덕림석(德林石)은 너비가 20여 리, 길이가 100여 리이다.

2023. 5. 4. 15:51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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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기략

강외기문〔江外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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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탑(寧古塔) 토문강(土門江) 북쪽 600리의 호이합하(虎爾哈河) 북쪽 기슭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연하고 서쪽으로 오라(烏喇)를 접하며, 남쪽으로 토문강을 끼고 북쪽으로 흑수(黑水)를 넘으니, 토지가 광활하며 산이 두르고 강이 이어진 곳이다. 풍속이 근검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하여 사냥을 업으로 삼으니 도회지가 없다.

영고탑은 옛 숙신국(肅愼國) 땅이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때는 읍루국(挹婁國)의 땅이었고, 후위(後魏)는 물길(勿吉), 수(隋)나라는 말갈(靺鞨)이라고 불렀으며, 당(唐)나라 때는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었다. 대씨(大氏)가 이곳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설치하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으며, 그 동북쪽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속하였다. 요(遼)나라 때는 여진(女眞) 여러 부(部)의 땅이었는데, 그들이 후에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하고 그 옛 땅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와 합라(合懶), 휼품(恤品), 호리개(胡里改) 등의 로(路)를 설치하였다. 원(元)나라는 다섯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도온(桃溫), 호리개(呼里改), 알타린(斡朶憐 오도리), 탈알린(脫斡憐), 패고강(孛苦江)이라 하였으며, 모두 합란부수달달등로(合蘭府水達達等路)에 예속시켰다. 명(明)나라 초에 건주(建州), 모린(毛憐) 등의 위(衛)에 속하였고, 후에 청(淸)나라 땅에 속하여 영고탑이라 하였다. 순치(順治) 10년(1653)에 앙방장경(邦章京)을 설치하였고, 강희(康煕) 1년(1662)에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을 두었다가, 15년(1676)에 장군은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으로 옮기게 하고 부도통(副都統) 등의 관리를 남겨 두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영고탑은 성경(盛京 심양) 동북쪽 1350여 리, 길림오라의 동북쪽 540여 리에 있고, 그 관할 지역이 동서로 3250여 리, 남북으로 1200리이다. 서남쪽 330리의 늑복진하(勒福陳河) 서쪽 기슭에 아다리성(俄多里城)이 있는데, 청나라의 먼 선조가 삼성(三姓)의 난을 평정하고 비로소 이곳에 자리 잡아 국호를 만주(滿洲)라고 하였다.

혼춘(渾春)은 영고탑 동남쪽의 혼춘하(渾春河) 좌우에 있다. 그 남쪽은 조선과 접경하고 있는데 모두 고아랍(庫雅拉) 등이 사는 곳이다. 강희 53년(1714)에 좌령(佐領) 편제하고 협령(協領) 방어(防禦) 두어 관할하도록 하였다. 동쪽으로 바다까지 280리이고, 서쪽으로 토문강까지 20리이며, 남쪽으로 바다까지 110리이고, 북쪽으로 불사항산(佛思恒山)까지 120리이다.

길림오라는 영고탑 서남쪽 540여 리에 있다. 장군, 부도통, 협령, 좌령 등의 관리를 두었다. 영고탑 장군도 이곳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혼춘부락(渾春部落)은 경원(慶源)의 강 북쪽 10여 리에 있다. 민간에서는 후춘(後春)이라고 부른다. 바라보면 집은 분간이 안 되는데 밥 짓는 연기가 보인다. 모두 집에 연통(煙筒)을 만드니 육진(六鎭)의 풍속과 같다. 관부(官府)는 선성(鄯城)이라고 하는 곳이다. 후춘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경원과는 70리 거리에 있다. 협령, 좌령, 방어 등의 관리가 있다.

선성, 후춘 등의 지역은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며 소, 말, 개, 돼지, 나귀, 노새, 염소, 양을 많이 키우니,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과 비슷하다. 수십 년 전에는 교역하고자 왕래하는 것이 수레 1000량과 말 4, 5백 마리에 불과했는데, 근년에는 수레가 4, 5천 량에 이르고 말도 마찬가지이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후춘의 인호(人戶)가 대략 5, 6천은 되는 듯하다.

후춘부락에서 흥개호(興開湖)까지는 길이 흑룡강(黑龍江)의 서쪽 강변으로 나 있고 그 사이에 큰 읍들이 많으나 정참(程站)과 도리(道里)는 모두 분명하지 않다.

선성은 서쪽으로 두만강까지 거리가 5, 동쪽으로 후춘강까지 거리가 7, 북쪽으로 후춘부락까지 거리가 12리이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안에 우물 여섯 개가 있다. 해관성(奚關城)이라고도 한다. 북쪽으로 거양성(巨陽城)까지 거리는 90리이다. 위에 석성(石城) 있으니 이를 어라손참(於羅孫站)이라고 한다.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 있고,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 있다. 서쪽으로 60 거리에 선춘령(先春嶺) 있다.

흥경(興京)은 성경 동남쪽 270리에 있다. 길림오라와는 서쪽 35리에서 접경하였다. 그 땅은 동서로 225리, 남북으로 290리이다. 명나라 초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였다. 청나라 초에 시조인 조조(肇祖)가 이곳에 처음 자리 잡으면서 흑도아라(黑圖阿喇)라고 하였고, 3대를 전해 흥조(興祖), 경조(景祖), 현조(顯祖) 이르기까지 모두 이곳에 살았다. 태조(太祖 누르하치)가 성경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는데, 세조(世祖) 순치(順治) 5년(1648) 흑도아라가 흥업(興業)의 땅이라는 이유로, 높여 흥경이라고 하고 성수장경(城守章京)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심양(瀋陽) 이북에 신오라(新烏喇)가 있다. 오모소리(吾毛所里), 삼성(三姓), 칠성(七姓), 유천(柳川), 후춘(後春) 등의 읍은 흑룡강 안쪽에 있다. 퍅개(愎介)에서 오라까지는 13일 거리이다.

후춘에서 오라까지는 1300리이고, 영고탑까지는 500리이며, 오모소리까지는 800리이다.

회령(會寧)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85리에 폐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번호(蕃胡)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분계강(分界江)까지는 5리쯤 된다고 한다.

회령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185리를 가면 벌가토리강(伐加土里江)에 이른다. 그 강변에서 서남쪽으로 400여 리를 가면 오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300리를 가면 영고탑에 이르며, 서쪽으로 160리를 가면 오모소리에 이르니, 모두 지름길이다.

북경(北京)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700리, 산해관에서 심양까지 700리, 심양에서 오라까지 700리, 오라에서 오모소리까지 500리, 오모소리에서 영고탑까지 300리, 영고탑에서 후춘까지 500리이니, 합하여 3400리이다. 말을 타고 가면 40일이 걸리고, 길을 재촉하면 20일이 걸린다고 한다.

선성에서 오라와 영고탑으로 가는 길은 온성(穩城) 건너편으로 나 있으니 종성(鍾城)과 경계한 깊숙한 북쪽 땅을 지나간다. 선성에서 오라까지는 7일 거리로 삼한수(三漢水)를 건너가며, 영고탑까지는 9일 거리로 오룡강(烏龍江)을 건너간다고 한다.

회령에서 영고탑까지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과저구(鍋底溝)까지 60리, 광비고령(光庇股嶺)까지 120리, 생격전자(生格甸子)까지 120리, 납서령(拉西嶺)까지 110리, 우집구자(寓集口子)까지 110리, 마련하잡로(馬連河卡路)까지 80리로, 합하여 600리이다.

영고탑에서 오라까지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사령참(沙嶺站)까지 80리, 필이한참(必爾漢站)까지 60리, 탑랍참(搭拉站)까지 60리, 아미소참(蛾眉所站)까지 80리, 이서참(伊西站)까지 40리, 추통참(推通站)까지 80리, 납법참(拉法站)까지 70리, 액아목참(厄阿木站)까지 80리, 오라까지 90리로, 합하여 640리이다.

회령에서 북경까지는 3400여 리이다.

영고탑에서 삼성까지는 7일 거리이다.

후춘에서 홍기포(紅旗浦)까지는 15일 거리이며, 물길로 가면 20일이 걸린다.

우솔리등등기(寓率里登登磯)는 영고탑의 뒤에 있다. 삼성에서 우솔리등등기까지는 육로로 15일, 물길로 20일 거리이니, 모두 아주 험하다고 한다.

황산(黃山)은, 무이보(撫夷堡)에서 동쪽으로 강 너머를 바라보면 겨우 10여 리 거리에 둥그런 봉우리가 들판 가운데 서 있는데, 그 색이 누렇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매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때에 산이 홀연히 공중으로 올라 누대, 인마, 기치의 형상을 만드는데 바람이 일면 사라진다. 민간에서 이를 두고 ‘산이 논다[山遊]’고 한다. 산 아래에 큰 못이 있는데 명주(明珠)가 난다. 팔지(八池) 중의 하나이다.

팔지는 무이보의 강 너머에 있다.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들판을 바라보면 8개의 못이 수십 리 길게 이어져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오색의 연꽃이 피고 명주가 나니, 북방에서 유명하다. 세 번째 못 가에 산이 있는데 흑각봉(黑角峯)이라고 하며, 그 봉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금당(金塘)이라고 한다. 목조(穆祖)의 옛터이니 곧 알동(斡東) - 번음(蕃音)은 오동(烏東)이다. - 땅이다. 경흥부에서 동북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다.

덕림석(德林石)은 영고탑성 서쪽 90리에 있다. 《통지(通志)에 “아막혜지(俄漠惠池)에서 동쪽으로 사란참(沙闌站) 남쪽을 돌아 호이합하에 다다르면 큰 바위가 있는데 너비가 20여 리, 길이가 100여 리이다. 크고 작은 구멍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둥글거나 각진 것, 육각, 팔각인 것도 있고, 마치 우물, 사발, 연못 같은 것도 있으며, 입구는 사발 같은데 그 속은 깊은 동굴 같아서 깊이가 1길(丈)이나 수 자(尺)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중에는 맑은 샘물이 솟아 짙푸른 것도 있는데 물고기가 헤엄치고 자작나무, 느릅나무 등이 자라기도 한다. 여름에도 모기나 등에가 없고, 사슴이나 고라니가 모여 산다. 덕림석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의 뜻을 풀이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백두산 아래에 돌로는 덕림이 있고, 보물로는 동주(東珠) 있으며, 사람으로는 우리 태조(太祖) 있으니, 모두 지령(地靈) 모여 이루어진 바이다.”라고 하였다.

[-D001] 강외기문(江外記聞) : 

두만강 건너편 만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글이다. 영고탑, 길림오라, 혼춘, 선성, 흥경 등의 성읍, 각 지점 간의 거리와 일정, 자연 경관 등에 대한 주요 정보를 서술하였다. 기문(記聞)이라는 편명에서 보듯 홍양호가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나, 《성경통지(盛京通志)》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의 청나라 지리서에서 발췌하여 서술한 정보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현지에서 수집하여 《삭방풍토기》에 수록한 지리 정보는 조선에서 생성된 것이고, 《대청일통지》 등의 청나라 지리서에서 발췌한 지리 정보는 청나라 측에서 생성된 것이므로, 이에 유의하여 독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의 만주 인식과 북방 영토 인식, 역사 인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D002] 영고탑(寧古塔) …… 있다 : 

영고탑이 토문강 북쪽 600리에 있다는 인식은 〈북관고적기〉의 말미에 보이는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는 인식과 상충되는 점이 있다. 《배우성, 洪良浩의 地理認識, 진단학보 100, 진단학회, 2005, 345~348쪽》 영고탑이 두만강 북쪽 600리에 있다는 지리 정보는 《성경통지》와 《대청일통지》 등의 청나라 지리서를 통해 수용한 것이며,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는 지리 정보는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조선에서 전승되던 것이었다. 그런데 《삭방풍토기》에는 영고탑이 토문강 북쪽 600리에 있다는 내용도,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는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리 인식의 상충은 홍양호 사후 여러 문헌을 발췌하고 보완해 《북새기략》이 편찬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D003] 앙방장경(邦章京) : 

청나라의 지방 군사, 행정 조직인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정1품 최고위 관직으로, 이후 장군(將軍)으로 고쳐 불렀다. 만주 지역에는 성경 장군(盛京將軍), 길림 장군(吉林將軍), 흑룡강 장군(黑龍江將軍)을 두었다.

[-D004] 부도통(副都統) : 

청나라 주방팔기의 정2품 관직으로 장군 아래의 차상위 관직이었다.

[-D005] 영고탑은 …… 하였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建置沿革》

[-D006] 고아랍(庫雅拉) : 

만주 동남부 지역에 살던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일파로, 고아라(庫牙喇), 고이객(庫爾喀), 고이객제(庫爾喀齊), 흡객랍(恰喀拉) 등으로도 불렸다. 《佟冬 編, 中國東北史 4, 吉林文史出版社, 1998, 1427~1429쪽》

[-D007] 좌령(佐領) …… 하였다 : 

협령(協領), 좌령, 방어(防禦)는 각각 청나라의 지방 군사, 행정 조직인 주방팔기의 정3품, 정4품, 정5품 관직이다. 좌령은 팔기군의 기본 편성 단위를 지칭하기도 하며, 우록(牛彔, niru)이라고도 하는데, 그 장(長)이 곧 좌령이었다.

[-D008] 혼춘(渾春) …… 120리이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6 吉林2 城堡》

[-D009] 선성은 ……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현성(縣城)과 거양성(巨陽城) 기사를 바탕으로 형성된 지리 정보이다. 선성을 《여지승람》의 현성으로 보고 거양성과 선춘령의 위치를 설명한 것이나, 정보가 축약되면서 일부 내용에 오류가 생긴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현성에서 북쪽 90리 되는 곳의 산 위에 어라손참(於羅孫站)이 있고, 그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그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 그 동북쪽 70리에 거양성이 있으며, 그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쯤에 선춘령이 있다고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0 咸鏡道 慶源都護府 古跡》 《輿地圖書 咸鏡北道慶源邑誌 古蹟》

[-D010] 조조(肇祖) : 

청 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인 여진족 대추장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 즉 몽거테무르를 말한다. 조선 초기에 조선의 북방 변경에서 활동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D011] 3대를 …… 살았다 : 

흥조(興祖), 경조(景祖), 현조(顯祖)는 각각 청 태조 누르하치의 증조부, 조부, 부친이다. 6대조인 조조부터 부친 현조까지 대대로 흑도아라(黑圖阿喇)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D012] 신오라(新烏喇) : 

타생오라성(打牲烏喇城)을 말하는 듯하나 분명하지 않다.

[-D013] 매년 …… 때에 : 

《이계집(耳溪集)》 〈황산유가(黃山遊歌)〉에는 ‘매년 겨울과 봄 사이의 청명한 때에’라고 되어 있다. 《耳溪集 卷5 朔方風謠 黃山遊歌, 韓國文集叢刊 241輯》 《耳溪洪良浩全書 上 102쪽》

[-D014] 통지(通志) :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말한다. 만주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종합 지리서이다. 1684년(강희23) 처음 편찬되었고, 1734년(옹정12), 1736년(건륭1), 1778년, 1852년(함풍2)에 수정본이 편찬되었다. 군사적 이유로 유출이 금지되던 《성경통지》를 조선은 17세기 말에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당시 청나라 측의 만주 지역 지리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배우성, 18세기 청의 지리지ㆍ지도와 백두산의 수계, 역사와 경계 65, 부산경남사학회, 2007, 31쪽》

[-D015] 덕림석(德林石) …… 하였다 : 

《성경통지》를 인용했다고 하였으나, 《성경통지》를 인용한 《대청일통지》를 참조해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盛京通志 卷27 山川3》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D016] ()나라 …… 하였다 : 

홍양호의 《이계집》 주석에 “백두산 밖에 덕림석이 있는데 크기가 100리에 이른다. …… 동주(東珠)는 동북쪽 해변의 큰 못에서 나는 명주(明珠)로 천하제일이다. 그러므로 금나라 사람이 ‘백두산 아래에 돌로는 덕림이 있고, 보물로는 동주가 있으며, 사람으로는 우리 태조가 있으니, 모두 지령이 모여 이루어진 바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서술이 보인다. ‘우리 태조’는 금나라의 태조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를 말한다. 《耳溪集 卷5 朔方風謠 胡山靑, 韓國文集叢刊 241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