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삼춘(三春)에도 꽃이 피지 않고, 8월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2023. 5. 4. 15:3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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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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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령(磨天嶺)이 단천(端川)과 길주(吉州) 사이에 버티고 있어 남북으로 도(道)를 나누니, 남쪽은 남관(南關), 북쪽은 북관(北關)이라고 한다.

북관에는 10개의 () 있으니,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鍾城), 무산(茂山),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등이다.

경성 이북은 육진(六鎭)이라고 한다. 6개의 () 두만강(豆滿江) 변에 분열(分列) 있으니, 회령, 종성, 무산, 온성, 경원, 경흥 등이다.

경흥은 옛 공주(孔州) 지역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땅을 파다가 동인(銅印)을 얻었는데, ‘광주방어사인(匡州防禦使印)’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광주(匡州)라고 불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공주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다가 세종(世宗) 10년(1428)에 횟가(會叱家) 지역으로 읍치(邑治)를 옮겼는데, 옛 공주 지역이 거리가 멀어져 다스리기 어려워지자 공주 옛 성을 수리하여 따로 만호(萬戶)를 두고 공주등처 첨절제사(孔州等處僉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17년(1435)에 근방의 민호(民戶) 300호를 옮겨 소속시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하고 첨절제사가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19년(1437)에 목조(穆祖)가 기업(基業)을 연 곳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하고 경흥으로 개칭(改稱)하였다. 25년(1443)에 성을 고쳐 넓히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경흥 경내에 네 진(鎭)을 설치하였다. 북쪽 26리에 무이보(撫夷堡), 남쪽 35리에 조산보(造山堡), 서쪽 37리에 아오지보(阿吾地堡), 남쪽 60리에 서수라보(西水羅堡)가 있으니, 모두 만호를 두었다.

경흥은 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았는데, 두만강에 임하고, 남쪽으로 바다와 연하였으니, 우리나라 동북쪽의 끝이다. 부성(府城) 가운데에 있고 진이 둘러 있는 것이 마치 바둑돌이 놓이고 별들이 펼쳐진 모양새 같다.

공주는 북쪽 끝에 있는 불모지이다. 삼춘(三春)에도 꽃이 피지 않고, 8월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솜옷[纊絮]을 입지 않고 기장과 조를 주로 먹는다. 땅은 아득히 넓고 사는 사람은 적은데 땅이 척박하여 축적되는 것이 없으니, 대개 중국의 상군(上郡), 북지(北地) 풍속과 유사하다. 오랫동안 여진(女眞) 야인(野人)이 살던 곳이므로 북쪽 변방의 풍속이 많이 남아 있다. 토산물로는 화피(樺皮), 삼베, 담비 가죽 등이 있다.

면(面)을 ‘사(社)’라고 하고, 민(民)을 ‘향도(鄕徒)’라고 하며, 향족(鄕族)을 ‘품관(品官)’이라고 하고, 남쪽으로부터 이주한 것을 ‘입거(入居)’라고 하며, 무격(巫覡)을 ‘사(師)’라고 하고, 마을의 공사(公事)를 ‘풍속(風俗)’이라고 하며, 사노(私奴)를 ‘토노(土奴)’라고 한다.

친기위(親騎衛)는, 품관과 공천(公賤),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합격한 자를 뽑으며, 군복, 안마(鞍馬)는 스스로 준비한다. 매월 두 번 거주지의 읍에 장령(將領)을 차정하여 활쏘기를 시험하고 병영(兵營)에 그 상벌을 보고하며, 매년 겨울에 도시(都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는 출신(出身)한다.

읍군관(邑軍官)은 위군관(衛軍官)이라고 부르며, 품관의 자제가 맡도록 한다. 액(額 배정 인원수)의 많고 적음은 읍의 크기에 비례하며, 두 명씩 입직한다. 마병(馬兵)은 별무사(別武士)라고 부르는데, 또한 번(番)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입직한다. 구차(久次)나 취재(取才)로 기패관(旗牌官)에 오르며, 기패관에서는 지구관(知彀官), 기고관(旗鼓官)에 오른다. 수첩군(守堞軍)은, 유자(儒者)와 무인(武人), 상인(常人)과 천인(賤人)을 막론하고 13세 이상인 자를 모두 장적(帳籍)에 올리는데, 이를 성정군(城丁軍)이라고 부른다매년 병사(兵使) 순조(巡操)에 소집하여 각자 횃불을 들고 성첩에 늘어서서 야간 습조(習操)를 행한다. 성의 네 문에 각각 장령을 두는데, 이들을 치총(雉摠)이라고 한다.

정병(正兵) 5인이 번을 나누어 관문(官門)에서 대기하는 것으로 관역(官役)을 수행하니, 이들을 도훈도(都訓導), 도할(都轄), 여수(旅帥), 대정(隊正), 군사(軍士) 등으로 부른다. 내노(內奴) 5인이 번을 서서 관령(官令)을 전하니, 이들을 배패(陪牌)라고 부른다.

남정(男丁)은 별도로 장적을 두어 역(役)이 없는 사람이 없다. 매월 세 번 본사(本社)에 모여 점고(點考)하니, 생사(生死)를 관에 고하고, 이주하여 오거나 간 자를 관에 고한다. 경계를 넘어 왕래할 자는 관에 고하여 첩(牒)을 받는다.

육진 지역은 모두 북으로 두만강과 접해 있으니 파수관(把守官)을 줄지어 둔다. 모두 위장(衛將)이라는 칭호를 겸하며, 군복을 입고 동개를 찬 채 상관(上官)을 뵙는다. 매년 10월에 강이 얼면 한 달에 한 번 병사를 훈련시키며, 3월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그만둔다.

파수(把守) 강변 요해처에 두되 10리마다 서로 바라보도록 한다. 초가 한 칸을 지어 비바람을 피한다. 장(將) 1인에 군(軍) 2인으로, 정병(正兵)이 맡도록 하며, 5일마다 교대한다. 3월에 강의 얼음이 녹으면 그 반을 철수시켜 해안 방어 지역으로 옮기도록 하니, 이를 해망(海望)이라고 한다.

북로(北路)에 보발(步撥)을 두어 30리마다 교대한다. 각 번마다 발장(撥將) 1인을 두어 품관이 맡도록 하고, 발군(撥軍) 5명을 두어 호역(戶役)으로 돌아가면서 차정하며, 5일마다 교대한다.

강변의 봉수대에는 감관(監官) 1인과 무사(武士) 3인을 두되 신향(新鄕 타향에서 이주한 향족) 맡도록 한다. 1명을 당직으로 정하여 5일마다 교대한다. 오시(午時) 섶을 태워 연기로 서로 확인해 보며, 비나 눈이 오거나 구름이 짙게 때에는 다음 봉수대로 말달려 가서 고한다.

마병은 보인(保人)이 없어 스스로 전마(戰馬)를 준비해야 하나 다만 발번(撥番)에서는 제외한다. 갑옷과 투구까지 갖춘 자는 호역을 모두 면제한다.

풍속이 타고 쏘는 일을 중시하여 () 업으로 삼는 사람이 적으니, 남자가 10 남짓이 되면 활을 잡고 말을 달린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물동이에 넣어 피를 씻어 내는데, 이를 ‘태열(胎熱)을 없앤다.’라고 한다.

머릿결이 아름다운 사람이 많으니, 기장 뜨물[稷泔]로 머리를 감아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안에서 북체()를 쓴다.

사람이 죽은 지 4일 만에 성복(成服)하고 바로 장사 지내며, 묏자리를 고르거나 날을 택하지 않는다. 100일이 지나면 탈복(脫服)하며, 관례(冠禮)나 혼례(婚禮)를 치르기도 한다. 유생이나 품관만이 상장례(喪葬禮)를 대략 행하여 삼년상을 치른다.

산승(山僧), 집에 있으면서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 자가 많으니, 자손이 대를 이어 승이 된다.

돈의 사용을 금하여 베나 면을 화폐로 쓴다. 길에 점포가 없어, 여행할 때 식량을 가지고 다니면서 취사하므로 노잣돈을 쓰지 않는다. 남방에서 북방으로 가거나 북방에서 남방으로 가는 자는 모두 관으로부터 공문(公文)을 받아 비상시에 대비한다.

날씨가 매우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이 귀하며, 땅은 넓으나 사람이 적다. 마을에 100곡(斛)의 부(富)를 쌓은 자가 없으니, 오로지 관의 환곡(還穀)에 의지하여 식구 수만큼 식량을 받아 간다. 조밥을 먹는 것도 드물어 기장과 귀리로 죽을 끓여 먹지만, 사람들의 힘이 세고 발걸음이 힘차다.

바람이 많이 불어 전립(氈笠) 쓰는 것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으니, 품관 자제들은 모두 착용한다. 병수(兵帥 병마절도사)와 읍재(邑宰 수령)는 죽직립(竹織笠)을 쓰는데, 전립과 그 모양이 같다. 길을 나설 때 쓰고서 바람을 막는다.

읍에는 상점이 없고 들에도 장이 서지 않아서, 사람들이 각자 서로 가진 것을 교역한다. 그래서 물건에 정해진 가격이 없다.

가옥은 모두 한 지붕에 여러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겹으로 벽을 만들어 방과 마루, 마구간과 곳간을 모두 갖추는 방식으로 지으니, 꺾이게 짓거나 곁채를 연이어 짓지 않는다. 기와집은 풍첨(風簷)을 설치하고, 기와가 없는 집은 띠를 여러 겹으로 엮고 진흙을 발라,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는다. 산간에서는 큰 돌을 기와 대신 쓰기도 한다. 큰 나무의 속을 파내 연통을 만들어 세우되 용마루보다 높여 화재를 방지한다. 담장은 만들지 않고 울타리를 두르는데, 싸리나 버들을 엮어 만들며 문은 만들지 않는다.

문(門)을 ‘오라(烏喇)’라고 하고, 산봉우리를 ‘장(嶂)’이라고 하며, 높은 언덕을 ‘덕(德)’이라고 하고, 가장자리를 ()’이라고 하며, 장벽(墻壁)을 ‘축(築)’이라고 하고, 얕은 개울을 ‘슬(膝)’이라고 하며, 고양이를 ‘호양(虎樣)’이라고 하고, 셋소[貰牛]를 윤도리(輪道里)’라고 하며, 새그물을 ‘탄(彈)’이라고 하고, 협호(挾戶)생계(生契)’라고 하며, 남쪽을 ‘앞[前]’이라고 하고, 북쪽을 ‘뒤[後]’라고 한다.

소와 말은 곡식을 먹이지 않고 들판에 방목하며, 공사(公私)로 도살을 하지 않으므로 가축이 번식한다. 전답과 주택을 소나 말로 거래한다.

짐을 싣는 데 수레를 쓰므로, 소에 가슴걸이와 안장 언치를 씌우지 않는다. 수레는, 바퀴가 작고 바큇살이 성기며 바퀴통 축이 밖으로 길게 나와 있다. 쓰지 못하는 망가진 수레의 바퀴통은 불을 붙여 횃불 대신 쓴다.

작은 수레를 발고(跋高)’라고 부른다. 바퀴는 없고, 나무 2개를 활처럼 휘어서 만든다. 뒤에 가로로 끌채[輗]가 있으니 거기에 물건을 싣는다. 수레보다 가볍고 빠르니, 눈길에서 더욱 그러해서 마치 돛단배가 물 위를 가는 것 같다.

쟁기[] [] 있고 [] 없다. 호미의 크기가 삽만큼 크고 자루가 길어서 작은 풀은 매지 못한다.

땅에 삼[麻]이 잘 자라서 세포(細布)를 짠다. 목화와 모시가 없고 누에와 뽕나무를 기르지 않는다. 저고리와 바지에 개가죽을 쓴다. 버선은 소가죽을 쓰는데 그 길이가 정강이를 덮으니, 이를 다로기(多路岐)’라고 부른다. 가죽신과 짚신은 신지 않는다.

나무로는 개오동나무, 상수리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등이 난다. 버드나무는 붉은 것이 많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나지 않는다. 가옥의 재목으로는 상수리나무를 쓰고, 창문에는 개오동나무를 쓴다.

해당화 열매를 열구(悅口)’, 가시연밥[芡仁]을 ‘마방(馬房)’, 상수리를 ‘율(栗 밤)’이라고 부른다.

과일로는 매실, 배, 개암이 나며, 꽃으로는 진달래가 핀다. 강변에 해당화가 많은데, 꽃잎 크기는 작약만 하고 열매 크기는 은행만 하며 향기가 짙게 풍긴다. 들의 못에는 연(蓮)과 마름[菱]이 자라기도 한다. 약재로는 오미자가 난다. 문묘와 사직에 제향할 때 과일로 해당화 열매를 쓰니 대추와 밤 대용이며, 백당(白糖)과 팥을 쓰기도 한다. 옻과 청대는 나지 않으나, 지치[紫芝] 나기도 해서 홍람색(紅藍色)을 물들일 수 있다.

곡식은 기장, 조, 보리, 밀, 귀리 등이 잘 자란다. 일찍 서리가 내려 가을보리는 파종하지 못한다. 논이 없으니 벼농사가 적다. 누룩은 메기장으로 만들고, 술은 차조로 빚는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술을 사고팔지 않고, 관에서는 화주(火酒 소주)를 쓴다.

닥종이가 생산되지 않아 귀리 짚을 찧어 종이를 만드는데, 이를 ‘황마지(黃麻紙)’라고 부른다. 공사(公私)의 문서에 모두 이 종이를 쓴다.

밀초가 생산되지 않아 삼대나 쑥대에 기장 겨를 발라 불을 밝히는데, 이를 ‘등(燈)’이라고 부른다.

들기름이 생산되지 않아 삼씨기름[麻子汁] 국과 구이의 맛을 내는 쓴다.

경흥의 적지(赤池)에 붕어가 많은데, 길이가 두 자가 넘는 것도 있다. 읍 사람들이 모두 그물을 쳐서 잡는데도 줄지 않는다. 조산포(造山浦)에서는 숭어와 황어가 난다.

두만강에서 송어(松魚)가 난다. 4월에 바람이 따뜻해지면 나온다. 입이 크고 비늘이 아주 잘며 아가미가 네 개이니, 송강(松江) 노어(鱸魚)와 비슷하다. 송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여름에는 숭어와 비슷하나 크기가 작은 물고기가 나는데 속칭 ‘야래(夜來)’라고 한다. 가을에는 연어가 나는데 그 길이가 수 자에 이른다. 연달아 무리 지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니 한 번 그물을 쳐 수십 마리를 잡기도 한다.

두만강에서 배를 운항하는 것을 금하나 바다 어귀에는 어선이 있다. 배는 모두 통나무 널빤지[全木]를 이어 붙여 밑판을 만들고 나무를 구유처럼 파내어 좌우측 판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는 마상()’이라는 다. 이 배를 타고 남관을 오가니, 견고하고 치밀하여 가라앉는 일이 드물다.

청어와 대구는 그물로 잡고, 명태는 낚시로 잡고, 문어는 작살로 잡고, 홍합과 해삼은 갈고리로 취한다.

다시마와 미역은 바다 가운데의 암초에서 나니, 명천 지방과 경흥의 서수라곶에서만 난다. 매년 3, 4월에 채취하는데,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수면에 생선 기름을 뿌려 물밑이 보이게 한 후 장대로 거두어들인다. 병영(兵營)이 먼저 채취하고, 다음으로 지방관(地方官)이, 그다음으로 진장(鎭將)이 채취한다.

용수(龍鬚)는 명천과 경성의 바닷가에서 난다. 한 줄기로 곧게 자라서 길이가 수 자에 이르며 힘줄처럼 가늘고 뼈처럼 단단하다. 북방 사람들이 붓대로 쓰니, 이 붓을 ‘용편필(龍鞭筆)’이라고 한다. 이백(李白) 시에용수석을 말지 말라.[莫捲龍鬚席]”라고 하였고, 《요사(遼史)》에고려에서 용수초석(龍鬚草席) 공물로 바쳤다.”라고 하였으니, 용수석은 이 용수를 엮어서 만든 자리이다.

녹용은 매년 5월에 사냥하여 채취하고 7월에 진헌(進獻)한다. 무산에서 많이 생산되며 질이 좋다.

철염(鐵鹽)은 북관 여러 읍에서 모두 쇠가마에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어 낸다. 쇠가마에 바닷물 수 섬을 받되 나무 구유에 물을 담아 가마에 붓고, 하루 밤낮으로 불을 지펴서 소금 10여 말을 얻는다. 색이 검고 맛이 탁해, 색이 희고 맛이 맑은 토염(土鹽)만 못하나, 날씨가 습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쇠가마는 무게가 1500근이니 발고 2대에 실어 소 10마리로 끌어 운반한다고 한다.

사철(沙鐵)은 회령과 종성에서 나며, 자기(磁器)는 명천과 회령에서 생산된다. 북방에는 강철(强鐵)이 나지 않아 사철로 솥과 농기구를 만들며, 깨진 그릇은 고쳐 쓴다. 도끼와 낫 따위를 잘 단련해서 그 예리함이 강철에 비해 손색이 없으니, 남방과는 다르다.

서수라 바다 가운데 한 섬에 온통 물새들이 서식한다. 풀 사이에 알을 낳는데, 그 크기가 주먹만 하고, 색깔은 희거나 푸르거나 누렇거나 아롱진 것들로 다양하다. 어민들이 주워서 갈라 먹는데 그 껍질이 잔으로 쓸 수 있을 만하다. 그래서 ‘난도(卵島 알섬)’라고 부른다.

매년 5, 6월에 강물이 불어나면 청인(淸人)이 각기 마상주(亇尙舟) 한 척을 타고 두만강을 따라 내려온다. 역관을 통해 사정을 물어보면 “슬해(瑟海)에 가서 소금을 굽고 미역을 채취한다.”라고 말한다.

[-D001]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 : 

경흥을 중심으로 육진, 북관 지역의 풍속, 군제, 방언, 생태, 산업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현지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이다. 경흥은 저자 홍양호가 정쟁으로 인해 좌천되면서 1777년(정조1)에 부임한 곳으로, 이곳에서 겪었거나 들은 정보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삭방풍토기》에 그 내용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북관 지역의 풍토에 대한 기존의 저술들은 대부분 여행 일기의 형식인 데 반해, 〈공주풍토기〉는 북관 지역의 특징적인 정보만을 간결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다양한 정보 가운데 당시의 함경도 방언이 수록되어 있어 일찍이 국어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당시의 풍속과 제도가 20세기까지 지속되거나 영향을 미친 것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조선 후기 북방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반영된 글로, 18세기 후반의 경흥과 육진, 함경북도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D002] 북관에는 …… 등이다 : 

남관에는 안변(安邊), 덕원(德源),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정평(定平), 함흥(咸興),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성(利城) 즉 이원(利原), 단천(端川) 등의 군읍이 있다. 서북쪽에 있는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함경도에 속하나 남관이나 북관에는 속하지 않았다. 《承政院日記 英祖 28年 4月 10日》

[-D003] 경성 …… 등이다 : 

1684년(숙종10) 두만강 상류에 무산부(茂山府)가 신설되기 이전까지 육진에는 부령(富寧)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산이 육진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1735년(영조11)부터는 육진, 무산, 삼갑(三甲)이라고 칭하던 것을 육진, 부령, 삼갑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삼갑은 삼수와 갑산을 의미한다. 《備邊司謄錄 英祖 11年 8月 23日》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131~137쪽》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계, 한국문화 3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300쪽》

[-D004] 근방 : 

경원의 300호를 떼어 경흥에 옮겨 소속시켰다. 《世宗實錄 17年 7月 19日》

[-D005] 목조(穆祖) :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이다. 조선 개국 후 추존(追尊)되었다.

[-D006] 경흥은 …… 승격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경원과 경흥의 건치연혁(建置沿革)을 바탕으로 서술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0 咸鏡道 慶源都護府, 慶興都護府》

[-D007] 두만강에 …… 같다 : 

《경흥읍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輿地圖書 咸鏡北道慶興邑誌 形勝》

[-D008] 땅은 …… 유사하다 : 

상군(上郡)과 북지(北地)는 진한(秦漢) 시대의 서북방 변경 지역 이름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상군, 북지, 안정 세 군은 땅이 넓은데 사람은 적으니 곡식이 넉넉해 많이 축적된다.[上郡北地安定三郡, 土廣人稀, 饒穀多畜.]”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공주와 상군, 북지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공주는 땅이 척박해 축적되는 것이 없다고 한 반면 상군, 북지는 곡식이 넉넉해 많이 축적된다고 하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 〈고구려지리지(高句麗地理志)〉의 옥저(沃沮) 관련 서술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後漢書 卷46 鄧寇列傳 鄧禹》 《修山集 卷12 東史志 高句麗地理志, 韓國文集叢刊 247輯》

[-D009] 화피(樺皮) : 

벚나무 껍질을 지칭하기도 하고 자작나무 껍질을 지칭하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경흥 일대에 분포하던 주요 수종인 것으로 보아 자작나무 껍질인 듯하다. 약재로 쓰이거나 활을 만드는 데 쓰였다. 《慶興郡誌, 慶興郡誌編纂委員會, 1988, 13쪽》

[-D010] 친기위(親騎衛) : 

조선 후기에 함경도에만 편제된 특수 병종의 기병 부대로, 1684년(숙종10)에 설치되었다. 친기위의 설치 경위, 편제 변천, 위상 변화 등에 대해서는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179~212쪽 참조.

[-D011] 구차(久次) :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또는 그러한 자를 승진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D012] 매년 병사(兵使) 순조(巡操) :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즉 북병사(北兵使)는 평소에는 경성의 북병영(北兵營)에 주재하다가, 매년 10월부터 2월까지 5개월간은 종성에 있는 행영(行營)으로 옮겨 육진을 지휘해 변경을 방비하였고, 이때 각종 군사 훈련과 시재(試才), 도시(都試) 등도 시행하였다. 북병사의 순조는 주로 봄에 이루어졌는데, 육진의 각 군읍에 가서 낮에는 속오군(束伍軍)을 조련하고 밤에는 성곽 방어 훈련을 점검하였다고 한다.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계, 한국문화 3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D013] 파수(把守) …… 한다 : 

조선 후기 두만강 변의 파수처에 대해서는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계〉, 《한국문화》 3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314~319쪽 참조.

[-D014] 강변의 …… 고한다 : 

조선 후기 육진 지역의 봉수 체제에 대해서는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계〉, 《한국문화》 3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319~326쪽 참조.

[-D015] 풍속이 …… 달린다 : 

육진을 포함한 함경도 지역은 이처럼 일반적으로 상무지향(尙武之鄕), 궁마지향(弓馬之鄕)으로 인식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문풍이 점차 진작되면서 문사층의 위상도 높아져 갔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문사층의 위상이 크게 강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213~238쪽》 《장유승, 朝鮮後期 西北地域 文人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10》

[-D016] 북체() : 

북방인 함경도에서 생산된 다리 또는 얹은머리를 말한다. 체는 체계(髢髻), 가계(假髻)라고도 쓴다. 육진 지역에서 나는 것이 특히 품질이 좋아 육진체(六鎭髢)라고도 불리며,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와의 교역이 금지된 품목이기도 했다. 《洛下生集 冊20 東事日知 髢䯻, 韓國文集叢刊 290輯》 《五龍齋遺稿 漫錄 42條, 韓國文集叢刊 續93輯》 《咸鏡道會源開市定例 別編 節目》

[-D017] 산승(山僧) …… 된다 : 

북관, 특히 육진 지역의 재가승(在家僧)은 불교의 승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계층이었다. 이들은 주로 두만강 접경 지역의 산간 지역에 고립된 집단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천민 집단으로 간주되었고 이질적인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존속하였고 여전히 천시되었다고 한다. 고립된 야인(野人), 번호(藩胡)의 후예로 추정되나 분명하지 않다. 《김열규, 咸鏡北道의 在家僧 IㆍII, 北韓 99ㆍ100, 北韓硏究所, 1980》 《會寧郡誌, 會寧郡誌編纂委員會, 1978》

[-D018] 돈의 …… 쓴다 :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 금제(禁制)〉에 의하면, 육진 지역은 화폐 사용과 상업 행위 등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지방이 개발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규제는 점차 와해되거나 철폐되어 갔다. 조선 후기 함경도의 상업에 대해서는 고승희, 《조선 후기 함경도 상업 연구》, 국학자료원, 2003 참조.

[-D019] () : 

국어사전에는 ‘언저리’의 평안도 방언이라고 되어 있다.

[-D020] 윤도리(輪道里) : 

소를 남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새끼를 그냥 가지는 일을 뜻하는 함경도 방언이다.

[-D021] 협호(挾戶) 생계(生契)라고 하며 : 

협호는 본채와 떨어져 있어서 딴살림을 하게 되어 있는 집채, 또는 남의 집 협호를 빌려서 살아가는 사람, 가장 빈궁하고 의지할 데 없는 농민 층 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생계’가 이 중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D022] 발고(跋高) : 

지금은 흔히 ‘발구’라고 부르는데, 20세기까지 널리 쓰였으며 종류도 다양하였다.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第12冊 咸鏡南北道篇, 文化財管理局, 1981, 163~164쪽》 《조선향토대백과 18 민속, 평화문제연구소, 2005, 422ㆍ431쪽》

[-D023] 쟁기에 …… 없다 : 

함경도 지방에서 쓰던 쟁기의 일종인 ‘가대기’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볏은 쟁기 날 위에 비스듬하게 덧댄 쇳조각으로 갈아 넘긴 흙을 받아 한쪽으로 떨어지게 하는데, 가대기는 볏이 없이 만들어 자갈밭이 많은 함경도 지방의 농경에 유리하였다고 한다. 《조선향토대백과 18 민속, 평화문제연구소, 2005, 432쪽》

[-D024] 호미의 …… 못한다 : 

실제로 함경도 지방에서는 20세기까지 날이 크고 자루가 긴 호미를 사용했다고 한다.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第12冊 咸鏡南北道篇, 文化財管理局, 1981, 162쪽》 《조선향토대백과 18 민속, 평화문제연구소, 2005, 445~446쪽》

[-D025] 세포(細布) : 

북관에서 생산된 고운 베로, 품질이 뛰어났다. ‘북포(北布)’로 불리기도 하였다. 청나라와의 교역과 사적인 거래가 금지된 품목으로 주로 진상되었으나 점차 그 유통이 활발해졌다. 《咸鏡道會源開市定例 別編 節目》 《고승희, 18~19세기 北關開市의 운영과 성격, 한국사연구 109, 한국사연구회, 2000》

[-D026] 다로기(多路岐) : 

가죽의 털이 안으로 들어가게 길게 지어 추운 지방에서 신는 버선의 일종으로 신발로 신기도 하였다.

[-D027] 상수리나무 : 

참나무의 일종으로 그 열매를 상수리라고 한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을 통칭 참나무라고 하고 그 열매를 통칭하여 도토리라고 한다. 참나무의 종류는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공주풍토기〉에 나오는 상수리나무와 상수리도 참나무와 도토리에 대한 범칭으로 쓰였을 수 있다.

[-D028] 열구(悅口) : 

20세기에 편찬된 《경흥군지(慶興郡誌)》에 따르면 해당화 열매를 방언으로 ‘열구배’라고 하였다고 한다. 《慶興郡誌, 慶興郡誌編纂委員會, 1988, 239쪽》

[-D029] 지치[紫芝] …… 홍람색(紅藍色) : 

자지(紫芝), 자초(紫草)로도 불리는 지치는 자주색 염료로 쓰며, 홍람(紅藍)은 홍화(紅花)로도 불리는 잇꽃의 이칭으로 홍색 염료로 쓴다. 그러므로 홍람색은 자주색, 홍색 등의 붉은 빛깔에 대한 범칭으로 쓰인 듯하다.

[-D030] 들기름이 …… 쓴다 : 

20세기에 편찬된 《회령군지(會寧郡誌)》에는 들깨기름, 삼씨기름[麻子油], 호박씨기름을 조미료로 쓴다고 하였다. 《會寧郡誌, 會寧郡誌編纂委員會, 1978, 188쪽》

[-D031] 송강(松江) 노어(鱸魚) :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4, 5월에 비로소 나오며 ‘큰 입과 잔 비늘에 아가미가 네 개[巨口細鱗有四䚡]’라고 하였다. 《本草綱目 卷44 鱗3 鱸魚》

[-D032] 마상()이라는  : 

마상선(亇尙船), 마상주(亇尙舟), 마상이 등으로 불렸고, 한자도 ‘마상(馬尙)’, ‘마상(麻尙)’ 등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함경도, 평안도, 만주 일대의 하천과 연해에서 인마를 수송하거나 곡물을 운반하는 등에 쓰였으며, 그 크기와 종류가 다양하였다.

[-D033] 용수(龍鬚) : 

왕골이나 골풀의 이칭이거나 일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D034] 이백(李白) …… 하였고 : 

이백의 〈백두음(白頭吟)〉에서 보인다. 《李太白文集 卷3 樂府2》

[-D035] 요사(遼史) …… 하였으니 : 

《요사》 〈본기(本紀)〉와 〈이국외기(二國外紀)〉에 요 성종(遼聖宗) 26년(1008) 고려가 용수초석을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遼史 卷14 本紀14 聖宗5, 卷115 二國外紀45 高麗》

[-D036] 슬해(瑟海) : 

두만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가리킨다. 〈백두산고(白頭山考)〉의 말미에 슬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