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옛 강토가 지금 혹 우리나라의 판도 안으로 들어왔으니, 아 거룩하다!

2023. 5. 4. 21:08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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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석관유집 6 / 〔책문(策問)

책문 3수〔策問 三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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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다. 사신의 임무는 중하다. 《주관(周官)》에 있는 대로 육절(六節)에 숙달하고 오물(五物)을 다스린 일은 논하지 않더라도, 춘추 열국(春秋列國)의 시기에는 사명(使命)을 더욱 중하게 여겼으니, 옥백(玉帛)의 예를 갖추어 국경에서 사신을 대접하였고 사신을 태운 수레가 길에서 분주히 교차하였다. 그중 훌륭한 사신은 나라의 성패를 엿보고 사람의 길흉을 말할 수 있었으니, 그런 사람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그 높고 낮은 등급을 매길 수 있겠는가? 사신을 보낼 때는 〈황화(皇華)를 읊고 돌아온 사신을 위로할 때는 〈사모(四牡)를 노래하였는데, 어찌하여 〈황화〉가 힘든 행역(行役)을 위로하기에 부족하고 〈사모〉가 의탁한 사명을 펼친 것을 소중히 여기기에 부족한 것인가? 시(詩) 3백 편을 외운 사(士)에게는 반드시 전대(專對)할 수 있기를 요구하였고, 사자(使者)허물을 적게 하려 하지만 아직 능치 못하시다.〔寡過未能〕라고 대답하자훌륭한 사자로다.〔使乎〕라고 여러 칭찬하셨으니, 성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상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유헌()을 내어 사신을 보내는 것은 어느 달인가? 수의직지(繡衣直指)는 어느 시대의 관직인가? 팔사(八使)를 보내어 풍속을 살폈는데 그중에서 누가 가장 훌륭한가? 다섯 가지 방법으로 풍속을 살피는 것은 누가 이 생각을 내었는가? 연주래(延州來) 상국(上國) 국풍(國風) 구경하였고 심제량(沈諸梁) 속에 열이 나서 얼음물을 들이켰는데, 누가 더 나은가?  정공(富鄭公) 강성한 오랑캐를 굴복시킨 과 공도보(孔道輔) 배우들을 물리친  중에 그 공이 어느 쪽이 더 큰가? 육가(陸賈) () 지방으로 들어가니 야만족이 복종하였고 장건(張騫) 황하의 발원지에 도달하니 원마(宛馬) 변방에 들어왔는데, 과연 이 둘에 우열을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소랑(蘇郞) 북해(北海)에서 담요를 씹었고 홍호(洪皓) 냉산(冷山)에서 말똥으로 국수를 끓였는데, 또한 이 둘에 같고 다름을 구분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사신 가는 것을 혹 뗏목을 탄다.〔乘槎〕라고 하고, 혹 옥을 닦는다.〔拭玉〕라고 일컬은 것은 비유를 잘하였다고 할 수 있거니와,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은원외서(殷員外序)와 명윤(明允 소순(蘇洵))의 〈석창언인(石昌言引) 또한 사신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말로서의 격조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서 장위(徐章威 서희(徐熙))는 요(遼)에 사신으로 가서 참으로 말로 상대를 제압하였고 정포로(鄭圃老 정몽주(鄭夢周))는 왜(倭)에 들어갔을 때 그 언행이 오랑캐의 땅에서 행하여지기에 족하였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북으로는 대방(大邦 중국)을 가까이하고 남으로는 섬 오랑캐를 어루만져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위한 방도를 극진히 행하였다. 박달나무 바퀴 단 수레를 타고 임금이 내린 옥 부절을 받드는 데에 합당한 인물을 많이 얻었으며, 사명(詞命)이 훌륭하고 문장이 성대하여 크게는 중화(中華)에 영예를 드날리고 작게는 풍속이 다른 외국의 존중을 받았으니,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근일(近日)의 중원(中原)을 논한다면,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은혜를 베풀면 사례하고 일이 있으면 초청하여 계주(薊州)와 유주(幽州) 사이에 사신의 수레가 연달아 왕래하니, 인물을 신중히 가려 사신으로 임명하여 나라의 위광을 떨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한데도, 어찌하여 근자 이래로 품계에 맞추어 사신을 보낸다고 일컬을 만한 경우가 드문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서는 여러 가지로 조치하는 일에 오직 역관(譯官)의 입만 쳐다보며, 빈손으로 갔다가 실속을 채워서 돌아오고 간혹 전대 속의 물건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그 나라의 허실(虛實)을 엿보고 그 나라의 정세(情勢)를 살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한심스럽게 여긴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어찌하여야 사신에게는 그 직무에 합당한 영예가 있고 행인(行人)에게는 언사에 실수를 범하는 탄식이 없어서, 저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고민하여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고 우리 조정에 인재가 많음을 알게 하겠는가. 여러 군자 중에는 틀림없이 독서와 궁리를 하여 사령(辭令)에 익숙하고 사정(事情)에 밝으며, 분연히 정(鄭)나라 자산(子産)과 노(魯)나라 자공(子貢)의 풍도를 그리워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웅건하고 박식한 변론을 듣기를 원한다.

 

묻는다. 나라가 영남(嶺南) 일로(一路)에 대해서 회유(懷柔)하고 인육(仁育)하여 덕혜(德惠)가 두루 펼쳐졌으며, 큰일이라고 하여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일이라고 하여 빠뜨린 것이 없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것은 유정지공(惟正之供)이지만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긴 것이 있으면 면제해 주었고, 전지(田地)와 수확(收穫)에 대한 조세는 임토지부(任土之賦)이지만 아전들이 간사한 짓을 한 것은 과한 것을 없애 주고 심한 것을 없애 주었다. 멧돼지와 꿩을 사냥하던 것을 옮겨 경공(京貢)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성탕(成湯)의 덕이 금수(禽獸)에 미친 것이고, 사노(寺奴) 내노(內奴)는 비총(比摠)을 조사하여 바로잡았으니 이는 문왕의 정치가 혜선(惠鮮)을 드러낸 것이다.

함양(咸陽) 곡식이 온통 모래와 흙임이 밝혀지자 만억(萬億)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를 불태워 버렸고, 남창(南倉) 돈이 포흠에 시달리자 거만(鉅萬) 권계(券契 어음) 모두 없애 버리도록 하였다. 양전(量田)의 일을 정비하면서 경계(經界)를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으며, 호적(戶籍)을 조사하도록 신칙하면서 민수(民數)를 바치는 신하에게 먼저 책임을 물었다. 선대의 어진 신하와 명성이 높았던 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으며, 광채를 숨기면서 재주를 품고 있는 인재들을 찾아 발탁하고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당상관의 품계에 초수(超授)하였으며, 교목세가(喬木世家)의 사람을 진신(搢紳)의 반열에 발탁하였다. 번질(反作)과 구포(舊逋)에 대해서는 네 고을이 함께 탕감을 받았고 햅쌀을 제류(除留)토록 하여 여섯 고을이 모두 소생하게 되었다. 조창(漕倉) 폐단이 없어지니 () () 양쪽이 편리해졌고, 사우(沙郵) 병폐가 제거되니 왕언(王言) 계절이 돌아오는 것처럼 미덥게 되었다. 대벽(大辟 사형(死刑))의 죄를 범한 자를 심리하여 부생(傅生)으로 처리한 일이 많고 흠휼(欽恤)의 새로운 규정을 시행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드러났다.

교제곡(交濟穀)의 운송을 드물게 한 것은 바닷가 민호의 어깨가 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고 여러 차례 어사를 파견한 것은 가난한 백성들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려는 것이었다. 솜이 귀한 해에는 다른 물품으로 받고 곡식이 많은 고을은 변통하여 사용하게 하였으며, 구걸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서는 ‘보살피고 길러 주는 전칙〔字恤哺養之典〕’을 만들고 무너지고 떠내려간 집을 위해서는 ‘위로하고 정착시킬 방도〔慰諭奠接之方〕’를 생각하였다. 한 해에 두 번 수확하는 밭작물에 대해 특별히 면전(綿田 목화밭) 예를 본떠서 급재(給災)하고 심하게 물에 잠긴 땅은 무너진 집에 대한 규정을 준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연분(年分)의 표재(俵災)를 오로지 도신(道臣)에게 맡기고 환곡의 상환을 정지하거나 다른 곡식으로 바꾸는 일은 장계로 보고할 필요도 없이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런 일들은 단지 그 개략(槪略)을 대충 거론한 것으로 열 가지 중에 여덟아홉 가지는 빠뜨린 것이며,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이 염려하고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마음과 백성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는 법도를 벗어나도 어쩔 수 없다는 의리로, 백성들이 감히 바라지 못하였던 일과 유사(有司)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던 일을 그때마다 모두 마음에서 결단을 내리어 통상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비록 이 도의 사람이 스스로를 위하여 행하는 경우에도 이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무릇 본도의 땅은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본도의 고을에는 현송(絃誦) 소리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풍속이 백 년 동안 길러지고 산택의 풍요로움이 나라에서 으뜸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이 많고 부유해졌으면 가르쳐야 한다.〔旣庶旣富又敎之〕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속(禮俗)은 점점 무너지고 사림(士林)에는 겸양의 기풍이 드물며, 재력(財力)은 날로 줄어들고 민생(民生)에는 쪼들린다는 탄식이 있는가. 남들이 본도를 보는 것과 본도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는 것이 점점 옛날과 같지 않으니, 이것은 비단 식견 있는 사람들이 남몰래 한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본도 사람들의 큰 수치이다. 지금 서(庶)와 부(富)와 교(敎) 세 가지로 말하건대, 서에서는 지극하고 충분하여 이 위에 더할 것이 없으나, 부와 교에는 과연 조금도 미진한 데가 없이 많은 조목들을 남김없이 시행하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여러 군자가 틀림없이 암혈(巖穴)에서 책을 읽어 깊이 경륜을 간직하고, 지금 세상에서 그것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생각할 것이니, 아무쪼록 통상적인 격식을 벗어던지고 속에 간직한 것을 모두 펼쳐서 교남(嶠南)에 인물이 많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묻는다. 관방(關防)은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니, 험준함에 의지하여 요충지를 지키고 난폭한 적을 막아 방비를 튼튼히 하는 수단이다. 역대(歷代) 왕조에서 관방을 다스려 온 자취가 모두 사첩(史牒)에 나와 있어 귀감으로 삼을 수 있으니, 혹 지형의 편리함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우기도 하였고 혹 험준한 요해처를 지켜 빗장을 단단히 걸기도 하였다. 우하(虞夏)의 도읍지는 삭방(朔方)의 역수(易水)를 등지고 여러 오복(五服)의 나라는 북쪽으로 사막에까지 이르렀으며, 한(漢)ㆍ당(唐)이 터 잡은 곳은 산과 강을 둘러 3면을 막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누르는 곳이었다. 이하(夷夏 오랑캐와 중국)의 경계가 옛날과 지금이 이토록 현저히 다른데, 방어를 위한 책략에는 제왕(帝王)과 패자(覇者)가 이처럼 다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안팎이 산과 강이다.”라는 것은 구범(舅犯) 말이요, 한수(漢水) 방성(方城)으로 지킨다.”라는 것은 굴완(屈完) 대답이었으니, 진(晉)나라의 지리(地利)는 싸워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능히 나라를 보전하여 결코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으며, 초(楚)나라의 형세는 적이 비록 숫자가 많아도 역시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안 것인가? 회수(淮水)와 비수(淝水)는 그 안쪽이 견고하여 육조(六朝) 때 그 지역의 패자(覇者)들이 도읍한 곳이었고 검각(劍閣)에 나 있는 잔도(棧道)는 양천(兩川) 세력이 할거하던 땅이었다.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역년(歷年)에 각각 길고 짧음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변경(汴京 북송의 수도)은 산과 강으로 막힌 데가 없었으나 백 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고 항주(杭州 남송의 수도)는 강과 바다로 막히었으나 한쪽 모퉁이에서만 살아남았으니, 그렇다면 관방이 혹 허술하여도 원래 치국(治國)이나 평천하(平天下)와는 관련이 없고 믿을 만한 험난함이 도리어 편안함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인가? 성고(成皐) 막아 () () 성패를 결정짓고 수양(睢陽) 지키는 것이 강회(江淮) 보장(保障) 되는 은 어째서인가? 혹  덩이의 흙으로 험한 관문을 봉해 버리기도 하고 혹 한 사람의 장수를 만 리의 성(城)에 비하기도 하니,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는 좋은 계책이 단지 사람에게만 관계가 있고 지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가?

전한(前漢)에서는 운중(雲中)과 안문(雁門), 후한에서는 선선(鄯善)과 무기(戊己), 당에서는 삭방(朔方), 송에서는 대명(大名)을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할 땅으로 간주하였으며, 황명(皇明 명나라)에 이르러 동북의 두 오랑캐 가까이에는 타안(朶顔) 삼위(三衛)와 거용관(居庸關)ㆍ고북구(古北口)의 병영을 설치하여 선대(宣大 중국 열하 지역)를 나라의 울타리로 삼았고, 하투(河套)와 감숙(甘肅) 지역에는 정장(亭障 초소)을 늘어세워 변경을 지켰다. 이것은 모두 수천 년 이래로 충성스러운 선비들과 지모가 있는 신하들이 경략(經畧)하였던 것인데, 이 모두에 대해 그 득실(得失)을 하나하나 진술하고 그 이해(利害)를 지적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로 말하면,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요동(遼東)과 계주(薊州)에 맞닿아 있어 신라와 고려 이래로 항상 전쟁을 치르는 나라가 되었다. 산성(山城)에 주둔한 것을 ‘새가 깃든 것〔鳥棲〕’에 비유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탄현(炭峴)을 지켜 적병을 막으려 한 사람은 누구인가? 살수(薩水)에서 수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안시(安市)에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지금 그곳이 어디인지 지적할 수 있겠는가? 여진(女眞)이 이위(伊位 함경도 초황령(草黃嶺))의 병목〔缾頃〕을 넘어 들어올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소(柳韶)가 북쪽 국경에 쌓은 성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조(我朝)에 이르러 땅을 가장 크게 넓혔고 이에 따라 지켜야 할 곳 역시 많아졌다. 서북 양계(西北兩界)를 문호(門戶)라고 부르는데, 문숙(文肅 윤관(尹瓘))의 공적을 기록한 비는 겨우 영주(英州)에 세워졌으나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공적은 두만강에까지 미쳤고, 상효손(常孝孫) 와서 바친 것은 그때 내원성(來遠城) 불과하였지만, 발해의 옛 강토가 지금 혹 우리나라의 판도 안으로 들어왔으니, 아 거룩하다!

그러나 용성(龍城)과 석막(石幕)은 그 진퇴(進退)에 대한 논의가 오래 계속되고 여연(閭延)과 무창(茂昌)은 아직 이어지는 형세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안북(安北)에 영(營)을 개설하였으나 그곳은 성을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철옹(鐵瓮)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삼강(三江)의 여러 진(鎭)은 내지에 귀속된 곳이 아니므로 모두 후주(厚州)에 병합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여, 갑론을박(甲論乙駁)만 할 뿐 확실한 계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강 연안의 진보(鎭堡)들은 거의 스스로 유지하기가 어렵고 웅건한 영(營)과 중첩한 성(城)도 한갓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니, 이것은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출입문을 단단히 얽어 두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고, 버드나무를 꺾어 채소밭에 울타리를 치면 광포한 사람도 두려워하는 법이니, 일이 일어나고서 근심하는 것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생각하는 것만 못하고, 위태해지고 나서 꾀하는 것은 안전할 때 염려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어찌하면 완벽한 계책을 내어 사방의 국경이 지켜지고 양계(兩界)의 관방이 확연히 공고해지며, 싸우고 지키는 주도권이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하여 밖으로는 오랑캐가 넘볼 근심을 없애고 안으로는 금성탕지(金城湯池)의 견고함을 지니겠는가? 여러 군자는 틀림없이 일찍부터 품어 온 특별한 포부가 있어 한번 펼쳐 보고자 할 것이니, 그 말을 듣기를 원한다.

[-D001] 육절(六節) : 

주나라 때 각 방국(邦國)에서 용도에 따라 사용한 호절(虎節)ㆍ인절(人節)ㆍ용절(龍節)ㆍ정절(旌節)ㆍ부절(符節)ㆍ관절(管節) 등 여섯 가지의 신표(信標)를 말한다.

[-D002] 오물(五物) : 

주나라 때 소행인(小行人)의 소임으로, 제후국에 상사가 있으면 부의(賻儀)를 보내 도와주고, 흉년이 들면 구호양곡을 거두어 보내 주고, 전사(戰事)가 발생하면 재물을 모아서 지원해 주고, 복된 일이 있으면 경하해 주고, 수해나 화재 같은 재앙이 있으면 위문해 주는 다섯 가지의 일을 말한다.

[-D003] 황화(皇華) : 

《시경》 〈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로, 군주가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읊은 시이다.

[-D004] 사모(四牡) : 

《시경》 〈소아〉의 편명으로, 군주가 사신을 위로하는 것을 읊은 시이다.

[-D005] 사자(使者) …… 칭찬하셨으니 : 

《논어》 〈헌문(憲問)〉에 나오는 내용으로, 거백옥(蘧伯玉)이 보낸 사자가 와서 공자의 묻는 말에 잘 대답하여 공자가 그 사자를 크게 칭찬한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D006] 유헌() : 

천자(天子)의 사자(使者)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후한(後漢) 응소(應劭)의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주(周), 진(秦)에서는 매년 8월이면 유헌의 사자를 보내어 이대(異代)의 방언(方言)을 구(求)했다.” 하였다.

[-D007] 수의직지(繡衣直指) : 

한 무제(漢武帝) 때 설치한 관직으로, 당시 민간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황제가 직접 파견한 것인데, 지방의 군대를 동원해 백성을 진압하고 군수와 자사(刺史)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수놓은 옷을 입고 부월(斧鉞)을 지닌 것은 그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후 어사(御史)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D008] 팔사(八使) : 

우리나라에서는 팔도 관찰사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전통적으로 지방의 정사를 살피기 위해 파견되는 8명의 어사나 지방관을 말한 듯하다. 어느 시대의 어떤 인물들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D009] 연주래(延州來) …… 구경하였고 : 

연주래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을 이른다. 그가 처음에 연릉(延陵)에 봉해졌다가 뒤에 주래(州來)에 봉해졌으므로 이른 말인데, 그는 중원(中原)의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풍을 구경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27年》

[-D010] 심제량(沈諸梁) …… 들이켰는데 : 

심제량은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며, 《논어》에 나오는 섭공(葉公)과 동일인이다. 이 사람이 아침에 임금으로부터 제(齊)나라에 사신 가라는 명을 받고 대단히 걱정한 나머지 열이 나서 저녁에 얼음물을 마셨다는 고사가 있다. 《春秋戰國異辭 卷29》

[-D011] 정공(富鄭公) ……  : 

부 정공은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진 북송(北宋)의 부필(富弼)을 가리킨다.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 땅을 떼어 달라는 거란의 요구를 물리쳤다. 《宋史 卷313 富弼列傳》

[-D012] 공도보(孔道輔) ……  : 

공도보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45대손이다. 인종(仁宗) 때 공도보가 거란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에서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면서 배우로 하여금 공자에 관한 놀이를 하게 하니, 공도보가 버럭 화를 내며 거란의 군신들을 꾸짖었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D013] 육가(陸賈) …… 복종하였고 : 

육가는 한 고조(漢高祖) 때 사람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지냈는데 남월(南越)의 위타(尉佗)에게 사신으로 가서 그를 회유시킨 일이 있었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漢書 卷43 陸賈傳》

[-D014] 장건(張騫) …… 들어왔는데 : 

장건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뗏목을 타고 올라가 황하의 원류를 찾았으며, 서역으로 사신 가서 대원(大宛), 강거(康居), 월지(月氏), 대하(大夏) 등 여러 나라를 모두 한나라에 복속(服屬)시키고 그곳의 문물을 한나라에 소개하였다. 《漢書 卷61 張騫傳》

[-D015] 소랑(蘇郞) …… 씹었고 : 

소랑은 한 무제 때 중랑장을 지낸 소무(蘇武)를 가리킨다.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간 억류되어 북해(北海)에서 고초를 겪었고, 또 흉노가 그를 움집에 집어넣고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는데 때마침 내리는 눈과 모직물의 털을 씹어 먹으면서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卷54 蘇武傳》

[-D016] 홍호(洪皓) …… 끓였는데 : 

홍호는 남송 고종(南宋高宗) 때의 충신으로, 금나라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어 15년 만에 돌아왔다. 금나라 점한(粘罕)의 뜻을 거슬러 냉산(冷山)으로 쫓겨나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으며, 큰 눈이 내려 땔감이 다 떨어지자 말똥으로 불을 피워 국수를 끓여 먹었다고 한다. 《宋史 卷373 洪皓列傳》

[-D017] 뗏목을 탄다〔乘槎〕 : 

사신으로 가는 것을 이른다. 한(漢)나라의 장건이 뗏목을 따고 서역 지방으로 떠난 것을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듯하다.

[-D018] 옥을 닦는다〔拭玉〕 : 

사신으로 가는 것을 이른다. 북조(北朝) 위(魏)나라의 장군 이루겸(伊婁謙)이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마침 위나라가 제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는데, 제나라의 왕이 이루겸을 책망하자, 이루겸이 “제가 사신으로 떠나올 때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僕拭玉之始 未聞興師]”라고 대답한데서 유래한 듯하다. 《北史 卷75 伊婁謙列傳》

[-D019] 은원외서(殷員外序) : 

이것은 당나라 한유가 지은 〈회골로 사신 가는 은 원외를 전송하는 서[送殷員外使回鶻序]〉이다. 여기에서 한유는 만리타국으로 떠나면서도 태도가 의연한 은 원외를 참으로 경중을 아는 대장부라고 칭송하면서 “지금 사람들은 수백 리 길만 가려 해도 문을 나서면 망망하여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이 있고, 이불을 들고 삼성에 들어가 번만 서려 해도 계집종을 돌아보며 시시콜콜 당부하기를 마지않는다.[今人適數百里 出門惘惘 有離別可憐之色 持被入直三省 丁寧顧婢子 語刺刺不能休]”라고 하였다.

[-D020] 석창언인(石昌言引) : 

이것은 송나라 소순이 지은 〈북사가 되어 가는 석창언을 보내는 인[送石昌言爲北使引]〉이다. 소순은 여기에서 “대장부로 태어나서 장수가 될 수 없다면 사신이 되어 말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으로 족하다.[大丈夫生不得爲將 得爲使 折衝口舌間 足矣]”라고 하였다.

[-D021] 유정지공(惟正之供) : 

백성들이 국가에 당연히 바쳐야 할 정상적인 조세를 뜻한다.

[-D022] 임토지부(任土之賦) : 

토지에 부과되는 조세를 뜻한다.

[-D023] 사노(寺奴) 내노(內奴) : 

절에 딸린 노비와 내수사(內需司)에 딸린 노비를 말한다.

[-D024] 혜선(惠鮮) :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휼하여 생기를 돋우어 주는 것을 뜻한다.

[-D025] 함양(咸陽) …… 버렸고 : 

《정조실록》 14년 2월 20일 조에 내용이 나온다.

[-D026] 남창(南倉) …… 하였다 : 

《정조실록》 15년 6월 9일 조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D027] 조창(漕倉) …… 편리해졌고 : 

영남의 고을에서 뱃삯으로 내는 이른바 선가미(船價米)를 혁파한 일로, 《정조실록》 15년 7월 13일 조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D028] 사우(沙郵) …… 되었다 : 

사근역(沙斤驛)의 묵은 환곡을 탕감해 준 일로, 《정조실록》 15년 3월 13일 조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D029] 부생(傅生) : 

중죄인(重罪人)의 죄상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을 때 형을 경감(輕減)하는 것이다.

[-D030] 특별히 …… 급재(給災)하고 : 

보통 밭은 1년에 두 번 경작하므로 흉년을 당하여도 급재를 허락하지 않지만, 목화밭은 반드시 입하(立夏) 이전에 씨를 뿌리게 되어 두 번 경작할 수 없으므로, 목화 농사에 참혹한 흉년을 당하였을 때는 간혹 특은(特恩)으로 급재하는 예가 있었다. 《萬機要覽 財用編二 年分》

[-D031] 표재(俵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그 비율에 따라 조세의 감면을 할당하는 것을 말한다.

[-D032] 현송(絃誦) 소리가 있었으며 : 

현송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조린다는 뜻이니, 이 지방에 예악과 학문에 힘쓰는 기풍이 있었음을 말한다.

[-D033] 백성이 …… 한다〔旣庶旣富又敎之〕 : 

《논어》 〈자로(子路)〉 제9장에 나온 염유(冉有)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을 축약한 말이다.

[-D034] 교남(嶠南) : 

조령(鳥嶺) 이남(以南)인 영남(嶺南)을 말한다. 교는 중국의 교령(嶠嶺)으로, 우리나라의 조령을 교령에 비유한 것이다.

[-D035] 오복(五服)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500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지역, 즉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이다.

[-D036] 안팎이 …… 말이요 :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고자 진을 쳤을 때 진 문공(晉文公)이 전쟁에 질 것을 근심하자, 문공의 외삼촌 구범(舅犯)이 “전쟁을 하여 승리하면 제후를 얻을 것이고 만약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안팎이 산과 강이니 반드시 해가 없을 것입니다.[戰而捷 必得諸侯 若其不捷 表裏山河 必無害也]”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28年》

[-D037] 한수(漢水) …… 대답이었으니 : 

제 환공(齊桓公)이 초나라를 정벌하고자 초나라 장수 굴완에게 막강한 군세를 과시하며 뽐내었으나, 굴완이 “임금님께서 만약 무력을 사용하신다면 우리 초나라는 방성산을 성으로 삼고 한수를 해자로 삼을 것이니,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사용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君若以力 楚國方城以爲城 漢水以爲池 雖衆 無所用之]”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D038] 검각(劍閣) :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이 관문은 장안(長安)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데, 검각현의 북쪽으로 대검(大劍)과 소검(小劍)의 두 산 사이에 잔교(棧橋)가 있는 요해처로 유명하다.

[-D039] 양천(兩川) 세력 : 

당(唐)나라 시기에 검남도(劍南道)에 동천 절도사(東川節度使)와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를 두었는데, 여기서의 양천은 이들을 가리켜 말한 듯하다.

[-D040] 성고(成皐) …… 결정짓고 : 

한(漢)과 초(楚)가 형양(滎陽)에서 싸울 때 역이기(酈食其)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성고의 험한 데를 막고 대행의 길을 차단하며 비호구에서 막고 백마의 진을 지켜 제후들에게 실제의 형세를 보이면 천하가 귀의할 곳을 알게 될 것입니다.[塞成皐之險 杜大行之道 距蜚狐之口 守白馬之津 以示諸侯效實形制之勢 則天下知所歸矣]”라고 하였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D041] 수양(睢陽) ……  :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수양성(睢陽城)이 반란군에 포위되자 사람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고 하였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수양은 강회의 보장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睢陽江淮保障也 若棄之 賊乘勝鼓而南 江淮必亡]”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 張巡》

[-D042] 덩이의 …… 하고 :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기에 외효(隗囂)의 장수 왕원(王元)이 “한 덩이의 흙을 가지고 가서 대왕을 위해 함곡관을 봉해 버리겠다.[以一丸泥 爲大王 東封凾谷關]”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13 隗囂列傳》

[-D043] 타안(朶顔) 삼위(三衛) : 

명 태조(明太祖)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 열하성(熱河城) 이북 지역에 설치한 타안(朶顔), 복여(福餘), 태령(泰寧)의 세 군영을 말한다.

[-D044] 상효손(常孝孫) …… 불과하였지만 :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금나라 군사가 요나라의 개주(開州)를 함락시키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자, 요나라 자사(刺史) 상효손이 내원(來遠), 포주(抱州) 두 성(城)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귀부(歸付)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D045] 삼강(三江) : 

여기서는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다. 압록강이 의주 부근에서 세 갈래로 흐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D046] 출입문을 …… 못하고 : 

미리 대비를 잘하면 환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뜻으로,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이 흐려 비가 오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가 출입문을 단단히 얽어 둔다면, 이제 네 하민들이, 혹시라도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47] 버드나무를 …… 법이니 : 

여기에서는 변경의 방비를 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시경》 〈동방미명(東方未明)〉에 “버드나무를 꺾어 채소밭에 울타리를 치니 광포한 사람도 두려워하네.[折柳樊圃 狂夫瞿瞿]”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