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9. 13:53ㆍ이성계의 명조선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1일 辛丑 2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승정원에 수초를 내려 종친에게만 군을 봉하게 했을 때 불리한 것이 무엇인지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게 하다
임금이 수초(手草)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보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한(漢)나라 이후로 황후(皇后)의 아비와 형제를 모두 열후(列侯)로 봉(封)하였거나 혹은 오직 황후의 아내나 부마(駙馬)나 공신(功臣)을 모두 열후로 봉하였지만, 왕(王)으로 봉하지는 않았다. 송(宋)나라 제도는 오직 황자(皇子)만은 왕에 봉하고 황손(皇孫) 이하는 사진(仕進)하기를 모두 문무관(文武官)의 전례에 따르되, 공주(公主)에게 장가든 자는 즉시로 부마 도위(駙馬都尉)를 봉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송나라 제도는 부마의 대우를 황손보다 우대하였다. 시왕(時王)의 제도에는 황자(皇子)는 친왕(親王)을 봉하고 친왕의 아들은 군왕(郡王)을 봉하며, 군왕의 아들은 장군(將軍)을 봉하여 장군은 3품 공후(三品公侯)와 대등하되, 부마(駙馬)는 특히 1품의 위에 있고, 황후의 아비는 1품을 넘을 수 없으며, 종실(宗室) 가운데에 또 진국 대장군(鎭國大將軍)이란 것이 있어서 지위가 공후(公侯)의 위에 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군왕(郡王)은 공후(公侯)보다 높기가 더한 것이다.
고려(高麗)의 봉군(封君)하는 법은 너무 헤퍼서 환관(宦官)에 이르기까지도 군(君)을 봉하였으니, 호불화(扈不花)를 신평군(新平君)에 봉하고 겸하여 조라치(照剌赤)를 봉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군을 봉한 조라치(照剌赤)라.’ 하였으니, 나도 호불화(扈不花)의 봉한 것을 보았다. 고려 말년에는 공신을 모두 백(伯)을 봉하였었는데, 개국(開國)한 후에 종친이나 부마나 공신을 모두 군(君)에 봉하였고, 공정왕(恭靖王) 때에는 친아들과 친형제는 공(公)을 봉하고 종친과 부마는 후(侯)를 봉하였으며, 공신은 백(伯)을 봉하였다가 오래되지 않아서 혁파하였고, 태종(太宗) 때에 종친과 공신과 부마를 모두 군(君)을 봉하고, 중궁(中宮)의 아버지와 형제 빈잉(嬪媵)의 아비까지도 역시 군(君)을 봉하였는데, 외척(外戚)으로서 군을 봉함을 얻으려 하였어도 얻지 못한 자가 역시 있었다. 양녕(讓寧)이 명나라에 갔을 때 예부(禮部) 조 상서(趙尙書)가 말하기를, ‘안남(安南)는 무도하여 배신(陪臣)을 모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라 일컬으니, 너의 나라의 봉군(封君)하는 법도 개혁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 뒤에 조정의 의논이 봉군한 것이 너무 많다 하여 여원(驪原)·여산(驪山)과 권홍(權弘)·김한로(金漢老)의 봉군한 것을 모두 깎았다. 조 상서(趙尙書)의 말이 비록 저와 같았으나 종친(宗親)과 부마(駙馬) 및 타성 공신이 봉군된 채로 명나라에 간 자가 많았어도 그르게 여기는 자가 없었고, 영충록(嬴蟲錄)에 또한 이르기를, ‘조선의 종친은 모두 군(君)이라 일컫는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우리 나라의 봉군하는 법을 혁파할 것이 아니다.
근일의 새 법에 별자(別子)의 맏아들[適子]은 군(君)을 봉할 수 있고, 왕의 여러 손자는 모두 3품 벼슬을 두게 되었으며, 부마는 처음부터 1, 2품 벼슬을 주니, 부마를 대우하기를 여러 손자보다 우대하는 것이 송나라 제도와 합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서군을 봉하는 것은 중국의 왕작(王爵)과 같은 것으로, 중국에는 이미 왕작(王爵)이 있어도 후작(侯爵)으로써 서성(庶姓)을 봉하는 것이 옳지만, 우리 나라는 군(君)으로써 종친을 봉하고, 또 군으로 서성을 봉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마땅히 송나라 제도에 따라 왕녀(王女)에게 장가들 자를 뽑으면 즉시 부마 도위(駙馬都尉)의 벼슬을 주는 것이 어떠한가. 만일 시왕(時王)의 제도와 서로 같아서 불가하다 한다면, 마땅히 근일의 법에 따라 아모 윤[某尹]을 봉하는 것이 어떠하며, 만일 또 종친과 부마의 작(爵)은 마땅히 다르게 하여야 한다면, 부곡(部曲)·향(鄕)의 이름으로 아무 도위(都尉)를 봉하는 것이 어떠겠는가. 이제부터는 다만 종친에게만 군을 봉하고 서성(庶姓)에게는 군을 봉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왕비의 아버지는 비록 다른 서성으로써 논할 수는 없으나, 종실(宗室)과 같이 부르는 것은 불가하고, 또한 군을 봉할 수도 없다. 혹은 말하기를, ‘공신(功臣)을 군(君)으로 봉하는 것은 《육전(六典)》에 실려 있으므로 고칠 수 없다.’ 하나, 육전이 후세(後世)의 일까지 아울러 말한 것이라면 혹 그 말이 옳지만, 만약 한때의 시행한 일을 말한 것이라면, 이제부터 군을 봉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조라치(照剌赤)라는 것은 궁중의 소제를 맡은 자이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10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4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上手草, 出示承政院, 其辭曰:
自漢以後, 皇后父及兄弟, 皆封列侯, 或惟后父駙馬功臣, 皆得封列侯, 不得封爲王。 宋制, 惟皇子封王, 皇孫以下仕進, 皆從文武官例。 尙公主者, 卽封駙馬都尉。 以此觀之, 宋制待駙馬優於皇孫。 時王之制, 皇子封親王, 親王之子封郡王, 郡王之子封將軍。 將軍等三品公侯, 駙馬特在一品之上, 后父未得過一品。 宗室之中, 又有鎭國大將軍, 位在公侯之上。 以此觀之, 郡王高於公侯遠矣。 高麗封君之法大濫, 至於宦官, 亦得封君。 扈不花封新平君, 兼封照剌赤, 時人稱嘆曰: "封君照剌赤, 予及見扈不花之封矣。" 高麗之末, 功臣皆封伯, 及開國後, 宗親駙馬功臣, 皆封君。 恭靖王時, 親子親兄弟封公, 宗親駙馬封侯, 功臣封伯, 不久而革。 太宗時, 宗親功臣駙馬, 皆封君, 中宮之父及兄弟與夫嬪媵之父亦封君, 外戚欲得封君, 而未得者, 亦有之。 讓寧之入朝也, 禮部趙尙書曰: "安南無道, 陪臣皆稱公侯伯子男, 汝國封君之法宜革。" 其後朝議封君大多, 驪原、驪山, 權弘、金漢老, 皆削封君。 趙尙書之言雖如彼, 宗親駙馬及庶姓功臣, 以封君入朝者多矣, 而無有非之者。 《嬴蟲錄》亦曰: "朝鮮宗親, 皆稱君。" 以此觀之, 我國封君之法, 不宜革之。 近日新法, 別子之適子得封君, 王之衆孫, 皆拜三品。 今之駙馬, 初拜一二品, 待駙馬優於衆孫, 與宋制合。 然我國封君, 如中國之王爵也。 中國旣有王爵, 以侯封庶姓可也。 我國以君封宗親, 又以君封庶姓, 不可也。 當依宋制, 選尙王女者, 卽拜駙馬都尉何如? 若曰與時王之制相似未可, 則當依近日之法, 封某尹何如? 若曰宗親駙馬之爵當別, 則以部曲鄕之名, 封某都尉何如? 自今以(移)〔後〕 , 但於宗親封君, 庶姓不得封君何如? 王妃之父, 雖不可以他庶姓論, 而與宗室同號, 未可也, 亦未可封君。 或曰: "功臣封君, 載於《六典》, 不可改。" 然《六典》幷言後世之事, 則或說是也。 若言一時施行之事, 則自今不得封君, 有何不可? 其令大臣擬議以聞。
照剌赤, 掌宮中掃除之任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