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8. 22:17ㆍ이성계의 명조선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8년 병인 > 12월 28일 > 최종정보
세종 28년 병인(1446) 12월 28일(신유)
28-12-28[02] 영돈녕부사 권홍의 졸기
[DCI]ITKC_JT_D0_A28_12A_28A_00020_2005_018_XML DCI복사 URL복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권홍(權弘)이 졸(卒)하였다. 홍(弘)의 자(字)는 백도(伯道)이고, 처음 이름은 간(幹)이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균(權鈞)의 아들이었다. 홍무(洪武) 임술년에 과거에 올라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에 승진되고,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이 되었다. 무진년에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어 이조 좌랑ㆍ병조 좌랑을 지내고 경오년에 우헌납(右獻納)에 옮겼으나 언사(言事)로써 폄직(貶職)되었다. 경진년에 좌보궐(左補闕)에 임명되고 사헌 시사(司憲侍史)로 승진되었다가, 성균 악정(成均樂正)으로 천직(遷職)되었다. 임오년에 태종(太宗)께서 권홍의 딸을 들여서 빈(嬪)으로 삼고, 드디어 권홍을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하였다. 정해년에 진헌사(進獻使)로써 북경(北京)에 갔다. 권홍의 재종조모(再從祖母)가 원(元) 나라 황태자비(皇太子妃)가 되었었는데, 원(元) 나라가 멸망하자 명(明)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혀서 스스로 목 매어 죽으니, 고황제(高皇帝)께서 놀라고 탄식하여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내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권씨(權氏)의 절의(節義)를 가상(嘉尙)히 여겨, 권홍에게 온화한 말로써 특별히 대접하여 어주(御廚)의 주식(酒食)을 내리고, 내리신 물건이 매우 많았다. 경인년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고, 을미년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무술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계묘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나, 조금 후에 치사(致仕)하였다. 권홍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사람을 접대함이 공손하였다. 또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잘 써서 헌릉(獻陵)과 문묘(文廟)의 비(碑)는 모두 그의 글씨로 썼다. 거주하는 동리의 골짜기가 청유(淸幽)하여, 비록 성시(城市)의 가운데 있으나 은연히 산림(山林)의 취미가 있었으므로 폭건(幅巾)과 여장(藜杖)으로 이리저리 거닐면서 한가한 세월을 보내었다. 매양 좋은 철을 만나면 반드시 손님을 맞이하여 술을 마시고 시(詩)를 읊었다.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정신을 수양한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졸(卒)하니 나이 87세였다.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와 제사를 내리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문순(文順)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현인(賢人)에게 유순하고 남을 사랑함을 순(順)이라 한다. 아들이 없었다.
【원전】 4 집 717 면
【분류】 인물(人物)
'이성계의 명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지란을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 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서 청해백으로 봉하였다. (1) | 2023.06.29 |
---|---|
호불화(扈不花)를 신평군(新平君)에 봉하는 것을 나도 보았다. (0) | 2023.06.29 |
도흥(都興)ㆍ유운(柳雲)ㆍ김사행(金師幸) 등이 망한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하다가 그 일을 보고서는, 마침 태상왕의 창시(創始)하는 초기를 당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인군이 궁중에 처하.. (0) | 2023.06.28 |
탈환불화는 동북면 사람인데, 기사년에 황제의 명령으로 중국에 간 사람이었다. (0) | 2023.06.26 |
일만 나라들 수레로 배로 폐백 보내 오는데, 일천 집 가가호호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 들려온다 (0) | 2023.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