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란을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 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서 청해백으로 봉하였다.

2023. 6. 29. 17:22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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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13 / 신도비(神道碑)

수충분의익찬경운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판형조사 판의흥삼군부도절제사 청해백 양렬 이공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刑曹事判義興三軍府都節制使靑海伯襄烈李公神道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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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25년(1392)에 강헌왕(康獻王 태조)이 즉위하여 수충분의 익찬경운개국 공신(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 양렬(襄烈) 이공(李公)을 청해백(靑海伯)으로 책봉하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판형조사(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判刑曹事)를 더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양하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가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건문(建文) 2년(1400)에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우시중(右侍中)에 특배(特拜)하고 승지를 보내어 그를 불렀으나 가지 않았는데, 공정왕이 오히려 공신록(功臣祿)을 하사하여 종신토록 지급하게 하였다. 건문 4년(1402) 여름 4월 계해일에 북청에서 돌아가시니, 왕이 조제(吊祭)를 내리고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영락(永樂) 8년(1410)에 강헌왕의 묘정에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휘는 지난(之蘭)이요, 자는 식형(式馨)으로 본관이 북청이다. 초명은 두란(豆蘭)이었다. 성은 동(佟)씨로서 국조(國朝)에 들어와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증조 부해(浮海)가 원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워 5천 호에 봉해졌다. 공의 아버지 아원(雅遠)에 이르러 여진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이르렀는데, 공이 귀해지고 나자 보조공신 영의정부사(補祚功臣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다.

처음에 정서대장군이 여진에 있을 때 큰 별이 우물 바닥에 빛을 드리웠다. 천기를 관찰하는 자가 이르기를, “이것은 계명성(啓明星)이니, 그 아래에 반드시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공이 태어났다. 장성하여서는 사람됨이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원(元)나라 지정(至正) 중에 강헌왕이 옛 광성(匡城)을 정벌하러 갔을 때, 의비(懿妃) 최씨 꿈에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개강(价江)에서 활 쏘는 사람이 패왕(覇王)을 보좌해 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공이 개강 가에서 사슴을 쏘았다. 강헌왕이 한 번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형제를 맺고, 신덕왕비(神德王妃) 강씨(姜氏)의 오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고, 전장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공과 함께 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북방에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신우(辛禑)가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대녕(大寧)에 이르러, 무신들에게 두 치의 백금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를 명하였다. 강헌왕이 활을 쏘아 거침없이 그 표적을 적중시키니 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공이 강헌왕에게 아뢰기를, “신묘한 무예를 어찌 성급하게 보여 주십니까?” 하였다. 강헌왕이 이로써 그의 지혜를 대단하게 여겼다.

몽고 승상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기병을 거느리고 홍긍(洪肯)으로 들어왔다. 공이 병사들을 이끌고 함관령(咸關嶺)을 넘어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군대를 거두었다. 이튿날 또 나하추와 합란(哈蘭)의 큰 들판 가운데서 싸웠다. 나하추가 긴 창을 휘두르며 곧바로 전진해 들어오자 강헌왕이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며 달아났다. 나하추가 결사대를 시켜 추격하여 거의 가까이 왔을 때, 강헌왕이 말에서 떨어지듯 몸을 떨어뜨리며 위를 올려다보며 적장의 겨드랑이를 쏘았고 공이 협공을 하였다. 나하추가 멀리서 강헌왕을 바라보고는 화살을 쏘았는데 강헌왕이 말안장 위에 일어서니 화살이 가랑이 밑으로 빠져나갔다. 공이 또한 앞으로 돌진하며 강헌왕을 막아 보호하니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즉시 달아났다.

왜노가 밤에 강도성(江都城 강화도(江華島))을 습격하여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착량(窄梁)으로부터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오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떨었다. 신우가 비빈들을 거느리고 도망을 가려 하여 병위(兵衛)들을 대궐문 밖에 둘러 세워 놓았다. 공이 강헌왕을 따라 해풍()에서부터 급히 승천으로 달려왔는데 날랜 장수가 백마산(白馬山)을 넘어 공의 군진을 범하였다. 공이 이에 화살을 뽑아 쏘아 죽이니 왜노가 마침내 달아났다.

얼마 안 있어 누선(樓船)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와 군현을 도륙하고 불을 질렀다. 또 호남(湖南)으로 들어가서 운성(雲城)을 함락시키고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쳤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호남의 천 리 길에 시체가 널려있으니 네가 힘껏 싸워서 이 치욕을 씻어 다오.” 하였다. 공이 군사를 정돈하여 말을 달려 정산(鼎山)에 이르니 왜노 장수가 창을 들고 곧장 강헌왕의 뒤를 쫒았다. 공이 급히 말을 달리며 크게 소리치기를,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강헌왕이 몸을 돌려 미처 보기도 전에, 공이 이미 화살을 뽑아 그 장수를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기발도(阿其拔都)는 나이 겨우 15세였는데, 용맹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왜노들이 추대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강헌왕이 공에게 그를 생포하라고 명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를 죽이지 않으면 필시 사람을 다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달려 나가 싸웠다. 아기발도는 갑옷을 겹으로 입고 있어서 목과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 투구를 쏘아 맞출테니 네가 그 얼굴을 쏘아 맞추어라. 그러면 아기발도를 단번에 죽일 수 있다.” 하였다. 이윽고 강헌왕이 그 투구를 적중시켜 그를 말 아래로 떨어뜨리니 공이 화살을 쏘아 아기발도를 결국 죽였다. 이에 왜노들이 모두 크게 소리내어 울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여진 장군 호발도(胡拔都)가 4만 기병을 거느리고 단주(端州)로 들어왔다. 그때 공이 모친상을 당해 있었는데 강헌왕이 사람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사직이 위태로우니 네가 비록 상중에 있으나 나를 위하여 상중에서 일어나 발도를 쳐야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이 영전에 곡하며 절을 하고 나서 마침내 따라 갔다. 강헌왕이 공을 선봉으로 삼아 호발도와 웅성(雄城)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어 발도가 도망갔다. 강헌왕이 이르기를, “이모는 전투에 임하여 용감하였으니,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단주가 이미 평정되고 나자 공이 갑옷을 벗고 모친상을 마치었다.

청송백(靑松伯) 심공(沈公) 덕부(德符)가 중문령(中門嶺)에서 왜노를 방어하다가 패하였으니, 그 왜노가 마침내 토아동(兎兒洞)에 진을 쳤다. 강헌왕이 군사를 이끌고 합란(哈蘭)에 이르러 장수들을 배치하고 정예병을 뽑아서 산속에 매복시켰다. 공이 이에 조영규(趙英珪) 등 백여 기병과 더불어 말고삐를 바짝 당기고 서서히 행군하니 왜노가 괴이하게 여겨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강헌왕이 출전 명령을 내리자 공이 마침내 선두가 되어 그들을 유인해 오니 왜노가 곧바로 강헌왕의 진을 범하였다. 이에 강헌왕이 거짓으로 군대를 퇴각시켜, 매복시켜 놓은 곳의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군대를 돌이켜 왜노들을 쏘아 죽였다. 공이 또한 말을 치달려 공격하고 복병이 또한 일어나니 왜노 군대는 쓰러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함관(咸關)에서부터 우두산(牛頭山)에 이르는 30리 길에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이때 공이 용감하기가 북방에서 으뜸이었다. 몽고의 여러 부족들은 두려워하여 꼼짝도 못했고 왜노들도 도망쳐서 그 후 50년 동안은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강헌왕의 좌명 공신(佐命功臣) 중에서 공의 이름이 가장 훌륭하였다.

신우(辛禑)가 군대를 내어 요동을 범할 때 강헌왕을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고 공을 원수(元帥)로 삼았는데, 패강(浿江)을 출발하여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신우가 김완(金完)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내리고 군대를 진격시키기를 재촉하였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삼군(三軍)을 다그쳐서 천자를 범하면 이것은 의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천하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군대를 돌이켜서 나라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천자는 진실로 범할 수 없으니 군대가 요동을 건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강헌왕이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익양백(益陽伯) 선생 몽주(夢周)가 왕씨(王氏)의 사직이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속으로 근심하여, 김진양(金震陽)과 더불어 힘을 다해 왕씨를 도울 것을 꾀하였다. 공정왕이 주연을 베풀었을 때 익양백이 슬픈 노래로 스스로 맹세하니 장수들이 공에게 그를 쳐서 죽이기를 권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익양백은 충신인데 내가 어찌 차마 충신을 해쳐서 스스로 불의에 빠지겠는가?” 하였다. 그 후 고여(高呂)ㆍ조영규 등이 익양백을 죽였으나 공은 참여하지 않았다.

강헌왕이 개국하여 공에게 명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으니, 북방을 진압하여 여진을 타일러 편안하게 해서 몰려오게 하였다. 여진은 모두 우리 백성이 되기를 원하여 정역(征役)을 복역하고 조세를 바치는 것을 감히 시기를 넘기지 않았다. 수백 년의 오랑캐 풍속이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었으며,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훈춘강(訓春江)까지 천여 리가 모두 우리 영토에 들어온 것은 공이 이룩한 공로이다.

처음에 공신으로 책정하여 공에게 철권(鐵券)을 내리자, 공이 병을 핑계 대며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여러 공경들이 공을 위하여 차탄하였다. 강헌왕이 밤에 신궁(新宮)에서 잔치를 열어 공신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 악공에게 명하여 〈문덕곡(文德曲)을 부르게 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여기까지 온 것은 경의 공이다.”

하였다. 공이 사례하여 이르기를,

“대의를 밝혀 천명(天命)의 터를 닦은 것은 전하의 덕이지, 신이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에 태조가 근신(近臣)을 보내어 침전으로 불러서 여러 신하와 장수들의 어짊과 불초함에 대해 물었다. 공이 인하여 말하기를, “정도전(鄭道傳)은 간사하여 반드시 종말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도전이 주벌되니 비로소 공에게 선견지명이 있음을 알았다.

공정왕이 보위를 이어받자, 공이 능히 정도전의 간사함을 분별하였다고 하여 또한 추충병의익대정사공신 청해군(推忠秉義翊戴定社功臣 靑海君)에 책봉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니 또한 분충효절동덕좌명 공신(奮忠効節同德佐命功臣)에 책봉하였고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공은 용모가 차분하고 온화하며 단아하여 부인 같았다. 장수가 되어서는 위엄이 사방에 떨쳤으며 그 큰 절개는 빼앗을 수 없었다. 북청(北靑)으로 돌아간 지 10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는 72세였다. 그 돌아가신 해 모월 모일에 부(府)의 동쪽 안대(晏臺)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필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谷山) 강씨(康氏)는 예의 판서(禮儀判書) 보대(普戴)의 딸이니, 바로 신덕왕비(神德王妃) 오빠의 딸이다. 아들 4명을 두었는데 화영(和英)은 판형조사(判刑曹事)를 지냈고, 화상(和尙)은 판공조사(判工曹事)를 지냈으며, 화미(和美)는 한성 부사(漢城府事)를 지냈고, 화수(和秀)는 예조 참판을 지냈다. 현손 이정호(李挺豪)는 수찬으로 김안로(金安老)를 논하다 죄를 입어 귀양 가서 죽었다. 7세손 첨절제사 이희당(李希唐) 선봉으로 왜노를 격퇴하다 백탑()에서 전사하였다.

정사공신(靖社功臣) 충장공(忠壯公) 이중로(李重老)는 이괄(李适)을 토벌하다 저탄(豬灘)에서 전사하였고, 이희당의 아들인 출신(出身) 이삼립(李三立)은 학포(鶴浦)에서 적을 방어하다 또한 전사하였으니, 아마도 모두가 공의 유풍(遺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공이 북방에서부터 강헌왕을 따라 장수들의 수장이 되어 백여 전의 전투를 치렀으니 북쪽으로는 몽고를 축출하였고 남쪽으로는 왜노를 꺾었으며 여진을 회유하여 땅을 천 리나 확장하였다. 능히 의리를 지켜 천자를 범하지 않았고 충신을 죽이지 않았으니 가히 어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출처 거취에 있어서 그 뜻이 은미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공정왕이 승지를 보냈을 때 공은 승지가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서 승려를 불러 삭도(削刀)를 가지고 기다리게 하였다. 승지가 들어와 유서(諭書)를 고하니, 공이 관대(冠帶)를 갖추어 절을 하고 받아서는 즉시 뜰에서 그 관대를 불태우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직 수염만 남겨 놓았다. 아! 이름을 과연 숨길 수 있겠는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그 이름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인가? 백세가 지나 반드시 공의 뜻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D001] 수충분의익찬경운개국공신 …… 이공 : 

이지란(李之蘭, 1331~1402)으로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식형(式馨)이며 양렬(襄烈)은 시호이다. 여진족 출신으로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어 무공을 떨치며 충성을 다한 인물로서 조선의 개국 공신이다.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로서 퉁두란으로 통한다.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천호가 된 후 1371년(공민왕20) 부하를 이끌고 귀화하여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음으로써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때의 이름은 이두란(李豆蘭), 조선에 들어와 이지란으로 개명하였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D003] 북청(北靑) : 

함경남도의 북동부 땅으로 북쪽은 험한 산악 지대이고 남쪽은 동해안에 이른다. 오랫동안 여진이 점거한 지역이었다. 청해(靑海)라고도 한다.

주-D001] 청해백(靑海伯) : 

이지란(李之蘭)의 봉호(封號)이다. 남송 때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이다.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로, 이성계(李成桂)와 의형제를 맺었으며 1371년(공민왕20)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92년(태조 즉위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 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서 청해백으로 봉하였다.

주-D016] 【16】이두란(李豆蘭) : 

고려(高麗) 말 조선(朝鮮) 초의 장군이다. 본관은 청해(靑海)이고, 초성은 동(佟), 초명은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蘭帖木兒)이다. 남송(南宋)의 충신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불화(阿羅不花)이다. 조선 건국 후 이름을 이지란(李之蘭)으로 개명하였다. 이성계(李成桂)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공민왕(恭愍王) 20년(1371)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北靑)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성계 휘하에서 운봉(雲峰) 전투 등에 공을 세워 공양왕(恭讓王) 때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ㆍ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를 역임하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음.

 

 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刑曹事,判義興三軍府都節制使,靑海伯襄烈李公神道碑銘。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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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武二十有五年。康獻卽位。策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襄烈李公。爲靑海伯。加輔國崇祿大夫

門下侍中贊成事,判刑曹事。公固辭。歸于北靑。留不返。建文二年。恭定特拜右侍中。遣承旨召之。不至。恭定猶賜功臣祿。以終其身。四年夏四月癸亥。卒于北靑。賜吊祭。輟朝二日。永樂八年。命配享康獻廟庭。公諱之蘭。字式馨。北靑人也。初諱豆蘭。姓佟氏。入國朝。賜姓李氏。曾祖浮海入元。以功封五千戶。至公皇考諱雅遠。仕女眞。官至征西大將軍。公旣貴。贈補祚功臣領議政府事。初征西在女眞時。有大星。垂于井甃。望氣者曰。此啓明也。其下必生魁傑人。已而。公生。及旣壯。爲人勇敢善騎射。

 

고려사 > 권38 > 세가 권제38 > 공민왕(恭愍王) 4년 > 8월 > 원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 영안왕대부인에게 잔치를 열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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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년 8월 10일(음) 계해(癸亥) ,
1355년 9월 16일(양)

 

원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 영안왕대부인에게 잔치를 열어주다

8월 계해 원(元)의 황태자가 월로첩목아(月魯帖木兒, 우루테무르)를 보내와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에게 잔치를 열어주자 왕이 그 집에 행차하였는데 왕은 이씨와 함께 남쪽을 보고 앉고 황후의 동생인 조희중(趙希仲)의 아내는 동쪽에 앉았으며 기철(奇轍)은 월로첩목아와 함께 서쪽에 앉고 재추(宰樞)들은 계단[階] 위에 앉았다.

 

33집 東史約 上(한국사료총서 제33집)   >   紀年東史約卷之十 朝鮮茅亭李源益, 編   >   本朝紀   >   壬午二年

壬午二年


四年    國寶傳位定宗之吁川國寶傳位之太宗⊙受⊙定宗⊙⊙川授圍寶之悅⊙誤   


也嘗進貢馬, 上親閱一下列馬置首, 帝見之, 曰朝鮮王愛我首進馬甚良, 命詞臣賦天馬歌, 上聞之, 曰擇駿馬辨人才, 予不讓於古人矣,

置敬承府,

擇儒臣趙敍, 金時用等, 爲元子左右諭善及侍學等官, 又營元子學宮於成均館東北隅, 朴錫命, 曰元子入成均館, 則誰得以訓之哉, 莫如闕內, 上曰雖闕內誰得以訓之, 莫如成均乃置元子府, 號敬承,

靑海伯李之蘭, 乞致仕許之, 尋卒,

之蘭字式釐國朝賜姓名, 生時有大星垂井甃望氣者, 曰此啓明也其下必生魁傑人, 勇敢善騎射, 初懿妃與老人言, 价江有射者, 伯王之輔也, 會之蘭射鹿价江上, 上王一見大奇之, 結爲兄弟, 以顯妃兄女妻之, 每從征以勇聞朔方, 蒙古諸族皆慴伏, 方策勳賜鐵券, 之蘭稱疾人皆嗟歎, 上王嘗召入臥內, 問群臣賢否, 之蘭言鄭道傳姦必不令終矣, 助皇朝征建虜勅封靑海伯, 上王多賚土田臧獲, 使移近京之地, 以先塋遠, 終不膺命, 自上王旋蹕豐壤, 卽歸北靑, 上遣承旨以右侍中召之, 之蘭豫招浮屠, 持刀以待, 及宣諭書冠帶受之, 卽庭中焚其冠帶, 因斷髫納于疏中以上, 曰佐君定國君臣之義至矣, 削髮被緇, 君臣之義絶矣, 且言平生多殺伐, 願爲子孫朮福, 獨留鬚髥以表丈夫, 上知其不可强賜功臣祿以終其身, 至是卒年七十二,

以李茂權仲和爲左右政丞

 

太祖高皇帝實錄 卷一百五十 洪武十五年 十二月 一日 2번째기사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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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故元平章月魯帖木兒建昌衞指揮使賜以綺衣金帶月給三品俸贍其家土官例無俸此特恩

 

건창의 귀순과 월노첩목아의 來朝

·        국가

建昌衛(건창위)

洪武五年, 羅羅斯宣慰安定來朝, 而建昌尙未歸附, 十四年遣內臣齎敕諭之, 乃降. 十五年置建昌衛指揮使司. 元平章月魯帖木兒 주 001等自雲南 建昌來貢馬一百八十匹, 幷上元所授符印. 詔賜月魯帖木兒 주 002綺衣·金帶·靴襪, 家人綿布一百六十疋·鈔二千四百四十錠. 以月魯帖木兒 주 002爲建昌衛指揮使, 月給三品俸贍其家. 十六年, 建昌土官安配及土酋阿派先後來朝, 貢馬及方物, 皆賜織金文綺·衣帽·靴襪. 十八年, 月魯帖木兒 주 003擧家來朝, 請遣子入學, 厚賜遣之. 二十一年, 建昌府故土官安思正妻師克等來朝, 貢馬九十九匹. 詔授師克知府, 賜冠帶·襲衣·文綺·鈔錠, 因命師克討東川·芒部及赤水河叛蠻. 二十三年, 安配遣子僧保等四十二人入監讀書. 二十五年, 致仕指揮安配貢馬, 詔賜配及其把事五十三人幣紗주 003有差.

 

건창의 귀순과 월노첩목아의 來朝

·        국가

建昌衛(건창위)

홍무 5년(1372)에 나라사 선위 안정(安定)이 내조하였으나주 001 건창은 아직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홍무] 14년(1379)에, 내신(內臣)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가게 하여 이들을 효유하니 항복했다.주 002 [홍무] 15년(1380)에 건창위지휘사사를 설치하였다.주 003 원나라의 평장(平章)주 004인 월노첩목아(月魯帖木兒) 등이 운남 건창에서 와서 말 180필을 공물로 바치고, 또 원에서 받은 부인(符印)주 005도 헌상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월노첩목아에게는 기의(綺衣)주 006·금대(金帶)주 007·화말(靴襪)주 008을, 그의 집안사람들에게는 면포 160필과 보초(寶鈔) 2,440정(錠)을 하사하였다. 월노첩목아를 건창위 지휘사로 삼고, 매달 그 집에 3품관에 해당하는 봉록을 주어 집안을 부양하게 했다. [홍무] 16년(1381)에, 건창 토관 안배(安配) 및 토추장 아파가 선후로 내조하여 말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모두에게 직금문기(織金文綺)주 009·의모(衣帽)·화말(靴襪)을 하사했다.주 485 [홍무] 18년(1383)에, 월노첩목아가 온 집안사람들을 데려와 내조하고 아들을 보내 학교에 입학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을 후하게 내리고서 이들을 돌려보냈다.주 011 [홍무] 21년(1386)에, 건창부의 사망한 토관 안사정(安思正)의 처 사극(師克) 등이 내조하여 말 99필을 공물로 바쳤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극에게 지부를 제수하고, 관대·습의(襲衣)주 012·문기(文綺)주 013·초정(鈔錠)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극에게 동천·망부 및 적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만족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홍무] 23년(1388)에, 안배(安配)가 아들 증보 등 42명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하여 독서하게 했다.주 014 [홍무] 25년(1390)에, 치사주 015 지휘 안배가 말을 공물로 바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안배 및 그의 관사(管事) 53명에게 보초와 비단을 차등을 두어 하사했다.

 

太祖高皇帝實錄 卷二百十七 洪武二十五年 四月 二日 1번째기사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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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建昌衞指揮使月魯帖木兒繹忽樂等德昌會川迷易栢興卭部并西番土軍殺官軍男女二百餘口掠屯牛燒營屋刼軍粮率眾萬餘攻城指揮使安的以所部兵開東北門出戰敗之斬首八十餘級獲馬五匹擒其黨十餘人賊乃退屯阿宜河已而轉攻蘇州指揮僉事魯毅率精騎出西門擊之虜眾大集毅且戰且卻復入城拒守虜眾圍城毅乘間遣壯士王旱突入賊營斫賊取其首懸西門賊驚怖乃引去

월노첩목아의 반란

·        국가

建昌衛(건창위)

已而月魯帖木兒  001, 德昌·會川·迷易·柏興·西番土軍萬餘人, 殺官軍男婦二百餘口, 掠屯牛, 燒營屋, 劫軍糧, 率衆攻城. 指揮使安的以所部兵出戰, 敗之, 斬八十餘級, 擒주 004其黨十餘人. 賊退屯阿宜河, 轉攻蘇州. 指揮僉事魯毅率精騎出西門擊之, 賊衆大集且戰且却, 復入城拒守. 賊圍城乘間遣壯士王旱突入賊營, 斫賊, 賊驚遁. 於是置建昌·蘇州二軍民指揮使司及會川軍民千戶所, 調京衛及陝西兵萬五千餘人往戍之. 仍諭將士互相應援, 設伏出奇, 幷諭擒주 002  005首獻者賞千金. 復諭總兵官涼國公藍玉, 月魯帖木兒  003詭詐, 不可信其降, 致緩師養禍.

월노첩목아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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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昌衛(건창위)

오래지 않아 월노첩목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덕창(德昌) 주 001·회천(會川) 주 002·미역(迷易)·백흥(柏興)·공부() 및 서번(西番) 주 003의 토군(土軍) 만여 명을 규합하여 관군과 남녀 200여 명을 죽이고 둔전을 경작하는 소를 노략질하고 병영을 불태웠으며, 군량을 빼앗고 무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였다. 지휘사 안적(安的)이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 그들을 물리치고 80여 명을 참수하고 무리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적들은 아의하(阿宜河)로 물러가 주둔하다가 방향을 돌려 소주[](蘇州衛)를 공격하였다. 지휘첨사 노의(魯毅)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서문을 나가 공격하였으나 적의 무리가 많이 모여 있었으므로노의는 싸우다 물러났다 하다가 다시 성으로 들어와 방어하였다. 적이 성을 포위하자 노의는 틈을 타서 장사 왕한(王旱)을 보내 적진으로 갑자기 들어가 적을 베게 하니 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에 건창·소주의 두 군민지휘사사 및 회천군민천호소(會川軍民千戶所)를 설치하고, 경성(京城)을 지키던 위()의 군사와 섬서 병사 1 5천여 명을 징발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유지를 내려 장사들이 서로 응원하며 매복했다가 기습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상으로 준다고 유시했다. 또 총병관 양국공(涼國公남옥(藍玉)에게 유지를 내려 월노첩목아 [] 속이므로 그가 항복하리라 믿고 공격을 늦추어 화를 키우지 말라고 했다. 004


·        각주 001)

德昌: 지금의 四川省 서남 凉山 彝族自治州 중남부에 위치한 縣이다. 四川省에서 傈僳族의 인구가 가장 많은 縣이다. 漢·晋 시대의 德昌은 남방 실크로드의 노선 상에 위치한 오래된 驛站이었다. 洪武 25(1392)에 德昌千戶所를 설치하여 建昌衛軍民指揮使司에 소속시켰다.  

·        각주 002)

會川: 지금의 四川省 會理縣 서쪽이다. 唐나라 때 이곳에 會川縣을 설치했는데, 天寶 말에 南詔의 소유로 되었다. 南詔는 이곳에 都督府를 설치했고, 大理國은 府를, 元朝는 路를, 明朝는 衛를 설치했으며, 淸代에 이르러서는 이를 폐지했다.  

·        각주 003)

西番: 明代부터 中華民國 시기까지 甘肅·四川·雲南 지역의 소수민족들이나 캄(Kham) 지역의 티베트인들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        각주 004)

관련 사항은 『太祖實錄』 卷222 洪武 25 10월 戊午條에 기록되어 있다

 

월노첩목아의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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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昌衛(건창위)

사천도지휘사 구능(瞿能) 주 001이 각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쌍랑채(雙狼寨)에 이르러 가짜 천호 단태평(段太平) 등을 사로잡으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지고 월노첩목아는 패하여 달아났다. 구능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추격해서 탁락채(托落寨)를 공격하고 함락시켰다. 이곳 저곳에서 싸우며 전진하다가 타충하(打沖河) 주 002에서 삼리 [가량 떨어진] [타충하]소(打沖河所)주 003에 이르러 월노첩목아와 맞닥뜨려 크게 싸워 또 물리쳤다. 그 무리 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들도 1,000여 명이었으며, 소와 말을 노획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관군이 덕창(德昌)에 들어가자 구능은 드디어 지휘동지 서개(徐凱)를 가려 뽑아 군대를 나눠주고 보제주(普濟州) 주 004로 들어가 [적을] 수색하여 체포하게 했다. [구능은] 다시 타충하의 가교(駕轎)에서 지휘 이화(李華)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탁락채의 잔당을 추격하게 했으며, 수서로 진격하여 월노첩목아의 관사(管事) 7명을 참살했고, 절로채(截路寨)의 토만(土蠻)인 장사(長沙)·납적(納的)이 모두 화살을 맞고 죽었다. 구능은 [군대를] 돌려 천성(天星)·와표(臥漂) 등 각 채(寨)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는데, 선후로 1,800여 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월로첩목아는 백응주(柏興州) 주 005로 도망쳐 들어갔다.


·        각주 001)

瞿能(?~1400): 安徽 合肥 사람이다. 부친인 瞿通은 洪武 연간(1368~1398)에 벼슬이 都督府 僉事(正2品, 전국 각지의 衛所를 통령하였음)에 이르렀는데, 瞿通이 죽자 아들 瞿能이 蔭敍로 都督府 僉事의 관위를 얻었다. 瞿能은 후에 四川都指使司의 都指挥使가 되어 藍玉과 더불어 大渡河를 건너 西番 부락을 토벌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副總兵으로 임명되어 建昌에서 반란을 일으킨 月鲁帖木兒를 토벌하였는데, 雙狼寨에서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燕王 朱棣가 ‘靖難의 變’을 일으키자 李景隆을 따라서 北上하여 朱棣를 토벌하는 데 참여했다. 北平을 공격할 때, 그는 아들과 함께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彰義門으로 진군하여 적군을 궤멸하고 승리를 목전에 두었는데, 李景隆이 그의 공로를 질투하여 후방에서 대군이 오는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 틈을 타 燕王의 군대는 신속하게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하자 瞿能 父子는 패배하고 李景隆 휘하의 全軍이 몰살당했다. 후에 다시 瞿能은 李景隆을 따라서 大軍을 이끌고 白沟河에서 燕王軍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瞿能 父子는 燕王軍 수백 명을 참살하였으나 결국은 燕王軍에 죽임을 당했다.  

·        각주 002)

打沖河: 四川省 鹽源縣의 동북에 있는 작은 강으로, 雅礱江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므로 雅礱江의 하류를 打冲河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蠻族들은 打沖河를 黑惠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雅礱江은 사천성 서부의 강으로서 金沙江의 지류이다. 靑海省 巴颜喀拉山의 南麓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흘러서 사천성 서북부로 흘러들어가는데, 石渠縣 부근에서 四川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서부터 雅礱江으로 칭한다. 大雪山 서쪽의 新龍縣과 雅江縣至 등지를 통과하여 雲南의 가장자리인 渡口市에서 金沙江으로 흘러들어간다. 雅礱江은 옛날에 若水, 瀘水로 불렸으며, 또 金沙江과 흡사하여 小金沙江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각주 003)

打冲河所: 四川省 鹽源縣 동북방 160리 지점에 위치했다. 明 洪武 연간(1368~1398)에 설치되었다. 唐代에는 沙罷城에, 元代에는 建昌路 瀘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        각주 004)

普濟州: 지금의 四川省 米易縣 서북방에 위치하였다. 元 至元 15년(1278)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定昌路에 소속시켰다가 至元 23년(1286)에 德昌路에 소속시켰다. 明 洪武 15년1382)에 德昌府에 소속시켰다가 永樂 2년(1404)에 普濟長官司로 고쳤다.  

·        각주 005)

柏興州: 지금의 四川省 鹽源縣 및 鹽邊縣 일대이다. 元 至元 연간(1264~1294)에 柏興府를 설치하고 治所를 潤鹽縣(지금의 鹽源縣)에 두었다. 明 洪武 15년(1382)에 柏興府를 설치했다가 洪武 24년(1391)에는 柏興府를 柏興州로 강등시키고, 潤鹽縣을 柏興州에 편입시켰다. 그 후에 곧 柏興千戶所로 고쳤다가 다시 鹽井衛로 고쳤다 

 

 

월노첩목아의 항복과 처형

·        국가

建昌衛(건창위)

帝遣諭藍玉: 月魯帖木兒  001信其逆黨達達  007·楊把事, 或遣之先降, 或親來覘我, 不可不密爲防. 柏興州 賈哈喇境內麽些等部, 更須留意. 賈哈喇, 麽些洞土酋也. , 王師克建昌, 授以指揮之職, 自是從月魯帖木兒  002率兵至柏興州, 遣百戶毛海以計誘致月魯帖木兒  008幷其子胖伯, 遂降其衆, 月魯帖木兒  003京師, 伏誅因奏: 四川地曠山險, 控扼西番···吐番  009出入之地馬湖·建昌·嘉定俱爲要道, 皆宜增屯衛.」 報可,

命玉班師월노첩목아의 항복과 처형

·        국가

建昌衛(건창위)

황제가 남옥에게 사자를 보내 효유하여 이르기를, “월노첩목아는 반역의 무리인 달달(達達)과 양파사(楊把事) 등을 믿으니, 혹 이들을 먼저 항복시키거나 혹 몸소 아군을 엿보러 올 것이므로 엄밀하게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흥주(柏興州) 가합라(賈哈喇) 경내의 마사(麽些)주 001 등 부족은 반드시 더욱 조심하라”고 하였다. 가합라는 마사동(麽些洞)의 토추(土酋)였다. 당초에 관군이 건창을 함락하고 [그에게] 지휘의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때부터 월노첩목아를 따라 반란에 가담했다. 남옥이 병사를 이끌고 백흥주에 이르러 백호(百戶) 모해(毛海)를 보내 계책을 써서 월노첩목아와 그 아들 반백(胖伯)을 유인하여, 드디어 그 무리를 항복시키고 월노첩목아를 경사(京師)로 압송하니 [황제가 그를] 처형했다. 이에 남옥이 상주하기를, “사천은 땅이 넓고 산이 험하여 서번(西番)을 눌러 지키고 있습니다. 송(松)·무(茂)·조(碉)·여(黎) [지방은] 토번(吐番)이 출입하는 곳에 해당하며 마호·건창·가정(嘉定) [지방]은 모두 중요한 길목이므로 모두 다 마땅히 둔병과 위(衛)를 늘려야 합니다”라고 하니, [황제는] 허락하고 남옥에게 회군하도록 명하였다.주 002

 

·        각주 001)

麽些: 納西族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고대 羌族의 한 갈래이다. 모계 중심의 부족으로 일처다부제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納西族이라는 이름은 1954년부터 사용되었다. 元代와 明代에 雲南의 麗江 지역에 沐氏 土司세력이 일어날 때, 이들 納西族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금의 사천성 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현재 중국 雲南省 麗江市 古城區·玉龍 納西族 自治縣·維西·香格里拉·寧蒗縣과 四川省 鹽源縣·木里縣, 西藏 自治區 芒康縣 鹽井鎭 등에 거주하고 있다. 언어는 티베트·미얀마語族에 속하며, 인접한 彛語에 가깝다. 농업이 생업이지만 산지에서는 양 등의 목축도 중요시하고 있다. 종교는 주로 샤머니즘으로서 주술사가 의식을 집행한다. 독특한 상형문자와 많은 경전이 있다.  

·        각주 002)

관련 사항은 『太祖實錄』 卷222 洪武 25년 11월 甲午條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남옥은 두 건의 상주문을 올렸는데 하나는 사천의 지경이 넓고 산이 험준하여 西番을 누르는 형세인데도 해마다 蠻夷들이 날뛰는 까닭은 軍衛가 적어서 방어가 허술하여 그러니 군위를 증치하자는 내용으로 본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받아들여져서 사천의 요충지에 衛와 屯兵이 증설되었다. 다른 하나의 상주문은 사천의 군사가 적으므로 民丁을 병사로 삼아서 入貢하지 않는 長河西·朶甘·百夷를 토벌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명 태조 주원장은 해마다 군량이나 세금을 납부하느라 지친 백성들 가운데서 건장한 자를 병사로 삼으면 백성들이 어떻게 견뎌내겠느냐면서 거절하였다

 

·        1. 太宗文皇帝實錄 卷一百二十 永樂九年 十月 二十八日 1번째 기사 / ○丙辰西番土官月魯帖木兒孫刺馬拍 刺馬······

○丙辰西番土官月魯帖木兒刺馬拍 刺馬拍:抱本刺作剌。 及其姪孛里 及其侄孛里:廣本抱本里下有等字,是也。 貢馬賜鈔幣有差

建昌府

本文

本漢邛都國。武帝立越嶲郡。唐曰嶲州。懿宗時爲蒙詔所據。改曰建昌府。元置建昌路。明改爲衞。皆在今四川西昌縣地。清設建昌上南道。駐雅安。設建昌鎭總兵。駐西昌。其地即漢之西南夷。稱建昌夷。有白夷黑夷兩種。細別之則爲九種。一邱。二猓玀。三白夷。四西番。五麽些。六格鹿。(按即黑夷)七韃靼。八回子。九漁人。中以猓玀種最爲強悍。漢唐蒙、司馬相如之所諭告。蜀漢雍闓、孟獲之所誘煽。唐吐蕃、南詔之所裹脅。皆此諸夷也。⦿唐撫州地。南唐置建武軍。宋改曰建昌軍。元改建昌路。明初改肇昌府。尋改建昌府。清因之。屬江西省。民國廢。故治即今南城縣。⦿明置。宣德後入於安南。在今安南東京東南二百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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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여요선

백두산 사적에 대한 고찰〔白頭古蹟攷〕

 

백두산 아래 발상 고적을 첨부함〔附白頭山下發祥古蹟〕

태조가 17세 때에 개강 정장(价江亭長)으로 광성(匡城) - 바로 경흥의 옛 이름이다. - 에서 몽가독(蒙苛毒)을 막았다. 이 행차에서 개강의 산골짜기에 살던 퉁두란(佟豆蘭)을 얻어 그와 함께 돌아왔다. 공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뒤에 이씨 성(姓)을 내려 주었다. - 《북도능전지》에 자세히 보인다. - 개강(价江)은 온성(穩城)의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한다. - 《청해백세가(靑海伯世家)》에 “현재 온성 유원(柔遠)의 물줄기이다.” 하였다. ○이상은 개강 고적이다. -

 

청음집 30 / 묘갈명(墓碣銘14수(十四首)

동지중추부사 송계(松溪) 이공 인기(李公麟奇) 묘갈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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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선대에는 대대로 북방에 살아 관직(官職)과 부속(部屬)이 있었다. 휘 지란(之蘭) 때 이르러서 원(元)나라 말기를 당해 스스로 고려로 귀의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우리 태조(太祖)를 따라 어지러움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여 훈업을 세운 데 대한 표창을 받아 공신각(功臣閣)에 들어가고 북청(北靑)을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았으며, 지위가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이르렀다.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으며, 양렬(襄烈)이라는 시호를 받고,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분이 화영(和英)을 낳았는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를 지냈고, 무후(武厚)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분이 효강(孝綱)을 낳았는데, 성균관 진사를 지냈다. 이분이 순희(淳禧)를 낳았는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정호(挺豪)를 낳았는데,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이분의 막내 정걸(挺傑)은 재주가 있고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었는데, 이분이 공에게 할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휘는 옥(沃)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참의에 추증된 민희증(閔希曾)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11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문곡집 22 / 행장(行狀3수○행적 2수를 붙임

청흥군 이공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靑興君李公請諡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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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중로(重老)이고, 자(字)는 진지(鎭之)이며,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선대가 북방(北方)에서 살았는데, 원(元)나라 말기를 당하여 휘 지란(之蘭)이라는 분이 스스로 빠져나와 고려(高麗)로 귀의하였다가 우리 태조(太祖)를 추종하여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고 관향(貫鄕)으로 북청(北靑)을 하사받았다. 지위가 문하시중 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 청해백(靑海伯)에 이르렀고, 졸한 뒤 양렬(襄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고전번역서 >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21권 > 신도비 > 최종정보

용주유고 21 / 신도비(神道碑)

청흥군 이공 신도비명병서 〔靑興君李公神道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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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을 살펴보건대 공은 자가 진지(鎭之)이다. 6대조 지란(之蘭)은 우리 태조에게 이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익찬경운 개국 정사 좌명 공신(翊贊景運開國定社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문하시중 청해군(靑海君)의 벼슬을 지냈다. 중국 조정에서 오랑캐를 정벌한 공로로 청해백(靑海伯)에 봉하였다청해백은 애초에 무공으로 이름났지만 그의 출처와 절개는 범대부(范大夫 범려(范蠡))와 장유후(張留侯 장량(張良))의 풍모가 있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씨는 이로부터 마침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어 대대로 유명한 사람이 나왔다.

 

 

 청해백(靑海伯:1331~1402) : 高麗 末, 홍무 25년(壬申:1392) 4월 명나라 태조 朱元璋의 요청으로, 명나라를 도와 建州衛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功으로, 명나라 건문 원년(建文 元年:己卯:1399:定宗 元年) 12월 靑海伯의 爵位를 받았음. 出 : 靑海李氏世藏. 

 

 

≪叅考≫ 이 墓所改築이 日帝强占期時代임에도 不拘하고 卽 朝鮮總督府에서 事務官 1, 道에서 學務課를 代表하여 道視學과 1, 警察部를 代表하여 警部 1, 北靑郡守와 北靑警察署長 其他 面代表 等이고 各 郡親族代表로서 北靑 李冕秀·李俊彦, 서울 李承俊·李茂秊, 洪原郡 李在律, 端川郡 李一性·李在健, 甲山郡 李深性, 吉州郡 李在兄, 鏡城郡 李在從, 咸興 李深一 等이 叅席하였다.

 

1) 秋史 金正喜 : 貫鄕은 慶州. 字는 元春. 號는 阮堂·秋史·禮堂·詩庵·果坡·老 果.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 1819년(純祖 19) 文科에 及第하여 世子侍講 院說書·忠淸右道暗行御史·成均館大司成·吏曹叅判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 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문집에 阮堂集, 저서에 金石過眼錄·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墨竹圖·墨蘭圖 등이 있다.

2) 長明燈 : 石燈은 사찰뿐만 아니라 陵墓 앞에 세워 邪惡한 기운을 물리친다 는 辟邪의 기능을 갖고 있다. 高麗 末에 처음 보이는데, 朝鮮時代에 와서 는 一品 이상 宰相의 墓域에만 세울 수 있었으므로, 매장된 사람의 身分 을 象徵하는 表示物이 되기도 했다. 初期에는 불을 밝힐 수 있는 장명등의 火窓 부분에 실제로 기름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으나, 점차 형식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받침대와 몸체, 지붕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초기에는 길고 날씬한 기 둥 모양이었으나 차차 작고 뭉툭해졌다. 고려 말에 건조된 여주 신륵사 普 濟尊者石鐘 앞 석등에서 잘 알 수 있다.

3) 告由祭 : 私私 집에서 重大한 일을 치르기 前 또는 後에 그 事由를 祠堂이 나 先塋에 고함.

4) 冕秀氏 : 李冕秀님은 靑海李氏 樞密公派로 北靑(靑海)에 居住 하였으며, 崇 禎 紀元後 五乙亥(1935) 八月 上澣에 靑海社에서『靑海伯世家』를 木版本 으로 刊行하였으며, 世家 序文에 十七世 孫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原本이 國內에는 없고, 日本에 있는 것을 國立中央圖書館에서 影印하여 保 存하고 있는 것을 吾門이 다시 영인하여 일부 宗人과 奎章閣·國史編纂委員 會·韓國學中央硏究員·各 大學 圖書館에 寄贈하였다.

 

※ 文縡顯(?~?) : 글 지은이에 대해서는 貫鄕이 南平人이라는 것 外에는 알려진 것이 없기에 收錄하지 못함을 매우 哀惜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 出 : 靑海伯世家(李冕秀 撰).

 

   靑海李氏  樞密公派  尙榮公  宗中

                   二十一世孫 松谷 應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