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太祖)께서는 일흔 이후에 전위(傳位)하셨으나, 정종(定宗) 이후에는 다 일흔이 못되어 전위하셨다

2023. 6. 1. 13:00이성계의 명조선

태조(太祖,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는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姓)은 (李), 본관은 전주(全州), 는 (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는 송헌(松軒), 또는 송헌거사(松軒居士)다. 아버지는 이자춘이였는데, 몽골식 이름이 울루스부카(Улус Буха, 吾魯思不花)였다.[1]

1398년 ㅡ 1335년  = 63년

태상왕  1398년  ㅡ  1408년 5월 24일 (음력)

태조(太祖)께서는 일흔 이후에 전위(傳位)하셨으나, 정종(定宗) 이후에는 다 일흔이 못되어 전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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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1 을유(1705) 11 2(임술)

31-11-02[06] 삼사를 인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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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삼사(三司)을 인견(引見)하였는데, 대신(大臣)ㆍ정경(正卿)ㆍ정원(政院)도 다 입시(入侍)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김진규(金鎭圭)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하루 해가 다하고 밤이 새도록 잇따라 수응(酬應)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조섭(調攝)은 우선 말할 겨를이 없거니와, 눈앞의 소요가 이러하여 허둥지둥 할 바를 모르겠는데, 이제 또 면대하여 이르시겠다는 명을 받으니, 깨달으신 희망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연코 들어줄 수 없는 일을 날마다 잇따라서 이렇게 하니,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전후의 비지(批旨)에 내 뜻을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경(卿) 등이 헤아리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무릇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성현(聖賢)이 귀하게 여긴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근본을 따른 말이고, 약으로 부지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방도입니다. 예전에는 옷을 드리우고 가만히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고, 국초에는 6부(府)가 있을 뿐이어서 기무(機務)가 매우 간편하였으나, 후세에는 번잡한 겉치레의 말절(末節)이 매우 많아졌는데, 전하께서 30년 동안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에 정신을 쏟으시느라 자고 먹고 할 겨를조차 없으셨으니, 옛 임금 가운데에서 찾아도 누가 전하처럼 정사에 부지런하였겠습니까? 이렇게 근로(勤勞)하셨기 때문에 손상된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인데, 이제 다른 방도로 기무를 줄이면 이런 우환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또 세자의 춘추도 장성하였으니 옆에서 모실 때에 문서를 보고 서무(庶務)에 참여하게 하면, 절로 가르침에 보탬이 있을 것이며, 또 기무에도 줄어드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은 말하기를,

“예전에 문왕(文王)은 모든 옥송(獄訟)에 대하여 구태여 알려 하는 바가 없었고, 진평(陳平)은 한(漢)나라의 한 재상(宰相)이었으나, 옥송을 결단하는 일이나 전곡(錢穀)이 얼마나 되는지를 몰랐으니, 대체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작은 일을 가까이하지 않고 뭇 신하로 하여금 재결하여 아뢰게 하며, 중대한 문서는 세자를 시켜 옆에서 참견하게 한다면, 가르치는 방도에 유익하고 수양하는 방도도 또한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상께서 국사(國事)에 밝아 익숙하고 전장(典章)에 통달하여 노련하시니, 만약 마땅한 사람을 얻어 다스리기를 꾀하신다면, 인군은 위에서 편안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힘쓸 것입니다. 전위(傳位)에 있어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古事)가 있기는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없던 일이니 갑자기 행한다면 인심이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춘궁(春宮)은 혈기(血氣)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뜻밖에 이 일을 당하였으니, 어찌 몹시 박절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위 문제(魏文帝)가 태자(太子) 굉(宏)에게 전위하자, 태자가 슬피 울며 그치지 않으므로, 문제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대신하는 느낌이 절로 마음속에 절박합니다.’ 하였습니다. 저 오랑캐의 임금은 나이가 어린 때였음에도 오히려 이러하였는데, 춘궁의 인자하고 효성스런 마음으로서는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고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보통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부형의 일을 갑자기 자제에게 맡기면 자제가 감히 맡아서 행하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어찌 세자의 정리(情理)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옛 임금이 병 때문에 태자에게 전위하고 싶었지만, ‘이처럼 어렵고 위태한 때에 어찌 차마 자손에게 근심을 끼치겠는가?’라고 한 일이 있었으니, 이제 우리 성상의 마음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뿐입니다. 춘궁으로 하여금 자리의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때때로 문서를 보게 한다면, 성상께서 조금은 우근(憂勤)을 덜 수 있고, 자애(慈愛)하시는 정과 효성스런 마음이 둘 다 그 도리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최석항(崔錫恒)은 말하기를,

“오늘은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는데, 대신(大臣)은 이미 아뢰었으니, 신 등이 청컨대 먼저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신 등은 진실로 오늘의 일이 한편으로는 부탁하여 걱정하심이 없고자 한 데서 나왔고, 한편으로는 병환을 조섭하시자는 데서 나온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세자는 나이가 이제 겨우 약관(弱冠)이고 학문도 아직 정숙(精熟)하지 못하므로, 지금은 바로 촌음을 아껴 덕기(德器)를 함양할 때입니다. 그러니, 갑자기 이 어렵고 큰 책임을 맡기신다면, 근심하고 초조하여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할 것이니, 어떻게 지기(志氣)를 펴고 덕기를 성취하겠습니까? 신이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니, 정청(廷請)의 계사(啓辭) 가운데에 ‘뭇 신하가 힘껏 다투니, 태종(太宗)께서 여러 번 거론하셨다가 여러 번 멈추셨습니다.’ 한 것이 있고, 그 글에 또 ‘중종(中宗) 말년에도 국정을 인종(仁宗)에게 돌리려 하셨으나, 그때 상신(相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힘껏 다투어, 마침내 천의(天意)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예전 우리 태종의 세대가 백성의 마음과 선비의 추향과 나라의 형세와 조정의 기강을 지금과 견주어 어떠하였겠습니까마는, 어렵게 여기고 삼간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습니다. 중종 때에는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바른 데로 돌이켜 향국(享國)이 장구하였고, 인종께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로 연세가 설흔에 가까왔으나, 보필하는 대신이 힘껏 다투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명(成命)을 거두셨습니다. 오늘날의 신하들이 비록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만은 본받고 사모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장령(掌令) 박행의(朴行義)는 말하기를,

“지금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이처럼 힘껏 다투고 춘궁이 초조한 것이 또 이러하며, 오부(五部)의 방민(坊民)까지도 모두 근심하지 않음이 없으니, 옛 임금이 혹 자기 소견을 세운 일이 있었지만, 이것은 끝내 굳이 어길 수 없습니다. 전(傳)에 ‘천하는 천하의 천하이다.’ 한 것은 한 사람의 사유(私有)가 아니기 때문이니, 이처럼 중대한 일을 임의로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듣건대, 왕세자가 밤낮으로 초조하여 침식까지 폐한다 합니다. 바라건대, 세자의 지극한 뜻을 돌이켜 생각하여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고, 지평(持平) 이교악(李喬岳)은 말하기를,

“《역경(易經)》에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를 위(位)라 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계신 자리는 곧 조종의 자리이니, 전하께서 결코 쉽사리 주고 받으실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왕세자는 연령이 채 약관이 되지 못하여 기혈(氣血)이 아직 충실해지지 못하였는데, 크고 어려운 일을 물려받은 뒤에 밤낮으로 초조하여 하늘의 화기를 손상시킨다면, 전하의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편안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처럼 온 나라 안이 허둥지둥하고 인심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전하의 생각으로는,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저희가 마땅히 절로 그만두리라.’ 하시겠으나, 이는 매우 그렇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신하가 정청(庭請)하는 것을 어찌 그칠 수 있으며, 정원(政院)에서 작환(繳還)하는 것을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삼사에서 복합하는 일도 그칠 수 없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하여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고, 지평(持平) 윤세유(尹世綏)는 말하기를,

“이 일은 끝내 봉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위로 신하들로부터 아래로 하인까지 이처럼 놀라고 의혹스레 여깁니다. 또 왕세자가 장차 복합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다른 것이야 오히려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에는 반드시 봉행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고, 헌납(獻納) 이의현(李宜顯)은 말하기를,

“당초 성교(聖敎)에 조종의 일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르셨으니, 아마도 성의(聖意)는 ‘이 일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행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기셨겠습니다만, 이는 실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태조(太祖)ㆍ정종(定宗)의 일은 국초의 처음 창업할 때에 관계되므로 오늘날 끌어댈 만한 것이 아니거니와, 세종(世宗)께서 선위(禪位)받으실 때에는 뭇 신하가 힘껏 아뢰었기 때문에 처음에 또한 여러 번 거론하였다가 여러 번 그만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 또 이런 분부가 있었으나 현상(賢相) 정광필(鄭光弼)이 백관을 거느리고 애써 말하며 조정에서 다투어 마침내 천의를 돌렸던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시세는 중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다르니, 어찌 중종 때의 가까운 전례를 버려두고 국초의 먼 전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국가의 명령은 인심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할 것인데, 이 일이 있고 나서는 조정의 신하들이 허둥지둥하여 할 바를 모를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모든 생명이 있는 무리는 모두 다 성곽(城郭)을 메우고 흘러 넘치도록 분주하고 눈물을 흘리니, 전하께서 억지로 행하려 하시더라도 끝내 그렇게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간직(諫職)에 있으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 하시어 전후의 성교를 빨리 거두소서.”

하고, 교리(校理) 이관명(李觀命)은 말하기를,

“어제는 밤이 깊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러갔으나, 옛사람이 견거(牽裾)절함(折檻)한 의리에 대하여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단연코 행하려 하시더라도 이는 참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인데, 상하가 서로 이토록 버티는 것은 매우 무익합니다.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방도는 마땅히 문서를 줄여서 수양하는 방도에 편하게 해야 할 뿐이며, 이 일은 참으로 뭇 신하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왕세자는 춘추가 점차 장성하고 학문이 날로 진취되어 일국의 신민이 모두 다 목을 늘이고 기대하니, 성상께서는 가르치는 방도를 더욱 다하시어, 뒷 사람을 계도하여 전열(前烈)을 이어 받게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예전부터 제왕(帝王)이 우근(憂勤) 때문에 병이 된 일이 없었으나, 위사(衞士)에게까지 음식을 내리는 것을 명하거나, 날마다 문서를 일정하게 달아서 재결하는 것은 실로 우근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번거로운 겉치레와 말절(末節)이 매우 많으니, 오로지 마땅히 강구하고 헤아려서 수양하는 방도를 편하게 해야 할 뿐입니다. 어찌 갑자기 막대하고 막중한 일을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교리(校理) 이만견(李晩堅)은 말하기를,

“오늘날의 이 일은 도리어 수양하는 방도에 해롭습니다. 상하가 서로 버티므로 상소하여 번거롭게 하는 것이 평소보다 훨씬 더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번뇌하시는 것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신다면, 신 등은 비록 죽임을 당하더라도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외의 인심이 이처럼 흔들리는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데, 《예기(禮記)》에 ‘향당(鄕黨)ㆍ주려(州閭)에서 죄를 얻는 것보다 차라리 숙간(熟諫)하는 것이 낫다. 부모가 노여워하며 기뻐하지 않아 매로 때려 피를 흘리더라도 더 공경하고 더 효도하며, 기뻐하면 다시 간(諫)한다.’ 하였으니, 비록 죽임을 당하더라도 전하의 신하된 자가 어찌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부교리(副校理) 남취명(南就明)은 말하기를,

“천하의 일에는 이름과 실속이 있는데, 이름과 실속이 서로 부합한 뒤에라야 어떤 일을 함이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모든 일을 아뢰어 행하라는 분부를 하셨으니, 크고 어려운 기업(基業)을 물려주신 뒤라 하더라도 한가히 있다는 이름이 있을 뿐이고, 도리어 수양하는 실속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수만의 군민(軍民)이 궐하(闕下)에서 울부짖으니, 신 등이 윤허받지 못하면 낯을 들고 군민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정언(正言) 정필동(鄭必東)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춘추가 아직 만년이 되지 않았으니 일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실 때가 아니며, 춘궁은 학업이 날로 진취된다고 하지만 또한 만기(萬機)를 담당할 때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두 가지 일을 헤아려 모든 신하들이 청하는 것을 따르소서.”

하고, 정언(正言) 한중희(韓重熙)는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비록 ‘조종조의 고사가 있다.’고 말씀하시나, 고금(古今)은 마땅한 것을 달리합니다. 인정이 놀라고 의혹스럽게 여겨 흔들리며 안정이 되질 않으니, 신 등이 성의가 비록 천박하다고는 하지만 복합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왕세자가 복합하는 일이 장차 있을 것인데, 비록 신들의 진언(進言)으로 말미암아 우선 멈춘다 하더라도 뒷날 반드시 이 일이 있을 것이고, 추울 때에 찬 곳에 있으면 반드시 손상됨이 있을 것이니, 그 근심은 어찌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수양하려 하시지만 도리어 화증(火症)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수헌(洪受櫶)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화증 때문이라고 하교하셨지만, 병을 고치는 방법에는 절로 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명(天命)의 거취는 인심의 향배에 달려 있는 것인데, 이 하교가 내려지고 나서 인심이 흔들리니, 이것이 어찌 가르쳐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예전부터 도리를 거스르고 일을 이룬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고, 부사직(副司直) 강현(姜鋧)은 말하기를,

“온 나라 안의 생명이 있는 자와 조정을 채운 모든 신하들이 허둥지둥하지 않음이 없어 답답한 인심을 위안할 수 없는데, 세자의 초조한 정이야말로 마땅히 또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빨리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면, 신 등이 받들 리가 만무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는 비록 조종조의 고사라고 하셨지만, 때와 형세가 같지 않을 뿐더러, 전하의 자리는 곧 조종의 자리이니, 어찌 그 몸이 근로하여 한때 병환이 있다하여 갑자기 춘궁에게 부탁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靈)이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한가하게 수양하시는 것은 장래의 일이고, 눈앞의 절박한 것이 매우 많아서, 성후(聖候)가 편찮으신 중에 날마다 번거롭히고 밤마다 인견하시니, 어찌 병을 더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세자가 천만 뜻밖에 갑자기 이 일을 당하여 날마다 잇따라 상소하고 장차 복합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손상될 염려가 없겠습니까? 정원(政院)에 머물러 둔 공사(公事)는 비록 들이라는 명이 있지만, 허둥지둥하는 이때 누가 감히 봉입(捧入)하여 재처(裁處)하겠습니까? 팔도에 흉년이 들어 서두르며 허둥지둥하니, 진구(賑救)할 방책이 하루가 급합니다.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공조 판서 송창(宋昌)은 말하기를,

“여염집의 일로 말하자면, 나이 젊은 자제에게 갑자기 집안일을 맡겨 학업을 폐하게 하면, 비록 남보다 나은 재주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공부가 점점 퇴보하여 끝내 성취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세자가 갑자기 이 책임을 맡는 것도 이 경우와 같은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염려가 여기에 미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김진규(金鎭圭)는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조종조의 고사를 인용하셨을지라도 전례로 인용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세종(世宗) 이후에는 다시 이런 일이 없었고, 중종(中宗)께서 처음 행하시려 하셨으나, 어진 정승이 힘껏 다투어서 중지하셨습니다. 소신(小臣)의 이 말은 매우 황공하나,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가릴 말이 있겠습니까? 이 일은 국가에 있어서는 참으로 부자의 윤리에 관계되고, 신하에게는 또한 군신의 의리에 관계됩니다. 또 고례(古禮)로 말하자면, 사대부(士大夫)의 나이가 일흔이 되고 병이 있으면 혹 전중(傳重)할 수 있으나, 미처 일흔이 못되어 전중하는 경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이나,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이 모두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일흔이 못되었을 경우 전중할 수 없음은 사대부의 가정(家庭)도 오히려 그러하니, 전하께서 어찌 전하지 않아야 할 연세에 전하실 수 있겠으며, 세자도 어찌 받지 않아야 할 시기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결코 받을 수 없음에도 혹 억지로 몰려서 받든다면, 또한 군신의 의리를 잃을 것입니다. 국가의 정령(政令)ㆍ거조(擧措)에 큰 윤리와 큰 의리를 손상하는 것이 있다면 근심이 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승지가 차례로 나아가 말하기를,

“이번 비지(批旨)는 결코 한 시각도 정원에 둘 수 없습니다.”

하고, 김진규가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하시므로 반드시 이 때문에 죄주지 않으실 것인데, 죽더라도 받들지 않으면 신하의 절의(節義)를 보전할 수 있겠으나, 혹 두려워서 받들어 행한다면 곧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정성을 다해 아뢰어 청하므로 자못 느껴 돌이킬 마음이 있었으나, 이제 김진규의 일흔에 전중한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평온하지 못하다.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태조(太祖)께서는 일흔 이후에 전위(傳位)하셨으나, 정종(定宗) 이후에는 다 일흔이 못되어 전위하셨다. 나 때문에 조종께 욕을 끼치니, 결코 따를 수 없다. 저가 ‘큰 윤리와 큰 의리를 손상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저가 비록 변변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김진규의 성정(性情)은 궤벽(詭僻)이 특히 심하여 불을 가리켜 물이라 하고 물을 가리켜 불이라 하니, 이처럼 궤벽한 사람은 동국(東國)에 없을 뿐더러 중국에도 없을 것이다. 저가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윤리ㆍ의리에 손상이 있다는 말로 조종 때의 일을 침범해 언급할 수 있는가?”

하였는데,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나아가 말하기를,

“김진규의 말은 지극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느껴 깨달으신 단서가 있다면, 어찌 이 때문에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사서(士庶)와 다른데, 일흔에 전중한다는 것은 사서를 말한 것이니, 김진규가 잘못 끌어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왕가의 향수(享壽)는 사서와 다른데도, 큰 윤리와 큰 의리를 손상한다고 말하였다. 저가 어찌 정종 이후의 일을 모르겠는가? 또 어찌 몹시 슬프지 않겠는가? 김진규는 어찌하여 감히 머물러 있는가? 나간 뒤에 내가 말하겠다.”

하므로, 김진규가 황공하여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저가 어찌 고의적으로 조종을 범할 뜻을 가졌겠습니까? 말이 뜻을 잘 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하고,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진규가 아뢴 것이 비록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을 쓸 즈음에 크게 망발하였으므로 죄를 논하는 것이 본디 마땅하겠습니다. 하지만 느껴 깨달으신 단서가 이미 나타나서 천리(天理)가 애연(藹然)한데, 이렇게 지극히 중대한 일을 어찌 한 사람의 말에 몹시 번뇌하여 도로 거두실 수 있겠습니까? 어제 물러갈 때에 밤이 이미 3경 3점이었으므로, 한편으로는 병침(丙枕)이 불안하실까 염려하고, 한편으로는 천안(天顔)이 온수(溫粹)하신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이제 또 면대하여 아뢰는 것을 윤허하여 성의가 애연하시니, 전에 인대(引對)하실 때에 어찌 이러한 때가 있었겠습니까? 온갖 소리가 다 고요하고 밤 기운이 청명하니, 이미 나타단 단서에 따라 뭇 신하의 청을 애써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전후의 비지에 이미 다하였다. 나의 이 거조(擧措)는 만기(萬機)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앓는 것이 점점 깊어져 마음이 매우 절박하므로 자리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있으면서 만년을 우유(優游)하려 한 것이다. 대개 전위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 이미 시작한 뒤에는 본디 단연코 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어제 오늘 전석(前席)에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청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고,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대위(大位)에 있으면서 역년(歷年)이 많으면서도, 어찌 백성에게 미친 덕택이 있었으리오마는, 위로 고굉보필(股肱輔弼)부터 아래로 기로(耆老)ㆍ군민(軍民)까지 다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하니, 임금과 신하사이는 비록 분의(分義)가 엄연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감동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성교가 이러하시니, 종사(宗社)와 신민의 복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시에 감동하여 흐느끼니, 임금도 또한 말하기를,

“자연히 감동되어 나도 절로 눈물이 흐른다.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니, 만약 이 일 때문에 헛되이 세월을 끌어 제때 미처 강구하지 못한다면, 이는 더욱 내 잘못일 것이다. 이 때문에 뭇 신하의 청을 애써 따른다.”

하였다.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성비(聖批)를 받으니 태평만년(太平萬年)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인데, 이것은 종사(宗社)가 묵묵히 도와서 천심(天心)이 자연히 바로 돌이켜진 소치입니다. 신 등은 불초하니, 어찌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이킬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허지(許墀)가 말하기를,

“궐하(闕下)에서 비지(批旨)를 기다리는 자가 매우 많으니, 이 하교를 빨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소(疏)에 대한 비답(批答)에 ‘이제 막 전석(前席)에서 뭇 신하의 청을 애써 따랐다.’고 말을 만들어 곧 전유(傳諭)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말하기를,

“옛말에 ‘임금에게 임금다운 말이 세 가지 있으니, 바로 천심(天心)이 개오(改悟)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위로 조종께서 부탁하신 뜻을 생각하고, 아래로 신민이 사랑하여 받드는 뜻에 몰려 이미 내린 하교를 도로 거두셨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큰 경사입니다. 우(禹)ㆍ탕(湯)이 자기를 죄책하니 그 흥기(興起)하는 것이 융성하였습니다. 이제 이 하교(下敎) 가운데 겸광(謙光)의 뜻이 말씀 밖으로 넘치시니, 이것은 우ㆍ탕의 마음입니다. 또 진휼하는 일을 급하게 여기셨는데, 이처럼 백성을 근심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것은 대개 마음이 천심에 맞기 때문이니, 만백성이 누구나 다 감동할 것입니다. 이 하교가 한 번 내려지면 뭇사람의 마음이 기쁠 것이니, 오늘의 일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경사입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내일 진하(陳賀)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차례로 물러갔다.

【원전】 40 집 17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D001] 생이지지(生而知之) : 

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앎.

[-D002] 견거(牽裾) : 

중국의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신비(辛毗)가 문제(文帝)에게 간(諫)하다가 임금이 대답없이 궁내(宮內)로 들어가려 하므로, 옷소매를 끌어잡으며 기어코 간한 고사.

[-D003] 절함(折檻) : 

강력하게 간(諫)하는 것을 비유한 말.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에, 성제(成帝)가 주운(朱雲)의 직간(直諫)에 노(怒)하여 조정(朝廷)에서 끌어내게 하자, 주운은 전각(殿閣)의 난함(欄檻)을 붙들고 매달려서 그 난함이 부러졌다는 고사.

[-D004] 숙간(熟諫) : 

힘써 간(諫)함.

[-D005] 전중(傳重) : 

제사를 받드는 중임을 자손에게 전수함.

[-D006] 애연(藹然) : 

무성하고 온화한 모양.

[-D007] 병침(丙枕) : 

임금이 밤에 잠자리에 듦.

[-D008] 겸광(謙光) : 

겸손하여 덕이 더욱 빛남.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정연탁 (역) |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