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0. 20:29ㆍ이성계의 명조선
정종2년 1400년
태조 이성계 생년1335년 + 70년 = 1405년 , 태조 이성계는 누구인가?
주원장 1328년 +70년 = 1398년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 논사(論史) - 한국
태조(太祖)의 어제(御製)와 어용 후서(御容後書)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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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 태조(太祖)는 신무(神武)와 성덕(聖德)이 있는 분으로 그 문장(文章)이 사책(史策)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초야(草野)의 천민이 어떻게 구경이나 할 수 있겠는가마는 어쩌다가 야사(野史)ㆍ패승(稗乘)을 뒤적이다가 몇 가지 본 것이 있기에 삼가 적어서 우리 후예들에게도 태조의 이러한 문장을 알도록 하려 한다.
《북관지(北關誌)》에 이렇게 되어 있다.
“태조가 한미할 때 함흥(咸興)에 살면서 남에게 무함을 받아 방백(方伯)에게 수금(囚禁)되었는데, 그의 편장(偏將) 중에 망기(望氣)하는 자가 있어 옥중(獄中)에 서기(瑞氣)가 있는 것을 보고 방백을 만나 좌우(左右)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내가 옥중을 바라보건대,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 이모(李某 태조를 가리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조심스레 석방하고 벌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방백이 놀라 이상히 여기고 즉시 석방하면서 ‘죄상으로 보아서는 즉시 사(赦)할 수 없으나, 용서해야 할 사정이 있기 때문에 즉시 석방한다.’ 하고는, 이어 용(龍) 자 셋을 운(韻)으로 불러 주면서 부르는 대로 시(詩)를 받아 짓게 하였다. 태조가 즉시 받아 짓기를,
요락지 못 이름 속에 숨어 있던 용이 / 瑤落池中隱潛龍
이젠 집을 옮겨 세간의 용 되었구려 / 移宅今作世間龍
훗날 만일 풍운을 얻는다면 / 他日若得風雲會
의당 패택의 용으로 변하리 / 變化當作沛澤龍
하므로, 방백이 크게 놀라 사례했다.”
홍장주(洪長洲) 만종(萬宗)이다. 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우리나라 태조가 한미할 때 백악(白岳) 한양(漢陽) 북산(北山)이다. 에 올라 지은 시에,
높다란 봉우리 두괴(斗魁)를 접했으니 / 突兀高峯接斗魁
한양의 승경은 하늘이 열어 놓았네 / 漢陽形勝自天開
산은 대륙에 서렸으니 삼각산이 일어섰고 / 山盤大野擎三角
바다는 장강을 끌었으니 오대산에서 시작했네 / 海曳長江出五臺
했다.”
하였다. 그리고 열성어제(列聖御製)에 의하면, 태조가 일찍이 삼각산에 올라가 지은 시에,
등라를 부여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 引手攀蘿上碧峯
흰 구름 속에 암자 하나 높이 누웠네 / 一菴高臥白雲中
여기서 보이는 곳 모두 내 강토 된다면 / 若將眼界爲吾土
초월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랴 / 楚越江南豈不容
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설림(說林)》에 이르기를,
“방번(芳蕃)ㆍ방석(芳碩)의 난(亂)에 태조가 함흥(咸興)에 나가 있을 때, 옛날 태조의 고향 친구였던 한 노인이 닭 두 마리와 말술을 직접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태조가 술을 마시고 거나해지자, 절운(絶韻)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비늘 달고 북해에서 날아올랐다 이르지 말고 / 休道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왔다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내 풍패에 노래하러 옴이 아니고 / 我行不是歌豐沛
도리어 당 명황의 촉도난이 부끄럽네 / 却愧明皇蜀道難
했다.”
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태조가 적전(赤田)에 행행한 것은 한번 북적(北狄)을 몰아내고 탁란(濁亂)한 제신(諸臣)을 제거하려다가 뜻대로 안 될 경우에는 중국에 가서 호소하려 함이었는데 정희계(鄭熙啓) 등이, 산승(山僧) 온해(溫解)가 쌍성(雙城) 용씨(龍氏)의 아들에게 준,
누가 말했나 북해에서 비늘 달고 날아오른다고 / 誰說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 입고 고향에 왔다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나는 풍패에서 노래하던 한 고조가 아니고 / 予非漢祖歌豐沛
도리어 당 명황의 촉도난이 부끄러워 / 反愧唐皇蜀道難
한 시를 인용하여 만류했다.”
하였는데, 《설림》에 기록된 것과 자구(字句)가 많이 다르니,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패승(稗乘)에 태조의 연구(聯句)가 있는데, 태조가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三尺劍頭安社稷]’ 하자, 최영(崔瑩)의 대련(對聯)에 ‘한 줄기 채찍으로 건곤을 안정시키리[一條鞭末定乾坤]’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꿈속에서 지은 시에,
종고 소리 중외에 떨치니 / 鼓鐘聲振通中外
여기가 바로 삼한의 만세 터전일세 / 正是三韓萬世基
하였는데, 실록(實錄)에서는 이를 ‘무인 삼월 무신삭 야몽(戊寅三月戊申朔夜夢)에 지었다.’하였다.
규경(圭景)은 삼가 상고하건대, 삼월삭(三月朔)은 의당 병진삭(丙辰朔)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실록에서 무인 삼월 무신삭(戊寅三月戊申朔)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아마 삼월 무신일(戊申日)인 듯하다. 그리고 《대동경세력략(大東經世曆略)》을 상고하건대, 명(明)나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1368~1398) 31년은 곧 우리나라 태조 7년인 무인년이다. 무인년 삼월 초하루가 무신일이고 보면, 삼월 삭일(三月朔日)이라 하지 않고, 삼월삭(三月朔)이라고만 일컬은 데서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실록에 이르기를,
“공정(恭靖 정종(定宗)의 시호) 2년(경진)에 상왕(上王 태조를 가리킴)이 몰래 신암사(新菴寺)에 행행하였을 때 세자(世子)가 친히 가서 환궁(還宮)하기를 청하여 환궁한 후, 공정(恭靖)과 세자가 헌수(獻壽)하고 의안공(義安公) 화(和) 등이 시연(侍宴)하였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상왕(上王)이 연구(聯句)를 지었다. 그 연구에 ‘밝은 달 주렴에 가득한데 사람 홀로 섰고[明月滿簾人獨立]’ 하였고, 또 ‘산하는 변함없건만 사람은 어디로 갔느뇨[山河依舊人何在]’ 하였다. 그 다음날 상(上) 정종(定宗)이다. 이 세자와 함께 덕수궁(德壽宮)에 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태상왕의 연구에 ‘나이는 칠십이 되었으나 마음이 서로 맞구나[年雖七十心相應]’ 하자, 상(上)의 대구(對句)에 ‘밤은 벌써 삼경인데 흥이 다하지 않구려[夜已三更興不窮]’ 일체 본서(本書)에 의해 기록하였으므로 연차(年次)가 서로 어긋나니, 보는 이는 자세히 상고해야 한다. 했다.”
하였다.
태조 어용후찬(太祖御容後贊)에 대해서는,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건대,
“준원전(濬源殿)은 함경도(咸鏡道) 영흥부(永興府) 동남쪽 13리에 있는데, 여기가 곧 환조(桓祖)의 옛 저택으로, 태조가 출생한 곳이다. 명 영종(明英宗) 정통(正統) 8년(계해) 우리 세종(世宗) 25년이다. 에 정인지(鄭麟趾) 등이 태조의 수용(睟容 초상화)을 여기에다 봉안(奉安)하였는데, 그 영정(影幀)의 뒷면에,
청룡 백호가 좌우에 둘렀는데 / 靑龍白虎左右邊
마치 호랑이가 바위에 걸터앉은 듯 / 山虎石上如蹲踞
공후며 부귀며 영화로운 세상 / 公侯富貴榮華世
일세를 통령한 대장군일세 / 出世統領大將軍
명예는 우레처럼 천하에 떨치고 / 雷振名譽天下遍
온 세상 막힘 없어 글과 수레가 사해에 통하였네 / 四海無防車書通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케 하고 / 三尺劍頭安社稷
한 줄기 채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네 / 一條鞭末定乾坤
라는 글귀가 있다.”
하였으니, 어째서 어용(御容) 뒷면에 이런 글귀를 써 놓았는지 진정 알 수 없다. 삼가 아는 이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태조(太祖) 6년(정축)에 도선위사(都宣慰使)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군현(郡縣)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여 행정(行政)에 편의하도록 하라고 하고는, 뒤에 수서(手書)를 전하면서 옷과 술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수서의 외면에는 ‘봉행차 개탁(峯行次開坼 삼봉(三峯)은 뜯어 보아라)하라.’고 썼고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로 작별한 지 오래되어 그대 생각이 몹시 나기에 신 중추(辛中樞)를 보내어 그대의 노역(勞役)을 위문(慰問)하도록 하려 했는데, 마침 최긍선(崔兢宣)이 그곳으로부터 돌아왔기에 그대의 근황을 갖추 알고 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구려. 이제 유의(襦衣) 한 벌을 그대에게 보내어 추위에 대비하도록 한다. 봄 추위가 이와 같으니, 늘 몸조심 잘해서 변공(邊功)을 꼭 이룩하라. 이만. 월일(月日)에 송헌거사(松軒居士)는 도장을 찍는다.”
《풍패지(豐沛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태조가 등극하기 이전에 귀주동(歸州洞) 환조(桓祖)의 구택(舊宅)에서 살았다. 그래서 뒤에 태조가 함흥(咸興)에 옮겨가 살면서 본궁(本宮)의 구지(舊址)에 손수 소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서 송헌거사(松軒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지금도 그 소나무가 본궁의 뒤뜰에 있다. 이 소나무는 병화(兵火)도 입지 않았고 새도 서식하지 않았는데,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4년(갑자) 이후로 세 그루는 스스로 말라 죽고 한 그루는 절반쯤 말랐으며, 두 그루만이 예전과 같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집에 의하면,
“이상의(李商議) 상의는 태조 잠저(潛邸) 시절의 관명(官名)이다. 가 자기의 자(字)와 거실(居室)의 이름을 나에게 묻고 또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내가 ‘계수나무 꽃은 가을에 교결하다[桂花秋皎潔]’는 뜻을 취하여 자(字)를 모(某) 삼가 상고하건대, 중(仲) 자 아래 결(潔) 자를 붙여 ‘중결’로 되었다. 라 하였고, 계수나무와 잘 어울리기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고 또 이공(李公)이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기 때문에 그 거실(居室)의 편액(扁額)을 송헌(松軒)이라 했다.”
하였으니, 송헌이란 호는 바로 묵은이 지어 올린 것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원보략(璿源譜略)》과 《기년아람(紀年兒覽)》에 의하면, 태조의 수용(晬容)이 3본(本) 있다.
한 본은 경성(京城)의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고, 또 한 본은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고, 또 한 본은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에 봉안되었는데, 인조(仁祖) 9년(신미) 2월에 강릉(江陵)에 천화(天火)가 크게 일어나 집경전(集慶殿)이 불탔을 때 여기에 봉안된 태조의 진용(眞容)을 구출하지 못하였고 또 함흥의 본궁(本宮)에 본래부터 봉안해 온 본이 있었고 보면, 태조의 수용(睟容)이 아마 5본이었던 듯하다.
[주-D001] 망기(望氣) :
하늘의 운기(雲氣)를 바라보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을 말한다.
[주-D002] 패택(沛澤)의 용(龍) :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 곧 패군(沛郡)인데, 그가 뒤에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03] 풍패(豐沛)에 노래 :
한 고조(漢高祖)가 제위(帝位)에 오른 뒤, 고향인 패군(沛郡)에 들러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크게 베풀어 놓고는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흩날렸도다. 위엄이 천하를 뒤덮고 고향에 돌아왔네. 어떡하면 맹사를 얻어서 사방을 지킬꼬.[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라고 노래한 것을 말한다. 《漢書 高帝本紀》
[주-D004] 촉도난(蜀道難) :
당(唐)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 명황(唐明皇)이 간험(艱險)한 서촉(西蜀) 지방으로 파천(播遷)했던 일을 말한다.
[1091]太祖御製御容後書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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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太祖神武聖德之餘。宸翰天章。炳耀史冊。然如草野賤氓。何以瞻玩。而或從野史稗乘。有所謹覽敬書之。俾我後昆。亦知天章之如此焉。《北關誌》及《豐沛誌》。太祖微時。在咸興。爲人所誣。方伯囚禁。其偏裨有望氣者。見獄中有瑞氣。見方伯。辟左右語曰。俺望獄中。有王氣。李某非凡人也。須釋而愼勿罪之。方伯驚異。卽放曰。罪不可卽赦。竊有原恕之道。故卽爲放釋。仍呼三箇龍字。俾卽應口而對。太祖卽對曰。瑤落池 【池名】 中隱潛龍。移宅今作世間龍。他日若得風雲會。變化當作沛澤龍。方伯大驚謝之云。洪長洲【萬宗】 《小華詩評》。我太祖微時。登白岳 【漢陽北山名】 有詩曰。突兀高峯接斗魁。漢陽形勝自天開。山盤大陸擎三角。海曳長江出五臺。列聖御製。太祖嘗登三角山。有詩曰引手鬱蘿上碧峯。一菴高臥白雲中。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車五山天輅《說林》。芳碩、芳蕃之亂。太祖遜于咸興。有一老父。乃太祖鄕舊也。手攜雙雞斗酒來慰。太祖醉後。口占一絶曰。休道騰鱗北海間。莫言今日錦衣還。我行不是歌豐沛。却愧明皇蜀道難。
星湖李瀷《僿說》。太祖之幸赤田也。欲大驅北狄。除濁亂諸臣。不如意。則赴訴于中國。鄭熙啓等。因山僧溫解之有贈雙城龍氏子詩曰。誰說騰鱗北海間。莫言今日錦衣還。予非漢祖歌豐沛。反愧唐皇蜀道難。與《說林》所記。字句絶異。殊不可曉也。
《稗乘》有太祖聯句。三尺劍頭安社稷。崔瑩對聯曰。一條鞭末定乾坤。太祖夢中作。鼓鍾聲振通中外。正是三韓萬世基。《實錄》曰戊寅三月戊申朔夜夢作。【景謹按。三月朔。當爲丙辰朔。而《實錄》曰戊寅三月戊申朔。則誤也。恐三月戊申日也。而又考《大東經世曆略》。則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卽我太祖七年戊寅也。戊寅三月朔日爲戊申。則不曰三月朔日。而只稱三月朔。而致誤也。】 《實錄》。恭靖二年庚辰。上王潛幸新菴寺。恭精及世子獻壽。義安公和等侍宴。酒酣。上王聯句曰。明月滿簾人獨立。山河依舊人何在。《實錄》。二年癸酉。上 【太祖】 與世子。詣德壽宮設宴。聯句曰。年雖七十心相應。【太祖】 夜已三更興不窮。【一依本書錄之。年次相錯。覽者宜詳之。】太祖御容後書。按《輿地勝覽》。璿源殿。在咸鏡道永興府東南十三里。卽我桓祖舊邸。太祖誕生之地。皇明英宗正統八年癸亥。【我世宗二十五年】鄭麟趾等。奉安太祖睟容。幀背有書曰。靑龍白虎左右邊。山虎石上如蹲踞。公侯富貴榮華世。出世統領大將軍。雷振名譽天下遍。四海無防車書通。三尺劍頭安社稷。一條鞭末定乾坤之句。何以書於御容禎後。誠未敢知也。恭俟知者。太祖六年丁丑。遣都宣慰使鄭道傳。畫定郡縣地界。許以便宜。以手書賜衣酒。外面書。三峯行次開坼。內書曰。相別日久。思想殊甚。欲遣辛中樞。往問行役。崔兢宣來。備知動止。稍自慰解。今將襦衣一領。以備風露。春寒若此。以時自愛。以旣邊功。不具。月日。松軒居士著圖書。
《豐沛誌》。太祖龍潛時。居于歸州洞桓祖舊宅矣。晩移咸興。本宮墟。手植松六株。號松軒居士。今在本宮後庭。兵燹不及。禽鳥不棲。天啓甲子以後。三松自枯。一松半枯。惟有二株如舊。牧隱李穡《集》曰。李商議【太祖潛邸官名】 問其字及居室名。又請名其一郞。予取桂花秋皎潔。字之曰某。【謹按仲字下潔字】 配桂莫如松。且公所重者。節義也。故扁其居曰松軒云云。松軒。牧隱所製進。
謹按《璿源譜略》及《紀年兒覽》。太祖睟容三本。一本奉安于京城永禧殿。一本奉安于全州慶基殿。一本奉安于永興璿源殿。而仁祖九年辛未二月。江陵天火大起。集慶殿災火。太祖眞容不救。又有咸興本宮。奉安本藏。則太祖睟容。恐五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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