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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년 기사(1629) 윤4월 19일(갑술) 맑음
07-윤04-19[30] 자정전에서 주강을 행할 때 특진관 심열 등이 입시하여 진강한 뒤 기민을 진휼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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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에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특진관 심열(沈悅), 동지사 홍서봉(洪瑞鳳), 참찬관 서경우(徐景雨), 시독관 최혜길(崔惠吉), 검토관 나만갑(羅萬甲), 주서 박일성(朴日省), 기사관 정태화(鄭太和)ㆍ윤구(尹坵)가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음으로 한 번 읽었다. 최혜길이 우공(禹貢) 양주장(揚州章)을 강하였는데, ‘회해유양주(淮海惟揚州)’에서 ‘진택지정(震澤底定)’까지 음으로 한 번 읽고 대문을 한 번 해석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대목을 음으로 한 번 읽고 대문을 한 번 해석하였다. 최혜길이 지의(旨義)를 강론하기를,
“양주(揚州)는 옛날 오(吳)나라 땅으로 천하의 동남(東南)에 위치합니다. 천문(天文)으로 말하면 두성(斗星)의 궤도(軌道)에 있는데, 가장 뛰어난 형승지지(形勝之地)입니다. 자고로 왕기(王氣)가 있어 오대(五代) 때에는 남조(南朝)가 되었고, 송(宋)나라 때에는 응천부(應天府)가 되어 남경(南京)이 되었습니다. 대개 진(秦)나라 때부터 왕기가 있다 하여 진시황(秦始皇)이 금(金)을 묻어 왕기를 누르고 - 몇 자 원문 빠짐 - 라고 하였는데, 혹은 말릉(秣陵)이라고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을 묻으면 왕기를 끊을 수가 있는가?”
하니, 나만갑이 아뢰기를,
“- 몇 자 원문 빠짐 - 신이 일찍이 평양(平壤)에 가서 보니, 영명사(永明寺) 아래에 금을 묻어 - 4, 5자 원문 빠짐 - 비록 무슨 일 때문에 묻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7, 8행 원문 빠짐 -
황하(黃河)가 터져 범람한 뒤에 장안(長安)에 인재가 없었습니다. - 몇 자 원문 빠짐 - 팽려(彭蠡)는 바로 서남(西南)의 대택(大澤)으로 일명 파양(鄱陽)이라고도 하고, 일명 궁정(窮庭)이라고도 하는데 - 4, 5자 원문 빠짐 - 오늘날에는 예장(豫章)과 남강(南康)의 물이 이 지역에서 합쳐져 - 몇 자 원문 빠짐 - 가 됩니다.”
하였다. 나만갑이 아뢰기를,
“강서(江西)는 바로 팽려의 소재지이니, 강동(江東)의 물도 팽려로 흘러든다면 그 크기를 알 만합니다. 강동의 물이 필시 장강(長江)을 끊고 와서 강서의 물과 서로 합하여 이 못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자, 최혜길이 아뢰기를,
“그 크기가 600리(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장강을 끊고 와서 합쳐질 이치가 있겠는가.”
하니, 나만갑이 아뢰기를,
“강동은 건너편에 있는데도 강동과 강서의 물이 서로 합쳐진다고 하니, 이로써 장강을 끊고 와서 합쳐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최혜길이 아뢰기를,
“기러기가 사는 곳이란 말은, 남방은 호수와 못이 많아 서식하기 알맞기 때문에 기러기 떼가 많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수재로 인한 근심이 이미 사라졌으므로 성인의 공덕이 조수(鳥獸)에까지 미친 것이니, 또한 여기에서 공덕이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택(震澤) 역시 큰 못이니, 둘레가 500리로 3만 6천 경(頃)입니다. ‘진(震)’이란 물이 요동치는 것을 형용한 이름입니다. 남방은 양지(陽地)인데도 음(陰)을 누르지 못하니, 이는 변이(變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수는 물을 머금어 담고 있는 곳인데 어찌하여 이렇듯 요동치는가?”
하니, 나만갑이 아뢰기를,
“수재로 인한 근심이 그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물길이 침범해 들어오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요동치는 것입니다. 치수(治水)가 된 뒤에는 수많은 물길이 각각 제 길을 따라 흐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 못 역시 안정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택’이란 이름은 필시 수재로 인한 근심이 생겨난 뒤에 이러한 이름을 가졌을 것이니, 분명 본명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큰 호수와 못이 있는가?”
하니, 나만갑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에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것들이 큰 못이지만 만약 중원(中原)의 호수와 못에 견준다면 영동의 못들이 어찌 크다고 하겠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나만갑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3대 연못은 제천(堤川)의 의림지(義林池), 함창(咸昌)의 공거지(公巨池), 연안(延安)의 남대지(南大池)입니다. 사면(四面)이 모두 수원(水源)에 닿아 있지 않은데 물이 어디에서 나와서 이렇게 큰 연못을 이루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홍서봉이 아뢰기를,
“경포(鏡浦)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큽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물이 해문(海門)과 통한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조수(潮水)가 드나듭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심열이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기민(飢民)을 진휼하는 일로 경기에 내려갔다 왔으니, 필시 백성들 일을 자세히 알 것이다. 보기에 어떠하던가?”
하니, - 반 행 원문 빠짐 -
“참상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초 신이 - 7, 8행 원문 빠짐 - 3승(升)을 나누어 주었더니, 백성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은혜를 입어 장차 - 몇 자 원문 빠짐 -’ 하였는데, 똑같이 나누어 주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이 갈 때에 들밥을 가져다가 보니, 모두 - 2자 원문 빠짐 - 이 섞여 있어서 곡기(穀氣)라고는 없었습니다. 송(宋)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이 오매초(烏昧草)를 올렸는데, 신은 그것이 무슨 풀인지 모릅니다만, 이번에 가서 보니 이 들밥이 실로 오매에 비길 만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곳곳이 다 그러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심(尤甚)한 곳은 양천(陽川), 통진(通津), 고양(高陽)이었는데, 서울과 가깝고 또 시초(柴草)가 많기 때문에 이것으로 식량을 살 수가 있어 백성들에게 약간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화(江華)는 8개 고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처음에는 지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전에 총융사(摠戎使)에게 들으니, 속오군(束伍軍)을 진휼할 때에 강화의 군사는 포함되지 못하여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서운하게 생각한다고 하였기에 신이 가지고 있던 포(布) 약간 동(同)을 가지고 2명당 1필(疋)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본부가 성책(成冊)한 기민의 숫자를 살펴보니, 1900명이었습니다. 교동(喬桐)의 기민은 진휼청(賑恤廳)에 납부할 곡식으로 연미정(燕尾亭)에 와 있는 것을 가지고 나누어 주도록 하였고, 그 나머지 서울에서 가까운 곳의 백성들은 서울에 와서 먹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이 기미년(1619, 광해군 11)에 비해서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시가(市價)는 기미년보다 나은데 민간의 기근은 더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가가 낫다면 백성의 기근이 어찌하여 기미년보다 심한가? 도로에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진(壬辰)ㆍ갑오(甲午) 연간에 보니, 도로에 쓰러져 죽은 자가 즐비하였는데 올해는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 모든 곡식이 다 타 들어가고 있던 차에 지난번에 비가 조금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파종하지 못한 곳이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분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파종하지 못한 곳이 많은 것이다. 이제는 절기가 늦어 파종하지 못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파종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맥(兩麥)이 비가 온 뒤에 조금 여물었다고 하는데, 비록 무성하지는 않더라도 평년(平年)에 비길 만은 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작년에 비해 나을 뿐만 아니라, 평년의 보리 작황에 비해서도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민이 오래도록 곡기를 입에 넣지 못하였으므로 필시 얼굴이 누렇게 떴을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이 부황(浮黃)이 들지는 않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 몇 자 원문 빠짐 - 부황이 든 자가 많았으나 그 나머지는 부황이 든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천(陽川)은 - 7, 8행 원문 빠짐 -
상이 이르기를,
“어부(漁夫)는 이미 - 5, 6자 원문 빠짐 -”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필시 다른 사람을 고립(雇立)하여 어부의 - 4, 5자 원문 빠짐 - 에 답하고 그 값을 거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거두었는가, 아직 거두지 않았는가?”
하니, - 5, 6자 원문 빠짐 -
“옛날에는 여력이 있어야만 어부에게 - 원문 빠짐 - 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봄가을에 다만 - 4, 5자 원문 빠짐 - 올해는 이처럼 흉년이 들었는데 고립인(雇立人)들에게 감봉(減俸)해 주지 않아서 - 4, 5자 원문 빠짐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본원(本院)에 말하여 변통하게 하라.”
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황해도가 가뭄이 심하여 감사가 진휼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계하였는데, 상사(上使) 김류(金瑬)가 본청(本廳)에 비축한 곡식이 없기 때문에 목(木)을 실어 보냈다고 합니다만, 평안도의 가뭄이 또한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가도(椵島)의 형세가 이와 같아서 등주(登州)의 미곡이 나오지 않고 있으니, 차후에 만약 미곡을 무역할 길이 끊기게 된다면 서로(西路)를 진휼하는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며칠 안에 하삼도(下三道)에서 진휼청에 납부하는 곡식이 많이 들어오니, 만약 이 곡식 천여 석(石)을 들여보낸다면 제때에 진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하 원문 빠짐 -
- 이상은 신여본에 의거함 -
조천항해록 제2권 /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2월
26일(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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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새벽녘에 길을 떠나려 하는데 노새의 주인들이 노새를 끌고 모두 도망쳤으므로 부득이 머무르게 되었다.
이는 대개 역관들의 농간이었으니, 사관에 있을 때에도 일이 완결된 지 오래인데도 저들의 사재(私財)를 매매하기 위하여 백 가지로 출발을 저지하였고, 마침내 간사한 꾀가 다하여 정상이 드러난 후에 마지못해 따라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신이 빨리 달려 멀리 가면 짐이 무거워 따라올 수 없으므로 노새의 주인에게 비밀히 연통하여 중도에서 달아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방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역관이란 천지 사이에 일종 괴물로서 사행(使行)이 서울을 떠나는 날에 문득 서로 속삭이기를, ‘북경에 가서 한탕 잘해 보자.’고 한다 하였는데, 이제 보니 과연 허황한 말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겨 온 지 200여 년에 해마다 조근(朝覲)하고 달마다 빙문(聘問)하여 예물이 길에 잇달았는데, 참으로 번번이 이와 같다면 어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사한 무리들이 드나들며 틈을 타서 구차히 비위를 맞춰 주었으므로 이 무리들이 습관이 되어 저희들 멋대로 자행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날 저녁에 사천(泗川) 성도부(成都府) 거인(擧人) 채여혜(蔡如蕙)와 한중(漢中) 향공(鄕貢) 장봉격(張鳳翮)ㆍ황노청(黃路淸) 등이 같은 숙소에서 유숙했으므로 접촉해 보니, 신유년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금년 2월 9일 회시(會試)를 보러 온 자였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글로써 통정을 할 도리밖에 없었다. 내가 먼저 글을 써서 묻기를,
“내가 북경에서 들으니 2월 28일 방방(放榜)한다 하였는데, 어찌 기다리지 않고 지레 돌아가오?”
하니, 대답하기를,
“아마도 합격할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다. 내가 또 글로써 묻기를,
“내가 일찍이 중국 과거의 문체(文體)를 보지 못했는데 공(公)이 지은 것을 보여 줄 수 없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난초(亂草)로 되어 있어 대인의 높은 안목에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어쩌면 세상의 물정이 이다지도 비슷한지 웃을 만한 일이었다. 채여혜가 다시 글을 써서 이르기를,
“연경(燕京)과 파촉(巴蜀)과 조선(朝鮮)이 모두 하늘 아래 연이은 땅이니 안팎을 논할 것이 없으며, 이제 선생의 단아한 풍채를 보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소생이 조만간 벼슬길이 열려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된다면 후일 다시 뵈옵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사해(四海) 사람이 모두 형제인데 이 역려(逆旅)에서 상봉한 것이 천재(千載)의 기우(奇遇)이며, 참으로 수재(秀才)의 말과 같이 후일 북경에서 거듭 만나게 된다면 오늘 저녁에 만난 것도 어찌 전생의 인연이 아니겠소.”
하고, 이에 시를 지어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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