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달자(大元㺚子)이다

2022. 9. 18. 12:15북경 추정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8월 4일 > 최종정보

인조 16 무인(1638) 8 4(갑오맑음

16-08-04[05] 우부승지 최유연 등이 입시하여 종신을 보내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박로가 아뢰기를,

“대개 막북(漠北)의 종족들은 모 이미 저들에게 귀속되었는데, 차하라(車河羅)의 태자는 사로잡혀 한(汗)의 사위가 되었으며, 북도에 있는 어파(魚波)와 달자()도 금년 4월에 전부 사로잡혀 왔는데 병력은 비록 패배당했다고 하나 조금도 기가 꺾인 모습은 없었습니다. 다만 여러 왕자의 의복과 거마(車馬)는 이전에 비해 너무 사치해져서 모두 매우 부귀하였고 출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으니, 통화(通貨)를 이롭게 여겨 중원(中原)과 강화하고자 한다 하니, 아마도 양국이 모두 전쟁을 괴롭게 여기는 듯하고, 천조(天朝)도 군대를 해산하여 변방의 백성을 휴식하게 했다고 합니다. …..

상이 이르기를,

“병력은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대체로 그들의 병력을 살펴보니, 몽고 지방에 깊숙이 있으면서 모두 땅을 나누어 왕으로 봉하고서 여러 왕의 딸로서 아내를 삼았으므로 황제의 딸도 몽고로 들어갔습니다. 요퇴(幺魋)의 딸이 소를 파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은 그 지역이 매우 불모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몽고를 대함이 이러했기 때문에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먼 지역의 병마(兵馬)라도 일시에 함께 모여 기한 내에 오지 않은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조(中朝)가 만약 화친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화친을 허락하더라도 전쟁은 한편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그 가운데 요퇴를 우두머리로 삼고자 한 자가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요퇴를 모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황제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항상 애호하고 있습니다. 호고발라(好古孛羅)는 황제의 장자(長子)이지만 비첩(婢妾)의 소생이기 때문에 태자에 봉해지지 못했으며, 전년에 태어난 자를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금년에 죽었으므로 세자가 아직 정해지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비록 황제지만 여러 왕들이 권력을 나누었으니, 훗날 다투어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화가 필시 없으리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일을 처리함은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사람 됨됨이가 사나운 짓을 하지 않고 여러 조카들을 잘 보살피는데, 귀영개(貴榮介)가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종족이라 일컬어지며 더욱 중망을 받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궁은 언제쯤 내보내겠는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저 사람들은 말하기를, ‘양국이 정성과 신의를 기필한다면 내보낼 수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 인조 16년 무인 > 8월 4일 > 최종정보

인조 16 무인(1638) 8 4(갑오)

16-08-04[02] 심양으로 가려는 빈객 박로를 인견하다

상이 묻기를,

“저 나라의 사정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저 나라는 지극히 형세가 커졌습니다. 막북(漠北)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그 나라에 귀속하였고 귀속하지 않은 곳은 다만 황하(黃河) 이북인데, 차하라[車河羅]의 태자가 【차하라는  서달(西부락의 이름이다. 한(汗)의 사위가 되었고 어피(魚皮)와 달자()도 전쟁하지 않고 귀속하였으니, 대저 그들의 위엄이 막북에 미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명나라도 또한 강화하고 기미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명조(明朝)에서 화친하려는 사신이 과연 나왔는데, 이는 바로 산해관(山海關) 군문(軍門)이 보낸 사람입니다. 소위 상사(上使)는 두 눈이 다 멀었으니, 모집에 응한 사람인 듯합니다. 청나라의 민심은 전쟁을 싫어하고 또 중국과 통화(通貨)하려고 하여 날마다 화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 청나라에서 말을 탄 사람 20명이 또한 중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저들의 여러 왕들이 패를 나누어 다투는 일이 많으니, 한(汗)이 죽으면 국가가 반드시 혼란될 것입니다. 호구(虎口)는 바로 한의 측실(側室) 아들인데 명위(名位)를 정하지 않았고, 또 14세의 아들이 있는데 측실 소생이기 때문에 사자(嗣子)로 삼지 못하니, 후일 반드시 서로 다투어 즉위(卽位)하려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효종실록 > 효종 6년 을미 > 4월 11일 > 최종정보

효종 6 을미(1655) 4 11(을축)

06-04-11[02] 반송사 허적이 돌아와 명과 청국의 실정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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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사(伴送使) 허적(許積)이 들어오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아역(衙譯) 김삼달(金三達)이 신에게 말하기를 ‘명나라 영력제(永曆帝)는 남경(南京)에 있다. 청나라 군사가 여러 번 사천(四川)을 범하였다가는 패하였는데 올해에 비로소 이길 수 있었고, 선부(宣府)ㆍ대동(大同)에서 떼도둑이 봉기하였으나 일찍이 3천의 군사를 써서 섬멸하였다. 매우 두려운 것은 몽고 군사가 날로 성하고 부락이 매우 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대원달자(大元)이다. 우리 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길은 몽고 땅과 멀지 않으므로 짐꾸러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36 집 10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조선왕조실록 > 현종개수실록 > 현종 > 5월 20일 > 최종정보

현종(개수실록) 15 갑인(1674) 5 20(계미)

15-05-20[01] 상이 고부사의 밀계를 김수흥에게 보이고 도제조 허적에게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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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사현합에 나아가 뜸치료를 받았는데 영의정 김수흥도 입시하여, 상이 고부사(告訃使)의 밀계(密啓)를 내보이고는 도제조 허적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상이 묻기를,

“이른바 태극달자(太極)라는 것이 어느 부락인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그건 바로 대원(大元)의 자손들인데 저들 스스로 병력이 강하다고 믿고 북경(北京)을 가볍게 보는 뜻이 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장계 내용으로 보면 오삼계가 자칭 정청 대장군(靖淸大將軍)이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이 도용한 명칭이 아니라 그렇게 추대되었음을 알 만한데도 우리 나라로서는 그 사실을 탐지할 수가 없어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현종개수실록 > 현종 > 10월 27일 > 최종정보

현종(개수실록) 13 임자(1672) 10 27(무진)

13-10-27[01] 사은  동지사인 창성군 이필ㆍ부사인 판윤 이정영이 청나라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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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 겸 동지사인 창성군 이필(昌城君李佖), 부사인 판윤 이정영(李正英), 서장관인 사예 강석창(姜碩昌)이 청나라에 갔다. 그 이듬해 봄에 환국하였는데, 그들의 문견사건에,

“몽고(蒙古) 기악온(奇握溫)의 후예가 군대와 말이 웅장(雄壯)하여 청인(淸人)이 두렵게 느끼고서 해마다 3백 6십만 금(金)을 실어다 주고 있으니, 명색은 속국이라고 하나, 실은 신복(臣服)하는 것이 아닌데, 근일에는, 대동지(大同地)를 떼어 주어 방목(放牧)하기를 요구하여, 장차 실랑이가 벌어지려는 형편이므로 한창 장수를 가려 군대를 조련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들의 형세가 조만간 아무래도 청나라의 절박한 해(害)가 될 것인데, 우리 나라의 걱정 또한 작지 않습니다. 지난 병오년 사은사 허적 등이 연경에 들어갔을 때 궐정(闕庭)에서 몽고 사신과 맞닥뜨렸는데, 역관으로 하여금 탐문을 하였더니, 답하기를 ‘우리 몽고는 지금 세 나라가 되었다. 하나는 항타안(項朶顔)이고 하나는 대타안(大朶顔)이고 하나는 산타안(山朶顔)이다. 그 밖에 국경과 근접한 부락은 모두 청나라에 속해 있다. 우리 항타안은 곧 대원(大元)의 후예이다. 비록 청나라에 귀부(歸附)하고 있으나 그래도 제호(帝號)가 있고, 대타안은 대국에 복종하여 몹시 친대(親待)를 받으며, 산타안은 군대가 강한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복종하는 일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북경(北京)은 우리 나라 소유인데 잃어버린 지가 지금 이미 수백년 째이다. 산타안은 쌍환달자(雙環)라고도 하는데 요새(要塞)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 스스로 지켜 나가고 있어, 비록 청나라의 위세로도 감히 가병(加兵)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38 집 127 면

【분류】 외교-야(野)

 

 

 > 조선왕조실록 > 경종실록 > 경종 즉위년 경자 > 9월 13일 > 최종정보

경종 즉위년 경자(1720) 9 13(정축)

00-09-13[01] 고부사 이이명 등이 심양에 다다라 연로의 소문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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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사(告訃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심양(瀋陽)에 다다라 연로(沿路)의 소문을 치계(馳啓)하기를,

“청(淸)나라 임금은 아직 열하(熱河)에 있고, 태자(太子)에 관한 일은 예전과 같으며 다른 소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연경(燕京) 지방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가옥이 무너지고 압사(壓死)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서정(西征)한 군병들은 주둔(駐屯)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서달(西)이 멀리 도망쳐 교전(交戰)은 하지 못했고, 병사자(病死者)가 속출(續出)한다 합니다.”

하였다.

【원전】 41 집 137 면

【분류】 외교-야(野)

[-D001] 서달(西) : 

서달자(西).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8년 임술 > 11월 24일 > 최종정보

숙종 8 임술(1682) 11 24(정묘)

08-11-24[03] 영창군 이침 등이 청국에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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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沈) 등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불러 보고 그 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부사(副使) 윤이제(尹以濟)가 말하기를,

“저들은 스스로, ‘남방(南方)은 이미 안정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태극 달자(太極)의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매번 황제와 함께 수렵할 것을 청하는데도, 청나라에서는 두려워하여 해마다 금(金) 3백 50만 냥을 주어서 때우고, 청나라 장수 장용방(張勇方)이 섬서(陝西)를 수비하며 꾀를 내어 묶어 두고 있는 까닭에, 아직 군사를 일으킬 일은 없으나, 이것이 복심(腹心)의 병통이 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몽고가 기세를 부리게 되면, 천하는 앞으로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다. 우리 나라라고 어떻게 유독 해를 입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겠느냐? 훗날의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윤이제가 말하기를,

“심양(瀋陽)의 성곽(城廓)은 온전하고, 인민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산해관(山海關)의 북쪽인 무령(撫寧)ㆍ영평(永平)ㆍ통주(通州) 등지는, 성곽과 읍사(邑舍)가 무너진 것들을 전연 그대로 버려두고 있었습니다. 북경(北京)의 성문(城門)과 태화전(太和殿)도 모두 무너져 있었으나, 수리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퇴각하여 수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까닭에, 관내(關內)의 여러 지역들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심양과 영고탑(寧古塔)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어, 근거지를 삼으려는듯이 보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남방을 평정하였다는 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대비 달자(大鼻)와도 군사를 서로 대치하고 있어, 태학사(太學士) 명주(明珠)의 아들을 보내어,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필코 무찔러 없애라.’고 하였다 합니다.

또 들으니, 청나라 황제가 곧 희봉구(喜烽口)에서 크게 사냥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북경을 출발하여 떠나려 할 때에, 세째 아우가 간(諫)하였지만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희봉(喜烽)은 곧 몽고 지방이므로, 그 속셈이 몽고에 군사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함인 듯합니다. 저들 나라가 근년에 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길거리에는 도적떼의 근심이 있어 사람들을 밤에 나다니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으며, 물가는 폭등하여 쌀이 귀하기가 금과 같고, 벼슬아치들의 탐풍(貪風)이 크게 유행하며, 사치(奢侈)하기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일선(李一善)도 말하기를, ‘눈앞에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가 곧 닥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흉년이 그 같은데, 탐욕이 풍속을 이루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꾸미는 문서(文書)마다 벌금만을 물리는 것으로 일삼는다면,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윤이제가 말하기를,

“지난날 예부 상서(禮部尙書)였던 분은 우리 나라 일이라면 모든 것을 크게 감싸주고 돌보아 주었는데, 근자에 액성격(額星格)이 상서가 되고서는 사람됨이 매우 까다롭고 세세하여, 이일선이 말하기를, ‘액성격이 예부에 오래 있게 되면 후일 일이 생길까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38 집 613 면

【분류】 외교-야(野)

[-D001] 태극 달자(太極) : 

몽고(蒙古) 추장(酋長)인 황태길(黃台吉)ㆍ청태길(靑台吉)을 이름.

[-D002] 태화전(太和殿) : 

청나라의 궁전.

[-D003] 대비 달자(大鼻) : 

악라사(卾羅斯). 곧 러시아를 이름.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9년 계해 > 3월 7일 > 최종정보

숙종 9 계해(1683) 3 7(기유)

09-03-07[01] 사은사 김석주 등이 청나라로부터 그쪽의 사정을 계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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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사(謝恩使) 김석주(金錫胄) 등이 청(淸)나라로부터 그쪽의 사정(事情)을 계문(啓聞)하였는데, 이르기를,

“청(淸)나라 임금이 남방(南方)을 평정(平定)한 뒤로는 교만하고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 유희(遊戱)로써 일을 삼으면서 천하(天下)가 이미 평정되었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섣달에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연회(宴會)를 열어 즐기기를 허락하였으므로, 각 아문(衙門)에서는 미리 봉인(封印)을 하여서 새해에는 사무를 폐지하는 것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미 오대산(五臺山)에서 유렵(遊獵)을 하였고, 또 장차 거용관(居庸關) 밖으로 사냥하려 나간다 합니다. 대비 달자(大鼻)들이 살고 있는 땅은 산이 높고 진흙 구덩이가 많은데, 오곡(五穀)은 심지 아니하고 다만 짐승을 날로 먹으며, 아울러 포(砲)와 창(槍)을 익히고 있다 합니다. 지난 가을에 대신(大臣)을 보내어서 초무(招撫)하였지마는, 황제(皇帝)의 교지(敎旨)를 지 아니하고 사나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 장차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討伐)하려고 합니다. 정금(鄭錦)은 대만(台灣)에 살고 있는데 병이 나서 일을 맡지 못하므로, 그의 아우 정현(鄭鉉)으로 하여금 대신 그 무리들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이름을 명사(明舍)로 고쳐 명(明)나라 조정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다 합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정금은 이미 죽었고, 그의 맏아들이 권력을 잡은 자에게 목매어 죽임을 당하였기에 그의 둘째 아들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 주국동(朱國棟)과 주세영(朱世英)이라는 자가 있으니, 모두 명(明)나라 조정(朝廷)의 후손(後孫)이라 일컬으면서, 바다의 섬에 웅거하여 출몰(出沒)하고 있는데, 군사의 세력이 모두 정금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전】 38 집 632 면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3년 정묘 > 3월 22일 > 최종정보

숙종 13 정묘(1687) 3 22(경자)

13-03-22[01] 돌아온 사은사 낭선군 우와 김덕원 등을 인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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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은사(謝恩使) 낭선군(郞善君) 우(俁)와 김덕원(金德遠)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김덕원이 아뢰기를,

“한인(漢人) 곽조서(郭朝瑞)가 오삼계(吳三桂)의 신하로서 주류하(周流河)에 유배(流配)되어 있기에, 신(臣)이 태극 달자(太)들의 소식을 물으니, 답하기를, ‘여기에 온 사자(使子)가 말하기를, 「섬서(陝西)와 산서(山西)는 원래 우리 땅이므로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기(武器)를 가지고 일을 해내겠다.」고 하므로, 황제(皇帝)가 성을 내고 또한 두려워하여 여러 곳에 있는 둔전(屯田)의 갑병(甲兵)을 이미 모두 철수시켜 각진(各鎭)으로 돌아왔고, 증원한 군사 8천 명은 아직 보내지 않고 남겨 두었으며, 땅을 갈라 주려고는 들지 않고서 단지 갖옷[裘]과 말[馬] 및 폐백(幣帛)만 더 주어 강화(講和)했는데, 이로 인해 드디어 사단이 이루어지게 될 듯하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원전】 39 집 97 면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28년 임오 > 3월 18일 > 최종정보

숙종 28 임오(1702) 3 18(기해)

28-03-18[03] 동지 정사 강현 등이 복명하여청나라의 사정에 대해 진달하다

[DCI]ITKC_JT_S0_A28_03A_18A_00030_2005_020_XML DCI복사 URL복사

동지 정사(冬至正使) 강현(姜鋧), 부사(副使) 이선부(李善溥), 서장관(書狀官) 박필명(朴弼明)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오랑캐[虜]의 사정을 물으니, 강현이 아뢰기를,

“신들이 그곳에 있을 때에 광동(廣東)과 호광(湖廣)에 토적(土賊)이 일어나 방금 군사를 출동했는데,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서북방의 몽고(蒙古) 태극 달자(太極)로서, 병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금과 비단으로 뇌물을 썼으나 그들의 환심을 사지 못한 듯하여, 일후(日後)의 근심은 오직 거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동쪽으로 순수(巡狩)한 사실에서 허실을 자세히 살펴야 했으므로 이른바 내각(內閣)의 진본(眞本) 문서를 사서 보니, 이는 경진년가을의 일이어서 별로 눈앞의 걱정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