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3. 22:55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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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6년 경신(1740) 6월 11일(경진) 맑음
16-06-11[27] 국청 대신 이하가 청대하여 죄인 박계순을 형신한 내용, 임인년 옥안에서 목호룡의 공초를 지워 버렸다고 한 부분의 처리와 옥안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 관학 유생의 상소를 중지하게 하는 일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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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경(初更)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국청 대신 이하가 청대하여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이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판의금부사 조현명(趙顯命), 지의금부사 김성응(金聖應), 동지의금부사 이익정(李益炡)ㆍ오원(吳瑗), 우부승지 송수형(宋秀衡), 장령 안경운(安慶運), 정언 한봉조(韓鳳朝), 가주서 김조윤(金朝潤), 편수관 서침(徐琛), 기사관 민수언(閔洙彦)이 입시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운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 탈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의 기후는 한결같이 편안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안하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 탈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지내고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죄인이 처음에는 혼미하여 지각이 없었는데 다시 형신(刑訊)하도록 올렸더니 기운이 살아났습니다. 조금 전에 이미 공초를 받아 올렸으니 틀림없이 보셨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시일이 길어지면서 간사한 계교가 점점 생겨나서 말이 무성하게 많아졌으니 이는 역옥(逆獄)과 달라서 결단코 차츰차츰 확대될 일이 아닙니다. 죄인이 ‘김해운(金海運)과 박계순(朴桂純)에게 들었다.’라고 한 것은 실로 믿을 것이 없고 또 핵심이 아니니 다시 잡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전히 생기가 있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매번 사주한 자를 물었는가?”
하니, 송인명이 이르기를,
“대략 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신 이후에 다짐(侤音)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형신 이후에 다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교대로 규정된 차수를 채워 형신하였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죄인의 기운이 막히지 않았으므로 자연 규정된 차수대로 형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형신 이후에 정신이 혼미하였는데 약물을 마신 뒤 정신을 차렸으니 우선 죽게 될 염려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괴이하다, 괴이하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다시 두세 차례 더 한다면 그가 어찌 죽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당상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일제히 대답하기를,
“소견이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죄인의 초사(招辭)를 읽으라.”
하니, 송수형이 나아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김해운이라는 자가 있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양반이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의금부 당상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김해운은 바로 김창석(金昌錫)의 얼속(孽屬)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장전(帳殿)에서 이미 하유하였다. 한 나라의 영의정을 모함하여 곧장 악역(惡逆)의 죄과로 몰아넣고자 한 것은 틀림없이 시골 사람의 말을 듣고 행한 일이 아니니 괴이하다, 괴이하다. 그렇다고 그가 ‘도신이 허락하였기 때문에 행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에 가깝지 않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계순의 일은 근원이 있을 듯하니 이러한 일은 엄격하게 조사하여야 한다. 그가 만일 시골 사람들과 행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사이에 혹여 곡절이 있는지 의심이 있었으므로 처음에 이를 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미 도신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으니 도신이 또한 어찌 애매모호한 상태에 있지 않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죄인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되지만 김해운을 잡아다 신문한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만 사사건건 확대되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한봉조가 아뢰기를,
“신들도 완의(完議)에 참석하였으니 소견이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안경운이 아뢰기를,
“죄인이 몹시 사악합니다. 형신 이후에 다짐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병이 있어서가 아닌 듯하니 그 뒤에 기색이 또렷해진 것은 먼 지방의 사람을 끌어들여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하고 싶어서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홍 감사(公洪監司)는 이미 후임을 차출하였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조영국(趙榮國)을 지난번에 이미 후임으로 차출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익정이 아뢰기를,
“죄인이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열거하여 죽기를 청하였는데 마지막에는 말을 바꿨으니 요망하고 악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와 같은 자들이 불령(不逞)한 무리를 모아서 이러한 일을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도신이 장계로 보고한 것이 괴이하다. 내가 직접 신문했던 것은 세도(世道)가 개탄스러웠기 때문이고 또 그 기회를 탄 것이 가슴 아파서였다. 그 후 본부로 하여금 형문하게 하였는데 그의 공초 가운데 ‘영상에게 미움을 받을까 두렵다.’라고 한 것은 수상하고 교묘하니 대체를 가지고 엄격하게 형문하여야 한다. 수촌(手寸)을 받고 더 형문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아니지만 각별히 더 형문하라. 왕자(王者)는 형벌을 신중히 시행하는 도리를 귀하게 여기지만 이는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 뒤로 난초(亂招)가 있으면 초기하지 말고 규례대로 형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공초하여 만일 조리가 있으면 김해운도 잡아다 신문하고 만일 지금 공초와 같을 뿐이라면 진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임인년(1722, 경종2)의 옥안을 상고해 내라는 명이 있어 신들이 옥안을 가져다 살펴보았더니, 정안(正案)에는 200자, 300자에 대해 ‘말이 부도(不道)함을 범하여 지워 버린다.’고 되어 있었고 초안에는 임인년 3월에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공초를 먹으로 지웠다고 하는데 지워 버린 곳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일 한 통을 다시 써서 ‘지워 버린다.[刪去]’는 글자까지 아울러 없앤다면 좋겠고 제목도 매우 좋지 않으니 그 옥안의 이름을 고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처음 한 권을 보았더니 의심스러운 것이 별로 없었으나 혹 무엇한 부분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다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 처음에는 쓰지 않았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쓰지 않은 것은 임인년의 옥사가 한창 진행될 때의 일이고 이는 옥안을 완성한 뒤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신년의 역옥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에 나의 분통이 가장 심하였으므로 박도창(朴道昌)의 옥사에 대한 처분이 지나친 듯하다. 그런데 지난해에 양찬규(梁纘揆)의 옥사의 경우는 나의 처분이 이미 정미하고 경들도 공정한 마음으로 행하였으니 역적 양찬규의 변란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이지만 그 일을 다스린 것이 지극히 정미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하들 중 새로 들어온 자가 있으므로 야대(夜對)를 행하여 글을 강론하고자 했었는데 도리어 이러한 이야기를 하여 대신하게 되었으니 가소롭다. 오늘 문득 생각해 보니 쉽게 처리할 방도가 있어서 경들이 국문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생각하여 처리하고자 했으니 정신이 흐릿하여 잘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에 상책은 목호룡을 형추(刑推)하는 것이고 하책은 영원히 기록하지 말거나 갖추어 기록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에 저위(儲位)를 사양하는 일까지 행했던 것은 심장이 떨리고 뼛속이 오싹하여 일이 어디에서 그칠 줄 몰라서였으니 임인년 이후의 조지(朝紙)를 내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은 마음에 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문안(文案)이 매우 많아서 중관(中官)이 항상 목간(木幹)으로 짊어지고 출입했었다. 내가 그 문안을 보지 않았으므로 누가 법대로 처형되고 누가 형장을 맞고 죽었는지 몰랐었는데 무신년에야 비로소 그 문안을 보았더니 내 마음의 분통이 더욱 사무쳤다.
원경하(元景夏)가 옥안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는 하나 만일 그것을 없앤다면 더욱 수상하고 또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니 이는 원경하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번안한다면 들어 있는 자가 번안에서 빠지더라도 글이 그대로 있으니 어쩌겠는가. 목호룡의 이름자는 실로 다시 제기하고 싶지 않으니 목호룡의 공초에 흉악한 말이 많이 있는데 이는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과 같은 맥락이니 읽어 가다 보면 내 마음이 오싹해진다. 이희지(李喜之)의 시와 김용택(金龍澤)의 검이 근거가 되었는데 검은 가소롭다. 그때에 세 당파가 각각 위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김용택의 검은 나를 위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결국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괴이하고 가소롭지 않겠는가. 이것을 미루어 보면 선비들은 오직 글을 짓고 행실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만일 옥안에서 이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또한 실정에 어두운 것이다. 왕자의 법이 지엄하니 옥안의 글이 여기에 있는 것이 어떠한가. 내가 반드시 효경(梟獍)과 불령으로 구분한 것이 지극히 정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워 버린 것이 이미 초안에 없으니 그렇다면 초안 가운데에 잘라져서 기록된 것이 몹시 괴이합니다. 잘린 부분을 잘라 없애고 붙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만 이른바 ‘역(逆)’을 다스릴 뿐이지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가리켜 ‘역’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입장을 바꾸어 처하였다면 모두 그리했을 것이니 나의 말이 정미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임인년의 일은 터무니없으니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애매한 자는 빼 버려야 하므로 정미년(1727)에 이미 다 빼 버려서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들이 난잡하게 공초한 것이 무수하였는데 팔도 사람이 모두 ‘역’이라고 하여 구제하고자 했던 자도 또한 그들을 불령한 무리로 여겨 감히 비호하지 못하여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이미 조지가 반포되었습니다. 당(黨)이든 역이든 간에 모두 애석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모두 중대한 형정(刑政)이니 만일 대강대강 한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사기 쉽습니다. 지난번 두 대신의 일과는 다르니 지금 만약 갑자기 바꾸어 고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쟁론할 것이니 아무리 조현명이라도 틀림없이 쟁론하려 할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데 또다시 일이 없는 가운데에 일이 생겨난다면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일 갈수록 더욱더 심해진다면 좌상(左相 김재로(金在魯))과 서로 다투는 단서가 될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지나친 거조를 행하신 것이 여러 번이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진정(鎭定)하는 방도를 참으로 조금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시경》에 ‘흰 규옥(圭玉)의 티는 그래도 깎아서 없앨 수 있지만 말을 한 번 잘못해서 생긴 오점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전하의 말씀 가운데 혹시라도 잘못이 있으면 인심이 화합하지 않게 되기 쉽습니다. 소신의 이러한 말은 당색을 좇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고심과 혈성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였다. 오원이 아뢰기를,
“옥안을 없애서는 안 된다는 성상의 말씀이 몹시 지당하십니다. 원경하가 항상 ‘역적 목호룡의 흉서(凶書)와 흉초(凶招)는 하루도 세상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처음에 이처럼 극도로 흉악한 말이 없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나 이미 있는데 지금 도리어 없애 버린다면 훗날 흉인의 무리가 현혹하려는 단서가 없으리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신은 항상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이 ‘김용택과 이천기(李天紀)를 구제하려는 자더라도 불령한 무리로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하들이 진달한 것이 어찌 이천기와 김용택을 구제하고자 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또한 어찌 이 사람을 비호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역적 목호룡의 흉서와 흉초를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 국청의 좌기 때에 대신이 살펴본 뒤에 신이 몇 장을 대략 볼 수 있었으니 ‘말이 부도함을 범하여 지워 버린다.’고 한 것이 여러 군데였습니다. 그 끝에 200여 자를 ‘말이 부도함을 범하여 지워 버린다.’고 하는데 그 아래에 바로 ‘고변하기를……’이라는 말로 이어져 있었으니 읽어 갈수록 분통이 가슴속에 가득 차서 차마 다시 보지 못하였습니다. 역적 목호룡의 극도의 흉악함은 만고에 없던 흉역(凶逆)인데 그 흉초에 나온 사람이 비록 한두 사람이더라도 그대로 옥안에 두고 역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흉초를 오히려 사실이라 여길 것입니다. 대신이 역안(逆案)의 ‘삼수’라는 제목을 고칠 것을 청한 것은 너무나 허술하니 그 옥안이 거짓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제목만 고친다면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니, 안경운이 이르기를,
“임인년의 옥안은 신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금 전 성상의 하교를 가지고 말해 보자면 김용택의 검이 이미 성상을 위한 일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신하들이 진달한 것을 들어 보니 김용택도 승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용택이 승복할 때에 성상을 위한 검도 승복하는 가운데에 들어간 것이니 이 한 가지 일에 근거하여 그것이 무옥(誣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것이 무옥인 줄을 안다면 당시에 복주(伏誅)된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은 원통하다.’거나 ‘어떤 사람은 원통하지 않다.’거나 ‘이 사람은 가련하다.’거나 ‘저 사람은 가련하지 않다.’고 해서는 결단코 안 되니, 대개 임인년의 옥사는 ‘무(誣)’ 한 글자 외에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송수형이 아뢰기를,
“지워 버렸다고 쓰여 있는 것은 애초에 지워 버리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고 지금 한 통을 다시 쓰는 것도 보탬이 되는 것이 없으니 반드시 그 가운데 곡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한봉조가 아뢰기를,
“지금 없애더라도 뒤에 무슨 말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송인명에게 이르기를,
“경의 말은 진정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경에게도 어떤 의도가 있으므로 여전히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 대체가 옳지 못한 점이 있으니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 ‘어버이와 임금을 위하여 숨기는 것은 신하와 자식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군신간의 의리를 깊이 터득한 것이다. 조금 전 주강 때에 하교하려고 했었는데 하지 않았으니 기유년(1729)에 이미 처분하였는데 지금 만약 시원하게 처분하고자 한다면 목호룡을 열 번 주벌하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을 것이다.
김용택과 이천기 무리의 경우에는 지난날에는 ‘형편없다.’라고 한 자가 있다고 한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오원이 홀로 ‘구제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가상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깨끗하게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또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면치 못한 것이다. 지난번 원경하가 ‘대체를 살펴 행하여야 합니다.’라고 한 것이 옳다만 또한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에 시일을 끌어 이에 이르러서 지난번 아들과 손자에 관한 하교를 하였으니 어찌 구차하지 않은가. 세 당파가 각각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면 효경의 무리일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일로 몇 번이나 간곡하게 하유하였는가. 지난번 처분한 뒤에 경들이 여전히 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지나친 거조를 행하기까지 한 것이니 반드시 이를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라.
이시필(李時弼)과 채광하(蔡光夏)의 무리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여 단지 자기 재주를 과시하기만 할 뿐이었는데도 그 속에 들어 있으니 또한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국안(鞫案)을 반드시 ‘삼수(三手)’ 두 글자로 명명한 것은 또 무슨 마음인가. 이는 역적 김일경의 교문의 장본(張本)이다. 황형(皇兄 경종)의 지극한 인과 성대한 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에 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단지 ‘삼수’ 두 글자를 없애고자 할 뿐이니 임인년의 역안은 오늘날의 조정에서 다시는 제기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목호룡도 그 마음이 아니라 결탁하여 일을 행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불령한 무리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그 옥안을 두었겠는가. 목호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불령한 무리가 서로 모여 악행을 저질러 무신년의 변란을 초래하였으니 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자이겠는가. 나의 생각은 이와 같을 뿐이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실로 급히 행하여야 할 필요가 없으니 유보해 두고 신하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경의 말은 고심에서 나왔으나 조금 전에 헌신(憲臣)이 ‘무(誣)’ 한 글자를 말하였으니 이에 대해 쟁집하는 자가 많이 있을 듯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역적 목호룡의 흉언은 실로 엄격하게 토죄하는 것이 마땅하나 불령한 무리를 모두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에 와서 다투는 것은 잘못이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 이정보(李鼎輔)가 와서 신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여 심지를 통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한바탕 서로 다투다가 마지막에는 서로 웃으면서 마쳤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평소 하는 말 중에 ‘명쾌하게 말하는 것은 좋으니 그렇지 않으면 피차간에 막히는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경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부족한 듯하니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만일 여기에 당색을 좇는 마음이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있다면 하늘이 틀림없이 죽일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끝내 경솔하게 행해서는 안 되니 풍원군(豐原君 조현명)과 물러나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학 유생의 상소가 이를 것이라고 하니 확실한가? 이른바 사문의 다툼이 예설(禮說)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는데 이번 효묘(孝廟)에 시호를 가상(加上)하는 날을 틈타서 자신의 사심을 이루고자 하니 어찌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선조(先朝 숙종) 때에 존호를 올리는 날에 한 중관이 밖에서 와서 ‘국가에 장차 다시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선조께서 바로 엄격하게 처분하셨는데, 그 뒤에 들어 보니 그 중관은 바로 박상검(朴尙儉)의 할아버지였다. 선조의 감식안이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내가 효묘께 융성함을 극진히 하는 것은 오로지 중히 여기는 바에 생각이 있어서인데, 이응(李膺)과 같은 자가 도리어 여기에 빙자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려 하였으니 만약 경들이 선조를 위하여 칭송할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대의 선조의 공렬은 바로 그 친구의 공이다.’라고 한다면 경의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 것이다.’는 말이 있다고 하니, 또한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훌륭한 임금이 있고 훌륭한 신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 비록 서로 필요로 하는 이치가 있지만 우리 성조(聖祖)와 선정신은 소열제(昭烈帝)와 제갈량(諸葛亮)의 관계와는 다르다. 소열제에게 제갈량이 없었으면 큰일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우리 성조께서는 대의를 드날리려는 뜻을 심양관(瀋陽館)에 계시던 날에 이미 정하셨으니 어찌 선정신의 도움이 꼭 필요했겠는가. 이응의 상소는 너무나 터무니없다. 나는 선조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감히 이를 빙자하여 청을 하니 당습을 철저히 제거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관학 유생의 상소는 마땅히 중지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조용히 처리할 뿐이지 어찌 언성과 기색을 높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언성과 기색을 높이는 것이 아니니, 조용히 처리하도록 하겠다만 상소는 중지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인이 물고(物故) 난 뒤에는 철교(鐵橋) 아래에서 검시하여 내보내고 큰길을 지나게 하지 말라. 책보(冊寶)를 봉진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길을 깨끗하게 하고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안경운이 아뢰기를, 上曰, 罪人物故後, 從鐵橋下檢屍以出之, 勿令過大路。冊寶封進不遠, 事當淸道以待矣。
“역적 이탄(李坦)의 처자식을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일을 모두 의금부 초기대로 즉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태적(南泰績)을 참작하여 처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이어서 국청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여 통쾌히 왕법대로 처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주-D001] 죄인 :
박동준(朴東峻)을 가리킨다. 그는 이해 5월 19일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버지를 왕자 산맥(王字山脈)에 묻고 누설하지 말도록 했다며 공홍 감사(公洪監司) 김성운(金聖運)에게 고발했는데 김성운이 이를 계문하였다. 영조는 삼사의 신하들이 박동준과 부화뇌동하여 이광좌를 무함한다고 여겨 그를 붙잡아 친국(親鞫)하였다. 《承政院日記 16年 5月 19日》
[주-D002] 박계순(朴桂純) :
원문은 ‘朴繼淳’이다.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및 《승정원일기》 이해 5월 23일 정사 기사 등에 근거하여 ‘繼淳’을 ‘桂純’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의 ‘박계순’도 동일하다.
[주-D003] 그때 …… 하유하였다 :
이해 5월 19일에 삼사에서 합계하여 신축년(1721, 경종1) 이후에는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의 심복으로, 정미년(1727, 영조3) 이후에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영의정 이광좌를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마침 공홍 감사 김성운의 장계가 올라오자 영조는 삼사의 신하들이 자신의 처분에 대해 불만을 갖고 박동준과 안팎으로 부화뇌동하여 자신을 조롱한다고 하면서 유척기(兪拓基)를 특별히 체차하고 삼사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英祖實錄 16年 5月 19日》
[주-D004] 조영국(趙榮國)을 …… 차출하였습니다 :
이해 5월 26일에 조영국을 공홍 감사에 제수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6年 5月 26日》
[주-D005] 박도창(朴道昌)의 옥사 :
1730년(영조6) 3월에 궁녀 순정(順正), 세정(世貞) 등이 세자와 옹주를 저주하여 뼛가루를 궁궐에 묻은 일이 있었는데, 군관 박도창이 주범으로 붙잡혀 형신을 받다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일로 종실인 여흥군(驪興君) 이해(李垓), 여릉군(驪陵君) 이기(李圻) 및 정사효(鄭思孝) 등의 남인계 인사가 연좌되어 화를 당했다. 《英祖實錄 6年 3月 12日ㆍ18日, 4月 26日》
[주-D006] 양찬규(梁纘揆)의 옥사 :
1739년(영조15) 9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양찬규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집을 찾아가 고장(告狀)을 가지고 온 일이 있자 예사롭지 않게 여긴 김주신의 집에서 포도청에 알려 그를 붙잡았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고장과 〈감고원몽(感故園夢)〉이라는 부(賦)가 나왔다. 그 내용이 스스로 왕자(王子)라고 칭하는 등 음험하고 기괴하여 국문하고 법대로 처형하였다. 《英祖實錄 15年 9月 16日, 17日》
[주-D007] 내가 …… 일 :
1722년(경종2)에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가 목호룡의 초사의 말단에 자신에 대한 악명(惡名)이 있다고 하면서 왕세제의 자리를 사양한 일을 가리킨다. 《景宗實錄 2年 3月 27日, 29日》
[주-D008]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 :
1722년(경종2) 9월에 김일경이 홍문관 제학으로서 지어 올린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말한다. 《景宗實錄 2年 9月 21日》
[주-D009] 이희지(李喜之)의 시 :
〈차백우낙조운(次伯雨落照韻)〉을 가리킨다. 목호룡이 1717년(숙종43)에 이희지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제 절반이나 떨어진 해를 어찌할 수가 없구나.”라는 내용의 시를 읊어 주었다고 하면서 숙종의 병환이 위중한 것을 빗대어 지은 시라고 주장하였다. 《景宗實錄 2年 4月 17日》 《凝齋集 次伯雨落照韻》
[주-D010] 김용택(金龍澤)의 검 :
목호룡의 고변 내용에 삼급수(三急手) 중의 첫 번째 방법인 대급수(大急手) 즉 자객을 궁중으로 들여보내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김용택이 백망(白望)에게 주었다는 보검을 말한다. 《景宗實錄 2年 3月 27日》
[주-D011] 연명으로 올린 차자 :
1721년(경종1) 10월 10일에 경종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리자 노론과 소론 모두 그 명을 거두도록 정청(庭請)하였는데, 17일에 이를 정지하고서 이건명(李健命),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가 연명으로 대리청정의 명을 받들겠다고 올린 차자를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景宗 1年 10月 10日, 17日》
[주-D012] 두 대신의 일 :
두 대신은 김창집과 이이명을 가리킨다. 이해 1월 10일에 이들이 복관(復官)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承政院日記 英祖 16年 1月 10日》
[주-D013] 목호룡 :
원문은 ‘虎虎’이다. ‘逆虎’ 또는 ‘虎龍’의 오류로 보고 ‘목호룡’으로 번역하였다.
[주-D014] 지난번 …… 않은가 :
1729년(영조5) 8월 18일에 이건명과 조태채에 대해 복관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들의 이름과 아들과 손자가 역적의 공초에 무수하게 나와 거론할 수 없으니 이전대로 추탈(追奪)하라.”라고 하교하였다. 여기서 아들과 손자란 이이명의 아들인 이기지(李器之)와 김창집의 손자인 김성행(金省行)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英祖 5年 8月 18日》
[주-D015] 이시필(李時弼)과 채광하(蔡光夏)의 무리 :
1723년(경종3)에 의관 이시필이 경종의 약을 의논할 때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자 다른 침의(鍼醫)들과 말다툼을 하다가 비속한 말로 욕을 하였는데, 침의들은 그가 임금을 범하는 부도한 말을 꾸몄다고 하였다. 결국 그 말의 출처가 침의들이었음이 밝혀져 침의 채광하 등이 모두 국청에 끌려갔다. 이시필은 제주로 귀양 갔다가 자살하였는데, 이후 영조는 그를 특별히 신원해주었다. 《景宗實錄 3年 8月 5日》 《承政院日記 英祖 2年 10月 14日, 8年 8月 20日》
[주-D016] 박상검(朴尙儉) :
경종 때의 환관으로 왕세제인 연잉군(延礽君)을 시해하려고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으며 그의 가산은 적몰(籍沒)되었다. 《景宗修正實錄 1年 12月 22日》 《承政院日記 景宗 2年 1月 6日, 7日》
[주-D017] 이응(李膺)과 …… 하였으니 :
이달 10일에 이응이 상소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貞公) 김익희(金益熙)를 효종의 묘정에 추가로 배향하기를 청한 일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英祖 16年 6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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