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집의 노비가 서울에 3백여 명 있고 시골에 또 수천 명이나 있으니

2022. 11. 21. 21:19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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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별집 2 / 계사(啓辭)

기해일

 

○ 비변사 낭청이 도체찰사의 뜻으로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임해군(臨海君) 집의 노비(奴婢)가 서울에 3백여 명이나 있고 시골에 있는 것은 또 수천 명이나 있으니, 이들을 각사(各司)에 분속(分屬)시켜 놓으면, 아문의 허다한 수요가 이 때문에 넉넉해져서 유익함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들으니, 이들을 모조리 사섬시(司贍寺)에 몰수(沒收)시키면 국계(國計)가 또한 이 때문에 넉넉해져서 유익함이 또한 많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뜻에는 이 두 가지 처치가 똑같이 모두 타당치 못하다고 여기는데, 그 타당치 못한 까닭에 대해서는 지금은 우선 변론하지 않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신으로 하여금 이들을 처리해서 북병(北兵)과 바꾸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으뜸 가는 계책이라고 여깁니다. 북쪽 변방에 두려운 일이 많아짐으로부터 조정에서 동ㆍ서ㆍ남(東西南) 삼로(三路)의 군사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해마다 북쪽을 방수(防戍)하게 함으로 인해, 먼 바닷가로부터 일어나서 길을 떠나는 자는 양식을 싸 가지고 가고 집에 있는 자는 그를 전송하곤 하느라, 북쪽 오랑캐들은 한창 편히 자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지친 상태가 되어 버리니, 이는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이미 내노(內奴)들을 조직하여 군대로 삼고 그들 신공(身貢)의 징납을 면제해 주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매우 훌륭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오직 사대부(士大夫)의 사천(私賤)들은 아무런 요령이 없으므로, 설령 신공의 면제를 허락했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는 노주(奴主) 사이의 구분이 이미 엄격하니, 누가 감히 공(公)에 의탁하여 신공을 바치지 않아서 후일의 책망을 남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천이 된 자들은 한 몸에 두 가지 짐을 지게 되니, 명칭은 비록 군사가 되었다 하나 실상은 군사가 아닙니다.

요즘에 북쪽의 일을 잘 아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천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관(官)에 몰입(沒入)시켜 정군(正軍)으로 만들면 수천 명의 정병(精兵)을 하루 아침에 소유할 수 있으니, 북쪽을 방비하는 계책은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이것이 지금의 가장 제일 가는 요무(要務)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뜻이 머뭇거리며 감히 발언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나라의 사천들은 고조(高祖)ㆍ증조(曾祖)로부터 서로 전해 와서 명분이 이미 엄격하고 정의(情義)가 이미 익숙해졌으므로 이 법이 한번 문란해지면 인정이 온편치 않아서 일을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행한 일로 인하여 다행히 수천 명이나 되는 속공 인구(屬公人口)를 얻었으니, 이 틈에 해관(該官)에게 신칙하여 경외(京外)의 노수(奴數)를 상세히 조사해서 분명하게 한 대장을 만들게 하고,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분명한 재국(才局) 있는 관원을 뽑아 북도(北道)에 보내서 감사(監司)와 회동하여 사천들을 쇄출(刷出)한 다음, 본주(本主)들로 하여금 첩장(牒狀)을 올려 스스로 이들의 직첩(職帖)을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말하게 하여 이들을 영원히 정군(正軍)으로 정해서 자손(子孫)에까지 미쳐 가게 하도록 하고, 경노(京奴) 1인당 값이 북노(北奴) 수구(數口)와 맞먹게 하여 이것을 참량(參量)해서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든다면 2천 명의 노(奴)로 3, 4천 명의 군사를 충분히 이룸으로써 유익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우선 모읍(某邑)으로부터 그 북쪽을 한계로 삼아서 먼저 바꾸어 정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부족하다면 또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난리를 겪은 이후로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로서 문서에 누락된 자가 과반수나 되는데, 각관(各官)에서는 이들을 액외 노비(額外奴婢)라 칭하여 별도로 한 대장을 만들어 놓고 사적으로 그들의 신공(身貢)을 징수하여 관아 내부의 용도로 쓰고 있으니, 이는 극히 무리한 일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이들을 일일이 쇄출하여 부족한 숫자를 채워 가면서 착실히 시행한다면 수년을 넘지 않아서 북로(北路)가 장차 전부 다 군대가 될 것이니, 그 수토(水土)에 익숙치 못한 채 천리 멀리 집을 떠나가서 방수(防戍)하게 되는 남방의 약한 군졸보다는 공(功)이 만 배나 될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을 갑자기 들은 사람들은 반드시 크게 놀라서 서로 다투어 온당치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대 처치(處置)를 하지 않으면 서북 지방은 끝내 우리 국가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 한 가지 일을 위하여 혼자 스스로 헤아려 본 다음 편지를 왕복해서 본도(本道)와 의논을 통한 지가 이미 상당한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부신(府臣)이 논한 가운데 말단(末端)의 한 조항은 마침 신의 생각과 합치하는데, 다만 대소(大小)와 소밀(疏密)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기(事機)가 서로 회합되었으므로 감히 이렇게 진계(陳啓)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