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3. 23:21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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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8년 정유(1477) 윤 2월 10일(무신)
08-윤02-10[01] 선군의 대우, 하삼도의 축성, 경상도의 군량 비축, 중국 물건의 무역 금지 등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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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미치자, 대사간(大司諫) 이약동(李約東)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도 처치사(慶尙道處置使)가 되었었는데, 군사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자는 선군(船軍)입니다. 선군은 매양 한 달[一朔]마다 서로 교체(交遞)하므로, 한달 사이에서 왕복(往復)하는 것을 체하고 그 나머지 한가한 날이 8.9일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수령(守令)이 또 뒤쫓아서 이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가난한 자는 유망(流亡)하고 부자는 피하기를 꾀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선군들이 그 역(役)에 오래 종사하여 배[船]를 다루는 데 익숙한 자가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는 선군의 전지(田地)는 사람들이 매매(買賣)할 수 없고, 수령이 부호(扶護)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었는데, 지금은 이런 영(令)이 없기 때문에, 〈선군들이〉 유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한 사람을 정하고 내일 한 사람을 정하니, 사람들이 그 역에 오랫동안 종사하는 자가 없으며, 또 수호(首戶)한 사람이 독자(獨自)로 입번(立番)하여 그 업(業)을 오로지하게 하나, 그 사람이 죽으면 뒤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동거(同居)하는 자식(子息)과 고공(雇工)은 다른 역을 정하지 말고, 다시 서로 체대(遞代)하여 입역(立役)하게 하면, 수호(首戶)는 어깨를 펴고 쉴 수 있고, 물에 익숙한 자도 또한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어떠한가?”
하니, 조석문(曹錫文)은 아뢰기를,
“이약동의 말이 옳습니다. 국가에서 선군(船軍)을 두고 대우하기를 심히 우대(優待)하여, 옛날에는 선군으로 벼슬이 가선(嘉善)에 이른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신고(身苦)가 전에 비하여 배(倍)나 되는데도 애호(愛護)하지 않으니, 어느 누가 소속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저들은 모두 물의 성질[水性]을 익히지 아니하여, 평시(平時)를 당해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면 신기(神氣)가 황홀(怳惚)하여 동서(東西)를 판별하지 못하니, 어찌 배를 다루어서 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수령(守令)이 선군을 구휼(救恤)하지 않는 자는 파출(罷黜)하는 법이 이미 세워졌으나, 만호(萬戶)는 변방에 기거(寄居)하고, 오직 수령에게만 의지하니, 누가 능히 거핵(擧劾)하겠습니까? 단지 이것만이 아닙니다. 전선(戰船)이 여러 가지 기구가 매우 많은데, 선군이 단약(單弱)해서 전혀 갖추지를 못했으니, 갑자기 〈적변의〉 경계(警戒)가 있으면 어떻게 이를 쓰겠습니까?
또 우리 나라의 방어는 남방(南方)보다 중함이 없는데, 남방의 읍성(邑城)이 견고하지 못하고, 우리 나라가 승평(昇平)한 지 1백 년이 되니, 만약에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게 되면 이를 방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연해(沿海)의 군(郡)에는 모두 성(城)이 있지만, 내지(內地)에는 성이 없어서, 왜적(倭賊)이 만약 성이 없는 길을 경유하여 틈을 타서 내군(內郡)으로 들어오게 되면, 화(禍)의 발생이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하삼도(下三道)의 주군(州郡)에 모두 성을 쌓아야만 마땅합니다. 지난 갑술년에 경상도 백성의 와언(訛言)에 ‘왜변(倭變)이 있을 것이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으니, 그 당시에 만약 성이 있었다면, 모두 성중(城中)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아뢰기를,
“신이 세조조(世祖朝) 때에 나주성(羅州城)을 쌓도록 청하였는데, 이연손(李延孫)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폐단을 진달(陳達)하여 이를 정지 하였다가, 신이 다시 청론(請論)한 연후에 쌓았습니다. 무릇 성을 쌓는 것이 방어(防禦)의 대계(大計)인데,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된 자가 일시의 폐단만 따지고 먼 장래에 대한 생각[遠慮]을 돌보지 아니하여, 문득 그 불가(不可)함을 말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그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그 고을[邑]의 대소(大小)에 알맞게 각자 수축(修築)하게 하면, 거의 가(可)할 것입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왜적(倭賊)이 깊숙이 들어와 겁탈을 하며 곧바로 한강(漢江)까지 이르고, 혹은 갑자기 개성(開城)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곽(城郭)이 없었던 소치입니다. 만약에 전라도가 적로(賊路)의 요해(要害)인데도 왜적의 방비가 좀 늦추어졌다고 한다면, 경상도는 왜로(倭路)의 요충(要衝)에 해당하고, 삼포(三浦)의 왜(倭) 또한 국가에서 염려해야 할 바입니다. 만약에 적왜(賊倭)가 변경을 범하면, 이 무리들이 향도(鄕導)가 되어서 중심부[腹中]로 끌어들일지 알 수 없으며, 우리 나라에 만약 변(變)이 있으면, 이 무리들이 틈을 타서 난(亂)을 일으킬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성은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영유(金永濡)는 아뢰기를,
“경상도는 왜노(倭奴)가 왕래하는 땅이 되는데, 양곡(糧穀)의 저축이 많지 않으므로, 만약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같은 것이 있게 되면, 한 현(縣)에서 사졸(士卒)이 하룻동안 먹을 것도 판비(辦備)할 수 없으니, 다른 도(道)의 주창(州倉)의 세(稅)를 서울로 운송하고, 경상도의 세(稅)는 전부 주창으로 들여서, 〈군량의〉 저축을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대창(大倉)의 곡식을 백만억(百萬億)에 이르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곧 대창을 증수(增修)하겠는데, 이 일을 마땅히 여러 정승(政丞)에게 의논하겠다.”
하였다. 김영유(金永濡)가 아뢰기를,
“지금 호부(豪富)의 집에서 청화기(靑畫器)를 다투어 쓰는데, 중국의 물건[唐物]은 저절로 올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수송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 폐단이 작지 않으니, 청컨대 엄히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물건을 무역하지 못하도록 일찍이 이미 법을 세웠으니, 그것을 거듭 밝히라.”
하였다.
【원전】 9 집 426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토지매매(土地賣買)
[주-D001] 거핵(擧劾) :
잘못을 들어 탄핵함.
[주-D002] 갑술년 :
1454 단종 2년.
[주-D003] 호부(豪富) :
세력이 있는 부자.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4년 계사 > 6월 3일 > 최종정보
성종 4년 계사(1473) 6월 3일(임술)
04-06-03[03] 용산강의 하류를 개착할지 여부를 순심하여 보고하게 하다
[DCI]ITKC_JT_I0_A04_06A_03A_00030_2005_004_XML DCI복사 URL복사
전지(傳旨)하기를,
“용산강(龍山江)에 대창(大倉)을 설치한 것은 조운(漕運)에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큰물[大水]로 인하여 용산강의 하류에 모래가 쌓이고 수심(水深)이 얕아져서 선박이 상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漕船)이 서강(西江)에 정박(碇泊)하고, 조운한 미곡(米穀)을 수레를 사용하여 실어 들이게 되니, 어찌 대창(大倉)을 설치한 본의(本意)이겠느냐? 근자(近者)에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각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강(江)을〉 개착(開鑿)하고자 하는 자가 많으나, 힘이 모자라서 중지시켰다. 원상(院相)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개착의 편부(便否)를 순심(巡審)하여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16년 을사 > 4월 18일 > 최종정보
성종 16년 을사(1485) 4월 18일(기사)
16-04-18[04] 용산강의 물길을 모래를 파내어 예전의 방향으로 인도하기로 하다
[DCI]ITKC_JT_I0_A16_04A_18A_00040_2005_023_XML DCI복사 URL복사
한명회(韓明澮)와 홍응(洪應)ㆍ정괄(鄭佸)ㆍ이덕량(李德良)이 용산강(龍山江)의 모래가 메워진 곳에 가서 모래를 파낼 편부(便否)를 조사하고, 그림을 그려서 아뢰기를,
“용산강의 모래가 메워진 곳은 역사(役事)가 어려워서 결코 〈모래를〉 파내어 물길을 뚫을 수 없고, 그 다음으로 할 만한 것은 산 밑의 여울[灘]에 돌을 쌓아 막는다면, 수세(水勢)가 반드시 예전의 물길로 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역(功役)이 또한 중(重)하여서 쉽게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강변(江邊)의 거민(居民)인 한 노인(老人)이 말하기를, ‘만약 크게 거사(擧事)할 수 없으면, 먼저 여울 목[灘項]의 사석(沙石)이 메워져 막힌 곳을 파서 수세(水勢)를 인도하면 가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공역이 덜 들어 할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돌을 쌓아 물을 막는 것은 공역이 가볍지 아니하여 할 수 없으니, 대창(大倉)을 다른 곳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다른 데는 옮길 만한 곳이 없고 옮기는 공역(功役)도 크니,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두 강(江)의 인부(人夫)를 써서 〈모래를〉 파내어 물길을 인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6년 을미 > 5월 13일 > 최종정보
성종 6년 을미(1475) 5월 13일(신유)
06-05-13[01] 사헌부 대사헌 이서장 등이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방도에 관하여 상소하다
1. 《예기(禮記)》의 봄ㆍ여름 월령(月令)을 살펴보건대 ‘토공(土功)을 일으키지 말고 대중을 징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가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성인(聖人)은 음양(陰陽)을 봉순(奉順)하고 천지를 본받아서, 부역 때문에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므로, 바람ㆍ비가 순조로와서 재변이 일어나지 않으나, 그 부역의 정사(政事)가 도리를 어기고 과중하게 부려서 백성의 힘이 지쳐 양기(養氣)가 요동하면 나라에 큰물이나 가뭄의 재변이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대창(大倉)을 10여 년 동안 영선(營繕)하였고, 경회루(慶會樓)는 지난해에 시작하여 이제까지 끝나지 않았는데, 그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하며, 회암사(檜巖寺)ㆍ용문사(龍門寺) 등을 동시에 중창(重創)하여 천재(天財)를 쓰고 민력(民力)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심하니, 성인이 음양을 봉순하고 농사철을 어기지 않는 뜻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신 등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긴급하지 않은 일을 일체 정지시키소서. 그러면 양기가 동요하지 않아서 재변이 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조 9년 계미(1463) 5월 21일(기유)
09-05-21[01] 군자감의 대창이 완성되다
[DCI]ITKC_JT_G0_A09_05A_21A_00010_2005_007_XML DCI복사 URL복사
군자감(軍資監)의 대창(大倉)이 낙성되었다. 이 앞서 국가(國家)의 축적(畜積)이 너무 많아서 창름(倉廩)에 용납할 수 없어, 명하여 군자감(軍資監)에서 앞서 철거(撤去)한 인가(人家)를 좌우로 나누어 대창(大倉)을 영조하게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석문(曹錫文)ㆍ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김개(金漑)ㆍ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ㆍ행 호군(行護軍) 강로(姜老) 등에게 그 일을 감독하고 독촉하게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낙성을 고하였다.
【원전】 7 집 575 면
【분류】 재정-창고(倉庫) / 건설-건축(建築) / 군사-병참(兵站)
>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10년 갑신 > 7월 1일 > 최종정보
세조 10년 갑신(1464) 7월 1일(임자)
10-07-01[02] 호조에서 대창이 모자라 창덕궁의 좌우 행랑 등을 수리하여 쓸 것을 청하다
[DCI]ITKC_JT_G0_A10_07A_01A_00020_200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대창(大倉)은 다만 12간(間)을 지었으나, 내년의 조세(租稅)는 반드시 대창(大倉)이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창덕궁(昌德宮)의 좌우 행랑(左右行廊) 2백 27간을 대창 도감(大倉都監)으로 하여금 미리 수리를 하게 하시고, 만약 또 부족(不足)하거든 여러 관사의 조방(朝房)에서 혹은 1, 2간이나 혹은 3, 4간씩 관원(官員)의 많고 적은 것을 계산하여 옮겨 비우고 모두 수리하여 창고를 만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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