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대판(大坂)과 강호(江戶), 복건(福建)과 강남(江南) 사이에 끼어 있는 섬이므로

2022. 9. 26. 21:21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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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8 갑인(1794) 3 8(을미)

18-03-08[02] 제주 목사 심낙수가 낙향할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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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제주도 호남의 방벽이 되며 말이 생산되고 귤을 바치는 곳으로서 진실로 이롭게 쓰이는 곳이지만 이보다 중대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대판(大坂)과 강호(江戶), 중국의 복건(福建)과 강남(江南) 사이에 끼어 있는 섬이므로 동쪽이나 서쪽에서 순풍을 타고 한번 돛을 올리면 5, 6일의 노정에 불과합니다.

고려 삼별초(三別抄) 반란을 일으켜 섬에 웅거하자 김방경(金方慶) 토벌하러 오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나 탄식하며 말하기를나라의 안위(安危) 번의 일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방경으로 말하면 세상에 드문 명장(名將)이므로 작은 섬을 한때 웅거한 반적(反賊) 정도는 언제든지 멸할 있었으나나라의 안위가 번의 일에 달렸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외국과 연통(連通)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베푼 혜택이 누적되고 흡족하며 제도가 엄숙하였으므로 가정(嘉靖) 연간에 10백여 척의 해구(海寇) 침략하였으나 완전히 사로잡는 공을 세웠으며 동쪽에서 오는 배는 척도 다시는 가까이하지 못하였습니다. 임진 왜란에 나라를 중흥(中興) 것은 호남 지방의 힘이었으며 섬에는 다행스럽게도 충돌이 없었던 데에 힘을 입은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그러한 점을 알고 수령을 뽑는 있어 모략이 있는 무신(武臣)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30, 40 동안 언제나 무신을 등용하여 매번 보충하는 때가 많았으며 간간이 문관을 임명하는 때도 있었으나 무신만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재물을 긁어들이는 길의 명목이 점점 많아졌으며 심지어 [] 정도의 미역이나 [] 되는 가죽까지도 값이 샀다가 비싸게 팔아서 이문을 챙기는 행위가 마치 장사치와 같게 되니 백성들이 관장(官長) 보기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없습니다. 비상시에 대한 대비는 한결같이 잊어 버리니 섬의 군사의 총수는 부대가 되기에 충분한데도 군사의 정원이 비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으니, 이는 모두 수령을 적임자로 뽑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본래의 험한 석벽(石壁)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화북포(禾北浦)와 조천포(朝天浦) 이외 지역인 수산포(水山浦)ㆍ서귀포(西歸浦)ㆍ모슬포(摹瑟浦)ㆍ명월포(明月浦) 등의 펀펀한 항구의 모래 사장에는 큰 배를 정박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듣건대 해마다 바람이 잔잔할 때면 엄청나게 큰 배가 우도(牛島) 등 2, 3 리(里)의 사이에서 닻을 내리고 물을 긷는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분별할 없는 배가 나타나면 으레 비국에 보고하였으나 근래에는 중지하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신이 보기에 관북(關北) 지방의 10() 가운데 회령(會寧) 제법 정사가 되고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들이는 행위도 적은데 이는 대체로 수령이 문벌과 인망(人望) 자못 무거워 자신의 앞길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섬은 회령보다 중요한 요해지일 뿐만이 아니므로 신의 생각에는, 제주 목사를 문벌과 명망이 알려진 무신(武臣)으로 뽑아 보내며 고을의 수령도 앞길이 환한 나이 젊은 무인을 임용하면 거의 잘될 것입니다.

선조(先朝계축년 어사 심성희(沈聖希) 아뢰기를제주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는 관계로 불법(不法) 많이 행해지고 있으니 강진(康津) 제주로 가는 문에 해당하는 만큼 시종(侍從)으로 수령을 삼아 언제나 염찰(廉察)하여 임금에게 직접 아뢰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제주목의 판관(判官) 시종신(侍從臣)으로 뽑아 보내면 실질적인 효과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거룩한 전하께서 섬의 백성들을 위하고 바다의 방어를 위하여 마음을 쓰지 않는 때가 없어서 배로 곡식을 수송하여 먹여주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장려하며 간혹 어사(御史) 파견해 폐단을 바로잡지만 어사가 배가 떠나자마자 폐단은 다시 종전과 같아지곤 합니다. 이른바 절목(節目)이라는 것도 모두 빈껍데기의 문서가 되고 마니 섬의 백성들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수령을 제대로 뽑는 가지 일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못난 사람이라고 하여 말까지 폐하지 마소서.

신이 쫓겨나 있던 중에 갑자기 명을 받고 의리에 따라 곳에 가서 임무를 수행해야 되겠기에 조심스럽게 명을 받들었는데 본주의 목사로 발탁하여 임명한 대해서는 더욱 황송한 마음이 더하였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뒤로 날짜를 한정하여 일을 마무리하였으나 전부터 앓던 병이 차츰 일어나고 각기병이 생겨나서 점점 심해진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을 호소하는데도 환곡을 저장한 창고의 문서를 전혀 살펴보지 못하고 그대로 폐기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몸은 외롭고 마음은 약해져서 스스로 목숨에 대한 위태로운 마음이 많이 생겨나서 외로운 등불 아래에서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진실로 살아서 왔다가 죽어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신의 정상을 가엾게 여기어 곧바로 대신할 목사를 임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죽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수령을 가려 뽑으려 한다면 너는 당연히 남에게 양보하지 않아야 된다. 병이 이렇다고 말을 하지만 참으로 이른바 국가의 일을 위하여 겨를이 없는 것이니, 너는 노력하여 일을 살피도록 하라. 상소문에서 말한 문제와 장계(狀啓)에서 품청(稟請) 내용은 묘당에게 사리를 따져 회계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원전】 46 454

【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D001] 계축년 : 

1733 영조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