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2. 23:00ㆍ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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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3권 / 행장(行狀)
선부군 영의정 문정공 행장〔先府君領議政文貞公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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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휘는 흠(欽), 자는 경숙(敬叔)이다. 신씨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에서 나왔다. 태사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 이르러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일을 도와 원훈(元勲)이 되었는데, 끝내 태조를 대신해 순절하자 태조가 평산(平山)을 관향으로 내려 주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평산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
정묘년(1627) 정월, 또 차자를 올려 마음속의 뜻을 진언하였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자 잇따라 계속 상소를 올려 기필코 윤허를 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노적(奴賊)이 침입하여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 달 사이에 관서(關西) 지역을 유린하였다. 그러자 부군을 기용하여 좌의정 겸 세자부에 임명하고는 특별히 명을 내려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24일 모갑(某甲)에 길을 나섰는데, 수원(水原)에 머무를 때는 차자를 올려 호남의 병력을 가지고 적을 토벌하라고 청하였고, 전주(全州)에 머무를 때 적이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사방으로 군사를 풀어 약탈을 자행한다는 말을 듣고 또 차자를 올려 적이 조약을 위반한 일을 힐난하라고 청하자, 모두 비답이 내렸다. 부군이 남도(南道)에 있으면서 성심으로 세자를 보호하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올렸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 매우 많았고 노고도 아울러 드러났다.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여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공과 마음을 합해 계책을 세운 뒤 병력을 조달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대조(大朝 임금)에 조달해 주었으며, 군민(軍民)의 고초를 조목별로 위에 아뢰어 감면시켜주었다.
3월, 세자를 모시고 강도(江都)에 들어가 복명하자 임금이 술을 내리고 호피(虎皮)와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간관(諫官) 중에 상소하여 대신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위로하고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 어가(御駕)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영의정이 사직하여 체차되었으므로 부군이 좌의정으로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머지 적들이 몽고병(蒙古兵)을 거느리고 청천강(淸川江) 서쪽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우호를 맺었으나 출몰하여 노략질하며 철수해 돌아갈 뜻이 없었다. 부군이 건의하기를,
“적이 우리 경내에 있는데 장사(將士)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부원수(副元帥) 이하를 책려하여 군대를 엄히 단속해서 뒤를 치게 하소서.”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 남북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와 정주(定州)에 나가 주둔하면서 간사(間使)를 보내 약조를 위반했다고 질책하니, 적이 마침내 철수하여 돌아갔다.
적이 물러간 뒤에 유민들 중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군이 곡식을 옮겨서 구휼해 주고 곡식 종자와 밭갈 소를 나누어 줌으로써 생업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영장(營將)을 팔도 전역에 설치해 군사에 관한 일을 분할하여 전적으로 조련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안주(安州)의 성과 해자를 증수하고 군량을 비축하고 병장기를 수선하였으며, 명을 내려 본도의 병사(兵使)를 황주(黃州)에 남겨 지키게 하고, 성곽을 축조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은 자못 의견을 달리 했으나 부군의 뜻이 확고부동하여 그 공사를 결국 끝마쳤다.
7월, 영의정 겸 세자사로 승진하여 규례에 따른 직책을 겸직하였다.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너그럽게 권면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도제조로 세자의 가례(嘉禮)를 주관하였는데, 번거로운 형식과 헛된 비용을 생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무진년(1628) 봄,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을 꾀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허적(許𥛚)이 그 모의를 알고서 재신인 홍서봉(洪瑞鳳)에게 편지를 보냈다. 홍서봉이 미처 발설하기도 전에 도하(都下)가 흉흉해지자, 부군이 그 정상에 대해 대략 듣고는 묘당에 앉아 급히 대장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를 부른 뒤 군대를 출동시켜 병기를 싣고 오는 적들을 체포하게 하는 한편, 홍서봉을 재촉해 허적의 편지를 발설하게 하였다. 얼마 뒤 허선(許選) 등이 고변하여 적도를 모두 잡아들였는데, 전후로 복주(伏誅)된 자가 50인에 이르렀다. 잡혀온 자들 중에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면 그 때마다 죄인을 살리려는 의논을 내어 임금께 아뢰어 모두 용서받게 하였다.
유효립의 옥사는 아주 복잡하였는데 은밀한 모의와 간교한 계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으로는 궁인(宮人), 환수(宦竪), 액정(掖庭)의 하리(下吏)와 결탁하고, 밖으로는 죄를 받았거나 뜻대로 안 되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연결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잡아 재앙의 기미가 드리운 상황이었는데, 부군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난리를 평정하였다. 밤낮으로 옥사를 다스리느라 몇 십 일씩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여러 죄수들의 공초가 실타래처럼 엉키고 구름처럼 쌓였어도 허실을 판별하면서 마치 촛불로 비추고 셈하듯이 하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었다. 옥사(獄事)가 완결되자 임금이 상변(上變)한 사람 및 추관(推官)까지 모두 녹공(錄功)할 것을 명했으나, 부군은 동료 재상과 함께 극력 사양하여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았고 단지 하사한 안마(鞍馬)만 받았다.
정묘년(1627) 여름, 혜성(彗星)이 북방에 나타났는데 태복(太僕)의 주마관(主馬官)이 죽는다는 점사(占辭)가 나왔고, 금년 봄에는 토성(土星)이 태성(台星)에 들어갔는데, 이는 상상(上相)에게 재앙이 있을 조짐이라고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부군이 상상(上相)으로 태복시의 제조를 겸하여 오래도록 마정(馬政)을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였는데, 6월 11일에 이르러 어깨뼈 주위에 악창이 생겼다. 이때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임금이 남쪽 교외에서 친히 기도드릴 때에도 부군은 병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해직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내가 몹시 걱정스럽다. 경이 완쾌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라.”
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어약(御藥)을 가지고 가서 병을 살피게 하였으며, 어찬(御饌)을 마련하여 대궐 안의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병문안을 하도록 하였다. 왕세자 역시 세 차례나 궁관(宮官)을 보내 문후(問侯)하였는데, 이 달 29일 무오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영의정이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정성을 다해 나라를 도왔는데,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이렇게 훌륭한 신하를 잃었으니, 내가 너무나도 애통하다. 상례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담당 관서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보내도록 상가(喪家)에 보내어 부족함으로 인해 생기는 근심이 없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중사(中使) 및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궁궐에서 별도의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특별히 도승지를 보내어 상주를 조문하게 하였다.
자전(慈殿)도 중사를 보내 고자를 조문하게 하고 궁궐에서 부의를 내렸다. 왕세자는 부음을 듣고는 그날 즉시 궁료(宮僚)를 이끌고 외당(外堂)에서 곡(哭)을 하였고, 7월 13일에 직접 영연(靈筵)에 나아가 조문하여 곡을 하며 슬퍼하고 남아있는 자제들을 위로하였다. 또 내외(內外)에서 보내온 별도의 부의가 모두 넉넉했는데, 이는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부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학문할 줄 알았다.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미 나아갈 방향을 알았으며, 명예를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자랑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성현의 글 속에서 스승을 얻었다. 평소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장중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며, 한결같이 경(敬)을 주장하고 화락하고 화평하게 지냈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의 근본으로 삼았다.
성명(性命)의 근원을 보고서 빨리 정통한데에 나아갔으며, 속유(俗儒)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았고 법도가 고아하고 올곧았다. 선유(先儒)가 이치를 강론한 책에 대해서는 끝까지 깊이 들어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근대 학자들의 설에 대해서도 모두 익숙하게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백자(程伯子 정호(程顥))와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를 더욱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백자는 성인의 자질을 지녔고, 요부는 성인의 재주를 가졌다.”
하였다.
전원으로 돌아온 뒤로는 세상일을 떨쳐버리고 마음을 고명한 경지에 두었는데, 이를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며, 마치 스스로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한 뒤 물러 나와서는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비속한 언어를 입에 내놓지 않았고 나태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여 성찰하고 정결히 하였으며, 마련하고 진설(陳設)하는 일 등을 모두 직접 하였다.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며 종당(宗黨)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부군의 천성에 근본을 둔 것이나 높이고 낮추는 데에 절도가 있었다. 홀로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머니처럼 모셨고, 의지할 곳 없는 조카딸 몇 사람을 집에 데려다 입혀주고 먹여주었다. 문에는 사적인 청탁이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부족한 것을 빌려 썼는데, 밭 한 고랑 늘린 것이 없고 하인 하나 불어난 것이 없었다. 집의 거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가인(家人)이 수리하자고 청하니, 부군이 말하기를,
“나랏일이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거처하는 방에는 책상과 의자만 놓여 있을 뿐이었으며, 임종하던 날에는 의금(衣衾)에 여벌이 없었고, 쌀독도 비어 제사에 올릴 음식도 남에게 의지하여 마련하였다.
선조께서 조정의 신하들 중에 청렴하고 근실한 자를 선발하여 정표(旌表)하라고 명하니 조정의 의론이 모두 부군에게 귀결되었는데, 부군이 대신에게 극력 말하여 중지시켰다. 일찍부터 병을 앓아서 벼슬길에 있어서도 대부분 한산한 곳을 청해 거처하였다. 남과 어울려 남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길을 다닌 적이 없었으며, 오직 임금이 시키는 대로 따라 쉽고 험난한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임명을 받으면 곧바로 떠나곤 하였다.
선조(宣祖) 말년에 이르러 매우 융숭한 대우를 받았는데, 오래도록 서액(西掖 경연)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마다 세세히 분석하고 정미한 의리를 요약해서 진달했으므로 선조께서 그 때문에 경청하였다. 여러 차례 승정원의 수장을 지내며 백사(百司)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사리에 맞게 진언(進言)하여 옛사람이 납언(納言)하던 풍도가 있었다.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러서는 정사의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고 일을 잘 다스렸다.
성명(聖明)을 만나고 나서는 아무리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을 당해도 확고하게 소신을 지키면서 치우침이 없이 자신의 입장을 내세웠으며, 여러 의견을 종합하되 헛된 의논에 흔들리지 않았고, 충성스럽고 유익한 일을 확장하면서도 요점을 가려내었다. 충성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잠규(箴規)를 올려 요약해서 말씀드리는 도리를 다하였고 주밀하게 원대한 계획을 내고서 공을 모두 윗사람에게 돌렸다. 진달한 것이나 주의(注擬)하고 조치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말한 적이 없어서 비록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듣지 못하였다. 인재를 아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후진을 권장해 이끌어 기필코 성취시켜 주었다. 늘 말하기를,
“전한(前漢)이 융성했던 것은 풍속이 돈후하여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이익을 따라가고 명예를 좇으며 속된 일을 경영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몸까지 더러워지는 것처럼 여겼으며, 늘 후배들이 대부분 방종하고 장중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치도(治道)를 논함에 있어서는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종(祖宗)을 본받기만 해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조정의 잘못된 처사를 보면 그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으면 반드시 건의하여 시행하곤 하였다. 기염을 토하며 이야기하는 자와는 같이 따지지 않았으나 실제로 일에 당해서는 끝내 가차 없이 대하였다. 낭서(郞署)의 낮은 관리를 만나면 신신당부하며 가르쳐 단속시켰고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덮어주었다. 조정의 청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백관들보다 앞서 나섰는데, 죽을 때까지 이런 일을 태만히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 여름부터 국가에 일이 많아 비국(備局)이 회좌(會坐)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곤 하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억지로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상황이 위급하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의리를 극진히 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금년 여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리 경내(境內)에 들어왔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몇 개 조목 모두가 득실에 크게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부군이 그때 벌써 악창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관아로 나갔으며, 그 뒤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깊이 염려하며 그 일을 팽개치지 않았다. 비국의 낭관(郞官)이 임금의 분부를 받고 논의를 수합하러 오자 부군이 입으로 몇 줄을 불러 주면서 시자(侍者)에게 받아쓰게 하다가 힘에 부쳐 그만두었는데, 열이 나서 기(氣)가 끊어지려 하고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오랑캐의 사신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았으며, 또 말하기를,
“가뭄의 재해가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늘이 재해를 내린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이다. 내가 죽어 하늘이 비를 내려 주신다면 유감이 없겠다.”
하였다.
부군은 감식안이 탁월하고 일을 미리 잘 헤아려 국가의 중요한 일과 인물의 종시(終始)에 대해 헤아린 것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벗과 한 번 친교를 맺으면 흰 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추포(秋浦) 황신(黃愼)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상(喪) 때에는 신위(神位)를 만들어놓고 곡하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 아파하였다. 평소 절도 있게 말을 하고 행동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앞에서 오만하게 하거나 장난을 치지 못했는데, 공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미리 경계를 설정해두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흔연히 같이 어울려 간혹 점잖은 해학으로 응대하였는데, 사기(辭氣) 사이에 봄 날씨와 같은 따뜻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아! 부군은 병인년(1626)에 무함을 당한 뒤로는 조정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비록 외적의 침입으로 다시 출사하였지만 사직소를 준비해 늘 주머니 속에 차고 다녔다. 유효립의 옥사가 마무리되자 부군이 사직소를 꺼내 불초한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이런 때라면 은혜를 청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좌상 오공(吳公)이 벌써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데다 그냥 놔둘 수 없는 변방의 일이 있어 마침내 책상 위에 말아두고 수심에 차 그날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혹독한 재앙을 내린단 말입니까.
부군은 젊었을 때 호(號)를 경당(敬堂)이라 하였고, 또 백졸(百拙)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고(南皐)라 하기도 하고, 현헌(玄軒)으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 별업(別業)이 김포(金浦) 상두산(象頭山) 아래에 있어 상촌거사(象村居士)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호를 현옹(玄翁)이라고 하였으며, 시골에 돌아가 있을 때는 방옹(放翁)으로 일컬었고, 유배 생활 중에는 여암(旅菴)이라고 편액(扁額)을 걸었다.
백사(白沙)의 부음을 듣고는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슬퍼하며 부질없이 〈현옹자서(玄翁自敍)〉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현옹이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글로 세상에 이름났어도 옹(翁)은 글을 일삼지 않았고, 조정의 높은 관직을 역임했어도 옹은 관직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죄를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어도 옹은 그 죄 때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특별히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도 없고 경영하는 것도 없었으며 가난해도 부유하게 여겼고, 풍요한 환경에 처해도 부족했던 때처럼 지내었다.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친소(親疏)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외물(外物)과 접할 때에는 외물이 구속시킬 수가 없었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제자(諸子)에 널리 통했으며 조금 근원에 이르렀으나 아직 완전한 귀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소옹(邵雍)의 천지 만물의 도수(度數)에 회통(會通)한 바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그 대략적인 면을 통했을 뿐이었다.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서적을 보는 외에는 종일토록 초연하게 지냈으므로 속물(俗物)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과 모두 교우를 맺어 옹을 아는 자가 많았는데, 혹 그의 글을 알아주기도 하고 혹 그의 행한 일을 알아주기도 하였다. 백사옹(白沙翁)이 옹과 이웃에 살면서 옹의 흥취를 알아주었는데, 옹도 마찬가지로 백사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백사가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자 옹이 지기(知己)를 잃은 탄식을 금하지 못하면서 세상에 대한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부군의 문장 작법은 육경(六經)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려서는 창려(昌黎 한유(韓愈))를 좋아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고문(古文)을 모두 가져다 읽었으며, 만년에는 마침내 스스로 깊은 경지를 열었다. 단지《좌전(左傳)》, 《사기(史記)》, 《장자(莊子)》, 〈이소(離騷)〉, 《예기(禮記)》, 고악부(古樂府), 《문선(文選)》과 시(詩)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당(唐)나라 제가(諸家)의 작품을 취하여 좌우에 두고 애송하였고, 명나라 제가들의 문체도 자못 좋아하였다. 서법(書法)도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계해년(1623) 이후로는 문묵(文墨)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퇴궐해서는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술한 시문(詩文)으로는 《상촌고(象村稿)》 전집(前集) 10책, 후집(後集) 2책, 속집(續集) 4책, 별집(別集) 6책, 여집(餘集) 3책, 내집(內集) 1책, 만집(漫集) 6책, 《선천규관(先天窺管)》 1책, 《구정록(求正錄)》 1책, 《화도시(和陶詩)》 3책이 있다.
아! 부군이 조정에 있던 4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두루 겪었으며 그 자취는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분명히 남아 있으니, 불초한 내가 혼자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독한 화를 만나 경황이 없어 글에 조리가 없기에 감히 입언하는 군자들에게 질정하노니 행여 돌아가신 분에게 글을 지어주기를 바라노라.
[주-D001] 선부군 …… 행장 :
이 글은 작자의 부친인 신흠(申欽, 1566~1628)에 대한 행장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D002] 성부(省部) :
옛날 상서성(尙書省)이나 이부(吏部)와 같은 관청으로 조선의 육조(六曹) 따위를 이른다.
[주-D004] 영유(永柔) :
평안도 영변(寧邊)의 속현(屬縣)으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할 때 이곳에 임시 행재소(行在所)를 두었다.
[주-D005] 송유진(宋儒眞)의 역모 :
송유진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으로 인해 흩어진 병사들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떠도는 백성들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천안(天安)과 직산(稷山) 등지에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도성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는 의병대장이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직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宣祖修正實錄 27年 1月 1日》
[주-D006] 조정이 …… 청하자 :
기미책(羈縻策)은 왜적과의 화친을 의미한다. 왜적의 기세가 강해지자 1594년 가을에 명나라가 왜(倭)와 화친하고 풍신수길(豐臣秀吉)을 일본 국왕(日本國王)으로 봉해 주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조선에서 완전히 철군할 것을 요구하며, 우리나라 조정에도 화친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595년 여름에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조선에 있는 왜군의 철군을 감시하게 하였고, 아울러 조선에는 적당 배신(的當陪臣)을 차출하여 심유경 등을 따라 왜영(倭營)에 가서 철군을 감시하도록 하라는 칙명을 내렸는데, 화의(和議)에 반대하던 황신이 적당 배신에 차임되었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주-D019]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具氏) :
인조의 생모로,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君夫人)으로 봉해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주-D023] 유효립(柳孝立) …… 꾀하여 :
인조반정으로 인해 제천(堤川)에 유배되어 있던 유효립이 몰락한 대북(大北)의 잔당들과 제휴하여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6年 1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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