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가 취기를 틈타 오만해져 오랑캐의 예법을 시행하려고 하므로 임금의 얼굴에 입맞추기를 하였다.

2023. 3. 6. 23:37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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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25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해(劉海) 형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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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명 나라에서 유해가 본래 요인(遼人)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하여 포학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잡게 하게 하되, 중국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막론하고 유해를 잡는 사람에게는 즉시 형주 자사(荊州刺史)를 제수하고 은(銀) 1만 냥을 주겠다고 하였다. 정묘년에 오랑캐와 모문룡의 여러 장수들이 유해가 나오는 것을 살펴 감시하고 또 우리나라에도 밀첩(密帖)을 보냈다. 《속잡록》

유해는 요동(遼東) 사람으로 오랑캐의 추장에게 항복하여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리더니, 무진년 여름에는 이름을 흥조(興祚)라 고치고, 그 아우 흥기(興基)ㆍ흥치(興治)ㆍ흥량(興良) 등을 이끌고 제 집을 불살라 타 죽은 것처럼 꾸미고 문룡에게 투항하였다. 유해는 인물이 교활한데다 글을 잘하며 이(利)를 좋아하고 재물을 탐냈는데 문룡이 그를 신임하였다. 문룡이 죽자 원숭환이 부총(副摠) 서부주(徐敷奏)ㆍ장빈량(張贇良)을 보내어 섬의 군사를 점검하고 그 가운데서 힘이 세고 씩씩한 자를 뽑아 갔는데, 유흥조ㆍ경중명(耿仲明) 등도 따라갔다. 부총 진계성으로 심세괴(沈世魁)ㆍ유흥치 등을 거느리고 가도를 지키도록 하였다. 《하담록》 《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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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劉海)는 우리나라 진주(晉州)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신(愼)이며, 이름은 민(敏)이요, 아버지는 응창(應昌)이다. 만력(萬曆)22년 왜변 때에 한 가족 9명이 노략질당하자, 유해는 11살에 유정(劉綎)의 군사에 들어가 유정의 성을 따르고 이름을 해라고 고쳤다. 차관(差官)으로서 조선에 와서 진주에 내려가 아버지를 찾겠다고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였다. 일찍이 그 아우는 6살 때에 왜국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재물을 저축하였는데,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백금(百金)을 속바치고 석방시키니, 이해에 돌려보내 오는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돌아왔다. 임금이 응창에게 6품의 벼슬을 주어 위로하고, 유해는 돌아가 유정과 함께 오랑캐를 정벌하다 전사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

[-D001] 당검(唐儉) : 

당 나라 때에 당검이 적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데, 당 나라에서 적국을 치려다가 당검이 죽음을 당할까 염려하니, 이정이 말하기를, “당검의 무리 때문에 군사를 쓰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25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묘년의 노란(虜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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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조 판서 이정귀, 호조 판서 김신국, 이조 판서 장유가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오랑캐의 차사를 보고 화친의 약조(約條)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평산을 한 발자국도 넘지 않겠다고 맹약하였다. 다음날 철병하여 돌아가면서 형제의 나라로 칭하고, 철병한 뒤에는 다시 압록강 기슭을 넘지 않기로 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명 나라는 바로 우리와 부자의 나라로서 2백 년 동안 정성껏 복종하고 섬겼으니, 이제 너희 나라와 화친하였다고 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 하여, 유해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극력 다투었는데, 유해가 문득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조선국은 예의뿐만 아니라 충신(忠信)이 천하에 으뜸이다.외로운 섬(강화도)으로 달아나 숨어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과 같아, 우리 군사가 만일 한번 걷어차면 개성(開城)과 서울이 문득 잿더미로 화하고 군사의 칼날이 온 나라에 번득일 것이니 나라의 존망이 지척에 있는데도 오히려 신의를 지켜 끝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으니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내가 마땅히 이런 뜻을 두 왕자에게 고하겠다.” 하고, 즉시 글을 써서 밤중에 두 왕자에게 한 기병(騎兵)을 달려 보내 물으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음은 또한 좋은 생각이니 그대로 맡겨두고, 단지 우리와 화친하는 맹약을 굳게 결정만 하고 오라.” 하였다. 유해가 세폐(歲幣)를 글로 써서 보이는데 너무 많았다. 이에 정귀 등 세 사람이 힘써 다투어 세폐를 모두 그만두게 하고, 다만 송례(送禮)라고 일컫고 약간의 물건으로 호군(犒軍)하겠다 하니, 오랑캐의 차사가 그대로 따랐다. 적이 회맹(會盟)하려고 할 때에 흰 말을 죽이고 조선 임금이 또한 맹약에 임하여 삽혈(歃血)하기를 요구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인심과 병력(兵力)과 군율(軍律)로써 과연 이 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렇지 못하여 적과 화친을 하고 하늘에 맹서할 때 어찌 직접 나가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이 그르다 하고 후세가 비평한다 하더라도 내 마땅히 맹약에 임하겠다.” 하니, 정귀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전교가 이에 이르시니, 이것은 참으로 회복의 기틀이 되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또한 상중에 계시어 친히 삽혈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오랑캐 차사에게 역설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은 다만 본부(本府 강화부)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를 시켜 서약문(誓約文)을 읽게 하고, 정귀와 오윤겸(吳允謙)ㆍ김류(金瑬)ㆍ이귀(李貴)ㆍ신경진(申景禛)이 서교(西郊)의 단소(壇所)에 모여 맹약하였다. 그후 유해가 명 나라에 도로 들어가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은 상태를 극론하였다. 《월사집(月沙集)》 ○ 《하담록》에는, “윤방(尹昉)ㆍ오윤겸(吳允謙)ㆍ이성구(李聖求)ㆍ최명길(崔鳴吉) 등이 회맹하였다.” 하였다.

○ 적병이 물러가 안주로 향하는데 정충신(鄭忠信)ㆍ윤숙(尹璹) 등이 진을 치고 시위하니, 적이 먼저 돌격 기병으로 우리 진을 빙 둘러 달리면서 윤숙 등을 깃발 아래에 불러 놓고 묻기를, “화친을 약정하고 물러가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상대하느냐?”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국토를 지키는 장수는 지키는 자리를 떠날 수 없으므로 우선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찌 감히 싸움을 하겠는가.” 하니, 오랑캐 추장이 말하기를, “비록 화친이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너희 군사가 매우 성대하니, 두 진이 한번 교전하여 자웅을 결정하여 봄이 어떨까?”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니, 오랑캐 추장이 놓아 주고 갔다. 《조야기문》

○ 처음에 적이 서흥(瑞興)과 평산에 주둔할 때, 유격 기병대가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소와 말과 곡식과 여자를 탈취하여 묶어 몰아가고, 어린아이는 활줄로 손바닥을 꿰어 끌어갔다. 이에 평안도 한 도는 보전된 땅이 전혀 없었는데, 다만 성천부(成川府) 한 지방만은 적과의 거리가 매우 먼 까닭에 수령과 대소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적은 화친하는 일이 비록 성립되었다 하나 대동강 서쪽은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황해도에서는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으나 관서(關西)에서는 노략질이 심하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안도(安堵)하도록 하였다. 평양에 잔류한 적 3만 1천 5백 명이 각각 여자를 서넛을 거느리고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이 달 20일 후에 이르러 관사(官舍)를 불태워 헐고 안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은 그 주민 중에서 독농관(督農官)을 정하여 다섯 가구에 소 한 마리를 주어 농사짓게 하였다. 《일월록》

○ 대마도(對馬島)에서는 우리나라에 오랑캐의 난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총(鳥銃) 3백 자루, 장검(長劍) 3백 자루, 화약 3백 근을 공물로 바치고, 이어 구원하러 나올 것을 청하였다. 《조야기문》 《국조전모(國朝典謨)》

○ 이때 영남 사람 이척연(李惕然)이란 자가 행재(行在)에 들어가 통곡하면서 주화(主和)한 간신을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세 번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일월록》

○ 13일에 세자가 전주(全州)를 출발하여 강화로 향하였고, 21일에는 임진(臨津)의 방위군을 해산하였다. 《조야기문》

○ 4월에 강화로 온 각도의 근왕병(勤王兵)을 돌려보내는 한편, 10일에 임금의 행차가 강화를 출발하여 통진(通津)에서 머무르고, 11일에 김포에 머물러 장릉(章陵)에 제사지내고, 12일에 환도하였다. 《일월록》

○ 강화를 승격시켜 유수부로 삼았다.

○ 처음에 모든 성이 무너지고 군사들이 물결처럼 흩어졌는데, 철산(鐵山) 사람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가 흩어진 병졸을 불러모아 복수하기를 선언하자 사람들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쳐서 잡았는데, 전후로 목베어 죽인 적의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정봉수를 당상관으로 승격시키고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제수하였다. 응모자들이 더욱 많아져 군사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있었는데, 의주에 있는 모든 진영의 적이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는 물러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다.여러 적이 합세하여 크게 진격해 들어와 포위하고 공격하여도 여러 날 동안 결말이 나지 않자, 적장 세 사람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만히 산 뒤로부터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쳐들어 오려고 하니, 봉수가 깨닫고 미리 명령, 정포(精砲) 30명으로 하여금 풀숲 사이에 매복하게 하여 적의 세 장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각각 열 방의 대포를 쏘게 하니, 세 추장이 과연 말을 타고 바위 위에서 서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30명의 정포가 동시에 모두 쏘자 세 추장이 말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군졸은 크게 무너졌다. 봉수는 적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는데, 적의 구원병 수천이 5리 밖에 있으므로 봉수가 밤에 경기병(輕騎兵)을 거느리고 습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났다. 다음날 비로소 영을 내려 목벤 적의 머리를 모으니 수백을 넘었다. 이 수급(首級)을 막하(幕下)의 갑사(甲士) 장초(張超)를 보내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봉수에게 가선대부의 작위를 하사하고, 용천 부사(龍川府使)로 승진시켜 본도(本道)의 방어사를 겸하게 하고, 김완(金完) 이하 모든 장수에게 그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는 동시에 특별히 장초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 김경서(金景瑞)가 오랑캐의 진중에 있으면서 여러 추장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가고자 하나, 정봉수란 사람이 있는 한 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경서가 용강(龍岡) 사람이므로 봉수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월록》

○ 일찍이 의주 사람 장사준(張士俊)이 용골성을 점거하고 있다가 오랑캐에게 항복하니, 행 부사 정봉수가 그 아우 기수(麒壽)와 김종민(金宗敏) 등과 함께 사준을 유인하여 베어 죽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지키는 한편, 이 소식을 모문룡(毛文龍)의 병영에 알리니, 문룡이 차관(差官)을 보내어 봉수에게 수비도사(守備都司)의 직을 제수하였다.

○ 봉수는 난이 평정된 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경상 병사에 이르렀고, 기수는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정려(旌閭)되었다.

○ 이에 이르러 오랑캐의 군사가 용골산성을 포위하니, 봉수가 격파하여 쫓아버리고 또 의주까지 추격하여 1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말 50필을 얻었는데, 싸움에 이긴 것을 보고하는 글을 오랑캐 군사에게 빼앗겨서 상달되지 못하였다.

○ 조정에서 봉수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봉수로 하여금 잠깐 피해 적의 대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하니, 봉수가 아뢰기를, “군사를 보충하고 군량만 지속된다면 염려 없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기종(金起宗)이 계청하기를, “그의 청을 들어주어 군세를 더욱 강화하소서.” 하였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병이 수만이나 되었는데, 선천과 곽산 사이를 횡행하며 힘을 합하여 용골산성을 공격하여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 패하면서도 오히려 득실거리면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용골은 서남쪽으로 20리의 거리에 바다가 있는데, 봉수가 사람을 시켜 모문룡의 병영에 위급함을 고하니, 모문룡이 전후로 끊임없이 배로 몰래 양식과 무기를 원조해 주어 성 안에서는 이에 힘입어 지탱할 수 있었다. 《일월록》

○ 오랑캐가 우리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용병(用兵)한 것을 책망하니 답하기를, “금 나라 군사가 즉시 강을 건너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잔류하여 노략질하므로 본도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복수할 것을 생각한 것이니, 이미 명령한 것이 아니고 또한 금지하기도 어렵소.” 하자, 오랑캐가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상의하고 남여 2천여 명을 돌려보내 주었는데, 김진(金搢)ㆍ박유건(朴有建) 등의 부처(夫妻)가 모두 왔다. 김진 등은 머리를 깎아 죄를 논하여 육진(六鎭)에 군사로 충원하였다. 한편 오랑캐 차사는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하여 가지고 갔다. 《일월록》

○ 적의 군사가 강을 건너갈 때 홍립과 난영(蘭英)은 각기 아들을 인질로 오랑캐에게 두고 본국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가 모두 수년 전에 죽었으므로 애통하며 추복(追服)하였다. 이때 오신남(吳信男)은 아들이 없어서 볼모를 보낼 수 없어서 마침내 적을 따라갔다. 우리나라에서 한윤(韓潤)을 본국에 머물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았다. 《일월록》

○ 4월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적이 수일의 도정(道程)에 있는데, 장만(張晩)은 원수(元帥)로 있으면서 먼저 스스로 도망하여 부녀자가 난을 피하듯 깊은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니, 청컨대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거듭 아뢰니, “부여(扶餘)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일월록》

○ 기자헌(奇自獻) 등 갑자년에 죽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하여 직첩(職牒)을 주고 연루된 집안 사람들도 풀어주었다. 《일월록》

○ 대간이 아뢰기를, “적병이 우리 강토에 깊이 쳐들어와서 화친하는 일로 협박하여 우롱하고 공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은 홍립 등이 주관하여 꾸미고 적의 흉계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홍립은 이미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라 칭하고 적장의 명령을 받들어 방(榜)을 내어 백성들을 꾀었으니, 그 반역의 죄상이 명백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홍립 등을 목 베어 거리에 효시하여 교만한 오랑캐의 기를 꺾어야만 합니다. 홍립은 바로 적에게 항복한 반신(叛臣)인데도 전하께서는 자리까지 주며 접견하셨으니 국가의 수치와 욕됨이 지극합니다. 나라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 차마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반신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진창군(晉昌君) 강인(姜䄄)은 품계가 높은 재신(宰臣)으로서 명을 받고 오랑캐에 사신으로 가자 겁이 나 어찌할 바를 몰라 절도 없이 절하고 꿇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양식과 말 먹이를 나누어 부담하려 하고 적이 주는 뇌물을 당연한 것처럼 받고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적의 명령을 듣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 절개를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벼슬 명부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송교(松郊) 이공무(李公楘)의 행장

○ 4월에 명 나라 태감(太監) 호량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제독이라 일컫고 혹은 총독(摠督)이라 일컬으며 나와서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한 실상을 탐문하고, 겸하여 오랑캐의 실정도 캐냈다. 이에 이상길(李尙吉)을 영위사(迎慰使)로 삼아 가도(椵島)로 보냈다.

○ 5월에 권호(權怙)를 명 나라에 보내어 오랑캐가 침입한 전말과 우리나라가 파천하여 위태하고 급박해서 임시 방편으로 화친한 것 등의 실정을 황제에게 아뢰니, 무진년에 회답하는 조서(詔書)를 보내왔는데, 그 대략에, “왕이 아뢴 병란을 당한 실정을 보고 짐은 마음에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오랑캐와 통문(通問)을 내왕한 것은 임시 방편으로 싸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왕의 본뜻은 아닐 것이며, 군신간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을 짐이 명백하게 살피고 있다. 더욱 힘써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엄중히 방비하라.” 하였다.

○ 5월에 유해(劉海)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에 이르러 서울로 가는 길에 군사를 벌려 두고 원창군(原昌君)ㆍ오신남(吳信男)과 함께 가정(家丁) 수백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성문 밖에서 영접케 하였는데, 유해가 임금이 친히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노하자 상이 부득이 접견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유해가 취기를 틈타 오만해져 오랑캐의 예법을 시행하려고 하므로 임금의 얼굴에 입맞추기를 하였다. 임금이 홍립에게 물으니, 홍립이 대답하기를, “오랑캐는 큰 맹약을 한 번 허락하면 평생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입맞추는 것은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하고, 홍립을 시켜서 타이르니, 유해가 그 다음 예법을 청하였다. 임금과 서로 등을 두드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다시 홍립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의 서약입니다.” 하자, 임금이 따랐다.

○ 홍립과 난영이 오랑캐 땅에 있을 때에 유해의 처제를 아내로 삼았는데, 곧 귀영개(貴永介)의 양딸이다. 오랑캐의 추장이 홍립과 난영에게 각각 요동 백성 5백여 명을 주어 부리도록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유해가 귀국하면서 두 여인을 데리고 오고 부리던 요동 사람들도 모두 따라왔는데, 조정에서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니 홍립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이 나고 심화가 더쳐 드디어 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7월 혹은 말하기를, “홍립이 울면서 선묘(先墓)를 하직하고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모문룡이 듣고 그 여자를 찾아갔다. 《일월록》 ○ 《병자록》에는 “혹은 홍립의 여러 친족들이 몰래 죽여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하였다.

○ 이때 김세렴(金世濂)이 체찰사의 종사관으로 호남에 가 있다가 진중(陣中)에서 어버이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는데, 김육(金堉)이 “분상(奔喪)에 역마를 탄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하며 벼슬 추천을 막으니, 사람들이, “세렴이 애당초 자기 말을 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역마를 이용하지 않으면 분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담록》

○ 계해년(1623) 8월에 수찬 김시양(金時讓)이 의주 부윤에 임명되자, 비변사에 말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다. 변방의 성문 밖은 바로 적의 국경이므로 적이 왔음을 알려줄 척후(斥候)와 봉화(烽火)가 없으면 적이 낮에 쳐들어올 경우에는 성문을 미처 닫을 사이가 없고, 밤에 쳐들어올 경우 성위에서 화살 하나도 쏠 사이가 없다. 군졸들을 격려하여 성위에 올라가 밤을 경비하는 것은 곧 변란을 듣고 나서의 일이다. 만일 군졸들에게 항상 성을 경비시킨다면 군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안주(安州)를 지키게 한다면 적이 의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을 지키는 방비를 하여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이 나를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키게 하려는 것인데, 번연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국가가 패망하는 화가 나 때문에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은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그때 최명길이 소를 올리기를, “김시양은 폐조(廢朝) 때에 죄를 얻고 12년 동안 북으로 옮겨갔다가 남으로 이동하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조정에 돌아온 지 겨우 2, 3개월도 안 되었으니, 다시 변방으로 내보내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게다가 김은 비록 재주는 있으나 본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니, 변방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명하였다. 이민구(李敏求)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만일 허락하였더라도 사실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김을 겁쟁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오랑캐의 군사가 의주에 쳐들어와 수문(水門)을 통해 들어와서 성위로 올라와 군졸들을 죽인 뒤에야 온 성중이 비로소 시양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담록》

○ 이때 홍립의 종 언복(彦卜)이 진중으로부터 강화도로 와서 아뢰기를, “원컨대 포수 1만 명을 시켜 적을 치도록 하면 1진(陣)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화친을 하면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싸우지도 않고 화친을 한다면 10년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말을 들어주지 못하였다. 《병자록》

○ 이때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 나라 서울에 있었는데, 본국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병부에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날랜 병사로 오랑캐의 배후를 곧바로 치도록 하니, 군문(軍門)에서 수병(水兵) 수천 명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고 태감(太監) 네 사람이 계속해서 왔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고 돌아갔다. 《촬요(撮要)》

○ 장수 모문룡이 또 우리나라를 무고하여 아뢰었는데, 그 가운데 두 마음을 먹고 오랑캐를 끌어들였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들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변명하니, 예부에서는 황제에게 아뢰어 억울함을 씻어주고 자문(咨文)으로 본국에 알렸다.

○ 금 나라가 화친을 의논할 때에 생원 윤형지(尹衡志)자는 경가(景可)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기사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박사가 되었다. 는 이때 나이 24세였는데, 소를 올려 화친을 배척하면서 화친의 주창자들을 공격하고, 계속해서 윤황(尹煌)과 윤지경(尹知敬)도 또한 간쟁하니, 그들의 말을 모두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성을 버린 자들이 이로 말미암아 법의 처단을 받아, 공론이 통쾌하게 여기고 이들을 지목하여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이때 외구는 한창 강한데 우리나라는 군비가 매우 소홀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헌의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방비하는 방도는 크게 조처하여 착실하게 원대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모두 재물과 힘을 낭비하는 것뿐이며 또한 구차스러울 뿐입니다. 병법(兵法)에 말하기를, ‘주인으로서 손객[客]을 대적하고,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라.’ 하였는데, 이제 변방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보고가 한 번 이르자 격문을 띄워 남도의 군사를 부르니, 남도의 군사가 미처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은 이미 내지(內地)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하물며 시일은 급박하고 사태는 위급한데, 군사들은 피로하고 말은 병드니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대장 한 사람에게 명하여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에 나아가 진을 치고 수초(水草)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택하여 형편따라 주둔케 하되 굳이 성을 쌓고 책(柵)을 설치할 것은 없습니다. 각도의 군사 5, 6만명을 10번(番)으로 나누어 항상 5, 6천 명에게 3개월씩 지키도록 하면 30개월에 한바퀴 돌게 될 것이고, 2월부터 7월까지는 2, 3천 명을 더 들여보내 농사를 보조하게 하면, 무릇 농가에서 한 사람이 농사지어도 충분히 2, 3인의 식량은 될 수 있으니, 7, 8천명이 기름진 땅에서 농사지으면 2만 명의 1년 식량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봄에는 농사 일을 시키고 여가에는 전쟁을 가르쳐, 5, 6천 명을 늘 주둔지에 있게 하여 오직 무술을 연습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을 일로 삼아 교대로 훈련시키면, 3년 안으로 5, 6만 명이 모두 쓸 만한 군사가 될 것입니다. 또 그 식량이 2만 명의 양식을 충분히 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서 힘을 헤아려 군사를 늘여서 옛 천경(踐更) 제도를 본뜬다면, 이는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급박한 때를 당해서 군사를 출동하고 창황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는 득실이 천양지차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군사는 평소에 어루만져 기를 수 있고, 양식은 운반하여 오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험한 산천과 굽은 도로로 군사를 매복시킬 만한 장소와 적을 칠 만한 곳에 이르러서는 장수는 스스로 헤아릴 수 있고 군사들은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지세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따르지 못하였다. 《염헌집》

○ 무진년(1628)에 오랑캐의 차사 박중남(朴仲男)ㆍ박경룡(朴敬龍)과 따라온 오랑캐 7명이 오랑캐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의 대략에, “달아나 돌아간 사람을 찾아서 돌려보낼 것이며, 회령(會寧)에 시장을 개설할지의 여부와 홍립과 난영이 데리고 간 한녀(漢女)를 찾아보고 유무를 상세히 알릴 것이며, 오신남ㆍ김진ㆍ박유건 등을 또한 찾으라.” 하였다. 중남은 바로 종성(鍾城)의 토병(土兵)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한 자이고, 경룡도 우리나라 사람이다.중남 등이 금 나라 서울에 들어가 고하였는데, 3월 26일 진강(鎭江)을 떠나서 4월 3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국서(國書)를 바치니, 한(汗 만주 황제의 칭호)이 말하기를, “시장을 개설하는 물화(物貨)는 두 나라가 유무를 교역하는 것이니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달아나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은 당초에 너희 나라에서 청해서 초출(抄出)한 남녀를 호송한 것인데, 다만 70여 인만 속(贖)바치고 그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다가 도중에 도망가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찾아간다는 것을 빙자하고 유인하여 도주케 하려는 계책이다. 의주에서 철병한 이후에 도주한 사람을 일일이 돌려보내라고 하였는데, 한 사람도 잡아서 보내지 않았다.따라서 너희 나라가 화친을 맺은 지 몇년 안되어 맹약을 이와 같이 어긴 것이지, 내가 어찌 너희 나라와의 맹약을 어겼겠는가. 예전에 남조(南朝 명 나라)가 우리나라와 더불어 소와 말을 잡아 천지에 제사지내고 돌을 세워 맹약의 글을 새겨두었더니,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불화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선한(先汗 전 황제)이 하늘에 고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광녕(廣寧) 등지의 24위(衛)를 모두 우리 수중에 넣었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그르다 하지 않고 남조를 그르게 여긴 까닭이다. 남조와 너희 나라가 대국이라는 이름을 믿고 우리를 초개(草芥)와 같이 대접하여 강상(江上)에서 시장을 개설한 날에 관원이 직접 곤장을 잡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쳤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냐.” 하니, 중남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인민들이 어렵고 가난한 상황은 대인(大人)들이 눈으로 보신 바입니다.하물며 싸움통에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남은 인생들이 어찌 남은 물건이 있겠습니까. 부모 처자를 잃은 자들이 대인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을 듣고, 명주와 무명과 종이 등의 물건을 근근히 준비하여 짊어지고 강가에 이르러 속바치고자 하니, 금 나라 사람이 너무 많은 값을 요구하여 한 사람의 몸값으로 소나 말로는 10마리를 요구하고, 명주와 포목과 수은(水銀)과 종이의 값으로는 거의 1천 냥 상당을 요구하므로 속을 바치고자 하던 자들이 낙담 통곡하고 마련할 방책이 없었습니다.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백성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 일을 추진하였고, 한(汗)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또한 인자(仁慈)한 데서 나왔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 유인하여 도망치게 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운운.” 하였으나, 한이 끝내 믿지 않고, “너희 나라는 모문룡과 통하여 우리를 침범할 계책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강 가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고서 무엇 때문에 회령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주저하는가.” 하였다.

○ 임금이 가만히 비변사에 물으니, 우의정 김류(金瑬)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은 큰 논의에 영상 신흠(申欽)과 좌상 오윤겸(吳允謙)이 병으로 나오지 못하므로 이경직(李景稷)을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영상은 병이 중하고, 좌상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불행하게도 잡혀갔다가 죽음을 무릎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인데, 이제 또 잡아 보냈다가 만일 죽음을 당한다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후세가 장차 또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이는 비록 큰 화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낼 사람들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오랑캐들은 이익을 중히 여기니 우리가 만일 많은 재물로써 속바치기를 요구하면 저 포로를 분배받은 자들이 그 재물을 탐내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연 죽이지 않는다면 화를 누그러뜨리고 사람도 보전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무방하고 그 수치와 욕됨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포로가 된 사람을 찾아 오는 일에 대하여 갑자기 질문을 받으니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다른 사람의 의논대로 정문익(鄭文翼)이 한(汗)과 약정(約定)을 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것을 기다려서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차하여 간쟁(諫爭)하기를, “나라가 나라가 되는 것은 백성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백성을 버리고 나라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평원군(平原君) 일개 공자(公子)로되 위제(魏齊) 자기 집에 숨겨두고 () 나라에 붙들려 가서도 오히려 진왕의 말에 따르지 않고 위제를 내보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차마 저 추한 오랑캐의 한 마디 말에 가벼이 우리 백성들을 호랑이 입에 갖다 바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만 한두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천백 명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이로써 민심을 잃게 되면 국가의 패망이 어찌 오랑캐 군사의 침범을 기다리겠습니까. 운운.” 하였다.

○ 이때에 오신남(吳信男)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에서 나와 박중남 등 오랑캐의 차사를 만나보게 하였더니, 중남은 인사말 이외에 따로 다른 말이 없었고 신남은 집이 먼 시골에 있어서 곧바로 와서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중남이 은 20냥을 주면서 한(汗)이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란(李灤)을 잡아 왕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과 오랑캐 나라에 사신을 갔을 때, 행동이 비루하고 어그러져 저들에게 수모를 받은 것과 또 사사로이 당녀(唐女)를 산 죄를 국문하였다. 금부에서 아뢰기를, “이란의 죄는 우리나라에서 따르기 어려운 오랑캐의 청을 제 멋대로 허락하여 막대한 불화의 실마리를 열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하니, 그날로 형을 집행하였다.

○ 이때에 이귀(李貴)가 비밀리 아뢰기를, “조속히 도망한 사람을 돌려보내라는 청을 따라 눈 앞에 닥친 화를 늦추소서.” 하니, 장유가 상차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사유를 논하고, 주서 강유(姜瑜)가 소를 올려 이귀가 망녕되게 말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한 죄를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오윤겸의 상차의 대략에, “병들어 혼미하던 중에 경솔하게 대답하였는데, 장유의 상차를 보니 명백하고 바르며, 또 강유의 상소를 보니 놀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거의 나라 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전후에 상하로 지은 죄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요, 사사로움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근심하지 않는 바를 근심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여 매양 눈 앞의 일만 우선 해결하려는 자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시배(時輩)들은 곧 공신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을 세우는 미끼를 삼고 있어, 늙은 이 몸은 실로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기화(奇貨)가 되니, 죽은 중[僧]으로 매질을 연습한다는 속담이 바로 지금의 저의 처지라 하겠습니다. 강유는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시론(時論)에 영합하여 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교할 것이 없고, 이목(李楘)은 신을 배척하여 효시(梟示)하자고 한 것이 두 번이고 귀양보내자고 한 것이 한 번인데, 이제 또 강유의 의논을 칭찬하고 신이 일을 그르친다고 말하는데, 전하의 유시(諭示)가 비록 간절하나 어찌 감히 출사(出仕)하여 벼슬자리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 정경세(鄭經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붙잡혔다가 도망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데 대한 의견이 조정에 가득 찼는데, 그 말들이 서로 득실은 있으나 끝내 일정하여 믿을 만한 계책은 없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임시 방편으로 우선 눈 앞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하나 천리(天理)를 어기고 인정(人情)을 거스르는 것이니, 눈 앞의 화를 반드시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며,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른 것을 지키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이치는 곧고 기운은 씩씩하여, 장유가 말한 바 여섯 가지의 난점 같은 것은 사정을 극진히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또한 어떠한 계책을 써서 뒷수습을 잘 하느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귀가 겁을 내어 부르짖으며 그만 두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군사도 없고 양식도 없고 군비도 비어, 해서(海西 황해도)와 관서(關西 평안도)가 한결같이 공허한데, 불행히도 적이 침입하여 온다면 전혀 방비할 도리가 없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무진년 8월에 회답사(回答使)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오랑캐에게 보냈다. 한(汗)이 잔치를 베풀어 예물 목록을 받고는 예물로 가져온 장검[長劍]을 취하여 칼집에서 뽑아보고 자못 아끼고 좋아하는 빛이 있었다. 서로 돌려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번 예물 목록은 전날과는 다르니 조선의 진실한 뜻을 가히 알겠다.” 하였다. 문익 등이 도망해 왔던 사람 5명을 바치며 아뢰기를, “새나 짐승도 또한 그 둥지를 그리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고향 땅을 생각하여 연연하지 않겠습니까.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은 실로 인정과 도리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웃 나라와 친선하는 대의(大義)로 용단을 내려 돌려보내니 측은히 여기고 가슴아픈 생각을 스스로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한이 이르기를, “서로 친선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다시 속바치고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드디어 청포(靑布) 3백 필로 속바치고, 9월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우선 그만두도록 허락하였다.

○ 원(元)의 예물 목록은 인삼 1백 근ㆍ초피(貂皮) 20벌이요, 별도의 예물 목록은 인삼 3백 근ㆍ초피 40벌이었다. 별도의 예물 목록은 돌려보내는 인구가 적은 까닭에 그 뜻에 사례한 것이다.

○ 10월에 문익 등이 돌아오자 품계를 뛰어 올려 공홍 감사(公洪監司)에 제수하였다.

○ 한(汗)은 사람됨이 사나운 기색이 용모에 나타났지만 침착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고 행동이 또한 무게가 있었다. 두 눈은 내리떠서 보통 때에는 작고 가는 듯하였으나 간혹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볼 때에는 광채가 번쩍거렸다. 한은 무엇보다도 뜻 밖에 사람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것을 능사로 삼아 위 아래가 간격이 없었으며, 하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삼가서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정사도 반드시 하늘을 가리켜 증명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매양 누루하치를 추모하여 항상 말하기를, “전한(前汗), 전한.” 하고, 간혹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한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너희 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달아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위 아래가 서로 버티고 조야가 어지럽게 다투고 힐난하여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한이 두세 명의 왕과 더불어 한두 마디 말로 결정을 보았다. 비록 문질(文質) 같지 않고 청탁(淸濁) 서로 현격하다 하더라도 번쇄(煩瑣)하고 간략함이 이와 같이 달랐다.

○ 무진년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위하여 요(遼)를 쳐서 치욕을 씻을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그것이 옳지 못함을 굳게 간하기를, “무릇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협박하는 것은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본성이 사납고 억세니, 왜를 두려워하여 우리 말을 순순히 듣고만 있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우리에게 왜를 치러가는 길을 빌려 그 분을 풀고자 할 것이니, 우리가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남쪽의 왜와 북쪽의 오랑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제 확실하지도 않은 말로 말미암아 경솔히 그 노여움을 돋우어 두 오랑캐로 하여금 서로 싸우도록 하면 우리가 곧 그 사이에 끼어 있게 될 것이니, 신은 국가가 장차 어찌 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깊이 그렇겠다고 여겨 드디어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염헌집》

○ 경오년(1630) 1월에 의주에서 보고하기를, “오랑캐가 12월에 심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계주(薊州) 등의 지방을 함락하고 통주(通州)를 포위하였다 운운.” 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명 나라에 대하여 위문하는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은 청하기를, “먼저 선전관과 역관을 가도(椵島)에 보내어 급속히 탐문하여 본 뒤에 분문사(奔問使)를 차출하소서.”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이 소를 올려 “풍정례(豐呈禮)를 빨리 중지하고, 또 분위사(奔慰使)를 보내고 정전(正殿)에 거처하는 것을 피하고 음악을 철폐하소서.” 하였고, 병조 판서 이귀가 군사를 달려 보내 난을 구원할 것을 계청하였다. 얼마 있다가 서쪽에서 들어온 보고에 “한(汗)이 통주에 깊이 쳐들어갔는데 명 나라의 대군이 앞을 차단하고 뒤를 끊었으며 서달(西㺚)이 명 나라와 마음을 합하여 적을 속여 희봉(喜峰) 어귀 아래로 유인하여 수문(水門)에 반쯤 들어왔을 때에 협격(挾擊)하여 크게 무찌르고 남은 군졸들을 포위하였다.” 하였다.

○ 3월에 접반사(接伴使) 진계성(陳繼盛)이 급히 아뢰기를, “황제가 친히 성위에 임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적의 육왕자(六王子)와 이름난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고 수만 명을 베고 사로잡으니, 적이 삼태영(三台營)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 박중남 등이 청포(靑布) 1만 8천여 통(桶)을 무역하여 가지고 가다가 의주에 이르러 유흥치(劉興治)에게 빼앗겨 빈 손으로 돌아갔다. 6월에 용골대(龍骨大)가 청포를 운반해 가는 일로 3천 수백 명을 인솔하고 왔는데, 그 중 3천 명은 의주에 건너편에 머물게 하고, 용골대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병사 유비(柳斐)와 서로 접견하였다. 유비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뜻을 말하니, 용골대가 성을 내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병사를 찌르는 시늉을 하고 이내 땅을 서너 차례 치자 따라온 오랑캐가 별안간 튀어나와 병사를 결박하였다. 이어서 중군 군관(中軍軍官)이 즉시 글을 써서 의주에 있는 오랑캐의 처소에 보내는 한편 병사에게, “서울에 가서 청포를 찾아가려고 하니 당장 쇄마(刷馬) 5백여 필을 준비하라.” 하였다. 이에 병사가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耈)는 금 나라 사람의 삼 값과 청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일이 지극히 괘씸하다. 금의 차사가 돌아간 뒤에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시켰다. 《응천일기(凝川日記)》

[-D001] 첨방군(添防軍) :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남도와 북도 출신의 군사로 나누어 세웠는데, 남도의 군사를 첨방군(添防軍)이라 한다. 즉 첨가하기 위하여 남도에서 온 군사라는 뜻이다.

[-D002] 간성(干城) :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성으로 나라를 방비하는 직책이라는 뜻인데, 장군은 곧 나라의 간성과 같다는 것이다.

[-D003] 죄기(罪己) 교서 : 

나라가 위급한 때에 임금이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온 국민에게 사과함으로써 민심을 한층 더 분발시키는 교서.

[-D004] 관중(管仲) …… 어질다 : 

제(齊) 나라에 난이 있어 공자(公子)들이 망명할 때에 관중이 공자 규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가 뒷날 입국하였는데, 환공과 공자 규가 서로 먼저 들어오기를 다투다가 규가 패하여 죽었는데도 관중이 따라 죽지 않고 뒤에 환공에게 벼슬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후일 천하를 안정시킨 공이 있으므로 공자가 그를 칭찬하였다.

[-D005] 천경(踐更) : 

옛날 병역 제도의 일종인데, 기간을 정하여 윤번제로 하는 것이다.

[-D006] 평원군(平原君) …… 않았는데 : 

진(秦) 나라 재상 범수(范睢)가 위(魏) 나라 재상 위제에게 전날에 당한 곤욕을 복수하려고 위 나라에 협박하여 위제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하자, 위제가 도망쳐 조(趙) 나라로 가서 평원군에게 의탁하였으므로 진 나라에서 평원군을 오라고 청해 협박하였다.

[-D007] 문질(文質) …… 현격하다 : 

우리나라는 문(文)을 숭상하고, 청 나라는 질박(質朴)을 숭상한다는 말이다.

 

○ 9일에 오랑캐가 유해와 홍립ㆍ난영을 차사(差使)로 보내 개성부(開城府) 풍덕(豐德)을 거쳐 행재소(行在所)에 들어오고, 11일에 강을 건넜다. 다음날 우리 측에서는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오랑캐의 차사를 접견하였는데, 임금이 답례를 하지 않자 오랑캐 차사가 크게 노하니 통역을 시켜 타일렀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홍립의 숙부 를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적진에 보내 위로하도록 하니, 유해 등이 돌아갔다. 유해는 본래 요동(遼東) 사람인데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이왕자(二王子)의 사위가 되었다. 《일월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