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5. 20:12ㆍ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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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집 1권 / 항전척독(杭傳尺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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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집략의 변설[明記輯略辨說]
지난해 연경에 갔을 때 우연히 청암(靑巖) 주린(朱璘)의 《명기집략》 몇 책을 발견했는데, 비록 아직 전서를 다 보지 않았지만 이 몇 책 중에만도 조선 사정의 기재가 잘못된 것이 지극히 많습니다.
선왕(先王)들이 까닭 없이 모욕과 무함당한 것에 있어서도, 잘못된 전문(傳聞)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정론(定論)이 되어, 수천 리나 되는 문물의 지역과 4백 년이나 된 시ㆍ례(詩禮)의 교화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전해줄 것이 못되게 만들었으니, 어찌 동방의 억울하고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반드시 덕망 높고 옳은 말하는 당세의 대군자(大君子)로서 후세에 신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 나서서 일편의 글을 지어 천하에 전하게 한 뒤에야, 중국의 의혹을 풀 수 있고 동방의 누(累)를 씻을 수 있게 되어, 집략의 오류는 변명을 기다리지 않아도 밝혀질 것입니다. 대개, 임금이 무고(誣告)를 당하고 있는데 그 아랫사람으로서 이것을 밝혀 설원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하된 도리가 아니며,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숨기고 덮어 천하의 이목을 가리고 백세(百世)의 공의(公議)에 반역한다면 이것은 천리(天理)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저의 사람됨이 비록 말하잘 것이 못되지만, 제공께서 알아주고 사랑해주어 충곡(衷曲)을 다 알고 계시니, 저를 신하의 도리도 모르고 천리를 어기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바라건대, 제공께서 이 근거 없는 말을 철저히 이해하고 신원하여 변명될 방도를 생각하여, 한 마디의 중대한 말로, 마침내 천하 후세에 신빙되게 하고, 유포(流布)된 간행본을 본국에 전해주기까지 하신다면, 제가 제공들과 맺은 친교가 더욱 동방의 땅에 있어서 할 말이 있게 될 것이고, 제공은 우리 동방에 있어 만세의 은인이 될 것입니다. 이에 그 기록에 의거해서 대략 변설(辨說)하기를 다음과 같이 합니다.
‘조선왕(朝鮮王) 휘(諱) 모(某)는 술에 빠져 국방에 있어 해이했다 …… ’ 하였는데,
소경왕(昭敬王 선조)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英明)하고 과감하여 정력을 다해서 좋은 정치를 도모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이(李珥)와 같은 특출한 학문과 세상을 경륜할 재질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발탁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국사를 담임하였습니다. 이가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10년 후에는 반드시 국가가 무너질 큰 변란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병사 10만을 길러서 대비해야 합니다.”
고 하였던 것인데, 그때의 재상이 유성룡(柳成龍)으로 또한 이름 있는 신하였지만 이(珥)의 말을 우원한 것으로 여겨, 일이 없는데 일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바로 이를 저지시키므로, 이가 나와서 추연(愀然)하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현(而見)도 또한 이러한 말을 하니, 국사를 말할 만한 사람이란 다시없다.”
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현은 성룡의 자(字)입니다. 이가 얼마 안되어 곧 병들어 죽었는데, 이가 죽은 뒤에 뭇 신하들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당파가 갈려 서로 알력을 일삼느라 변방에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대비할 줄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소경왕께서 힘을 다하여 조절하였으나, 할 수 없었고, 난리 중에 의주로 피신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의주에서 시를 지어 하기를,
조신들이여 오늘의 이 일 뒤에도 / 朝臣今日後
다시 서이니 동이니 이름질 것인가 / 寧復名西東
하셨으니, 대개, 군신(群臣)들이 당파를 일삼아 나라를 그르친 것을 통탄하신 것입니다. 유성룡이 난리가 끝난 뒤에 비로소 이이의 말을 생각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아무는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군비가 소홀했던 것은 여러 신하들의 붕당 때문에 저질은 잘못이었습니다.
왕께서 정사에 부지런 하였던 것에 있어서는, 패사(稗史)와 야언(野言)을 상고하여 보면 참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많은데, 어디나 한 마디도 술로 실정(失政)하였다는 말은 없으며, 또 이이를 등용하자 이이가 충성을 다짐하여 신하가 되었고, 당파를 제거하려고 하여 통탄하던 심정이 시구에 나타나 있으니, 술에 빠졌다는 것이 무언(誣言)인 것은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병신 7월 조(條)에, ‘총애하는 신하[嬖臣] 이덕형(李德馨)의 말을 들어 …… ’ 하였는데,
덕형의 호(號)는 한음(漢陰)이며, 본국의 유명한 재상으로 명절(名節)이 높은데, 폐신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도 사실과 어긋난 것입니다. 또, 광해군(光海君)은 이때 이미 세자(世子)로 있었습니다. 세자는 나라의 근본인데 인국(隣國)과의 화해가 아무리 중하다 해도 어린 세자로 하여금 험한 바다를 건너가 교할(狡猾)한 오랑캐의 조정을 밟게 할 것입니까? 이것은 전한 사람의 잘못입니다. 그때에 황신(黃愼)이 아경(亞卿 참판직위)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이었는데 《주판(州判)》이라고 한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또, 왜(倭)의 청봉(請封)은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중국이 능히 그 사명(死命)을 제어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미봉책(彌縫策)을 쓴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비록 분명히 그 간사한 계책임을 알았지만 중국 장상(將相)들의 환심을 잃어서는 안되겠기에 부득이 이 뜻을 굽혀 청봉을 하고 만 것이니, 왜가 맹약(盟約)을 파기한 것은 본래 조선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무술 7월 조에, ‘통제사(統制使) 이순(李舜)이 …… ’ 하였는데,
이것은 이순신(李舜臣)이니, 순신이 통제사(統制使)로서 삼도(三道)의 수군을 총괄하여 6년 동안 왜병을 방어하면서 전후에 10여 만의 군사를 격파하였습니다. 대개, 왜군이 능히 청ㆍ제(靑齊) 지방으로 건너가 직접 중원(中原)을 두드리지 못한 것은 순신이 그 길목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계(天啓 인조 1년 1623) 계해 5월 조에, ‘조선국왕 이혼(李琿)이 그 조카 이모에게 찬탈당했다 …… ’ 했는데,
이 한 도막은 비단 동방의 망칙한 무고일 뿐이 아니라 실로 윤리의 대법(大法)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대개, 혼(琿)은 바로 광해군(光海君)입니다.
소경 왕 말년에 왕비(王妃) 김씨가 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를 낳으므로 수상(首相)이던 유영경(柳永慶)이 궁중에 들어가 하례를 올렸는데, 광해가 후궁(後宮)의 소생인지라 자못 이 때문에 스스로의 의심을 갖고 있다가, 소경 왕이 승하하자 광해가 왕위에 올라, 바로 영경을 무함하여 죽이고, 아울러 의(㼁)마저 죽였는데 그때 나이 여덟 살이었습니다. 또, 왕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왕비의 어머니는 외딴 섬으로 귀양보냈는데 수년 만에 마침내 죽었습니다.
대비(大妃) 김씨는 서인(庶人)을 만들어 별궁(別宮)에 유폐(幽閉)시키고, 간하는 모든 신하들을 거의 모두 죽이거나 귀양보냈으며, 총애하는 계집 김씨의 권세가 안팎에 넘치고 정사가 회뢰(賄賂)로 행해지므로 민간에서 조롱하여 이르기를 ‘은왕 성탕(殷王成湯)’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은(殷)과 은(銀)이 음이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러운 짓의 소문과 민심의 원망을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이것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어머니이신 대비를 유폐하고 동기간을 죽였으니, 이미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습니다. 이때에 이귀(李貴) 등이 의병(義兵)을 인솔하여 대비를 맞아 궁에 돌아오시게 하고, 대비의 명으로 혼을 폐하였다가 다시 광해군으로 삼아 강화에 추방하였던 것입니다.
헌문왕(憲文王)이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명망과 덕행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대비의 명을 받들어 이 분을 모셔 즉위(即位)하셨던 것입니다. 이때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국가의 원로(元老)이었습니다. 폐모(廢母)하던 때에 있어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으므로 교외에 은거하고 있다가, 새 임금이 즉위하였음을 듣고는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창졸간에 새끼줄로 교자를 이끌게 하고 호창(呼唱)하면서 서울로 들어오니 장안 민중들이 보고서 기뻐하며 이르기를,
“완평이 들어오니 새 임금이 반드시 나라의 의로운 임금이다.”
하였던 것인데,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공중의 의론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혼은 어질고 유순하다 …… ’ 하였는데,
광해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고 선왕(先王)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으니 어질고 유순한 사람이 이와 같았겠습니까?
‘이모(李某)는 말 달리기와 칼 쓰기를 시험하였다.’ 하고, ‘고령(誥令)을 관장하려 했다 …… ’ 하였는데,
우리 나리의 법제에 종친(宗親 왕의 친)은 사 세(4世)까지 후한 녹을 주고 2품(品) 이상은 군(君)으로 봉하여, 과거보아 벼슬하지도 못하게 하고 조정의 정사(政事)에 간여하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감히 집에 갑주(甲冑)나 병기를 두지 못하며, 그 지극히 가까운 친족은 감히 조사(朝士)들과 함부로 사귀지 못하고 다만 날마다 시와 술, 풍류와 여색에 자신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옛적에 왕자의 스승이던 사람이 왕자를 일러 말하기를,
공자와 왕손이 꽃나무 숲에서 떨어지는 꽃을 향해 / 公子王孫芳樹下
맑은 노래 고운 춤으로 일생을 보내네 / 淸歌妙舞落花前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왕자들의 일을 말한 것으로서, 종친들의 스스로 처세(處世)하여 가는 바를 대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그 말 달리기와 칼 쓰기를 실험했다는 무고와, 고령(誥令)을 관장했다는 오류는 참으로 여러 말 할 것이 못 됩니다. 하물며 이 당시 기상을 살펴본 사람이, 왕택(王宅 뒤에 헌문 왕이 된 능양군(陵陽君)의 저택)에 왕기(王氣)가 서린다고 비밀히 아뢰므로 광해가 듣고 의심하게 되었고,
왕이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그 집을 비워 감히 거처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장차 조석간에 화가 미치게 된 판인데, 감히 요로를 차지하고 무용을 과시하여 화를 재촉하였겠습니까?
‘혼의 계조모인 왕 대비(王大妃)와 밀약하여 3월 9일에 궁중에서 불을 질렀다 …… ’ 하였는
왕대비는 광해에게 어머님이 됩니다. 이때에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되어 수비가 매우 엄하므로 자기 자신을 구출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판인데, 궁중에서 불을 질러 신호를 하려 한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귀(李貴) 등이 불을 끈다는 구실로 군사를 인솔하고 궁중에 들어가 혼을 결박하여 타는 불 가운데 던져 죽이고 그 세자궁(世子宮)의 권속과 친근하게 신임하던 사람들을 다 죽였다. …… ’ 하였는데,
불을 질렀다는 것이 이미 잘못 전해진 것인 바에야 불끄기를 구실 삼았다는 오류는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거의(擧義)하였을 때 이귀 등이 장단부사(長湍府使)인 이서(李曙)와 약속하여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밤을 이용하여 북문에서 문지기를 죽이고 들어가 궁문 밖에서 불을 놓았습니다. 수위하는 군사들이 대비를 맞아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자진 해체하여 감히 대드는 사람이 없으므로 드디어 서궁으로 갔었는데 문을 이미 쇠를 녹여부어 열 수 없으므로 철퇴로 쳐부수고 대비를 모셔 정궁(正宮)으로 돌아와 광해를 끌어내어 10가지 큰 죄목으로 문책한 뒤 폐위하여 서울에서 백여 리 떨어진 강화에 안치하였는데, 그 세자궁의 권솔도 모두 따라갔던 것입니다. 처음에 대비께서, 광해의 죄악이 너무나도 현저하므로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으나, 헌문 왕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끝까지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뒤에 광해의 세자가 강화로부터 서울로 도망쳐 들어와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매 드디어 광해까지 함께 제주도로 옮겼고, 8년 후인 신사년에 광해가 병들어 죽었으니, ‘불더미 속에 던져 죽이고 세자궁의 권솔까지 죽였다.’는 것은, 전부 오전(誤傳)된 것입니다. 친근하게 신임 받던 사람으로는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등 수십 인이 모두 극력 폐모(廢母)하는 논의에 찬동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죄가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개, 거의(擧義)하여 반정(反正)한 뒤에 죄 있는 사람은 죄주고 악한 정치는 개혁하여, 윤리가 어두웠다가 다시 밝아지고 국가가 위태롭다가 다시 편안해져, 자연 서로 보고 서로 들으려고 하게 되어 민심을 위안시킨 것은 물론이요, 특히 그 광해군 부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더할 수 없는 깊은 인(仁)이요 성한 덕으로서 길이길이 후세에 칭송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할 시초에 초야의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모여들었고 의거(義擧)를 주창한 사람들도 또한 거개 유문(儒門)에서 도를 강론하던 선비들이었으므로 지금 1백 50년이 되도록 초야에서 높이 평가하여 군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불행하게도 근거없는 말이 중국 땅에 흘러들어가 이와 같은 망극한 무고가 역사에 기록되게 하여, 선왕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여러분들의 의거를 일으킨 공이 천하에 밝혀질 수 없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등ㆍ래(登萊) 지방 순무(巡撫) 원가립(袁可立)이 상소에, 만일 과연 무도(無道)하면 마땅히 대비로 하여금 사실을 갖추어 아뢰고 조용히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 하게 한다.’ 하였다는데,
이 말은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때 대비께서 별궁에 유폐되어 그 자신도 보전할 수 없었는데, 비록 갖추어 아뢰고자 하였던들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광해가 그때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악독한 위세를 부리고 있어, 군사가 없이는 그 권세를 제거할 수 없고 내쫓지 않으면 종묘ㆍ사직을 보존할 수 없으며 나라에 임금이 없이는 선비와 백성을 안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대저, 속국(屬國)과 내번(內藩)은 전부터 사체와 전례가 동떨어지게 달라, 먼저 의거를 일으키고 뒤에 보고하는 것이 진실로 난을 치는 권도(權道)인 것인데, 이때 원(袁)의 뜻이야말로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유와 같이 보아 참난(僣亂)의 죄과에 돌리려 한 것이니,
아아! 그 생각하지 않음이 너무도 심한 것입니다.
‘전년에 왜적을 막아 준 은혜를 생각하여 중국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다가 오늘날의 변을 당하게 되었다. …… ’ 하였는데,
이 말은 더욱 사실과 어그러집니다. 대개, 만력(萬曆) 때 왜적을 방어해 준 전역(戰役)이야말로 우리 동국의 망극한 은혜였습니다마는, 오직 광해가 책봉(冊封)되었을 때에 명조(明朝)에서 시종 허가하지 않으므로 광해가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다가, 만력 기미(己未 광해 11 1619)에 양호(楊鎬)와 유정(劉綎)이 건주(建州)에서 패전하여 명조에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게 되자, 조선에서 대장 강홍립(姜弘立)에게 명하여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고 김응하(金應河)와 김경서(金景瑞)로 부장(副將)을 삼았었는데, 광해가 비밀히 홍립에게 지령하여 성패를 관망하여 적절히 대처하라고 했었습니다. 홍립이 과연 머뭇거려 늑장을 부리다가 심하(深河)에 이르러서는 밀지(密旨)가 있다고 하여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고, 홀로 김응하만이 명 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니, 오직 저 홍립의 항복은 실로 광해의 비밀 지령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헌문 왕의 비는 바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입니다. 한씨는 그야말로 삼한(三韓)의 후손이요 기자(箕子)의 후예인데, 사람들의 말이 어찌 이토록 속이고 어긋나는 것입니까? 전하는 말이 와전(訛傳)되는 데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어서, 남(南)이란 글자 때문인 것 같은데, 왜(倭)가 우리 나라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자음(字音)이 와전되고 또 와전된 것 같습니다. 대개, 광해 때에 모든 신하들 중에서 폐모를 주장한 사람을 《북(北)》으로 지목하였으니,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ㆍ허균(許筠)의 무리 같은 자들이오,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고 죄당하게 된 사람들을 《남(南)》이라고 지목하였으니, 이원익과 한준겸 같은 사람이 이들입니다. 당시 본국의 문자 상에 더러 헌문 왕을 남인(南人)의 사위라고 말한 것이 있었는데, 이 말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자 중국이 드디어 잘못하여 남인을 왜인(倭人)으로 알아 이러한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전문(傳聞)의 와전이란 대개 이런 것입니다. 이래서 사서(史書)에 궐문(闕文)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며, ‘글을 글자 그대로 다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병인(丙寅)년, 강왈광(姜曰廣)의 책봉조(冊封條)에, ‘조선왕 모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므로 변신(邊臣)이 토벌할 것을 청하자, 위충현(魏忠賢)을 끼고서 책봉을 청하였다 …… ’ 하였는데,
창의(倡義)하여 반정(反正)한 것 때문에 찬탈ㆍ시역(弑逆)하였다는 수악(首惡)의 누명을 뒤집어썼으니 그 원통함이 극도에 달하여 더 말할 수도 없거니와, 애석한 것은 중국에 양심적인 사가(史家)가 없고 천하에 공의(公議)가 없는 것입니다! 위충현에게 책봉을 청하였다는 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동국이 불의를 저질러 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조정의 공의에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서는 새길을 찾아 권세 있는 환관과 결탁하여 고명(誥命 책봉을 허락하는 황제의 명령)을 도둑하려고 했다는 말인데, 바로 이 한 마디 반전된 말의 사이에서, 당일의 반정 대의가 말살되어 버리고, 천고에 원흉이라는 죄악이 성립되어 버려, 수백 년 동안의 예의(禮義) 염치(廉恥)를 지켜온 기풍(氣風)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아! 이것을 변명(辨明)하지 않으면 동방이 끝내 구이(九夷)의 하 나라는 누추(陋醜)를 벗어나지 못하여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없을 것이니,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은 동방의 영원한 원수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주-D001] 패사(稗史) :
소설이니 전설이니 하는 민간의 자질구레한 일들이나, 항간의 떠도는 말 등을 기록한 것.
[주-D002] 청봉(請封) :
일본(日本)이 명(明) 나라에 봉왕(封王)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
[주-D003] 청ㆍ제(靑齊) :
청(靑)은 중국 고대의 구획을 말한 구주(九州)의 하나로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요동 등의 각지를 말하고 제(齊)는 전국 시대의 국명으로서 역시 산동성의 익도현(益都縣) 부근을 말함.
[주-D004] 내번(內藩) :
천자의 도읍(都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후국이니, 외번(外藩)은 이와 반대임.
[주-D005] 사략(史略) :
사실(史實)을 약술한 역사서이다. 당서 예문지(唐書藝文誌)에 두 신 사략(杜信史略) 30권이 있고 송(宋)의 고 사손(高似孫)의 찬술로 6권이 있다.
[주-D006] 사슴을 노래[歌鹿] :
《시경》소아(小雅)의 군신가빈(君臣嘉賓)의 연례(燕禮)에 부르는 녹명장(鹿鳴章)을 말하는 것인 듯함.
[주-D007] 산음승흥(山陰乘興) :
중국 진(晋)의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거주하였는데 큰 눈이 내리는 밤에 홀연히 그의 친우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났다. 안도는 섬(郯)땅에 살고 있었으므로 문득 작은 배를 타고서 밤으로 도착하였다. 그러나 문전에 가까이 다달아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왜 그대로 돌아왔는가 하고 물었더니 왕자는 대답하기를, ‘흥이 나서 갔었는데 문전에 가서는 흥이 딱 떨어져서 돌아온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 사람을 보아야만 하는가?’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주-D008] 남악이자(南嶽二子) :
남악(南嶽)은 형산(衡山)을 말함.
[주-D009] 거인(擧人) :
한(漢) 때에 수령이 천거한 사람을 말한 것인데, 후세에 와서는 과거보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거인이라고 했음.
[주-D010] 회시(會試) :
명사(明史) 선거지(選擧誌)에 말한 것을 보면 각성의 거인(擧人)을 경사(京師)의 공원(貢院)에 집합해서 행하던 시험이다. 이에 합격한 자를 공사(貢士)라고 하며 전시(殿試)에 응하여 진사의 자격을 얻는다. 3년에 한 번씩 거행하였다. 청대에도 이 제도를 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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