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6. 15:41ㆍ병자호란
서계집 제16권 / 행장(行狀) 2수(二首)
전라도 병마절도사 정공(鄭公)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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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봉수(鳳壽), 자는 상수(祥叟), 성은 정씨(鄭氏)이다. 그 선대는 하동인(河東人)이다.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세웅(世雄)이고, 조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증(贈) 병조 참의 인각(麟角)이고,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 증 병조 참판 휘 양년(陽年)이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충주 김씨(忠州金氏)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연(淵)의 따님이다. 봉증(封贈)된 것은 모두 공이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선조(宣祖) 5년인 임신년(1572)에 태어났다. 공은 충후(忠厚)하고 담략(膽略)이 있었으며 신장이 7척(尺) 남짓이었다.
8세 때에 고을 근처 골짜기에 있는 사혈(蛇穴)에서 뱀이 때때로 나와서 사람을 무는 일이 발생하였으나 이를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저 뱀을 잡을 것이다.” 하고, 아이들을 거느리고 뱀이 있는 사혈에 가서 먼저 몇몇 작은 아이들에게 작대기를 쥐고 사혈 곁의 좌우에 숨게 한 다음, 뱀이 사혈에서 나오면 작대기로 쳐서 잡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잘 달리는 조금 큰 아이에게 사혈에서 뱀을 약 올린 다음 재빨리 도로 달아나게 하였는데, 뱀이 과연 사혈에서 나와 그 아이를 쫓았다. 이에 공이 크게 소리치자 숨어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들고 있던 작대기로 마구 쳐서 뱀을 죽이니 뱀으로 인한 근심이 드디어 사라졌다.
또 공은 어릴 때 식물을 심어 가꾸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미나리를 가져다 맨땅에 심고는 물을 대며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비를 내려 이 미나리를 배양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큰비가 내려 채소밭이 모두 물에 잠겼으나 미나리만 무성하게 자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선조 25년인 임진년(1592)에 왜적이 침입하였다. 공은 이해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난리에 어가를 호종하고 전후로 6년 동안 종군(從軍)한 공으로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후에 부장(部將)을 거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전직(轉職)되었고 동부 주부(東部主簿)로 개차되었다.
선조 39년인 병오년(1606)에 감찰로 천직(遷職)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영산 현감(靈山縣監)이 되었다. 이듬해에 부친의 병환으로 휴가를 청하여 돌아와서는 복직하지 않았고, 또 5년 뒤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기를 마치고 나서도 묘소를 지키며 지낼 뿐 나가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과 살촉을 갈며 항상 대비하는 듯하였는데 공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0여 년이 지나 인조(仁祖) 5년인 정묘년(1627)에 북로(北虜)가 침입하는 난리가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떨치고 일어나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수호하며 대적(大敵)을 막고 유민(遺民)을 보호하는 등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당시에 중용(重用)되었다.
이해 정월에 10여 만의 호기(胡騎)가 밤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함락하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돌기(突騎)가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일군(一軍)은 곧장 능한산성(凌漢山城)에 이르렀고 일군은 사포(蛇浦)로 들어가 모문룡(毛文龍)을 습격하려 하였다. 이에 철산 부사(鐵山府使) 안경심(安景深)이 몸을 빼서 웅골산(熊骨山)으로 달아났다. 당시에 오래도록 태평 시절을 누린 터라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여 대부분 약탈을 당하였다. 공의 집은 철산부의 서쪽 촌락의 외진 곳인 해곡(海曲)이었으므로 이튿날에야 비로소 난리를 피해 도망 온 사람을 통해 ‘노적(虜賊)이 사포를 격파해서 한인(漢人)을 모조리 죽이고 위협하여 사람을 붙잡고 가축을 약탈해서 동쪽으로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당시에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이 구성(龜城)에서 병사(兵使)와 만났다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휘하 수십 인과 함께 노병(虜兵)을 뚫고 말을 타고 달려 용골산성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병사를 수합하여 굳게 지키니 노병이 그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안도하고 근방의 피난민들이 또한 대부분 용골산성으로 귀의하였다. 노병이 국경을 침입한 다음, 약탈한 고을의 백성들을 모아놓고 토착민을 부령(部領)으로 삼아 군중(軍中)에 배치하고서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기 때문에 저들에게 귀순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안경심이 철산부의 경내가 텅 빈 것을 보고 스스로 보전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말을 타고 달려와 공을 뵙고 계책을 물었는데, 공이 힘을 합해 적을 막기를 청하였다. 안경심이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앉아서 말하는 사이에 붙잡혀간 사람이 노적의 영전(令箭)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노적이 정 영산(鄭靈山) 형제가 백성들을 모아 해도(海島)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로 하여금 불러오게 하였다. 노적에게로 간다면 가솔이 보전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륙을 당할 것이다.” 하여, 공이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뿐이다.” 하니, 그 사람은 곧 가버리고, 안경심은 안색이 변하여 급히 웅골산으로 돌아가려 하기에 공이 애써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노적이 연이어 능한산성과 안주(安州)를 함락하고 날로 남하하면서 수만 명의 병사를 창성(昌城), 의주(義州), 선천(宣川), 곽산(郭山)에 나누어 주둔시키니 관서(關西)의 군현(郡縣)이 모두 노적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이희건이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과 함께 용골산성에 있으면서 형세가 더욱 고립되었는데, 노기(虜騎)가 날마다 왕래하면서 갖은 수단으로 위협하니 성중의 장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졸들이 또 노적에게 귀순한 사람들이 당장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고립된 성이 구원을 받지 못하여 조만간 격파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디어 방수(防戍)하던 남병(南兵)과 함께 한밤중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이에 이희건이 성가퀴에 올라가 통곡하고는 홀로 말을 타고 달려 남쪽으로 달아났다. 장사준은 의주 사람인데 처자가 모두 노적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성을 노적에게 넘기고 말았다. 노적이 장사준을 용골진장(龍骨鎭將)으로 삼아 백성들을 불러 모으게 하고 이어 부사(府使)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기 때문에 용천 일대는 다른 군과 달리 노적의 약탈을 면하였다.
공은 당시에 가솔을 거느리고 해도(海島)에 들어갔는데 그곳으로 와서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 만에 노적이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도로 육지로 나와, 아들 경호(景顥)에게 노적의 상황을 엿보게 하였다. 경호가 채 몇 리도 못 가서 100여 기(騎)의 노적을 만나 도로 공이 있는 곳으로 도망해 오니 몇 기의 노적이 뒤쫓아 왔다. 이에 공이 활을 당겨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서 자제들에게 모두 병장기를 들고 말에 올라 진을 치고 기다리게 하니, 노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앞쪽에 조수가 쓸려 나가면 육지와 통하는 소도(小島)가 있었으므로 가솔들에게 먼저 소도로 들어가게 하고 공이 몇 기와 함께 후미를 끊었는데 난리를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공이 채 건너기도 전에 몰려들어 포구(浦口)를 가득 메웠다. 노기가 갑자기 이르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니 소도 안의 사람들이 또한 모두 놀라 뿔뿔이 흩어졌고, 오직 몇 사람만이 떠나지 않았다. 공이 힘을 다하여 막으니, 노적이 끝내 소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노적이 사람을 보내 공을 회유하게 하였으나 공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소전(小箭)을 쏘아 노적 둘을 사살하니 노적이 달아났다. 공이 드디어 응도(鷹島)로 옮기니 흩어진 백성들이 도로 모여들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한인 전준(錢俊)이 그 무리와 함께 정씨(鄭氏)의 무덤이 있는 숲 속으로 도망하여 숨자, 마을의 무뢰한 자가 무리를 모아 이들을 모두 때려 죽였는데 전준 혼자만 탈주하여 가도(椵島)로 돌아갔다. 2월 22일경 바다에 대선(大船)과 소선(小船) 도합 7척이 조수를 따라 밀려오자 공이 놀라 말하기를, “이는 필시 전준이 오는 것이다.” 하고, 급히 육지로 나가 산에 올라가 결진(結陣)하고 기다렸다. 이날 밤에 안개가 많이 끼어 지척에서도 사람을 분변할 수 없었는데 적도들이 왁자하게 다가오자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 버리고 공이 아우 한 명, 아들 한 명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서로 맞붙어 수십 인을 죽이니 적도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은 상처를 많이 입었으나 옷이 두꺼운 덕분에 죽지 않았고, 아우 기수(麒壽) 또한 오른팔에 화살을 맞아 활을 쥘 수 없는 데다가 화살마저 떨어져 이에 달아났다. 공은 당시에 56세였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깊은 상태였으므로 정히 위급하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언덕 아래에 말 한 마리가 고삐를 드리우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 바로 공이 타던 전마(戰馬)였다. 공의 아우와 아들이 즉시 공을 안아 말에 태우고 떠났다.
공이 가솔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다나 육지를 막론하고 모두 적들이 들끓어 피할 만한 곳이 없다. 듣건대 장사준이 용골산성을 가지고 노적에게 항복하여 그 경내가 일시적으로나마 그런대로 편안하다고 하니 가서 사세를 관망할 만하다.” 하고, 즉시 처자를 거느리고 용천(龍川)으로 달려갔으나 굶주리고 지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민가에 묵었다. 용천 사람 이광립(李光立) 형제 다섯 명이 공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맞이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해 주었다. 이광립은 이희건이 용천 부사로 있을 당시에 용천부의 좌수(座首)였기 때문에 장사준이 위협하여 구직(舊職)인 좌수를 그대로 맡게 하였다. 공이 이곳에 거처한 지 며칠이 지나자 노적의 유기(游騎)가 갑자기 들이닥쳐 이광립의 집을 포위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먼저 자진하여 머리를 깎아 변발을 하였다. 공이 종자(從者)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50을 넘었고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머리를 짧게 잘라 구차히 살기를 구하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응당 활시위를 잡아당겨 화살을 쏘아 사생결단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이광립이 우마(牛馬)에다가 건량(乾粮)을 실어 노적에게 보내니 노적이 그제야 포위를 풀고 갔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화를 다행히 면하였다. 용골산성은 성이 완전하고 병기가 갖추어져 있으며 양식이 또 많고 장사준이 노적과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노적이 필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저 용골산성에 가서 천천히 후일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밤을 틈타 이광립 등과 함께 가솔을 거느리고 용골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에 노기가 과연 다시 이르러 집을 불 지르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 이날 총진대(摠鎭臺) 앞의 수기(帥旗) 꼭대기에 마치 무지개가 높이 허공에 뻗쳐 올라가는 듯한 청백(靑白)의 기운이 있었고, 그 위에 백운(白雲)과 흑운(黑雲)이 동서쪽으로부터 와서 한참 동안 뒤섞여 움직였다. 이로부터 난리를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공이 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 이에 장사준이 노적에게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우마(牛馬)를 빼앗아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노적에게 선물로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공이 망루를 두루 살펴보고 몇 차례 장사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험준한 지형을 믿을 만하다고 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래서 장사준이 기꺼이 노적을 섬기고 의거(義擧)에 합세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감히 말하지 않았다. 채 며칠이 안 되어 몇 기의 노기가 이르자 장사준이 진충루(盡忠樓) 위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는데 철산의 무사 이인(李仁)이 곁에 있다가 노적의 활을 한번 잡아당겨 보았는데 그만 활이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장사준이 크게 노하여 이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였다.
당시에 ‘노적이 정 영산 형제가 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꺼려 몰래 장사준과 모해(謀害)하려 한다.’는 말이 성중에 나돌았는데, 공이 은밀히 대비하고 있었다. 본부의 무사 김종민(金宗敏)은 평소 충실하고 자질이 또 영민(英敏)하였다. 공을 뵙고 묻기를, “공은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왔습니까?” 하여, 공이 말하기를, “곤궁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몸을 의탁하려고 이곳에 왔다.” 하니, 김종민이 말하기를, “저는 공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사태가 급해지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려고〔舍生取義〕 해서이다.” 하니, 김종민이 개연히 말하기를, “공과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은밀히 김종민에게 말하기를, “성이 이처럼 험고한 데다가 곡식도 몇 개월을 지탱할 수 있고 사람도 수천을 밑돌지 않으니 형세로 보아 충분히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거병(擧兵)하여 적에게 대항하지 않고 솥 안에 든 고기 떼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구차히 보존한다면 어찌 또한 한스럽지 않겠는가. 만약 뜻있는 병사 수십 인을 얻어 성중에 호령하여 험고한 지형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자신을 보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명(功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종민이 말하기를, “지금 성 안에는 장사준이 있고 성 밖에는 강한 노적이 있으며, 성중의 사람들은 태반이 전일에 성에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무리이니, 의거에 참여시키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 당시와 지금은 시기도 다르고 사정도 바뀌었으니 잘 도모하는 자는 능히 기회를 인하여 공을 이룬다. 지금 노병이 사방에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지(死地)에 깊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 수 있는 방도로 격려한다면 어느 누군들 분발하여 의거에 합세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 나의 동정은 남이 엿보고 있으니 감히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군은 본부 사람이니 필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사람들이 평소에 군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이해(利害)로 깨우쳐 의거에 합세하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되고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할 수 있는 때이다.” 하니, 김종민이 그 계책을 심히 옳게 여겨 드디어 은밀히 동지와 함께 모의하였다. 공이 또 비밀리에 모의한 내용을 용천의 사인(士人) 이개립(李介立)ㆍ이촉립(李矗立) 형제에게 고하니, 역시 개연히 따랐다. 이에 김종민, 이개립, 이촉립, 이희로(李希老), 심일(沈溢), 최인립(崔仁立), 백무립(白武立) 등 8인과 더불어 계책을 세웠다.
공이 말하기를, “공 등이 각자 100인을 모집한 뒤에야 대사(大事)를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김종민 등이 나가서 병사를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공의 아우 기수가 말하기를, “이들은 바로 겁먹은 병졸과 난리를 겪은 백성들이니 의리로 달래서는 안 되고 술수로 속여야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의거를 하려 하면서 먼저 속임수를 써서야 되겠는가?” 하니, 기수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안군(成安君)은 기묘한 계책을 쓰지 않아서 끝내 지수(泜水)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전단(田單)은 신(神)이 나의 스승이라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켜 온전한 제(齊)나라를 수복하였으니, 이를 통해 고인의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김종민 등에게 명하여 유식한 장자(長者) 및 호걸스러운 이의 명자(名字)를 명부에 죽 기록한 다음, 각각 거짓으로 수결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유식한 장자 및 무사들이 모두 이처럼 의거에 참여하였는데 너희들은 어찌 장자와 일을 함께 하지 않고 부질없이 노병(虜兵)에게 죽는 짓을 하려 하느냐?” 하니, 이 명부를 본 자들이 믿고서 암암리에 서로 알려 준 덕분에 모집에 응한 자가 거의 수백 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때가 되기를 기다려 거사를 일으키기로 기약하였다.
심일이 은밀히 와서 고하기를, “거사의 기밀이 많이 누설되어 조모(祖母)의 늙은 계집종이 이미 사준에게 고하였으니, 장차 어찌해야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성패는 하늘에 달렸으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 아주 안전한 계책이 따로 있으니 군 등은 우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 밤에 장사준이 공의 아우를 불러 방에 들게 한 다음 사람들을 물리치고 묻기를, “공의 형제가 망녕되이 이상한 모의를 한다고 하던데 진실로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기수가 부정하며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만번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공에게 와서 몸을 의탁하였는데 공이 정성을 다하여 대우해 주셨습니다. 이는 필시 간사한 사람이 말을 만들어 내어 공이 의심하게 하여 우리 형제가 죄를 얻게 만들려는 수작일 것이니, 우리들이 내일 성을 나가 멀리 떠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참소하는 말이 즉시 절로 수그러들어 공은 우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장사준이 말하기를, “나 또한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공의 형제와 평소에 정의가 두터운지라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하기에 감히 덮어둘 수 없어 말한 것일 뿐이니, 어찌 가벼이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다시 따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기수가 밤이 깊은 뒤에야 돌아와 전말을 갖추어 공에게 아뢰었다. 기수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가서 곧바로 장사준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니, 장사준이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하였다. 기수가 말하기를, “가솔을 거느리고 장차 성을 나가려 합니다. 이에 와서 하직 인사하는 것입니다.” 하니, 장사준이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하십니까. 영산이 필시 어젯밤에 한 말을 언짢게 여긴 것이군요.” 하였다. 기수가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공의 은혜에 감격하여 진실한 마음뿐 다른 마음이 없는데 사람들이 의심하니 다시 어찌 감히 이곳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떠나는 것뿐입니다.” 하니, 장사준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의심하지 않는데 그대는 어찌 스스로 의심합니까.” 하고, 굳이 만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준이 처자를 살피기 위해 의주로 달려갔다가 3월 2일에 10여 기(騎)의 호기와 함께 돌아와서 노장(虜將)의 영(令)으로 성중(城中)에 영하기를, “성 안의 남자와 여자는 각자 쌀 10말〔斗〕을 의주 군중(軍中)으로 져다 날라라. 이 영을 어기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하니, 성중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기뻐하기를, “대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김종민 등 몇 사람으로 하여금 고의로 말을 퍼뜨리게 하기를, “노적이 우리 성중에 사람이 많은 것을 꺼려 쌀을 져다 나른다는 명분으로 유인하여 이르게 한 다음, 이어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고 나서 그 틈을 타 처자를 약탈하려 한다.” 하니, 이날 밤에 인심이 흉흉해져 의거에 합세하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다음 날 장사준이 성중에 명령을 내려 10세 이상은 모두 창고 아래에 모이게 하였다. 장사준이 공과 함께 진충루 위에 앉아 장사들을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좌수 이광립으로 하여금 창고를 열어 남자에게는 5말씩, 여자에게는 3말씩 쌀을 나눠 주게 하였다. 이에 김종민이 이촉립에게 칼을 가지고 많은 사람 속에 들어가 곡식 더미 위에 서서 큰소리로 말하게 하기를, “너희들은 오늘 쌀을 지고 가서 압록강을 건너가 이역(異域)의 귀신이 되겠느냐, 아니면 이 쌀을 먹고 이 성을 지켜 충신이 되겠느냐. 더구나 너희들이 믿고 성에 모인 까닭은 쌀 때문인데 지금 노적에게 보내 주고 나면 너희들이 다행히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서 먹을 것을 취하겠느냐. 오늘의 일은 참으로 이른바 도적에게 양식을 가져다준다는 격인데, 너희들은 어찌 혼매하여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단 말이냐.” 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모두 성을 사수하기를 원하였다.
김종민이 들어가서 장사준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쌀을 보내려 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이 틈을 타고 장사준에게 이르기를, “공은 몸소 국가의 은혜를 입어 관작이 현귀(顯貴)하니, 의리상 노적을 격파하여 국가에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미력이나마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니, 장사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재앙이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의주는 나라의 강대한 번진(藩鎭)인데 일거에 도륙을 당하였고 능한산성과 안주는 도내의 큰 진영인데 멀리서 적의 기세를 바라보기만 하고도 와해되었는데, 더구나 이 용렬한 패망한 백성들이 감히 노적의 칼날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또 나의 가속이 모두 노적의 수중에 있으니, 내 차마 처자를 노적에게 남겨 두고 내 한 몸만 살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말을 꺼내지 마십시오.” 하였다. 공이 반복하여 설득하고 깨우쳤으나 장사준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촉립이 곁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정 영산은 평소에 인망이 있고 전략을 잘 아니 이 성은 오직 영산만이 지킬 수 있다. 하늘이 이미 영산에게 이 성을 맡겼으니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고, 장사 이희로 역시 칼을 뽑아들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대장이 정해졌으니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고,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기세등등해져 공을 부축하여 견여(肩輿)에 태우고 옹위하여 총진대(摠鎭臺)에 이르렀다. 장사준은 좌우가 텅 비어 아무도 없자 혼자 멍하니 앉아 말하기를, “다만 시종을 지켜볼 뿐이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고서 군례(軍禮)를 행하고 전패(殿牌)를 설치하였다. 장사들이 모두 천세(千歲)를 외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공이 즉시 제장(諸將) 40여 인을 배치하고 김종민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공이 이에 장사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지금 제공들이 나를 다그쳐 대장으로 삼았다. 내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것은 진실로 나의 평소 뜻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오늘 오합지졸을 억지로 모아 이 대사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제군의 지려(志慮)가 굳건하지 못하여 시종여일(始終如一)하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당대에 웃음을 살 뿐만 아니라 또한 만대에 수치를 끼치게 되고 말 것이다. 원하건대, 제군들은 제각기 충의를 떨쳐 한결같은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죽어도 후회하는 바가 없게 하라.” 하니, 장사들이 모두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감히 영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제장을 각자 지킬 자리로 나누어 보냈다. 제장이 모두 말하기를, “장사준은 끝내 의거에 합세할 사람이 아니니, 지금 거사를 하면서 그의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대의(大義)를 밝혀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일찍 제거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거사를 시작하는 지금 수비가 완전하지 못한데 대뜸 사준을 죽인다면 노적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필시 재빨리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잘 대우하여 적을 누그러뜨린 다음 일이 정해진 후에 죄를 성토하여 죽이는 것이 낫다. 그때 가서 죽여도 오히려 늦지 않다.” 하고, 다음 날 사람을 보내 양영(兩營)에 첩문을 전했다.
황조(皇朝)의 좌도독(左都督) 모문룡(毛文龍)이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요민(遼民) 20여 만을 거느리고 와서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주둔하였다. 난이 일어난 이후에 모병(毛兵)이 배를 타고 해상(海上)에 출몰하면서 노적에게 투항한 자를 사로잡는다는 핑계로 우리의 남자와 여자를 살육하고 약탈하여 거의 다 없어졌는데 특히 연해(沿海)의 백성들이 그 해를 입었다. 당시에 독부(督府)의 기고관(旗鼓官)인 왕사선(王士善)이 병사를 거느리고 미곶에 있었으므로 공이 왕사선에게 이첩(移牒)하여 합세하여 저들을 막아 침략하지 못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노적이 명오리(鳴烏里)로 군병을 옮겨 의주로 향하려 하였는데, 공이 수백의 정예병을 내어 성의 서쪽 산이 좁은 곳에서 맞이하여 엄습(掩襲)해서 노적이 약탈해 간 수십 마리의 가축 및 호마(胡馬) 3필을 빼앗아 공로가 있는 사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장사준은 세력을 잃고 날로 고립되어 항상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11일에 의주로 가서 처자를 만나고 그 기회에 노적의 정세를 정탐하고 오겠다고 청하였는데, 공이 허락하였다. 이에 제장이 모두 불가하다고 여겨 말하기를, “사준은 우리의 허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주로 간다면 필시 간교한 꾀를 부릴 것이니, 보내지 말고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금 노적과 보루를 마주하여 대치하고 있는데 병사들은 모두 오합지졸이니, 시일을 오래 끌면 장차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양식 또한 바닥이 날 것이다. 지금은 수비가 이미 완전하니 사준으로 하여금 노적을 격동시켜 싸움을 재촉하게 하여 격파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장사준이 의주에 이르러 사정을 호소하니 노장(虜將)이 이 말을 듣고 즉시 편지를 써서 공에게 보냈는데, 거기에 “정 대장이 용천에 왔다는 사실을 내가 일찍이 듣지 못했다. 어찌 일찍이 나에게 통지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대부분 회유하고 위협하는 말이었으므로 공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노적이 장사준과 더불어 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장사준이 정예 갑병(甲兵) 300명을 몰래 이끌고 와서 저물녘에 북산(北山)의 소나무 숲에 이르러 매복시켜 두고 횃불을 올려 신호하면 출병하기로 약속하였다. 장사준이 밤을 틈타 성에 들어와서는 공을 만나지 않고 곧장 자신이 거처하던 무욕당(無欲堂)으로 갔다. 이에 공이 이상한 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먼저 사람을 보내 위문하게 하니, 장사준이 사례하기를, “멀리서 말을 달려 와 밤이 깊었으니 내일 만나 뵙겠습니다.” 하였다. 공의 아우 정기수가 말하기를, “직접 가서 만나 보겠습니다.” 하고, 장사 몇 사람을 거느리고 무욕당에 이르러 장사준의 행동거지가 전과 다름을 알아차렸다. 정기수가 즉시 장대(將臺)로 돌아왔다.
밤이 이미 2경이 되자 정탐하러 간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호병(胡兵)이 소나무 숲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즉시 장사로 하여금 다시 정탐하게 하였는데 장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호병이 이미 성 바깥까지 바짝 다가왔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장사준이 호병을 이끌고 온 것이다.” 하였다. 제장이 모두 말하기를, “먼저 장사준을 참수한 뒤에야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누차 청하고서야 허락하였다. 제장이 병사를 이끌고 장사준이 거처하는 당 아래에 이르니 시비(侍婢)가 병사가 왔노라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제장이 시비를 격살(格殺)하고 드디어 당으로 들어가니 장사준이 칼을 뽑아들고 베개에 기댄 채 누워서 미처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장사준 및 심복 10여 인을 죽이고 동당(同黨)인 문응신(文應信), 김덕황(金德黃)을 체포하여 모두 참수하여 조리돌리니, 노적이 드디어 물러갔다.
장사준에게 협박을 받아 따른 자들은 모두 풀어 주어 죄를 다스리지 않고 각자 임무를 주었다. 제장이 모두 말하기를, “이광립은 장사준 밑에서 좌수를 지냈으니 죽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광립은 평소에 충의를 품고 있었는데 단지 장사준에게 협박을 당하였을 뿐이다. 더구나 이광립의 자제 수십 인은 모두 무력(武力)이 있으니 어찌 모조리 죽여서 우리의 군세(軍勢)를 꺾이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장이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하였다. 이광립이 의심을 품고서 병기를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키자, 공이 아우를 보내 깨우치게 하기를, “그대는 어찌 나를 믿지 못하는가. 우리 형제가 어찌 차마 그대를 죽이고 홀로 살겠는가.” 하니, 이광립이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이에 장사준의 재물을 수합하여 장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고는 명령을 내리기를, “노적이 성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장사준 때문이었는데, 지금 장사준이 죽었으니 노적이 필시 쳐들어올 것이다. 공 등은 의당 각자 면려하여 법령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야경(夜警)을 돌고 창을 베고 잠을 자면서 수비를 엄밀하게 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공의 풍성(風聲)을 바라보고 달려와서 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노적이 장사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즉시 불러 모으니 여러 둔영의 인마(人馬)가 3일 만에 양책(良策)에 운집하였는데 깃발과 장막이 수십 리에 가득 찼다. 3월 17일 새벽에 노적이 성 밖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족히 3, 4만은 되었다. 4군(軍)으로 나누어 1군은 성의 북쪽 험한 곳을 점거하여 장차 공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의병(疑兵)을 삼고, 또 동쪽 서쪽 남쪽에서 각각 1군이 일시에 함께 진격하였다. 노적이 성의 남문에 이르러 서찰을 화살에 묶어 성중으로 쏘니, 성 위의 사람이 중국말로 꾸짖기를, “갈노(羯奴)야, 싸우려거든 속히 싸우자. 너희의 살점을 씹어 먹고 싶구나.” 하고는 활을 당겨 쏘았다. 노장(虜將)이 노하여 삼면의 병사를 지휘하여 방패를 잡고 전진하며 함성을 지르게 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쏘아올린 화살이 공중을 가려 주위가 어두워질 정도였다. 공이 군중에 명령을 내려 활시위를 한껏 당기기만 한 채 화살을 쏘지 말고 있다가 적이 성에 접근하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화살을 쏘게 하였다. 노병이 성에서 수십 보 떨어진 거리까지 다다르자 성 위에서 화살과 돌을 동시에 쏟아 부으니, 노적의 선봉 수천 명이 모두 죽어 널브러진 시체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노장은 성황단(城隍壇) 위에 앉아 싸움을 재촉하였고 공 또한 평상을 의지하고 한데에 앉아 장사들을 독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다. 화살과 돌이 바닥이 나려 하자 공이 명령을 내려 큰솥을 가져다 부수어 탄환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 탄환에 맞은 자는 모두 죽었다. 이에 성중의 남녀 노약자들이 소반, 동이 등의 각종 그릇을 머리에 이고 앞 다투어 돌을 운반하고 화살을 주워 싸움을 도왔다. 정오를 지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싸움이 더욱 급박해졌는데 마침 성 위에 불이 나서 수십 인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노병이 이때를 틈타 연기를 무릅쓰고 돌진하여 운제(雲梯)를 타고 성으로 올라오니, 부리(府吏) 최내흘(崔乃屹)과 심철(沈哲)이 먼저 올라온 자를 밀어 떨어뜨려 죽였으나 적이 더욱 급히 밀려왔다. 이에 유병장(游兵將) 백위(白暐)와 정시창(鄭始昌) 등이 병기를 가지고 불길을 무릅쓰고 분발하여 격투(格鬪)를 벌이니 노병이 조금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병(胡兵) 하나가 관을 짊어지고 진격하니 화살과 돌로는 모두 뚫을 수 없었다. 노병이 고기비늘처럼 늘어서서 그 뒤를 따랐는데 소봉(蘇鳳)이라는 자가 큰 돌로 쳐서 깨부수니, 노병이 드디어 물러갔다. 묘시(卯時)부터 신시(申時)까지 다섯 차례 크게 맞붙어 싸웠는데 노병이 대패하여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제장이 모두 추격하여 남은 무리를 모조리 섬멸하려 하였으나 공이 즉시 징을 울려 병사를 거두어들이며 말하기를, “오늘 전투에서 다행히 승리하여 크게 전승을 거두었다. 만약 출전하여 불리하게 된다면 사기(士氣)를 꺾고 병위(兵威)를 손상하게 될 것이니, 굳게 성을 지키면서 천천히 후일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죽은 호병이 부지기수였는데 몇 리 밖으로 그 시체를 모두 끌고 가서 모아놓고 불태웠고, 장수 2인과 편장(偏將) 수십 인 또한 죽었는데 시체를 싣고 가서 양책에 이르러 관사를 부수어서 그 시체를 태웠다. 성중의 사람 중에 죽은 자는 30여 인이었고 상처를 입은 자 또한 매우 많았다. 화살 수만 개를 거두어 모았고, 이날 밤에 노적에게 붙잡혀 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남녀가 100여 인이었다.
당시에 조정에 통지하려 하였으나 노기(虜騎)가 사방에 가득하였으므로, 용감히 뚫고 나아갈 자를 모집하여 전(前) 만호(萬戶) 이응무(李應武)와 전사(戰士) 장초(張超) 등을 보냈는데, 이응무는 노적을 만나 피살되었고 장초는 강도(江都)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사기가 백 배나 충천하여 모두들 팔뚝을 휘두르며 싸우고자 하였다. 당시에 노적이 성과 채 20리 거리도 안 되는 회군천(回軍川)에 세 둔영을 결집시켜 날마다 유기(游騎)를 내보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니 성중의 장사들이 다투어 나가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보졸(步卒)에다 갑옷도 없는데 저들은 궁수(弓手)에다 철기(鐵騎)이니 성벽을 굳게 지키며 틈을 노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애초에 성 안에 곡식이 많지 않았는데 장사준이 호장(胡將)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걸핏하면 주식(酒食)을 마련해 보낸 데다 그의 친척과 휘하의 병사들마저 모두 창고의 쌀을 먹은 바람에 남은 곡식이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전사(戰士)가 5000명이나 되고 그 밖에 노중(虜中)에서 도망쳐 돌아온 남녀 노약자가 날마다 100명 정도나 되고 보니 양식이 고갈되고 말았다. 독부에 곡식을 내주기를 청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공이 제장에게 이르기를, “산성에는 백이(百二)의 험준함이 있고 군사들은 결사(決死)의 마음을 품고 있으나 양식이 떨어져버렸다. 비록 조정에 위급함을 알리더라도 도로가 가로막혀 한 달 안에 구원받기 어려운 형편이니, 참획(斬獲)한 노적의 수급을 모장(毛將 모문룡(毛文龍) )에게 주어 군량과 무기를 구하는 것이 낫다.” 하고, 즉시 첩문(帖文)을 갖추어 참획한 노적의 수급 15급(級)을 보내니 모문룡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서찰을 보내 장사들을 위로하였다. 공이 다시 신장(申狀)을 보내기를, “선천, 곽산, 창성, 의주의 노적들이 국경 지역에서 날뛰면서 더욱 사납게 굴어 전날보다 심하게 살육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을 나가 공격하려니 이롭지 못할까 두렵고 성벽을 굳게 지키려니 양식이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양식 수백 섬〔斛〕을 빌려 주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도와줌으로써 의거의 공을 끝까지 이루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모문룡이 답하지 않았다.
노병이 성 남쪽 10리 지점으로 진영을 옮기고는 붙잡아 간 여자에게 서찰을 들려서 성으로 보내 왔다. 그 서찰에, “지금의 싸움은 우리 병사만 피로할 뿐만이 아니다. 또한 너희 군사도 모조리 죽을 것이다. 안주(安州) 이서(以西)의 토지와 인민이 우리에게 귀속되었는데, 용천(龍川)은 안주의 서쪽에 있으니 또한 우리의 토지가 아니겠는가. 너희는 잘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어찌 이 용천 한 고을을 격파하지 못하겠는가. 만일 귀순한다면 우리에게 좋을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도 큰 공이 있을 것이다. 대군이 이르게 된다면 우리와 너희는 모두 아무런 공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온 성의 사람들이 양식을 실은 배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오지 않자, 다시 전후로 획득한 노적의 수급 및 기모(旗帽)를 독부로 보내어 양식을 빌려 달라고 청하기를, “추로(醜虜)가 창궐하여 무고한 사람을 살육하니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이 한 성에 모였습니다. 한정이 있는 양식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대고 있는데, 병사들은 홀몸이 아니어서 위로는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처자가 있어 병사 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7, 8명의 식구를 먹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한창 급박하여 조석간에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이는 모영선(毛永璇)이 눈으로 목격한 바입니다. 소방(小邦)의 운명은 천조(天朝 명나라 )에 달려 있으니 이 백성을 부디 널리 구원해 주소서.” 하였다. 모문룡이 전후의 정문(呈文) 및 노수(虜首)와 호마(胡馬)를 얻고는 공을 수비(守備)에 제수하고, 또 도사(都司)로 바꾸어 제수하고는 은패(銀牌) 및 백금(白金)과 홍단(紅段)을 상으로 주었다. 모문룡의 답서에, “수비 정봉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해를 꿰뚫고 장대한 기상이 하늘까지 뻗쳐서 힘껏 노적들을 섬멸하고 의리로 삼군(三軍)을 고무시켰으니, 응당 탁용(擢用)하여 특별한 우대를 보여야 한다.” 하였다. 모문룡이 겉으로 장려하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구휼할 의사가 없었고, 또 모영선을 보내어 성중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4월 2일에 노기가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수미가 서로 이어져 밤낮으로 끊이지 않다가 6일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노병이 거의 다 압록강을 건넜는데 붙잡은 사람과 약탈한 가축을 모두 몰고 갔고, 후미를 끊는 정예 기병이 능한(凌漢), 청강(淸江), 거련(車輦) 등지에 있어 수십 기의 유기(游騎)가 출몰하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10일에 노적이 항복한 사람을 보내 성중에 서찰을 전했다. 공이 장사들에게 이르기를, “노적이 우리가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음을 알고 날마다 싸움을 걸었지만 우리는 성벽을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노적의 마음이 필시 나태해졌을 것이니 우리가 습격할 만하다.” 하였다. 당시에 노병이 양책에 있었다. 이에 수십 기의 정예병을 뽑아 밤에 노적의 진영을 습격하니 노적이 놀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적의 수급 2급을 베고 말 63필을 얻었다.
다음 날에 또 이희로(李希老), 김여의(金汝義) 등을 보내 각기 40여 기를 거느리고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노적의 유기를 습격하게 하였는데, 갈산(葛山)의 연대(煙臺) 아래에서 막 말에게 꼴을 먹이던 노적을 만나 싸워 적의 수급 7급을 베었다. 나머지 노적들은 모두 상처를 입고 달아났다. 당시에 노병(奴兵)이 의주에 있으면서 포로 및 투항한 사람을 우군(牛軍)이라 명명하고 나누어 팔영(八營)을 만들었는데 그 숫자가 4000여 인이나 되었다. 체찰 부사(體察副使)가 효유(曉諭)함으로 인하여 공이 격서(檄書)를 지어 부르니, 의주의 무사 백원효(白元孝)가 200여 인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도망쳐 돌아왔다. 수일 만에 도망쳐 돌아온 남녀가 3000여 명에 이르렀으나 새로 귀부(歸附)한 사람은 그 마음을 알 수 없고 게다가 성중에 사람은 많고 땅은 협소하였다. 그리하여 외성(外城)을 축조하여 새로 귀부한 무리를 거처하게 한 다음 장수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성중에 전사가 4000인이고 새로 귀부한 자가 또 3000인이나 되었는데 양식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체찰사가 공에게 용천 부사(龍川府使)의 직임을 행하게 하고, 토포장(討捕將) 이효신(李孝信)과 인산 첨사(獜山僉使) 이덕보(李德輔)를 협수사(協守使)로 삼아 속도가 빠른 배를 타고 양식 100석(石), 화약 100근(斤), 연환(鉛丸) 1000발을 보내 주게 하였다. 당시에 철산의 무사 김여기(金礪器)가 웅골산의 굴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모집하여 노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이 격서를 보내 소모장(召募將)을 삼아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었다. 노병(奴兵) 30여 기가 용천 경내에서 약탈을 자행하므로 이주천(李柱天)을 보내 50기를 거느리고서 추격하여 싸우게 하였는데 수급 6급을 베고 말 3필을 얻어 돌아왔다. 노병(虜兵)이 출몰하며 마을을 수색하고 약탈하였으므로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이 감히 성을 나가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군관 이개립(李介立)으로 하여금 30여 기를 거느리고 가서 노적의 정세를 엿보게 하였다. 마흘리(馬屹里)에 이르러 지척도 분변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 속에서 노적을 만나 맞붙어 싸워 수급 5급을 베고 말 3필을 얻었다. 이개립은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죽은 군사는 없었다.
의주의 교생(校生) 최수진(崔守眞)이 노적에게 항복하여 심복이 되어 기밀 사항을 모두 노적에게 알려주고, 붙잡혀 간 백성 가운데 도망쳐 돌아오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최수진이 굳게 지켜 벗어날 수 없게 하였다. 당시에 성중에서 임중헌(林中憲)을 보내 유병 300여 기를 거느리고 양하리(楊下里)의 갈대숲에 매복하였다가 노적이 약탈하러 나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마침 최수진이 그 무리 7, 8명과 더불어 항복한 병사 300여 인을 거느리고 왔다. 임중헌이 급히 병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포위하고서 반복하여 설득하고 깨우치는 한편 화포(火砲)로 겁을 주니 병사들이 스스로 최수진과 정응신(鄭應信) 등을 포박하여 귀순하였다. 임중헌이 이들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와서 최수진 등 두 사람을 참수하였다. 당시에 장대진(張大振), 이성시(李聖時), 백거의(白居義) 및 군사 최탁립(崔卓立), 관노(官奴) 순파회(順波回), 토병(土兵) 정응신이 모두 노적을 따라 그들의 이목이 되었고, 최수진은 호장(胡將)의 천총(千摠)이 되어 마을을 불 지르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용천의 출신(出身) 문여탁(文汝卓)이 용골산성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도중에 호인(胡人)에게 쫓겨 들어오지 못하고 우거진 수풀 사이에 숨어 있었다. 최수진이 문여탁 및 가속 10여 인을 사로잡아 포박하여 의주에 이르러 죽이고는 그 가운데 미모의 여자를 가려 정응신에게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로잡혀 죽었다.
성중에 양식이 바닥난 지 오래되었으나 노병(奴兵)이 곳곳마다 집결하여 오래 머물 계책을 하여 우군(牛軍)으로 일컬어지는 노적(虜賊)에게 귀순한 조선인들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농사짓게 하였다. 성중의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지금 노적이 돌아갈 의사가 없습니다. 가령 노적이 돌아가더라도 식량이 떨어져 끝내 살 방도가 없을 것이고, 경작하고자 하면 또 종자를 구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독부에 종자를 빌려 달라고 하였는데 독부에서는 응답하지 않았다. 노병(虜兵) 100여 기가 항상 의주의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와서 잘 자란 풀을 말에게 먹였으므로 유병장(游兵將) 이진선(李進先)에게 100여 기를 거느리고 습격하게 하였는데 수급 5급을 베고 말 6필을 얻어서 돌아왔다.
장초(張超) 등이 행재소에 이르니 상이 소견(召見)하여 친히 묻고는 주식(酒食) 및 보검(寶劍)을 하사하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입혀 주고 절충장군으로 초승(超陞)하였으며, 공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용천부사 겸 조방장(龍川府使兼助防將)을 제수하고 채단(綵段)ㆍ백저(白苧)ㆍ금권자(金圈子)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답하기를, “여러 성이 함락된 이후로 대적(大賊)이 깊이 들어와 강대한 번진과 큰 진영의 이름난 장수와 건장한 병졸이 멀리서 적의 기세를 바라보기만 하고도 흩어져 달아났는데, 경만 홀로 먼 변방의 무사로서 의로운 백성을 소집하여 고립된 성을 파수하였다. 먼저 장사준 등을 참수하여 사기를 끌어올렸고 대적이 쳐들어오자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싸워 적의 선봉을 꺾고 많은 적을 살상하여 한 성을 온전하게 보전하였으니, 이는 비단 근래의 제일 탁월한 공일 뿐만 아니라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이런 사람은 많지 않다.” 하였다.
당시에 사방을 노적이 모두 차지하였으나 고립된 성만 홀로 온전하였으므로 포로가 되었다가 달아나 돌아온 자들이 운집하였다. 그리하여 군중에 굶주려 죽은 자가 여기저기 널렸으나 시행할 만한 계책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다시 노적의 수급 6급 및 획득한 기모(旗帽)를 독부에 보내어 상을 청하니, 모문룡이 전후의 상으로 은(銀) 350냥을 보내 주었으므로 즉시 그 은으로 가도에서 쌀을 사들였다. 당시에 노병이 선천과 곽산에 가득하여 도로가 막혔으므로 독부에 정문을 보내 수로를 통해 조정에 보고할 수 있도록 배를 빌려주기를 청하였다.
당시에 노병이 조금 물러가자 한인(漢人)이 용천ㆍ의주ㆍ철산의 연해(沿海)와 산곡(山谷) 사이에 출몰하면서 머리를 깎아 변발을 한 조선 백성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는 바람에 땔나무하고 풀을 베는 자들이 감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독부에 정문을 보내 혼동하여 죽이지 말기를 청하기를, “용천ㆍ의주ㆍ철산의 백성들 중에 처음에 강한 호인의 협박을 받아 머리를 깎지 않은 이가 열에 하나도 안 되는데 노적이 물러간 틈에 땔나무하고 풀을 베는 사람이 야외에 혹 나가기라도 하면 천병(天兵)이 없는 곳이 없어서 걸핏하면 죽임을 당하니 사람들이 몸을 어디에 두어야겠습니까. 단지 머리를 깎아 변발을 한 것만으로 죄를 삼는다면 의거에 참여하여 노적을 토벌한 성중의 사람들 또한 망원(亡猿)의 화(禍)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호장이 용골산성으로 귀순하는 우군이 많음을 보고는 노하여 병사를 모아 성을 공격하려는 뜻을 보이는 한편 서찰을 보내 말하기를, “귀국이 이미 우리 금나라와 더불어 우마(牛馬)를 잡아 천지에 제사 지내 금석처럼 굳은 맹약을 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일개 배반한 신하가 작은 성에 병사들을 집결하여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나라를 배반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양식이 떨어진 지 이미 보름이나 되어 여러 차례 위급한 사정을 조정에 알렸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계책이 궁해지자 다시 모영선 및 장관 몇 사람을 독부에 보내 애걸하였다. 마침 체부(體府)의 군관 계천립(桂天立) 등이 곡식 300여 석을 호송하여 왔으며, 독부에서도 쌀 300석을 빌려주었고 상으로 받은 은으로 또 쌀 300석을 샀으며, 이희건(李希建)이 용천 부사로 있을 당시 성에서 달아난 중군 이충걸(李忠傑)이 독부에 투항하였는데 스스로 속죄하고자 쌀 80여 석을 바쳤으며, 동지사(冬至使) 남이웅(南以雄)이 쌀 10여 석을 보냈으니, 모두 합쳐 1000여 석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중의 병졸이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어 얻은 미곡(米穀)으로는 겨우 열흘을 지탱할 수 있었으므로 군중에 점점 도망하는 자가 발생하였다.
11일에 노적 20여 기가 성 북쪽 20리 지점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즉시 30여 기를 내보냈고 모영선 또한 10여 인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싸워 9급을 참획하니, 나머지 노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우리 병사 2인이 죽었고 한인 1인 또한 죽었다. 성중의 사졸들이 기근을 견디지 못해 밤마다 달아나 도망자가 1000여 인에 이르렀으나 막을 방도가 없었다.
16일에 노병 30여 기가 나와 약탈하자, 백의종군(白衣從軍)한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쫓게 하였는데 7급을 베어 죽였다.
다음 날에 또 노병 수십 기가 전야(田野)에 달려와 양맥(兩麥)을 베어 가자, 또 김완으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고 쫓게 하여 5급을 참수하였다. 당시에 양식이 또 떨어졌으나 조정의 힘으로는 더 이상 구원할 수 없었으므로 사졸이 많이 달아났고, 독부에 곡식을 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또 응답이 없었다. 조정이 관향사(管餉使)와 체찰사 및 부원수로 하여금 급히 양식을 운반하여 성중에 보내게 하였는데,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말하기를, “군향이 이미 떨어졌으니 용골산성의 병사를 의당 내지(內地)로 옮겨 각자 살길을 구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성중의 장사들이 한창 굶주림을 참고 양식이 이르기를 기다렸는데 “산성의 병사를 응당 내지로 옮겨 각자 살길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맥이 풀려 떠날 생각을 하였다.
6월 12일에 초관(哨官) 장운립(張雲立), 수문장(守門將) 이현로(李賢老) 등이 몰래 그 무리를 꾀어내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달아났다. 공이 장수와 막료들을 거느리고 성을 순시하며 사람들에게 효유하기를, “너희들이 처음 의거하였을 때에 각자 충의를 분발하여 나를 다그쳐 대장을 삼았다. 지금 큰 공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의거를 잘 마무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중도에 뿔뿔이 흩어지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서쪽 지방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성화(聖化)를 받을 수 없습니다. 큰 승리를 거둔 이후로 지금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운반해 온 양식이 채 1000석이 안 되어 굶어 죽은 시체가 날마다 쌓여만 가니 고립된 성을 지키고 앉아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남쪽 지방에서 구걸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다음 날에 장관 이학례(李學禮) 등 26인 또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성문을 부수고 빠져나갔다. 이보다 앞서 조정이 선전관을 보내 백금과 인삼을 성중에 보내 군량을 사게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500기를 내보내 호송하여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채 돌아오기도 전에 성중의 병사가 먼저 달아났고 호송하러 보낸 500기도 달아난 병사와 더불어 양책에서 합진(合陣)하였다. 많은 병졸이 일시에 흩어지자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공이 또 효유하는 글을 지어 한구룡(韓九龍), 김득현(金得鉉) 등을 보내어 달아난 병졸을 불러들이게 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대답하고 한구룡 등마저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당시 남은 병사들을 점검해 보니 채 1000인도 되지 않았다. 제장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궁박하게 되었습니다. 노적이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필시 성을 공격할 것이니, 일찍 피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안주로 달려가고 싶지만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가는 많은 사람들이 속히 걷기 어렵습니다. 노적에게 뒤쫓길까 두려우니,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먼저 독부에 알린 다음 조정에 보고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다음 날에 장사 25인과 더불어 남녀 노약자 5000여 인을 거느리고 김완(金完), 이덕보(李德輔), 의주 판관(義州判官) 김우(金宇) 등과 함께 철산의 대계도(大雞島)로 들어갔다. 마침 명나라의 양 감군(兩監軍)이 병선 80여 척을 거느리고 대계도 앞에 정박하여 성을 버리고 나온 까닭을 물었는데, 사실대로 아뢰니 쌀 100석을 보태주었다.
이전에 조정에서 정주(定州)와 곽산의 노적이 이미 병사를 거두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5월 16일에 선전관을 보내 공에게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고 장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백금 1000냥을 하사하였다. 유서(諭書)에, “경이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 목숨을 바쳐 떠나지 않았으니,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충성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오래 전부터 관원을 보내 위무하고 싶었으나 도로가 가로막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경은 의당 그 공로를 구분하여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정에서 장려하는 뜻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사한 유서와 물품이 6월 16일에 대계도에 이르렀고, 6월 9일에 또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겸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모두 공이 용골산성을 떠난 뒤에 이르렀다. 공이 떠나자 노병이 뒤따라 이르러 용골산성을 불태워 버린 탓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게 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용천의 무사 이립(李立)도 소위도(小爲島)에 병사를 모아 누차 노적을 물리쳤으나 또한 양식이 떨어져 독부에 곡식을 빌려 달라고 고하였는데, 독부에서 배를 보내 그 무리를 실어서 대계도로 옮겨 놓았다. 이때에 이르러 몇 리 거리에 걸쳐 양군(兩軍)의 진영이 이어졌는데, 당시에 열흘 내내 장맛비가 내리는 바람에 전염병에 걸려 죽는 자가 날마다 수십 명이나 되었다. 백금과 인삼을 접반사(接伴使) 원탁(元鐸)에게 보내 쌀로 바꾸게 하려 하였는데 마침 체부(體府)에서 곡식 300여 석을 보내 주었고, 관향(管餉)에서 보낸 백금이 또한 2000냥이었으므로 아울러 접반사로 하여금 가도에서 쌀로 바꾸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절도에 곤궁하게 거처하는 것이 잘못된 계책이었으므로 육지로 나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굶주려 거의 죽을 지경이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육지에 도달할 수 없을까 두려웠다. 이에 600여 인의 노약자를 먼저 내보내 미곡선(米穀船)에 나누어 태워 남관(南官)으로 보냈다.
이보다 앞서 조정이, 모문룡이 대계도로 이립의 군사를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문룡이 용골산성의 병민(兵民)을 점차 겸병하려는 계책을 품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공에게 하유하기를, “만일 모문룡이 위협하거든 왕명을 받아 지방을 지키는 터라 감히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고 핑계 대어 모문룡에게 속아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성을 빠져나와 달아난 것이 6월 13일이었고 유지(諭旨)가 내린 것이 21일이었으나, 7월 6일에야 비로소 유지가 대계도에 이르렀다.
조정이 또 노약자들을 배에 태워 내지(內地)로 옮기고 장정들은 육로로 걸어가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무리를 거느리고 안주에 이르렀는데 며칠 만에 유지를 내려 다시 용골산성에 들어가 지키라고 명하였다. 공이 거느린 병졸이 천신만고 끝에 비로소 내지에 들어온 터라 이 명을 듣고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여겨 응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달아난 병졸 또한 스스로 죽게 될 줄 알고 모두 도망쳐 숨어 나오지 않는 바람에 공이 누차 효유하여 겨우 장정 수백 인을 모았다. 이에 공을 따라 용골산성으로 향한 사람이라곤 아우 기수 및 김종민, 이광립 등 몇 사람뿐이었다.
도로 용골산성에 나아가니 성가퀴는 부서지고 초목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여 몸을 붙일 곳이 없었고, 오직 옛 관부에 몇 칸 집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이 다시 용골산성에 이른 이후로 숙병이 더욱 심해졌는데, 상이 의원을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초엄(貂掩) 및 장사들의 겨울옷을 하사하였다. 유지를 내리기를, “경의 충의가 해를 꿰뚫어 내가 한창 의지하고 중히 여기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병이 위중하니 잠시도 잊을 수 없다. 거느린 병졸이 모두 맨주먹을 치켜들고 적을 죽인 사람들인데 도로 청천강(淸川江)을 건넜으니 낭패하고 괴로운 형상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하였다. 후일에 또 유서(諭書)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으며 의백(衣帛)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여러 성이 모두 함락되어 인심이 이미 이산되었는데 의로운 무리를 규합하여 고립된 성을 애써 지켰으니, 그 충용(忠勇)과 의열(義烈)은 옛적에도 드문 일이다.” 하였다.
10월에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이배(移拜)되었다. 공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상이 내국(內局)의 진귀한 약재 1합(盒)을 하사하였다. 12월에 오래도록 변방에 있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데 불편하다고 해서 개천 군수(价川郡守)로 개차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는데, 임기가 찼다.
경오년(1630, 인조8) 1월에 오위장(五衛將)에 배수되었고, 부총관(副摠管)으로 천직되었다. 서울에 이르니 상이 소견하여 위로하고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7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특별히 배수되었다.
이듬해 7월에 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특별히 이배되었는데, 성을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한 공로로 말을 하사받았다.
임신년(1632)에 병마절도사를 그만두고 돌아와 자산(慈山)에 우거하였다.
계유년(1633)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되었다. 6월에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에 배수되었다.
갑술년(1634) 봄에 전라 병마절도사에 배수되었다.
병자년(1636) 2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배수되었다. 6월에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으로 천직되었다. 공이 서울에 있으면서 병을 앓자 상이 내의를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시로 하여금 문병하게 하였으며 양구(羊裘) 1습을 하사하였다. 12월에 노병이 서울을 침범하여 상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였는데 공이 병으로 어가를 호종하지 못하고 홍천(洪川)으로 피난하였다.
정축년(1637)에 장연(長淵) 포두리(浦頭里)에 우거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 가을에 자산으로 돌아왔다.
을유년(1645) 1월 29일에 우거에서 졸하니, 향년 74세였다. 조정에서 사제(賜祭)하고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군현으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다. 그해 10월 6일에 철산 정혜면(定惠面) 소산(蘇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수안 계씨(遂安桂氏) 대립(大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남을 두었는데 경호(景顥)이니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이다. 손자 5인은 지병(之屛), 지한(之翰), 지번(之藩), 지간(之幹), 지원(之垣)이다. 증손 또한 5인이니 홍명(弘鳴)ㆍ창명(昌鳴)ㆍ태명(泰鳴)은 지간의 아들이고, 현명(顯鳴)ㆍ준명(俊鳴)은 지원의 아들이다. 지병은 현감이니 준명을 데려다 후사를 삼았고, 지번은 창명을 데려다 후사를 삼았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지간은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이고, 지원은 맹산 현감(孟山縣監)이다.
아, 정묘년(1627, 인조5)의 난리 때 장수의 부신(符信)과 고을 수령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국가의 서문(西門) 밖 변경을 맡은 자가 한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살을 쏘고 창을 휘둘러 적과 맞서 싸우는 이가 아무도 없어 노적으로 하여금 느긋하게 말을 몰고 천천히 달려 마치 아무도 없는 텅 빈 땅을 밟듯이 하도록 하고 말았다. 공은 예전에 현감을 지내다 전리(田里)에 물러나 은거하던 일개 무관일 뿐이었다. 창졸간에 난리를 만나 해도(海島)에 머물고 숲 속에 숨어서 10명의 식구를 보전할 수 없고 공 일신도 의탁할 곳이 없는 처지였으나 지절(志節)은 더욱 견고하였고 의기(意氣)는 더욱 장대하였다. 마침내 서둘러 용골산성으로 들어가 은밀히 의로운 병사를 결집한 다음 반역한 신하를 참수하고 사나운 노적에 대항하여 성에 의지하여 혈전을 벌이니, 노약자들이 모두 떨쳐 일어났다. 그리하여 5000명의 약한 병졸로 수만의 강한 노적을 꺾어 우뚝 솟은 고립된 성이 노적의 심장부에 웅거하였으니, 그 형세는 거센 물결이 흘러넘쳐 하늘을 뒤덮어도 지주(砥柱)가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굳건하였다.
3월부터 6월까지 구원이 끊기고 양식이 떨어져 사졸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노적들은 흘겨보며 기회를 노릴 뿐 공이 용골산성을 떠나도록 감히 다시 성 밖 일보(一步)의 땅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공을 범같이 두려워할 뿐만이 아니었다. 강한 노적이 끝내 우리에게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간 일을 두고 담론하는 자들은 장마에 가로막혀 돌아간 줄로만 안다. 그러나 노적들이 머뭇머뭇 뒤를 돌아보며 공이 자신들의 후미를 노릴까 근심하여 감히 방자히 굴지 못했다는 것은 세상에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당시 노적을 물리친 공은 의당 공에게 돌아가야 한다. 성조(聖祖)께서 공을 가상히 여기고 포장한 것이 다른 신하들보다 특별한 것이 마땅하도다. “장순과 허원의 충성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이른 것은 또 어찌 한때 경도되어 지나치게 장려하고 허여한 말씀이겠는가.
공이 입조(入朝)하자, 상이 소견하여 음식을 하사하고 매우 지성스럽게 위무하였다. 연달아 호남과 영남의 수륙(水陸) 양진(兩陣)의 절도사를 삼은 것은 모두 상이 친히 발탁한 것이다. 공이 병들자 의원을 보내 병세를 살펴보게 하기도 하고 약재를 하사하기도 하였고, 공이 서울에 있을 적에는 날마다 내시를 보내 문병하게 하였으니, 성조께서 공을 깊이 알아주셨고 융숭히 대우하신 일은 옛적에도 비길 이가 드물 것이다. 만일 병자년(1636, 인조14)이 되기 전에 서문(西門)을 공에게 맡겼다면 필시 노적을 제압하여 남하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고, 강도(江都)를 공에게 맡겼다면 필시 적을 막아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때에 공이 이미 늙고 병들었고 조정에서는 또 공을 등용하기를 주장하는 대신이 없었던 것이 한스러우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손자 지원이 판서 이공(李公)의 글을 가지고 와서 공의 유적을 서술하여 행장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삼가 그 글을 받아 차례로 서술하여 후일의 군자가 상고하고 근거할 바가 있기를 기다린다. 공이 산성을 사수하고 노적에게 대항한 일에 대해서는 전말이 자세하기에, 끝내 간략히 기술하여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인멸되게 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감히 번거롭다는 책망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낱낱이 들어 상세하게 논술한다. -판서 이공은 이름이 세화(世華)이다.-
[주-D001] 내가……해서이다 :
맹자가 말하기를, “생선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리라. 사는 것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로운 것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가질 수 없다면 사는 것을 버리고 의로운 것을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하였다. 《孟子 告子上》
[주-D002] 성안군(成安君)은……말았고 :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장이(張耳)와 함께 불과 수만의 병력으로 조(趙)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정형(井陘)으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조왕(趙王)과 성안군 진여(陳餘)는 군대를 정형 입구에다 집결시켰는데, 이를 불가하게 여긴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반대했으나 듣지 않고 정면으로 싸워 이기려고 하다가 결국 한신의 계략에 속아 조나라는 망하고 성안군은 참형을 당하였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3] 전단(田單)은……수복하였으니 :
전단은 전국 시대 제 혼왕(齊混王) 때의 왕족이다. 연(燕)나라의 명장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침입하여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을 때, 즉묵(卽墨)의 성에 포위되어 있던 전단이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파면시켰다. 그리고 성 안의 사람들에게 끼니때마다 반드시 뜰에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날아다니던 새들이 모두 성 안으로 내려와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연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기자 전단은 “신께서 내려오셔서 나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神來下敎我〕” 하였다. 또한 성 안의 사람들에게 “신이 내려오셔서 나의 스승이 되실 것이다.〔當有神人爲我師〕” 한 다음 아무런 능력도 없는 병졸을 스승으로 모시고는 군령을 내릴 때마다 언제나 신이 내리는 지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 안의 소 1000여 마리를 모아서 용의 무늬를 그린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뿔에는 예리한 칼을 묶어 세우고 꼬리에는 기름을 적신 갈대를 매단 다음 성의 수십 곳에 구멍을 뚫고 밤중에 그 구멍으로 꼬리에 불을 붙인 소를 적진으로 내모는 한편 장사 5000명으로 하여금 소의 뒤를 따르게 하여 연나라에 빼앗겼던 70여 성을 수복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4] 도적에게……격 :
자기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荀子)》〈대략(大略)〉에 “가르칠 만한 사람이 아닌데 가르치는 것은 도적에게 양식을 가져다주고 적군에게 병기를 빌려주는 격이다.〔非其人而敎之 齎盜糧 借賊兵也〕” 하였다.
[주-D005] 전패(殿牌) :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전(殿)’ 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이다.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리 전원이 모여 배례(拜禮)하고 또 지방에 출장한 관원은 이에 대하여 배례하였으며 만일 훼손하거나 모독하면 불경(不敬)으로 처리되어 본인은 물론 수령과 그 고을까지 처벌당하였다.
[주-D006] 천세(千歲) :
신민들이 임금의 만세(萬歲)를 송축하는 말로, 한 무제(漢武帝)가 높은 산에 올랐을 때 백성들이 그 아래서 세 번 만세를 외친 고사에서 유래한다. 《漢書 卷6 武帝紀》 여기서는 조선은 제후국(諸侯國)이기 때문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설치하고 천세를 외친 것이다.
[주-D007] 백이(百二) :
두 명의 군사가 백 명의 군사를 막을 수 있는 요새라는 뜻으로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가리킨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여기서는 용골산성의 험준하고 견고한 지형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8] 망원(亡猿)의 화(禍) :
사소한 것을 추구하다가 큰 것을 잃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로, 《회남자(淮南子)》〈설산훈(說山訓)〉에 “초왕(楚王)이 도망간 원숭이를 찾으려고 하여 숲이 이 때문에 잔멸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인(漢人)이 노적(虜賊)이나 노적에게 동조한 사람을 죽이려다 도리어 의거(義擧)에 참여한 사람을 죽이는 화(禍)를 초래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주-D009] 양 감군(兩監軍) :
총독태감(摠督太監)과 감군도독(監軍都督)을 말한다.
[주-D010]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른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으나 장순, 허원, 요은(姚誾), 남제운(南霽雲) 등은 수양(睢陽)을 굳게 지켜 2년을 버티다가 성이 고립되고 원군이 이르지 않아 결국 식량이 떨어지고 사졸이 없어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전에 장순이 전투를 독려하면서 눈을 부릅떠서 눈자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이를 악물어 이가 부서졌는데, 포로가 된 뒤에 안녹산의 당인 윤자기(尹子奇)가 장순의 입을 칼로 찢어서 보니 남아 있는 이가 서너 개뿐이었다. 장순이 죽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를 위해 의리로 죽지만 너희들은 역적에게 붙었으니 개돼지만 못하다. 어찌 오래가겠느냐.” 하였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주-D011] 지주(砥柱) :
황하(黃河)의 격류 속에 우뚝 서 있는 바위산이다. 흔히 중책을 한 몸에 지고서 위태로운 상황을 극복해 가는 사람의 비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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