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동쪽, 서쪽, 북쪽이 모두 지대가 높고 차가우므로
2022. 9. 5. 20:50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임하필기 제35권 / 벽려신지(薜荔新志)
[벽려신지(薜茘新志)]
사시향관(四時香館)에는 꽃나무가 수백 종이나 된다. 개중에 백장미(白薔薇), 백모란(白牡丹), 백련화(白蓮花)는 소동파(蘇東坡)의 세 가지 흰 음식인 쌀밥, 무나물, 소금에 비길 만하다. 격자(格子) 곁에 석상(石床)이 있는데, 거기에는,
좋은 꽃들 삼백 그루나 심었더니 / 多種好花三百本
나지막한 울타리 비바람에 사시로 향기롭다 / 短籬風雨四時香
삼백육십 일에 / 三百六十日
꽃은 사시로 향기로우리라 / 花應四時之香
나지막한 울타리 비바람에 사시로 향기롭다 / 短籬風雨四時香
삼백육십 일에 / 三百六十日
꽃은 사시로 향기로우리라 / 花應四時之香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태호석(太湖石)이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움푹 들어간 구멍이 수십 개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늙은 범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고, 또 다른 하나는 푸른 학이 목을 빼고 있는 것처럼 생겼으니, 기이한 광경이다. 또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한강 가에 있는 돌을 운반해 오다가 절반을 깨뜨려 버렸는데, 버려두기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재실 앞으로 운반해다가 세 개의 태호석으로 짝을 이루니 그 형상 또한 기이하였다. 명산(名山)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태가 바뀐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향기는 멀리 풍기는 것을 취하고, 술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을 취하고, 돌은 메마른 것을 취하고, 거문고는 소리가 화락한 것을 취하고, 차는 빛깔을 취하고, 대는 그림자를 취하고, 달은 빈 것을 취하고, 바둑은 고요한 것을 취하고, 지팡이는 친근한 것을 취한다. 그리고 물은 가득 고인 것을 취하고, 눈은 나부끼는 것을 취하고, 칼은 겁나는 것을 취하고, 포단(蒲團)은 해진 것을 취하고, 미인은 시샘하는 것을 취하고, 중은 한가함을 취하고, 꽃은 은은한 향기를 취하고, 금석(金石)과 정이(鼎彝)는 오래된 것을 취한다.
어떤 과객이 임하려에 들러서 나의 그윽한 일을 묻기에 옛사람의 시구를 가지고 응답하였다.
“무슨 감개한 일이 있기에 이처럼 은거를 합니까?” 하기에, “대체로 마음이 넉넉하면 몸도 넉넉하지만, 몸이 한가하고 마음이 한가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소이다.[大都心足身還足 只恐身閒心未閒]” 하였다. “무슨 공부를 하며 소일을 합니까?” 하기에, “꽃을 아끼어 봄에는 일찍 일어나고, 달을 사랑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惜花春早起 愛月夜無眠]” 하였다. “무엇으로 생활을 하며 일생을 마치려고 합니까?” 하기에, “아들은 씨앗 뿌리고 손자는 밭갈이 하는 속에 흉년이 없고, 붓으로 꽃을 피우고 먹으로 비를 내리는 속에 풍년이 있습니다.[子種孫耕無歉歲 筆花墨雨有豐年]” 하였다. “어디를 오가면서 무료함을 달래렵니까?” 하기에, “봄 언덕에 연한 풀이 직물처럼 덮여 있으니, 사슴과 어울려서 서로 잠을 자렵니다.[陽坡草軟厚如織 仍與麋鹿相對眠]” 하였다. “이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산 위에 흰 구름이 많습니다.[嶺上多白雲]”라고 대답하였다. “초가집을 이루었군요.” 하기에, “거연히 나의 천석입니다.[居然我泉石]” 하였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됩니까?”라고 묻는 데 대해서는, “쓰르라미는 봄가을 알지 못하고, 개구리는 공과 사를 가리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은 오히려 귀를 어둡게 하고, 우는 매미는 거듭 나를 속입니다.[蟪不知春秋 蛙不爲公私 流水猶聾耳 鳴蟬重我欺]”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시구이다.
양연(養硯 신위(申緯)) 노인이 젊을 때 지은 시에,
나라를 기울게 할 풍류는 삼짇날의 버들이요 / 傾國風流上巳柳
일생의 처량함은 석양의 꽃이로다 / 一生惆悵夕陽花
일생의 처량함은 석양의 꽃이로다 / 一生惆悵夕陽花
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매우 경절(警絶)하다. 그러나 초년의 풍류는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반면에 말년의 쓸쓸함은 쇠잔한 꽃과 같았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진묘관(秦妙觀)은 선화(宣和) 연간의 유명한 기생으로서, 일찍이 초상화로 외방에 전해진 자였다. 육승지(陸升之)가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를, “전번에 임안(臨安)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한 늙은 부인이 쑥대머리에 때 낀 얼굴로 시장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처마의 낙숫물로 발을 씻으면서 흐느껴 하소연하기를, ‘관인(官人)은 일찍이 진묘관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소첩이 바로 진묘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얼굴은 초췌하였으나 음성이나 행동거지는 태연하였습니다.” 하였다. 육승지는 이야기를 마치자 눈물로 옷깃을 적셨는데, 그것은 아마 만년(晩年)에 유락하는 자신의 신세가 그녀와 서로 같음을 슬퍼했기 때문이리라.
신자하(申紫霞)가 노경에 교외에 살면서 늙은 기생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노래 부르고 춤추는 번화한 것은 전신의 일이요 / 歌舞繁華前身事
영웅과 아녀가 번갈아서 등장을 하였도다 / 英雄兒女遞登場
영웅과 아녀가 번갈아서 등장을 하였도다 / 英雄兒女遞登場
하였는데, 내가 ‘장(場)’ 자 운에 따라서 화답하기를,
노래 부르고 춤출 때에는 봄꿈이 길었건만 / 歌舞前身春夢長
봄꿈 깨고 나면 어느 곳인들 슬퍼함이 없으랴 / 覺來何處不悲傷
쇠잔하고 왕성함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 銷殘盛壯非人力
냉락하고 번화한 것은 각각 한바탕 꿈인 것을 / 冷落繁華各一場
누대는 무심하게도 한밤의 달을 돌려보내고 / 樓榭無心歸夜月
영웅은 부질없이 슬퍼하며 석양에 눈물 흘린다 / 英雄枉惜淚斜陽
그대는 이생의 일을 헤아리지 말지니 / 莫君商量此生事
미인의 머리는 세기도 쉽단다 / 容易名花頭上霜
봄꿈 깨고 나면 어느 곳인들 슬퍼함이 없으랴 / 覺來何處不悲傷
쇠잔하고 왕성함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 銷殘盛壯非人力
냉락하고 번화한 것은 각각 한바탕 꿈인 것을 / 冷落繁華各一場
누대는 무심하게도 한밤의 달을 돌려보내고 / 樓榭無心歸夜月
영웅은 부질없이 슬퍼하며 석양에 눈물 흘린다 / 英雄枉惜淚斜陽
그대는 이생의 일을 헤아리지 말지니 / 莫君商量此生事
미인의 머리는 세기도 쉽단다 / 容易名花頭上霜
하였으니, 이는 신자하의 말을 부연한 것이다.
뒤꼍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 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든 다음 ‘퇴사담(退士潭)’이라고 이름을 짓고 시를 적어 놓았는데, “행동거지는 여기에서 하고 시비는 알 바가 아니다.[行止止於此 是非非所諳]”라는 구절이 있다.
단상(湍相)이 정승에 제배되었다는 기별이 밤중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취침 중이었다. 집안사람들이 알리려고 하자 공의 종제(從弟)인 정민공(貞敏公)이 “내일 아침에 사뢰자.” 하고 만류하였다. 아침에 공은 저보(邸報)를 보고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는 무진년에 정승에 제배되었다는 명을 받았는데, 서울의 저보가 역시 밤중에 이르렀다. 집안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곧바로 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고, 나도 놀라서 일어났다. 그때 문득 단상의 옛일이 떠올라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단상을 따를 수 없구나.” 하였다.
무관(武官) 윤정주(尹庭舟)의 이름은 임금이 하사한 이름인데, 가오(嘉梧)의 본토박이로 힘이 세었다. 그는 숙종조(肅宗朝) 때 매우 대우를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가로 폐출되었을 때 그는 매일 한 되의 쌀과 한 마리의 꿩을 싸 가지고 가서 그 담 안에 던져 놓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뒤에 열여덟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또한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가오의 사람 중에 드러난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황만화(黃蔓花)를 신이(辛夷)라고 하는데, 《본초(本草)》에는 목필화(木筆花)가 신이로 되어 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홍장미(紅薔薇)를 해당(海棠)이라고 하는데, 《군방보(群芳譜)》에는 산단(山丹)이 해당으로 되어 있다.
소나무를 심은 지 10년 만에 무성하게 자라 뜰 절반을 뒤덮었으니, 토질이 알맞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오대부송(五大夫松)을 ‘오송(五松)’이라고 칭하였는데, 진(秦)나라 역사책에 보면 오대부라는 벼슬이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그 소나무를 오대부로 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한 그루의 소나무라 하더라도 또한 오대부라고 할 수 있다.
도(稌 찰벼)와 나(稬 찰벼)는 패국(沛國)에서 술과 단술을 만드는 재료를 일컫는 말이었다.
갱(秔 메벼)은 유(糯 찰벼)의 등속이다.
선(秈 메벼)은 차진 것도 있고 차지지 않은 것도 있다.
갱(稉)은 세속에서 갱(粳 메벼)으로 쓴다.
홍도(紅稻)는 적사(赤사)이다. 송(宋)나라 공명지(龔明之)의 《중오기문(中吳紀聞)》에는, “홍련(紅蓮)은 올벼인데, 예전부터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육노망(陸魯望 육귀몽(陸龜蒙))의 시에는, “석양바람 불어올 때 흰 국화를 읊고, 향도로 밥을 지으니 홍련임을 알겠노라.[遙爲晩風吟白菊 近炊香稻識紅蓮]”라고 읊었다. 내가 상고하건대, 홍련을 백국과 대(對)를 맞추었으니, 이것은 만도(晩稻 늦벼)이다.
오릉(烏稜)은 한릉(旱稜)이다. 《육서(六書)》에 이르기를, “밭에 심은 것은 남쪽 지방에서는 9월에 수확하고, 북쪽 지방에서는 10월에 수확한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시월에는 벼를 거두어들인다.” 하였으니, 빈(豳)나라도 서쪽 지방의 높고 차가운 지대여서 그랬던가.
우리나라는 동쪽, 서쪽, 북쪽이 모두 지대가 높고 차가우므로 9월에 수확하는데, 호남과 영남만은 지대가 따스하므로 반드시 10월에 수확을 한다. 풍토가 각각 다르므로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금년에 벼를 벤 데서 명년에 다시 나는 것을 착(𥞺)이라 하고, 금년에 벼가 떨어져서 명년에 저절로 나는 것을 이(秜)라 한다. 들벼로서 심지 않아도 저절로 나는 것을 여(穭)라 하니, 《광무기(光武記)》에 이르기를, “곡식이 저절로 났다.[嘉穀旅生]” 하였다.
조[粟]는 뭍에서 나는 종자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다. 당나라 맹선(孟詵)의 《식료본초(食料本草)》에 의하면, “북방 사람은 좁쌀[小米]이라 하는데, 싹이 붉은 것은 문(虋 붉은 기장)이라 하고, 싹이 흰 것은 기(芑 흰 차조)라 한다.” 하였다.
양(粱 조)은 서(黍 기장), 직(稷 메기장)의 총칭이다. 직(稷)은 오곡(五穀)의 장(長)이다. 또한 직은 명자(明粢)이다. 《좌전》의 “젯메로 쓸 서직은 쓿지 않는다.[粢食不鑿]”는 구절에 대한 그 소(疏)에, “자(粢)는 직의 별명이다.” 하였다.
출(秫 차조)은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고려(高麗)에는 메벼[秔], 기장[黍], 삼[麻], 보리[麥]는 있어도 차조는 없다.” 하였다.
서(黍 찰기장)는 차진 조[黏粟]이다. 출 또한 직의 차진 것이다. 서는 오곡의 첫 번째이다. 공자는 먼저 찰기장밥을 드셨다. 채옹(蔡邕)은 명선서(鳴蟬黍)라 하였다.
거(秬)는 《상서(尙書)》에서 검은 기장[黑黍]이라 하였다. 비(秠)는 한 껍질 속에 두 개의 알맹이가 든 검은 기장으로서, 종묘의 제사 때 쓰이는 창주(鬯酒)를 만드는 것이다.
맥(麥 보리)은 오곡의 시초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떨어진 양식을 이어 주는 곡식이다.” 하였다.
소맥(小麥 참밀)은 가을에 심겨져 겨울에 자라고 봄에 이삭이 패고 여름에 열매가 여무니, 사시의 기운을 다 갖춘 것이다. 옛 노래에서 읊기를, “높은 밭에 참밀을 심었더니 오래도록 이삭이 패지를 않는구나.[高田種小麥 終久不成穗]” 하였다.
대맥(大麥 보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옛날의 시에서 말한, “푸르고 푸른 보리가 저 언덕에 났도다.[靑靑之麥 生彼陵陂]”라는 것이다.
모(麰 갈보리)는 내모(來麰)ㆍ춘모(春麰)이다.
내(䅘 밀)의 경우 제(齊)나라 사람들은 줄기를 견(䅌 보릿대)이라 칭하였다.
연맥(燕麥 귀리)은 일명 작맥(雀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세속에서는 이모(耳牟 귀리)라고 한다.
교맥(蕎麥 메밀)은 일명 숙맥(菽麥)이라고도 하고, 화교(花蕎)라고도 한다. 육방옹(陸放翁)의 시구에, “메밀꽃이 덮인 눈과 같다[蕎麥如鋪雪]”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속에서는 목맥(木麥)이라고 한다.
촉서(薥黍 수수)는 고량(高粱)이다. 우리나라의 방언에는 수수를 출(秫)이라 한다. 혹은 별명으로 당미(唐米 수수쌀)라 한다.
숙(菽 콩)은 뭇 두태(豆太)의 총칭이다. 《광운(廣韻)》에 의하면 숙은 숙(尗)과 같다.
답(荅 팥)은 소두(小豆)인데, 등나무처럼 난다.
한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겸년(歉年)이라 하고, 두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기년(饑年)이라 하고, 세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근년(饉年)이라 하고, 네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황년(荒年)이라 하고, 다섯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대침년(大侵年)이라 한다. 그리고 다섯 가지 곡식이 다 풍년 든 해를 유년(有年)이라 한다. 《이아(爾雅)》에는,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기년이라 하고, 채소가 흉년 든 해를 근년이라 하고, 과일이 흉년 든 해를 황년이라 한다.” 하였고, 《광운》에는, “곡식이 없는 해를 기년이라 하고, 채소가 없는 해를 근년이라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채소를 심어서 먹는 것을 오곡 다음으로 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해 농사가 풍년 들려고 하면 단 풀이 먼저 나니, 단 풀은 냉이[薺]이다. 그해 농사가 흉년 들려고 하면 쓴 풀이 먼저 나니, 쓴 풀은 두루미냉이[葶藶]이다. 그해가 악한 해가 되려고 하면 악한 풀이 먼저 나니, 악한 풀은 물마름[水藻]이다. 그해가 가물려고 하면 가문 풀이 먼저 나니, 가문 풀은 납가새[蒺藜]이다. 그해가 돌림병이 발생하려고 하면 병풀이 먼저 나니, 병풀은 쑥[艾]이다. 그해가 장마 지려고 하면 장마풀이 먼저 나니, 장마풀은 쑥대풀[蓬]이다.
고(考)는 《예기》 곡례(曲禮)에, “생전에는 부(父)라고 부르고, 사후에는 고(考)라고 부른다.” 하였는데, 《설문(說文)》에는, “고는 노(老)의 뜻이다.” 하고, 《석명(釋名)》에는, “고는 성(成)의 뜻이니, 성덕(成德)이 있음을 말한다.” 하였다.
비(妣)는 《이아(爾雅)》의 주(註)에, “비(媲)의 뜻이니, 고의 배필이다.” 하였다.
옹(翁)은 《광아(廣雅)》에, “옹은 아버지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기》에는, “나의 아버지[吾翁]는 바로 너의 아버지[若翁]이다.” 하였다.
공(公)은 아버지이다. 《전국책(戰國策)》에 의하면, “진진(陳軫)이 장차 위(魏)나라에 가려고 하니, 그 아들 진응(陳應)이 아버지[公]의 행차를 만류하였다.” 하였다. 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공이라고 한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 의하면, “그 자식을 안고 젖 먹이며 시아버지[公]와 더불어 무례하게 나란히 앉았다.” 하였다.
부군(府君)은 《문중자(文中子)》에 ‘동천부군지술(銅川府君之述)’이란 말이 있다.
대가(大哥)는 당나라 현종(玄宗)이 영왕(寧王)에게 준 서신에서 대가라고 일컬었다.
형형(兄兄)은 북제(北齊)의 남양왕(南陽王) 고작(高綽)이 아버지를 형형이라고 부르고, 적모(嫡母)를 가가(家家)라고 부르고, 유모(乳母)를 자자(姊姊)라고 부르고, 아내를 매매(妹妹)라고 불렀다.
야(爺)는 고악부(古樂府)의 목란(木蘭) 시에, “책(冊)마다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 있다[卷卷有爺名]”는 말이 있다. 오(吳)나라 사람들은 아버지를 자(㸙)라 부르고, 또 파(爸)라 불렀다. 형(荊) 땅의 방언에는 아버지를 다(爹)라고 하였다. 《정자통(正字通)》에는, “의붓아비[假父]를 동(㸗)이라 한다.” 하였다.
모(母)는 《석명(釋名)》에는 덮어 주다[冒]의 뜻이라 하였고, 《증운(增韻)》에는 사모하다[慕]의 뜻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힐편(蒼頡篇)》에는, “그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사람의 젖을 상징한 것이다.” 하였다.
태부인(太夫人)은 《한서(漢書)》 문제기(文帝紀)의 주(註)에 이르기를, “열후(列侯)의 처를 부인(夫人)이라 칭한다. 열후가 죽고 아들이 다시 열후가 되면 이에 태부인이라 일컬을 수 있다.” 하였다.
모(姥)는 공작행(孔雀行)에서 읊기를, “열심히 공모를 봉양하네[勤心養公姥]”라고 하였다. 공(公)은 아버지를 말하고, 모(姥)는 어머니를 말한다. 강남(江南)에서는 어머니를 아언(阿嫣)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전(字典)》에는, “세속에서 어머니를 낭(娘)이라 칭한다.” 하였고, 《운회(韻會)》에는, “낭(娘)은 양(孃)과 같다.”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유씨(劉氏)를 대양양(大孃孃)이라 부르고, 양씨(楊氏)를 양양(孃孃)이라 불렀다. 촉(蜀) 땅 사람들은 어머니를 저(姐)라 부르고, 강인(羌人)은 저(媎)라 부르는데, 저(媎)는 저(姐)와 같다. 그리고 강동(江東) 사람들은 제(姼)라 부르고, 초(楚)나라 사람들은 황(媓)이라 부르고, 또 내(嬭)라 부르며, 제(齊)나라 사람들은 미(㜷)라 부르고, 강회(江淮) 사람들은 제(媞)라 부르고, 회남(淮南) 사람들은 염(媣)이라 부르고, 오(吳)나라 사람들은 미(㜆)라 부른다.
소자(所子)는 《한서(漢書)》의 주에, “형제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을 소자라 한다.” 하였다.
여(女)는 《박아(博雅)》에는, “여는 따르다[如]의 뜻이다.”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는, “사람을 따른다는 뜻이니,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여(女)라 한다.” 하였으며, 《석명(釋名)》에는, “서주(徐州)와 청주(靑州)에서는 딸을 오(娪)라 하는데, 오는 거스르다[忤]의 뜻이다. 딸이 갓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고 언짢아한다.” 하였다.
손(孫)은 자(子) 자와 계(系) 자로 이루어졌으니, 조상을 계승함을 말한다. 《이아》에는, “손은 공순하다[順]의 뜻이니, 조상에게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손(玄孫)은 《이아》의 주에, “현(玄)은 친속(親屬) 관계가 희미함을 말한다.” 하였다.
현손의 아들을 내손(來孫)이라 한다. 《석명》에, “내손은 무복(無服)의 관계에 있으므로 그 뜻이 소원(疏遠)하니 내래(乃來)라고 부른다. 또는 이손(耳孫)이라고도 한다.” 하였고, 응소(應昭)의 주에, “이손은 증조와 고조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내손의 아들을 곤손(昆孫)이라 하니, 곤(昆)은 후(後)의 뜻이다.
곤손의 아들을 잉손(仍孫)이라 하니, 잉(仍)은 거듭하다[重]의 뜻이다. 《석명》에, “예(禮)를 가지고 그대로 유지할 뿐, 은의(恩義)는 실로 없는 것이다.” 하였다.
잉손의 아들을 운손(雲孫)이라 한다. 《석명》에, “거리가 이미 멀어 떠다니는 구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형(兄)은 구(口) 자와 인(儿) 자로 이루어졌는데, 인(儿)은 인(人)이다. 구(口)와 인(人)으로 글자가 이루어진 것은 아우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백호통》에, “형(兄)은 견주다[況]의 뜻이니, 아버지에 견주는 것이다. 강남과 강북에서는 형을 황이라 부른다.” 하였다.
제(弟)는 순종하다[順]의 뜻이니, 형에게 순종함을 말한다.
자(姊)는 자문하다[咨]의 뜻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 자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형(女兄)을 저(姐)라 하고, 여제(女弟)를 매(妹)라 한다.
중(仲)은 가운데[中]의 뜻이니, 지위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숙(叔)은 젊다[少]의 뜻이니, 어린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계(季)는 계(癸)의 뜻이니, 갑을(甲乙)의 차서에 계(癸)가 끝에 있기 때문이다.
부(夫)는 부축하다[扶]의 뜻이니, 도(道)로써 부접(扶接)함을 말한다.
부인이 남편을 이천(移天)이라 하니,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하늘이되 시집가면 남편이 하늘이 됨을 말한다. 또는 소천(所天)이라고도 한다.
처(妻)는 제(齊)의 뜻이니, 남편과 더불어 동체(同體)이기 때문이다.
빈(嬪)은 부인(婦人)의 미칭(美稱)이니, 서로 손님처럼 공경함을 취한 것이다.
부(婦 아내)는 복(服)의 뜻이니, 남편을 복종해 섬긴다는 것이다. 또 아들의 처를 부(婦 며느리)라고 하는데, 시부모를 복종해 섬긴다는 것이다. 강남에서는 부를 구(姁)라 부르고, 강인(羌人)은 발(妭)이라 불렀다. 《자휘(字彙)》에는 부를 식(媳 며느리)이라 하였다.
고(姑 고모)는 고(故)의 뜻이다. 곧 나에게 구고(久故)의 사람이 됨을 말하니, 아버지의 자매(姊妹)이다. 또 남편의 어머니를 고(姑 시어머니)라고 한다. 《광운》에는, “고(姑)는 위(威)라고 말하는데, 무섭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장(嫜 시부모)이라고도 한다. 안사고(顔師古)는, “존장(尊章)은 구고(舅姑)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질(姪)은 바꾸다[迭]의 뜻이니, 바꾸어 가며 진어(進御)함을 말한다.
형제의 처들이 서로 사(姒 위 동서)니 제(娣 아래 동서)니 하고 부른다. 《이아》에, “같은 남편을 섬기는 여자들이 먼저 난 사람을 사(姒)라 하고, 뒤에 난 사람을 제(娣)라 한다.” 하였다.
형제의 처들이 서로 축리(妯娌 동서)라고 부른다.
수(嫂)는 《석명》에는, “수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고, 《의례(儀禮)》에는, “수는 존엄(尊嚴)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였다. 또 구수(丘嫂)라고도 하는데, 구(丘)는 크다는 뜻이다.
장인(丈人)은 태산(泰山)에 장인봉(丈人峯)이 있으므로, 처(妻)의 아버지를 악장(岳丈)이라 부르고 처의 어머니를 태수(泰水)라 부른다.
생(甥)은 생(生) 자와 남(男) 자로 이루어졌으니, 여자가 출가하여 다른 남자의 배필이 되어 낳은 것이다.
서(壻)는 사(士) 자와 서(胥) 자로 이루어졌는데, 서는 재서(才諝 재지(才智))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임금의 사위를 공서(公壻)라 하고, 공주(公主)에게 장가든 자를 주서(主壻)라고 한다. 죽은 딸의 남편을 구서(丘壻)라고 하는데, 구는 공(空)의 뜻이다. 그리고 자매(姉妹)의 남편끼리는 요서(僚壻 동서(同壻))라 하고, 손서(孫壻)는 낭서(郞壻)라 한다. 비서(婢壻)는 여종과 간통한 외부인이고, 유서(游壻)는 창기(娼妓)의 지아비이다.
반자(半子)는 《당서(唐書)》 회골전(回鶻傳)에, “가한(可汗)이 상서하기를, ‘지금은 사위이니 반 자식입니다.’라고 했다.” 하였다.
포대(布代)는 《천중기(天中記)》에 이르기를, “데릴사위를 포대라고 한다. 풍포(馮布)라는 자가 재간(才幹)이 있었는데, 손씨(孫氏)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자 그의 장인이 번거로운 일만 있으면 풍포에게 대신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모(母)는 적모(嫡母)이다.
첩(妾)은 접(接)의 뜻이다. 또는 방처(傍妻)라고도 하고 처첩(處妾)이라고도 하는데, 처첩은 동녀(童女)이다.
김공 경연(金公敬淵)이 소싯적에 꿈속에서 “푸른 적삼에 흰 말을 타고 소동루를 향하는데, 장수의 깃발 앞세우고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靑衫白馬小東樓 牙纛去時不復還]”라는 시구를 얻었다. 이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어 부임할 때 한 성루(城樓)를 보고, “이것이 무슨 누대인고?” 하고 우연히 물어보았더니, ‘소동문루(小東門樓)’라는 것이었다. 공은 깜짝 놀라며, “이것이 바로 소동루인가. 나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내 병이 나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맹자(孟子)》에서 말한 “대인이 할 일이 있다.[有大人之事]”는 구절의 ‘대인’은 지위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그 심지(心志)를 잘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養其大者爲大人]”는 구절의 ‘대인’은 덕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주역》에서 말한 “대인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는 구절의 ‘대인’은 덕과 지위를 겸해서 말한 것이다.
지금 사람은 아버지를 대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한서(漢書)》 소광전(疏廣傳)에, “소수(疏受)가 소광(疏廣)에게 말하기를, ‘대인의 의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숙부도 대인이라 칭할 수 있고, 또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범방이 그 어머니와 결별하면서 말하기를, ‘대인께서는 차마 못하는 사랑을 잘라 버리소서.’라고 했다.” 하였으니, 어머니도 대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자가 선생에 대해서 더러 선(先) 자든 생(生) 자든 그 어느 한 글자만을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漢)나라 때 숙손통(叔孫通)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조정 의식을 만들었는데, 제생(諸生)들이 “숙손생(叔孫生)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하였고, 《한서》 매복전(梅福傳)에 의하면, 매복이 “숙손선(叔孫先)은 충성치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註)에, “선(先)은 선생(先生)과 같은 것이다.” 했다. 또 장석지전(張釋之傳)과 공수전(龔遂傳)에는 왕생(王生)을 위하여 버선끈을 매어 주었느니 한 말이 있고, 또한 공경(公卿)들이 등선(鄧先)이니 장담선(張談先)이니 하고 자주 말들을 하였으니, 모두 이 뜻이다.
건륭(乾隆) 연간에 선부(膳夫)가 포갱(匏羹 박국)을 올리니, 건륭황제가 “귀하지 못한 물건이다.” 하면서 퇴짜를 놓았다. 그러자 건륭황제가 죽을 때까지 중원 천하에 박이라는 박은 익지를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제왕은 천제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니 역사책에서, “오랑캐 또한 천상(天象)에 응하였구나.” 하고 조롱한 것은 잘못이다. 울타리에 여는 박꽃이 지금도 성하지 않으니 괴상한 일이다.
고려 때 대궐 뜰을 구정(毬庭)이라고 한 것은 모양이 공과 같았기 때문이다. 근세에 말[馬]의 훈련장을 구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훈련장이 희구(戱毬)처럼 둥글기 때문이다.
정조(正祖)가 군관(軍官) 서유대(徐有大)를 불러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너는 가서 후원에 있는 귀신들을 먹여라.” 하고 분부하였다. 서공은 분부를 듣자마자 곧바로 갔다가 조금 후에 복명하였다. 정조가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었느냐?” 하니, “국출신(局出身)들에게 먹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깜짝 놀라며, “너는 너무나 영리하구나.” 하였다. 이때부터 서유대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쇠해 갔다.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그 뜻을 받드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버이를 섬길 때 말씀하지 않은 뜻까지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금상(今上) 신미년(1871, 고종8) 10월 7일에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는데, 나는 약원(藥院)의 직임을 지닌 사람으로서 주선하고 물러 나왔다. 이날 밤 꿈에 높은 누대(樓臺) 위에 있노라니 얼룩무늬의 털을 가진 짐승이 무리를 지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범이라고 하였다. 또 그 숫자를 물어보았더니 15마리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서 생각해 보았더니 대개 범은 남자의 상징이고 15는 양수(陽數)이다. 그러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11월 4일 경인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비로소 그 꿈의 징조를 알았다. ‘경’ 자와 ‘인’ 자는 범에 속하고, 달수의 11과 날수의 4를 합하여 15가 되는 것이다.
산실청의 당직실이 이문원(摛文院)과 가까워 매일 책을 가져다가 읽었는데, 와서 보는 제공(諸公) 중에 더러 웃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대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하고 말했다. 일찍이 한 노인이 이르기를, “항상 책을 책상에 놓아두면, 눈은 비록 책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책에 있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이 격언이다. 진실로 조용할 때에 묵묵히 앉아서 책을 펼쳐 본다면 어진 스승과 좋은 벗을 대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자연 순정(純正)해지니, 혼자 있을 때의 공부는 이 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표천(鄭瓢泉)이 젊은 시절 서쪽 어떤 고을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러 갈 때 단상(湍相)을 찾아뵙고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상공(相公)이 말하기를, “자네는 내려가서 꼭 글을 많이 읽게.” 하니 정공은 그러리라 하고 물러갔다. 임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정공이 또 단상 댁에 들러 뵈었더니, 상공이, “글을 읽었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읽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상공은 깜짝 놀라며, “그러면 무엇을 했는가?” 하고 물었다. “돈 몇만 관을 싣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상공이 괴상히 여기고,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토지를 사려고 합니다. 사대부가 국사에 전력하려면 먼저 집안 걱정을 잊어야 가능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네. 나는 다섯 번 감사 노릇을 하였으나 집안이 이처럼 가난하니,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일일세.” 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정공의 말을 기억하고 정공을 관찰해 보았더니, 정공은 서쪽 고을의 수령으로 갔다 온 뒤로는 다시는 돈을 갖고 오지 않았다.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정승이 되었을 때 매번 사대부들의 사생활이 넉넉한가의 여부를 물어보았으니, 이것은 그들이 거취를 가볍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기공(杜祁公)은 장원 급제한 사람을 보고 그 가산의 있고 없음을 물어보았으니, 이것은 그들이 생활이 어려워 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상공과 정공 두 분의 문답은 그 차원이 모두 여느 사람보다 한층 높은 것이다.
어떤 관상쟁이가 동어(桐漁 이상황(李相璜))의 젊은 시절의 상을 보니 취할 만한 데가 없었다. 그 집에 머물러 함께 자면서 살펴보았으나 일상생활의 행동 가운데에도 더욱 칭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동어가 뒷간에 갔을 때의 태도를 보고는 말하기를, “크게 귀할 상이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모습이 바로 옥토끼가 달을 희롱하는 형상이니, 매우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송나라 때 한 위공(韓魏公 한기(韓琦))은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였고, 문로공(文潞公 문언박(文彦博))은 걸음걸이가 자박거렸는데, 관상쟁이가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일이 없으면 대신의 상이 아니다.” 하였다.
이여해(李汝諧)가 송나라 사람의 글씨를 기증하였는데, 그 서법이 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었다. 뒤에 청나라 사람 판교(板橋) 정섭(鄭燮)이 쓴 ‘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뜻의 ‘난득호도(難得糊塗)’ 네 글자를 보았더니, 그 아래에, “똑똑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려우나, 똑똑한 경지에서 점차 어리석은 경지로 들어가기는 더 어렵다. 한 단계를 늦추고 한 걸음을 물러서며 자신의 생각을 낮추는 것이 어찌 뒷날 복을 받는 계책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적었는데, 그 서체는 바로 송나라의 서법이었다.
윤야(潤埜) 이기부(李基溥)가 난초 그림 여덟 폭을 연경(燕京)의 대종사(大鍾寺)에서 얻어 와서 나의 글씨와 바꾸었다. 뒤에 그 난초 그림이 궁궐로 흘러 들어갔다가 또 외간으로 흘러 나갔는데, 그중 두 폭은 종이 더미 속에서 발견되어 지금 향관(香館)에 보관하고 있다.
정경산(鄭經山 정원용(鄭元容))의 《수향편(袖香編)》에는 국조전고(國朝典故), 예악문물(禮樂文物) 등 400조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풍고(金楓皐 김조순(金祖淳))와 수작한 말이 30여 조목이나 되었으니, 선배들의 교제는 후진들이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대부(先大父) 문정공(文貞公 이계조(李啓朝))이 고금의 격어(格語)와 이문(異聞)을 기록한 것이 3, 4십 권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한 가지도 당세의 일을 적은 것이 없었다. 집에 간수하고 ‘만벽당총서(晩碧堂叢書)’라고 하였다.
가대인(家大人)께서 승자(陞資)하자 윤경당(尹褧堂)이 옥관자(玉貫子)를 보내며 축하의 말을 하기를, “이에 연꽃을 새겨 묘하게 꾸민 옥관자를 드리고, 이로써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를 빕니다.” 하였다. 전편이 모두 이와 같은 말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때여서 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 한 구절뿐이니, 매우 한스럽다.
지사(知事) 이기남(李箕男)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진공 정사(進貢正使)로 연경에 갔는데,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향에 전해 달라고 편지를 많이 부쳤다. 한글로 쓴 편지가 한 상자나 되었는데, 이기남은 사양치 않고 받아 가지고 압록강에 이르러서 모두 물속에 던져 버리고 종신토록 그 편지의 출처를 말하지 않았다. 이기남의 자손들이 많은 것은 실로 그 음보(陰報)를 받은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연경에 갔다가 돌아온 자가 한인(漢人)의 시를 읊기를,
나에게 장부의 눈물이 있으나 / 我有丈夫淚
감히 울지 못한 지 삼십 년이나 되었네 / 不敢泣下三十年
오늘날 심양의 길에서 / 今日瀋陽路
그대를 위하여 가을바람 앞에서 한 번 눈물을 뿌리노라 / 爲君一灑秋風前
감히 울지 못한 지 삼십 년이나 되었네 / 不敢泣下三十年
오늘날 심양의 길에서 / 今日瀋陽路
그대를 위하여 가을바람 앞에서 한 번 눈물을 뿌리노라 / 爲君一灑秋風前
하였으니, 그 말이 격절하고 강개하였다. 한인의 도장에 이따금 “나는 본래 한을 품은 사람이다.[僕本恨人]”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천일정(天一亭)으로 가는 길이 이태원(異胎院)을 경유한다. 임진왜란 뒤에 왜인(倭人)들을 살게 해 준 곳이다. 그 풍속이 지금도 사납고 독하니 왜인의 종자가 남아 있어서일 듯한데, 습속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수령으로 나갈 때 장기(瘴氣)가 있는 지역을 피하는데, 수령 자체에도 장기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금을 난폭하게 거두고 아랫사람을 박해하여 윗사람을 받드는 것은 조부(租賦)의 장기요, 법조문을 엄격히 적용하여 이욕을 챙기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명백하게 가리지 않는 것은 형옥(刑獄)의 장기요, 백성들의 이익을 침범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화재(貨財)의 장기요, 쇠와 나무를 다루어 거복(車服)을 호화롭게 꾸미는 것은 공역(工役)의 장기요, 첩희(妾姬)를 많이 가려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유박(帷薄)의 장기다.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대하여 늙은 학구(學究)들이 이따금 ‘한나라의 수정후’로 풀이하였다. 나도 일찍이 그렇게 알았는데, 뒤에 지리지(地理誌)를 보매 한수라는 땅이 있었으니, 정후가 벼슬 이름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유현덕(劉玄德)이 의성 정후(宜城亭侯)였던 것으로 보면, 정후가 벼슬 이름이라는 것은 더욱 분명하다.
사람은 글은 할 줄 모르면서도 소아(騷雅)의 기운이 있고, 중은 게(偈)는 할 줄 모르면서도 청고(淸高)한 기상이 있다. 그리고 술 한 잔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도 술의 정취를 이해하고, 돌 한 개조차 그릴 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의 품격을 안다. 이것은 마음이 슬기롭기 때문이다.
진미공(陳眉公 진계유(陳繼儒))에게 다소잠(多少箴)이 있었는데, 그 말이 속되지 않았다. 지금 있는 한 본(本)은 어떤 사람의 저작인지 모르겠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기욕(嗜慾)은 적게 갖고 견문(見聞)은 많이 가질 것이며, 본심(本心)은 많이 갖고 부끄러워하는 얼굴 모습은 적게 가질 것이며, 귀한 사람에게 붙는 일은 적게 하고 천한 사람을 편드는 일은 많이 할 것이며, 독립(獨立)하는 일은 많이 하고 구속(拘束)받는 일은 적게 할 것이며, 서울에 사는 일은 적게 하고 시골에 사는 일은 많게 할 것이며, 하찮은 음식은 많이 먹고 좋은 음식은 적게 먹을 것이며, 말은 적게 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많게 할 것이며, 자수(自守)하는 일은 많게 하고 탐선(耽羨)하는 일은 적게 하라. 나에게 맛있는 술이 있으니 기쁘게 잔치를 베풀으리라.” 하였다.
산속의 삶에는 여덟 가지 덕목이 있으니, 마음을 비울 것, 몸을 편안히 할 것, 욕심을 버릴 것, 예절을 지킬 것, 할아비는 낚시질을 할 것, 아이들은 글을 읽을 것, 그림 그리는 일은 망설일 것, 풍자는 하지 않을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을 놓아두면 밥벌레나 같을 것이다.
산새가 우는 것은 진솔루(眞率漏)라 이르고, 뜰의 개구리가 우는 것은 양부취(兩部吹)라 이른다. 이에 대해 연구(聯句)를 쓰기를, “수풀에 부는 바람은 시간을 알리는 새를 날리고, 물 위에 떨어지는 장맛비는 개구리 울음을 재촉하도다.[一林風送報更鳥 傍水霖淫催鼓蛙]”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산사실록(山史實錄)이다.
옛날에 있던 낙하금(落霞琴)은 중국 사람이 준 것인데, 거기에 명(銘)이 씌어 있기를, “이 낙하금 한 개는 치운(穉雲)이 만든 것이다. 그 가운데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이 있으니, 종자기(鍾子期)가 아니면 그 누구와 흥취를 부치리오. 도광(道光) 계미년 계하(季夏) 초에 주강(珠江)의 포서(捕署)에서 명을 짓다. 학파(學坡) 왕갱(王賡)이 쓰고 전당(錢塘) 조기(曹錡)가 제작하다.” 하였다.
“말을 조심하라는 훈계는 고금이 다를 것이 없었으니, 《논어》에는 열다섯 번 보이고 《주역》에는 열두 번 보인다.[愼言揭訓無今昔 十五於論十二易]”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시구이다. 《논어》에는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 열다섯 번 보이고, 《주역》에는 열두 번 보인다. 진계유(陳繼儒)가 말하기를, “옛날의 은거한 자는 말을 대담하게 하였으나, 오늘날의 은거하는 자는 말을 공손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나 붓으로 쓰는 것이나 모두가 말인데, 입에서는 조심하고 붓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 말을 공손하게 한다고 하면 옳겠는가.” 하였다.
선유(先儒)들이 칠정(七情)의 뜻을 논할 때 대부분 ‘정(情)은 성(性)이 동한 것이다.’라고 여겼으니,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이 이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
희는 ‘대우(大禹)가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지적을 받으면 기뻐했다’는 바로 그것이고, 노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한 번 노하매 천하가 안정되었다’는 바로 그것이고, 애는 ‘문왕(文王)이 불쌍한 사람들을 애처롭게 여겼다’는 바로 그것이고, 구는 ‘맹자가 이단을 두려워했다’는 바로 그것이고, 욕은 ‘의(義)는 내가 하고 싶다’는 바로 그것이다. 요순(堯舜)이 백성을 사랑했던 것이나, 공자(孔子)가 간색(間色)인 자줏빛을 미워했던 것은 정(情)의 올바른 것이다.
손백종(孫伯宗)이 조정에서 물러 나와 기뻐했던 것이나, 오왕(吳王)이 자서(子胥)에 대해 노여워했던 것이나, 완적(阮籍)이 이웃 여자를 애처롭게 여겼던 것이나, 장선(莊善)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사적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 묵자(墨子)의 겸애(兼愛)나, 양화(陽貨)가 무례한 것을 미워했던 것이나, 신장(申棖)의 욕심은 정(情)의 사특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인의 기쁨은 물건에 따라서 기뻐하고, 성인의 노함 또한 당사자에 따라서 노하니, 이것은 마음에 매이지 않고 상대방에게 매인 것이다. 사람이 누가 배우지 않고 능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성(性) 가운데의 도리이다.”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하나의 기(氣)가 오르내릴 뿐이다. 하늘은 기(氣)로써 베풀고 땅은 질(質)로써 받는다. 기가 오르면 양(陽)이 되어 더위가 이르고, 기가 내리면 음(陰)이 되어 차가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세서(歲序)가 오월(午月)에 이르면 더운 기운이 혹심하다. 하짓날은 기가 당연히 내리니 더위가 점점 물러간다. 겨울이 되어 천기(天氣)가 크게 차가우면 땅의 받는 기가 도리어 더워져서 우물물이 따스해진다. 또 자월(子月)이 되면 차가운 기운이 극에 달한다. 동짓날은 기가 당연히 올라가니 차가운 기가 점점 사라진다. 여름이 되어 천기가 크게 더우면 땅의 저축된 기가 도리어 차가워 우물물이 서늘해진다. 이것은 구괘(姤卦)와 복괘(復卦)의 상(象)이다. 사람의 몸에 증험해 보면, 여름에는 몸은 더위를 이기지 못하나 배는 차갑고, 겨울에는 몸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나 배는 따뜻하니, 몸은 하늘과 같고 배는 땅과 같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고첩(古帖)을 많이 모아 책상에 비치하였는데, 그 이익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다섯 가지 해가 있다. 긴긴 날을 보내고 속된 것을 제거하는 데는 이익됨이 없지 않으나, 농사짓고 나무하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첫째 해이다. 서파(書派)를 분별하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꽃을 가꾸고 채소 물주는 일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둘째 해이다.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아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셋째 해이다. 풍류를 즐기고 고아한 태도를 갖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북쪽 창 밑에서 낮잠을 자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넷째 해이다. 훈수법(薰修法)과 같은 것에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손님을 대하여 담론을 하는 데에 해가 되니 그것이 다섯째 해이다.
《주사(酒史)》를 지은 사람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소나무 밑에 마주 앉아서, 앞산에 석양이 곱게 물들고 아지랑이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줄도 깨닫지 못한 채 끊임없이 담론하다가 손님이 일어서려고 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비가 촉촉히 내릴 때 여관에서 이웃집의 술 거르는 소리를 들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물에 목욕하고 나서 높은 절벽에 누워 꾀꼬리 소리를 들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국화는 늙어 가고 단풍은 쇠잔해 가므로 가을 흥취를 견디지 못하여 뜰을 배회하고 있을 때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찾아오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깊어 가는 산옥(山屋)에서 등불을 켜고 유협전(遊俠傳)을 읽어 내려가다가, ‘바람 소리 우수수 나니 역수가 차갑구나.[風蕭蕭兮易水寒]’라는 글귀에 이르게 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적을 치러 나가려고 깃발과 북을 정돈하고 장검을 어루만지며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데 별안간 붉은 햇빛이 땅에 가득함을 보게 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공손대낭(公孫大娘)이 칼춤을 추어 태수(太守)의 천묘(千畝)나 되는 대나무밭을 쓸어버렸다.’는 대문을 배울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을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의 자만가(自挽歌)에 화답할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당시(唐詩)를 읽다가 이청련(李靑蓮 이백(李白))의 여산폭포(廬山瀑布) 시에 이르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산창(山窓)에 눈은 개고 새벽 달은 밝으며 우주에 한 점의 티끌 기운이 없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거문고를 타다가 끝나갈 때에 갑자기 가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바짝 나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대숲의 그늘이 주렴에 가득하고 임원(林園)은 깨끗한데 창 밖에서 바둑 두는 소리가 들리면 술 생각이 먼저 동하게 된다. 낙화(落花)를 보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고, 좋은 술잔을 받으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근심이 있는 자가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두세 잔 들이마시면 어렴풋이 잠이 오니 또한 쾌족한 일이다.”
근심이 있는 자가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두세 잔 들이마시면 어렴풋이 잠이 오니 또한 쾌족한 일이다.”
사람의 장단점은 반드시 죽은 뒤에 나타난다. 죽은 뒤에는 대부분 단점을 드러내고 장점은 드러내지 않는데, 어찌 감히 장점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단점만 없으면 다행이다.
정원(政院)의 인신(印信)은 강희(康煕) 연간에 제작한 것인데, 인문(印文)이 아직도 닳지 않고 있다. 인신을 주조할 때 금과 쇠를 혼용해서 만들었으니, 이 때문에 오래되어도 닳지 않는다고 한다.
옛말에, “상사(上士)는 마음을 닫고 중사(中士)는 입을 닫고 하사(下士)는 문을 닫는다.” 하였으니, 이 말은 ‘큰 은자(隱子)는 성시(城市)에 숨는다’는 말과 같다.
매화는 한옥(寒屋)에 두는 것이 어울리고, 살구는 장대(粧臺)에 두는 것이 어울린다. 그리고 배꽃은 봄비와 어울리고, 연꽃은 새벽바람과 어울리고, 해당화와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자리에 어울리고, 모란꽃과 작약꽃은 계극문(棨戟門)에 어울리고, 꽃다운 계수나무와 그윽한 난초는 은사(隱士)에게 주는 것이 좋다.
옛날 세상에 뜻을 둔 자들은 근력이 있어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나는 연약하니 첫 번째 불능(不能)이요, 국사가 어려움이 많은데 나는 편안히 누워 있으니 두 번째 불능이요, 좋은 수레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영화를 누리는 자가 많은데 나는 산속에 살고 있으니 세 번째 불능이다. 그리고 생황과 퉁소, 북과 악기를 앞뒤에서 연주하는 자들이 많은데 나는 다만 까마귀 떼와 새의 지저귀는 소리만 들으니 네 번째 불능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요히 앉아 저술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옛사람들의 저술을 외우고 선현(先賢)들을 비판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은 것을 뽑아서 남의 잘못을 입증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람을 시켜서 나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시를 짓기를,
의원의 사람은 의도 가운데 있고 / 意園人在意圖中
그림 밖의 귤산은 한수의 동쪽에 있도다 / 圖外橘山漢水東
한수의 동쪽에 있는 천석이 나의 의원이니 / 漢東泉石吾園意
집 이름을 오리귤옹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 名室可吾李橘翁
그림 밖의 귤산은 한수의 동쪽에 있도다 / 圖外橘山漢水東
한수의 동쪽에 있는 천석이 나의 의원이니 / 漢東泉石吾園意
집 이름을 오리귤옹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 名室可吾李橘翁
하였는데, 속된 말이고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의원이라고 일컬은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귤산의원(橘山意園)이란 네 글자를 일찍이 강사(江榭)에 편액으로 썼는데 중국 사람이 그림을 그려 보내왔기 때문에 시의(詩意)가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노경에 꿈속에서 산중에 들어가 보았더니, 석벽에 ‘천광대사정식(天光大師淨食)’이란 여섯 글자의 대자(大字)가 새겨져 있고, 그 곁에는 밥 먹는 중들이 수없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큰 숟가락 여섯 개를 주었다. 그 모양이 고려 때의 숟가락과 같았다. 두 개는 따라온 자들에게 나눠 주고 네 개는 품에 품고 깨었다. 그 숟가락을 그림으로 그려 고경(古鏡)이라는 선승(禪僧)에게 질정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향산(香山)에 운광대사(雲光大師)가 남긴 숟가락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불가(佛家)의 말에 네 가지 정식(淨食 깨끗한 생활)이란 것이 있으니, 유구식(維口食 주술(呪術)이나 점치는 일)을 아니하며, 앙구식(仰口食)을 아니하며, 방구식(方口食 부호(富豪)에게 아첨하여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며, 하구식(下口食 논밭을 갈거나 탕약을 지어서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다. 아니하다[不]의 뜻이 정(淨)이다. 앙구식은 조정에 의지하여 먹는다는 뜻이다. 우리 유가(儒家)로 보면, 천광(天光)에는 ‘천광이 배회한다[天光徘徊]’라는 글귀의 뜻과 같은 것이 있고, 정식(淨食)에는 ‘인의(仁義)에 배부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 있다. 숟가락을 받은 것은 남조(南朝) 때 강엄(江淹)이 오색의 붓을 받았다는 꿈과 같은 점이 있는 것일까.
서사가(徐四佳 서거정(徐居正))가 노경에 들어 하루에 지은 시가 더러는 10수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자소(自笑) 시를 짓기를,
한 수의 시를 읊고 나서 또 시를 읊으니 / 一詩吟了又吟詩
종일 시만 읊고 그 밖의 것은 모르노라 / 盡日吟詩外不知
옛날에 지은 시들 펼쳐 보니 만 수나 되는데 / 閱得舊詩今萬首
죽은 날에 가서야 시를 짓지 않을 걸 아노라 / 儘知死日不吟詩
종일 시만 읊고 그 밖의 것은 모르노라 / 盡日吟詩外不知
옛날에 지은 시들 펼쳐 보니 만 수나 되는데 / 閱得舊詩今萬首
죽은 날에 가서야 시를 짓지 않을 걸 아노라 / 儘知死日不吟詩
하였다. 임신년에 나는 고향에 돌아온 지 40일 만에 시 400편을 지었는데, 장단시(長短詩)와 율절시(律絶詩)가 다 구비되었다. 더위 먹은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을 때 붓을 던져 버리고 일어서서 읊기를,
올해의 질병이 지난해와 같으니 / 今年疾病去年如
해마다 질병으로 기거가 나태하다 / 疾病年年懶起居
처자식의 병을 병통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니 / 非但病吾妻子病
병 속에 세월을 좁은 집에서 보내노라 / 病中歲月一蝸廬
해마다 질병으로 기거가 나태하다 / 疾病年年懶起居
처자식의 병을 병통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니 / 非但病吾妻子病
병 속에 세월을 좁은 집에서 보내노라 / 病中歲月一蝸廬
하였다. 기당(祁堂) 홍 상국(洪相國 홍순목(洪淳穆))이 나더러, ‘일이 없어서 병이 생긴다’고 조롱하기에 내가 읊기를,
오래도록 한가하여 세상일 잊고 보니 / 久閒忘世事
질병이 자주 찾아드는구나 / 疾病頻侵尋
침범한 질병은 달게 여기나 / 自甘侵疾病
이미 사그라진 마음엔 어찌하리요 / 其奈已灰心
질병이 자주 찾아드는구나 / 疾病頻侵尋
침범한 질병은 달게 여기나 / 自甘侵疾病
이미 사그라진 마음엔 어찌하리요 / 其奈已灰心
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변방으로 귀양 갔을 때 정대모(程大侔)에게 답장하기를, “여기는 음식에 고기가 없고, 질병에 약이 없고, 거처에 내실이 없고, 나감에 벗이 없고, 겨울에는 숯이 없고, 여름에는 찬 샘이 없으니, 대체로 없는 것뿐이라오.” 하였다.
나의 고향에는 소공의 없던 것이 다 있는데, 다만 고기와 약이 없을 뿐이다.
소식(蘇軾)의 ‘동파(東坡)’라는 호는 백낙천(白樂天 백거이(白居易))의 《남빈지(南賓志)》에서 나왔다. 동파, 서파(西坡)는 다 백 문공(白文公 백거이)의 고적(故蹟)이다. 《용재수필(容齋隨筆)》에, “동파가 백낙천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호를 삼았다.” 하였다. 그리고 미주(眉州) 마이산(蟆頤山)에 노옹천(老翁泉)이 있는데, 동파는 만년에 또한 ‘노천거사(老泉居士)’라고 호를 지었으니, 이것이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연어(石林燕語)》에 보인다. 부자(父子)가 같은 호를 한 것 또한 특이한 일이다.
그림으로 산수를 보면 산수의 영향이 그림만 못하고, 산수로 그림을 보면 산수의 기운이 그림보다 낫다. 화초(花草), 영모(翎毛)는 붓끝에서 생기가 나고, 누대(樓臺), 인물(人物)은 눈동자가 정신을 전할 수 있다.
속담에, “용은 그리기 쉬워도 범은 그리기 어렵다.” 했다. 그것은 용은 보지 못하는 것이고 범은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이태백이 고래 타고 하늘에 올라갔는데, 누구와 달밤에 놀거나.”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밝은 달의 주인이 어찌 이태백 하나뿐이겠는가. 다만 그는 그것을 일전도 들이지 않고 샀을 뿐이다. 소동파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가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라고.”
선화(宣和) 연간에 어느 주점(酒店)의 벽에, “시비는 낚시터에 이르지 않고, 영욕은 항상 말 탄 사람을 따른다.[是非不到釣魚處 榮辱常隨騎馬人]”라는 시구가 씌어 있었다. 나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낚시질하는 것은 한가한 것이 바쁜 것 같고, 말 타는 것은 귀한 것이 천한 것 같다.” 하였다.
김노가재(金老稼齋 김창업(金昌業))가 연경에 가다가 한 주점을 보고, “어찌 궁벽한 곳에 있는가?” 하니, 그 주인 여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꽃이 향기로우면 나비가 스스로 오는 법이지요.[花香蝶自來]” 하였다. 중국 말은 비록 일상적인 대화나 시골 사람의 말이라 하더라도 시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식한 촌 여자의 문답하는 말도 모두 이와 같거니와, 관청에서 통용하는 언어로 말하면 더욱 문자의 풀이인 것이다. 각성(各省) 중에서 복건성(福建省)의 말이 아름답지 못하다 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을밤이 길다’는 말은 하지만 ‘여름밤이 길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속에 살면서 일이 없으면 여름밤도 역시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시를 읊기를,
주시에서는 겨울밤 긴 걸 읊었고 / 周詩冬夜永
당시에서는 가을밤 긴 걸 읊었다 / 唐詩秋夜長
어째서 여름밤이 긴 걸 괴로워하는가 / 如何苦夏夜
걱정이 있는 것도 상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 非憂又非傷
당시에서는 가을밤 긴 걸 읊었다 / 唐詩秋夜長
어째서 여름밤이 긴 걸 괴로워하는가 / 如何苦夏夜
걱정이 있는 것도 상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 非憂又非傷
하고, 또 읊기를,
겨울밤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 冬夜䨦䨦雪
가을밤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 秋夜颯颯風
여름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 / 夏夜一簷雨
차갑게 나의 어둔 귀를 울린다 / 冷冷起我聾
가을밤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 秋夜颯颯風
여름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 / 夏夜一簷雨
차갑게 나의 어둔 귀를 울린다 / 冷冷起我聾
하였으며, 또 읊기를,
내가 귀 먼 것은 타고난 것인데 / 我聾天所賦
어디서 들려오는 빗소리인가 / 何來一雨聲
산속의 더러운 것들 말끔히 씻는데 / 洗滌山中累
밤중에 홀로 놀래노라 / 中夜獨自驚
어디서 들려오는 빗소리인가 / 何來一雨聲
산속의 더러운 것들 말끔히 씻는데 / 洗滌山中累
밤중에 홀로 놀래노라 / 中夜獨自驚
하였다.
설경(雪景)은 산의 경치만 한 것이 없고, 산의 설경은 달빛 아래에서 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눈을 읊은 시에서,
눈 쌓인 산 위에 까마귀 나니 / 寒鴉一點雪千山
흑백이 분명하여 쉽사리 보겠다 / 黑白分明容易覵
까마귀 눈 더럽히지 않으니 눈 더욱 깨끗한데 / 鴉非汚雪雪逾潔
눈이 까마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 而雪於鴉那有關
흑백이 분명하여 쉽사리 보겠다 / 黑白分明容易覵
까마귀 눈 더럽히지 않으니 눈 더욱 깨끗한데 / 鴉非汚雪雪逾潔
눈이 까마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 而雪於鴉那有關
라고 하였으니, 바로 실경(實景)이다.
송나라 조 청헌(趙淸獻 조변(趙汴))은 59세에 우렛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고서 자호를 지비자(知非子)라 하였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허물을 고친 데 대한 말이라고 한다.
나는 금년이 59세다. 거백옥(蘧伯玉)보다 10년 뒤에 잘못을 알았으나 잘못을 아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렛소리가 나의 도심(道心)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태을삼식서(太乙三式書)》는 역리(易理)에 근거를 둔 책이다. 연경 저자에 두 본이 있으니, 하나는 등본(謄本)이고 다른 하나는 침본(鋟本)인데, 모두 금서(禁書)이다. 틀린 전사본(轉寫本)보다는 판서(板書)가 조금 낫다. 그러나 학력(學力)을 갖춘 뒤에야 마음을 안정할 수 있으니, 아이들은 이것을 익혀서는 안 된다. 대개 패관소설(稗官小說) 중에서 《산해경(山海經)》과 지리지(地理誌) 외에는 책상머리에 둘 필요가 없다.
소동파가 말하기를, “나무를 심는 데 있어서는 큰 것은 살릴 수가 없고, 작은 것은 이 늙은이가 그 생장을 기다릴 수가 없다. 따라서 중간치를 고르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뿌리에 흙덩이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이 좋다.” 하였다. 나는 매번 소공의 말을 취한다.
차(茶)를 채취할 때는 가는 것을 채취하고, 차를 저장할 때는 따뜻하게 저장하고, 차를 끓일 때는 뜨겁게 끓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는 것을 채취하지 않으면 쓰고, 따뜻하게 저장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고, 뜨겁게 끓이지 않으면 맛이 없다. 더욱이 깨끗한 것을 귀히 여기는데, 햇빛을 보여 맛이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해서(海西)에서는 먹이 생산된다. 중국 강남(江南)의 휘주(徽州)와 흡주(歙州)의 경우, 그을음은 아궁이로부터 먼 곳에 있는 것을 채취하고 기름은 맑고 깨끗한 것을 채취한 다음 부드럽게 빻아 얇게 뜬다. 이렇게 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진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토가 알맞고 시절이 적합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늦가을에 만들 경우는 몇 해를 경과해도 먹이 부서지지 않는다.
진미공(陳眉公 진계유(陳繼儒))이 말하기를, “옛 비문이나 석각의 법첩(法帖)을 표구할 적에는 전액(篆額)을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현인(賢人)이 갓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 말은 법첩의 운치를 깊이 얻은 것이다. 그러나 한비(漢碑) 300종(種) 가운데 전액을 전한 것은 불과 10분의 1인데, 어떻게 현인들을 일일이 갓을 쓰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벼루를 씻기 좋아하니, 구양공(歐陽公)의 “3일 동안 벼루를 씻지 않으면 마치 세면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 말에 대해 실로 동감한다. 갓 벼루를 씻어서 대하면 때를 씻고 일월을 보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
마음이 한가하고 몸이 편안하면 책을 보고, 마음이 호탕하고 손이 건장하면 글씨를 쓰고, 마음이 한유(閑遊)하고 눈이 밝으면 그림을 그리고, 마음이 맑고 손가락이 가벼우면 거문고를 탈 것이다.
마음과 몸이 다 나약하면 병이 나게 되고, 마음과 손이 다 무력하면 눕게 되고, 마음과 눈이 다 어두우면 졸음이 오게 되고, 마음과 손가락이 다 활발하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초서(抄書)는 많음을 구할 필요가 없다. 한 토막이라도 가치 있는 글을 얻으면 보배가 된다. 따라서 그러한 글을 부지런히 구할 뿐이니, 부지런히 구하면 아홉 길 산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어찌 곧장 높은 태산을 이루는 자가 있겠는가.
독서(讀書)는 강령(綱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욕심을 부려 많은 양을 탐해서는 안 된다. 송독(誦讀)함에 있어서는 다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하면 저절로 풍부한 지식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급히 달리면 미끄러지고 엎어지게 마련이니, 절대 경계해야 한다.
글씨를 쓰는 데는 생획(生畫)이 있고 또 숙획(熟畫)이 있다. 생획을 쓸 줄 모르면서 먼저 숙획을 일삼는다면, 이것은 바로 나루를 건너뛰어 배를 타는 격이다. 그 어찌 순조롭게 피안(彼岸)에 닿아 현묘(玄妙)의 문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명승(名勝)에 대해 나중에 시 53수를 지었더니, 기당(祁堂 홍순목(洪淳穆))이 말하기를, “봉래(蓬萊)ㆍ영주(瀛洲)의 청랭(淸冷)한 기운이 궤안(几案) 사이에 피어오르니 소동파의 이른바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라는 것이오. 처음에는 비록 늘그막에 자리에 누운 채 젊은 시절의 유람을 생각하면서 세속에 찌든 마음과 병든 몸을 위로하기 위해서 쓴 작품이지만,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정도가 참으로 ‘백석(白石)으로 밥을 지어 먹고 벽하(碧霞)를 마신다.’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구려.” 하였다.
사시향관 잡영(四時香館雜詠) 30수와 전원 잡영(田園雜詠) 12수를 기당(祁堂)에게 부쳤더니, 서신을 보내오기를, “꽃향기 그윽한 곳이기에 하루가 참으로 한 해와 맞먹을 터이니, 옛날 공리자서(公理子西)가 힘주어 말했던 것처럼 그 높은 운치는 노둔한 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못난 자신을 돌아보건대, 그와 같은 경제(經濟)를 일찍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어찌 뜻이야 본래 없었겠소만, 하늘이 청복(淸福)을 누리게 하는 일은 쉽게 얻을 수 없나 봅니다. 그러니 재주가 있고 없는 것 또한 분수에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소. 지금은 늘그막에 다다랐으니, 다만 나의 능력이 아득히 미치지 못함을 탄식할 뿐이라오.” 하였다.
내가 지은 사찬(史贊) 15수, 사영(史詠) 42수, 황명사영(皇明史詠) 45수에 대하여 기당(祁堂)이 평하기를, “사찬과 사영은 필묵(筆墨)에 있어서 좋은 법문(法門)이오. 전번에 보내온 시권(詩卷)이 이미 산중 실록(山中實錄)이었는데, 이제 또 정사(正史)에 뜻을 두고 수천년의 시비득실을 환하게 살피어 짧은 절구로 공정 무사하게 평가하였소. 이는 바로 사(史) 중에 사(史)이니, 어떻게 함부로 한마디 찬(贊)을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논할 만한 곳이 없지 않소. 고명(高明)한 그대의 옛 현인들을 벗 삼는 뜻으로써 한나라의 장량(張良), 당나라의 이필(李泌), 송나라의 전약수(錢若水) 같은 인물에 대하여 음상(吟賞)한 바가 없고, 또 절의(節義)를 논한다면 송나라의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儒)와 철현(鐵鉉)과 구식사(瞿式耜)와 사가법(史可法)을 꼽을 수 있는데, 또한 하나는 거론하고 하나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혹시 매화가 이소(離騷)를 원망하고 해당화가 두보(杜甫)에게 한을 품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겠소.” 하였다. 그리고 끝에 시 한 수를 적기를,
오래 사는 신선이라 고금의 세상을 구경하며 / 閱世洞僊翫古今
상전벽해 속에 한가히 거문고를 타는구나 / 海桑三變付瑤琴
바람 불고 비 뿌릴 때 한담설화(閑談屑話)를 하고 / 風翻雨掣空言在
잎 떨어지고 꽃 피는 속에 묘리를 찾노라 / 葉落花開妙理尋
대필 문장에는 총명기가 서린 눈을 멈추었고 / 大筆文章留慧眼
선악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공리를 좇는 마음 진정시켰네 / 平衡袞鉞定機心
매화가 원망하고 해당화가 한을 품는다 해도 / 梅之幽怨棠之恨
꽃들이 워낙 많아서 다 읊을 수 없겠네 / 猶有群芳未盡吟
상전벽해 속에 한가히 거문고를 타는구나 / 海桑三變付瑤琴
바람 불고 비 뿌릴 때 한담설화(閑談屑話)를 하고 / 風翻雨掣空言在
잎 떨어지고 꽃 피는 속에 묘리를 찾노라 / 葉落花開妙理尋
대필 문장에는 총명기가 서린 눈을 멈추었고 / 大筆文章留慧眼
선악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공리를 좇는 마음 진정시켰네 / 平衡袞鉞定機心
매화가 원망하고 해당화가 한을 품는다 해도 / 梅之幽怨棠之恨
꽃들이 워낙 많아서 다 읊을 수 없겠네 / 猶有群芳未盡吟
하였다.
영남사 팔영(詠南社八詠)은 정주계(鄭周溪), 조추담(趙秋潭), 조성산(趙星山), 박금령(朴錦舲), 이종산(李鍾山), 김석거(金石居), 박초파(朴蕉坡)가 짓고, 그중 하나는 내가 지은 것이다.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이 차운하면서 적기를, “여름 날씨가 무더운 것은 본디 대풍이 들 징조이지만, 초막 속에 칩거하는 신세가 딱하기는 하구려. 불같이 달아오르는 해가 중천에 오르면 뜰에 선 나뭇잎들이 모두 탄다오. 비록 더위를 잘 견디기로 유명한 사안(謝安)이 죽을 마시고 여공(呂公)이 술을 대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동자세로 있을 수가 없다오. 더구나 평소의 공부에 아량(雅量)과 정력(正力)이 없으니 오죽하겠소. 오직 가슴속의 구학(丘壑)을 가지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꿈속의 신선 세계를 노닐매 은자의 맑은 정취가 갑자기 세파에 찌든 어리석은 중생에게 이르고 쟁그랑거리는 패옥 소리가 멀리서 이르러 오니, 마치 두꺼운 얼음을 먹고 맑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소이다.” 하였다.
홍기당이 《남화경(南華經)》의 장편에 대해 평하기를, “《남화경》의 장운(長韻)을 읽으면 두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생겨서 회오리쳐 곧장 올라갈 수 있다.” 하였다.
칠언 율시로 13경을 찬(贊)하여 홍기당에게 보냈더니, 답서에 이르기를, “이것은 이른바 ‘좋은 소리로 나를 회유한다.’는 것이오. 오석산(烏石山)과 영원산(靈源山) 같은 명산이 멀리 있지 않아서 속세를 떠난 은자처럼 천석(泉石) 사이를 배회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긴 대나무와 성긴 소나무 숲 속을 거닐면서 낭랑하게 시를 읊었으니, 어찌 한 점이라도 세속 사람의 기운이 있겠소. 그런 때문에 입만 열면 저절로 주옥 같은 문장이 이루어지는 것이오. 이제 또 경전(經傳) 쪽에 생각을 돌려서 문장을 구사하였는데, 과연 그 철철 넘치는 문장 솜씨는 막을 수 없이 흘러나오고 있군요.“라고 하였다.
박평로(朴平老)는 나의 《가오고략(嘉梧藁略)》 15권을 가져다 보고 적기를, “문(文)과 시(詩)의 묘처(妙處)는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소마는, 비록 재주에 우열이 있고 공부에 천심(淺深)이 있다 하나 더러는 주옥 같은 문장으로 사단(詞壇)을 주름잡고 더러는 보옥 같은 서문으로 나라의 융성함을 떨치니 그 관계된 바가 중하거니와 또한 세대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한유(韓愈)의 글은 팔대(八代)의 쇠미함을 일으키고, 육유(陸游)의 문장에는 중원의 태평한 기상이 있다.’ 하였으니, 어찌 여기에서 취사선택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니, 식견이 높은 언론이다.
박평로가 말하기를, “벽자(僻字)와 은어(隱語)를 쓰는 것은 졸렬함을 숨기기 위한 방법인데, 시에서는 더욱 심하다. ‘시는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든가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라든가 하는 말이 어찌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가지 기법으로 꾸며서 표현하는 것을 이름이겠는가. 후세에서는 과거(科擧)의 문체를 제외하고는 음영(吟詠)하는 것을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든가 ‘뜻을 말하는 것이다.’라든가 하는 말이 그래도 혹 근사하다. 그러나 속투(俗套)를 스스로 자랑하는 일은 옛날의 문장가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어릴 때부터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운자(韻字)를 뽑는 일을 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것은 제목이 없이 시를 짓는 일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근체시(近體詩)의 경우에는 화초(花草)ㆍ서화(書畫)ㆍ다당(茶鐺)ㆍ주구(酒甌) 등 백여 글자를 찾아 망라하면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자만이 아니다. 노경에는 절대로 음풍 영월(吟風咏月)은 하지 않고 근래에 와서 지은 것은 오직 금석색(金石索) 59수, 임하려(林下廬) 8경(景),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30수인데, 오히려 부화(浮華)에 가까우니 또한 부끄럽다.
경산(經山) 정공(鄭公 정원용(鄭元容))이 뽑아서 이룬 《문영진선(文英珍選)》은 《예기(禮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가어(家語)》, 《노자(老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문자(文子)》, 《관윤자(關尹子)》, 《육자(鬻子)》, 《한비자(韓非子)》, 《상자(商子)》, 《관자(管子)》, 《안자(晏子)》, 《항창자(亢倉子)》, 《윤문자(尹文子)》, 《등자(鄧子)》, 《공손자(公孫子)》, 《귀곡자(鬼谷子)》, 《강태공육도(姜太公六韜)》,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울료자(尉繚子)》, 《공총자(孔叢子)》, 《가자(賈子)》, 《육자(陸子)》, 《동자(董子)》, 《한자(韓子)》, 《유자(劉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글을 담은 5책인데, 문장의 궤범(軌範)이다. 그의 아들 남한 유수(南漢留守) 정주계(鄭周溪 정기세(鄭基世))에게 부탁하여 그 책을 베껴서 책상에 두고 보는데, 소득이 적지 않다.
《황각장주(黃閣章奏)》 15책은 정경산이 30년 동안 경영한 정승의 사업을 실은 것이다. 나라를 위한 원대한 계책과 깊이 있고 고상한 문장이 모두 여기에 담겨져 있으니, 정승 집안의 보물이라 할 만하다.
정주계가 나의 《임하필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순정(純精)하면서도 전아(典雅)하다. 문장이 아름다우면서도 빼어난 가운데 함축미가 있어서,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두루 통하였고 매우 찬양하지 않으면서도 찬양하는 뜻을 다했으니, 참으로 기문(奇文)이다.
《소화시평(小華詩評)》은 내가 젊은 시절에 손수 베낀 것인데, 할아버지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이 책이 있으니, 인장(印章)이 찍혀 있다. 그런데 안성(安城) 사람이 빌려갔다.”고 했다. 40년 뒤에 내가 초평(草坪) 사는 일가 집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일가는 이 책을 안성 사람에게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책에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거두어 회수할 수 있었다.
경소(景召)가 죽어서 내가 제문을 가지고 조문하기를, “나이는 50이요, 직위는 겨우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네. 경소는 청빈하여 생활이 어려웠으나, 평생 동안 구차한 말을 하지 않았네. 발자취가 공사(公事)가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네.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성도(成都)에 철비(鐵碑)가 서 있네. 대상 날 거리가 멀어서 결별할 수 없었네.” 하였으며, 시를 읊기를,
아, 네 나이 겨우 오십이니 / 嗟爾得年纔識非
꽃다운 풀에 이슬 갓 말랐다 / 振山芳草露初晞
생전에 고생 겪은 일 그것이 애석하지 / 適來堪惜經酸苦
사후에 벼슬 좋고 나쁜 것 무슨 상관인가 / 死後何關爵顯微
세월이 다시 돌아온들 누가 붙잡으랴 / 歲月再回誰挽駐
인정은 무한한데 단지 슬퍼만 하노라 / 人情無限只歔欷
이승에서 겪는 고락은 다 같은 일 / 此生憂樂一般事
공연히 시 지으며 죽은 것 부러워한다 / 空賦詩篇羨大歸
꽃다운 풀에 이슬 갓 말랐다 / 振山芳草露初晞
생전에 고생 겪은 일 그것이 애석하지 / 適來堪惜經酸苦
사후에 벼슬 좋고 나쁜 것 무슨 상관인가 / 死後何關爵顯微
세월이 다시 돌아온들 누가 붙잡으랴 / 歲月再回誰挽駐
인정은 무한한데 단지 슬퍼만 하노라 / 人情無限只歔欷
이승에서 겪는 고락은 다 같은 일 / 此生憂樂一般事
공연히 시 지으며 죽은 것 부러워한다 / 空賦詩篇羨大歸
하였다.
‘바위 위의 석호는 새끼를 안고 존다.[巖上石虎抱兒眠]’는 말은 선문(禪門)의 오도어(悟道語)요,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雲在靑天水在甁]’는 말은 승가(僧家)의 견성게(見性偈)이다. 무릇 시문(詩文)과 서화(書畫)는 먼저 허령(虛靈)한 기운을 얻은 뒤에야 저절로 묘경(妙境)에 들어가게 된다.
김추사(金秋史)는, “그림에 독서한 사람으로서의 기상이 없으면 화원(畫院)의 품격에 가깝다.” 했고, 신자하(申紫霞)는, “글씨에 전자나 예서의 기운이 없으면 속되다.” 했으며, 서풍석(徐楓石 서유구(徐有榘))은 “시문에는 마땅히 서화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마소를 거간하는 시장 거리에서 밥을 빌어먹는 격인데, 어느 겨를에 선비의 옷차림으로 당당하게 걸으면서 박식한 유자(儒者)들과 어울려 지내는 유한공자(遊閒公子)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은 와당문(瓦當文)을 좋아하여 마멸되고 깨어진 기와 조각을 취한다. 옛날 사람들은 박락(剝落)된 곳에서 심획(心畫)을 찾아내서 보철(補輟)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서예가들은 박락된 곳을 발견하면 기이한 것만을 탐하여 단절(斷折)하고 파탈(破脫)하면서 글자의 모양대로 졸렬하게 그린다. 이러고서 어떻게 순정(純正)하고 정일(精一)한 경지를 엿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동정(洞庭) 장산인(張山人)이 이르기를, “산꼭대기에 있는 샘은 가벼우면서 맑고, 산 아래에 있는 샘은 맑으면서 무겁고, 돌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달고, 모래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차고, 흙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후중하다. 그리고 유동(流動)하는 물은 안정(安靜)한 물보다 양호하고, 그늘진 곳의 물은 볕을 향한 물보다 낫다. 산이 가파른 데는 샘이 적고, 산이 수려한 데는 신령함이 있다.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이 없다.” 하였다.
내가 천마산(天摩山) 꼭대기에서 물을 마셔 보니 가벼웠고, 퇴사담(退士潭)에서 물을 마셔 보니 무거웠고, 승가사(僧伽寺)에서 물을 마셔 보니 달았고, 수곡(壽谷)의 묘정(竗井)에서 물을 마셔 보니 차가웠고, 청해(靑海)의 동정(東井)에서 물을 마셔 보니 후중하였다. 안정한 물, 볕을 향한 물, 샘이 적은 것, 신령함이 있는 것, 맛이 있는 것, 향이 있는 것도 모두 족히 말할 수가 있다.
나의 고향에서는 채소가 생산된다. 3, 4월 사이에 석순(石筍)을 따서 순사(蓴絲)처럼 푹 삶아 가지고 상추처럼 밥을 싸 먹는다. 그리하여 드디어 야부(野夫)와 산승(山僧)의 먹거리가 되어 버렸으니, 연(蓮)이나 국화처럼 찧어서 제삿술을 빚는 데 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임술년에 정경산(鄭經山 정원용(鄭元容))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헌수(獻壽)하려고 학 두 마리를 구하여 잘못 길들이다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는데,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긴다. 학만 보면 문득 이 일이 생각나지만 도리어 다시 시원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말하기를, “새장을 열지 않아도 흰 꿩은 저절로 날아가고, 팔찌 위에서 배불리 먹지 못하자 매는 떠나 버렸다.” 하였다.
포명보(包鳴甫)가 말하기를, “순화첩(淳化帖)의 창힐자(蒼頡字)는 아직도 괘체(卦體)를 띠고 있다.” 하였다. 이것은 글자를 얻는 근본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서법(書法)은 모두 오행(五行)에 근거를 두고, 오행은 다 팔괘(八卦)에서 연역된 것이니, 그 어떤 것이 괘체가 아니겠는가. 특히 생획(生畫)이 팔괘의 처음 획과 같기 때문이다.
한비(漢碑)의 탑본(搨本)은 우리 동방의 오운(五耘) 윤동절(尹東晢)에게서 나왔는데, 처음에 내가 약관 시절 그 탑본을 얻어서 임서(臨書)하였다. 뒤에 연경에서 구입하였거나 조사(朝士)에게 증여받은 것으로서 서한(西漢) 이후로부터 당(唐)ㆍ송(宋)ㆍ원(元)에 이르기까지의 석각(石刻)이 백여 본이나 된다. 진즉 그 원류(源流)를 서술하여 옛사람의 한례가(漢隷歌)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뜻만 있고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어느 날에 정본(正本)이 나올지 모르겠다.
옛 기물(器物) 중 제기류(祭器類)인 정(鼎)ㆍ내(鼐)ㆍ이(彝)ㆍ고(觚)의 구별에 대해서는 비록 적고재(積古齋 완원(阮元))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彝器款識)》와 주위필(朱爲弼)의 《적고도석(積古圖釋)》이 있으나, 글과 도식이 끝내 서로 부합되기 어렵다. 그래서 한 번 도식을 상고하고 기록하여 책을 펼치면 일목 요연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한스럽다.
연시(燕市)에 나와 있는 옛 그림은 모두 가짜여서 잘 그린 근고(近古)의 것만 못하지만, 근고의 것도 가짜가 많아서 고금이 동일하니, 화보(畫譜)의 인판(印板)이 본래의 명수(名手)임만 같지 못하다. 이를테면 개자원(芥子園 왕개(王槩))과 십죽재(十竹齋 호정언(胡正言))는 고의(故意)를 얻었지만 신운(神韻)이 없다. 그리고 십죽재는 글씨와 그림이 속되지 않아서 옛 명가(名家)들이 대부분 그 법을 취하였다.
거문고를 10년이나 배웠지만 초장(初章)의 이음(理音)도 이루지 못하였다. 5장의 상성(商聲)이 가장 중도를 얻기 어렵다. 박두계(朴荳溪 박종훈(朴宗薰))는 이음을 잘하고, 신취미(申翠微 신재식(申在植))는 상성을 잘하고, 김유관(金游觀 김흥근(金興根))은 농현(弄絃)이 격식에 맞고, 서매원(徐梅園 서기순(徐箕淳))은 조율(調律)이 어긋나지 않았는데, 모두 문장과 도덕을 겸비한 인물들이다.
술을 좋아하기로는 나만 한 사람이 없고, 바둑을 좋아하기로도 나만 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술은 입술에 적시지도 못하고 바둑은 손을 대지도 못한다. 듣자하니, ‘술잔이 이르기만 해도 얼큰히 취하고, 바둑은 첫수에 결판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말은 모두 고인들의 운치 속에서 생긴 것이다. 나는 그 기구만을 앞에 진열해 둔 채 그 천진(天眞)함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방언에 마불차(麻不借 산신), 배불락(盃不落 술잔), 승소병(僧笑餠 떡), 찬리채(鑽籬菜 닭고기), 수사화(水梭花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산중유사(山中幽事)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아도 이른다. 그런데 화도(畫圖)의 옥려(屋廬)와 시의(詩意)의 산수(山水)를 얻지 못한 것이 한이다.
속담에,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있다. 불가의 말에 나무(南無)는 크다[大]의 뜻이고, 미타(彌陀)는 비다[空]의 뜻이다. 내가 생각건대, 10년 공부가 하루아침에 크게 비어 버리는 것은 결코 대장부의 일이 아니니, ‘나무’ 앞에 ‘물(勿)’ 자를 더하는 것이 가하다.
네모난 연못에 자그마한 배를 띄운 다음 푸른 돛과 흰 휘장을 달고 찻잔과 술동이를 준비해 놓고는 한두 시객(詩客)과 서로 깔고 누운 채 어린아이를 시켜 조가(釣歌)를 부르며 노를 젓게 하였는데, 머리가 들리면 꼬리가 막히고 꼬리가 흔들리면 머리가 부딪혔다. 하루 밤낮을 꼬박 술잔만 한 작은 연못 속을 돌았으니, 강한(江漢)과 하타(河陀)의 뱃놀이에도 오히려 견디지 못할 듯싶다. 그런데 하물며 항미(杭眉)ㆍ전당(錢塘)의 뛰어난 경치와 명발(溟渤)의 광활한 곳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술잔을 기울이며 한 번 통곡하였다.
수선화(水仙花) 시에, “문 앞에서 웃음 짓는데 큰 강은 비껴 흐른다.[門前一笑大江橫]”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난날 상감께서 이 구절을 외우며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그것을 제목으로 삼아 시를 짓게 하였다. 나는, ‘화음(華陰) 사람이 수선화 여덟 섬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가지고 시구를 지었다. 황산곡(黃山谷)의 시에서는, “어느 때에나 특별히 자신전에 올라서, 궁중 매화와 더불어 차등을 정해 볼건가.[何時特上紫宸殿 包與宮梅定等差]”라고 읊었다. 그때 김유관(金游觀 김흥근(金興根))의 시에, “일생에 평소의 마음 가진 사람임을 알겠다[一生知是素心人]”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시구는 황산곡의 시와 서로 백중을 겨룰 만하다.
민(閩) 땅에는 홍말리(紅茉莉)가 있고, 촉(蜀) 땅에는 자수구(紫綉毬)가 있고, 초(楚)나라에는 홍리화(紅梨花)가 있고, 연(燕)나라에는 황석류(黃石榴)가 있고, 천태산(天台山)에는 황해당(黃海棠), 백해당(白海棠), 백계화(白桂花), 자계화(紫桂花), 벽계화(碧桂花), 백매괴(白玫瑰)가 있고, 낙양(洛陽)에는 황작약(黃芍藥)이 있고, 창주(昌州)에는 향해당(香海棠)이 있고, 나의 동산에는 연한 홍수구(紅綉毬), 황석류, 백해당이 있다.
옛말에, “책의 정오(正誤)를 바로잡을 때 의심스러운 것을 빼 놓는 사람은 평생 입으로 광언(誑言)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빼 놓는다[疑者闕之]’는 뜻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빼 놓는다면 그의 평생의 실천 공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평생 배웠지만 잘 해내지 못한다.
양생가(養生家)가 괴강신(魁罡神)을 꺼려하는데, 그 실질을 나무라는 것은 그 나태함을 나무라는 것이다.
내가 잘 눕는 것은 기운이 나태하기 때문이고, 앉아서 잘 조는 것은 정신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몸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장기나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성벽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운치에 대한 생각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산에 놀러가지 않는 것은 경치를 탐하는 생각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떨어진 꽃을 쓸지 않는 것은 봄철의 나태함 때문이고, 뜰에 난 풀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여름철의 나태함 때문이며, 향산(鄕山)에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나태함 때문이다.
금강산에 있는 승려가 나에게 정공장(丁公杖)이라는 지팡이를 보내왔기에 명(銘)하기를,
굳세게 할 수도 있고 부드럽게 할 수도 있으니 / 能剛能柔
늙은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어린이들을 돌봐 주리로다 / 老少安懷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 左之右之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로다 / 與爾必偕
늙은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어린이들을 돌봐 주리로다 / 老少安懷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 左之右之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로다 / 與爾必偕
하였다. 또 문궤(文几)를 보내왔기에 명하기를,
둥근 것은 양을 상징하니 / 圓象陽
등을 대고 의지하고 / 靠背而倚
모난 것은 음을 상징하니 / 方象陰
베개로 삼아 즐기노라 / 支枕而喜
덕은 벼슬에 맞지 않고 / 德未孚于爵
나이는 연치로 숭상할 나이가 아니니 / 年未尙于齒
저 문궤는 / 彼其之几
야인의 궤로다 / 野人之几
등을 대고 의지하고 / 靠背而倚
모난 것은 음을 상징하니 / 方象陰
베개로 삼아 즐기노라 / 支枕而喜
덕은 벼슬에 맞지 않고 / 德未孚于爵
나이는 연치로 숭상할 나이가 아니니 / 年未尙于齒
저 문궤는 / 彼其之几
야인의 궤로다 / 野人之几
하였다. 중국 사람이 나에게 세면기를 보내왔기에 명하기를,
너의 낯을 씻으니 / 洗爾面
너의 때가 씻어진다 / 爾垢斯滌
사람들은 너를 보고 / 凡人視爾
너의 하얀 얼굴을 예뻐한다 / 憐爾白晢
그중에는 기필하지 못할 것도 있으니 / 其中未必
조석으로 경계할지어다 / 朝夕驚惕
너의 때가 씻어진다 / 爾垢斯滌
사람들은 너를 보고 / 凡人視爾
너의 하얀 얼굴을 예뻐한다 / 憐爾白晢
그중에는 기필하지 못할 것도 있으니 / 其中未必
조석으로 경계할지어다 / 朝夕驚惕
하였다. 붓을 보내왔기에 또 명하기를,
입은 우호를 이룰 수도 전쟁을 부를 수도 있는데 / 惟口出好興戎
네게서 나와서 나에게 들어온다 / 出自爾入于吾
나는 이것을 믿으니 / 吾斯之信
군자의 관건이로다 / 君子之樞
네게서 나와서 나에게 들어온다 / 出自爾入于吾
나는 이것을 믿으니 / 吾斯之信
군자의 관건이로다 / 君子之樞
하였다. 또 고경(古鏡)에 명하기를,
모든 곱고 미운 것이 / 凡厥媸姸
그 면상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 莫逃其面
소인은 곁으로 엿보고 / 宵人之窺
군자는 정면으로 보도다 / 君子之見
너의 형용에 따라서 / 隨爾形容
교사하고 정직함이 드러난다 / 巧正斯卞
여기에 높이 다니 / 高懸左玆
밝은 빛이 두루 비친다 / 晃朗周遍
동식물의 모든 형태는 살필 수 있으나 / 能察動植肖蠕
일편단심은 어떻게 비출 수 있겠는가 / 安能照丹心一片
그 면상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 莫逃其面
소인은 곁으로 엿보고 / 宵人之窺
군자는 정면으로 보도다 / 君子之見
너의 형용에 따라서 / 隨爾形容
교사하고 정직함이 드러난다 / 巧正斯卞
여기에 높이 다니 / 高懸左玆
밝은 빛이 두루 비친다 / 晃朗周遍
동식물의 모든 형태는 살필 수 있으나 / 能察動植肖蠕
일편단심은 어떻게 비출 수 있겠는가 / 安能照丹心一片
하였다.
천지 사이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견문과 생각으로써 추측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을 상고하였더니, 거기에 실려 있기를, “손설거(孫雪居)가 한양(漢陽) 수령으로 있을 때 어떤 산중 백성이 돌을 깎다가 그 속에 흰 거북이 있어서 바치므로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천보(天寶) 연간에 이응물(李應物)이 지주산(砥柱山)에 있는 돌을 쪼개다가 그 속에서 옛날의 보습을 얻었는데, 거기에 ‘평륙(平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이내 그 고을 이름을 평륙현(平陸縣)으로 고쳤다. 또한 당나라의 하후자(夏侯孜)는 정릉 산릉사(貞陵山陵使)로서 정릉에 쓰려고 단단한 돌을 파다가 돌 속에서 금비녀를 얻었다. 그 금비녀의 반 토막 남짓은 아직도 돌 속에 있다.” 하였다.
또 《동관여론(東觀餘論)》에 이르기를, “심양(潯陽)의 역병(役兵)이 돌 하나를 파니 그 돌 속에 비판(碑板)과 같은 돌 하나가 또 있었다. 살펴보니 바로 왕일소(王逸少 왕희지(王羲之))가 쓴 ‘어지럼증에 대한 처방문[頭眩方]’이었다.” 하였다. 황장예(黃長睿 황백사(黃伯思))가 이르기를, ‘매몰된 지 오래되면 흙이 더러 돌로 변한다.’ 하였으니, 이 각판(刻板)이 돌 속에 들어간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호박(琥珀) 속의 의충(蟻蟲)이나 수정(水晶) 속의 도화편(桃花片 조개의 일종)과 같은 것이다. 남당(南唐) 때 왕문병(王文秉)이 쪼개진 돌에서 금잠(金蠶)을 얻고 송나라 때 두관(杜綰)이 떨어진 돌에서 고어(枯魚)를 얻은 것은 일종의 화기(化機)이다.
세 개의 벼루는 산재(山齋)의 큰 보물이었다. 그 가운데 용도연(龍圖硯)에 명(銘)하기를,
천지가 상을 나타내니 / 天地著象
용이 신도를 짊어졌다 / 龍負神圖
양은 둥글고 음은 모나니 / 陽圓陰方
진주를 얽어서 꾸밈을 하였다 / 珠綴絡紆
문방사우 중에서 으뜸가는데 / 四寶爲首
석묵으로 조화를 이룬다 / 石墨和濡
천자의 조서가 내리지 않더라도 / 不待丹詔
종신토록 함께하리라 / 終身輒俱
용이 신도를 짊어졌다 / 龍負神圖
양은 둥글고 음은 모나니 / 陽圓陰方
진주를 얽어서 꾸밈을 하였다 / 珠綴絡紆
문방사우 중에서 으뜸가는데 / 四寶爲首
석묵으로 조화를 이룬다 / 石墨和濡
천자의 조서가 내리지 않더라도 / 不待丹詔
종신토록 함께하리라 / 終身輒俱
하였고, 천통연(天統硯)에 명하기를,
춘관이 음악을 맡으니 / 春官司樂
하늘이 통서(統緖)가 되었다 / 天乃爲統
영륜(伶倫)이 율려를 매달고 / 伶懸律呂
한나라의 매승(枚乘)은 아송의 소리를 숭상하였다 / 漢枚雅頌
넓히는 것이 덕이 되니 / 濶之爲德
조석으로 봉공한다 / 朝夕奉供
귀에 중용의 소리가 들리니 / 渢渢乎耳
대하와 대송 음악이로다 / 大夏大宋
하늘이 통서(統緖)가 되었다 / 天乃爲統
영륜(伶倫)이 율려를 매달고 / 伶懸律呂
한나라의 매승(枚乘)은 아송의 소리를 숭상하였다 / 漢枚雅頌
넓히는 것이 덕이 되니 / 濶之爲德
조석으로 봉공한다 / 朝夕奉供
귀에 중용의 소리가 들리니 / 渢渢乎耳
대하와 대송 음악이로다 / 大夏大宋
하였고, 후조연(後凋硯)에 명하기를,
숭악에 뿌리박고 / 嵩嶽托根
해와 달과 별보다 뒤에 시든다 / 後三光凋
매서운 풍상 속에 / 烈烈風霜
우뚝 솟은 운표로다 / 落落韻標
옥 바탕의 순수한 푸름으로 / 玉質淳蒼
자주 조탁을 받으나 / 數鍼琢雕
참사에 더럽혀지지 않고 / 讒邪不汚
맑은 바람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았노라 / 淸風雲霄
해와 달과 별보다 뒤에 시든다 / 後三光凋
매서운 풍상 속에 / 烈烈風霜
우뚝 솟은 운표로다 / 落落韻標
옥 바탕의 순수한 푸름으로 / 玉質淳蒼
자주 조탁을 받으나 / 數鍼琢雕
참사에 더럽혀지지 않고 / 讒邪不汚
맑은 바람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았노라 / 淸風雲霄
하였다.
옛사람이 이웃의 노인이 꽃을 즐기고 손자를 희롱하며 따뜻한 햇볕만 좋아했지 성문 안의 일 따위는 아예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노옹이 손자만 안고 독은 안지 않았는데, 마침 꽃밭에 물을 주려고 하자 비가 오는구나.[老翁抱孫不抱甕 恰欲灌花山雨來]”라는 시구를 지었다.
내가 사시향관 잡영(四時香館雜詠)에서 읊기를,
손길 가는 대로 짚은 노인의 지팡이 / 時來隨手老人笻
물 북쪽 밭 남쪽 도처에 만난다 / 水北田南到處逢
어린애 이끌고 바람 쐬며 들구경을 하니 / 携幼乘涼田水聽
늘어진 수양버들이 흩어진 머리를 스친다 / 垂垂楊柳掠髼鬆
물 북쪽 밭 남쪽 도처에 만난다 / 水北田南到處逢
어린애 이끌고 바람 쐬며 들구경을 하니 / 携幼乘涼田水聽
늘어진 수양버들이 흩어진 머리를 스친다 / 垂垂楊柳掠髼鬆
하였고, 또 읊기를,
당자서(唐子西)의 시처럼 해는 소년같이 길고 / 日長如少子西詩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구름은 무심히 바위굴에서 나온다 / 雲出無心陶令辭
한 조각 한가한 마음이 구름과 함께 머무는데 / 一片野心雲與住
창 밖에 해 긴 것 무엇이 해 되겠는가 / 何妨窓外日遲遲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구름은 무심히 바위굴에서 나온다 / 雲出無心陶令辭
한 조각 한가한 마음이 구름과 함께 머무는데 / 一片野心雲與住
창 밖에 해 긴 것 무엇이 해 되겠는가 / 何妨窓外日遲遲
하였으며, 또 읊기를,
남쪽 들에 들밥 내오는데 개 또한 따르고 / 南畝饁筐犬亦隨
종종걸음 치는 건장한 부인 어린애를 안았네 / 踉蹡健婦抱孩兒
쑥대머리로 풀을 깔고 앉아 전구를 부르고 / 蓬頭藉草田謳作
더러는 호미를 베개 삼아 베고 밥때를 기다린다 / 或枕尖鋤待食時
종종걸음 치는 건장한 부인 어린애를 안았네 / 踉蹡健婦抱孩兒
쑥대머리로 풀을 깔고 앉아 전구를 부르고 / 蓬頭藉草田謳作
더러는 호미를 베개 삼아 베고 밥때를 기다린다 / 或枕尖鋤待食時
하였고, 또 읊기를,
시골에 사는 재미를 그 누가 알겠는가 / 鄕居滋味有誰知
낙이 무궁하여 각각 철따라 다르다 / 樂在無窮各異時
춥고 덥고 다습고 시원한 것들 내 스스로 얻는데 / 寒暑燠涼吾自得
타인이 어찌 내 하는 일 물을 필요 있겠는가 / 他人何必問吾爲
낙이 무궁하여 각각 철따라 다르다 / 樂在無窮各異時
춥고 덥고 다습고 시원한 것들 내 스스로 얻는데 / 寒暑燠涼吾自得
타인이 어찌 내 하는 일 물을 필요 있겠는가 / 他人何必問吾爲
하였는데, 옛사람들과 시의 뜻은 같으나 격은 같지 않다.
소동파의 말에, “서책을 교정하는 일은 먼지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있다. 나는 10년 동안 서책을 교정하였다. 무릇 초록(抄錄)을 함에 있어서 종으로, 횡으로, 거꾸로, 수직으로 두루두루 더듬어 보고 나서 목판에 새긴다. 목판에 새긴 뒤에는 또 더듬어 보고 더듬어 본 뒤에야 인쇄를 한다. 인쇄를 한 뒤에는 또 더듬어 본다. 이렇게 해도 필경에는 긴요한 곳에 오자나 낙자가 있다. 그 책을 찾는 일이 긴요하므로 눈은 반드시 서가 밑에 있게 되니, 이것은 조화 속의 다사(多事)한 것이다.
산중에는 특별한 음식이 없고 약초(藥草)에다 생선과 과일을 겸한다. 내가 사는 산에도 특별한 음식이 없다. 연잎으로 술을 빚고, 목두(木頭)로 나물을 뜯으며, 산약(山藥 마)과 채마밭의 아욱으로 순포(筍脯)를 대신하고, 못의 순채와 들 미나리에 생강과 계피를 탄다. 주자(朱子)의 이른바 ‘파로 끓인 국과 보리밥’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세 종류의 부추 반찬’ 역시 하나의 지락(至樂)인 것이다.
법첩(法帖)을 보면 그 정신이 배어 있는 곳만을 취할 뿐이지, 어찌 면목(面目)과 두발(頭髮) 가운데 어떤 것이 크고 어떤 것이 작고 어떤 것이 곱고 어떤 것이 추한지를 세세하게 평할 필요가 있겠는가. 책을 펼쳤을 때 먼저 그림자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어야만 더불어 말할 수 있다.
산중에서 사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과목(果木)은 반드시 네모나게 벌여서 심고, 연못은 반드시 빙 둘러서 파며, 거문고와 비파는 반드시 타넘지 말되, 마음만은 매어 놓지 않는 것이다.
백소부(白少傅)가 직접 지은 생묘지(生墓誌)에 이르기를, “밖으로는 유행(儒行)을 가지고 몸을 닦고 안으로는 석교(釋敎)를 가지고 마음을 맑게 하며, 곁으로는 도사(圖史)ㆍ산수(山水)ㆍ금주(琴酒)ㆍ영가(詠歌)를 가지고 뜻을 즐겁게 하였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명(銘)하기를, “살아서는 성인을 만나고 죽어서는 성인을 따른다. 성인이란 이른바 ‘이 사람’인 것이다.” 하였다.
종려나무 털로 만든 신은 촉(蜀) 땅의 승려들 사이에서 나왔다. 오(吳)나라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 없다. 내가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에서 그 신을 보았는데, 그 만듦새가 몹시 예스러웠으니 바로 촉 땅의 물건인 것 같았다.
안동(安東) 강 세마(姜洗馬)의 집에 《가사방위서(家舍方位書)》가 있다. 그 책에 따라서 몇 년마다 한 번씩 방향을 고쳐서 사는데, 자손이 아직도 끊임없이 이어 간다. 나도 연경 저자에서 한 권을 구하여 그 설을 대략 알게 되었지만, 만일 그대로 따라서 행한다고 하면 파옹(坡翁 소동파)의 택승정(擇勝亭)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기질이 약한데도 인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매번 기운이 빠지고 피로할 때면 보할 약제가 없었다. 그러자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이 나에게, “먼저 작은 것을 먹고 뒤에 큰 것을 먹어 보오.”라고 하면서, 인삼 약제를 복용하도록 권하였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공을 들여서 지금은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당은 선각자라고 할 만하다.
사람이 세상에 생존하자면 밥으로 하늘을 삼으니, 술이나 담배는 주식 밖의 것이다. 명말 청초에는 담배를 금하였는데, 지금은 상하가 통용하고 노소의 구별이 없다. 호인(胡人)은 담배를 ‘담파고(痰破姑)’라고 한다. 담배를 피우기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식사를 마쳤을 때, 시름에 잠겼을 때, 무료할 때, 냄새날 때, 사색할 때, 비 올 때, 오락할 때 가장 알맞으니, 이것이 담배의 여덟 가지 맛이다.
연(蓮)을 심는 데는 염소똥이 알맞고, 대[竹]와 사계화(四季花)를 심는 데는 말똥이 알맞고, 모란을 심는 데는 백출(白朮)이 알맞고, 석류를 심는 데는 월수(月水)가 알맞고, 내금(來禽)과 사과(樝果)를 심는 데는 사람 오줌이 알맞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 내가 사는 데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이름이 계산촌(鷄山村)인데, 앞에는 계양리(鷄養里)가 있고, 또 계시촌(鷄塒村)ㆍ계량촌(鷄糧村) 등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혈(眞穴)을 찾지 못한다.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은 내가 사는 데서 5리 떨어진 장천리(長川里)에서 태어났다 하고, 야사에는 송사련(宋祀連)이 배천(白川)에 살았다고 하였는데, 장천과 배천 그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의신(李懿信)은 유명한 지사(地師)였는데, 내가 사는 데서 10여 리 떨어진 야목리(冶木里)에서 살았다. 처음에 용인 이씨(龍仁李氏)가 그를 속여서 본래 정해 놓은 명당을 얻었다. 이것으로 보면 아무리 유명한 지사라 하더라도 산천의 명당만은 원래 정해진 임자에게 돌아가므로 스스로 주인을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사리(寒沙里)는 가오리(嘉梧里)에서 7리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부터 그 마을에 명당이 있다는 말이 전하는데, 중고(中古)에 한 종실의 걸출한 사람을 그 명당에 장사 지냈다. 뒤에 그 자손이 그 명당을 팔려고 상서(尙書) 이기연(李紀淵)에게 물으니, “조상을 위하는 도리는 먼저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서는 안 된다.” 하고 공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자손은 다시 홍씨(洪氏)에게 팔고 그 묘를 옮겼는데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꼭 어제의 것처럼 선명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300년 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땅속의 일은 헤아리기 어렵다.
뻐꾸기는 밭갈이를 재촉하고, 매미는 호미질을 재촉하고, 갈가마귀는 풍년을 말해 주고, 나는 솔개는 비를 부르고, 비오리는 가을을 알린다 하니, 이것은 모두 농가(農家)의 말이다.
향촌(鄕村)에는 매양 날씨가 흐릴지 맑을지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나의 고향에서는 천마산(天摩山)을 가지고 알아본다. 일찍이 《박물지(博物志)》를 보았더니, “아침에 비둘기가 울면 석양에 반드시 바람이 불고, 석양에 비둘기가 울면 그 이튿날 아침에 반드시 비가 온다.” 하였는데, 이것은 과연 산중의 천문(天文)이다.
진천(鎭川)에 사는 김씨(金氏)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의 집에 전해 내려오는 도실배(桃實杯)는 크기가 표주박만 한데, 소동파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 선대에서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송나라에 들어갔을 때 소동파가 기증한 것이라 하는데, 《동파집》을 상고하매 또한 시어(詩語)와 그 연보(年譜)가 있으니, 전혀 그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봉집(芝峯集)》에 이르기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일찍이 교주(交州)에 시를 남겨서 판(板)에 새겨 걸었다. 을사년 홍수 때 그 시판이 물에 떠내려가 없어졌는데, 결국 강도(江都) 700리 밖에서 입수하여 시골 사람의 땔나무감이 되는 것을 면하고 다시 공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공이 그 시에 대해 서문을 썼고, 회양 부사(淮陽府使) 장군(張君)은 그 시판을 벽에 걸었다.” 하였다. 월사의 시에서 읊기를,
산은 둘러 있고 중첩된 관문은 험한데 / 山擁重關險
강은 굽이치고 두 영은 길다 / 江蟠二嶺長
풍운은 선굴을 보호하고 / 風雲護仙窟
일월은 부상에 가깝다 / 日月近扶桑
가을엔 은어회가 잘게 요리되고 / 秋膾銀鱗細
봄엔 잣잎술이 향기롭게 빚어진다 / 春醪栢葉香
임기가 끝날 때 대신으로 써 준다면 / 瓜時倘許代
나는 회양 땅을 소중히 여기리 / 吾不薄淮陽
강은 굽이치고 두 영은 길다 / 江蟠二嶺長
풍운은 선굴을 보호하고 / 風雲護仙窟
일월은 부상에 가깝다 / 日月近扶桑
가을엔 은어회가 잘게 요리되고 / 秋膾銀鱗細
봄엔 잣잎술이 향기롭게 빚어진다 / 春醪栢葉香
임기가 끝날 때 대신으로 써 준다면 / 瓜時倘許代
나는 회양 땅을 소중히 여기리 / 吾不薄淮陽
하였다. 지봉은 그 참변을 목격하였다 한다. 나도 회양을 지날 때 이 시를 보고 베꼈다. 교주는 회양의 별칭이다.
《약천집(藥泉集)》에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의 살계(殺鷄) 시가 있다. 동명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밤중에 퇴고(推敲)를 하는데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을 때 닭 울음소리가 들려 그 닭을 잡아다가, “내가 시를 아직 이루지 못하였는데 네가 감히 먼저 울다니”라고 나무라고 즉시 베어 죽였는데, 이 일이 고담(古談)으로 전해진다.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시에,
밤중에 먼저 울자 일어나서 춤을 춘 자가 있었는데 / 半夜先鳴曾起舞
새벽 맡아 한 번 울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하였네 / 司晨一唱反逢嗔
글 잘짓는 사람이 이때부터 생각이 막혔으니 / 長卿自是多淹思
잘못 창 앞의 붉은 볏의 닭을 죽였구나 / 枉殺牕前絳幘人
새벽 맡아 한 번 울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하였네 / 司晨一唱反逢嗔
글 잘짓는 사람이 이때부터 생각이 막혔으니 / 長卿自是多淹思
잘못 창 앞의 붉은 볏의 닭을 죽였구나 / 枉殺牕前絳幘人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별호(別號)가 중첩으로 나오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서계(西溪) | 양홍주(梁弘澍), 정세호(鄭世虎), 남주(南趎), 박세당(朴世堂), 김담수(金聃壽), 이덕윤(李德胤). |
졸암(拙菴) | 이충작(李忠綽), 이직언(李直彦). |
동계(桐溪) | 정온(鄭蘊), 이흘(李屹), 권달수(權達手). |
송암(松菴) | 권항(權伉), 권징(權徵), 유관(柳灌). |
송당(松堂) | 조준(趙浚), 권맹손(權孟孫), 박영(朴英), 김광재(金光載). |
노봉(老峯) | 김극기(金克己), 민정중(閔鼎重). |
풍암(楓巖) | 권식(權寔), 임복(林復), 문위세(文緯世). |
초려(草廬) | 고려조(高麗朝)의 김진양(金震陽), 조선조(朝鮮朝)의 이유태(李惟泰). |
구봉(龜峯) | 송익필(宋翼弼), 주박(周博), 남계하(南啓夏), 김수일(金守一), 권덕린(權德麟), 신명인(申命仁). |
쌍백당(雙栢堂) | 최기(崔沂), 홍중주(洪重疇), 이세화(李世華), 홍순각(洪純慤). |
동명(東溟) | 황윤중(黃允中), 최기백(崔基銆), 정두경(鄭斗卿), 김세렴(金世濂). |
동강(東岡) | 조상우(趙相愚), 최후상(崔後相), 김첨경(金添慶), 김우옹(金宇顒), 허요(許窰). |
회곡(晦谷) | 신유(申愈), 조한영(曺漢英), 남선(南銑), 조광좌(趙光佐). |
송정(松亭) | 신명화(申命華), 김수(金洙). |
묵재(默齋) | 김관(金瓘), 김홍익(金弘翼), 홍언필(洪彦弼), 최유해(崔有海), 이심원(李深源), 심안세(沈安世). |
송강(松江) | 조징(趙澄), 정철(鄭澈), 조사수(趙士秀). |
현주(玄洲) | 조찬한(趙纘漢), 이명한(李明漢). |
성재(誠齋) | 권고(權皐), 민이승(閔以升), 유탁(柳濯), 박은(朴誾), 오억령(吳億齡). |
만취당(晩翠堂) | 김맹권(金孟權), 권율(權慄), 김위(金偉). |
잠곡(潛谷) | 김의정(金義貞), 김육(金堉). |
옥봉(玉峯) | 이원(李媛), 백광훈(白光勳). |
서하(西河) | 고려조의 임춘(林椿), 조선조의 이민서(李敏敍). |
행촌(杏村) | 고려조의 이암(李喦), 조선조의 민순(閔純). |
저촌(樗村) | 심육(沈錥), 이정섭(李廷燮). |
쌍계(雙溪) | 송응상(宋應祥), 이복원(李福源), 김뉴(金紐). |
운곡(雲谷) | 송한필(宋翰弼), 이광좌(李光佐), 이택(李澤), 최계훈(崔繼勳), 최수(崔授), 남노성(南老星). |
사우당(四友堂) | 송국택(宋國澤), 한명회(韓明澮). |
석탄(石灘) | 고려조의 이양중(李養中)과 이존오(李存吾), 조선조의 한효중(韓孝仲)과 이신의(李愼儀). |
간이(簡易) | 한숙(韓淑), 최립(崔岦). |
현석(玄石) | 한인급(韓仁及), 박세채(朴世采). |
석봉(石峯) | 한수(韓脩), 한호(韓濩). |
퇴우당(退憂堂) | 김수흥(金壽興), 박승종(朴承宗). |
백석(白石) | 남탁(南晫), 허직(許稷), 박태유(朴泰維). |
규봉(圭峯) | 심연(沈演), 심봉의(沈鳳儀). |
양촌(陽村) | 고려조의 권근(權近), 조선조의 정재희(鄭載禧)와 이겸지(李謙之). |
눌재(訥齋) | 박증영(朴增榮), 이태연(李泰淵), 이예(李芮), 이충건(李忠楗), 양성지(梁誠之), 박상(朴祥), 김찬(金瓚). |
봉암(鳳巖) | 한홍조(韓弘祚), 한몽린(韓夢麟). |
도곡(陶谷) | 한술(韓述), 이필중(李必重), 이양원(李養源). |
약봉(藥峯) | 이탁(李鐸), 심단(沈檀), 서성(徐渻), 김극일(金克一). |
보만재(保晩齋) | 한명상(韓命相), 이육(李堉), 서명응(徐命膺). |
동고(東皐) | 강신(姜紳), 김노(金魯), 이명(李蓂), 이준경(李浚慶), 성준득(成準得), 이수록(李綏祿), 박이서(朴彛叙). |
성암(省菴) | 박필전(朴弼傳), 송준(宋駿), 김효원(金孝元), 성호(成浩), 조명국(趙鳴國), 이지번(李之蕃). |
송파(松坡) | 조휘(趙徽), 이덕민(李德敏), 남응침(南應琛), 남세주(南世周), 서문상(徐文尙), 최성지(崔誠之), 이해창(李海昌). |
둔촌(遁村) | 고려조의 이집(李集), 조선조의 조문형(趙文衡). |
약천(藥泉) | 조계원(趙啓遠), 남구만(南九萬). |
치암(恥菴) | 고려조의 박충좌(朴忠佐), 조선조의 송질(宋鑕), 구사민(具思閔), 한세양(韓世讓), 이지렴(李之濂). |
농암(聾巖) | 심지명(沈之溟), 이현보(李賢輔). |
만사(晩沙) | 심우승(沈友勝), 서경우(徐景雨), 심지원(沈之源). |
일재(一齋) | 민회현(閔懷賢), 권한공(權漢功), 이항(李恒). |
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 성담중(成聃仲). |
사암(思菴) | 박순(朴淳), 성세장(成世章). |
추담(秋潭) | 성만징(成晩徵), 오달제(吳達濟), 김우급(金友伋). |
어은(漁隱) | 오국헌(吳國獻), 민제(閔霽), 허회(許淮). |
설정(雪汀) | 이흘(李忔), 조문수(曺文秀). |
설봉(雪峯) | 박찬(朴燦), 강백년(姜栢年), 허홍(許烘), 윤수(尹燧). |
죽계(竹溪) | 안순(安純), 문관(文瓘), 최경장(崔慶長). |
사재(思齋) | 김정국(金正國), 안처순(安處順). |
약포(藥圃) | 이희수(李喜壽), 안숙(安璹). |
초당(草堂) | 강경서(姜景敍), 구면(具𡩄), 허엽(許曄). |
양파(陽坡) | 홍언박(洪彦博), 정태화(鄭太和). |
고은(皐隱) | 안지(安止), 이규보(李圭輔). |
석문(石門) | 이경직(李景稷), 임규(任奎), 오이익(吳以翼), 윤봉오(尹鳳五). |
동리(東里) | 윤옥(尹玉), 정세규(鄭世䂓). |
화곡(華谷) | 정종명(鄭宗溟), 이경억(李慶億). |
구천(龜川) | 어효첨(魚孝瞻), 이세필(李世弼). |
백곡(栢谷) | 정곤수(鄭崑壽), 김득신(金得臣). |
몽와(夢窩) | 김창집(金昌集), 유희령(柳希齡), 최철견(崔鐵堅). |
모당(慕堂) | 홍이상(洪履祥), 손처눌(孫處訥). |
매계(梅溪) | 목서흠(睦敍欽), 문근(文瑾). |
율곡(栗谷) | 이이(李珥), 조명욱(曺明勗). |
옥산(玉山) | 이우(李瑀), 이석(李晳). |
남곡(南谷) | 이후(李垕), 조정서(趙正緖). |
창해(滄海) | 이사호(李士浩), 허격(許格). |
기내(畿內 경기)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고양(高陽)이고, 하간부(河間府)는 교하(交河)이고, 장평부(長平府)는 양성(陽城)이고, 용릉부(舂陵府)는 남양(南陽)이고, 광릉부(廣陵府)는 양주(楊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부평(富平)이고, 영주부(永州府)는 강화(江華)이고, 청성부(淸城府)는 광주(廣州)이고, 남웅부(南雄府)는 시흥(始興)이고, 영창부(永昌府)는 영평(永平)이고, 운양부(鄖陽府)는 죽산(竹山)이다.
충청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순천부(順天府)는 지금의 대흥(大興)이고, 진강부(鎭江府)는 단양(丹陽)이고, 지주부(池州府)는 청양(靑陽)이고,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이고, 운중부(雲中府)는 회인(懷仁)이고, 소흥부(紹興府)는 신창(新昌)이고, 공주부(贛州府)는 석성(石城)이고, 광주부(廣州府)는 연산(連山)이고, 중경부(重慶府)는 충주(忠州)이고, 천주부(泉州府)는 영춘(永春)이다.
전라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순천부(順天府)는 지금의 창평(昌平)이고, 청주부(靑州府)는 낙안(樂安)이고, 여남부(汝南府)는 광주(光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진안(鎭安)이고, 연평부(延平府)는 남평(南平)이고, 염주부(廉州府)는 영산(靈山)이고, 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이고, 동평부(東平府)는 제주(濟州)이고, 호주부(湖州府)는 장흥(長興)이다.
경상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진주(晉州)이고, 광평부(廣平府)는 청하(淸河)이고, 회안부(淮安府)는 안동(安東)이고, 서안부(西安府)는 함양(咸陽)이고, 사명부(四明府)는 봉화(奉化)이고, 남강부(南康府)는 안의(安義)이고, 남평부(南平府)는 영천(永川)이고, 운안부(雲安府)는 양산(陽山)이고, 광주부(廣州府)는 남해(南海)이고, 광주부(廣州府)는 신녕(新寧)이고, 하원부(河源府)는 하양(河陽)이고, 태주부(泰州府)는 영해(寧海)이고, 운남부(雲南府)는 곤양(昆陽)이고, 합서부(陜西府)는 예천(醴泉)이고, 기주부(夔州府)는 양산(梁山)이다.
강원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산남부(山南府)는 지금의 양양(襄陽)이고,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고, 곡성부(穀城府)는 횡성(橫城)이다.
황해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평산(平山)이고, 상주부(常州府)는 강음(江陰)이고, 엄주부(嚴州府)는 수안(遂安)이고, 회남부(淮南府)는 해주(海州)이고, 동주부(潼州府)는 안악(安岳)이다.
평안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고, 진정부(眞定府)는 정주(定州)이고, 운중부(雲中府)는 삭주(朔州)이고, 천수부(天水府)는 영원(寧遠)이고, 임조부(臨洮府)는 위원(渭原)이고, 혜주부(惠州府)는 용천(龍川)이고, 요동진(遼東鎭)은 의주(義州)이고, 대동진(大同鎭)은 철산(鐵山)이고, 동천부(潼川府)는 창성(昌城)이다.
함경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하중부(河中府)는 지금의 길주(吉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삼수(三水)이고, 천수부(天水府)는 회령(會寧)이고, 침주부(郴州府)는 영흥(永興)이고, 광신부(廣信府)는 영풍(永豐)이다.
우리나라 선현들의 문집은 많이 읽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기송(記誦)한 것은 전편(全篇)이거나 혹은 한두 구이지만, 비록 편언(片言)이라도 생각나는 대로 아래에 기록한다.
안회헌(安晦軒 안향(安珦))의 학교(學校) 시에,
향 피우고 등불 밝혀 곳곳에서 불공들 드리는가 하면 / 香燈處處皆祈佛
퉁소 불고 장고 치며 집집마다 굿들을 하는구나 / 簫管家家盡祀神
오직 몇 칸의 공자 사당만은 / 獨有數間夫子廟
뜰에 풀만 수북하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네 / 滿庭春草寂無人
퉁소 불고 장고 치며 집집마다 굿들을 하는구나 / 簫管家家盡祀神
오직 몇 칸의 공자 사당만은 / 獨有數間夫子廟
뜰에 풀만 수북하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네 / 滿庭春草寂無人
하였으니,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말씀이다.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보덕굴(普德窟) 시에,
음산한 바람은 산골짜기에서 일고 / 陰風生巖谷
시냇물은 깊고도 푸르구나 / 溪水深更綠
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바라보니 / 倚杖望層巓
높은 처마 구름 위에 떠 있구나 / 飛簷駕雲木
시냇물은 깊고도 푸르구나 / 溪水深更綠
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바라보니 / 倚杖望層巓
높은 처마 구름 위에 떠 있구나 / 飛簷駕雲木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이 말은 지어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한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출새(出塞) 시에,
말고삐 나란히 잡고 멀리 군사를 따라가다가 / 聯鞍千里遠從軍
함주에 이르러서 또 그대를 보내려 하노라 / 欲到咸州又送君
정말 너무도 슬퍼 남아의 창자 끊어질 지경이니 / 政是男兒腸斷處
가을바람에 나는 화각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 / 秋風畫角不堪聞
함주에 이르러서 또 그대를 보내려 하노라 / 欲到咸州又送君
정말 너무도 슬퍼 남아의 창자 끊어질 지경이니 / 政是男兒腸斷處
가을바람에 나는 화각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 / 秋風畫角不堪聞
하였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는 기상이 담겨 있다.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익재선생명(益齋先生銘)에, “북두 태산(北斗泰山)처럼 높은 문장은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 한유(韓愈))와 같고, 광풍 제월(光風霽月)처럼 맑은 마음은 용릉(舂陵)의 주무숙(周茂叔 주돈이(周敦頤))과 같다.” 하였으니, 천만 근의 힘이 실려 있다.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옥금(玉金)이 밤에 소금(小笒)을 불다’라는 시에,
가냘픈 피리 소리 녹음 속의 마을에서 나는데 / 嫋嫋聲穿綠暗村
시내 위에 뜬 초승달 주렴을 환하게 비추누나 / 半鉤溪月滿簾痕
그대는 처량하고 구슬픈 곡조를 타지 말게나 / 憑君莫弄淸商調
매화가 고원에 떨어질까 두렵소이다 / 恐有梅花落故園
시내 위에 뜬 초승달 주렴을 환하게 비추누나 / 半鉤溪月滿簾痕
그대는 처량하고 구슬픈 곡조를 타지 말게나 / 憑君莫弄淸商調
매화가 고원에 떨어질까 두렵소이다 / 恐有梅花落故園
하였으니, 그 강개한 뜻이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다섯 살 때 지은 ‘대보름날 밤’이라는 시에,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에 따라 생기고 / 高低隨地勢
이르고 늦음은 자연 현상에서 이루어진다 / 早晩自天時
남의 말을 어찌 다 근심할 수 있겠는가 / 人言何足恤
밝은 달은 본래 사정이 없는 것이다 / 明月本無私
이르고 늦음은 자연 현상에서 이루어진다 / 早晩自天時
남의 말을 어찌 다 근심할 수 있겠는가 / 人言何足恤
밝은 달은 본래 사정이 없는 것이다 / 明月本無私
하였으니, 만고의 공언(公言)이다.
소양곡(蘇陽谷 소세양(蘇世讓))의 ‘패강(浿江)에 배를 띄우고’라는 시에,
강물은 깊고 아득하여 거울처럼 평평한데 / 江水沈沈鏡面平
미세한 바람 지는 해에 비단 물결 이는구나 / 細風斜日縠紋生
작은 배로 노를 저어 중류에 내려가니 / 扁舟蕩槳中流去
어느 곳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느냐 / 何處一聲羌笛橫
미세한 바람 지는 해에 비단 물결 이는구나 / 細風斜日縠紋生
작은 배로 노를 저어 중류에 내려가니 / 扁舟蕩槳中流去
어느 곳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느냐 / 何處一聲羌笛橫
하였으니, 진루(塵累)가 없는 시이다.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야행(夜行) 시에,
길은 어두운데 산 위에 달이 없고 / 路黑山無月
마을은 희미한데 밤에 등불이 있구나 / 村迷夜有燈
사립문 안에선 봄꿈에 빠졌을 텐데 / 柴衡春夢熟
사립문 두드리려 하나 누가 응하겠는가 / 欲扣定誰應
마을은 희미한데 밤에 등불이 있구나 / 村迷夜有燈
사립문 안에선 봄꿈에 빠졌을 텐데 / 柴衡春夢熟
사립문 두드리려 하나 누가 응하겠는가 / 欲扣定誰應
하였으니, 어두운 길을 더듬어 가도 스스로 그 길이 있는 것이다.
이퇴계(李退溪)의 계당 우흥(溪堂偶興) 시에,
온종일 구름은 비를 머금고 / 盡日雲含雨
이슥토록 새들은 봄을 부른다 / 移時鳥喚春
산촌이라 범과 자주 마주치고 / 山村頗狎虎
시냇길엔 만나는 사람이 적네 / 溪路少逢人
이슥토록 새들은 봄을 부른다 / 移時鳥喚春
산촌이라 범과 자주 마주치고 / 山村頗狎虎
시냇길엔 만나는 사람이 적네 / 溪路少逢人
하였으니, 한 세상을 훈계한 뜻이어서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율곡(李栗谷)의 ‘우연히 짓다[偶成]’라는 시에,
취미를 얻으니 걱정이 절로 잊혀지는데 / 得趣自忘憂
시를 읊으매 시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 吟詩不成句
꿈속에서 고향에 잠깐 돌아갔는데 / 鄕關夢乍回
나뭇잎이 가을 비에 떨어지누나 / 木落秋江雨
시를 읊으매 시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 吟詩不成句
꿈속에서 고향에 잠깐 돌아갔는데 / 鄕關夢乍回
나뭇잎이 가을 비에 떨어지누나 / 木落秋江雨
하였으니, 신선이 될 생각이 있다.
정한강(鄭寒崗 정구(鄭逑))의 ‘야산(倻山)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전체의 면목은 다 내놓지 않고 / 未出全身面
일각의 기이함만 조금 드러냈네 / 微呈一角奇
비로소 조화의 뜻을 알겠노니 / 方知造化意
천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함이다 / 不欲露天機
일각의 기이함만 조금 드러냈네 / 微呈一角奇
비로소 조화의 뜻을 알겠노니 / 方知造化意
천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함이다 / 不欲露天機
하였는데, 흰 구름이 가로 끼었으니 일각만 약간 드러난 것이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종이를 보내 준 데 사례하며 원 상인(元上人)에게 주다’라는 시에,
천하에서 제일 흰 종이 한 묶음을 / 一束剡藤天下白
산승이 가져다 주면서 인정을 베푸네 / 山僧持贈作人情
근래에 글 쓰는 힘이 모두 쇠약해졌으나 / 邇來文力都衰颯
아직도 도중에 일기 쓰는 일은 하려 한다네 / 猶擬途中記雨晴
산승이 가져다 주면서 인정을 베푸네 / 山僧持贈作人情
근래에 글 쓰는 힘이 모두 쇠약해졌으나 / 邇來文力都衰颯
아직도 도중에 일기 쓰는 일은 하려 한다네 / 猶擬途中記雨晴
하였는데, 마치 노인의 시구를 듣는 것 같다.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의 취음(醉吟) 시에,
예리한 석 자의 태아검을 차고 / 三尺太阿劍
백년토록 양보음을 읊으리라 / 百年梁甫吟
벼슬을 하자니 백안시하는 사람 많고 / 逢迎多白眼
유세를 하자니 황금이 적구나 / 遊說少黃金
풍진의 모든 일에 한 번 눈물을 훔치는데 / 風塵萬事一揮淚
남아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 / 誰知男兒方寸心
백년토록 양보음을 읊으리라 / 百年梁甫吟
벼슬을 하자니 백안시하는 사람 많고 / 逢迎多白眼
유세를 하자니 황금이 적구나 / 遊說少黃金
풍진의 모든 일에 한 번 눈물을 훔치는데 / 風塵萬事一揮淚
남아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 / 誰知男兒方寸心
하였는데, 마치 이광전(李廣傳)을 읽는 것 같다.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의 강상낙화(江上落花) 시에,
매번 꽃이 필 무렵에 꽃을 보지 못했는데 / 每到花時不見花
올해도 신병이 지난해처럼 많구나 / 今年病似去年多
매화꽃 다 떨어지고 복사꽃 늦게 피었는데 / 梅花落盡桃花晩
비바람은 무정하게 좋은 세월 보내는구나 / 風雨無情送歲華
올해도 신병이 지난해처럼 많구나 / 今年病似去年多
매화꽃 다 떨어지고 복사꽃 늦게 피었는데 / 梅花落盡桃花晩
비바람은 무정하게 좋은 세월 보내는구나 / 風雨無情送歲華
하였으니, 몸과 마음을 바쳐 나랏일을 돌보는 뜻이 담겨 있다.
윤오음(尹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삼일포(三日浦) 시에,
삼일포 가운데 작은 배 띄워 선유하니 / 三日湖中泛小舟
한 구역 아름다운 경치 물과 구름이 한가롭다 / 一區形勝水雲悠
적다 보니 옛날 놀던 곳 다시 기억나는데 / 書來重憶曾遊處
서른여섯 봉우리의 무한한 가을빛이네 / 三十六峯無限秋
한 구역 아름다운 경치 물과 구름이 한가롭다 / 一區形勝水雲悠
적다 보니 옛날 놀던 곳 다시 기억나는데 / 書來重憶曾遊處
서른여섯 봉우리의 무한한 가을빛이네 / 三十六峯無限秋
하였으니,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가되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기상이다.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아이의 시권에 쓰다[題兒子詩卷]’라는 시에,
너의 나이 열두 살인데 / 汝年十二歲
새로운 시구를 좋아하니 / 能好新詩句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의 아들이 / 猶勝陶家兒
늘 배나 밤을 찾는 것보다는 낫다 / 梨栗長在口
새로운 시구를 좋아하니 / 能好新詩句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의 아들이 / 猶勝陶家兒
늘 배나 밤을 찾는 것보다는 낫다 / 梨栗長在口
하였으니, 종일 단정히 앉은 채 춘풍화기(春風和氣)를 띤 기상이다.
이한음(李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신안제(新安題) 시에,
일은 풍운과 함께 변하고 / 事與風雲變
강은 세월과 같이 흐른다 / 江同歲月流
고금 영웅들의 뜻은 / 英雄今古意
모두 한 빈 배와 같다 / 都付一虛舟
강은 세월과 같이 흐른다 / 江同歲月流
고금 영웅들의 뜻은 / 英雄今古意
모두 한 빈 배와 같다 / 都付一虛舟
하였으니, 동정호(洞庭湖)의 추월(秋月)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상이다.
이지봉(李芝峯 이수광(李睟光))의 ‘중양절에 빗줄기를 대하여’라는 시에,
뜰에 가득한 비바람은 서늘한 가을을 보내는데 / 滿庭風雨送秋涼
병 앓는 이 늙은 몸 좋은 날 만나니 눈물 줄줄 흐른다 / 病裏逢辰老淚長
도연명(陶淵明)에 비한다면 가난이 더 심하니 / 若比淵明貧更甚
꽃도 없고 술도 없이 중양절을 지내노라 / 無花無酒過重陽
병 앓는 이 늙은 몸 좋은 날 만나니 눈물 줄줄 흐른다 / 病裏逢辰老淚長
도연명(陶淵明)에 비한다면 가난이 더 심하니 / 若比淵明貧更甚
꽃도 없고 술도 없이 중양절을 지내노라 / 無花無酒過重陽
하였으니, 옛날 문사(文士)의 본색이다.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요야(遼野) 시에,
먼 산은 지워진 듯 나무는 떠 있는 듯 / 遠山如抹樹如浮
넓은 건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구나 / 納納乾坤盡一眸
흡사 동정호에 가을 물 가득하여 / 怳似洞庭秋水滿
가벼운 배 밝은 달밤 중류에 떠 있는 듯 / 輕舟明月泛中流
넓은 건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구나 / 納納乾坤盡一眸
흡사 동정호에 가을 물 가득하여 / 怳似洞庭秋水滿
가벼운 배 밝은 달밤 중류에 떠 있는 듯 / 輕舟明月泛中流
하였으니, 요동벌 700리에 사람은 콩알만 하게 보이고 말은 개미만 하게 보여 그 끝을 분변하지 못하는 모양을 잘 나타냈다.
신상촌(申象村 신흠(申欽))의 춘주탄(春州灘) 시에,
춘주의 사십탄은 / 春州四十灘
여울마다 물결이 서 있는 것 같다 / 灘灘浪似立
돛대가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 愼莫摧帆檣
북풍이 밤에 세차게 불어온다 / 北風夜來急
여울마다 물결이 서 있는 것 같다 / 灘灘浪似立
돛대가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 愼莫摧帆檣
북풍이 밤에 세차게 불어온다 / 北風夜來急
하였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아련히 표리에 보인다.
최간이(崔簡易 최립(崔岦))의 괴석(怪石) 시에,
창 사이에 이 한 마리가 달려 있는데 / 窓間一蝨懸
주목하고 보니 수레바퀴처럼 크다 / 目定車輪大
내가 이 괴석을 얻은 뒤로는 / 自我得此石
꽃피는 산을 향해 앉지 않노라 / 不向花山坐
주목하고 보니 수레바퀴처럼 크다 / 目定車輪大
내가 이 괴석을 얻은 뒤로는 / 自我得此石
꽃피는 산을 향해 앉지 않노라 / 不向花山坐
하였는데, 못을 자른 듯 쇠를 꺾은 듯 흉험(凶險)하여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의 무제(無題) 시에,
오열하는 듯 흐르는 청평의 물은 / 嗚咽淸平水
동쪽으로 흘러서 한강에 들어간다 / 東流入漢津
두견새는 밝은 달밤에 울어 / 鵑啼明月夜
외로운 이 신하를 슬프게 하는구나 / 血泣一孤臣
동쪽으로 흘러서 한강에 들어간다 / 東流入漢津
두견새는 밝은 달밤에 울어 / 鵑啼明月夜
외로운 이 신하를 슬프게 하는구나 / 血泣一孤臣
하였는데, 정말 공의 평생 심사를 쏟아 놓은 시이다.
이동악(李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라는 시에,
변방에서 종군하느라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 絶塞從軍久未還
고향 서신 왔어도 제때에 보지 못하고 해를 넘긴다 / 鄕書雖到隔年看
집사람은 남편이 파리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 家人不解征人瘦
겨울옷을 예전처럼 크게 만들었구나 / 裁出寒衣抵舊寬
고향 서신 왔어도 제때에 보지 못하고 해를 넘긴다 / 鄕書雖到隔年看
집사람은 남편이 파리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 家人不解征人瘦
겨울옷을 예전처럼 크게 만들었구나 / 裁出寒衣抵舊寬
하였는데, 절반도 채 다 못 읽어서 백발이 성성해지는 느낌을 준다.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의 ‘금오(金烏)에 들러’라는 시에,
대나무는 지난날의 푸름을 지니고 있고 / 竹有當年碧
산은 옛날처럼 높구나 / 山依昔日高
청풍이 오히려 머리털을 쭈뼛하게 하는데 / 淸風猶竪髮
고인이 멀어졌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 誰謂古人遙
산은 옛날처럼 높구나 / 山依昔日高
청풍이 오히려 머리털을 쭈뼛하게 하는데 / 淸風猶竪髮
고인이 멀어졌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 誰謂古人遙
하였으니,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를 올라가는 기상이 담겨 있다.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의 ‘산인(山人)이 시를 권하다’라는 시에,
산속에 사는 사람이 좋은 술을 권하니 / 山人勸美酒
취한 뒤에 긴 노래가 나온다 / 醉後長歌發
산속의 살림살이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 莫道山家貧
소나무 사이에 밝은 달이 있다 / 松間有明月
취한 뒤에 긴 노래가 나온다 / 醉後長歌發
산속의 살림살이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 莫道山家貧
소나무 사이에 밝은 달이 있다 / 松間有明月
하였으니, 왕마힐(王摩詰)이 이따금 눈 속에 파초를 그린 것과 같은 격의 시이다.
최지천(崔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야좌(夜坐) 시에,
칼날 같은 추위 이불에서 생기고 밤은 긴데 / 鎌稜生被夜漫漫
벽을 비치는 등잔불 교묘하게 추위를 견디네 / 照壁燈花巧耐寒
존엄한 도성이 지척에 있음을 알겠는데 / 咫尺嚴城知不隔
궁중의 종소리 달빛과 어울려 구름 끝에 떨어진다 / 禁鍾和月落雲端
벽을 비치는 등잔불 교묘하게 추위를 견디네 / 照壁燈花巧耐寒
존엄한 도성이 지척에 있음을 알겠는데 / 咫尺嚴城知不隔
궁중의 종소리 달빛과 어울려 구름 끝에 떨어진다 / 禁鍾和月落雲端
하였으니, 경루(瓊樓), 옥우(玉宇)의 높은 곳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택당(李澤堂 이식(李植))의 촌거즉사(村居卽事) 시에,
나뭇잎 떨어지고 가을은 저물어 가는데 / 木落三秋盡
바람 불어 뭇 골짝은 소리 내어 운다 / 風饕衆竅鳴
호수 고기는 축일에 오르고 / 湖魚丑日上
들술은 묘시에 기울인다 / 野酒卯時傾
발자취 멀리하니 세상에 구하는 일 없고 / 迹遠無求世
마음 간직하니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 心存不役名
산재가 기거하는 곳이니 / 山齋睡起處
이불 덮어쓰고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 / 擁被聽松聲
바람 불어 뭇 골짝은 소리 내어 운다 / 風饕衆竅鳴
호수 고기는 축일에 오르고 / 湖魚丑日上
들술은 묘시에 기울인다 / 野酒卯時傾
발자취 멀리하니 세상에 구하는 일 없고 / 迹遠無求世
마음 간직하니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 心存不役名
산재가 기거하는 곳이니 / 山齋睡起處
이불 덮어쓰고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 / 擁被聽松聲
하였으니, 위 마룻대며 아래 추녀 끝을 훌륭한 목수가 잘 다듬어 놓은 격이다.
조용주(趙龍洲 조경(趙絅))의 ‘형강을 건너다[渡荊江]’라는 시에,
걸어서 형강의 물 머리에 이르니 / 行到荊江江水頭
흰 갈매기 헤엄치는 물결 밖에 외로운 배 있다 / 白鷗波外有孤舟
어부가 나에게 창랑의 재미를 말해 주는데 / 漁翁說我滄浪趣
인간의 만호후보다 단연코 낫다 한다 / 絶勝人間萬戶侯
흰 갈매기 헤엄치는 물결 밖에 외로운 배 있다 / 白鷗波外有孤舟
어부가 나에게 창랑의 재미를 말해 주는데 / 漁翁說我滄浪趣
인간의 만호후보다 단연코 낫다 한다 / 絶勝人間萬戶侯
하였으니, 천하의 분경(奔競)하는 사람을 깨우칠 만하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의 절구(絶句)에,
기러기는 석양에 먼 공중을 지나가고 / 鴈度遙空晩
조수는 먼 물가 바람에서 생긴다 / 潮生極浦風
어촌에는 가난한 집이 많은데 / 漁村多白屋
석양 속에 절반으로 보인다 / 一半夕陽中
조수는 먼 물가 바람에서 생긴다 / 潮生極浦風
어촌에는 가난한 집이 많은데 / 漁村多白屋
석양 속에 절반으로 보인다 / 一半夕陽中
하였으니, 무한한 그림의 뜻이 멀고 가까운 곳에 출몰하고 있다.
이백강(李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용계(龍溪) 시에,
용계의 물은 졸졸 흐르는데 / 嗚咽龍溪水
산문에서 손님을 전송하니 때는 가을이로다 / 山門送客秋
서풍 속에 나그네는 시름에 겨워 / 西風游子恨
공연히 석양빛 비치는 다락에 기대네 / 空倚夕陽樓
산문에서 손님을 전송하니 때는 가을이로다 / 山門送客秋
서풍 속에 나그네는 시름에 겨워 / 西風游子恨
공연히 석양빛 비치는 다락에 기대네 / 空倚夕陽樓
하였으니, 졸졸 흐르는 용계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 누가 석양의 한을 씻을 수 있겠는가.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의 ‘길 옆의 무덤’이라는 시에,
길 곁의 한 고총 쓸쓸하게 있는데 / 路傍一古塚
그 자손 지금 어느 곳에 살고 있는가 / 子孫今何處
오직 한 쌍의 석인만이 있어 / 惟有雙石人
길이길이 지키고 떠나가지 않는다 / 長年守不去
그 자손 지금 어느 곳에 살고 있는가 / 子孫今何處
오직 한 쌍의 석인만이 있어 / 惟有雙石人
길이길이 지키고 떠나가지 않는다 / 長年守不去
하였으니, 선생의 덕풍(德風)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
이서하(李西河 이민서(李敏敍))의 ‘시냇가에서 한가히 읊조리다’라는 시에,
비바람 치듯이 물소리는 격렬하고 / 水聲激激疑風雨
대낮도 분변 못하게 아지랑이 짙게 끼었다 / 山靄盈盈晝不分
진종일 쓸쓸하게 한 가지 일도 없어서 / 盡日蕭然無一事
꽃 심고 채소 심으며 조석을 보내노라 / 栽花種菜度朝昏
대낮도 분변 못하게 아지랑이 짙게 끼었다 / 山靄盈盈晝不分
진종일 쓸쓸하게 한 가지 일도 없어서 / 盡日蕭然無一事
꽃 심고 채소 심으며 조석을 보내노라 / 栽花種菜度朝昏
하였으니, 표범이 남산(南山)에 숨어 있어서 아욱도 캐지 못하겠다.
유시남(兪市南 유계(兪棨))의 산천재(山泉齋) 시에,
성스럽고 어리석음은 출발점에서 갈리고 / 聖蒙由發軔
사람과 귀신은 앞길에서 판단된다 / 人鬼判前關
맑고 탁한 도랑물들은 / 淸濁溝渠水
원류가 다같이 산에서 나왔다 / 源流幷出山
사람과 귀신은 앞길에서 판단된다 / 人鬼判前關
맑고 탁한 도랑물들은 / 淸濁溝渠水
원류가 다같이 산에서 나왔다 / 源流幷出山
하였으니, 문장과 도학은 본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다.
이정관재(李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청풍주중영월(淸風舟中詠月) 시에,
달은 강심에 찍힌 채 수면은 거울처럼 평평한데 / 月印江心鏡面平
고운 것 더러운 것 온갖 것이 다 와서 드러난다 / 姸媸萬態畢來呈
탁한 물을 만난다 해도 흔적을 볼 수 없으니 / 縱逢濁水還無見
물결의 맑은 빛이 저절로 밝음을 지니고 있다 / 波際淸光自在明
고운 것 더러운 것 온갖 것이 다 와서 드러난다 / 姸媸萬態畢來呈
탁한 물을 만난다 해도 흔적을 볼 수 없으니 / 縱逢濁水還無見
물결의 맑은 빛이 저절로 밝음을 지니고 있다 / 波際淸光自在明
하였으니, 혼자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기상을 담고 있다.
박서계(朴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대탄(大灘) 시에,
산이 쪼개져서 푸른 강은 급히 흐르고 / 山破蒼江急
바람이 감돌아서 지는 해는 더디게 간다 / 風回斜日遲
물결 사이에 있는 한 쌍의 흰 새는 / 波間雙白鳥
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 會待我歸時
바람이 감돌아서 지는 해는 더디게 간다 / 風回斜日遲
물결 사이에 있는 한 쌍의 흰 새는 / 波間雙白鳥
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 會待我歸時
하였으니, 청정(淸貞)한 절의가 멀리 북두칠성을 쏜다.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효종(孝宗)의 만사(輓詞)에,
마음 단단히 다잡고 나라의 운명 연장하며 / 銳意恢天步
근심과 근면으로 십 년을 일관하셨네 / 憂勤一十年
뛰어난 지모는 모든 제도를 바르게 다지고 / 英猷貞百度
훌륭한 계책은 뭇 현인들을 굴복시키셨다 / 長策屈群賢
먼 곳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니 / 杞梓多生楚
경세(經世)의 재사(才士)들이 다 모여 있다 / 驊騮竟向燕
중흥의 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 中興未究業
그 사적은 청사에 밝게 빛나리 / 昭晰在靑編
근심과 근면으로 십 년을 일관하셨네 / 憂勤一十年
뛰어난 지모는 모든 제도를 바르게 다지고 / 英猷貞百度
훌륭한 계책은 뭇 현인들을 굴복시키셨다 / 長策屈群賢
먼 곳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니 / 杞梓多生楚
경세(經世)의 재사(才士)들이 다 모여 있다 / 驊騮竟向燕
중흥의 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 中興未究業
그 사적은 청사에 밝게 빛나리 / 昭晰在靑編
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난 시대에 영웅들이 성심(誠心)을 내보인 것이다.
김문곡(金文谷 김수항(金壽恒))의 ‘가을밤 회포가 있어’라는 시에,
가을빛 띤 난초 언덕엔 향기가 다했는데 / 蘭皐秋色歇芳菲
몇 곳이나 강담의 나그네 돌아가지 못했을까 / 幾處江潭客未歸
땅 끝 하늘 끝에 소식이 끊어졌으니 / 蠻海極天消息斷
꿈속에서 기러기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리라 / 夢隨征鴈向南飛
몇 곳이나 강담의 나그네 돌아가지 못했을까 / 幾處江潭客未歸
땅 끝 하늘 끝에 소식이 끊어졌으니 / 蠻海極天消息斷
꿈속에서 기러기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리라 / 夢隨征鴈向南飛
하였으니, 한바탕 부는 시원한 바람에 뜬구름이 모두 걷힌 기상이다.
민노봉(閔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영설(詠雪) 시에,
화방에 갓 핀 꽃처럼 번화하고 / 繁似花房初發榮
백옥 같은 자태에 싸늘한 기를 띠었다 / 凜如玉立勢崢嶸
변방에서부터 와서 끝까지 유람하였네 / 來從絶塞窮遊覽
관산이 괴로운 행로라고 누가 말했던가 / 誰道關山是苦行
백옥 같은 자태에 싸늘한 기를 띠었다 / 凜如玉立勢崢嶸
변방에서부터 와서 끝까지 유람하였네 / 來從絶塞窮遊覽
관산이 괴로운 행로라고 누가 말했던가 / 誰道關山是苦行
하였으니, 풍설(風雪)을 무릅쓴 행인의 노고를 잘 표현하였다.
김농암(金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전중군안(田中群鴈) 시에,
만 리 길 따뜻한 곳을 찾아가는 기러기는 / 萬里隨陽鴈
서리 내리기 전에 북쪽 변방을 출발한다 / 先霜發北邊
갈대를 머금고 먼길을 근심하며 날다가 / 含蘆愁遠道
이삭을 먹기 위해 쓸쓸한 밭에 내려앉는다 / 啄穗下寒田
그림자만 보면 그물인가 의심하고 / 顧影頻疑網
소리만 들으면 활소린가 겁을 낸다 / 聞聲誤怯弦
고상한 뜻 갖고 높은 하늘을 날다가 / 冥冥九霄意
그만 끝내는 곡식의 유혹을 받았구나 / 終被稻粱牽
서리 내리기 전에 북쪽 변방을 출발한다 / 先霜發北邊
갈대를 머금고 먼길을 근심하며 날다가 / 含蘆愁遠道
이삭을 먹기 위해 쓸쓸한 밭에 내려앉는다 / 啄穗下寒田
그림자만 보면 그물인가 의심하고 / 顧影頻疑網
소리만 들으면 활소린가 겁을 낸다 / 聞聲誤怯弦
고상한 뜻 갖고 높은 하늘을 날다가 / 冥冥九霄意
그만 끝내는 곡식의 유혹을 받았구나 / 終被稻粱牽
하였다. 학문과 덕행을 닦은 훌륭한 사람이니, 그의 시를 누가 읽지 않겠는가.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우중(雨中) 시에,
빗발이 빽빽하게 먼 소나무 위를 건너가고 / 雨足森森度遠松
구름 걷히니 두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 雲披露却兩三峯
서루의 사면엔 시냇물 소리 요란하고 / 書樓四面溪聲合
절에선 석양에 치는 종소리 들려온다 / 碧寺虛傳日暮鍾
구름 걷히니 두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 雲披露却兩三峯
서루의 사면엔 시냇물 소리 요란하고 / 書樓四面溪聲合
절에선 석양에 치는 종소리 들려온다 / 碧寺虛傳日暮鍾
하였으니, ‘한밤중에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에 들린다.[夜半鍾聲到客船]’는 고시의 맛을 풍기고 있다.
박구당(朴久堂 박장원(朴長遠))의 평강도중(平康道中) 시에,
산이 높아 해가 쉬이 지니 / 山高日易夕
마을 길에 소와 양이 내려온다 / 村逕下牛羊
우연히 간수 가의 돌에 앉아 / 偶坐澗邊石
행색이 바쁜 줄을 잊었노라 / 不知行色忙
마을 길에 소와 양이 내려온다 / 村逕下牛羊
우연히 간수 가의 돌에 앉아 / 偶坐澗邊石
행색이 바쁜 줄을 잊었노라 / 不知行色忙
하였으니, 깨끗하여 속세의 기미가 없다.
최곤륜(崔崑崙 최창대(崔昌大))의 병중(病中) 시에,
임원엔 석양볕 아직 많이 남았는데 / 林院多夕照
외로운 연기 먼 봉우리에 피어오른다 / 孤煙生遠峯
멀리서 생각하노니 서산의 중은 / 遙念西山僧
혼자 와서 석양 종을 울리리라 / 獨來鳴暮鍾
외로운 연기 먼 봉우리에 피어오른다 / 孤煙生遠峯
멀리서 생각하노니 서산의 중은 / 遙念西山僧
혼자 와서 석양 종을 울리리라 / 獨來鳴暮鍾
하였으니, 종소리가 나무 사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식암(金息菴 김석주(金錫胄))의 ‘관서(關西)로 떠나는 사람을 보내며’라는 시에,
흰 얼굴 붉은 적삼 수놓은 치마에 가렸으니 / 白面紅衫映繡裙
지난날 풍류 지닌 젊은 낭군이었지 / 風流昔日少郞君
맑은 강 한 굽이에 천 가닥 수양버들은 / 淸江一曲千條柳
이쁜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노라 / 猶許佳人唱遏雲
지난날 풍류 지닌 젊은 낭군이었지 / 風流昔日少郞君
맑은 강 한 굽이에 천 가닥 수양버들은 / 淸江一曲千條柳
이쁜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노라 / 猶許佳人唱遏雲
하였는데, 부귀상(富貴像)이 담겨 있다.
조후계(趙后溪 조유수(趙裕壽))의 ‘낙화암(落花巖)에서 피리를 불다’라는 시에,
외로운 피리 소리 푸른 벽을 찢고 / 孤管裂靑壁
그 울림이 푸른 조수를 끌어당긴다 / 餘音曳綠潮
석양에 처량한 생각 갖는 것은 / 悲涼日暮意
다만 백제에 대한 원한 때문 / 只以怨前朝
그 울림이 푸른 조수를 끌어당긴다 / 餘音曳綠潮
석양에 처량한 생각 갖는 것은 / 悲涼日暮意
다만 백제에 대한 원한 때문 / 只以怨前朝
하였는데, 처량한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박정재(朴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사군(四郡)의 산수(山水)를 찾아가는 사람을 보내며’라는 시에,
남생은 평소 호방하고 활달하여 / 南生雅放曠
산수를 즐기고 좋아한다 / 嗜好在山水
가을바람에 문을 나가서 / 秋風出門去
모든 일을 될 대로 내버려 둔다 / 萬事理不理
나는 수를 놓고 치마를 만들어서 / 我願繡作裙
온종일 방 안에 걸어 두고 싶노라 / 終日掛屋裏
그대는 기특한 경치를 사랑하지만 / 君自愛奇景
나는 기특한 선비를 사랑하노라 / 我自愛奇士
산수를 즐기고 좋아한다 / 嗜好在山水
가을바람에 문을 나가서 / 秋風出門去
모든 일을 될 대로 내버려 둔다 / 萬事理不理
나는 수를 놓고 치마를 만들어서 / 我願繡作裙
온종일 방 안에 걸어 두고 싶노라 / 終日掛屋裏
그대는 기특한 경치를 사랑하지만 / 君自愛奇景
나는 기특한 선비를 사랑하노라 / 我自愛奇士
하였으니, 착실한 공부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서만정당(徐晩靜堂 서종태(徐宗泰))의 ‘금강산에 들어가다’라는 시에,
금강산에 드는 것 성인의 문에 드는 것 같으니 / 入山如入聖人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도의 존재 아닌 것이 없다 / 鑽仰無非見道存
저절로 심상하게 놀라 움직이는 곳이 있는데 / 自有尋常驚動處
마음으론 알아도 입으론 말하기 어려우리라 / 秖應心會口難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도의 존재 아닌 것이 없다 / 鑽仰無非見道存
저절로 심상하게 놀라 움직이는 곳이 있는데 / 自有尋常驚動處
마음으론 알아도 입으론 말하기 어려우리라 / 秖應心會口難言
하였으니,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진퇴(進退)에 차서가 있다.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 꿈을 꾸던 그날 밤에 강태공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은 급현 태공묘비(汲縣太公廟碑)에 보인다. 그러나 문왕이 위수(渭水)에 사냥가려고 할 때 점은 쳤지만 강태공 꿈을 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강태공이 문왕 꿈을 꾸었다는 사실도 서책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약원(藥院)의 직소(直所)에서 의서(醫書)를 보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사람은 천지의 변화하는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한 달 만에 고액(膏液)이 엉기고, 두 달 만에 혈맥이 형성되고, 석 달 만에 배낭(胚囊)이 이루어지고, 넉 달 만에 태반(胎盤)이 이루어지고, 다섯 달 만에 힘줄이 이루어지고, 여섯 달 만에 뼈가 이루어지고, 일곱 달 만에 형체가 이루어지고, 여덟 달 만에 움직이고, 아홉 달 만에 뛰고, 열 달 만에 출생한다. 형해(形骸)가 이루어지고 나면 오장(五臟)이 안에서 나누어진다. 간장은 눈을, 신장은 귀를, 비장은 혀를, 폐장은 코를, 담장은 입을 주관한다. 하늘에는 사시(四時), 오행(五行), 구요(九曜), 360일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지(四肢), 오장(五臟), 구규(九竅), 360마디가 있다. 하늘에는 풍우(風雨)와 한서(寒暑)가 있고 사람에게는 취여(取與)와 희로(喜怒)가 있다. 그리고 담장은 구름, 폐장은 기체, 비장은 바람, 신장은 비, 간장은 우레가 된다. 사람은 천지와 서로 같은데, 마음이 주인이 된다.” 하였다.
공자(孔子)는 하늘에 대해 잘 말씀하지 않았다. 하늘에 관해 여러 책에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여러 물건의 정기요, 만물의 조상이다. 구름이 떠다니는 것은 기체가 왕래하는 것이고, 일월 성신(日月星辰)은 기체가 쌓인 것이며, 우로 상설(雨露霜雪)은 기체가 응결된 것이다. 음양(陰陽)은 기체의 어머니이다.
봄은 창천(蒼天)이니, 만물이 발생하고 그 색이 푸르다. 여름은 호천(昊天)이니, 만물이 장성하고 그 기운이 성대하다. 가을은 민천(旻天)이니, 만물이 성숙하고 모두 문채가 있다. 겨울은 상천(上天)이니, 음기(陰氣)가 위에 있고 만물이 복장(伏藏)한다.
천한(天漢)은 수기(水氣)인데, 정광(精光)이 하늘에 전운(轉運)한다. 하늘의 정기는 해가 되고, 땅의 정기는 달이 되었다. 바람은 천지가 기운을 내부는 것이다. 천지의 기운이 화합하면 비가 오는데, 폭우(暴雨)를 동(凍)이라 한다. 우레는 1양(陽)이 2음(陰)의 아래에 분발하는 것이니, 양기(陽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운 달에 발한다. 바람은 1음이 2양의 아래에 엎드린 것이니, 음기(陰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운 달에 발한다. 천지가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을 몽무(雺霧)라고 한다.
나무와 돌의 괴귀(怪鬼)는 기(夔) 또는 망랑(罔閬)이라 하고, 물의 괴귀는 용(龍) 또는 망상(罔象)이라 하며, 흙의 괴귀는 분양(羵羊)이라 하며, 나무의 정령은 팽후(彭侯)라 하는데 삶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분양은 잣나무 뿌리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묘역(墓域)에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순히 금수(禽獸)나 충어(蟲魚)라는 것만 알지, 그 성격은 분변하지 못한다. 여러 책을 널리 상고해 보는 것도 학문에 일조가 되는 일이다.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천하에 큰 길짐승[獸]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곧 지방(脂肪)이 있는 것, 고혈(膏血)이 있는 것, 털이 짧은 것, 날개가 달린 것, 비늘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날짐승[禽]도 길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인 오금희(五禽戱)는 바로 곰이 나무를 부여잡고 힘을 쓰는 것처럼 하는 동작, 새가 목을 빼고 먹이를 먹는 것처럼 하는 동작, 범이 돌아보는 것처럼 하는 동작, 원숭이가 걷는 것처럼 하는 동작, 거북이가 머리를 움츠리는 것처럼 하는 동작이니, 길짐승도 날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은 맑은 물에서 먹고 맑은 물에서 놀고, 이무기도 맑은 물에서 먹고 맑은 물에서 놀며, 물고기는 탁한 물에서 먹고 탁한 물에서 논다. 물고기 가운데 흐르는 물속에서 사는 놈은 등 비늘이 희고, 고여 있는 물속에서 사는 놈은 등 비늘이 검다.
까마귀는 바람에 목욕을 하고, 까치는 비에 목욕을 하고, 닭은 흙에 목욕을 하고, 새는 모래에 목욕을 한다. ‘음력 10월에 검은 새가 목욕한다’ 하였는데, 검은 새는 까마귀요, 목욕한다는 것은 날아서 잠깐 올라갔다가 잠깐 내려갔다가 하는 것을 말한다.
개는 눈을 좋아하고, 말은 바람을 좋아하고, 돼지는 비를 좋아한다. 그리고 까마귀는 넓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까치는 좁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한다. 오리는 물속에 잠기기를 좋아하고, 갈매기는 물 위로 뜨기를 좋아한다.
닭은 잡아맬[繫] 수 있기 때문에 계(鷄)라 이르고, 오리는 친압할[狎] 수 있기 때문에 압(鴨)이라 이른다.
말은 입을 얽고 소는 코를 뚫는데, 이것은 사람이 한다. 말은 하루에 100리를 가고, 소는 하루에 100이랑을 간다. 소는 순풍(順風)에 달리고, 말은 역풍(逆風)에 달린다. 《좌전》에, “발정난 마소도 서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양은 성질이 이슬을 무서워하므로 느지막이 나갔다가 일찌감치 돌아온다.
귀가 긴 짐승은 꼬리가 짧으니 토끼 등속이 바로 그것이고, 다리가 짧은 짐승은 꼬리가 기니 범과 표범의 등속이 바로 그것이다.
고양이는 일명 몽귀(蒙貴)라고도 하고 오원(烏圓)이라고도 하는데, 눈동자가 아침과 저녁에는 둥글고 낮에는 쭈그러져서 실오라기와 같다. 콧끝은 항상 차고 오직 하지(夏至) 하루에만 따뜻하며, 털은 이나 벼룩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은 고양이가 어두움 속에서 털을 역으로 세워 화성(火星)처럼 빛내고 귀 부분을 넘어서까지 낯을 씻으면 손님이 온다.
곤충이나 짐승들의 수명 및 변화는 다음과 같다.
하루살이는 3일, 누에는 27일, 매미는 30일 동안 산다. 쓰르라미는 여름 동안만 살기 때문에 봄과 가을을 모른다. 그리고 쥐는 300년, 원숭이는 800년, 여우와 사슴은 각각 1000년, 학은 2000년, 거북은 3600년, 기린은 3000년을 산다.
100년 묵은 여우는 미녀가 되고, 100년 묵은 박쥐는 신선이 된다. 두꺼비는 1000년이 되면 머리에 뿔이 나고 이마 밑에 단서(丹書)가 생긴다. 범은 500년이 되면 하얀색으로 변하고, 1000년이 되면 이빨이 빠지고 뿔이 난다. 제비는 1000년이 되면 호염(胡髥)이 나고 문을 북쪽으로 향해서 집을 짓는다. 거북은 1000년이 되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연잎 위에서 논다. 사슴은 1000년이 되면 푸른 사슴이 되고, 500년이 더 되면 흰 사슴이 되고, 또 500년이 더 되면 검은 사슴이 된다.
까마귀는 암수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오른쪽 날개로 왼쪽을 가리는 놈은 수컷이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가리는 놈은 암컷이다. 벌은 생식기가 꼬리에 있는데, 꼬리가 갈라진 놈은 암컷이고 꼬리가 뾰족한 놈은 수컷이다. 게는 배꼽이 둥근 놈은 암컷이고 뾰족한 놈은 수컷인데, 수컷은 낭해(𩷕䱺)라 하고 암컷은 박대(博帶)라 한다. 거북은 수컷은 대모(瑇瑁)라 하고 암컷은 자휴(觜蠵)라 하며, 고래는 수컷은 경(鯨)이라 하고 암컷은 예(鯢)라 한다. 물새는 수컷은 빛깔이 붉은데 비(翡)라 하고 암컷은 빛깔이 푸른데 취(翠)라 한다. 수컷이 우는 놈을 원(鴛)이라 하고 암컷이 우는 놈을 앙(鴦)이라 한다. 오리는 수컷이 울지 않고, 매미는 암컷이 울지 않는다. 메추라기는 수컷은 개(鶛)라 하고 암컷은 비(痺)라고 하는데, 수컷은 발이 높고 암컷은 발이 낮다. 말은 수컷은 즐(騭)이라 하고 암컷은 탄(驒)이라 한다. 집비둘기는 암놈이 수놈을 타고, 바닷게는 암놈이 수놈을 업는다. 비둘기는 암컷은 앞을 펴고 수컷은 뒤를 편다. 기러기는 수컷이 부르고 암컷이 응한다. 새매는 수컷이 작고 암컷이 크다.
한 방향으로 통한 길을 도로(道路), 두 방향으로 통한 길을 기(岐), 세 방향으로 통한 길을 극(劇), 네 방향으로 통한 길을 구(衢), 다섯 방향으로 통한 길을 강(康), 여섯 방향으로 통한 길을 장(莊), 아홉 방향으로 통한 길을 규(逵)라 한다.
나는 50이 넘어서 젊은 소실을 두었는데 쇠로(衰老)한 것이 부끄러워서 매번, “백발이 홍안에 비치는 것 차마 보지 못하겠네[不堪白髮照紅顔]”라는 시구를 외었다. 60이 넘어서 전라도 감영에 있는 생사당(生祠堂)에서 내 초상화를 찾아왔는데, 바로 38, 9세 때 그린 것이었다. 곧 소실을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해서, “내 젊을 때의 모습을 볼 것 같으면 사람이 어찌 태어나서 늙을 자 있겠느냐.”라고 하였으니, 또한 한 남자의 통쾌한 일이었다.
공자는, “제사 지내지 않아야 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다.” 하였다. 나는 귀신을 섬기지도 배척하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일찍이 말하기를, “정성껏 조상께 제사 지내고 그다음은 지신(地神)을 받들어야 한다. 대개 나라에 태묘(太廟)와 태사(太社)가 있듯이 사가에도 받드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만재(金晩齋 김세균(金世均))는 일찍이 이선단(二仙丹)으로 학질(瘧疾)을 치료하고, 또 건나복(乾蘿葍)으로 이질(痢疾)을 치료하였다. 여러 번 시험해서 여러 번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이선단과 건나복을 많이 저축해 놓고 찾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기쁘게 응하고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남에게 신의가 있던 박문효(朴文孝)에 비할 만하였다.
옛사람의 필기(筆記)를 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새집으로 이사 가서 변소가 있었던 곳인 줄 모르고 그곳에 사당을 지었는데 훗날 그 집에 불길한 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 말은 비록 경험하지 못한 일이나,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명나라 사람의 차기(箚記)에 이르기를, “강남 어떤 사람의 집에 하루는 나비 떼가 날아들어 창문과 기둥을 어지럽게 쳤다. 그래서 그 집주인이 편액을 ‘백접당(百蝶堂)’이라 써서 걸었는데, 뒤에 자손이 번성하였다. 강남에는 길쌈하는 집이 많았는데, 그 나비는 이웃집의 누에나방이었던 것이다. 선가(仙家)에서 독만큼 큰 누에고치를 가지고 축수(祝壽)하는 비방으로 삼으니, 그 길조(吉兆)는 알 만하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등지에 야생 누에나방이 있는데, 그 빛깔이 사랑스럽다. 야생 누에고치는 집에서 기르는 누에고치와 다르다.
옛사람의 말에, “명산을 지나면서 뒤에 다시 보겠다는 기약을 한 자는 반드시 보지 못한다.” 하였다. 나는 약관 시절에 부용당(芙蓉堂)을 꼭 다시 보리라 기약했는데, 30년 뒤에 결국 보았다. 석왕사(釋王寺)는 스쳐 지나고 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훗날의 기약을 논할 수 있겠는가. 경포대(鏡浦臺)와 설악산(雪嶽山)이야말로 반드시 기약했던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종당에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명산을 지나면서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 분은 박두계(朴荳溪 박종훈(朴宗薰))이다.
장량(張良)과 이필(李泌)의 우열(優劣)을 논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장량은 고제(高帝) 같은 임금을 만났기 때문에 힘쓰지 않고서도 성공하였지만, 이필은 올바른 임금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처지는 같고 힘쓰는 것은 달랐다.” 하였다.
심 문충공(沈文忠公 심순택(沈舜澤))이 헐성루(歇惺樓)에 이르러 말하기를, “볼 것은 바로 일만이천 봉인가. 내 이미 다 보았으니 돌아가야겠다.” 하였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중서(中書)에 거듭 제수하는 왕명이 이르렀다. 그 전유(傳諭)하는 말에 이르기를, “금강산 속 좌의정이 머무는 곳에 전유하노라.” 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났다는 것은 명산에 질정해도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7, 8세 때 왕고(王考)를 충청 감사의 임소에서 모실 때 금강(錦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나에게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외도록 명하고 또 시를 짓게 하셨다. 내가 곧바로 짓기를, “누대 위에서는 미인이 춤을 추고, 맑은 강에는 흰 갈매기가 떠 있다.[樓上美人舞 淸江泛白鷗]” 하였더니, 왕고께서 찬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초년에 부귀하고 만년에 휴퇴(休退)할 상이다.” 하셨다. 나는 50세 후에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몸이 매이지 않은 배와 같았으니, 시의 예언을 비로소 깨달았다.
선왕고께서는 80세에 편찮으셔서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셨다. 그러자 여러 의원들은 모두, ‘당연히 보제(補劑)를 써야 한다.’고 하였는데, 유독 조종익(趙鍾翼) 의원만은 비아탕(肥兒湯) 처방을 내고 양황련(兩黃連)과 노회(蘆薈)를 가미하여 5, 6첩을 달여 드리니, 즉시 효과가 났다. 노인의 증세가 어린애와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조 의원은 어의(御醫) 중에 유명한 자였다.
우리나라의 조정 규모는 송(宋)나라에 비할 만하다. 그래서 《송조명상론(宋朝名相論)》을 지었는데, 송나라 명상 중에는 문장(文章), 사공(事功), 도덕(道德), 학문(學文)에 뛰어난 자들이 줄줄이 나왔다. 상민중(向敏中) 같은 정승은 앞 시대의 훌륭한 인물들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관직에 나와 직무를 돌볼 때는 규구(規矩)를 잃지 않았고 집안을 다스리거나 처신을 하는 데에서도 결점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런 사람은 중등인이 될 만하다. 만일 이런 사람을 본받는다면 후세의 비방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친께서 대사헌으로 계셨을 때 올린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 ‘경간(卿懇)’이란 두 글자가 있었으므로, 상소를 하여 이 두 글자를 거두시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옛날 영조 때 충목공(忠穆公) 이은(李溵)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 두 글자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 고사였던 것이다.
나의 족질(族姪) 이교영(李喬榮)은 문사(文士)인데 근래에 지은 나의 시를 보고, “도연명(陶淵明)의 시체(詩體)군요.”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시를 외어 보라고 하였더니, 그가 백운(白雲) 시를 읊기를,
흰구름은 무슨 일을 하려고 / 白雲何事爲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오가는가 / 搖曳無定跡
소나무와 계수나무 사이로 흘러들지만 / 流入松桂叢
깃든 학은 조는 중이라 그것을 모른다 / 棲鶴眠不識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오가는가 / 搖曳無定跡
소나무와 계수나무 사이로 흘러들지만 / 流入松桂叢
깃든 학은 조는 중이라 그것을 모른다 / 棲鶴眠不識
하였고, 또 한 수를 읊기를,
산 위의 달은 공중 가득히 실려 있고 / 山月滿空載
솔바람은 비와 함께 솔솔 부는구나 / 松風與雨斜
강호가 별천지가 아니니 / 江湖非別界
이곳에 문득 집을 짓노라 / 此處便爲家
솔바람은 비와 함께 솔솔 부는구나 / 松風與雨斜
강호가 별천지가 아니니 / 江湖非別界
이곳에 문득 집을 짓노라 / 此處便爲家
하였다. 내가 이들 시에 대하여 소감을 말하기를, “시어(詩語)에 진루(塵累)의 기미는 없으나 다만 선어(禪語)에 가까우이.” 하고는 내가 지은 백로주(白鷺洲) 시를 외기를,
백로주 가엔 흰 해오라기 날고 / 白鷺洲邊白鷺飛
백운산 위엔 흰 구름 많다 / 白雲山上多白雲
구름은 멈추고 해오라기는 졸고 산수는 고요한데 / 雲住鷺眠山水靜
한가한 사람은 잠이 없어 이들과 무리를 이루었다 / 幽人無夢自成群
백운산 위엔 흰 구름 많다 / 白雲山上多白雲
구름은 멈추고 해오라기는 졸고 산수는 고요한데 / 雲住鷺眠山水靜
한가한 사람은 잠이 없어 이들과 무리를 이루었다 / 幽人無夢自成群
하였다.
영남 사람이 말하기를, “이퇴계(李退溪)의 옛집을 수리할 때 보니, 들보에 ‘우리 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아마 바다 속의 사람일 것이다. 입에 천상의 물을 머금고 있다가 내뿜어 불의 정신을 씻는다.[吾家有一人 應是海中人 口含天上水 噴灑火精神]’는 뜻의 20글자가 있었는데, 이웃집들이 그것을 따라 하였다. 뒤에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유독 그 글씨가 붙은 곳만은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하였다. 이것은 퇴조비(退潮碑)의 탑본(搨本)이 불을 막아 준다는 것과 같은 유이다.
내가 관동(關東)을 유람할 때 낙산사(洛山寺)에 들렀더니 어떤 중이 나에게 누런 탱자를 주었다. 그래서 장난삼아 시를 읊기를,
우습다 회수 건너온 열매가 / 可笑渡淮實
어찌 나의 손에 들어왔는고 / 胡爲到我手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찌 내가 / 行人焉識我
이따금 시골 노인의 벗이라는 걸 알았는가 / 往往野翁友
어찌 나의 손에 들어왔는고 / 胡爲到我手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찌 내가 / 行人焉識我
이따금 시골 노인의 벗이라는 걸 알았는가 / 往往野翁友
하였다. 나의 호가 귤산(橘山)이기 때문에 곁에 있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옛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은 자취를 감춘 채 소양강(昭陽江)을 건너다가 소년들에게 봉변을 당하였고 그에 대한 시를 남겨 세간에 전하고 있지만, 나의 행적이야 누가 알겠는가.
원릉(元陵)의 만사(輓辭)에, “여염엔 자녀들 남겨 두고, 성궐은 평상시와 같다.[閭閻遺子女 城闕若平生]”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 참봉(李參奉 이광려(李匡呂))이 남을 대신해서 지은 것인데 명구(名句)로 전하고 있다. 내가 《동명집(東溟集)》을 보았더니 ‘장 옥성(張玉城)의 옛집을 읊다.’라는 시에, “영웅은 이미 진토가 되었는데, 문관은 평상시와 같다.[英雄已塵土 門館若平生]”라는 시구가 있었다. 두 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푸른빛이 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겠다.
김수팽(金壽彭)이란 자는 호조의 이서(吏胥) 중에 칭송을 받은 자이다. 정조 때에 금곡(金穀)을 오랫동안 관리하였는데, 번고(飜庫)할 때에 한 낭관(郞官)이 은(銀)으로 만든 바둑돌 몇 개를 가지자 김수팽은 한 움큼을 가졌다. 낭관이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기자 김수팽이 말하기를, “관원이 한 개를 취할 경우 아전이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니, 이것은 세상을 깨우치는 훌륭한 말이 될 만하다.
임신년 10월 18일,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을 퇴계원(退溪院)에서 받고 날이 저물어 불암사(佛巖寺)에서 잤는데, 19일 새벽에 어떤 사람이 홍패(紅牌)와 백패(白牌) 두 짐을 붉은 보로 싸서 집의 정청(正廳)에 안치하는 꿈을 꾸었다. 혹시 이 몽징(夢徵)이 뒤에 나타날는지.
정사년 가을에 폭풍이 동대문 밖으로부터 일어나서 큰 나무들이 쓰러졌는데, 바람이 지나간 곳은 마치 구겨 놓은 수세미와 같았다. 이런 현상은 100리 안팎이었다. 8월에 내가 순원왕비(純元王妃)의 애보(哀報)를 듣고 혜화문(惠化門)에 들어가서 수목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기미년과 경신년 사이에 동협(東峽)의 산허리에서 불이 나서 풀과 나무가 순식간에 탔는데 산불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내가 임신년에 설악산에 들어가서 보니 아직도 꺼멓게 탄 채로 서 있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니, 깊은 산에는 괴상한 일들이 더욱 많다.
순조(純祖)가 부인의 복색 중에 있는 ‘중리소상(中裏小裳)’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묻자, “무저비(無低卑)인데, 곧 상하가 통용함을 이른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자가 있었다. 순조는 또 조신(朝臣)의 집 소실의 칭호를 ‘아내서(衙內胥)’라고 하도록 분부하였는데, 이는 곧 국초(國初)에 고려인(高麗人)을 정병(正兵)으로 강정(降定)한 것이다. 그의 안사람인 부인도 감히 칭존(稱尊)하지 못하고 단지 ‘아내서’라고만 하였는데, ‘서’는 ‘그 사람[彼]’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 궁중에서 전래한 말인 것 같다.
내가 하루는 오줌을 누다가 그만 실수로 옷을 적셨다. 그리하여 이불을 둘러쓴 채 앉아서 가동(家僮)으로 하여금 젖은 옷을 불에 말리게 하고, 자소시(自笑詩)를 불러 주어 쓰게 하기를,
옛날의 건강하고 탄탄하던 몸을 만져 보니 / 按摩昔日康強軀
닭 가죽처럼 쭈그러지고 학 뼈처럼 메말랐다 / 一半鷄皮更鶴癯
오줌을 누면 가로 나가서 바지 밑이 젖고 / 放溺橫奔袴底濕
밥을 대하면 어지럽게 흘려 밥상머리가 더럽다 / 對飱亂落盤頭麤
어째서 네 모습이 이와 같이 되었는고 / 胡爲爾狀如斯否
인생이 다된 것을 쓸쓸하게 웃노라 / 堪笑人生已矣乎
애석하다 안방에 있는 젊은 소실을 / 可惜室中伏侍御
고운 얼굴 공연히 늙어 촌할멈 되도록 한 것 / 紅顔空老作村姑
닭 가죽처럼 쭈그러지고 학 뼈처럼 메말랐다 / 一半鷄皮更鶴癯
오줌을 누면 가로 나가서 바지 밑이 젖고 / 放溺橫奔袴底濕
밥을 대하면 어지럽게 흘려 밥상머리가 더럽다 / 對飱亂落盤頭麤
어째서 네 모습이 이와 같이 되었는고 / 胡爲爾狀如斯否
인생이 다된 것을 쓸쓸하게 웃노라 / 堪笑人生已矣乎
애석하다 안방에 있는 젊은 소실을 / 可惜室中伏侍御
고운 얼굴 공연히 늙어 촌할멈 되도록 한 것 / 紅顔空老作村姑
하였다.
내가 윤침계(尹梣溪 윤정현(尹定鉉))에게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권하였더니, 윤침계는 일언지하에 곧 결정해 버렸다. 또 이런 식으로 이공 헌구(李公憲球)에게 권하였으나, 이공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또 심암(心菴) 조공(趙公 조두순(趙斗淳))에게 권하였더니, 조공이 처음에는 놀랍고 괴이쩍게 생각하다가 10여 년 후에 벼슬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고, “나보다 낫다.” 하고는, 그날로 서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이 세 분들은 모두 내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게 깨우쳐 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으니, 남에게 권하기는 쉽고 자신이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데, 나는, 절의를 세우고 의리를 위해 죽는 것은 쉬워도, 명철하여 몸을 보존하기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의를 세우는 일에 유의하다가 되지 않는다면 불의에 빠지지도 않고 몸을 보존하는 계책도 스스로 그 가운데 있지만, 오로지 몸을 보존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쓴다면 소인과 비루한 사람의 태도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배우는 자에게는 병이 되고 배우지 않는 자에게는 약이 되니, 명예를 좋아하는 일을 금하면 사대부의 명예와 법도가 실추된다. 이것은 세속의 비루함을 깊이 탄식한 말이다.
‘속된 시골 사람에게나 인정받는 사이비 군자인 향원(鄕愿)은 덕을 해치는 존재다.’라고 하였으니, 성인의 세상에서는 이런 사이비 군자가 덕을 해치는 존재이지만, 세속이 말단으로 떨어진 시대에는 이런 사람 한 명마저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선군의 차기(箚記)에 《명사(明史)》 효종본기(孝宗本紀)의 황후 성씨(皇后姓氏)에 관한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 후 철종조(哲宗朝)에서 염씨 성향(廉氏姓鄕)의 일로 인해 옥사가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사례를 준용하였으니, 이때에야 비로소 선군께서 생각하신 바가 계셨던 것을 알았다.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만년송(萬年松)이 있는데, 키는 몇 자에 불과하나 가지와 줄기는 넓게 퍼져 있다. 풍로(風露)가 세차게 떨어지는 곳에서 다만 땅을 덮고 자랐을 뿐이다. 그 잎을 따서 차를 끓이면 매우 청렬(淸洌)하다. 나는 설악산에 들어가서 차도 마시고 그 소나무도 구경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아홉 수로 극운(極運)을 삼는데, 가장 순탄하기 어려운 것은 59이다. 나는 임신년 겨울에 유핵(乳核)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아 59의 액회(厄會)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의원이 포공영(蒲公英 민들레) 즙을 발라 주어 약효를 보았으니, 약이 어쩌면 사람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닐까. 수를 누리는 사람은 약의 효과를 얻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살 때 시골 사람들이 워낙 무식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초선(蕉扇)을 빌려다가 혼인 도구로 삼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옛날 이퇴계(李退溪)가 시골에서 살 때 면임(面任)이, “방역(坊役)의 명년 당번은 상공 댁의 차례입니다.”라고 고하니, 퇴계 선생은 그저 웃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 나 역시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유감없는 상(喪)이 없다.”고 한다. 경산(經山) 정공(鄭公 정원용(鄭元容))으로 말하면 수는 91세에 이르고 직위는 영상에 올라 작고하였으며, 복을 입는 사람들이 수십여 명이나 되는 호상이었는데도, 오히려 남은 한이 있었다. 이때 임금으로부터 술과 약이 원조(元朝)에 하사되었는데 미처 받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니, 이것이 남은 한이다. 사람의 자식은 부모가 비록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작고했다 하더라도 무궁한 한이 있게 마련이다.
전옥서(典獄署)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으니, “전옥서 안에 유명한 샘이 있는데, 샘 가에 서 있는 묵은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우물 속으로 서려 들어갔다. 죄인이 형장을 맞은 뒤에 그 물로 씻으면 낫지 않는 자가 없다.” 하였다.
이봉환(李鳳煥)이란 자가 전옥서 참봉이 되어 그 구기자나무 뿌리를 파내서 달여 먹었는데, 그 후로는 물이 영험이 없었다. 이봉환이 죄에 걸려 형을 받고 전옥서에 갇히니, 사람들은 구기자나무 뿌리를 파낸 응보라고 지목하였다. 이봉환은 호가 우념(雨念)인데, 글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나는 젊을 때 규장각에서 활자를 주조하는 일을 보살폈다. 그때 거기에 나이 20쯤 된 영리한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총명이 월등하여 물어보면 무슨 일이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여러 날을 대해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성명과 주소를 물어보았지만 우물거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서 탐찰(探察)하였으나 끝내 그의 내력을 알지 못하였다. 지금 30년이 흘렀는데, 인재를 잃은 것이 더욱 한스럽기만 하다.
격포(格浦)를 다시 설치하려고 할 때 도형(圖形)을 가지고 격포에 대한 것을 삼군부(三軍府)에 물었는데, 여러 장신(將臣)들이 모두 그것을 몰랐다. 나는 이때 마침 공소(公所)에 있었는데, 물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 주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도백(道伯)으로 격포를 순찰했기 때문에 연혁(沿革)의 근원이나 요충(要衝)의 긴요한 것들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 만사 가운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것이 이와 같다.
만회암(晩悔菴)은 어떤 중이 옛 절을 폐기하고 새 터에 고쳐 세운 것이다. 계유년 여름에 내가 꿈속에서 절에 올라가니, 관세음보살이 공중에 나타나서 노한 기색을 띠었고 또 몇 마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이 또 어떤 중을 포박하여 이불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매우 괴이하게 생각되어, 중으로 하여금 옛 절을 중수하고 옛 부처를 도로 봉안하게 하였다. 이 절이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난 것 또한 괴이한 일이다.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이 이르기를, “호주(湖州)에서는 오로지 양털만을 이용해서 붓을 만드는데 너무 부드러워서 빳빳한 힘이 없다. 그래서 초서(貂鼠 노랑가슴담비)의 털을 구하여 붓을 만들되 토끼털로 심을 박았는데,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가 사용했던 서수필(鼠鬚筆)은 반드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 퉁퉁해서 들어 올리거나 떨어뜨리거나 하는 운용이 사람의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감동을 받고 만주(灣州)에 있을 때 담비털을 많이 구하여 중국 선비가 준, 이미 묶여진 호주의 양털을 풀어서 섞어가지고 붓을 만들었다. 그 제작에 있어서 약간 수척하게 하고 퉁퉁하지 않게 하였더니 들어 올리고 떨어뜨리고 하는 운용이 과연 법에 맞았다. 그래서 진상하는 물품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종요와 왕희지에게 한번 보여 주지 못하고 또 왕어양과 더불어 한번 평론해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에서 포(脯)를 만드니, 천지(天地)ㆍ악독(岳瀆)ㆍ묘사(廟社)의 제수로 쓰인다. 뜰에 가득히 고기를 널어 놓으면 까마귀와 까치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뭇 새들도 그 위로 날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금지하는 기물을 설치하지 않는데, 오백년 동안 한결같이 그러하다.
걷어다가 저장해 놓아도 쥐에게 먹히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내가 봉상시를 담당했을 때 매번 이런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아마 신령(神靈)이 보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시(詩)와 문(文)을 짓는 데는 피해야 할 여섯 가지 병통이 있으니, 곧 거친 것[荒], 고운 것[姸], 탁한 것[濁], 가벼운 것[輕], 깔끄러운 것[澁], 완고한 것[固]이다. 거칠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탄식이 있고 고우면 겉만 번지르르할 혐의가 있으며, 탁하면 특특해지고 가벼우면 빈약해지며, 깔끄러우면 용납할 수 없고 완고하면 변통할 수 없으니, 이것이 다 병통이다. 이상은 어떤 사람의 말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병통이 있으면 비록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 이백(李白), 두보(杜甫) 같은 높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牴)와 궤(𤙙)는 짐승 이름으로, 마음가짐이 충직(忠直)하다. 명나라 승천문(承天門) 안의 화표주(華表柱)의 정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나는 일찍이 연궁교(燕宮橋) 가에서 이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위휘부(衛輝府) 앞에 있는 돌에도 있다 한다. 이것은 또한 용구자(龍九子) 따위와 같은 것이다.
삼일포(三日浦)는 어떤 세도가가 언덕을 쌓아 관개(灌漑)에 사용하였는데, 수심이 여러 길이다. 이 때문에 영랑(永郞)과 술랑(述郞)의 단서(丹書)가 다 침몰되어 고적(古蹟)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근자에 들으니, 언론에 밀려서 언덕을 허물었더니 단서가 나타났다 한다.
경포대(鏡浦臺)가 무너져서 잠시도 머물러 있기 어려웠는데, 근자에 또 중수하였다. 나는 이에 다시 찾아가 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뒤미처 경포대에 시를 쓰기를,
현도관(玄都觀)에는 지난번에 들렀던 유몽득이 다시 찾아갔고 / 玄觀前來劉夢得
동정호에는 나타난 여순양을 사람들이 몰라본다 / 洞庭不識呂純陽
동정호에는 나타난 여순양을 사람들이 몰라본다 / 洞庭不識呂純陽
하였다.
옛날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陽脩))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를 헐뜯었고, 사마군실(司馬君實 사마광(司馬光))은 맹자(孟子)를 꾸짖었고, 왕안석(王安石)은 《춘추(春秋)》를 비방하였고, 두 정자(程子)는 옛 《대학(大學)》을 뜯어고쳤고, 주자(朱子)는 자하(子夏)의 시서(詩序)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모두 의론이 아직 정론화되지 못했을 때였다. 명말 청초에도 이런 의론이 없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제현(諸賢)들은 처음부터 이의가 없었으니 중국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명유(明儒)가 윤길보(尹吉甫)에 대해 논하기를, “윤길보는 비록 임금을 위하여 숭고(崧高)ㆍ증민(烝民)ㆍ한혁(韓奕)ㆍ강한(江漢) 같은 훌륭한 네 편의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그러나 후처(後妻)에게 미혹되어 그의 아들로 하여금 마름과 연으로 옷을 해 입고 이상조(履霜操)를 짓게 하였으므로 여희(驪姬)의 참소를 받아들인 진(晉)나라 헌공(獻公)에 비하겠으니, 명신(名臣)이 아니다.” 하였다.
이는 달론(達論)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공과 사는 다른 것이고, 또한 오랑캐 험윤(玁狁)을 친 공을 가지고 《시경》에서 “문무를 겸한 윤길보는, 온 나라의 모범일세.[文武吉甫 萬邦爲憲]”라고 칭송을 하였으니, 어찌 명신이 되기에 부족하겠는가.
내가 《어양속집(漁洋續集)》을 보니 필법이 속되지 않아 매우 아끼며 감상하였다. 뒤에 그 《필기(筆記)》를 얻어 보고 황자홍(黃子鴻 황의(黃儀))의 글씨임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박학(博學)하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소사(小詞)를 잘하였다 한다.
중국 봉산현(鳳山縣)에 삼보강(三寶薑)이란 생강이 있다. 이 생강은 명나라 초에 삼보 태감(三寶太監)이 심은 것이라 전하는데,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강이 생산되는 고장은 오직 전주(全州)의 봉상면(鳳翔面) 뿐인데, 혹시 삼보강을 인용해서 이름한 것인가. 또한 기록할 만한 일이다.
남창(南昌) 진홍서(陳弘緖)가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채색 아지랑이가 만 가닥으로 뻗치면서 붉은 쟁반 같은 덩어리가 그 속에서 솟아 나왔는데, 밝은 광채가 출렁거려 안정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햇바퀴를 이루었다. 진홍서가 이내 깨닫기를, ‘붉은 기운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모여서 해가 되는구나. 해는 하루하루 생기는 것이니, 어제의 묵은 해가 오늘의 해로 다시 돋는 게 아니로구나.’ 하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주장을 따랐다.
기운이 모여서 해가 된다는 것은 기담(奇談)으로서야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기운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 모이지 않은 곳에는 어떻게 해를 이룰 수 있겠는가. ‘태양의 기가 양(陽)이 회복될 때를 타서 모일 곳을 얻어 모인다.’고 한다면 그 말은 혹 옳은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붉은 쟁반 같은 덩어리의 밝은 광채는 처음 솟을 때의 현상이고 햇바퀴를 이룬 것은 약간 올라왔을 때의 현상인데, 어떻게, ‘오늘의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일 기운이 모이는 것으로 말한다면 오늘의 기운은 어제의 기운이 아니겠는가. 공자께서,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이치[性與天道]’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은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되기 때문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인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문집은 세 질인데, 초판은 정금남(鄭錦南)이 장수로 촉석성(矗石城)을 지키고 있을 때 판각했고, 재판은 이잠와(李潛窩)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판각했고, 삼판은 영남 감영에서 판각했다. 나의 선고 문정공(文貞公 이계조(李啓朝))께서 오천(梧川)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의 교정본(校正本)을 가지고 인쇄에 부치니, 비로소 일통(一統)의 문자(文字)가 갖추어졌다.
정금남은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이고 이잠와는 참판 이명준(李命俊)인데, 다 백사의 문인이었다.
중국 사람이 나에게 옛날 먹 두 자루를 주었는데, 그 먹에는 유미(隃糜)라는 두 글자가 찍혀져 있었다. 상고해 보면, 당(唐)나라 때 고려에서 송연묵(松煙墨)을 중국에 바쳤는데, 쌀가루와 녹교(鹿膠)를 타서 먹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미라고 하였으니, 이는 지리지(地理志)에 보인다. 유미는 한(漢)나라 때의 고을 이름이고 그 지방에서 석묵(石墨)이 생산되었는데, 혹시 먼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뜻을 취하여 유미라고 하였던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이름이 있어서 함께 행해졌던 것인가. 실로 분변할 수 없는 일이다.
40년 이래로 서울의 사대부들은 다시는 단오선(端午扇)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염조 대선(廉造大扇)을 숭상하다가 뒤에는 심씨 소선(沈氏小扇)을 숭상하고 또 곡두 소선(曲頭小扇)을 숭상하였다.
가지각색의 비단을 부채에 발라서 부치다가 곧 모두 폐지하고, 또 붉은색을 숭상하다가 얼마 안 가서 폐지하였다. 지금은 전부가 소절선(小切扇)을 사용한다. 한때의 유행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기한 짐승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다. 나는 진기한 길짐승은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해정(海淀)에서 앵무새를 본 적이 있었는데, 등은 푸르고 턱 밑은 붉은빛으로 매우 진기하였다. 돌아와서 유관(游觀) 김공(金公 김흥근(金興根))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김공이 깜짝 놀라며, “왜 가져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상고하건대, 광주(廣州)는 강남(江南)이라 붉은 앵무새가 많이 서식한다. 또 오색 앵무새도 서식한다 하니, 그것은 혹시 별종이 아닌지.
무소뿔의 무늬는 동일하지 않다. 뿔이 자랄 때 산을 보면 산의 모양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의 모양이 된다. 만력(萬曆) 연간에 상고현(上高縣)에서 범 한 마리를 잡았는데, 무늬가 온통 조수(鳥獸)처럼 생겼다 한다. 그 범은 혹 산수표(山水豹)의 따위로서 무소의 무늬와 같은 것이었던가.
연경 시장의 꽃가게에는 별로 기이한 품종이 없다. 그런데 불수감(佛手柑)이란 나무는 열매가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고, 높이는 한 길에 불과하여 동이에 담길 정도였다. 키가 크고 굵은 품종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거무스레한 종이에 쓴 금자 도경(金字道經)은 행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면서 글자가 파리대가리처럼 작았는데, 동기창(董其昌)의 글씨였다. 어린 대나무를 원료로 해서 만든 종이에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한 책은 반 행서로 씌어 있으며 겨우 글자 모양을 분변할 수 있는데, 문징명(文徵明)의 글씨였다.
이용면(李龍眠 이공린(李公麟))은 구사(九辭)를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렸고, 당인(唐寅)은 소년행(少年行)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렸으며, 유송년(劉松年)은 아미산(蛾嵋山)ㆍ여산폭포(廬山瀑布)ㆍ검각잔도(劍閣棧道)를 그렸는데, 매우 훌륭하였다. 이들은 족히 동기창의 글씨, 문징명의 글씨와 더불어 막역한 인연을 맺을 수 있겠다.
화주(華州) 사람 곽완위(郭宛委 곽종창(郭宗昌))가 일찍이 요동(遼東)에서 왜국(倭國)의 장수 풍신수길(豐臣秀吉)의 글씨 한 장을 입수하였는데, 행초(行草)가 고아(古雅)하고 창경(蒼勁)하여 진당(晉唐)의 기풍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임진년 후에 전적(典籍)을 요구하는 서신이었는데, 인개족(鱗介族)으로서 이처럼 옛것을 좋아했다 한다.
대개 중국 사람은 왜인(倭人)의 재예(才藝)는 사랑하면서도 수족(水族)으로 지목하였으니, 천하의 공론을 알 수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내부(內府)에 간직된 벼루들을 꺼내서 전대의 연호를 만력이라는 글자로 새기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중에 있는 벼루 하나는 바로 당나라 문종(文宗)이 우세남(虞世南)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이에 조사정(趙士楨)이, 이 벼루를 그대로 보관해서 전대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더불어 아름답게 지냈던 일을 드러내 보이자고 하였다.
연경 시장에서 벼루를 구입하면 이따금 만력 자가 찍힌 벼루가 많았는데, 이것은 그 내부에서 유출된 것이고 실은 만력 연간에 제작된 벼루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옛 벼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대개 옛사람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적은 더욱 값지게 여기는데, 어찌 전대의 연호를 없애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책을 간직할 때 선배들의 도서(圖書)를 없애 버리지 않고 또 나의 도장도 찍지 않는다. 그것은 은밀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成都)에서 밭을 갈던 농부 하나가 설도(薛濤 당(唐)의 여류 시인)의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채전(彩牋) 수만 장을 빙 둘러서 순장을 하였다고 한다. 설도가 만든 설도전(薛濤牋)이 천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거니와, 옛날에 죽은 사람을 들에 장사한 것은 산에 묏자리를 잡는 방법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밭을 가는 사람들이 무덤 속에 매장된 기물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근세에는 장사할 만한 들이 없으므로 명산 대지(名山大地)가 모두 오염되고 있으니, 이 또한 산의 재액이다.
어양산인(漁洋山人 왕사정(王士禎))이 촉(蜀) 땅에 사신 갈 때 검주(劍州)를 지나다가 남문 밖을 보니, 등애묘(鄧艾廟)라는 자그마한 사당이 지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왕사정은, “강백약(姜伯約 강유(姜維))을 제사 지내지 않고 도리어 등애를 제사 지내는구나.” 하고 탄식하며 그 사당을 헐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뒤에 당나라 사람 당언겸(唐彦謙)이 읊은 시에서,
소열제(昭烈帝)가 남긴 백성들은 죽어도 오히려 부끄러워하여 / 昭烈遺黎死尙羞
칼을 들어 돌을 찍으면서 항복을 주장한 초주를 원망할 것이다 / 揮刀斫石恨譙周
그런데 어째서 천년 후에 촉나라를 멸망시킨 등애의 사당을 세워서 / 如何千載留遺廟
무후 제갈량(諸葛亮)과 대등하게 파산에 제사를 지내는가 / 血食巴山伴武侯
칼을 들어 돌을 찍으면서 항복을 주장한 초주를 원망할 것이다 / 揮刀斫石恨譙周
그런데 어째서 천년 후에 촉나라를 멸망시킨 등애의 사당을 세워서 / 如何千載留遺廟
무후 제갈량(諸葛亮)과 대등하게 파산에 제사를 지내는가 / 血食巴山伴武侯
라고 한 것을 보고, “나보다 앞서 이미 말하였구나.”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아래에 붙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 김추사(金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공방(貢房)의 소금 되는 되가 매우 고기(古器)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갑술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옹원(司饔院)에서 오래된 소금 되를 매일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5대째 궁중에서 소금 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금 되의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다.” 하였다. 내가 그 되를 가져다가 보았더니, 바로 옛 동준(銅尊)으로서 뚜껑이 있었으며 푸른빛이 밝고 윤기가 나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이와 같은 것이 다섯 개이고 그중 하나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사재감(司宰監)의 공인(貢人)에게 있다고 하니, 김추사가 말한 것이 바로 이 소금 되였던 것이다.
진보현(眞寶縣)의 수정사(修定寺)에 있는 석벽(石壁)이 장마 때 물에 씻겨서 떨어지니, 돌이 조각조각 쪼개졌는데 완연히 꽃나무 무늬가 있어 마치 신필(神筆)의 그림이 나오는 듯했다. 연경(燕京) 십삼산(十三山)에 이런 돌이 있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국새(國璽)는 명나라에서 준 것인데,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병자년에 청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뒤에 자문(咨文) 등에서 모사하여 연경에서 다시 주조(鑄造)하였다. 그런데 계유년의 경복궁(景福宮) 화재 때 그 소재를 몰랐다가 와력(瓦礫) 속에서 찾아내니, 귀뉴(龜紐)는 녹아 버렸으나 인문(印文)은 온전하였다. 그래서 다시 도금하여 예전대로 봉모당(奉謨堂)에 간직하였다. 상감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전국보(傳國寶)는 태조조(太祖朝)에서 교명(敎命) 등에 사용하였으니, 이것 또한 선대의 뜻과 일을 계승하는 것이다.” 하셨다.
을해년 세자 책봉 때 이 국새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이 무엇을 취사선택할 때에는 반드시 ‘흥(興)’이니 ‘항(恒)’이니 하니, 김공 수흥(金公壽興)과 김공 수항(金公壽恒) 형제가 동시에 정승에 올랐기 때문이다. 영어(穎漁 김병국(金炳國))가 정승에 오른 뒤 그 백씨인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서 다시 ‘학(學)’과 ‘국(國)’을 내놓았다.” 하였다.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 발문에 이르기를, “차(茶)가 옛 사서(史書)에 나타난 것은 위(魏)ㆍ진(晉) 이후부터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 초 한굉(韓翃)의 사다표(謝茶表)에, ‘오(吳)나라 임금이 어진 이를 예우하자 차[茗]를 차려 놓았다는 소문이 들렸고, 진(晉)나라 신하는 손님을 사랑하여 곧 차를 대접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구양공이 인용한 것은 고작 이것이다. 《운곡잡기(雲谷雜記)》에는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있는 ‘명채(茗菜)’라는 글자를 인용하였고, 《동약(僮約)》에는 ‘무양다(武陽茶)’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위ㆍ진 이전의 일들이다. 그리고 《야객총서(野客叢書)》에는 《주례(周禮)》의 ‘다가(茶檟)’라는 ‘다(茶)’를 말하였으니, 이것은 육경(六經) 중의 일이다.
동아현(東阿縣)의 물은 갖풀을 달이는 데 가장 알맞다. 그러므로 아교(阿膠)라고 하는데, 아교의 명목은 하나뿐이 아니다. 어교(魚膠), 수교(獸膠), 조교(鳥膠), 인교(人膠)가 있는데, 인교는 뱀을 말한다. 난교(鸞膠)는 특히 거문고 줄에 합당하다.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기린 뿔과 봉새 부리를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데, 아교를 고아 거문고 줄 이으면 기묘한 소리가 난다.[麟角鳳觜世莫識 煎膠續絃奇自現]” 하였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비단 도포를 입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좋은 책은 매양 표상금(縹緗錦)으로 표장을 하는 것이니, 나는 장차 나의 글을 보호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진(晉)나라의 학륭(郝隆)이 햇볕에 배를 드러내 놓은 채, ‘뱃속의 책을 말린다.’고 한 고사와 같은 뜻이다.
보이차(普洱茶)는 운남성(雲南省)에서 생산된다. 몇 가지 종류가 있으니, 목방(木邦)에서 생산되는 목방차(木邦茶)와 보이(普洱)에서 생산되는 보이차가 그것이다. 목방차는 덩어리를 만든 다음 보이차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는데, 그 지역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보이차의 진품(珍品)에는 모첨(毛尖), 아다(芽茶), 여아(女兒) 등의 이름이 있다. 모첨은 곡우(穀雨) 전에 따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않고, 아다는 약간 자라면 따서 덩어리로 만들되 2냥(兩) 또는 4냥을 기준으로 삼는데, 운남성 사람들이 중하게 여긴다. 여아도 아다의 종류인데 곡우 뒤에 따서 1근(觔)에서 10근까지를 한 덩어리로 만든다. 이민족의 처녀들이 차를 은화(銀貨)로 바꾸어 모아서 시집 밑천을 삼기 때문에 여아차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 나머지는 조보엽(粗普葉)이라 하는데, 모두 운남성 안의 곳곳에서 판매한다. 그리고 거친 것을 취하여 고약처럼 고아서 떡을 만드는데,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내어 선물용으로 준비한다. 또한 예주차(蕊珠茶)라는 것이 있는데, 열병(熱病)을 다스릴 수 있으니 항주(杭州)에서 생산되는 용정차(龍井茶)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향이 너무 강렬하고 차성(茶性)이 또 극히 차가우며 맛이 쓴 쪽에 가까워서, 용정차의 중화(中和)한 기운이 없다. 그 밖에는 회화나무와 버드나무의 겨우살이를 따서 차 대신 달여 마신다.
내가 두 번째 연경에 들어갔을 때 찻가게의 사람에게 자세히 들었는데, 상품(上品)은 용정차이고, 그다음은 덩어리를 짓지 않은 보이차이며, 또 그다음은 2냥 또는 4냥으로 덩어리를 지은 것이다. 그 밖의 1근에서 10근까지를 한 덩어리로 만든 것이나 고약처럼 고아서 만든 것들은 모두 논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도장 파는 돌이라면 매양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수산(壽山)에서 생산되는 돌을 꼽는다.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수산의 돌을 선물로 준다. 그것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청전현(靑田縣)에서 생산되는 돌과 수산에서 생산되는 돌이 진귀(珍貴)하기 때문이다. 이들 돌은 값이 가장 높아서 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세상에 나도는 도장 돌들은 반드시 수산의 돌이라 칭하므로, 청전의 돌은 보지 못하겠다.
연경(燕京)의 조신(朝臣)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는 필체는 철보(鐵保)의 필체이고, 석각(石刻)과 묵본(墨本)은 모두 가짜이다.
찰례부(察禮部)에서 나에게 자그마한 글씨 한 폭을 선물하여 크게 생색을 내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얼른 그 글씨 획을 보았더니 틀림없이 말린 물고기 뼈와 같았는데, 자세히 살펴본즉 마치 강유(剛柔)가 있는 연철(鍊鐵)과 같았으니 참으로 천연적으로 얻어진 심획(心畫)이었다.
한 역원(驛員)이 이 글씨를 빌려서 구들 위에 걸어 놓자 청나라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고 은자(銀子) 50냥으로 사기를 원하였으니, 중국에서 서화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거개 이와 같았다.
최공 국보(崔公國輔)는 문사(文士)였는데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아무 상공(相公)을 뵈었더니, 막 한 재상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대화 내용은 모두 서책의 제목과 옛사람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네. 나는 그것을 한바탕 들었지만 무슨 책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겠네. 그대는 혹시 알겠는가. 나는 문자를 약간 이해하나 평생 해 온 공부는 경사(經史)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는데, 지금 일자무식이 되었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것은 다름이 아닐세. 근일에 고증학(考證學)이 성행하여 말하는 대상이 패관 총서(稗官叢書)와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세. 후생들의 학문이 병들었네.” 하였다.
이 말은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을 경각시키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일엽편주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집이 강남의 단풍잎 속 마을에 있다.[扁舟一棹歸何處 家在江南黃葉村]”라는 시구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뒤에 내가 연경에 가서 보니 물가가 온통 누런 단풍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백양목(白楊木)이었다. 남경(南京)의 풍경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유항(柳巷)’이란 뜻도 대충 이해가 간다. 마을 앞에는 반드시 항구(巷溝)가 있어 버드나무를 심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문전에 버드나무 심어 깊이 골을 이루었다.[門前種柳深成巷]”라는 것이다.
내가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갔다가 송면촌(松面村)을 지나고 화양동(華陽洞)을 거쳐서 돌아왔는데, 호서(湖西)에서 살기 좋은 터는 바로 송면촌이었다. 속리산이 뒤를 막아 주고 화양동이 수구(水口)가 되었으니, 평상시에나 난리 시에나 살 만한 곳이었다. 그다음은 초평(草坪)이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대추나무가 그들먹하였다. 보은(報恩) 한 경내에서 매년 가을마다 흥판(興販)을 하는데 거래량이 7000석이라 하니, 그 밖의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지부지기[瓦松]는 흔히 고옥(古屋)에서 난다. 옛날 사람이, ‘사환가(仕宦家)에서 난다.’고 한 말은 잘못이다. 여항(閭巷)에는 고옥이 없으므로 나지 않는다. 오직 사우(祠宇)에만은 나니, 사우는 항상 수리를 하지 않아 고옥이 된 때문에 그렇다.
차 이름은 하나뿐이 아니다. 일본 차에도 맛 좋은 차가 있으니, 그중에서도 능삼(綾森), 응조(鷹爪), 유로(柳露), 매로(梅露), 국로(菊露), 초적(初摘), 백문(白文), 명석(明昔), 명월(明月), 청풍(淸風), 박홍(薄紅), 엽로(葉老), 낙우(樂友), 백발(白髮), 남산수(南山壽) 등의 이름을 가진 차가 가장 좋다.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상공(相公)이 바둑을 잘 두는 어떤 참판과 종종 대국을 하는데, 대국을 할 때마다 상공이 몇 집씩을 이겼다. 하루는 나라 안에서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한 명관(名官)이 찾아와 뵈었다. 상공이 앞서 대국하던 자더러 그 바둑 솜씨의 고하를 시험해 보게 하였더니, 뒤에 온 자는 그 솜씨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치선(置先)을 하였다. 상공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나는 영공(令公)과 바둑을 둘 때 항상 굽혀 치선을 하는 사람인데, 영공은 어째서 저분한테 스스로 굽히오?” 하니, 명관이, “본래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둡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공은 비로소 깨닫고 앞서 대국하던 자를 나무라기를, “대감께서 잘못하셨습니다. 어째서 노부(老夫)를 그처럼 속일 수 있단 말이오?” 하였다. 그리고 상공은 그 참판과 평생 다시는 대국을 하지 않았다.
춘산(春山 김홍근(金弘根)) 상공이 어떤 고수와 대국을 하였는데, 계속 졌다. 그러자 상공이 바둑판을 밀쳐놓고 말하기를, “그대의 바둑 솜씨가 뛰어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네. 나를 계속 지게 하면 그대에게 무슨 빛이 나는가. 실로 기가(棋家)의 심심풀이하는 법이 아닐세.”라고 하였으며, 그 뒤로 다시는 그와 더불어 대국을 하지 않았다.
두 상공의 규모는 비록 다르나, 선배들의 일로서 흠모할 만하다.
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시를 짓기를,
귤나무에는 바람 불고 대숲에는 비 떨어지는데 / 橘柚風來竹雨零
가시울타리 쳐진 깊숙한 곳엔 등잔불빛 푸르네 / 棘籬深處一燈靑
하늘과 잇닿은 깊은 물 방향을 흐리게 하기에 / 連天積水迷方所
밤이 되면 북두칠성을 길이 우러러 보옵니다 / 夜來長瞻北斗星
가시울타리 쳐진 깊숙한 곳엔 등잔불빛 푸르네 / 棘籬深處一燈靑
하늘과 잇닿은 깊은 물 방향을 흐리게 하기에 / 連天積水迷方所
밤이 되면 북두칠성을 길이 우러러 보옵니다 / 夜來長瞻北斗星
하였다. 이 시가 궁중으로 흘러들어 가 임금을 감동시켜, 몽오는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옛날 사람들은 시를 가지고 임금을 감동시킨 일이 많았다.
신사년에 나는 처음으로 중화(中和)에 유배되었는데, 주인집 벽을 보니 시가 적혀 있기를,
창문은 서령의 천추에 쌓인 눈빛을 머금고 / 窓含西嶺千秋雪
문전엔 동오의 만리에서 온 배를 정박시켰다 / 門泊東吳萬里船
문전엔 동오의 만리에서 온 배를 정박시켰다 / 門泊東吳萬里船
하였다. 이에 나는 깜짝 놀라며, “나는 반드시 유배지를 옮기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거제(巨濟)로 옮겨졌다. 거제로 갈 때 안산(安山) 지경을 경유하였는데, 꿈에 김영초(金穎樵 김병학(金炳學))를 노상에서 만났다. 그 이튿날 상국(相國)의 묘소를 지나게 되었고 이날은 바로 상공의 대기일(大朞日)이었으며 또 추석이어서 막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었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세속에서 남자를 사나해(似羅海 사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읍(邑)의 큰 것을 말한다. 통영(統營)을 지날 때 들으니 여자를 가사나해(假似羅海 가시나이)라고 불렀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여병(女兵)을 이용해서 왜적을 물리쳤는데, 이 때문에 일상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신발 장수에 대한 호칭의 유래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과 정병가(正兵家)에서 신발 장수를 불러 대가를 바치라고 한 데서 나왔다. 이 때문에 ‘값바치[價捧上赤]’라 부른다.
정묘조(正廟朝)에 각신(閣臣)이 사사로이 임금을 만났을 때 김공 종수(金公鍾秀)가 윤공 행임(尹公行恁)을 향하여 ‘소[牛]’라고 하니, 윤공은 김공을 향하여 ‘도깨비[魍魎子]’라 하였다. 정조가 변명하도록 하자 윤공이, “사서(史書)에 ‘윤탁을 「소」라고 하지 말라.[無以尹鐸爲少]’ 하였고, 역서(曆書)에 ‘도깨비는 김[甲子金]’이라 하였으니, 신은 소가 아니고 김종수는 도깨비입니다.” 하니, 듣는 자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양문(梁門)의 어느 대신 하나가 책을 많이 모았다가 만년에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는 책은 원래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받은 자가 수권(首卷)의 등쪽에 춘도(春圖)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대신은, “그것은 바로 불을 피하는 법술이다.” 하였다 한다.
만력 황제(萬曆皇帝 명(明)의 신종(神宗))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매번 책의 첫머리에 찍었다. 을해년 내가 연경에 들어갔을 때 송가장(宋家莊)에서 《송원강목(宋元綱目)》 1질을 보고는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의 집에서 흘러나온 구경 칠판(九經漆板)에도 이 광운지보가 찍혀 있었다. 또 한 향촌(鄕村)에서 본 대판(大板)의 《사문유취(事文類聚)》 1질은 당세에 희귀한 보배였다.
판서 김세호(金世鎬)의 향장(鄕莊)은 나의 집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집에서 당판(唐板)의 《강목(綱目)》 1질을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10세 동안 전해 내려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마판(馬板)으로 삼아 그 흔적이 많이 있으나, 조금도 결락된 부분이 없이 완전하다. 나는 평소에 이런 말을 들었었는데 오늘날 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상공(相公)은 만년에 본인이 지어 놓은 시문을 보기 좋아하였다. 그 까닭을 우러러 여쭈었더니 대답하기를, “지어 놓은 시문은 보기가 매우 쉬우니, 마음이 수고롭지 않음일세.”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보통으로 들었는데, 노경에는 과연 낯선 글을 보는 것이 눈에 익은 글을 보는 것만 못하였다. 그것은 소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비우어(肥愚魚)는 서남해에서 생산되는데 통칭 청어(靑魚)라 한다. 서수라(西水羅)는 동해에 가까운데 더러 청어가 잡힌다. 그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너비는 대여섯 치 되며 그 색깔은 짙푸른데 구우면 흘러나온 기름이 불을 끌 정도이고 맛은 보통이 아니다.
내가 홍원(洪原) 수령으로 나가서 고을을 순행할 때 북어별(北魚鱉)이 비어(肥魚) 속에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서 급히 잡아 오게 하였더니, 어부가 벌써 바다에 놓아 버렸다. 보고도 못 먹은 것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선물받은 물고기를 연못에 놓아준 것과는 다르나, 어부가 폐단을 막은 것은 제대로 된 일이다.
부(蚨 물나비)는 물가 부들에서 기생하는 곤충인데, 그 곤충은 헤어졌다가 다시 합하고 함께 부들 위에 붙어 있다.
청동(靑銅 돈)을 부라고 하는 것은 그 쌓인 청동이 흩어졌다가 다시 들어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옛날 한 부자가 청동 만 전을 표시를 하여 흩었는데 10년이 채 안 되어서 전액이 다시 들어왔다 하니, 아마 이것을 이름인가.
숭례문(崇禮門)이란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나온 말이다.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 대서(後板大書)는 공조 판서 유진동(柳辰仝)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유진동은 대를 잘 그렸으므로 호를 죽당(竹堂)이라 하였다. 유진동이 아이 때 그 부형이 그림을 못 그리게 하니 눈물로 댓잎을 그렸다 한다. 그의 신도비는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찬하였다.
함경도 감영 안채의 아랫방은 신령스러워 영험이 많다고 한다. 옛날에 판서 이희갑(李羲甲)이 함경 감사로 있을 때 두 어린 딸이 일시에 함께 그 방으로 들어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후로는 그 신을 높이 받들어 무슨 물건이든 들어오기만 하면 반드시 먼저 이 방의 신에게 올렸다.
판서 김세균(金世均)이 함경 감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바로 판서 이희갑의 질녀였다. 그 부인은 감사를 따라 내려간 뒤에 그 신위를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에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어떤 두 여자가 부인의 좌우에 눕는 것이었다. 부인이, “웬 사람이냐?” 하고 말을 꺼내니, 두 여자는 일시에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바로 사촌 간인데, 다른 사람이 받드는 곳을 그대는 못 본 체하니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영렬(營列)은 폐지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돌보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니, 두 여자가,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간여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의복(衣服)과 자장(資粧) 등속을 푸짐하게 마련하여 두 보따리를 그 신위의 곁에 놓았더니, 다시는 별일이 없었고 부인의 병도 나았다.
이에 앞서 내가 함경 감영에 있을 때 부인이 혼자 마루 머리에 앉아 있었는데, 곶감 한 개가 앞에 던져졌다. 마음속으로 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지켜보게 하고 조금 후에 아랫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곶감이 과연 한 개가 비었다. 그래서 비로소 영험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로는 후하게 받들었더니 다시는 다른 일이 없었다.
옛날 심일송(沈一松 심희수(沈喜壽))은 이인(異人)인 첩(妾)을 얻어 그의 내조를 많이 입었다. 이 이야기는 야사에 실려 있다.
판서 조영국(趙榮國)도 이인을 얻어 첩으로 삼았다. 그런데 단지 전설만 있고 기록은 없으니, 유감이다.
인조조(仁祖朝)에 연양(延陽 이귀(李貴))의 사당을 짓도록 명하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이 아뢰기를, “신들 존사(尊師)의 사당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데 먼저 문생(門生)의 사당을 세우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사당과 서천(西川) 정공(鄭公)의 사당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 두 사우(祠宇)는 지금도 존재한다. 백사 선생의 사당은 7세에 이르도록 전해 오다가 뒤에 셋집이 되었는데, 내가 되찾아서 보수하였다.
전에 세들어 살던 사람은 바로 구씨(具氏) 집안이었으니, 구(具) 재상과 공주(公主)의 사당을 함께 받든 지 오래였기 때문에 고적(古蹟)이 많다. 아교풀에 갠 금박 가루로 송학(松鶴)을 그린 병풍 두 폭이 있는데, 이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그린 것으로서 공주에게 하사된 것이다. 그 밖에 제기(祭器)가 있는데, 도자기ㆍ접시ㆍ숟가락 등 수십 개로서 큰 것은 주척(周尺)으로 2척 남짓 되었다. 다식판(茶食板)도 크고 작은 것이 몇 개 있는데 모두 오래된 물건이었다. 임금이 거둥할 때 쓰는 평상(平床)도 한 개 있었는데, 근일에 없어졌다.
서천(西川)의 옛집은 회현동(會賢洞)에 있는데, 여러 번 집주인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사손(祀孫)이 들어가서 살고 있으며 사우(祠宇)가 우뚝 솟아 있다. ‘회현동의 정씨 가문’이라는 칭호는 서천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정동(貞洞)의 판서 오취선(吳取善)의 집 문밖에 있는 우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우물에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로는 집주인이 자주 바뀌고 그 집에서 자주 과거에 오르는 자가 나왔다. 그 수가 거의 아홉에 차자 다시는 과거에 오르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강 합하(姜閤下)의 집이 되었다.
환재(瓛齋) 박공(朴公 박규수(朴珪壽))은 농담을 잘했다. 증광시(增廣試)를 치른 뒤에 나에게 농담하기를, “어떤 사람이 용 서른세 마리가 마구간에 있는 꿈을 꾸고 이해 증광 초시의 합격을 마음속으로 자부하였다네. 그런데 회시(會試) 때에 이르러서는 매일 용 한 마리가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는구먼. 회시장에 들어가는 날에는 단지 한 마리 용만 남았더라네. 그러다가 회시장 안에서 책 상자에 의지하여 한 마리 용마저 끝내 끌려가는 꿈을 꾸고 그 사람은 탄식해 마지않았다는구먼.” 하였다. 이 말은 《신제해(新齊諧)》에 증보할 만하다.
담배는 여송국(呂宋國)에서 나왔다. 이 사실은 필기(筆記)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그 품종에 대한 기록은 보지 못하겠다. 연전에 왜선(倭船)에 들어가서 여송국의 담배를 보았는데, 품종이 우리나라 영남의 담배와 같고 너무 독해서 피울 수가 없었으니, 그 품종은 분명 이것이 유출된 것이다.
자칭 예를 안다고 하는 호중(湖中)의 한 사대부 집안이 먼저 외간상(外艱喪)을 만나고 뒤에 내간상(內艱喪)을 만났는데, 상제가 곡을 할 때 ‘비고(妣考)’라고 소리를 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상제가 답하기를, “외간상에 ‘애고(哀考)’라고 하는데 내간상에 어찌 비(妣)를 칭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다.
요즘 예를 안다는 것은 모두 이와 같으니, 매우 가소롭다.
내가 아이 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하나를 보았다. 성은 이(李)이고 호는 기야(箕埜)였는데, 지극히 연로하고 또 술도 잘 마셨다. 그는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남의 시권(試券)을 써 주기도 하였는데, 흥이 나면 중간에 매화도 그리고 대나무도 그려서 남을 낭패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과장에 들어가면 술을 금하였으니,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 증상이 발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 불렀다.
단농 상서(丹農尙書)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최군 희진(崔君喜鎭)이 그 막중(幕中)에 있으면서 밭 사이에서 고려자기 하나를 얻었다. 높이는 한 자쯤 되고 너비도 그와 같았는데 고색이 창연하여 매우 보배스러웠다. 이 자기를 규재(圭齋) 남 태사(南太史 남병철(南秉哲))에게 바치니, 남 태사 또한 애지중지하였다.
남공이 죽은 뒤에 이 자기는 하인들의 거처에서 가래침을 뱉는 그릇이 되었으며 반은 이미 떨어져 나갔다. 최군이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자주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거문고도 따라서 없어진다’라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고려의 사대부와 자기는 가짜가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전인들의 필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장(大將) 이완식(李完植)이 청소(晴沼) 조공(趙公 조용화(趙容和))에게 와서 조문을 하는데 그 집이 워낙 좁아서 갓이 대질려 부서지고 모자만 남았다. 이공은 갓이 부서진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조문하는 일을 예식대로 행하고 수작하는 데서도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조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군교(軍校) 무리가 새 갓을 이미 대령하고 있었는데, 그는 또한 돌아보지 않은 채 받아 썼을 뿐이다. 여기에서 장신(將臣)의 큰 기량을 볼 수 있고, 또한 영문(營門)에 모든 기구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공은 항상 이공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심두실(沈斗室 심상규(沈象奎))이 이름을 지을 때 정조가 규(奎) 자를 하사하고 자를 치교(穉敎)라고 하였으니, 곧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의 뜻이 담긴 것이다.
심암(心菴 조두순(趙斗淳))이 항상 심공의 일을 말하기를, “이 어른은 젊을 때 남숙 초도포(藍熟綃道袍)에 부죽립(付竹笠)을 쓰고 오려마(烏驪馬)에 걸터앉아, 화려한 안장이 번쩍번쩍 빛을 내었고 하인 10여 명이 줄줄이 따르면서 종로거리를 지나갔다. 이때 이 어른의 벼슬은 이조 참판에 직제학(直提學)이었다.” 하였다. 심암은 이렇게 말하면서 몹시 부러워하였는데, 그는 직제학을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자주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합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직제학을 지내지 못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조공이 문득 정색을 하며, “괴이한 일이지, 괴이한 일이지.” 하였다. 선배들은 벼슬에 미련을 갖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임오년 가을에 나는 중화(中和)로부터 거제(巨濟)로 향하면서 안산점(安山店)에서 잤는데, 이날 밤 꿈에 걸어서 논밭 사이의 길에 당도하니 한 대신(大臣)이 앞에 와서 읍을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바로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 상공(相公)이었으며 흰 도포에 흰 띠를 띠었는데 안색이 초췌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며, “합하를 여기에서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하니, 공도 이와 같이 답하였다.
이튿날 지나가는 길이 완연히 꿈에서 지나던 곳과 같았다. 앞 언덕을 바라보니 산소 하나가 있었는데, 석물 모습이 대신의 묘소와 같았다. 막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바로 김공의 산소였다. 친구와 이처럼 의기가 투합하다니,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다. 때는 추석날이었다.
홍공(洪公) 아무개는 병자호란 때 종사관으로 순절하면서 편지를 써 말 머리에 묶어서 집에 보냈는데, 뒤에 영험이 종종 집에 나타나서 어버이 봉양하는 예절을 항상 부인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그 어버이를 모시고 평상시처럼 수작을 하였다. 모친이 그 형체를 보기를 원하니, 누차 거절하다가 끝내는 거울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모친이 병을 앓자, 그의 백씨에게 말하기를, “금번 병환은 회생할 수 없으니, 속히 장례 준비를 하십시오.” 하였다. 그리고 상을 당한 뒤에는 백씨가 곡을 하면 그 곁에서 또 곡소리를 내어 삼년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패(牌 합격증서)를 받아 사당에 들어가니, 사당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신은(新恩)’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세 번 났으며, 그때부터 아무런 영향(影響)이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에게서 자세히 들었다.
수석(修石) 정기선(鄭基善)이 남한 유수(南漢留守)로 있을 때 큰 범이 밤에 아헌(衙軒)에 들어와 유수가 앉는 곳에 앉았는데, 며칠 안 가서 대부인(大夫人)이 병으로 영중(營中)에서 죽었다.
송석(松石) 김학성(金學性)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여러 손님들과 마루 위에서 밤을 지샜는데, 큰 구렁이가 들보에서 떨어져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그 뒤 그 부친의 병환이 점점 나아서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두 분의 일은 길흉이 같지 않으니, 모든 일은 사람 운세의 통색(通塞)에 매여 있고 그 재앙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내를 순시하는 감사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경기가 다른 도보다 으뜸이다. 경기 고을 수령들의 내찬(內饌)은 모두 당일에 내려 보내는데, 세도가의 문객이 주인집의 찬을 얻어먹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선대인께서는 경기 감사에서 경상 감사로 옮겨 가셨는데, 관내를 순시하고 돌아오실 때마다 경기의 일을 말씀하셨다.
내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관내를 순시하면서 보니, 모든 규모가 경기 관내와 못한 점이 없었으며 사치풍의 성행이 경기 고을과 서로 백중을 이루었다.
영남 감영의 보선고(補饍庫)는 한 영내에서 소중하게 여기므로, 감사가 아니면 얻어먹을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맏아들만이 얻어먹게 되고, 이 밖에는 비록 부형이라 하더라도 얻어먹을 수 없다. 감영의 규례가 예전부터 이와 같았다.
나는 일찍이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근자에는 이 보선고가 폐지되고 일반 주방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감영의 모양새가 쓸쓸하다. 고속(庫屬)이 넉넉하지 못한 것 또한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내의 역마(驛馬)는 단지 감사의 부인에 대해서만 거행(擧行)하고 기타에 대해서는 거행하지 않으니, 위의 일과 유사하다.
춘천(春川) 실운(室雲)에 있는 감로수(甘露樹)는 하지(夏至) 때에 꿀 같은 즙이 나오는데, 그것을 먹으면 다리 힘이 튼튼해진다고 한다. 동협(東峽) 사람들은 그 효과를 많이 본다. 나무 이름은 속칭 색수리(塞水里)이다. 《사기(史記)》를 상고해 보면, “정경(鄭敬)이 군(郡)의 공조 도위(工曹都尉)가 되었을 때 청사 앞에 감로(甘露) 같은 이슬이 맺힌 회화나무가 있었다. 그러자 이속(吏屬)들은 모두, ‘명부(明府)의 선정의 소치이다.’ 하였는데, 정경만은, ‘명부의 정사가 어떻게 감로를 내리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무의 즙일 뿐이다.’ 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이와 같은 것인가.
탐라(耽羅)의 바다 속에 옥두지(玉杜支 옥으로 된 뒤주)가 있는데, 전설에, ‘쌀 한 줌을 던지면 문득 가득 찬다.’ 하고, 또 ‘백씨(白氏) 성을 가진 목사(牧使)가 건져 낸다.’고 한다.
그런데 근일에 백낙연(白樂淵)이 탐라 목사가 되어 수군(水軍)을 많이 동원해서 줄로 그 뒤주의 다리 부분을 묶어서 들어 올리려고 할 때에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역부(役夫)들이 도피하였다 한다. 그 물건은 필시 시기를 기다리는 물건일 것이리라.
중국 사람 주만청(周萬淸)은 초서를 잘 썼다. 호산(壺山) 박 상공(朴相公)이 소시에 주만청의 초서 한 폭을 얻어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하루는 김추사(金秋史)가 갑자기 와서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벽을 보더니, “여기 있었구나. 여기 있었구나.” 하고는 곧 서폭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가 버렸다. 뒤에 박공이 또 한 폭을 벽에 걸어 놓았는데, 내가 박공을 뵈려고 가서 문에 들어서면서 크게 놀라 그 서폭을 바라보았다. 이에 박공은 웃으며 김추사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대의 성벽도 알 만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감히 그 서폭을 달라고 청하지 못하였다. 뒤에 공의 성복(成服)하는 날 내가 가서 참석하였는데, 그 서폭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그 서폭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흘러간 세월에 대한 감회가 이와 같다.
김추사가 임종 시에 벽에 있는 자그마한 난초 그림 한 폭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이 화폭이 보배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사람의 기벽(嗜癖)은 임종 시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일본 사람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갑신년에 개성 사람 하나가 고총(古塚)을 파 들어가다가 왕릉에서 옥대(玉帶)를 발굴하고 또 운학(雲鶴)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냥이나 나갔다. 그때는 원(元)나라 장인(匠人)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그 만듦새가 여느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더러운 기운이 깊이 스며 있는 것조차 모르고 좌석 주변에 놓아두기를 좋아하는데, 종래의 중국 사람들의 기록에서는 이를 비난한 경우가 많았다.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은 집안의 변고를 당하여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서거하였는데, 임종 시에 시를 읊기를,
육십구 년간의 일 만사가 헛된 것 / 六十九年萬事空
인간의 한 꿈은 비와 바람일 뿐 / 人間一夢雨兼風
천추에 청산의 뼈를 누가 알겠는가 / 千秋誰識靑山骨
백일은 무궁히 붉은 마음 비춰주리 / 白日無窮照赤衷
인간의 한 꿈은 비와 바람일 뿐 / 人間一夢雨兼風
천추에 청산의 뼈를 누가 알겠는가 / 千秋誰識靑山骨
백일은 무궁히 붉은 마음 비춰주리 / 白日無窮照赤衷
하였으니, 허 급제(許及第) 집안의 일과 동일하다.
을유년 봄에 문후(問候)하는 반열에 달려가서 보니, 삼정승과 호조 및 선혜청의 당상관들이 마치 경사를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았더니, 하는 말들은 바로 200석의 쌀을 실은 배가 경강(京江)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반록(頒祿)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나라의 재정이 곤궁함을 알 수 있었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묘가 상주(尙州)에 있는데, 사태로 떨어져 나가서 봉분이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올 병자년에 이장을 하였다. 이장을 할 때에 관을 열어 보니, 교대(絞帶)가 새 것과 같고 얼굴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300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지리(地理)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부마도위(駙馬都尉) 신익성(申翊聖)이 옥관자가 붙은 망건을 벗어서 공주 앞에 던지면서, “나는 이 원수 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大提學)을 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 말이 궁중으로 흘러 들어가 선조가 신공더러 대제학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신공이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대제학을 추천하였으니, 그대 자신이 대제학이 된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하였다.
금상 경진년에 왕세자에 대한 송두문(送痘文)을 나더러 지어 올리게 하였다. 나는 대제학이 아니므로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결국 짓는 일을 면하지 못하였다.
전후의 일이 비록 다르나,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성군(靈城君) 박공(朴公 박문수(朴文秀))이 길에서 이조 판서를 만나 묻기를, “오늘은 어떤 벼슬자리를 냈소?” 하니, “문임(文任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제학) 자리를 냈소이다.” 하였다. 이에 “누굽니까?” 하니, “아무아무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박공은 손을 들어서, “그런 인물과 같군요.”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는 크게 화를 내고 오천공(梧川公 이종성(李宗城))을 찾아뵙고 그 이야기를 하니, 오천공이 말하기를 “그런 인물이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니, 영성의 말은 반드시 이런 뜻일 것이오.” 하였다.
이일학(二日瘧 이틀거리)을 치료하는 신기한 비방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 살아 있는 대귀(大龜)의 등 위에 구멍 셋을 뚫고 구멍마다 석웅황(石雄黃) 3돈쭝을 넣은 다음 짚으로 싸고 진흙을 발라서 약성이 남아 있도록 불에 익힌다. 이것을 학질을 앓는 자가 그 병을 앓는 날 이른 아침에 1돈쭝씩 소주와 같이 먹으면, 세 차례를 지나지 않아서 곧 낫는다. -대귀는 세속에서, 아주 큰 남생이를 일컫는 말이다.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에 정승이 가장 많다. 처음에는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과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형제가 함께 상부(相府)에 있었고, 뒤에는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와 영어(穎漁 김병국(金炳國)) 형제가 함께 상부에 있었으며, 지금은 김공 병덕(金公炳德)과 김공 병시(金公炳始) 종형제가 함께 상부에 있다.
문충공(文忠公) 김재찬(金載瓚)이 사제(私第)에 있을 때 하루는 소패(召牌)를 내었는데, 호조 낭관이 와서 뜰에 서자 분부하기를, “나의 약현(藥峴) 집 행랑채가 다 무너졌으니 속히 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며칠 안 가서 다 수리하였으니, 옛날 법에 대신의 집은 담부(淡府)이기 때문이다. 근일에는 이 법이 없는데, 상부(相府)의 비중이 가벼워진 원인은 실로 이 때문이다.
신독재(愼獨齋) 김공(金公 김집(金集))은 본래 적자가 없어서 서자로 적통을 이었다. 그 적통을 이은 서자는 봉내(封內)를 쓸 적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을 증조(曾祖)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를 조(祖)로, 신독재를 부(父)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을 외조(外祖)로 해서 다 적고 나서는 통곡하기를,
한 번 죽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인데 / 一死都無事
평생토록 몸을 가진 것이 한이로다 / 平生恨有身
평생토록 몸을 가진 것이 한이로다 / 平生恨有身
하였다.
‘하늘이 벌어진다’는 말은 의심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갑신년 겨울밤에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였는데, 서북쪽 사이에서 하늘이 열려 불빛 같은 것이 중천에 뻗치더니 조금 후에 빛이 걷히고 하늘이 합하였다. 이것은 혹시 유기(流氣)의 사광(射光)인가. 실로 알지 못할 일이다.
내가 어렸을 적 어느 날 초경(初更), 소나기가 내린 뒤에 마치 새 울음소리도 같고 귀신 소리도 같은 이상한 소리가 시끄럽게 성중에 가득하였다. 그것을 못 들은 사람이 없었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합루(宙合樓) 앞에 있는 감나무 한 그루는 바로 정조 임금이 손수 심은 것이다. 9월 진전(眞殿)의 다례(茶禮) 때 그 감을 따서 제물로 썼다. 제사 지내고 남은 것을 얻어서 맛보았더니, 매우 감칠맛이 났다. 근일에도 그 감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 주합루 앞에 있는 동학(銅鶴)은 익종조(翼宗朝)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손자를 데리고 놀면서 동전 한 닢을 주었더니, 그 아이가 그만 삼켜 버렸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급히 의원의 집으로 달려가다가 길에서 정수동(鄭守東)을 만나서 그 까닭을 말하였더니, 정수동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애기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오. 요즘 사람들은 공전(公錢)과 사전(私錢)을 수만 냥씩 먹고도 오히려 죽지 않거늘, 하물며 손자가 그 할아버지의 돈 한 닢을 먹었는데 죽을 리가 있겠소.” 하였다. 이 말은 족히 격언(格言)이 될 만하다.
[주-D001] 진솔루(眞率漏) : 진솔한 시계라는 뜻이다.[주-D002] 양부취(兩部吹) : 양부는 음악의 입부(立部)와 좌부(坐部)이니, 양부취는 곧 양부고취(兩部鼓吹)를 말한다.[주-D003] 부자(父子)가 …… 일이다 : 소동파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의 호가 노천(老泉)이기 때문이다.[주-D004] 매화가 …… 품는 것 : 굴원(屈原)이 이소경(離騷經)에서 많은 꽃들을 등장시켰으나 매화만은 등장시키지 않았고, 두보 또한 시에서 많은 꽃들을 인용하였으나 해당화만은 인용하지 않았다.[주-D005] 적고재(積古齋)의 …… 있으나 : 이 부분은 원문의 글자대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필사하는 데 착오가 있는 듯하므로 문맥이 통하도록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6] 밤중에 …… 있었는데 :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은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는데, 유곤(劉琨)과 함께 자다가 밤중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유곤을 차서 깨우며,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한다. 뒤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춤을 춘다는 말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주-D007] 삼일포(三日浦) : 시 제목이 《오음유고(梧陰遺稿)》에는 ‘기고성태수차경숙(寄高城太守車敬叔)’으로 되어 있다.[주-D008] 요야(遼野) : 시 제목이 《월사집(月沙集)》에는 ‘학야도중(鶴野途中)’으로 되어 있다.[주-D009] 경간(卿懇) : ‘경의 간청’이라는 뜻으로, 품계가 높은 신하의 상소에 대해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릴 때 쓰는 말이다. 대신(大臣), 상보국(上輔國), 산림(山林) 등이 올린 상소에 이 말을 쓰고, 그 이하의 신하가 올린 상소에는 ‘너의 간청’이라는 뜻의 ‘이간(爾懇)’이라는 말을 쓴다.[주-D010] 원릉(元陵) :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조선조 영조와 그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이다.[주-D011] 번고(飜庫) : 창고에 있는 물건을 뒤적거려 조사하는 일이다. 번고(反庫)라고도 쓴다.[주-D012] 강정(降定) : 무관(武官)에 대한 징벌(懲罰)의 한 가지로, 벼슬을 낮추어 군역(軍役)을 시키는 것을 이른다.[주-D013] 유몽득(劉夢得) :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으로, 몽득(夢得)은 그의 자이다. 당초 그는 좌천을 당하여 10년 동안 지방에서 지내다가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마침 현도관(玄都觀)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였으므로, “현도관 안의 천 그루 복숭아는, 모두 유랑이 떠난 뒤에 심은 것이다.[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는 시구를 읊었다. 이 시구에 원망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비난이 일어나 또 지방관으로 폄직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3년 만에 다시 현도관에 들러 시를 읊었다는 고사가 있다.[주-D014] 여순양(呂純陽) : 당나라 때 신선 여동빈(呂洞賓)으로, 순양자(純陽子)는 그의 호이다. 여동빈은 강호에 유랑하다가 신선 종리권(鍾離權)을 만나 연명술(延命術)을 받고 신선이 된 다음 양절(兩浙) 사이를 다니며 놀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주-D015] 이상조(履霜操) : 악부(樂府)의 금곡가사(琴曲歌辭) 이름이다.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伯奇)가 죄 없이 후모(後母)의 참소를 받고 쫓겨나서 마름과 연으로 옷을 해 입고 아가위를 따서 먹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서리를 밟으며 쫓겨나게 된 것을 상심해하면서 거문고를 끌어다가 이상조를 탔으며, 이 곡이 끝나자 하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주-D016] 담부(淡府) : 어느 정도의 상부(相府)라는 뜻이다.[주-D017] 봉내(封內) : 과거 답안지 오른쪽 끝에 성명, 생년월일, 주소, 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이던 일이다. 봉미(封彌)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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