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춘추 서문[吳越春秋序]

2022. 9. 16. 10:56고대사

동문선 제95권 / 서(序) 오월춘추 서문[吳越春秋序][DCI]ITKC_BT_1365A_0950_010_0070_2002_007_XML DCI복사 URL복사최항(崔恒) 주상 전하는 신 아무개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전부터 역사서를 살펴보기 좋아했는데 《오월춘추》도 사가(史家)의 부류로서 당시 행사의 득실을 기록하여 후대의 거울이 되게 하였고 또 그 글이 증빙할 만한 점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문종(文宗)의 명령을 받들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엮어내고, 아울러 오(吳)ㆍ월(越)의 사실까지도 기입했었다. 그러나 체재나 범례에 구애되어 오직 병가(兵家)에 절실한 것만을 다 잡았기 때문에 미처 자세히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소략함을 유감으로 여겨 범엽(范曄)의 저작인 《후한서(後漢書)》를 주로 삼고, 《좌전(左傳)》ㆍ《국어(國語)》ㆍ《전국책(戰國策)》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등의 책을 일일이 참고해서 자세하기를 기하여 빠진 것은 보태고 거듭된 것은 깎아 실을 꿰듯이 차례를 삼고 그릇된 곳을 바르게 하여 한 책을 만들어 거의 넓고 흡족하도록 이바지했으니, 이제 마땅히 다시 교정을 더하고 또한 주해(注解)를 붙이라.” 하셨다. 신이 신숙주 등과 더불어 삼가 지시를 받들고 몇 달 만에 겨우 완성하여 올리니 책 이름을 내리시고 또 신에게 명하여 서문을 쓰라고 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천하 국가의 안위와 흥망이 있는 것은 저절로 안위와 흥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임금이나 재상이 행하는 일의 득실 여하에 달렸다. 역사란 득실을 기록하여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을 남기는 것이다. 천백년 뒤에 나서 오히려 천백년 전의 일을 의론하고자 할 때 바로 기재한 책이 있지 않으면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지난 일을 알아서 추측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세(末世)가 된 뒤로는 혼란한 날이 늘 많아 사서(史書)가 간수되지 못하여 책들이 흩어졌으니,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나 큰 인재를 기다려 널리 캐내서 갖추어 놓아야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후인이 계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前人)이 정사(正史) 편년(編年) 이외에 따로 일가(一家)를 만들 적에는 비록 체제가 순수하지 못하여 기사가 허황되고 말이 혹 올바르지 못한 것이 짐작되지만 반드시 모두 간추리고 거두어 당시의 일을 갖추어 실어서 비록 번다함에 치우칠지언정 간략으로 쏠리지 않는 것은 훗날 크게 축적하는 자로 하여금 자료를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니, 《초한춘추(楚漢春秋)》도 이러한 부류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실은 기록이 많고 전한 것이 넓어도 박학한 자도 오히려 가다가 빠뜨린 것이 있음을 꺼려 하는데, 하물며 오월(吳越)이 동남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서 상당(上黨 산동성(山東省)의 동남)의 나라와는 풍마우(風馬牛 바람난 말이나 소)도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임에 있어서랴. 기록도 반드시 많지 않고, 전하는 것도 반드시 넓지 않을텐데 유독 이런 책에 의뢰하여 지금까지 유전되니 도리어 다행이 아닌가. 그 구역이 분포되어 전란이 날로 계속되니,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 모의하고 계획한 방법과 공수(攻守) 보복(報復)의 상황과, 충신과 간당의 진퇴하는 기틀과, 국세의 강약과, 운수의 흥망 등을 대략 눈앞에 볼 수 있으니, 권장하고 경계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것을 소홀히 다뤄 상고할 길이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는 하늘이 내리신 명철한 분이시고 지혜가 날로 새로워 즉위하시기 전에 독서하기에 항상 부지런하여 여러 책을 널리 보시고, 지난 일을 밝게 아시며, 비록 영편(零編)이나 소설이라도 눈에 익히고 마음으로 명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책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생각을 두시어 손수 검토하고 정밀하게 고정(攷定)하여 실가닥이 얽히고 머리털이 맺어진 듯한 것을 낱낱이 풀어내어 은미한 것을 나타내고, 탈락된 것을 수집하여 그 처음과 끝을 갖추어 보존하고,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어 마름질한 것은 밝고, 분류한 것은 치밀하며, 검토한 것은 유실된 바가 없고, 확실함을 드러낸 것은 근거가 있게 하셨다. 《오월춘추》 한 책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좋은 기록이 되었으니, 저 전대 제왕이 등한히 찾고 함부로 편집하여 거룩한 찬저(撰箸)라 자랑한 것이 어찌 만분의 하나인들 비슷할 수 있겠는가.이제 보면 오(吳) 나라가 흥한 것은 성대륙(成大六 손백(孫白)) 같은 인걸(人傑)을 능히 등용했고, 그 망한 것은 오원(伍員)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던 까닭이다. 월(越)의 패망은 범려(范蠡)의 시말(試末)의 경계를 듣지 않아서요, 그 흥함은 문종(文種)의 9술(九術)의 책략을 썼기 때문이었으니, 임금이 인현(仁賢)의 말을 믿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영(郢 초(楚))에 들어간 군사는 무극(無極)의 패금(貝錦)이 매개된 것이요, 오(吳)를 전복한 화란은 태재(太宰) 백비(佰嚭)의 감언이설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으로서 참소하는 무리를 혹시라도 기까이 할 수 있겠는가. 어제는 회계산(會稽山)에 깃들었다가 오늘은 고소대(姑蘇臺)에 깃들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일정하지 않은 것을 짐작하겠고, 지난해는 월(越)을 오(吳)에 넘겨주고, 올해는 오(吳)를 월(越)에게 넘겨주니 천의(天意)의 헤아리기 어려움을 볼 수 있다. 장작더미에 누워서 쓸개를 쳐다보는 일이 한창 부지런할 때 도리어 석전(石田)의 수확이 급했고,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부대에 담아 강물에 띄울 때 그 뜰에 벌써 풀이 돋았으니, 모사(謀事)가 슬기롭지 못한데 뉘우친들 무엇하랴. 천년 뒤인 오늘에도 오히려 충신의 가슴을 두드리게 하고, 지사(志士)의 머리털을 치솟게 하니, 나라를 가진 이가 이를 보면 어찌 깨우침이 없으랴.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때문에 친히 수집하실 적에 반드시 자상함을 다하고, 음훈(音訓)까지 편찬하여 관람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시종 빠짐없이 하여 지난 일을 직필(直筆)로 쓰고, 선악을 숨김없이 하여 장래에 명경(明鏡)을 보인 것이니 깊고도 맛이 있다. 어리석은 신은 애석하게 여기는 점이 있으니, 오(吳)는 후직(后稷)의 자손이요, 월(越)은 신우(神禹)의 후예로서 서로 달팽이뿔 위에 있는 만(蠻)ㆍ촉(觸)처럼 되어 회(淮)ㆍ사(泗)의 사이에서 패권을 다투기에 만족하며, 일찍이 자기 조상의 성왕(聖王)이 구주(九州)를 차지하고 백대를 우두머리로 내려온 치화(治化)가 사람에게 있지 땅에 있지 않은 것을 알지 못했다. 아, 이 점이 오월은 끝내 오월로 있게 되고 중국에 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찌 거듭거듭 뒷사람이 개탄하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한 책이 어찌 다만 오월의 사적을 기록한 책만 될 뿐이겠는가. 진실로 천하 만세의 군신의 귀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