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가는 길

2022. 9. 18. 12:36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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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0년 계유(1873) 8월 13일(기축) 맑음

10-08-13[07] 자경전에서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할 때 좌승지 이교익 등이 입시하였다

……….

, 이근필이 아뢰기를,
“동북에서 발원하는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굽이쳐 내려 그 형세가 매우 장대합니다.”
하고, 한경원이 아뢰기를,
“의무려산의 일맥이 흘러들어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산야가 광활하여 도로와 마을이 아득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영고탑(寧古塔)에서 가깝고 우리나라에서도 가깝겠다.”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동쪽으로 심양(瀋陽)과는 400리 가까이 떨어져 있습니다.”
하고, 조우희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과연 이곳에서 떨어져나온 산맥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향마가 산해관(山海關) 바깥에 있으면서 산해관 안쪽 지방은 침입하지 않는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산해관 안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거대한 관문에 난입할 수 있겠습니까.”……

, 이근필이 아뢰기를,
“아라사는 사막의 바깥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우리나라 북쪽 국경과 맞닿아 있고 서로는 서양의 여러 나라와 맞닿아 있는데, 나라의 길이가 만여 리나 뻗어 있어 마치 길다란 뱀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군장이 있습니다. 나라가 막강하여 서양 사람들도 두려워하며, 중국에서는 청 나라 초기부터 객관을 설치하여 내왕하는 사신들을 맞아들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구국은 본시 우리나라가 개국한 초기에 조공을 바쳤던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어느 나라와 가까운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동남 해상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 조금 가까우며, 중국에 조공하는 노정은 수로로 500리, 육로로 3000리나 된다고 합니다.”
하고, 한경원이 아뢰기를,
“과연 개국 초기에 조공을 바쳤던 나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월남국(越南國)도 조공을 바치러 왔다던데 방물(方物)과 복색이 어떠하던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신들이 객관에 있을 때에 조공 사신이 아직 북경에 도착하지 않아서 그들의 복색은 보지 못하였고, 방물은 비단, 약재, 상아를 보내왔다는 것을 경보(京報)에서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개국한 초기에는 여진(女眞)과 섬라(暹羅)가 모두 조공을 바치던 나라였는데, 월남도 조공을 하였는가?”
하니, 이근필이 이르기를,
“월남은 곧 계림군(桂林郡)ㆍ상군(象郡)으로,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적은 없는 듯합니다.”
하고, 한경원이 아뢰기를,
“여진은 북쪽에 위치하고 섬라는 남해에 위치하고 있는데, 개국 초기에 조공을 바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 이근필이 아뢰기를,
“만주인은 특별하게 대우하고 한인에 대해서는 끝내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인과 만주인의 관계는 필시 겉과 속이 같지 않을 듯한데, 혹시 서로간에 혼인을 한다는 말은 없는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과연 겉과 속이 같지 않아서 혼인은 거의 드물다고 합니다.”
하고, 한경원이 아뢰기를,
“서로 혼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인은 속으로 항상 불평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연경으로 가는 길은 북쪽을 향해 가다가 길을 꺾어서 다시 남쪽으로 갈 듯하다.”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북쪽으로 가다가 길을 꺾어서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꺾어 북쪽으로 갑니다.”
하고, 조우희가 아뢰기를,
요(遼)에서 곧장 서산참(西山站)으로 가면 불과 4, 5백 리밖에 되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사신 행렬은 매번 심양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남으로 되돌아 내려오니, 우회하는 노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공을 싣고 가는 사신 행렬이 지름길을 제쳐 놓고 5, 6백 리를 우회하여 가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조공을 싣고 가는 행렬이 대로(大路)를 따라 가게 되면 연로에 잠시 머물 수 있는 역참이 넉넉히 있지만, 지름길로 가게 되면 모두가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광야입니다. 그런데도 당초에 우회하게 한 데에는 반드시 뜻하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

상이 이르기를,
몽고인의 복색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복색은 만주인과 다른 바가 없으나 황색옷을 많이 입고 있었고, 주의(周衣)를 입고 머리를 깍은 모습이 중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

이근필이 아뢰기를,
몽고는 불교를 숭상하므로 서양의 사교(邪敎)와는 얼음과 숯불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엄정하게 위정척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연히 흠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
상이 이르기를,
“연경에 갈 때는 며칠 걸렸는가? 돌아올 때는 며칠이 더 걸렸는데, 이것은 장마를 만나서 그런 것이겠지만, 하루에 혹 백여 리를 걷기도 했는가?”
하니, 이근필이 아뢰기를,
“신들이 책문(柵門)을 출발한 지 28일 만에 황성(皇城)에 도착하였습니다. 돌아올 때는 연경에서 책문까지 처음에는 22일이 걸리도록 역참(驛站)을 배정하고 떠났으나, 도중에 비를 만나고 홍수를 만나 하루에 수십 리를 가기도 하고 하루나 이틀씩 여관에 머무는 바람에 날짜를 곱절이나 소비하여 40일 만에 겨우 책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설령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 하더라도 길이 질척거려 하루에 백여 리를 가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