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13ㆍ백두산
2-윤03-21[02] 영안북도 절도사 이조양이 야인 문제를 치계하다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이조양(李朝陽)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윤3월 초하룻날 온성(穩城)에 당도하여, 가흘라(加訖羅)에 와서 사는 올적합(兀狄哈)의 중추(中樞) 야당개(也堂介) 등 및 유원진(柔遠鎭) 성 밑에 와서 사는 이부롱고(李夫弄古) 등과 상항(上項)의 사람들을 보수(保授)하는 올량합(兀良哈)의 중추(中樞) 아령개(阿令介) 등을 불러서 묻기를, ‘너희들이 지난 겨울에 처음 왔을 적에 곧 진장(鎭將)으로 하여금 억지로 본토로 돌아가게 하였더니, 너희들이 거주하겠다고 청하기를 매우 간절히 하고, 또한 몹시 추운 때이므로 먼 길에 돌아가다가 동상에 걸릴까 염려하여 우선 머물러 있게 한 것인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매, 올적합 등이 만일 변방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너희들이 향도(嚮導)하였다 하여, 너희들에게 죄를 돌릴 것이다. 그때를 당하면 너희들이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니, 비록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빨리 옛 터전으로 가서 때때로 정성을 바치는 것이 좋을 곳이다.’ 하니, 이이후(伊伊厚)ㆍ기소합(其巢哈)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올적합(兀狄哈)이 아니고 바로 여진(女眞)의 종족이기 때문에 이마거(尼亇車) 등이 항상 종처럼 침책(侵責)하는데, 지금 만약 돌아간다면 반드시 올적합에게 살해당할 것이니, 차라리 이 땅에서 죽을지언정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또 말하기를, ‘회령(會寧) 성 밑에 있는 알타리(斡朶里)ㆍ가타개(加他介)가 너희들과 대대로 원수진 사이라, 너희들이 와서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서 장차 보복하려고 하는데 진장(鎭將)은 너희들이 귀순(歸順)한 까닭으로써 굳이 금단할 것이나, 역시 끝까지 제지하기 어려우니, 이것도 역시 너희들의 큰 걱정거리이다. 차라리 본토(本土)로 돌아가서 가흘라(加訖羅) 종족이 사는 곳에서 양식을 구하려고 내왕하였다는 것으로써 올적합에게 애걸하기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너희들을 가엾게 여기어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이이후(伊伊厚) 등이 대답하기를, ‘가흘라(加訖羅)란 땅은 다른 야인도 많이 살기 때문에 아령개(阿令介) 등과 나라의 울이 되어 영구히 이 땅에 살려고 지금 이미 봄보리[春牟]를 파종하고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으니, 조선(朝鮮)이 우리가 돌아가지 않은 죄를 다스려 우리를 베어도 죽는 것이요, 올적합 등이 저를 배반하였다고 성내어 우리를 쏘아 죽여도 죽는 것이니,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올적합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선에 목을 바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봄갈이를 하였다고 말을 하나, 너희들은 본디 사냥을 일삼고 전혀 농사만을 힘입어 살아가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일기가 따뜻하여, 정히 노유(老幼)를 이끌고 돌아가기에 알맞은 때임에랴.’ 하니, 이이후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성의로 귀순하여 왔으니, 비록 이 땅에서 죽을지라도 영구히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하므로,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우리 나라 남방 내지(內地)에 살 만한 곳이 많이 있으니, 지금 내지로 옮겨서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하겠다.’ 하니, 이이후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여진 종족인데, 우리 동류들이 이 땅에 많이 살므로 함께 살려고 온 것이니, 남방의 내지로 옮기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내지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보니, 너희들이 귀순하였다는 말이 진정이 아니다.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였다면 어찌 내지로 옮기는 것을 꺼리겠느냐. 너희들이 가고 머무는 데 대한 이해는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속히 돌아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여기에 살면 무릇 사변을 체탐(體探)하는 등의 일을 정성껏 아뢰겠거니와, 만약 굳이 본토로 돌아가게 한다면 결단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포주(蒲州) 화라온(火剌溫) 등지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간 후에 만약 아무 곳에서 사변이 있다면 후회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므로, 또 말하기를, ‘만약 오래 머문다면 너희 두두인(頭頭人) 및 보수인(保授人) 등을 잡아 가두어 치죄할 것이니, 속히 돌아가라.' 하고, 또 이런 말로써 유원진(柔遠鎭) 성 밑에 와서 주접(住接)한 다탕개(多湯介)ㆍ이부롱고(李夫弄古) ㆍ 철지고(撤知古)ㆍ소소고(所巢古) 등에게 말하였더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여기 온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새로 온 사람들의 예로써 아울러 돌아가라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한데, 하물며 우리들이 나온 뒤에 올적합 등이 우리가 도망쳤다고 성내어 우리 형제들을 죽였음에리까. 우리가 만약 돌아간다면 또한 반드시 살해를 당할 것이니, 비록 이 땅에서 죽을지라도 차마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또 위의 조항에 의거하여 재삼 타일렀으나 다탕개(多湯介) 등의 대답은 여전히 매우 간절히 거절하므로,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내가 조정에 아뢰어 남방에 터전을 정해서 살게 할 것이며, 아니면 서울로 올라가서 시조(侍朝)하게 하겠다.’ 하였더니, 다탕개 등의 대답도 이이후(伊伊厚)와 같으므로, 또 말하기를, ‘만약 오래 머문다면 너희들뿐 아니라, 보수인(保授人)까지도 아울러 잡아 가두고 죄를 다스리겠다.’ 하고, 또 아령개(阿令介)ㆍ마가무(馬加茂)ㆍ나양개(羅陽介)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의 보수(保授) 이이후 등에게도 본디 영구히 거주할 것을 허락한 것이 아니고, 다만 지난 겨울 몹시 추울 때에 얼어 죽을까 염려스러워서 곧 돌아가라고 독촉을 못 한 것이다. 지금은 억지로 본토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오래 머물지 말게 하라.’ 하니, 아령개(阿令介)가 대답하기를, ‘지금 온 사람들 중에 날쌘 자가 많이 있으니, 내가 이곳 부락의 장수가 되어 항상 이들을 거느리고 무릇 사변을 체탐(體探)하는 일에 관하여 서로 더불어 정성껏 해보겠으나, 만약 지금 돌려보낸다면 그들이 반드시 포주(蒲州)로 갈 것이니, 내가 장수로서 이런 용맹스런 군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한입니다.’ 하고, 마가무(馬加茂)는 대답하기를, ‘이부롱고(李夫弄古)가 사위가 되어 함께 살아온 지가 이미 오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다 동족이니, 비록 국가의 명이 두렵기는 하나 인정에 난처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아령개(阿令介)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이이후 등 용맹스러운 사람을 잃는 것을 한으로 여기나 그들이 오기 전에도 너는 역시 장수가 된 지 오래였으니, 어찌 그들에게 의뢰하겠는가. 또 포주(蒲州) 화라온(火剌溫)으로 들어가는 일에 대하여는 매우 불가하다. 네가 이마거(尼亇車)와 원수진 지 오래였으니, 그들이 이 땅에 와서 산다면 이마거 등이 너를 원망함이 더욱 심할 것이니, 친히 거느리고 가서 우지점(亐知岾)으로 보내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또 마가무(馬加茂)ㆍ나양가(羅陽加) 등에게 말하기를, ‘당초에 이부롱고(李夫弄古) 등이 나왔을 때에 이미 진장(鎭將)을 시켜서 본토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는데도 너희들이 여태까지 오래 머물고 있었으니 이미 죄를 지었는데, 이제 그대로 두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너를 중한 죄로 다스리겠다.’ 하였더니, 아령개(阿令介)는 대답하기를, ‘올적합(兀狄哈)과 원수진 것을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요, 국가의 명이 두려우니, 곧 독촉하여 돌려보내겠으나, 그들은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다른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하고, 마가무(馬加茂) 등은 대답하기를, ‘아령개가 보수(保授)하는 이이후 등이 만약 돌아간다면 우리들이 보수(保授)하는 이부롱고(李夫弄古) 등도 역시 들여보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또 온성진(穩城鎭)에 이첩(移牒)하여 독촉하여 본토로 돌려보내라고 하니, 온성진의 회첩(回牒)에, ‘세 번이나 통사(通事)를 보내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으나 머뭇거리고 곧 내어보내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아령개ㆍ마가무ㆍ나양개 등을 불러서, 이이후 등이 곧 나오지 않는 까닭을 물었더니, 아령개는 대답하기를, ‘마을 안에 와서 사는 이이후 등 27명과 우지(亐知)에서 뒤떨어진 타당개(他堂介) 등 27명 및 뒤따라 나온 기소합(其巢哈) 등 47명에게 국령(國令)으로써 돌아갈 것을 독촉하였더니, 이이후 등의 말이 ‘본토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이마거(尼亇車)에게 살해를 당할 것이므로 화라온(火剌溫) 부락으로 투입하려고 한다. 다만 지금 농사철이라, 먼 길을 떠나 가느라면 그쪽에 가서도 역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생계가 어려우니 지금 가흘라(加訖羅)에서 서쪽으로 단숨에 갈 만한 거리인 남경(南京) 냇가에다 장막을 짓고 살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들어가려고 한다.…’ 하며, ‘이달 초7일에 아울러 처자까지 거느리고 돌아가겠다.…’ 하였습니다. 또 아당지(阿堂只)에게 묻기를, ‘이이후 등과 우지(亐知)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이 오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처음에 곧 진(鎭)에 알리고서, 그 뒤를 따라 나온 기소합(其巢哈) 등에 있어서는 나오게 된 원인을 애초부터 알리지 않았으며, 변장의 처분도 없이 우거(寓居)를 허하는 것이 불가하다.’하면서 힐문(詰問)하니, 대답하기를, ‘기소합(其巢哈)은 3월 보름경에 마을 안에 왔었는데, 전자에 이미 이이후에게 거주할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예라 생각하고서 곧 아뢰지 않았습니다.’ 하며, 마가무ㆍ나양개 등은 말하기를, ‘마을에 와서 우거하는 올적합의 소소고(所巢古)ㆍ살지(撒知) 등 10명과 이부롱고(李夫弄古) 등 4명이 아울러 하는 말이 장차 남경(南京)으로 가서 살겠다 하며, 처자를 거느리고 나갔다.’ 합니다. 남경도 역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주접을 허할 수 없으므로 다시 온성진(穩城鎭)에 말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독촉하게 하였으나 만약 머뭇거리고 본토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조치를 하오리까?”
하니, 정부와 육조에 의논하게 하였다.
【원전】 13 집 96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 보수(保授) :
보석(保釋)된 사람을 맡음.
[주-D002] 향도(嚮導) :
길잡이.
02-윤03-22[03] 어세겸ㆍ이세좌 등이 야인 문제를 의논하다
어세겸(魚世謙)ㆍ이세좌(李世佐)ㆍ성현(成俔)ㆍ조익정(趙益貞)ㆍ신종호(申從濩)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이 의논드리기를,
“이이후(伊伊厚) 등을 본토에 강제로 돌려보내는 일에 대하여는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나, 다만 그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하나 농사 때를 놓칠까 염려됩니다.’ 하였은즉,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니, 의리에 강박하여 쫓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 있어, 동약사(童約沙) 등이 만포강(滿浦江) 밖에 살고자 하였는데, 그때에도 강제로 돌려보냈으되 오히려 가을을 기다려서 보내달라는 애원을 들어주었으니, 이 예에 의하소서. 다만 그들의 말이, ‘우리들이 돌아간 뒤에 아무 곳에서 사변이 있으면 후회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우리를 희롱한 것 같으나 이것은 변장(邊將)이 임시에 한 마디 말로 꺾어버리기에 달렸습니다. 이와 같이 조무래기들의 간사한 일에 있어서는 조정에서 일일이 그 말을 멀리서 지수(指授)할 필요가 없으며, 절도사(節度使)에게 일임하여 편의에 따라 돌려보내게 하고, 과연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치계(馳啓)하여 취품(取稟)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극돈(李克墩)은 의논드리기를,
“저들의 말이 ‘장차 화라온(火剌溫)의 포주(蒲州)로 투입한 뒤에 사변이 있게 되면 후회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 것은 모두 우리를 희롱하는 말이오나, 이 때문에 우리 계책을 스스로 꺾을 수는 없으니, 전자의 사목(事目)에 의하여, 절도사로 하여금 반복하여 타이르고 혹은 훈계도 해서 기어이 본토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다만 성종조(成宗朝)에 있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 동약사(童約沙)가 만포(滿浦) 강가에 와서 살므로 우리 나라에서 돌아가라고 독촉하니, 동약사가 추수(秋收)한 뒤에 돌아가겠다고 청하므로 국가에서도 역시 그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이 예에 의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농작물을 거둔 뒤에 옮겨가겠다고 말하니, 네 말이 불쌍하다. 과연 이때에 돌아간다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농사철을 놓칠 우려가 있으니, 우선 여기에 머물러서 파종한 농작물을 거둔 뒤에 곧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 이로써 타이르고, 저들의 답변을 들어서 다시 아뢰어 취품(取稟)하게 하소서.”
하고, 성준(成俊)ㆍ성세명(成世明)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답한 사연을 보면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방어(防禦)로 말하오면 양계(兩界)가 다 중요하나, 평안도(平安道)가 더욱 긴절하온데, 지금 서쪽인 남경(南京)으로 옮긴다면 형세가 반드시 점차 포주(蒲州)로 들어가게 되어 평안도의 피해는 반드시 전보다 더할 것이니, 우선 절도사로 하여금 거취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여 만일 반드시 장차 서쪽으로 옮기고 영영 본토로 돌아갈 리 없을 것 같으면, 남경은 종성(鍾城)과 거리가 그다지 가깝지 않고 올량합(兀良哈)의 부락이 많이 살고 있으니, 굳이 쫓을 것은 없습니다.”
하고, 유지(柳輊)ㆍ박건(朴楗)ㆍ신준(申浚)ㆍ윤효손(尹孝孫)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들어온 뒤에는 그 종족이 잇달아 따라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형세가 장차 번식(蕃息)되므로 반드시 본토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나, 지금 그들의 말이 ‘20여 일 걸리는 화라온(火剌溫) 등지로 이사할 의향이나 다만 지금 농사철이어서, 먼 길을 가자면 농사철을 놓치게 되니 생활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가흘라(加訖羅)의 서쪽으로 한숨에 갈 만한 거리인 남경(南京)에 장막을 치고 살다가 가을이 되면 들어가겠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므로, 강박하게 쫓아내서는 안되며, 말하기를, ‘지금 농사철에 있어 보금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여 곧 돌아가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이니, 추수가 끝나면 곧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가을을 기다려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순(柳洵)이 의논드리기를,
“야인의 성질이란 미련하고 사나워서 변화되기 어렵고 오직 이익만 따르는데, 지금 그들이 이미 가까운 경내로 이주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으니, 비록 온갖 방법으로 효유하더라도 마침내 돌아가는 것을 볼 리는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병위(兵威)를 사용해서 강제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심어 놓은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강박하게 쫓아낼 수는 없으니, 가을을 기다려서 본토로 돌아갈 것을 돈유(敦諭)하여 저들로 하여금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될 것을 미리 알게 하고서 가을이 되면 위명(威名)이 있는 장수를 보내어 타일러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김경조(金敬祖)ㆍ김심(金諶)은 의논드리기를,
“국가에서 이미 이이후 등이 바치는 성의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빨리 거절해야 할 것이요 고식으로 나가서는 안 되오니, 다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전일의 뜻을 거듭 타일러서 빨리 본토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겸(世謙) 등의 의논에 따랐다.
【원전】 13 집 98 면
【분류】 외교-야(野)
02-08-07[01] 병조 판서 성준 등이 야인 문제를 의논하다
병조 판서 성준(成俊)ㆍ참판 허침(許琛)ㆍ참의 이숙함(李叔瑊)이 아뢰기를,
“전일에 가흘라(加訖羅) 지방에 와서 거주하는 이마거(尼亇車)를 본토로 돌려보내라 하였는데도, 저들이 즐겨 돌아가지 않고 남경(南京) 지방에 옮겨 살고 있으니, 올 추수 때에는 강제로 본토에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위의 사람들이 이미 본토를 배반하였으니, 만약 강제로 돌려보낸다면 반드시 포주(蒲州) 등지로 들어갈 것입니다. 올적합(兀狄哈)은 성질이 본디 날래어 싸움을 잘하여 다른 종족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야흐로 건주위(建州衛) 야인이 자주 우리 경계를 범하여 좀도둑질하여 마지않는데, 또 이마거(尼亇車)를 저 땅으로 쫓는다면 다시 한 적이 생겨서 그 기세를 보태 주는 것이니, 옳은 계책이 못 됩니다. 남경은 종성(鍾城)과 거리가 2식(息) 반 길이니, 그 중간에 반드시 귀화한 야인이 살아서 조금만 성식(聲息)이 있으면 곧 와서 고하여 다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므로, 이마거(尼亇車)가 여기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남경은 우리 땅이 아님에리까. 저들이 또 조정의 명령을 좇지 않는다면 어찌 강제로 쫓겠습니까. 돌아가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이계동(李季仝)은 변방 일을 아는 사람이니, 같이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마거(尼亇車)를 강제로 송환(送還)하는 것의 가부(可否)에 대하여는 전임 정승과 정부와 육조의 판서와 이계동에게 의논한다.”
하였다.
【원전】 13 집 131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
02-08-14[01] 장령 정이교 등이 사당과 신주 세우는 일 등을 철회하도록 아뢰다
장령 정이교(鄭以僑)가 아뢰기를,
“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것은 단연코 하지 못할 것이니, 속히 공론을 들으소서. 윤민(尹慜)이 여러 대(代)의 조정에 벼슬하여 조금 사체(事體)를 아는데, 맨 먼저 소장으로 사설(邪說)을 바치고자 하다가 다행히 한사문(韓斯文)의 저지함에 힘입어 중지되었더니, 지금 언관(言官)의 책임을 맡았는데 또한 신주를 세우는 것을 옳다고 하고, 이극규 또한 일의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함이 아닌데도 감히 간하지 못하고, 이의무(李宜茂)는 처음에는 동료와 큰소리를 하고 극력 논하다가는 이극규 등과 합하여 도리어 바른 의논을 하는 사람을 그르다 하고 헐뜯으니, 그 정상을 모두 국문하여야 합니다.”
하고, 사간 윤석(尹晳)이 아뢰기를,
“윤씨는 묘(墓)를 옮겼으니, 명절과 삭망(朔望)에 다 제사지낼 수 있으므로 반드시 신주와 사당을 세울 것이 없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변경함이 없어야 효도라 할 수 있다.’하였으니, 지금 3년 안에 있어 어찌 급급히 폐비(廢妃)를 위하여 따로 신주와 사당을 세우겠습니까. 또 공신(功臣)에게 가자(加資)하는 일은 3년 뒤 중삭연(仲朔宴) 때에도 할 수 있는 것이니, 빨리 철회하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백두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경가는 길 (0) | 2022.09.18 |
---|---|
흑룡강 (0) | 2022.09.18 |
임금을 그리는 마음은 연새의 구름으로 달리고 (0) | 2022.09.17 |
친히 용사(새외(塞外)의 땅) 지방에 몸을 굽히시어 (0) | 2022.09.16 |
위엄이 안문(雁門) 땅의 편발(編髮)들을 항복 받는구나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