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1. 14:25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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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 병인(1866) 9월 3일(기미) 맑음
03-09-03[20]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양이를 대적할 계책을 마련할 것을 청하는 전 헌납 박주운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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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헌납 박주운(朴周雲)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난번에 스스로 논열하는 상소를 올리고 오직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상께서 따스한 유시를 곡진히 내려 의심스러운 비방을 풀어주고 수령의 직임을 체차하여 마음을 편안히 해주셨습니다. 신은 큰 은혜에 감격하여 돌아가 늙은 아비를 간호하며 두문불출하고 돌보아 전야(田野)에서의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길에서 들으니, 서양 선박이 범람하여 경강(京江)에까지 육박하여 위로는 정무에 바쁘신 성상께 깊은 우려를 끼치고 아래로는 떠들썩하게 소문이 일어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위험한 사태에 무슨 도움을 끼치기엔 부족하지만 외람되이 은혜를 입어 신하의 반열에 끼어 있기에 감히 지방에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평민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차비를 차리고 길을 물으며 어렵사리 올라와 다행히도 도성 밖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만 뒤돌아 보건대 신은 온갖 비방을 다 받아 위태로이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으로서 깊은 연못이나 얇은 얼음이 앞에 닥쳐 있듯이 두려운 마음이 늘 떠나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감히 자리에 나아가 일을 논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거듭 범할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태로움을 보고 힘을 다 바치려 하는 것은 신하로서의 떳떳한 분수입니다. 지금 서양 선박이 종잡을 수 없이 출몰하여 형세를 정탐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는데, 경기의 지척에서 문득 그들이 멋대로 들어와도 제재하는 바가 없고 멋대로 가도 구속하는 바가 없게 둔다면 나라에 방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훌륭하고 명철한 제왕이라도 일찍이 화란이 반드시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헤아려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에 죽을 죄를 지은 어리석은 신이 하찮으나마 개연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삼가 지난 역사에서 오랑캐를 막아냈던 데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오늘날을 위하여 진달할까 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서양 오랑캐는 멀리 서해 극변 수만 리 밖에 있어 우리나라와는 구역이 멀리 떨어져 있고 풍기(風氣)도 매우 달라 하늘 끝과 바다 끝이 서로 미칠 수 없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 그들의 삶은 배를 집으로 삼고 재화의 이익을 생활 밑천으로 삼고 있다 합니다. 또 그 야소교(耶蘇敎)의 괴이한 설은 우리 우주가 생긴 이래 천하의 이제(二帝)ㆍ삼왕(三王)ㆍ주공(周公)ㆍ공맹(孔孟)ㆍ정주(程朱)의 도를 바꾸려 하고 있는데, 지혜로운 자는 금은으로 꾀고 어리석은 자는 생각을 미혹케 만들어 장차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인민을 모두 자신들을 위해 쓰이게 하려 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곧 군사를 일으켜 멀리 바다를 건너와 천하를 횡행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니, 이것이 지난번에 서양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또한 서양 오랑캐가 가장 강한 상대여서가 아니라 실로 중국에서 그 방어를 잘못한 데에 기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중국의 장신(將臣) 격림심(格林心)의 출사주(出師奏)를 가지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처음 강소성(江蘇省)과 광동성(廣東省)에 들어올 때 기선(琦善)의 매화용(梅花樁)을 은(銀)을 뇌물로 주지 않았는데도 지레 스스로 뽑았고, 우감(牛鑑)의 방죽과 포대(砲臺)를 은을 뇌물로 주지 않았는데도 대번에 스스로 허물었습니다. 임칙서(林則徐)가 무수한 아편(鴉片)을 다 불살라 버리고 또 죄를 얻어 나라를 떠나게 되지 않았었다면 저들이 어찌 감히 가벼이 중국에 들어와 이렇게까지 멋대로 굴 수 있었겠습니까. 격림심이 말하기를 ‘무도한 저 오랑캐들은 일개 무능한 무리일 뿐이고 믿는 바는 화륜선(火輪船)뿐이라 여러 차례 침범했어도 아직까지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가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1려(旅)의 군사를 데리고 막는다면 어찌 당당한 상국(上國)이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고 화의를 청하는 데까지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화의(和議)가 끼칠 근심거리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라고 논하였는데, 그 설이 엄정하고 격렬하였습니다. 신은 이로써 천하의 의리는 마멸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되었으니, 삼가 중국에 인물이 있다고 여깁니다.
아, 우리 동방은 천 리의 천연적인 요새지를 갖춘 나라로서 5백 년간 인재를 길러 예의가 이 때문에 보존되어 뭇사람들의 마음이 장성(長城)보다도 견고하니, 만약 저들 중에 병법을 아는 지혜로운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필시 견고한 방어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죽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저들이 내통하는 것이나 국경 넘나드는 것을 모두 법으로 처벌함을 꼬투리삼아 감히 사나운 기세로 명분도 없는 전란을 크게 일으킨다면 우리의 천한 노예나 빌어먹는 사람, 제대로 듣거나 보거나 걷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 적이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여 우리의 예의를 어지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니, 이는 타고난 올바른 기운 때문입니다. 순역(順逆)으로 논하더라도 이미 저 바르지 못하고 늙은 병사들을 제압하기에 족한데, 더구나 하늘이 한 시대의 사람을 낳음에 각기 그 시대의 일을 완료하도록 하는 법이니 또한 어찌 이 난을 그치게 할 수 있는 조정의 영현(英賢)이나 재야의 준걸(俊傑)로서 미리 나와 한때에 주의(注擬)할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태평스러운 시대가 오래 지속된 탓에 백성의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서양 선박이 이르면 몹시 두려워했다가 물러나면 조금 안정되는데, 그 나아오고 물러남을 미리 알 기약이 없어 수비해야 한다고도 하고 싸워야 한다고도 하여 일정한 계획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 계속 이렇게 해나가다가는 적이 닥쳐오는 날, 군민(軍民)이 정신없이 도망쳐 사방으로 흩어져 수습할 수 없게 되고 저축해 놓은 것을 버리고서 훔친 곡식에 의지하게 되고 관령(關嶺)을 포기하고서 적로(敵路)와 통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군부에게 오랑캐를 남겨 놓게 될까 두려운데, 궁벽한 산골에 추위가 닥쳐 굶주려 얼어죽는 사람이 잇따라 발생하여 고을이 텅 비고 적의 칼날이 뒤따라 닥치면 지난날 흩어져 도망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끝내 유린당하여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우려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처자식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임은 알면서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계책은 나라를 지키는 데에 달려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계책은 적을 막아낼 알맞는 방법을 찾는 데에 달려 있음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적을 막아낼 방도를 물으면 때에 따라 임기응변하면 된다고 말할 뿐이니 임기응변으로 과연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우리나라의 강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천하의 강국이 된 까닭은 전곡(錢穀)이 풍부하거나 갑병(甲兵)이 많아서가 아니라 산골짜기의 험준함이 천하에서 으뜸가기 때문입니다. 병법(兵法)에, 먼저 고지(高地)를 점거하는 자가 승리한다 하였고, 손무자(孫武子)는 먼저 고지를 점거하면 피하여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 고유의 험준함을 인하여 곳곳에서 고지를 점거하여 성을 쌓고 지킨다면 척계광(戚繼光)이 이른바 저 백만 명의 침범자들을 그냥 둔다는 경우가 이것일 것입니다. 지난 임진 왜란 때 선정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일찍이 산성(山城)에 관한 말을 하였는데, 그 결론에 ‘만약 이 방법을 놓아두고 따로 나라를 보존할 수 있고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는 기발한 방책이 있다고 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불가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신 또한 오늘날의 형세에 만약 이 방법을 놓아두고 따로 나라를 보존할 수 있고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는 기발한 방책이 있다고 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불가할 것이라 말하겠는데, 신이 아무 생각없이 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혹 이를 어렵게 여기는 자가 있어 ‘현재 허물어져 있는 산성도 아직까지 수선하여 올리지 못하였는데, 노동력을 어디에서 동원하고 재용을 어디에서 차출할 수 있겠는가. 갑작스러운 때에 토석(土石)의 대공사를 일으킬 수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참으로 더불어 오늘날의 급선무를 이야기할 만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이 재용도 손상하지 않고 백성도 수고롭히지 않으면서 조석간에 마련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을 뒤에서 조목조목 말하겠고, 먼저 지난 역사에서 그렇게 했던 분명한 증거를 말하여 실증하도록 하겠으니 오직 성상께서 헤아려 택하소서.
신이 듣건대, 옛날 초 나라와 한 나라가 분쟁하고 뭇 영웅들이 각축할 때 이좌거(李左車)가 조(趙) 나라를 위하여 모의하면서 말하기를 ‘정경(井陘)의 길을 지켜 천 리의 군량 보급을 끊으며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서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면 두 장수의 목을 휘하에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용차(龍且)가 제(齊) 나라를 구하려 할 때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하여 말하기를 ‘한(漢) 나라 군대가 멀리 싸우러 오는데 그 칼날을 당해 내기 어려우니 벽을 깊숙이 쌓고 견고히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이다. 한 나라 군대는 객지에서 지내는 것이라 식량을 얻을 길이 없는 형편이니 그렇게만 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이 당시의 병법으로 시행될 수만 있었다면 또한 가만히 앉아서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인데, 더구나 오늘날 서양 오랑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또 중국의 지형은 들이 넓고 산이 드물어 천연적인 험지가 매우 적은데 서양 오랑캐의 용병술은 평원이나 강해(江海)에서의 싸움에 강한 면모를 발휘하니 그들이 질주하는 기술을 멋대로 부린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달라 삼면이 높은 산맥으로 첩첩이 싸여 있고 산골짜기는 밭을 일구기에 적당하니, 실로 보루를 높이 쌓고 벽을 깊숙이 쌓고자 한다면 정경(井陘)과 같은 험준함이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엿보아 넘어 들어오고자 한다 해도 또한 그때마다 사로잡히게 될 것이니, 어찌 감히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만들기만 잘하면 그 강함이 약해지기 쉽고 지키기만 잘하면 그 험준함이 견고해 질 수 있으니, 병갑(兵甲)이나 기계(器械)의 예리함은 이에 상관없는 것입니다.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융졸(戎卒)이 200만 명에 정기(旌旗)가 900여 리에 이어졌으니 그 용맹한 장수와 굳센 병사들이 어찌 서양 오랑캐보다 열 배 정도가 될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살수(薩水)에서 패하고 신성(新城)에서 퇴각하여, 요하(遼河)에 이르러 헤아려 보니 돌아온 자가 2700명뿐이었고 군량과 기계가 다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이 어찌 한 모퉁이 편사(偏師)의 강함이 이루어 낸 것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고지에 올라 험준한 형세를 의지하지 않고 서로 대륙의 평야 지대에서 겨루었다면 그 성패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 태종이 천하를 석권하여 사해에 위세를 떨쳤는데도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때 뭇 신하들이 모두 고려는 산을 따라 성(城)을 만들어 끝내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이 듣지 않고 이내 기병과 보병 10만 명에 전함(戰艦) 500척을 내어 동래주(東萊州)에서 배를 타고 평양까지 왔는데, 끝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던 안시성(安市城)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성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서 성주(城主)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여 그 견고한 수비를 기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구사(舊史)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여 성주의 성명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성을 빙 둘러싸고 견고히 지켰던 의리는 이미 천하에 다 알려진 바입니다.
그 후 원주(原州)에서 거란(契丹)을 막아내고, 귀주(龜州)와 자주(慈州)에서 몽고(蒙古)에 저항했던 것도 모두 이로 인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거란에서 원정을 나서려 할 때 그 신하가 간하기를 ‘고려는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지키고 있어 대군이 가서 정벌한다 해도 공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거란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스스로 형세를 살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갑자기 험준한 곳에 깊이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수고로이 방어하게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후 산성이 이처럼 긴요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선정(先正) 정몽주(鄭夢周)가 산성기(山城記)에서, 평원은 나갈 때마다 패하지만 천 길 높이의 보루는 걱정을 없애준다고 말하면서 이미 그 당시에 이를 수리하지 않고 있는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학교를 늘리고 예의를 일으켰어도 또한 이 제도에 대해서는 강구하지를 아니하여 사방의 성지(城池)가 모두 평지처럼 낮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임진년의 변란 때 어리석은 저 섬 오랑캐들이 천 리를 달려와 마치 빈땅에 들어오듯 쉽게 침입하는데도 첩첩이 둘러싸인 산줄기에서 어느 누구도 적의 칼날을 막아 꺾지 못하여 한 달여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백성들이 유린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험지를 잃어 제대로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전후 7년 동안 우리나라의 장점이 도리어 저들의 손에 들어가, 높은 산 정상의 좌우를 돌아다 볼 수 있는 곳에 모두 목책(木柵)을 둘러 둔을 치고 굴곡진 곳엔 큰 바위를 둘러쌓아 서로 가려지도록 하고 구멍을 뚫어 탄환을 쏘기에 편리하도록 하고는 밤이면 봉화를 들어 서로 호응하고 낮이면 사방으로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양쪽으로 서로 바라다보이는 땅이 모두 우리의 땅인데 우리 백성이 서로 의지하여 틈을 엿보아도 끝내 한 군영도 격퇴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양의 전투에 제독(提督)이 장수가 되어 장사(壯士)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고 대포의 힘이 5, 6리까지 미칠 수 있었는데도 적이 모란봉(牡丹峰)의 토벽(土壁)으로 들어가 조총(鳥銃)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중국 군사들이 대부분 부상하여 부득이 성밖으로 군대를 수습하고 밤에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패배하여 물러갈 때 연해의 16둔(屯)이 모두 산과 바다를 의지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뚫어 중국 군대가 사방으로 쳐다보면서도 끝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적의 계략이 교활하여 형세를 점거하는 데에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승리로는 행주(幸州)에서의 쾌전이 가장 큰 것이었는데, 산기슭이 암석으로 덮여 있어 시석(矢石)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이 와서 힘껏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돌아간 것입니다. 파주(坡州)의 성은 토산이 우뚝히 솟아 있고 다른 대응하는 봉우리가 없어 왜적이 다 모였어도 애당초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담양(潭陽)의 성은, 적 가운데 이를 본 사람도 말하기를 ‘만약 조선이 견고히 지킨다면 우리가 어찌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그 당시의 수성(守城)에 관한 개견(槪見)입니다.
또 토민(土民)이 막아 지킨 경우를 가지고 말하면, 황주(黃州)의 백성 이사림(李思林)은 홀로 그 마을의 늙거나 병든 남녀 400여 명을 이끌고 넓은 들 큰 길 가운데 솟은 그리 높지 않은 이른바 산산(蒜山)이라는 곳으로 올라가 성책을 설치하고 지켰는데, 애당초 궁시(弓矢)나 기계(機械)는 없었고 단지 큰 돌을 많이 모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보루가 겨우 수 리 밖에 있어 심지어 불빛을 서로 비추는 것까지 볼 수 있었는데도 끝내 감히 와서 범하지 못하였고, 평행장(平行長)도 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으나 공격도 해 보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때부터 담력이 더욱 세져 마침내 몇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올라가 망을 보게 하고 산을 내려와 아무렇지도 않게 땔나무를 하고 경작물을 거두어들였으며, 목숨을 길고 싸울 수 있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뽑아 틈을 타 졸지에 쑥 나와서 왕래하는 적을 기다렸다가 소나 말을 빼앗아 와서 군사들에게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적이 물러감에 이사림의 무리만이 온전하였으니, 저 구구한 작은 성책에서 거둔 효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라의 산성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를 통해 본다면 우리나라의 장점이 우리 손 안에 들어 있고 저들에게 들어가지 않아 각기 지킬 수 있는 험지를 지켜 청야(淸野)하고서 들어가 보존하면서 때때로 나와 적의 소굴을 공격하였다면 지난날 신성(新城), 안시(安市), 원주(原州), 귀주(龜州)에서 거둔 것 같은 큰 승리를 한산 대첩(閑山大捷)을 기다리지 않고도 일찍이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니, 비록 천하의 굳센 왜구로서도 일찍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도모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서양 오랑캐는 큰 바다를 건너와 우리의 험준한 산세에 익숙지 않은데 우리가 각각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산맥의 요해처에는 본래 관방(關防)의 시설을 해 놓은 곳이 많기는 하지만 오래된 데다가 관심을 쏟지 않아 태반이 허물어져 있고 소금이나 식량, 기계, 무기 등도 거의 없습니다. 또 옛성의 기지가 한 고을에 혹 3, 4군데, 혹 5, 6군데 있는데 대부분이 못쓰게 무너졌는데도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이외에 매우 험준한 지역으로 지켜야만 할 산이 곳곳에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도 또한 모두 그냥 놓아둔 채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아, 험지를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면 험지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유 문충공은 임금을 도와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를 가진 인물로 중흥(中興)의 온갖 책임을 담당하여 그 몸을 다 바치며 대비하여 막고 싸워 지킬 알맞는 계책에 정성을 기울여 수천 만 마디의 진언을 올렸는데, 형세(形勢)에 관한 통설의 큰 요점에서 첫째도 산성을 말하였고 둘째도 산성을 말하였습니다. 대략에 ‘성을 만드는 데는 반드시 형편(形便)을 잘 골라야 하는데, 형편이란 적이 반드시 경유할 곳이자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을 말합니다. 반드시 산세가 가파라 사방에 잡고 기어오를 만한 것이 없고 또 시야가 넓고 탁 트여 수십여 리를 두루 볼 수 있고 좌우에 장애되는 것이 없어 적이 오고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만약 한쪽 면이나 양쪽 면이 평이하여 잡고 기어오를 만하면 또한 백성을 동원하여 깎고 파서 험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은 견고하고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니 너무 크면 많은 힘을 쏟아야 하고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혹 산림이 너무 울창하고 골짜기가 활짝 트여 있으면 적이 엄폐할 수 있으니 틈을 타 모여들어옴에 한 곳에서 놀라 부르짖으면 온 성 안이 모두 놀라 마치 곽준(郭䞭)이 황석(黃石)에 대해 이 금기를 범하였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민둥민둥하게 만들어 사면에 수목도 없고 암석도 없게 만들어 적이 와도 은폐할 곳이 없고 성 위에서 돌을 굴려도 판자 위에 둥근 알을 굴리듯 잘 내려가도록 해야 바야흐로 천연의 험지가 될 것입니다. 적의 장기도 이에 이르면 다 쓸모가 없어져 탄환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힘이 다하면 곧 떨어져 버리고 토산(土山)과 운제(雲梯)도 설치할 만한 곳이 없어 성 안의 동정을 끝내 엿볼 수 없고 적이 비록 기어오른다 해도 숨이 차고 기운이 다 빠져 가는데 큰 돌까지 비오듯 쏟아짐에 흩어져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산성에 험지를 설치해 놓는 데에 따른 이로운 점입니다. 그러나 성을 쌓아야만 하는 지형이라 해도 사람들을 동원하고 재용을 소비하려고 하면 또한 곳에 따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고금의 성벽 축조법을 수정해서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왜루(倭壘)의 제도인데 매우 간단하고 쉬워 임시 방편으로 목책(木柵)을 만드는 법입니다.’ 하고, 인하여 차자를 올렸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나무를 세워 기둥을 만들되 땅으로 1, 2척(尺) 정도 들어가게 하고, 기둥 위 2곳 혹은 3곳에 구멍을 뚫어 짧은 막대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되 안에서 밖으로 나와 반은 안에 있고 반은 밖에 있도록 하고 길이가 2, 3척 되도록 합니다. 짧은 막대기 양 끝에는 또 구멍을 뚫어 가로지르는 나무가 들어가도록 하고 이렇게 차례로 연결하되 반듯하게 되도록 하고 마치 인가에서 벽을 만드는 모양으로 안팎에서 욋가지를 얽습니다. 그러고 나면 중간이 비어 흙을 넣을 수 있게 되니, 바깥 쪽의 참호를 만드는 곳에서 나오는 찰흙을 가져다가 볏짚을 넣고 물로 섞어 그 안을 채워서 단단하게 다져 쌓고 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다져 쌓아 제일 윗부분까지 다 채운 후에 그치는데, 높이는 2장(丈) 혹은 1장 반 정도가 되도록 합니다. 몇일 후에 흙과 나무가 서로 붙어 돌처럼 단단하게 뭉쳐지면 이어 고운 진흙을 안팎의 표면에 두껍게 발라 적이 와서 불태워버리는 것을 막도록 합니다. 또 네 모퉁이의 굴곡진 곳에는 바깥 면을 향하여 철(凸) 자 모양으로 한두 칸 정도 나오도록 하여 아랫면에는 구멍을 뚫어 대포를 쏠 수 있도록 하고 중간쯤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현황자조총(玄黃字鳥銃) 등의 포를 쏠 수 있도록 합니다. 꼭대기 부분에는 판(板)을 놓아 망루(望樓)를 만들되 바깥 면에 방패를 설치하여 망루 위에서 살펴보면서 활을 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화약과 화포를 많이 준비하여 대비한다면 적이 비록 수만 명이라도 감히 와서 범하지 못할 것이니, 목책안 군사의 다과(多寡)나 강약(强弱)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가 긴 때에는 불과 수백 명이 3, 4일만 힘을 쓰면 곧 완성할 수 있는데, 그 견고함은 석성(石城)보다 못하지 않고 그 제도는 적을 막아내는 데에 세밀히 배려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앞에서 말한 바 재용을 상하지 않고 백성을 수고롭히지 않으면서 조석간에 마련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니, 비록 갑작스러운 때 쇠잔한 무리라 하더라도 어찌 곳곳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유 문충공은 당시의 백전 노장으로서 경험도 충분히 해보고 생각도 익숙히 해보았는데 그 요령으로 진달한 것이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않았으니, 지난날의 징험이자 앞으로의 거울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법을 각도에 반포하되 되도록 빨리 공문을 보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리하여 현재 성자(城子)가 무너진 곳은 그들로 하여금 법대로 다시 수선하되 겸하여 수어(守禦)의 대비도 점열하게 하고, 또 그 적이 반드시 경유할 곳이자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곳곳의 형편을 잘 고르되 먼저 해방(海防)부터 하여 차차 내지로 들어와 각각 그 법대로 설치하도록 합니다. 고을마다 이와 같이 하는데, 혹 한 고을에 몇군데가 이와 같을 경우 규모가 크면 정부(丁夫)를 조발하여 합하여 만들도록 하고 작으면 방리(坊里) 사람을 모아 각각 만들도록 합니다.
완성되고 나면 지방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그 지역에서 충성스럽고 심지가 있어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인물을 골라 단자를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하여 각각 장령(將領)으로 차임하도록 합니다. 이어 중국 연대(煙臺)의 예대로 백성을 모집하여 그 신역을 면제해 주고 5호(戶)씩 결집시키며 요미(料米)를 주어 살도록 하여 그 근방에서 위급한 사태가 벌어져 사람을 모을 때를 대비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각각 소관하는 곳으로부터 통제를 받아 리(里)는 면(面)에, 면은 주(州)에, 주는 진(鎭)에 연계되어 모두 도(道)에 통괄되도록 하여 좌우로 서로 의지하고 상하로 서로 도와주어 차례차례 관할하고 맥락이 서로 연결되도록 합니다.
그리한다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다 그러하니,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멍하니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다가 살 길이 이에 있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사람도 많이 들지 않고 기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재용도 크게 손상되지 않고 힘도 많이 들지 않는 데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법을 내걸어 권장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앞다투어 달려와 그 수고로움도 잊고 갑절 더 힘을 들여, 며칠도 안 되어 수십리 사이에 모두 우뚝히 나타나 천 리의 견고한 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또 활과 화살, 화포, 대포, 조총 및 권율(權慄)이 만든 화륜포(火輪砲) 등의 무기를 많이 준비하였다가 나누어 주어 익히도록 하고, 또 해당 고을에서 여러 가지 무기를 나누어 만들어 여러 요새로 보내 주고 이어 큰 돌을 많이 모아 대비하고 있도록 합니다.
또한 강의 흐름이 얕아 건너다닐 수 있는 곳에는 반쯤 건넌 곳에 마름쇠[菱鐵]를 설치하되 물살에 떠내려 가거나 파묻히지 않도록 하고, 큰 배가 반드시 경유하는 길목에는 강 입구쪽 물줄기들에 큰 쇠사슬을 널리 설치해 놓되 타서 녹아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항상 험준한 산성과 더불어 서로 돕는 형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 된다면 삼면의 해방(海防) 5천 리 안에 방역(方域)의 관문이 첩첩이 겹치고 경성(京城)의 울타리가 정연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니, 비록 서양배 백천 척이 다가오더라도 끝내 감히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엿보지 못하고 벌써 분위기를 살피고서 멀리에서 막힐 것입니다. 설혹 어리석고 예민하지 못하여 끝내 위급한 사태를 일으킨다 해도 사람과 기물이 갖추어져 있고 군대가 정돈되어 있어 이미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비록 도망치도록 권한다 해도 도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처자를 이끌고 저축해둔 식량을 싣고 모두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양향(糧餉)이 이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장의 공문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달되더라도 실어와야 할 백만 석의 곡식과 충성을 바칠 천만 명의 군사도 잠깐 사이에 모을 수 있습니다. 또 비록 군사를 멀리서 징발해 온다 하더라도 그 건재한 어른이나 부녀, 아동의 숫자가 군사의 수보다 몇 십배는 더 많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그저 산림 속에 숨어 있도록 한다면 쇠잔한 쓸모없는 백성에 불과하겠지만 실로 이에 수습하여 조리 있게 단결시킨다면 모두 때에 닥쳐 쓸모있는 결사적인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통제를 받되 각자 수비하며 마을의 북을 울려대고 검은 깃발을 죽 늘어놓아 항상 사방을 성원할 부대처럼 차리고 있어 적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 대응의 방식은 적이 오면 서로 이끌고서 들어가 버리고 적이 가면 멀리 망을 보면서 경작을 하며, 많이 오면 단단하게 닫아걸고 적게 오면 습격을 합니다. 혹 도착할 때에 다다라 기계를 설치하거나 혹 가기를 기다려 뒤를 포위하되 관군(官軍)이 기습병으로 협격하거나 혹 험한 요새에 엎드려 있다가 그 앞뒤를 단절시키거나 혹 요충지에 출몰하여 그 군량 보급로를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만리길을 달려 들어온 적으로서도 진격하자니 노략질할 것이 없고 물러나자니 추격당할까 두려워 이미 취사 선택을 할 수 없어 우리에게 식량을 구할 것이고 또 스스로 두려워 한발짝도 제대로 뗄 수 없는 형세에 놓여 있지만 굶주리고 낭패하여 도망가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병법에서 이른바 싸우지 않고도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니, 병법 중의 상책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산성을 요리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보는데, 이는 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상고할 수 있는 지난날의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신의 이 소장을 가지고 묘당에 묻고 조정 신하들에게 널리 의논하여 절충해서 빨리 시행하신다면 하찮은 저의 다행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신은 산야의 미물로서 지극히 어리석어 마음으로 터득한 계책도 없고 몸으로 경험한 일도 없이 한갓 옛사람들이 남긴 말을 주워모아 장황하게 진달하였으니 외람되고 망녕스러이 군 데에 대한 죄를 기꺼이 받겠습니다. 황공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는 모두 예전 사람들의 말이니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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