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5. 18:24ㆍ역사적 사실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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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 정유(1897) 9월 8일(갑오, 양력 10월 3일) 맑음
34-09-08[12] 오늘의 형세가 황제의 칭호를 올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금부터 황제의 칭호를 쓸 것을 청하는 입전 시민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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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전 시민(立廛市民)과 전 지사(知事) 정재승(丁載昇)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성시(城市)의 미천한 신분으로서 어찌 감히 국가의 대사(大事)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어질고 은혜로운 성상의 은택 가운데에서 생장하였으니, 비록 미천한 신분이지만 남들처럼 귀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은 것도 있고 본 것도 있으며, 떳떳한 마음은 한결같고 티끌만 한 정성도 한결같습니다. 이러므로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여항(閭巷)의 한 가지 옳은 말을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각각 자기 실정을 말하는 것을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채납해 주소서.
우리 폐하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이래로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으시면서도 정치를 지극한 수준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유학(儒學)을 높이고 사도(斯道)를 중시하여 예의의 나라에 문명(文明)을 열었고, 내치(內治)를 잘하고 외국과 사이좋게 지냄으로써 국가의 형세를 태산과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환란이 생기기 전에 미리 대비하여 군려(軍旅)를 새롭게 하였고, 가뭄과 홍수에도 백성들이 이를 의지하여 편안하게 살게 되었으며, 재주 있는 사람만을 등용함으로써 뭇선비들이 다투어 나왔고, 폐단이 생기는 대로 바로잡음으로써 여러 고을이 소생하여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500년 만에 왕자(王者)가 반드시 나오고 36년 만에 대덕(大德)이 더욱 밝아지는 것을 기필할 수 있습니다. 고금을 통해 고증해 보면 비록 삼황오제 때라도 우리나라보다 성대하게 다스려진 적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런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을 가지고 자주 독립을 이루었으나 황제의 존호는 아직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관리들의 상소가 이미 나왔고 유생들의 말도 계속 이르러서 마침내 신들도 감히 진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한결같은 의론입니다. 무릇 천하 만고의 큰 의리와 큰 사업이 해와 별처럼 빛나고 천지보다도 높은데, 그 실질에 걸맞도록 명칭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중외(中外)의 여론이 상의하지 않고도 견해가 일치되니, 여기에서 떳떳한 성품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오늘의 형세는 속히 황제의 칭호를 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폐하께서 비록 겸손한 덕으로 윤허하지 않더라도 지금 그만둘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신들은 지금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감히 낱낱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 백관이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고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따르고 천명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만국공법》에 이르기를, ‘백성이 순종하면 허락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관할하는 것이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천하의 나라로서 국토의 면적이 넓은 경우에는 황제를 칭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 둘러싸이고 산에 막혀 있어서 넓이는 삼한(三韓)과 사부(四府)를 두고 남쪽으로는 탐라(耽羅)와 우산(于山) 등의 나라에서 북쪽으로는 야인(野人)과 여진(女眞) 등의 지역까지 모두 통일 국가가 되어 온전한 형국을 이루었으니, 이 정도의 지역으로도 충분히 제국(帝國)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 삼대(三代)의 제도는 천자(天子)의 기봉(畿封)이 1천 리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영토는 남쪽과 북쪽 끝까지 3600여 리를 통괄하고 있으니,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몇 배 이상이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지(誌)》에 이르기를, ‘백성들은 옛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옛법을 허물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 조선(朝鮮)의 백성은 다만 황제(皇帝)가 귀하다는 것만을 알고 군주(君主)가 높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옛것을 따르면 백성이 편안하게 여기고 새로운 것을 들으면 백성이 의심을 하니, 황제의 칭호로 폐하의 자리가 높아지는 것은 저절로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하계(河薊)를 평정하였을 때, 국가의 형세가 어려움이 많고 군제(軍制)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중흥(中興)의 자리를 겸양하였습니다. 그랬다가 풍이(馮異)라는 신하가 한마디 간언(諫言)을 하자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것은 종묘사직과 민심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오늘의 천하는 바로 대국(大局)이 한번 새롭게 되는 초기입니다. 지구상의 만국(萬國)은 모두 자주 독립으로 일정한 대권(大權)을 삼지만, 위호(位號)는 나라의 습속에 따라서 각각 달라 대황제(大皇帝)라고 하기도 하고 대군주(大君主)라고도 하고 대통령(大統領)이라고도 하며, 정치 체제는 혹 군주가 전제(專制)하기도 하고 혹은 군민(君民)이 함께 다스리기도 하고 혹은 국민이 참여하는 공화(共和)를 하기도 하여 각각 인주(人主)의 권한을 한정합니다. 이것이 《만국공법》이 만들어지게 된 까닭입니다.
우리나라는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따라 처음으로 나라를 열었으므로 의당 제호(帝號)를 일컬어야 했지만, 그 당시 국면(局面)과 사세(事勢)가 진실로 그럴 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자들이 한을 품고 개탄하며 답답하게 여겨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천운(天運)이 좋은 운수로 돌아와서 국운이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 성상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서는 멀리까지 미치는 덕과 중흥의 다스림으로 하늘에 짝하고 표준을 세웠으니, 진실로 만세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지금 연호(年號)를 정하고 경장(更張)하는 날에 미쳐 비로소 위호를 높이고 자주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날이 바로 황제라고 일컫는 그날입니다. 이는 우리의 더없이 큰 경사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각 나라에서도 환히 알고 있는 칭호인 것입니다. 이미 조칙(詔勅)을 제(制)라고 하였으니, 각 나라가 어찌 조선이 황제의 나라임을 모르겠으며, 어찌 폐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군주와 황제는 그 뜻이 마찬가지이니, 외국의 입장으로 보면 통령(統領)처럼 높은 것입니다. 통령도 높고 군주도 높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황제가 있다는 것만 알 뿐 다른 존귀한 것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 폐하의 성대한 덕과 큰 공업을 가지고서 어쩌면 그리도 겸손하여 아직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늦추시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살피시어 속히 황제의 칭호를 정하여 천지가 순환하는 이치를 본받아 황제가 표준을 세우는 도리를 행하심으로써 옛 나라를 새롭게 하는 명에 응하고 대덕(大德)은 반드시 지위를 얻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소서. 그렇게 하시면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휘호(徽號)가 비로소 금석(金石)에 오래도록 전해지고 태자 전하의 효성이 따라서 거듭 해와 달보다도 빛날 것이며, 종묘사직이 이에 힘입어 태평하게 되고 신하들과 백성들이 따라서 생업을 편안하게 여겨,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어 밭 갈고 우물 파는 것을 모두 황제의 힘에 힘입으며 기뻐 춤추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명성이 만국에 빛나고 영광이 사방에 퍼질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시원스레 칙지를 내리시어 지금부터 황제 나라의 칭호를 쓰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것은 그대들이 청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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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 정유(1897) 9월 8일(갑오, 양력 10월 3일) 맑음
34-09-08[11] 명 나라의 계통을 잇고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는 마음으로 황제의 위에 오를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학 곽선곤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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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유학(幼學) 곽선곤(郭善坤)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뭇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전에 참람하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감히 양심에서 우러나온 충심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 ‘이것은 그대들이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므로, 신들은 삼가 여러 번 읽고서 너무도 두렵고 떨려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분의(分義)로 헤아려 보면 진실로 고향으로 물러나서 공손히 조정의 논박을 기다리며 사령(四靈)의 무리와 함께 경축하는 날에 함육(咸育)되어야 마땅하며, 진실로 감히 다시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거나 참람한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을 향한 구구한 신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떳떳한 본성의 의리에서 똑같이 나온 것이니, 형벌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오직 성상을 높여서 추대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다시 성상의 주벌(誅罰)을 범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시고 환히 살피소서.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폐하의 덕화(德化)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신성(神聖)함과 같으며 공적은 은 나라와 주 나라가 중흥한 것보다 뛰어나시니, 황제로 높인다고 해서 더 높아지지 않고 군주라고 해서 더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여 추대하고 싶은 신하의 심정에 있어서는 기필코 군부(君父)를 지극히 높은 지위로 높이고자 하니, 이것은 떳떳한 윤리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겸손하여 그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으신다 해도 온 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극한 심정을 또한 어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나라가 기자(箕子)로부터 1000세(世)를 지내 오는 동안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자주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대개 중화(中華)의 정통은 복희(伏羲)와 황제(黃帝) 이래로 명(明) 나라에 이르기까지 천명을 받아 천자(天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태조(太祖)께서 선양을 받아 왕조를 세워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왕업을 세우고도 명 나라를 섬겼던 것은 의리를 지키고 상도(常道)에 처했던 것입니다. 현재 천지의 운수가 음양(陰陽)이 바뀌는 것은 본래 소장(消長)의 떳떳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만국이 서로 교통하여 차츰차츰 일변(一變)하는 국면을 이루고 있는데, ‘황(皇)’이라 일컫고 ‘제(帝)’라고 일컫는 여러 나라들을 보면 국토가 크거나 부용국(附庸國)을 아울러 관할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각각 자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폐하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대보(大寶)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은 또한 의리에 합당하고 권도(權道)를 행하는 것입니다. 때는 고금(古今)의 차이가 있고 의리는 경(經)과 권(權)이 나누어져 있으니, 태조 때에 있어서는 의리를 지켜서 상도에 처하는 것이 폐하 때에 있어서는 의리에 맞게 권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천리(天理)의 떳떳한 것입니다. 때는 비록 다르지만 의(義)는 바로 하나로 합쳐지니, 지금이 폐하께서 선왕께서 미처 하지 못한 뜻을 추모하고 자손에게 무궁한 기반을 남겨 주는 날입니다. 더구나 《춘추(春秋)》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의리로 말하면, 노(魯) 나라는 비록 작고 초(楚) 나라가 비록 크지만 노 나라를 높이고 초 나라를 배척하였으며, 진(晉) 나라가 비록 좁고 위(魏) 나라가 비록 넓으나 진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위 나라를 가짜로 여겼으니, 옛날 성현들의 상도와 권도에 대한 은미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독 명 나라의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유독 명 나라의 의관(衣冠)을 착용한 것이 또한 《춘추》의 노 나라, 《자치통감강목》의 진 나라와 같으니, 후세의 역사가들이 장차 명 나라의 정통을 누구에게 소속시키겠습니까. 이것이 신자(臣子)들이 더욱 서둘러 호소하여 간절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로는 명 나라의 계통을 잇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에 답함으로써 조종(祖宗)의 공렬을 빛나게 하고 만세토록 왕업을 드리우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나라에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들이 이처럼 거듭 청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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