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麻浦)에 세운 청나라 칸[淸汗]의 비석(삼전도비(三田渡碑))’은 동우(棟宇)가 휘황한데

2023. 3. 1. 21:28역사적 사실 오류

三田渡碑

사적 제101호로서 비신 높이 395㎝, 너비 140㎝이다. 1639년(인조 17)에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이며,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거비(巨碑)이다.

비양(碑陽)에는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滿洲文), 그리고 비음(碑陰)에는 약 2.1㎝ 크기의 한문 해서가 새겨져 있으며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라고 적혀 있다.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篆)하였다.

이 비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뒤로하고 백성의 안위를 위해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한 사실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 치욕의 유적이다.

본래 청 태조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로 보고 서로가 예우(禮遇)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 태종이 대노하여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 임금이 잠시 머무름)하고 항복 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강박(强迫)에 못 이겨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몽고문·만주문·한문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이 비가 유일하다.

 

삼전동 三田洞

밭이 셋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삼전동 동명은 이곳은 원래 서울 근교 한강 5진의 하나인 삼전도로서 마전포(麻田浦)라고도 하였는데삼밭麻田이 있었으므로 을 한자로 취음(取音)하여 삼전동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일설에는 마을에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2권   >   高宗 32년 乙未(1895년) ①   >   7. 迎恩門과 三田渡碑의 철거

7. 迎恩門과 三田渡碑의 철거

 

迎恩門과 三田渡의 비석을 철거하였다. 영은문은 경성의 서문 밖 數里의 거리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는 延詔門이라고 하였으나 順治청국 세조의 연호 편자주 이후에는 영은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詔使를 맞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석은 한강 삼전도에 있는데, 仁祖 정축년(1637)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굴욕을 당한 후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戰功을 기록한 것이다. 故相李景奭이 그 비문을 撰하였다. 이 비석에는 天子가 東征할 때 그 병사가 1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글자는 몽고 글자로 썼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우리 나라는 청나라와의 국교가 이미 단절되어 事大儀節을 모두 삭제하였기 때문에 이 두 개의 유적도 철거한 것이다.

김가진은 金尙容의 후예이다. 그는 이때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제 累朝 동안 피폐했던 치욕을 씻고 臣子의 私讎를 갚았으니 開化가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하였다

 

경난록()  >   을미년(1895)

을미년(1895)

을미년(1895, 고종 32)

유길준(兪吉濬)이 내부대신이 되어 강제로 협박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최면암(崔勉菴, 최익현)을 잡아올려 그와 더불어 일을 하려고 하였는데, 최공(崔公)이 죽을지언정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한갓 모욕만 당하고 떠났다.

학자인 전우(田愚), 김병창(金秉昌), 정윤영(鄭允永) 등을 모두 음직에 차임하여 유학(儒學)을 존숭한다는 명분을 차지하였다. 당시 내외의 상황으로 인하여 속으로 해치면서 겉으로 임금의 위호(位號)를 존숭하여 대군주(大君主)로 올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관제(官制)를 고쳤다. 연조문(延詔門)註 017을 허물고 그 곳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묻었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4월 26일 > 최종정보

인조 16년 무인(1638) 4월 26일(기미) 맑음

16-04-26[07] 일처리가 잘못 되었으므로 대죄한다는 병조 판서 이시백의 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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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신이 병으로 누워 있는 상태에서 삼가 - 원문 빠짐 - 비국에 내리신 전교를 보고서 신은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삼전도(三田渡)의 비석 - 원문 빠짐 - 내수사(內需司)의 돌을 빌려 사용한 것은 백성의 힘을 펴 주려는 것은 아니었고, 동한기가 되어 - 원문 빠짐 - 급작스럽게 캐내어 다듬어서 실어 나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계달(啓達)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간원이 그간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서 차자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실로 신의 일 처리가 잘못됨으로 인하여 온당치 못하다는 하교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의리상 대궐로 달려 나가 벌을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병세가 매우 심하여 몸을 일으킬 수 없으니 사실(私室)에서 황공한 마음으로 석고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안심하고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다.

[-D001] 원문 빠짐 : 

원문은 ‘因諫院陳 缺’인데, ‘因諫院陳’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D002] 원문 빠짐 : 

원문은 ‘缺 於榻前’인데, ‘於榻前’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7월 10일 > 최종정보

인조 16년 무인(1638) 7월 10일(신미) 맑음

16-07-10[04] 삼전도비석에 대한 일은 홍보가 나오면 결정해야 하므로 우선 지체하고 있는 것이라는 비변사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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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삼전도비석(三田渡碑石)은 만들기를 마쳤으니, 이후에는 청나라에 보고해서 알리고 비문(碑文)을 쓸 사람도 내보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통보가 없는지 물어서 아뢰라.’고 전교하셨습니다. 홍보(洪靌)가 비문의 초본을 가지고 갈 때에, 비문을 지은 사람은 관직과 성명을 사실대로 쓰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쓸 사람은 단지 모관(某官) 모(某)라고만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홍보로 하여금 청나라 조정에 말하기를, ‘전서와 예서는 잘 쓰는 사람으로 신중히 뽑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석 뒷면에 글씨를 쓸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홍보가 나오면 비문의 제술이 완전히 결정이 날 것이니 그런 뒤에야 통보해서 청해 올 일이 있게 될 것이므로 우선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전교하기를,

“홍보가 가지고 간 비문은 글자를 배열하여 들여보냈는가?”

하였다.

- 《비국등록》에 의거함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8월 16일 > 최종정보

인조 16년 무인(1638) 8월 16일(병오) 맑음

16-08-16[08] 충청도에서 차사원을 별도로 정해 삼전도의 비석 다듬는 일을 감독하도록 할 것 등을 청하는 공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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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건이 공조의 말로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의 비석(碑石)을 충주(忠州)에서 떠내어 가져오라고 이미 계하하시어 본도에 이문하였습니다. 다만 반드시 겨울 전에 돌을 다듬어야 얼음이 얼지 않아 강물을 따라 내려올 수 있으므로 사세가 긴급합니다. 그래서 변수(邊首)와 석수(石手)를 이미 내려 보냈으므로 마땅히 경관(京官)을 보내 감독하게 해야 하지만 폐단이 없지 않으니, 본도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별도로 정하여 필요한 제구(諸具)와 떠내어 가져오고 마련하는 등의 일을 하는 군사와 야장(冶匠)과 석수를 모두 정해 보내서 즉시 부역(赴役)하도록 충청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비석의 체제(體制)가 높고 큰데 이미 개조하였다면 귀대(龜臺)도 그것에 따라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신들이 석공을 불러 물으니, ‘과천(果川)에 쓸 만한 돌이 있으며 거리도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이 달 안으로 공사를 시작해야 하니, 공장(工匠)과 역군(役軍) 등의 요포(料布)를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전례대로 숫자를 살펴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8월 20일 > 최종정보

인조 16년 무인(1638) 8월 20일(경술) 맑음

16-08-20[11] 삼전도 비석의 새 견본과 관련하여 기지와 개비할 재목의 숫자를 헤아려 본 결과를 보고하는 공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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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건이 공조의 말로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 비석의 새 견본이 지나치게 큰데 이미 고쳐 만들었다면 비각(碑閣)을 만드는 것도 그것에 따라서 고쳐야 하니, 다시 필요한 잡물(雜物)을 자세히 헤아려 마련하여 품지한 다음 시행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 지금 본조의 낭청ㆍ목수(木手)ㆍ석수(石手) 등을 보내서 기지(基址)와 개비(改備)할 재목의 숫자를 헤아려 보게 하였더니, 기지를 물려 쌓는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고 댓돌〔簷階〕과 바깥 담장은 비록 넓지는 않지만 예전의 내단(內壇)을 그대로 쓰면 될 것입니다. 다만 토석(土石)의 공사만 조금 많이 하면 되므로 편의대로 흙을 더 넣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개비할 재목과 부족한 숫자는 모두 27조(條)이니 미리 먼저 베어 놓았다가 얼음이 풀리면 즉시 띄워 내려 보내도록 강원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11월 23일 > 최종정보

인조 16년 무인(1638) 11월 23일(신사) 맑음

16-11-23[19] 강물이 얕아 비석을 운반할 큰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얼음이 풀려 강물이 불어나는 내년 봄에야 운반할 수 있다는 비변사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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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뢰기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체제(體制)를 청나라에서 가지고 나온 뒤 아직도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세가 온당치 못합니다. 해조에 물어보았더니 비석을 이미 수상(水上)에서 채취하였으나 돌이 워낙 커서 큰 배가 아니고는 실어 운반할 수 없는데 금년에 장맛비가 내리지 않아 강물이 매우 얕으므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으니 내년 봄 얼음이 풀려 강물이 불어나면 그때야 운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배종 재신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자세히 전달하게 하여 의심을 품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비국등록》에 의거함 -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7년 기묘 > 3월 25일 > 최종정보

인조 17년 기묘(1639) 3월 25일(임오) 맑고 서풍이 붊

17-03-25[13] 4월에 당번할 기병 가운데 역위전 등을 정하여 보내겠다는 병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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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가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오는 4월에 당번(當番)할 기병(騎兵)의 원래 숫자 497명 가운데 전일에 계하하신 역위전(驛位田) - 원문 빠짐 - 삼전도 비석(三田渡碑石)을 강가에서 비각(碑閣)까지 예운(拽運)할 군사 - 원문 빠짐 - 수구(水口)의 침전(鍼箭)을 채굴할 군사 37명, 모화관(慕華館)을 수리할 군사 10명, - 몇 자 원문 빠짐 - 을 정하여 보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D001] 원문 빠짐 : 

원문은 ‘防 數字缺’인데, ‘防’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D002] 원문 빠짐 : 

원문은 ‘四百 數字缺’인데, ‘四百’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7년 기묘 > 6월 28일 > 최종정보

인조 17년 기묘(1639) 6월 28일(갑인) 맑음

17-06-28[10] 삼전도 비석의 일을 간검하여 보고하는 영접도감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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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비석은 우선 새기지 말도록 어제 전교를 받들어 이미 해조로 하여금 속히 통지하게 하였습니다. 이 삼전도 비석의 일은 도감이 구관할 바가 아닌데, 칙사가 비석 견본과 비문 초안을 보고자 하기를 성화보다 급하게 하니 해장(該掌)을 불러서 비석 세울 곳에 견본을 만들게 하고 또 지본(紙本)을 떠서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을 그려 넣게 하였는데, 이미 두 가지 일의 일자가 지나 독촉이 잇따르니 감히 해장에게 책임을 미룰 수 없습니다. 도감에서 신이 직접 간검하여 지난밤에 사자관으로 하여금 불을 밝히고 서사하게 하여 오늘 아침에 전문(篆文)까지도 이미 썼습니다. 또한 찬술한 이경석은 전본(前本)에 직함과 성명을 모두 썼으므로 이대로 썼습니다. 다만 이미 숭덕(崇德) 3년이라고 썼으니 이는 작년입니다. 따라서 이경석의 직함은 지어 올릴 때의 직함을 써야 하는데, 생각건대 이경석의 질자가 이조 판서의 질자로서 이미 심양에 들어갔으니 이 또한 서로 어긋난 듯합니다. 또 해서를 쓴 사람, 전서를 쓴 사람은 그 당시 누구라고 정하지 않았으므로 단지 아무 관직의 신 아무개 봉교서(奉敎書), 봉교전(奉敎篆)이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지금은 해서를 쓴 사람, 전서를 쓴 사람을 이미 누구라고 정하였으니 곧바로 그 사람의 직함과 성명을 써야 할 듯한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정 역관의 말에, 반드시 비문을 인출한 뒤에 출발할 것이니 속히 새겨 인출해야 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역관 등이 새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말하기를, 한 달 두 달이라도 누워서 먹겠다고 하였답니다. 이는 위협하며 재촉하는 말로서 이 사본을 반드시 가져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경석은 이조 판서로 써넣고 서사관도 사실대로 쓰라.”

하였다.

 

인조실록 39권, 인조 17년 11월 15일 무진 1번째기사 1639년 명 숭정(崇禎) 12년

청나라 칙사의 일에 대한 원접사 정태화의 치계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원접사(遠接使)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였다.

"칙사가 강을 건너 온 뒤에 그의 임무를 탐문해 보았더니, 전일의 속은(贖銀)을 탕감하는 일과 앞으로 기병(騎兵) 동원을 감면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또 정명수(鄭命壽)가 말하기를 ‘청대죽(靑大竹) 15태(駄)와 홍시(紅柿) 20태와 생리(生梨) 10태를 아울러 봉황성(鳳凰城)까지 수송하라. 그리고 삼전도 비(三田渡碑)의 전면(前面)은 마땅히 몽고(蒙古) 문자로 쓰고 후면은 우리 나라의 비문(碑文)을 새겨야 할 것이니, 칙사가 서울에 들어가기 전까지 먼저 후면을 새겨 놓고 기다려 오래 지체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73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7년 기묘 > 11월 16일 > 최종정보

인조 17년 기묘(1639) 11월 16일(기사) 맑음

17-11-16[07] 삼전도비 등에 대해 의처하여 보고하는 비변사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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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렴이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지금 원접사 장계에 대한 영접도감의 초본(草本)을 보니, 그중에 묘당으로 하여금 의처하게 하라는 일이 3건이었습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후면을 먼저 새기고 - 원문 빠짐 - 이 역(役)이 가장 급함을 알았는데, 돌은 넓고 글자는 적어 전본(前本)의 글자 모양을 그대로 쓸 수 없었습니다. 즉시 - 원문 빠짐 - 다시 배서(排書)하여 속히 새기는 역을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외에서 맞이하는 일은 때에 다다라 크게 차질이 생기는 근심이 있을 듯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지금 정 역관(鄭譯官) 등이 편의를 보아 주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을 들었으니, 이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반제(班制)는 의정(議政)이 동반(東班)의 우두머리이고 대군(大君)이 서반(西班)의 우두머리인데, 동반ㆍ서반의 제도는 어지럽혀 어긋나도록 해서는 안 되니 지금 대군이 백관을 거느리는 뜻으로 의절을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이번에는 사체가 중대하므로 특별히 시신(侍臣)을 보내어 원접사와 함께 의논하여 상정(商定)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죽(靑竹)을 구하는 것은 그 수가 매우 많으니 내국(內局)에 조금 저축되어 있는 것을 먼저 보낼 수 없으므로 우선 산지가 멀다고 말하고 속히 해도로 하여금 즉시 베어서 올려 보내도록 각별히 하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 개유하는 일은 당하 문관을 차송(差送)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7년 기묘 > 11월 17일 > 최종정보

인조 17년 기묘(1639) 11월 17일(경오) 맑음. 서풍.

17-11-17[30] 삼전도 비석을 쓰는 일에 적임자가 아니므로 개차해 줄 것을 청하는 형조 참판 오준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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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참판 오준(吳竣)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어제저녁에 삼가 이조가 전한 관문(關文)을 보니, 삼전도(三田渡) 비석을 신이 가서 쓰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진신(搢紳) 사이에서 서예로 이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미천한 신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개차하게 하여 잘 살펴 처리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신다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7년 기묘 > 11월 22일 > 최종정보

인조 17년 기묘(1639) 11월 22일(을해) 맑음

17-11-22[06] 비석을 세울 때의 예운군을 미리 정제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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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공조의 이문을 보니 삼전도(三田渡) 감역(監役)의 첩정(牒呈) 내에, 비석을 세울 때의 예운군(曳運軍) 500명을 미리 정제하고 - 원문 빠짐 - 경기 감사로 여금 부근의 연군(烟軍)을 조발하여 역소(役所) - 원문 빠짐 -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D001] 원문 빠짐 : 

원문은 ‘缺數字 例’인데, ‘例’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D002] 원문 빠짐 : 

원문은 ‘交 缺數字 會’인데, ‘交’와 ‘會’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영조 1년 을사(1725) 11월 17일(신해) 흐림

01-11-17[21] 삼전도(三田渡) 비문을 등서하여 칙사에게 들였다는 영접도감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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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이 영접도감의 뜻으로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 비문의 앞, 뒷면에 새겨진 청서(淸書)와 한서(漢書)를 그들의 요구대로 등서하여 들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9월 7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9월 7일(무술) 맑음

12-09-07[17] 소대를 행하여 《송조명신언행록》을 강하고, 서천부원군 정곤수의 봉사손을 녹용하는 일, 양호의 송공비 비각을 개수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에 대해서는 비석이 있는가?”

하니, 유건기가 아뢰기를,

“사현(沙峴) 아래에 비석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석에 비각(碑閣)이 있는가?”

하니, 심성진이 아뢰기를,

“비각이 있습니다.”

하였다. 윤지태가 승지(홍성보)에게 말하여 전달하여 아뢰게 하기를,

“양호의 송공비(頌功碑)가 비각에 들어 있는 것이 선묘조(宣廟朝)부터였는데 중간에 무너졌으므로 숙묘(肅廟)의 정유년(1717, 숙종43) 연간에 고(故) 직장(直長) 황순승(黃順承)이 아뢰기를 ‘마포(麻浦)에 세운 청나라 칸[淸汗]의 비석(삼전도비(三田渡碑))’은 동우(棟宇)가 휘황한데 사현 아래에 세운 양호의 비석은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기게 내버려 두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온당치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상께서 비각을 세워 비석을 가려 보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지금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으므로 또한 무너질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주서의 말을 들으니 감회가 일어난다. 삼전도(三田渡)의 비각은 높이 솟은 듯이 세워져 있는데 이 사현의 비각은 무너짐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물며 비각을 선조에서 세우게 하였다고 말한 경우이겠는가. 오늘날의 중수 또한 선대의 뜻을 이어받는 한 가지 방도가 되니, 일체 예조 정랑을 보내어 적간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새롭게 수리하고 난 뒤에 아뢰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승정원일기 833책 (탈초본 46책) 영조 12년 9월 7일 무술 17/17 기사 1736년  乾隆(淸/高宗) 1년

上曰, 楊經理有碑耶? 健基曰, 碑在沙峴下矣。上曰, 碑有閣耶? 星鎭曰, 有閣矣。志泰語承旨, 使之轉達曰, 楊鎬頌功碑之有閣, 自宣廟朝, 而中間崩頹, 肅廟丁酉年間, 故直長臣黃順承告達, 以爲淸汗麻浦之碑, 棟宇輝煌, 而楊經理沙峴之石, 一任風磨雨洗, 事體未安云。自上命立閣而覆之, 今已數十年, 故亦不無陊缺之患矣。上曰, 予聞注書言而起感矣。三田渡碑閣翬飛, 而此處未免崩頹, 良可慨然。況碑閣聞是先朝所建云, 今日重修, 亦爲繼述之一道, 一體遣禮郞摘奸, 使之一新修補而後, 奏達, 可也。出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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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정축(1637) 1월 30일(경오) 맑음

 잠시 용골대 등이 초피구(貂皮裘) 가지고 나와 황제의 말로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에 주고자 해서 가져왔는데, 지금 보니 본국의 의복 제도가 이와 같지가 않다. 감히 억지로 입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情理)를 표하고자 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엎드려 사례하였다. 마침내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올리게 하였는데,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가 얼마 후 와서는 묻기를,

“고명(誥命)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 연간에 역신(逆臣)의 난리가 있었을 때 이미 잃어버렸고, 고명은 이번의 난리에 강화도로 보냈습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인지라 잘 보존되었는지는 기필하기 어렵지만, 만약 혹시라도 잘 보전되었다면 추후에 바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서 들어갔다. 얼마 후 초구 한 벌을 가지고 와서 인평대군을 불러 입게 하고, 또 세 벌을 가지고 나와 삼공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또 여섯 벌을 가지고 나와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고, -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또 다섯 벌을 가지고 나와 다섯 승지를 불러다 입게 하고서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산성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애썼기 때문에 감히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자, 대군 이하의 하사받은 사람들 또한 모두들 뜰에 들어가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리고는 가서 노모(老母)를 만나 볼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자, - 이는 그들의 노모가 일찍이 강도로 갔기 때문이다. - 김돌시(金乭屎)가 화를 내며 꾸짖고서 내보내 주었다. 상이 밭가에 앉아 진퇴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시(酉時)에 한(汗)이 비로소 환도(還都)를 명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봉림대군과 봉림대군의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장차 그들을 북쪽으로 데려가려고 해서였다. 상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 빈궁의 막차로 들어가서 빈궁을 만나 보았다.송파진(松坡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진졸(津卒)은 거의 다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강가에 정박해 있었는데, 백관들이 앞을 다투며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상이 강을 건넌 뒤에 황제가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을 통해 건너서 장막(帳幕)으로 나아갔다. 용골대 등이 호행(護行)하는 군병을 이끌고 길의 좌우에 도열하여 상을 인도해서 가니,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하였는데, 길 양 옆에서 슬피 울부짖는 자가 1만 명을 헤아렸다. 살곶이 다리에 이르자 날이 이미 저물어 어두웠으며, 초경(初更)쯤에 비로소 경성에 당도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이때 몽병(蒙兵)이 아직도 도성에 가득하여 이전처럼 노략질하였는데, 다만 궐문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호종하고 온 백관들이 모두 궐내에 머물러 있었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5년 정축 > 1월 28일 > 최종정보

인조 15년 정축(1637) 1월 28일(무진) 맑음

15-01-28[07] 영의정 김류 등을 인견할 때 입시하여 성을 나가는 절차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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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更)에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우의정 이홍주, 호조 판서 김신국을 인견하는 데에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서를 보니 보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많이 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천천히 한다면 혹 완화시킬 방도가 있겠지만 대목 대목 대처하기 곤란한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마 하지 못할 일이 많이 있으니, 이처럼 망극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상이 좌상에게 묻기를,

“대신이 저들에게 갔을 때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서에 있는 내용 외에도 한 말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내용의 말이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인보(印寶)를 바치는 일과 가도(椵島)를 공격하는 일 등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외에 더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저들이 좌우를 물리치고 비밀리 말한 것은 모두가 절목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또 이달 그믐날에 서로 만나기를 원하였는데, 서로 만날 때에는 한(汗)이 장차 이곳으로 건너올 것이고 만난 후에는 상으로 하여금 도성에 들어가 머무르게 하고 싶으며 한은 2일에 회군해서 들어갈 것이라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갈래의 군대는 이미 북방으로 길을 잡아 보냈는데 이는 일도(一道)의 말꼴과 양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전라도로 보낸 군병은 가도를 공격할 때의 선박 만드는 일에 이용되고 있는데 2일에는 또한 마땅히 이곳으로 와서 모일 것이라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사대부의 가속들에게 노략질하지 말라는 일을 언급하였더니 그들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우호한 뒤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들의 하는 일은 매우 기밀(機密)하여 상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비록 호의(好意)라고는 하나 난처한 일이 많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어찌 호의라고 하겠습니까. 일이 이미 이 지경까지 된 이상 또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상께서 성을 나가실 때 중원(中原)이 하사한 책보(冊寶)를 가지고 오게 해서 새 것으로 바꾸어 주려는 것과 이후로 병력을 동원할 경우 명령이 있을 때는 거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부득이 해서 마침내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그 와중에 어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나가서 만날 때의 절차에 대해 저들의 말을 들어보니, 복색은 미복(微服) 차림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국왕이 황제를 뵙는 것은 그야말로 대사(大事)인데 어찌 미복 차림으로 이처럼 위의(威儀)를 형편없게 한단 말인가. 산개(傘蓋)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안 된다. 황제의 앞에서 어찌 산개를 펼 수 있단 말인가. 시위(侍衛)는 해도 무방하다. 옛사람들 중에는 혹 면박(面縛)을 한 경우가 있고, 혹은 대향(戴香)을 한 경우가 있으며, 혹은 해진 옷을 입고 나와서 항복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바로 죄가 있어서 사과를 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정복(正服) 차림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고서, 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런 색깔의 옷차림으로 나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황제의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 처리할 것이지만 그때 가서의 예절은 우리 쪽에서 지시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중원 사람들이 시킨 내용일 것입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때에 닥쳤을 때 반드시 황급한 화가 있게 될 것이니, 먼저 우리 스스로 밖에 장막을 설치하고 미리 예절을 익혀서 전도되는 문제가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무방하다.……’고 하였고, 출행(出幸)하는 도로는 서문(西門)으로 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명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을 내일 아침에 보내되, 최명길로 하여금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명길은 어디에 있는가? 병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내일 일찍 가야 하기 때문에 병이 있는 관계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신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성을 나온 뒤에 그대로 도성으로 들어가려면 선박이 없어서 건널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였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여울물이 얕은데 어찌 건너기가 어렵겠는가.’ 하고, 그들이 또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는 으레 있는 일이 있다.’ 하였으니, 이는 필시 물건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묘년(1627, 인조5) 때에도 각기 군병에게 물건을 준 일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도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강도와 경도(京都)뿐이었는데 이미 모두 탕진되어 구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내용을 말하였더니, 말하기를, ‘어찌 급하게 서둘 필요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사로잡힌 사람 중에 의주(義州)에 이르러 도망간 자는 어찌할 방도가 없더라도 들어간 뒤에 도망 온 자는 의당 잡아서 보내야 하되, 만약 속바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