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인구 4천만 대 5천만

2022. 9. 2. 15:43고대사

삼천리 제7권 제7 > 名將과 此一戰

잡지명 삼천리 7 7
발행일 1935 08 01
기사제목 名將과 此一戰
필자 權悳奎, 柳光烈, 李光洙
기사형태 문예기타

名將과 此一戰
權悳奎, 柳光烈, 李光洙

乙支文德과 薩水戰役

崖溜 權悳奎

1. 乙支文德의 生長出身

薩水戰役이 高句麗 嬰陽王 23년 곳 隋煬帝 大業 8년의 일이니 곳 朝鮮紀元 2945년이요 서기 612년이라. 乙支文德이 이 戰役에 陸軍都元帥인즉 文德의 낳이 아마 30이상 50가량이리니 세기로 치면 朝鮮紀元으로 29세기로 30세기를 걸치고 서기로는 6세기로 7세기를 걸처 산 인물이다.

전설에는 乙支文德이 平壤 郭外의 石多山에서 났다하나 지금 平壤부근에 頓씨가 있어 乙支文德의 자손이라 하며 頓씨 家乘에 乙支公의 후손 乙支遂가 高麗 仁宗 때의 妙淸亂을 平하야 그 공으로 頓山君을 封하얐기 따문에 인하야 頓으로 姓하얐다 하고 또 乙支公의 習射臺 遺址가 石多山 근처 馬耳山 아레에 있다 하얐는데 또 전설에 乙支公의 독서하든 石窟이 石多山에 있다 하니 아마 乙支公이 馬耳山 아레에 나아 石多山의 石窟 속에서 공부하얐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石多山은 바루 平壤 郭外가 아니라 平壤의 西方 70리 가량되는 江西郡 甑山 부근의 해변에 있다.

乙支公은 가난한 집에 났다. 그러나 천성이 騎射를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며 度量과 智畧이 있어 시인이요 군인이요 정치가요 대위인이다. 그럼으로 中國史官이 「乙支文德, 善屬文」이라 「高句麗大臣 乙支文德, 沉鷙有智數」라 하얐다.

이때 高句麗는 대개 世家豪族이 정권을 잡았었다. 그런데 乙支公이 정치사회에 나서게 된 것은 아마 公이 世家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薩水戰役 이전부터 戰功이 있어 武를 尙하는 高句麗로 이를 賞하야 猝然히 大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 乙支文德의 遺跡逸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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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公의 戰績은 아레에 니아기 하려니와 遺跡으로 말하면 公의 居宅은 平壤에도 있었을 것이요 頓씨 家乘에는 公의 舊居地가 平壤의 西北 龍岳 북쪽에 龜村이 곳 거긔라 하얐다.

乙支公의 독서 석굴이 石多山에 있고 習射臺가 馬耳山에 있음은 이미 말하얐다. 公의 전장유적은 薩水 곳 淸川江에 隋軍을 破하든 破軍沼가 있고 淸川江 우에 七佛寺가 있는데 이는 乙支公이 隋軍을 淸川江에 몰아 넣을 때에 강물을 줄이고 닐굽 중으로 하야곰 다리를 걷고 강을 건너며 물이 정강이밖에 안 찬다 하든 七僧의 기념으로 된 절이다.

遺跡으로 제일 큰 것은 遼東둘에 죽어 잣바진 隋軍의 骸骨를 모아 쌓은 경관이었는데 이는 高句麗가 망한 뒤에 唐將 薜仁貴가 헐어 없새고 白塔을 세웠다. 이를 唐太宗이 安市城에 침입하얐을 때에 唐將 蔚遲敬德의 쌓은 것이라 함은 또 訛傳이다.

또 頓씨 家乘에 公의 墓는 平壤西의 大寶山 南쪽 玄岩山에 있다 하얐고 지금에까지 그 자리를 指點하야 아는 이 많으나 歲久崩頹하야 墓인지 아닌지 모르게 된 것은 큰 유감이다. 유감이 어찌 이것뿐이랴. 公의 초상도 傳치 못 하얐다. 또 頓씨 家乘에 公의 석상이 石多山 層岩上에 있드시 漲水로 말미암아 海底에 떨어저 들이가매 그 近傍 村民들이 畵工 安夢鸚을 청하야 公의 상을 그리어 祭하얐다 하얐는데 淸川江水에 倒仆한 公의 석상을 근년에 발견하얐으나 이것좇아 頭面이 破壞되어 보는 이로 하야곰 눈물을 지우게 한다.

또 더욱 한되는 것은 公의 생사년월 좇아 모르는 것이요 그 사업의 기록도 關係外國의 史冊에 그 그림자를 畧干 빛욀 뿐이요 그 功業을 頌贊한 글ㅅ발은 볼 수가 없고 李朝에 오아 公의 功德을 追慕하야 平壤 祥光山에 忠武祠를 세웨 해마다 제사하게 하얐으니 이는 仁祖 때의 일이다. 뒤에 平壤의 南村 長谷里에 옮겻고 또 安州城 內에 公의 祠堂이 있었으니 이것은 李朝 顯宗 때에 세운 것으로 그 니름을 淸州祠라 하얐다. 또 백여년 전에 安州 士民들이 公의 석상과 석비를 城下에 세웠으니 그 碑文은 進士 吉元模의 作으로 그 碑文에 가르되 公의 비가 고대로부터 淸川江 南岸에 있었다 하얐으니 근년에 발견된 頭面破壞의 석상도 정말 고대의 석상임을 알겠다.

3. 高隋의 國力比較

嬰陽王의 父王인 平原王은 어진 님검이다. 內治에 힘을 들여 국력을 충실케 하얐으니 그 大槪를 말하면 農桑을 권하야 나라이 富케 하얐음은 물론이어니와 이때 문명이 한참 滿熟한 시대라 宮城의 건설, 市街의 성립, 官舍의 설치 등이 俱備하얐으니 平壤의 外城인 長安城이 이때의 서울로 궁성의 주위가 약 5리에 金宮玉樓가 눈을 어리고 시가는 田자형으로 구분하야 市區가 대개 180區이요 平壤 全市의 人戶가 21만 5백여 戶에 상비병이 30만이요 남은 여러가지 중에도 曇徵의 그림과 王山岳의 琴調 百餘曲과 李文眞의 國史 백여권이 國粹를 발휘하야 盛世를 粧飾하얏다.<95> 이 때 삼국의 판도를 말하면 지금 朝鮮半島의 忠淸北半으로부터 滿洲大幅은 高句麗가 차지하야 훌륭한 一大帝國을 일우고 반도의 南은 百濟, 新羅가 分領하야 인구를 합하면 4천만에 달하는데 中國으로 말하면 隋라는 니름밑에 저의 개국이래, 남북이 통일되어 한족의 인구가 약 5천만이니 朝漢 兩民族의 인구가 대개 상이한데 隋의 文帝(煬帝의 父)가 이 中國統一의 餘威를 가져 高句麗를 엿볼 새 嬰陽王에게 보내는 국서에 「왕은 생각하라. 浿水(지금 遼水)가 넓다한들 長江(楊子江)과 어떠하며 國兵이 많다한들 陳國(隋에게 망한 강남의 國)과 어떠하랴. 朕이 왕의 罪過를 責할진대 무삼 大力을 들이랴만 그래도 은근히 曉喩하야 왕의 自新을 바라노라」(抄譯)하얐다.

嬰陽王은 高句麗 季世의 짝 없는 英主이라 벌서부터 隋와는 양립치 못할 것을 헤알여 오든 차에 왕의 9 2월에 친히 西征에 임할 세 靺鞨兵 萬餘로 선봉을 삼고 姜以式으로 元帥를 삼아 대군으로 遼西를 擊入하며 대왕은 후군을 거늘이어 뒤를 니있다. 隋 文帝가 이 소문을 늗고 수륙군 30만을 發하야 潮水같이 驅入하얏다. 대왕이 대군을 命하야 臨渝關에서 屬戰擊破하니 적병이 退走하는 중에 死傷이 과반이요 적의 兵船은 我 水軍의 猛擊과 風浪을 遭하야 거의 覆沒하니 死者-10 8, 9. 隋의 擧國이 驚惶하얏다. 이 전쟁이 무릇 8개월에 달하얐다.

4. 高隋의 再戰과 乙支의 薩水大捷

姜以式의 臨渝關 戰捷 후에 嬰陽大王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매 南北隣國이 다 猜忌하는 중 더욱 新羅와 百濟는 隋의 高句麗 再구*의 뜻이 있을 줄을 헤알이고 使를 보내어 高句麗 침을 꼬드기나 隋 文帝는 前㤼이 있어 이를 사절하드니 文帝가 죽고 그 아들 煬帝가 서서는 吐谷軍(而藏地) 東突厥(蒙古地) 등 제국을 朝貢받고 兼하야 해마다 豐登하야 창고가 넘처가고 게다가 煬帝는 巡遊를 좋아하야 3천리 운하(直隸省 通州로부터 浙江者 抗州에까지)에 龍舟놀이를 하며 여러 貢國을 巡覽할 새 啓民可汗의 帳(今 山西省)에서 高句麗 使者를 맞나 突厥이 高句麗에도 조공함을 알고 高句麗 시기의 마음이 꼭뒤까지 오르는데 寵臣裵矩가 先帝의 부끄럼을 씻으라 꾀이고 또한 高句麗 서울 平壤의 佳麗함과 皆骨山(金剛山)의 靈秀함을 침이 마르게 니야기 하야 煬帝의 욕심을 닐으컸다.

嬰陽王이 百濟 新羅가 隋를 通하고 隋의 煬帝가 東侵의 욕심이 있음을 미리 헤알인 지라 隋와의 作戰 계획을 의론할 새 幾萬의 군사는 南으로 發하야 百新 兩國을 경계하고 數十萬兵으로 隋를 경비하는데 대왕은 친히 大陸大元師가 되고 乙支文德은 陸軍元師요 王弟 建武는 水軍元師라 水陸 양면을 똑같이 보되 만일 隋가 전쟁을 닐으키면 대거 침입하리니 저윽이 操心할 *라 하야 이번에는 進攻의 策을 쓰지 말고 先守後戰策으로 인민을 命하야 성내에 入居케하고 將土를 命하야 假戰假敗하야 각 요새에 退守하다가<96> 적의 군사가 疲勞한 뒤에 공격하기로 하얏다.

嬰陽王 22(서기 611) 6월에 隋의 煬帝가 高句麗 치는 詔書를 나리어 翌年 정월에 涿郡(今 直隷省 ■縣)에 집중케하고 戰備를 하는데 새로 지은 兵船이 3백艘요 兵車가 5萬乘이며(乘은 一車四馬) 淮南 江南의 수군 7만을 發하야 수군을 증가하고 軍需를 운반하는 役夫만 數十萬人이라. 수륙에 떠드는 소리가 밤낮 끄치지 아니 하드라.

翌年 정월에 煬帝가 ■郡에 이르러 諸軍을 節度할 새 좌우 각 12군으로 낞우니 기병이 4단에 40隊요 보병이 4단에 80隊요 輜重兵과 散兵이 다 각각 4단이라. 團마다 色을 달리하고 보병이 사이사이 끼어 모다 24군이 1일에 1군씩 출발하야 40일만에 다 출발하니 首尾가 960리에 뻐치고 기발이 하눌을 가리며 북소리 山河를 울리고 御營軍이 뒤를 니어 또한 80리에 뻐치니 正兵이 1,133,800에 號를 2백만이라 하고 輸運兵이 또한 150만이니 中國 有史 이래 未曾有의 大動兵이라. 그 침입의 선로는 ()은 御營軍과 其外 10여군이니 煬帝가 친히 거늘여 遼水를 건너 遼東 각 성을 치기로 하고 ()은 大將 宇文述 등의 9軍이니 또한 遼水를 건너 바루 平壤城을 치기로 하고 수군 10여만은 水軍總管 來護兒가 거늘여 海路로 좇아 大同江으로 들어올라 宇文述과 합세하야 平壤을 치기로 하얐다.

이에 계획하얐든 高句麗 대장 乙支文德이 遼河 北西의 軍兵을 걷어 遼河를 직히니 3월에 隋軍이 오아 河西 上下 數百里에 結陣하야 우글우글하며 隋軍 제일 용장, 선봉 麥鐵杖이 浮橋를 매어 河水를 넘으려 한다. 乙支將軍이 諸將으로 迎擊하야 麥鐵杖 등 수십 將士와 만여 병졸을 버이고 浮橋를 끊었다. 隋兵이 물에 달려들어 浮橋를 다시 매며 격전하는지라 乙支將軍이 예정한 계획대로 거* 패하야 퇴군하얐다. 이에 煬帝가 그 전군을 몰아 河水를 건너 遼東 각 성을 圍攻하며 宇文述 등 9군은 乙支장군을 좇아 平壤城을 치려하얐다.

이를 앞하야 來護兒의 거늘인 수군 10여만은 바다를 건너 浿江口로 들었다. 高句麗 수군元師 建武는 수군을 각처에 숨어 있게 하고 平壤城下 인가에다 布泉을 걸어 널고 隋兵의 상륙을 내벌여 두었다. 隋의 정병 4만이 먼저 城下에 돌진하야 金帛을 노략하노라 隊伍가 산란하얐다. 建武元師가 決死隊 5백명으로 羅郭空寺 중에서 나아가 이를 돌격하야 破하고 諸軍을 호령하야 쫓아치며 각 處의 수군이 일시에 나아가 한께 쳐 부시니 隋軍이 서로 짓밟아 죽은 자- 무수하고 江口에서 선박을 擊沉하니 來護兒- 겨우 小艦을 타고 단신으로 도망하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매 隋의 糧艦이 어찌 남았으랴. 宇文述의 대군이 平壤에 온다한들 장차 무엇을 먹으리요.

乙支장군이 遼河에서 퇴군하야 隋兵의 虛實을 탐지하려 하야 降使者의 맵시로 宇文述의 陣을 찾었다. 이에<97> 그 虛實을 다 알고 돌아왔다. 宇文述 등 上下가 나중에야 속은 줄을 알고 사람을 빨리 보내어 다시 맞나기를 청하얐으나 일은 벌서 늦었다.

宇文述 등이 급히 행군하야 乙支장군의 유인에 빠졌다. 隋兵이 平壤에 이르니 인가가 막끔 비고 성내외가 고요하얐다. 述 등이 乙支장군의 七戰七走에 속아 平壤에 왔으나 내용을 알 길이 없고 來護兒의 소식이 감감하며 降伏할 문서 조사를 하는 중이라든 高句麗 정부의 회답이 5일을 지나 10여일이 넘어도 도무지 動靜이 없음으로 諸軍을 지휘하야 攻城을 시작하얐다. 어찌 뜻하얐으랴. 城上으로부터 외쳐 가르되 너의 小軍은 陷沒을 당하고 糧艦이 모다 침몰하얐으니 너이가 무엇을 먹고 살려느냐. 宇장군아 어리석다. 七戰七走를 어찌 생각하는가. 닐굽번 패토록 이기었으면 그만두는 것이 어떠하냐고 비웃는 말을 전하고 虜獲한 바 隋 수군 將卒의 印信, 旗幟를 던저주며 일시에 旗幟가 사면에 곶히며 소뇌, 활살이 비오듯 하얐다. 述 등이 이제야 일의 틀림을 알고 退還할 새 淸川江에 이르니 물이 그리 깊지 아니 한지라. 다투어 건너는 중에 상류에 막았든 沙*을 터놓으니 물이 폭력으로 나리 밀리고 뒤의 추격이 급하야 빠저 죽는 자 맞어 죽는 자 밟히어 죽는 자 놀라 죽는 자가 이루 셀 수가 없는데 남아 쫓겨가는 자- 一日一夜에 450리를 달려 도망하야 鴨綠江을 건너 遼東에 가아 兵數를 점검하니 術 등의 거늘인 九軍의 30만5천이 겨우 2천7백이 남었다. - 딱하다. 군사는 백의 하나골도 남지 못하고 軍需輜重은 모다 高句麗의 虜獲品이 되었다.

또 앞서 隋의 遼東征伐하든 군사는 遼東 각 성을 쳐 하나도 함락지 못하고 將卒만 喪하얐으며 더욱 烏列忽(遼東城)에서는 아주 全沒을 당하야 3월로부터 7월까지 4, 5朔동안에 遼東벌판이 피ㅅ빛, 비린내로 化하얐다. 이에 隋의 24군의 數百萬名이 전멸되고 虎賁郞將 衛文昇이 殘軍 數千으로 煬帝를 보호하야 가지고 도망하얐다. - 전쟁에 죽은 자도 끔찍하거니와 隋의 수백만 寡婦는 장차 어찌될 것인가.

隋 煬帝는 이 뒤 억지로 제 2, 3회의 전쟁을 닐으켰으나 다- 뜻을 얻지 못하고 니내 威信이 떨어저 내란으로 하야 몸을 죽이고 나라까지 망하얐다.

乙支장군은 이렇듯 큰 전쟁에 큰 승리를 얻고 隋兵의 각골을 뫃아 쌓아 승전의 기념탑을 半空에 둥두렷이 올리어 京觀이라 하얐다.

이 때에 高句麗의 威權은 세계를 누르고 국민의 의기는 하눌을 치받었다. 아 乙支公이어. 公은 과연 사람이 아니요 신이로다. 만일 신이 아니요 군인이요. 사람에게 두고 말한다 하면 公은 학자요 시인이요 군인이요 정치가요 대위인이로다. - 거룩거룩하다. 公이어 乙支公이어.98

百濟 刀比山城戰과 金廋信

柳光烈

신라에 태종왕이 즉위하든 당시에는 조선 안에서 신라가 몹시 미움을 밧든 해이다. 신라가 가튼 동방에 잇으면서 바다 밧 당나라의 구원병을 청하여 오는 것이 몹시 고구려와 백제사람의 맘을 충둥한 것이다. 이 해에 백제, 고구려, 말갈(靺鞨) 세 나라 군사는 련병(連兵)하야 신라 북편 33()을 처서 빼아섯다. 이 소식이 당나라에 들어가자 당나라에서는 자긔 나라에 호의를 표하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야 그 이듬해 2월에 당나라 장수로 영주도독 정명진(營州都督 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左衛中郞將 蘇定方)을 보내서 고구려를 들이치니 그해 여름 5월에 정명진 등은 요수(遼水)를 건너서 요동에 나타난다.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군사 수효가 적은 것만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역전하야 피차에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이엇는데 그들을 싸홈에 당치 못할 것을 알고 고구려 촌락에 불을 질르고 다라낫다.

이러케 당나라 군사도 패하여 다라나는 것을 본 백제(百濟)에서는 더욱 교만한 맘이 생기어 이해 2월에 사치스럽고 고웁게 태자궁(太子宮)을 새로 고처노코 왕궁 남편에 망해정(望海亭)을 지으니 멀리 바라보이는 경치가 몹시 아름다우며 더욱 백제는 그때 미술이 극도로 발달되엇는 때이라 주란화각(朱欄畵閣)에 령롱한 색채는 천하 사람의 눈 놀래일 듯. 따라서 인심은 숭전과 유흥에 취하야 교만하 맘이 싹돗기 시작하엿다. 이러한 때에 난데없는 빗갈 붉은 말 하나이 도성의 북악(北岳) 오함사(烏含寺)에 뛰어 들어와서 불전(佛殿) 근처로 돌아다니며 슬피 울더니 수일 후에 죽어버리엇다. 이러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잇다하야 식자사이에는 나라에 무슨 변이 일지 안을가 근심하게 되엇다.

이러케 백제에서 정자나 지어노코 아름다운 애자를 모아노코 노래를 듯고 술을 먹고 나라의 임금이나 중대한 신하가 향긔잇는 술에 취하고 어엿분 색시를 안고 누엇는 사이에 신라는 전년에 30여 성을 빼앗긴 것을 분히 녁이어 상하 일심으로 백제를 치게 되엇다.

김유신은 출정하기 전에 임금에게 나가서<99

「백제의 군신이 사치하고 음란하야 나라일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이 때야말로 백성의 질고를 무릅스며 죄 잇는 그 나라를 칠 때입니다.

하고 백제로 진군하엿다.

이 싸홈에 특출하게 싸와서 죽은 장수가 둘이 잇스니 하나는 왕족 김흠운(金歆運)이요 하나는 몸에 가사를 입은 중 추도(騶徒)이다. 김흠운은 모든 장졸이 백제와 싸호느라고 전장에 나갓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전장에 나가려는 결의를 하엿다. 평소에 그와 친근하든 사람은 그가 일즉이 화랑도(花郞徒)로 다니어서 전장에 나가서 뒤로 물러서지 안는 기개가 잇을 뿐 아니라 한번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갑흐려는 사람인 줄 앎으로 「그가 나가면 다시 도라오지 못 하리라」고 예측하엿다.

그는 낭당대감(郞憧大監)이란 중임으로 출전하엿다. 그는 한번 출전하게 된 후에 귀족이엇만 자긔 집에서 편안히 자지 아니하고 풍우를 무릅쓰고 병졸들과 함끠 감고(甘苦)를 가치하엿다. 행군하여 백제 영양산(營陽山) 알에 이르러 조천성(助川城)을 치러 들어가려 하는데 백제 군사가 밤중에 풍우가치 모라와서 훤-히 밝을 때에 토성(土城)을 넘어서 들이 밀리니 신라 군사는 별안간 당하는 일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로 이리 몰치고 저리 몰리며 자상천답이 되어 야단인데 백제 군사들은 이 혼란한 틈을 타서 급히 치니 쏘다지는 화살이 비오듯 한다. 흠운은 이 소란한 중에도 말을 타고 18척 장창을 빗겨들고 백제 군사가 오는 것을 보아 한숨에 내뭇지를 긔세를 보이고 섯다. 백제 군사가 쏘는 화살은 흠운의 전후좌우로 쏘다지고 간혹 흠운의 갑옷을 맛치고 튀어 떠러지는 것 보인다. 흠운은 이 생사가 순간에 잇는데도 의연히 웃둑 서서 『화살이 감히 나야 마치랴 하는 듯이 서 잇다. 이때 어대로 조처 왓는지 대사 전지(大舍 詮知)가 달려와서 흠운을 붓들고 『대감- 백제놈들이 암중(暗中)에 습격을 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니 어서 잠간 피하엿다가 후일을 보십시다』하니 흠운은 여전히 장창을 빗겨들고 우연히 서 잇다. 전지는 안탁가운 듯이

『대감 이러케 지척을 물변하는 속에서 상사 나시면 대감이 이러케 상사나신 줄을 누가 알며 더구나 대감은 신라의 귀족이요 대왕의 아들가튼 사람이니 만일 적병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놈들은 더욱 자랑삼아 떠들어 의긔양양할 것이요 신라군사로는 더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그러니 어서 도망하십시다』

하고 끌엇다. 흠운은 쓸쓸히 우스며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이미 일명을 나라에 허락하엿으니 남이 알고 모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잇으랴』

하면서 웃득 서서 꼼작도 아니한다. 이때 다른 막하 장수도 뛰어와서 흠운의 말곱비를 잡아끌며

『어서 달아나자』

고 하니 흠운이 허리에 찻든 칼을 빼어 부하를 쫏고 백제 군사를<100> 마저 싸와 수십명을 죽이고 죽엇다. 이를 본 그 막하장수 대감 예파(大監 穢破)와 소감 적득(小監 狄得)이 모다 그 엽헤 잇다가 싸와서 죽고 보기당주(步騎憧主) 보용나(寶用那)도 흠운이 죽엇다는 말을 듯고

『아- 흠운이 가튼 이는 귀족으로 태어나서 영화로운 지위에 잇고 남들이 모다 애석히 녁이는데도 오히려 충절을 직혀 죽엇는데 나 보용 나 가튼 사람은 산대야 별로 유익도 없고 죽는대야 해가 없으니 남아 잇어 무엇하리요』

하면서 내달어 싸와 수삼인을 죽이고 죽엇다. 신라 임금은 이 말을 듯고 몹시 애통하며 세 사람의 벼슬을 올려주고 백성들도 모다 그들의 나라를 위하야 죽은 것을 슬퍼하엿다. 그때 사람들이 이번에 죽은 여러 장수들이 영양산 알에서 그러케 죽엇다 하야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불르게 되니 석양산로(夕陽山路)에 나무하여 가지고 지나가는 초동(樵童)이나 수양버들 알에 물동이 이고 가는 여인네들까지 모다 이 슬푼 양산가를 불르며 눈물지엇다.

또 한 사람인 추도(騶徒)는 사양(沙陽)땅의 사람이니 삼형제 중에 가운데 동생이엇다. 일즉이 불도(佛道)에 뜻을 두고 산문(山門)에서 도를 닥가 법명을 도옥(道玉)이라 하며 실제사(實際寺)에 가서 아츰 저녁으로 법종과 불경을 친하고 잇엇다. 이리는 중 세상은 소란하야 대왕이 군사를 내어 백제의 원수 갑흘 싸홈을 한다는 말을 듯고 동무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듯건대 중이 된 사람은 우으로 술업(術業)을 정밀하게 닥가서 도성(道性)을 회복하든지 그러치 안으면 도용(道用)을 이르키어 남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형용은 상문()과 가트되 한가지 착한 일도 취할 것이 없으니 종군(從軍)하야 내 몸을 죽이어 나라에 갑는() 이만 못하다』

하고 법의(法衣)를 버스며 군복을 입고 취도라고 일름을 고친 후 병부(兵部)에 나가서 3천당()의 군사가 되어 수군(隨軍)하니 기고(旗鼓)가 상당하며 창검을 들고 적진에 돌입하야 역시 수삼인을 죽이고 죽엇으니 이러케 호화로운 생활을 하든 귀공자나 산문에 도를 닥는 중까지 전장으로 뛰여 나가느니만큼 사기(士氣)는 하늘을 찍를 듯 하엿다.

이러한 중에 김유신은 가을 9월에 백제 도비천성(刀比川城)을 처서 익이엇다. 이 싸홈이 잇기 몃 해 전에 신라의 부산현령(夫山縣令)으로 잇든 조미압(租未押)이 백제군사에게 잡히어 백제의 좌평(左平) 벼슬한 임자의 집 종이 되엇섯는데 조미압이 임자를 자긔의 신세를 자탄하면서도 공순하고 부지런히 임자를 섬기엇기 때문에 임자는 타국에 잡혀와 잇으며 부지런히 상전을 섬기는 것을 불상히 녁이어 원만하면 출입을 감시하며 가두어 노코 부려 먹을 것이로되 맘대로 드나들게 하엿엇다. 조미압은 이 틈을 타서 빠저 도망하야 달아와서 백제국 내정을 자세히 김유신에게 보고하엿다. 김유신은 조미압이 신라 나라를 위하야 충성되고 맘이 발서 쓸만한 줄을 알고 말하기를<101

『내가 들으니 임자가 백제의 일을 마타서 한다는 말을 듯고 한 번 그와 통정(通情)을 하여보고 십흐되 할 도리가 없더니 이제 그대를 맛나니 죽고 살 말을 서로 할 만하야 말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서 내 뜻을 좀 말하여 주지 못 하겟소』

하엿다. 조미압이 대답하기를

『령이 나를 불초(不肖)하다 아니하시고 식히신다면 죽어도 후회 아니 하오리다』

하고 쾌히 승락하며 다시 사지와 다를 데 없는 백제에 가서 임자를 맛나게 되엇다. 임자를 맛나서

『소노가 댁에 종이 되고 이미 백제 국민이 되엇사온데 맛당히 이 나라의 풍속을 좀 알아야 하겟기로 수십일 동안 나가 돌아 다니며 구경을 하엿사온데 마치 길르든 개나 말이 주인을 사모하고 참아 니즐 수 없는 것과 가타서 다시 돌아왓읍니다』

하니 임자가 그런 줄로 밋고 책망치 안앗다. 그 후에 조미압이 조용한 틈을 타서 많님자에게 말하기를

『전자에는 무서워서 바로 말슴치 못 하엿사오나 실상은 신라에를 갓다왓읍니다』

하고 죽을 세음치고 말을 건네엇다.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