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11:08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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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직지 제3권 / 유관록(留館錄) 상 ○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19일-30일]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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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풍수(北京風水)
예부터 제왕(帝王)이 도읍을 세운 지역은 반드시 위로 천시(天時)에 합하고 아래로 지리에 맞았다. 북경은 천문(天文)에 있어서는 기(箕), 미(尾)의 분야가 되고, 지지(地志)에 있어서는 ‘우공(禹貢)’ 기주(冀州)의 지역이 된다.
오른쪽으론 태항산(太行山)을 끼고서 화산(華山)으로 백호(白虎)를 삼았고, 왼쪽으론 창해를 두르고서 태산(泰山)으로 청룡(靑龍)을 삼았으며, 북쪽으론 의무려(醫巫閭)를 뒤로 하고, 남쪽으론 구하(區夏)에 닿아서 하제(河濟)로 금대(襟帶)를 삼고 숭산(嵩山)으로 경계를 삼았다. 회남(淮南)의 모든 산들은 제2중의 안산(案山)이 되고, 강남(江南) 오령(五嶺)의 모든 산들은 제3중의 안산이 되었다.
수세(水勢)로 말하면, 백하(白河)는 남쪽으로 통주(通州)에 흐르니 청룡수(靑龍水)가 되고, 옥천(玉泉)은 남쪽으로 통혜하(通惠河)에 흐르니 백호수(白虎水)가 된다. 그리고 노구하(蘆溝河)는 물굽이가 완평(完平)의 경계로 들어가니 주작수(朱雀水)가 되고, 습여(濕餘), 고량(高梁), 유하(楡河) 등의 물은 모두 도성 북쪽을 돌아서 동쪽으로 백하에 들어가니 현무수(玄武水)가 된다.
바람이 없는데도 흩어지고 물이 있어서 경계를 이루며, 산을 등져 샘이 깊으니 토질은 윤택하고, 바다에 닿아서 조수가 스치니 토양(土壤)은 비옥하다. 감여가(堪輿家)에서 이른바 ‘천리대와(千里大窩)’라는 것이니, 참으로 좋은 풍수이다.
오장원(吳長元)의 《신원지략(宸垣識略)》에,
“태항산은 서쪽에서 내려와 길게 뻗어 북쪽으로 가서 위(魏), 진(晉), 연(燕), 조(趙)의 경계에 이어져 동쪽 의무려에서 끝난다. 중첩된 봉우리가 옹호하면서 감아 도니,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또한,
“태항산이, 삼위(三危)에서는 머리를 내밀고, 하탁(河坼)에서는 기세가 약해지다가, 북쪽으로 가서는 높아져서 항산(恒山)이 되고, 지엽의 멧부리와 중첩된 봉우리들은 모두 연(燕) 지방으로 내달려, 질서 정연하게 다시 이어져 동쪽으로 수십백 리를 뻗어 바다 서해자(西海子) 로 들어갔다. 이것을 ‘서산(西山)’이라 일컫는데, 이는 경사(京師)의 오른팔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의산(醫山)과 서산은 바로 한 산에서 갈라진 줄기이다.”
하였다. 그리고,
“상고컨대, 주자(朱子)가 연도(燕都)의 형세를 논할 적에 태산과 화산(華山)을 가지고 청룡, 백호를 삼은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태산의 산맥이 혹시 옛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함곡(函谷)의 서쪽으로부터 와서 동해(東海)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산수(山水)가 다 순탄하니, 그 기운이 능히 응취(凝聚)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제문집(御製文集) 속의 ‘태산 산맥은 성경(盛京)의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금주(金州)의 여순구(旅順口)에 이르러 바다에 들었으니, 바다 가운데 열두어 개의 섬들은 모두 그 산맥이 드러난 것이다. 산동(山東) 등주(登州)의 복산(福山)에 이르러선 단애산(丹厓山)이 서남쪽에서 솟아 800여 리를 뻗어 가다 맺혀서 태산이 되었는데, 그 높디높고 구불구불 구부러진 모양이 오악(五嶽)의 우두머리가 된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제수(濟水)는 순조롭게 달리고 대산(岱山)은 거슬러 치솟아,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두 주에서 퍼져 화산 지맥과 서로 접한다. 그래서 중원의 형세가 매우 견고하게 맺히고, 연도(燕都)는 또 오른쪽으론 산, 왼쪽으론 바다, 그 사이에 싸여서 자연 깊숙한 구역이 된다. 이상은 주자가 알지 못한 바다.”
하였다.
도성(都城)의 수세는 모두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 댄 것이다. 대개 옥천(玉泉)의 물이 동남으로 40리를 흐르다가 고량하(高梁河)를 거쳐 도성 서북 모퉁이에 이르러선 도성의 해자[濠]를 빙 둘러 이룬다. 동으로 한 갈래를 나눠 덕승문(德勝門) 오른쪽 수문으로 들어와 모여서 십찰해(十刹海)가 된다. 그 하류가 또 자금성(紫禁城)의 해자를 빙 두르니, 이를 ‘금호(禁濠)’라고 한다.
금호가 또 동으로 한 갈래를 나눠 지안문(地安門) 왼쪽 수문을 경유, 들어가 옥하수(玉河水)가 되고, 다시 자금성 동남쪽 모퉁이로 흘러나가 중어하교(中御河橋), 북어하교(北御河橋)를 거쳐서 정양문(正陽門) 동쪽 수문을 경유, 내성(內城)의 해자에 모인다. 북경의 성첩 제도는 남성(南城)에만 안팎의 구별이 있다. 또 동편문(東便門) 왼쪽 수문을 경유, 도성의 해자로 흘러 모여 동으로 운하(運河)에 들어간다.
금호 서쪽 한 갈래는 지안문 오른쪽 수문을 경유해서 들어가 모여 태액지(太液池)가 되고, 남쪽으로 흘러 금오옥동교(金䱯玉蝀橋)에 이른다.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진다. 그중 동쪽 갈래는 궁성(宮城)의 해자가 되어 동쪽으로 옥하수에 모인다. 그중 서쪽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자금성 서남 모퉁이를 나가, 서천안문(西天安門) 및 태청문(太淸門)을 둘러 지나서 동천안문(東天安門) 밖에 이르러, 동쪽으로 궁성의 해자와 도성의 해자에 모인다. 서쪽으로 한 갈래가 나눠져서 서직문(西直門) 왼쪽 수문을 경유해 들어가, 남쪽으로 흘러서 부성문(阜成門)을 거치고 선무문(宣武門) 서쪽 수문을 경유, 내성의 해자로 흘러 모인다. 그 나머지 가방(街坊)에 있는 자그마한 개천은 다 기록할 수 없다.
북경연혁(北京沿革)
서계(書契) 이전의 연대(年代)나 국도(國都)는 상고할 수가 없으나, 경전(經傳)에 나타난 것은 황제(黃帝)가 도읍한 탁록(涿鹿)이 이곳이다. 이 때문에 이백(李白)의 ‘북풍행(北風行)’에,
연산의 눈송이 크기가 돗자리만 한데 / 燕山雪花大如席
조각 조각 날려 헌원대에 떨어지네 / 片片吹落軒轅臺
라 하였다.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유릉(幽陵)이라 하였다. 도당(陶唐)에서는 유도(幽都)라 하였는데, 화숙(和叔)을 살게 한 곳이다. 우(虞)에서는 유주(幽州)라 하였는데, 공공(共工)을 내쫓은 곳이다. 대개 옛날에 9주(九州)가 있었는데, 순 임금 때에 기주(冀州)와 청주(靑州)가 지역이 넓다고 하여 청주를 나누어 영주(營州)를 만들고, 기주를 나누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주(州)를 더 만들었다. ‘순전(舜典)’에, ‘12주를 처음 만들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우(禹)가 수토(水土)를 다스리고 다시 구주를 만들었으며, 은(殷), 주(周)는 그대로 따랐다. 주에서는 여기에 소공(召公)을 봉하고 국호를 연(燕)이라 하였다. 진(秦)에서는 상곡(上谷)이라 하였으며, 한(漢)은 연왕(燕王)을 봉하였다가 뒤에 광양(廣陽)이라 고쳤으며, 진(晉), 당(唐)은 범양(范陽)이라 하였다.
요 태종(遼太宗)은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를 두었다. 성 둘레는 36리요, 8문(門)이 있었다. 동쪽은 안동문(安東門)ㆍ영춘문(迎春門), 남쪽은 개양문(開陽門)ㆍ단봉문(丹鳳門), 서쪽은 현서문(顯西門)ㆍ청보문(淸普門), 북쪽은 통천문(通天門)ㆍ공신문(拱辰門)이라 했다. 송(宋)은 연산부(燕山府)를 두었다. 성의 둘레는 27리요, 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금(金) 나라 임금 양(亮)이 연경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연이 열국(列國)의 이름이므로 경사(京師)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마침내 성도(聖都)라 고쳤다가 다시 중도(中都)로 고쳤다. 이때 성의 둘레는 75리요, 13문(門)이 있었다. 동쪽은 선요문(宣曜門)ㆍ양춘문(陽春門)ㆍ시인문(施仁門), 남쪽은 풍의문(豐宜門)ㆍ경풍문(景風門)ㆍ단례문(端禮門), 서쪽은 호화문(灝華門)ㆍ여택문(麗澤門)ㆍ돈의문(敦義門), 북쪽은 통천문(通天門)ㆍ회성문(會成門)ㆍ숭지문(崇智門)ㆍ광태문(光泰門)이라 하였다.
원(元)은 대도(大都)라 하였는데, 그 궁궐의 유허(遺墟)는 지금의 안정문(安定門) 밖에 있다. 성의 둘레는 60리요, 11문이 있었다. 동쪽은 제화문(齊化門)ㆍ숭인문(崇仁門)ㆍ광희문(光煕門), 남쪽은 여정문(麗正門)ㆍ문명문(文明門)ㆍ순승문(順承門), 서쪽은 화의문(和義門)ㆍ평칙문(平則門)ㆍ숙청문(肅淸門), 북쪽은 건덕문(建德門)ㆍ안정문(安定門)이라 한다. 그 후에 개평부(開平府)로 도읍을 옮기고는 상도(上都)라 일컬었으니, 바로 지금의 거용관(居庸關)이다. 대도(大都)를 고쳐 중도(中都)라 하고 부(部), 성(省)을 나누어 세웠다.
명 태조(明太祖)가 서 무령 달(徐武寧達)을 보내 연을 평정하여 북평부(北平府)라 하고, 원(元)의 옛성을 헐어 내 그 땅을 줄이고는 연저(燕邸)를 세웠다. 난을 평정한 뒤에는 순천부(順天府)로 이름을 고쳤다. 그때의 성의 둘레는 40리이며 9문이 있었다. 남쪽은 여정문(麗正門) 뒤에 정양문(正陽門)이라 고쳤다. ㆍ문명문(文明門) 뒤에 숭문문(崇文門)이라 고쳤다. ㆍ순승문(順承門) 뒤에 선무문(宣武門)이라 고쳤다. 동쪽은 제화문(齊化門) 뒤에 조양문(朝陽門)이라 고쳤다. ㆍ동직문(東直門), 서쪽은 평칙문(平則門) 뒤에 부성문(阜成門)이라 고쳤다. ㆍ서직문(西直門), 북쪽은 안정문(安定門)ㆍ덕승문(德勝門)이라 한다.
가정(嘉靖) 때에 남성(南城) 혹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을 증축하였다. 둘레는 38리요 7문이 있었다. 남쪽은 영정문(永定門)ㆍ좌안문(左安門) 일명 강찰문(壃擦門)ㆍ우안문(右安門) 일명 초교문(草橋門) 동쪽은 광거문(廣渠門) 일명 사와문(沙窩門) ㆍ동편문(東便門), 서쪽은 광녕문(廣寧門) 일명 창의문(彰義門) ㆍ서편문(西便門)이라 하였다.
지금의 청 나라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모두 명 나라의 옛것을 따랐다.
성궐의 위치[城闕位置]
도성(都城)은 모양이 두(斗)와 같은데, 그 둘레는 40리, 높이는 3장(丈) 5척(尺) 5촌(寸), 너비는 1장 5척이다. 외성(外城)의 둘레는 38리요, 자금성(紫禁城)의 둘레는 18리, 궁성(宮城)의 둘레는 8리이다. 그 높이와 너비는 도성에 비교하면 각각 3분의 1이 줄어 있다. 성 위에는 모두 여장(女墻)이 있고, 성 안팎에 벽돌로 쌓은 것이 까마득하며, 포구멍[砲穴]이 갖춰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100보마다 1치(雉)를 만들었고 10치마다 대치(大雉)를 만들었다. 군데군데 설치하여 둔군포(軍鋪)가 40곳이었다. 군포마다 갑군(甲軍) 10인이 지키는데 낮에는 망을 보고 밤에는 딱다기를 친다. 이들은 교대할 시한이 차지 않고는 성에서 내려갈 수도 없고, 비록 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부고(訃告)가 전해지지 않는다.
성안에는 간혹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층계를 만들었으나, 문을 달아 굳게 채워 두고 오직 갑군이 당번을 교대할 때에 비로소 연다.
오직 궁성은 그렇지 아니하여 붉은 흙으로 바르고 누런 기와로 덮었으니, 아침 햇볕이 내리쬐면 광채가 현란하였다. 성의 네 귀퉁이마다 반드시 각루(角樓)가 있는데, 모양이 절구(折矩)와 같고, 제도는 적루(敵樓)와 같았다. 겹처마와 다섯 용마루는 공중에 우뚝 솟았고 정대(頂臺)는 햇빛에 빛났다. 들으니, 이것이 서양의 풍마동(風磨銅)으로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빛난다고 한다.
자금성(紫禁城) 안에는 옛날에 백성이 살지 않았는데, 강희(康煕) 때에 인구가 날로 늘어나자 비로소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다. 시전(市廛)과 여정(閭井)은 성 밖과 다름이 없었다. 앞에는 조정(朝廷), 뒤에는 시사(市肆), 왼쪽에는 사직(社稷), 오른쪽에는 종묘(宗廟), 남쪽에는 천단(天壇), 북쪽에는 지단(地壇), 동쪽에는 일단(日壇), 서쪽에는 월단(月壇)이 있는데, 모두 옛 제도와 같았다.
성을 둘러 해자[濠]가 있는데, 너비가 수십 보(步) 되었으며 깊이는 배를 띄울 만하였다. 길이 난 곳에는 반드시 석교(石橋)를 놓았으며, 간혹 돌을 쪼아 난간을 만들고, 난간을 끼고 시사(市肆)를 설치하였다.
성안의 길은 구궤(九軌)를 준칙(準則)으로 하였으며, 길옆에 모두 하수도[隱溝]를 만들었다.
성문(城門)은 동에서 서, 남에서 북으로 일자(一字)로 통하였고, 도성(都城)의 9문(九門)은 제독(提督)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다. 영정문(永定門) 밖 옹성문(瓮城門)에서 태화문(太和門)에 이르기까지는 대개 아홉 겹이었다.
9문에는 모두 초루(譙樓)가 있었다. 초루는 모두 겹처마였으나 정양문루(正陽門樓)만은 세 겹 처마였다.
5문(五門)에는 모두 옹성(瓮城)이 있었고, 옹성은 모두 2문이 있었으나 정양문의 옹성만은 3문을 설치하였다. 옹성에는 모두 적루(敵樓)가 없었지만, 정양문, 조양문(朝陽門), 부성문(阜成門) 3문에만 적루가 있었는데, 높이는 문루(門樓)와 같았다.
영정문은 곧 외성의 정문(正門)이다. 겹처마에 3문이었으며, 옹성은 2문이었다.
좌안문(左安門)은 영정문의 왼쪽에 있다.
우안문(右安門)은 영정문의 오른쪽에 있다.
광거문(廣渠門)은 곧 외성의 동문(東門)이다. 겹처마에 1문이었고, 옹성은 없다.
동편문(東便門)은 광거문의 북쪽에 있다. 곧 외성의 동쪽 액문(掖門)인데 홑처마이고, 옹성은 없다.
광녕문(廣寧門)은 곧 외성의 서문(西門)인데, 제도가 광거문과 같다.
서편문(西便門)은 광녕문의 북쪽에 있다. 곧 외성의 서쪽 액문인데, 제도는 동편문과 같다.
정양문 세상에서는 전문(前門)이라 한다. 은 곧 도성의 정문이다. 그 중문(中門)은 늘 닫아 두고 열지 않고, 오직 황제가 출입할 때 기름 100곡(斛)을 부어야 비로소 열린다고 한다. 문안의 통행하는 거리는 기반가(基盤街)라 하고, 또 천구(天衢)라고도 한다. ‘천구의 달구경[天衢玩月]’은 연경(燕京) 십 경(景)의 하나이다. 돌난간으로 둘러 놓았고 사방에는 장랑(長廊)을 벌여 놓아 온갖 물화가 구름같이 모여드니, 또한 천보랑(千步廊)이라 이름한다. 문밖에는 다리가 해자에 걸쳐 있는데 정양교라고 한다. 3개의 석량(石梁)으로 이루어졌다. 그 남쪽에 있는 작설(綽楔) 5칸이 있는데 제도가 매우 장려하였으며, 만주와 한(漢)의 글자로 ‘정양교’ 세 글자를 금서(金書)하였다. 명 형부 시랑(刑部侍郞) 맹조상(孟兆祥)이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3월에 정양문을 지키다가 적이 이르자 문 아래에서 죽었고, 아들 진사(進士) 맹장명(孟章明)과 아내 하씨(何氏), 그리고 자부 왕씨(王氏)도 모두 자결하였다. 청 나라 초에 맹조상에게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숭문문(崇文門)은 정양문의 왼쪽에 있다. 원(元) 나라 때 합달(蛤達)의 왕부(王府)가 문안에 있었기 때문에 혹 합달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중국 발음으로 합달은 우리나라의 해대(海垈)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간혹 해대문이라 잘못 일컫기도 한다.
선무문(宣武門)은 정양문의 오른쪽에 있다.
조양문은 곧 도성의 동문(東門)이다. 문안의 큰 거리 동쪽에 4패루(牌樓)가 있다.
동직문(東直門)은 조양문의 왼쪽에 있다. 겹처마에 1문이요, 옹성은 없다.
동액문(東掖門)은 조양문의 오른쪽에 있다. 홑처마에 1문이요, 문에는 편액이 없다.
안정문(安定門)은 곧 도성의 북문인데 동쪽에 가깝다. 제도는 동직문과 같다.
덕승문(德勝門)도 도성의 북문인데 서쪽에 가깝다. 제도는 안정문과 같다. 안정, 덕승 2문 안쪽 한가운데에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있다.
부성문은 곧 도성의 서문이다. 문안 서쪽에 4패루가 있다.
서직문(西直門)은 부성문의 오른쪽에 있는데, 제도는 동직문과 같다.
서액문(西掖門)은 부성문의 왼쪽에 있는데, 제도는 동액문과 같다.
태청문(太淸門)은 정양문의 북쪽, 천안문의 남쪽에 놓여 있다. 명 나라 때에는 대명문(大明門)이라 일컬었다. 겹처마에 3문이다. 자금성 천안문으로부터 좌우에 철자(凸字) 모양과 같이 성에 붙여 담을 쌓았는데, 태청문은 그 남쪽 끝에 있다. 문밖은 돌난간으로 둘렀으며, 길을 끼고 돌사자상이 각각 둘, 하마비(下馬碑)가 각각 하나씩 마주 서 있다. 6부(部)와 백사(百司)가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다. 문안에는 담을 따라 동서로 서로 마주 향한 백관(百官)의 조방(朝房)이 각각 110칸이며, 또 꺾어 돌아 북쪽에 있는 조방이 34칸이나 되었다. 이른바 천보랑(千步廊)이 곧 이것인데, ‘정양문 안의 천보랑’이라고 한 것은 대개 세상에서 잘못 일컬어진 것이다.
천안문 혹 장안문(長安門)이라 한다. 은 곧 자금성의 정문인데, 겹처마에 5문이다. 명 나라 때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 하였는데, 순치(順治)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조칙(詔勅)을 반포할 때마다 문 위에 금봉(金鳳)과 타운(朶雲)을 만들어 선조관(宣詔官)이 조복(朝服)으로 예를 행하고, 조서(詔書)를 받들어 타운을 따라 금봉을 거쳐 내려온다.
문 안팎에는 모두 푸른 돌사자가 마주 앉아 있으며, 또 5, 6길[丈]이 되는 돌기둥이 마주 서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경천주(擎天柱)이다. 기둥에는 용을 두루 새겼고, 기둥 꼭대기에 앉힌 물건은 무슨 상(像)인지 모르겠으나 주먹을 불끈 쥐고 끌어당기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문밖 동쪽 담장에는 서쪽을 향하여 동천안문(東天安門)이 있고, 서쪽 담장에는 동쪽을 향하여 서천안문(西天安門)이 있다. 정통(正統) 연간에 사람이 다니기에 편하게 하기 위하여 이것을 만들었다 한다. 이 두 문을 공생문(公生門)이라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지금 혹 공성문(孔聖門)이라 잘못 일컫는다고 한다. 문안 동서 2무(廡)는 각각 26칸이다. 동무(東廡)의 정 중앙에는 태묘가문(太廟街門)인데, 그 안에는 태묘가 있다. 서무(西廡)의 정 중앙에는 사직가문(社稷街門)인데, 그 안에는 사직이 있다. 태묘, 사직은 모두 아래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단문(端門)은 천안문 북쪽의 오문(午門)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제도는 천안문과 같다. 이름은 명대의 명칭 그대로 한 것이다. 문안의 동서 2무는 각각 5칸인데, 동쪽에는 묘주문(廟廚門) 혹 묘우문(廟右門)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있고, 서쪽에는 사좌문(社左門)이 있다. 2문의 북쪽에는 2무(廡)로 각각 42칸이 있는데, 부(部), 원(院), 부(府), 시(寺), 감(監)의 조방(朝房)이다. 동쪽에는 궐좌문(闕左門)이 있고, 서쪽에는 궐우문(闕右門)이 있다. 2문 북쪽에는 또 2무로 각각 3칸이 있는데, 삼공(三公)이 조회에 모이는 곳이다. 팔기 도통(八旗都統)의 회의는 모두 궐좌문에 모이고, 구경(九卿)의 회의는 모두 궐우문에 모인다.
오문(午門)은 곧 궁성의 정문(正門)으로 혹 오봉문(五鳳門)이라 일컫는데, 겹처마에 3문이다. 문 이름은 명 나라의 예전대로 부르는 것이다. 백관은 왼쪽으로 들어오고 종실(宗室)은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문에는 또 좌우의 액문(掖門)이 있는데 늘 닫아 두고 열지 않는다. 전시(殿試) 날마다 식년(式年)에 합격한 공생(貢生) 중에 외자 이름[奇名]인 자는 왼쪽으로 들어오고, 두 자 이름[偶名]인 자는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대개 천자가 조정에서 조회를 보고 나갈 때에는 종과 북을 문루(門樓) 위에서 울리며, 포로를 받고 역서(曆書)를 반포할 때에도 모두 문루에 친히 임한다고 한다. 문밖 해자 다리에는 푸른 돌사자가 마주 서 있다. 문안 왼쪽에는 가량(嘉量)을 만들어 두었으며, 오른쪽에는 일규(日圭)를 설치하였다. 동서의 2무는 각각 24칸인데, 계찰(稽察), 상유(上諭), 내각(內閣), 고칙(誥勅), 기거주(起居注), 번서(繙書) 등의 조방(朝房)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 안은 바로 대내(大內)의 태화문(太和門)이다. 태화문은 아래에서 상세히 기록한다.
동안문(東安門)은 곧 자금성의 동문이다. 바깥은 조양문과 마주 서 있으며, 안쪽은 동화문(東華門)과 마주 서 있다.
동화문은 곧 궁성의 동문이다. 바깥은 동안문과 마주 서 있으며, 안쪽은 대내의 협화문(協和門)과 마주 서 있다. 협화문은 아래에 상세히 기록한다.
지안문(地安門) 혹 후재문(厚載門)이라 일컫기도 한다. 은 곧 자금성의 북문이다. 북동쪽에는 안정문이 있고, 북서쪽에는 덕승문이 있다. 안쪽은 궁성의 신무문(神武門)과 마주 서 있다. 신무문 안쪽은 곧 대내의 어화원(御花園)이다. 어화원은 아래에 보인다.
서안문(西安門)은 곧 자금성의 서문이다. 바깥은 부성문과 마주 서 있으며, 안쪽은 서화문(西華門)과 마주 서 있다.
서화문은 곧 궁성의 서문이다. 바깥은 서안문과 마주 서 있으며, 안쪽은 대내의 희화문(煕和門)과 마주 서 있다. 희화문은 아래에 상세히 기록한다.
태화전(太和殿)은 곧 옛날의 이른바 노침(路寢)이다. 해마다 원조(元朝), 동지(冬至), 만수(萬壽) 세 큰 명절 및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하례(賀禮)를 받을 때와 대조회(大朝會)의 연향(燕饗), 장수에게 명하여 출사(出師)시킬 때, 임헌(臨軒)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일 때와 백관(百官)이 제수(除授)되어 사은(謝恩)할 때에 이 태화원에 나아간다. 명 나라 때에는 황극전(皇極殿)이라 하였고, 또 봉천전(奉天殿)이라고도 하였다.
기지(基址)의 높이는 두 길, 전의 높이는 12길, 가로는 12칸, 세로는 5칸이다. 위에는 겹처마에 풍경 4개를 걸어 두었는데, 풍경 사이는 20척이 될 만하였다. 누런 유리(琉璃) 기와로 이고 철사 그물로 둘렀다. 어제(御題)의 편액에는 ‘건극유유(建極綏猷)’라 하였다.
전 앞의 붉은 섬돌[陛]에 백석(白石)의 난간을 둘렀으며, 섬돌은 다섯이 나와 있는데 각각 세 계단이었다. 섬돌 위에는 황금의 큰 솥을 마주 놓아 두었는데, 높이가 한 길 가량으로 10여 섬을 담을 만하였다. 또 큰 석정(石鼎) 각 1, 동구(銅龜)ㆍ동학(銅鶴) 각 2, 가량(嘉量)ㆍ일규(日圭) 각 1을 벌여 놓았다. 섬돌을 에워싼 삼면(三面)에는 모두 3층의 돌계단[石砌]을 쌓았으며, 돌계단마다 높이가 한 길 가량 되었고 쌓은 돌이 우뚝하였으나 누워 있는 모양과 같았다. 몇 군데를 나누어 백옥(白玉)의 돌난간이 세로로 서 있는데, 난간의 높이는 어깨에 찰 정도였다. 모두 용과 봉을 새겼고, 맑고 미끄러워 거울같이 보였다. 제1층에는 청동(靑銅)의 큰 화로를 놓아 두었고, 제2층에는 두 화로를 마주 놓았으며, 제3층에는 화로 8개를 열지어 놓았다. 화로는 모두 솥 모양이었다. 황제가 전(殿)에 나아갈 때는 여기에다 향을 모두 사른다고 한다. 계단 아래의 뜰은 매우 넓었는데, 동으로는 산 모양을 만들어 정(正), 종(從) 1품에서 9품까지 동서로 각 두 줄씩 모두 18개를 새겨 어도(御道) 옆에 열을 지어 세웠다. 이것이 바로 천관(千官)이 참알(參謁)하는 곳이다. 전 좌우에는 작은 문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왼쪽 문은 중좌문(中左門), 오른쪽 문은 중우문(中右門)이라 하였다. 그 안이 바로 중화전(中和殿)이다.
태화문은 곧 대내의 정문으로 명 나라 때에는 황극문(皇極門)이라 불렀고, 또 봉천문(奉天門)이라고도 했다. 처마는 2중으로 9칸이요, 3문의 앞뒤 섬돌은 각각 셋이 나와 있고, 좌우 섬돌은 각각 하나가 나와 있다. 그 좌문은 소덕문(昭德門)인데 명 나라 때는 홍정문(弘政門)이라 하였다. 그 우문은 정도문(貞度門)인데, 명 나라 때는 선치문(宣治門)이라 하였다. 해자에 내금수교(內金水橋)가 걸쳐 있고, 동(銅) 사자가 마주 서 있다. 문안의 2무(廡)는 각각 52칸이다. 처마를 따라 큰 솥 30개를 놓아서 소금물을 담아 두었으니, 화재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동쪽에는 협화문(協和門)ㆍ체인각(體仁閣)ㆍ좌익문(左翼門)이 있고, 서쪽에는 희화문(煕和門)ㆍ홍의각(弘義閣)ㆍ우익문(右翼門)이 있다.
협화문은 바로 대내의 동문인데, 명 나라 때는 회극문(會極門)이라 불렀다.
희화문은 바로 대내의 서문인데, 명 나라 때는 귀극문(歸極門)이라 불렀다.
체인각은 협화문의 왼쪽에 있는데, 명 나라 때는 문소문(文昭門)이라 불렀다. 겹처마에 기둥이 8개다. 안에는 사방에서 공물로 바친 포백(布帛)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홍의각은 협화문의 오른쪽에 있는데, 명 나라 때는 무성문(武成門)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홍자(弘字)를 피하여 굉자(宏字)로 바꾸었다. 제도는 체인각과 같다. 안에는 사방에서 공물로 바친 금은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좌익문은 체인각의 왼쪽에 있으니, 바로 동액문(東掖門)이다.
우익문은 홍의각의 왼쪽에 있으니, 바로 서액문(西掖門)이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 뒤에 있다. 명 나라 때는 중극전(中極殿)이라 하였고, 또 화개전(華蓋殿)이라고도 하였다. 세로와 가로는 각각 3칸이요, 처마는 모나고 꼭대기는 둥글다. 옥첩(玉牒)의 고성(告成) 및 제사에 축판(祝版)을 참고해 보고, 경적(耕耤)할 때 오곡 농기(五穀農器)를 살펴보는 것을 이 전에서 한다. 2무는 각각 30칸인데, 그 기구들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보화전(保和殿)은 중화전의 뒤쪽에 있다. 명 나라 때는 건극전(建極殿), 또는 근신전(謹身殿)이라고 하였다. 태화전, 중화전과 더불어 세 대전이라 일컫는다. 9칸에 겹처마이다. 좌우의 섬돌은 중화전과 태화전을 거치는데, 섬돌이 서로 붙어 있다. 해마다 제석(除夕)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외번(外藩) 및 매 과시(科試)에서 새 진사(進士)를 조고(朝考)할 때에 여기에 나아간다. 무릇 열조(列祖)의 보훈(寶訓), 실록(實錄)을 고성(告成)할 때 의장(儀仗)을 갖추어 찬수관이 여기에서 바친다. 전 뒤의 10여 보(步)에 높은 기지(基地)가 있고 섬돌이 벌여 있는데, 동쪽은 경운문(景運門)이요, 서쪽은 융종문(隆宗門)이다. 두 문안에는 주려(周廬)가 각각 12개 기둥이 있다. 동쪽은 문무 대신(文武大臣)이 정사를 아뢰려고 파루(罷漏)를 기다리는 곳이요, 서쪽은 시위(侍衛), 내무(內務), 군기(軍機)가 숙직하는 집이다. 한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건청문(乾淸門)이 있는데, 곧 건청궁의 문이다.
건청궁은 건청문 안에 있으며 가로는 9개 기둥, 세로는 5개 기둥이 있다. 무릇 신료의 소대, 백료의 인견(引見) 및 원조(元朝) 때 제왕(諸王)에게 베푼 연회는 모두 여기에서 하였다. 강희(康煕) 50년(1711, 숙종 37)에 왕(王), 대신(大臣)으로부터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60세 이상인 자에게 천수연(千叟宴)을 베풀었다. 여기에 황자(皇子), 황손(皇孫)이 모두 참여하여 친히 선수(膳羞)를 돌보아 두터운 은혜를 다하였다. 건륭(乾隆) 48년(1783, 정조 7)에는 종실에게 여기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건륭 50년(1785, 정조 9)에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90세가 넘은 자를 어전에 불러서 시식(侍食)하였다.
교태궁(交泰宮)은 건청궁 뒤에 있으며, 제도는 중화전과 같다. 황제가 쓰는 보새(寶璽) 25개를 여기에 간직한다.
곤녕궁(坤寧宮)은 교태궁 뒤에 있으니, 바로 내전(內殿)이다. 가로가 9개의 기둥이다. 왼쪽은 동란전(東暖殿), 오른쪽은 서란전(西暖殿)이다. 동란전의 동쪽에는 영상문(永祥門)이 있고, 북쪽에는 기화문(基化門)이 있다. 서란전의 서쪽에는 기화문이 있고, 북쪽에는 영칙문(永則門)이 있다.
어화원(御花園)은 곤녕전의 뒤쪽에 있으니, 바로 대내의 후원(後苑)이다. 왼쪽에는 경원(瓊苑)의 동문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경원의 서문이 있다. 정남(正南)에는 천일문(天一門)이 있는데, 문 앞에는 금 기린 둘이 마주 서 있다. 북쪽에는 흠안전(欽安殿)이 있는데 현무신(玄武神)을 봉안(奉安)하였다. 흠안전 동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는 석동(石洞)이 있고, 위에는 어경정(御景亭)이 있다. 정자 동쪽이 이조당(摛藻堂)인데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가 간직되어 있다. 이조당 동쪽이 응향정(凝香亭)이고, 정자 앞 연못 위가 부벽정(浮碧亭)이다. 부벽정 남쪽이 만춘정(萬春亭), 강설헌(絳雪軒)인데, 강설헌 앞에는 해당화(海棠花)와 여러 가지 꽃을 많이 심어 놓았다. 또 그 남쪽은 곧 경원의 동문이다.
흠안전의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연휘각(延暉閣)이 있는데, 혹 응청실(凝淸室)이라고도 일컫는다. 그 서쪽에는 위육재(位育齋)가 있고, 위육재 앞 연못 위에는 징서정(澄瑞亭)이 있다. 또 서쪽에는 육취정(毓翠亭)이 있고, 그 남쪽에는 천추정(千秋亭)이 있다. 또 남쪽에는 양성재(養性齋)가 있고, 또 그 남쪽은 바로 경원의 서문이다. 흠안전의 북쪽에는 승광문(承光門)이 있다. 왼쪽에는 연화문(延和門)이 있고, 오른쪽에는 집복문(集福門)이 있는데, 그 북쪽은 바로 자금성의 신무문(神武門)이다.
소인전(昭仁殿)은 건청궁의 왼쪽에 있는데, 송(宋), 금(金), 원(元), 명(明)의 구판 서적(舊版書籍) 400부 및 악가 판간(岳珂版刊)의 오경(五經)이 저장되어 있다. 문의 편액에는 ‘용광문(龍光門)’이라 하였다.
홍덕전(弘德殿)은 건청궁의 오른쪽에 있다. 동무(東廡)는 어다방(御茶房)이요, 안쪽은 숙직하는 곳이다. 문에는 ‘봉채문(鳳彩門)’이라 편액하였다.
단응전(端凝殿)은 홍덕전의 남쪽에 있는데, 자명종(自鳴鐘)을 설치해 두었다. 그 남동쪽에는 일정문(日精門)이 있는데, 어약방(御藥房)으로 통한다. 남쪽 1실(室)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 및 선현(先賢), 선유(先儒)를 봉안하였다. 또 남쪽으로 옮겨 북쪽을 향해서는 상서방(上書房)이 있는데, 황자(皇子)가 공부하는 곳이다. 남서쪽에는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그 남쪽은 주사방(奏事房)이다. 또 그 남쪽으로 돌아 북쪽을 향하면 남서방(南書房)이 있는데, 내정(內庭) 사신(詞臣)이 숙직하는 곳이다.
무륵전(懋勒殿)은 단응전(端凝殿)의 남쪽에 있는데, 단응전과 서로 마주 대하여 있다. 안에는 도사한묵(圖史翰墨)의 도구를 저장해 두었다.
경인궁(景仁宮)ㆍ승건궁(承乾宮) 명 나라 때에는 동궁(東宮), 귀비(貴妃)가 살던 곳이다. ㆍ종수궁(鍾粹宮)ㆍ연희궁(延禧宮)ㆍ영화궁(永和宮)ㆍ경양궁(景陽宮) 안에는 송(宋) 나라 고종(高宗), 효종(孝宗) 양조(兩朝)의 어서(御書)인 《시경》 및 마화지(馬和之)가 그린 ‘모시도(毛詩圖)’ 모두 12권을 저장하였다. ㆍ천궁보전(天穹寶殿) 상제를 제사 지내는 곳. ㆍ재궁(齋宮) 치재하는 곳. ㆍ육경궁(毓慶宮)ㆍ돈본전(敦本殿) 모든 황자가 거처하는 곳. 은 모두 단응전의 일정문 동쪽에 있다.
영수궁(永壽宮)ㆍ익곤궁(翊坤宮)ㆍ저수궁(儲秀宮)ㆍ계상궁(啓祥宮)ㆍ장춘궁(長春宮)ㆍ함복궁(咸福宮)ㆍ중화궁(重華宮) 건륭 황제(乾隆皇帝)의 잠저(潛邸) ㆍ숭경전(崇敬殿) 해마다 신정(新正)에는 여기에서 내정 사신(內廷詞臣)에게 다연(茶宴)을 하사한다. 동서 두 각(閣)에는 불상(佛像)을 모셔 두었다. ㆍ보중전(保中殿)ㆍ욕덕전(浴德殿)ㆍ수방재(漱芳齋)ㆍ정거헌(靜居軒) 승경전에서 여기까지는 모두 중화궁(重華宮)에 맞닿아 있다. ㆍ연경전(延敬殿)ㆍ무진전(撫辰殿)ㆍ양심전(養心殿) 건청궁처럼 소대, 인견하는 곳. ㆍ삼희당(三希堂)ㆍ유우재(攸芋齋)ㆍ어선방(御膳房)ㆍ봉선전(奉先殿) 열조(列朝)의 화상이 안치되어 있다. 무릇 국가의 대전례(大典禮) 및 승여(乘輿)가 출입하게 되면 고성(古城)이 있고, 세시(歲時), 절서(節序), 삭망(朔望)에는 천신(薦新)이 있으며, 기신(忌辰)에는 제사가 있는데, 사생례(事生禮)와 같이 하루 삼헌(三獻)한다. 그 예의와 공헌(供獻)은 내장부(內掌府)가 관장한다. ㆍ수령전(壽寧殿)ㆍ황극전(皇極殿)ㆍ영수궁(寧壽宮)ㆍ양성헌(養性軒) 경승헌(敬勝軒)ㆍ낙선당(樂善堂)ㆍ삼우헌(三友軒)ㆍ이화헌(頤和軒)ㆍ수안실(隨安室)ㆍ일여재(日如齋)ㆍ도화헌(導和軒)ㆍ양소헌(養素軒)ㆍ경기각(景祺閣)ㆍ창음각(暢音閣)ㆍ열시루(閱是樓)ㆍ범화루(梵華樓)ㆍ불일루(佛日樓)ㆍ힐륵정(擷扐亭)ㆍ일구정(日矩亭)ㆍ고화헌(古華軒)ㆍ설상정(楔賞亭)ㆍ욱휘헌(旭輝軒)ㆍ수초당(遂初堂)ㆍ연취루(延趣樓)ㆍ용수정(聳秀亭)ㆍ화상루(華賞樓)ㆍ운광루(雲光樓)ㆍ벽라정(碧螺亭)ㆍ옥수헌(玉粹軒)ㆍ권근재(倦勤齋)ㆍ부망각(符望閣)ㆍ죽향관(竹香館)ㆍ정진심당(淨塵心堂) 등이 여기에 있다. ㆍ조상소(兆祥所) 황자가 거처하는 곳. ㆍ자령당(慈寧堂) 화원(花園) 가운데에 함약관(咸若館)ㆍ보상루(寶相樓)ㆍ길운루(吉雲樓)ㆍ함청재(含淸齋)ㆍ연수당(延壽堂)ㆍ임계자음루(臨溪慈蔭樓)가 있다. ㆍ수강궁(壽康宮)ㆍ수안궁(壽安宮)ㆍ춘희전(春禧殿)ㆍ중정전(中正殿)명 나라 때에는 원극보전(元極寶殿)이라 불렀다. 삼청신(三淸神)을 제사 지낸다. 배전(配殿)이 둘인데, 춘인전(春仁殿)과 경의전(敬義殿)이다. 왼쪽에는 유객헌(有客軒)이 있고 오른쪽에는 무일재(無逸齋)가 있다. 지금은 불상을 모셨다. 내감(內監)과 라마(喇嘛)가 거처하는 곳이다. ㆍ보화전(寶華殿)ㆍ영화전(英華殿) 명 신종(明神宗)의 어머니인 이 태후(李太后)가 심은 보리수가 있는데, 지금도 살아 있다. 200년쯤 된 나무이다. 등이 모두 단응전의 월정문 서쪽에 있다.
서화원(西花園)은 계상궁(啓祥宮)의 서쪽에 있다. 남쪽에는 경복궁(景福宮)이 있고 그 뒤에는 혜풍정(惠風亭)이 있다. 혜풍정 북쪽에는 양이헌(養怡軒), 양이헌 뒤에는 혜요루(慧曜樓), 그 서쪽에는 경승재(敬勝齋), 경승재 서쪽에는 벽림관(碧琳館), 그 남쪽에는 연화실(蓮花室), 연화실 남쪽에는 응휘당(凝暉堂), 그 앞에는 연춘각(延春閣)이 있다. 돌을 쌓아 산을 만든 그 위에는 적취정(積翠亭)이 있다. 적취정 앞에는 기석(奇石)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비래(飛來)’, 서쪽의 것을 ‘옥령롱(玉玲瓏)’이라 하였다. 돌 사이로 다 나가면 남쪽에 옥호동(玉壺洞)이 있고 동구에는 ‘취봉(鷲峯)’이라 씌어 있다.
전심전(傳心殿)은 협화문(協和門) 동쪽에 있는데, 황사(皇師), 제사(帝師), 왕사(王師), 선성 선사(先聖先師)의 신위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원(院)의 동쪽에 있는 대포정(大庖井)은 위로 정자를 세워 덮었는데, 물맛이 매우 좋다. 명 나라 황건(黃建)이 경사(京師)의 샘물의 수질을 논하면서, 옥천(玉泉)을 첫째로 꼽고 대포정을 둘째로 꼽았다고 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강희(康煕 청 성조)가 오래도록 제위(帝位)에 있자, 태자가 이 전에 거처하면서 궁료(宮僚)에게, ‘세상에 어찌 백발의 태자가 있는가?’ 하였다. 이 말이 새어 나가서 태자는 폐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다시는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고, 여러 아들 중에서 어진 자를 뽑아 그 이름을 친히 써서 궤짝에 넣어 봉해 두었다가 황제가 붕어(崩御)하면, 여러 대신이 열어 보아 영립(迎立)하였다고 한다.
문화전(文華殿)은 전심전의 서쪽에 있다. 높은 계단이 아홉 층계요, 누런 유리(琉璃) 기와로 덮었다. 뒤쪽에는 주경전(主敬殿)이 있는데, 매년 2월에 여기에서 경연(經筵)을 베풀었다. 《황명고사(皇明故事)》에,
“전 가운데에 9개의 감실(龕室)을 만들어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공봉(供奉)하고, 왼쪽 1개의 감실에는 주공(周公), 오른쪽 1개의 감실에는 공자를 모신다. 날마다 천자가 전에 와서 강(講)을 여는데, 먼저 일배 삼고두(一拜三叩頭)의 예를 행한다. 그동안 각로(閣老) 및 강관(講官)은 월대(月臺) 위 돌난간의 왼쪽에 서서 기다린다. 승지가 ‘선생래(先生來)’라 부르면 각로 및 강관은 한 줄로 늘어서서 나와 반(班)을 나누어 자리에 앉는다. 이때에는 당폐(堂陛)의 엄숙함을 생략하여 강관(講官)이 편하도록 안석(案席)에 기대게 한다.”
하였다.
문연각(文淵閣)은 문화전의 뒤쪽에 있는데 곧 장서(藏書)하는 곳이다. 대개 세 겹 상하로 각 6영(楹)이요, 층계는 두 번 꺾어서 올라가게 하였다. 청록(靑綠) 기와로 덮었다. 앞에는 벽돌로 네모난 연못을 만들어 석교(石橋)를 걸치고는 옥하(玉河)의 물을 끌어대었다. 안에는 어제비(御製碑)가 있었다. 살펴보니,
“황명(皇明) 정통(正統) 6년(1441, 세종 23)에 송(宋), 금(金), 원(元)이 소장한 서적을 합한 《편정목록(編定目錄)》이 무릇 4만 3200여 권이요, 《영락대전(永樂大全)》 2만 3937권을 보태니 당시의 서적이 이미 대단히 많았다. 건륭 때에 유문(遺文), 일서(佚書)를 더 구입하여 이정(釐正)해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만들어 여기에 저장하였다. 《사고전서목록》의 서문에는, ‘건륭 47년 편집을 마치고 특별히 문연각(文淵閣), 문소각(文溯閣), 문진각(文津閣), 문란각(文瀾閣) 등 네 각(閣)을 건축하여 보관한다.’ 하였다. 또 ‘강절(江浙)에는 인문(人文)이 많이 집중(集中)한다. 그곳의 힘써 배우고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가 금중(禁中)의 비서(秘書) 읽기를 원하는 자가 떨어지지 않으니 이 서적을 널리 펴는 것이 마땅하다. 양주(揚州) 대관당(大觀堂)의 문회각(文滙閣), 진강구(鎭江口) 금산사(金山寺)의 문종각(文宗閣), 항주(杭州) 성인사(聖因寺)의 문란각(文瀾閣)과 같은 곳에는 모두 장서(藏書)하는 곳이 있다. 사고관(四庫館)이 서책을 다시 복사하여 셋으로 나누어 각각 그곳에 잘 간직케 하여 강절(江浙)의 선비가 가깝게 나아가 직접 보게 하고 녹용(錄用)함을 얻게 한다.’
하였다. 이것으로 볼 것 같으면 경적(經籍)의 풍부함이 멀리 전대(前代)를 크게 넘을 뿐만 아니라 각 곳에 나누어 보관하여 선비가 나아가 보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니, 규모의 넓음도 또한 알 수 있겠다. 옛날 갑신년에 우리 세자 □□대군(大君)이 구왕(九王)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이 각에서 유숙하였었다. 《심양일기(瀋陽日記)》에 나옴. 뒷담 안에는 돌로 만든 산이 있고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우거져 수풀을 이룬 것이 문틈으로 엿보인다. 《신원지략(宸垣識略)》에,
“원명원(圓明園)의 문원각(文源閣), 열하(熱河)의 문진각(文津閣), 봉천(奉天)의 문소각(文溯閣)이 이 건물을 모방하여 지어 《사고전서》를 보관한 것은 모두 어제기문(御製記文)으로 돌에 새겨져 있다.”
하였다.
상사서(上駟署)는 문화전의 동북쪽에 있다. 전배(前輩)의 연행일기에는 모두 대내 태복시(太僕寺)라고 하였다. 동서구(東西廐)의 말은 몇 백 필인지 모르는데, 모두 훌륭하여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 마구간 둘레에는 담장을 만들고 목책으로 문을 만들었다. 매일 한낮에 마부가 목책을 열고 채찍을 들어 부르는 듯한 형상으로 지휘하면 마구간의 말들이 모두 나와서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나누어 서서 동서의 대열을 잃지 않았다. 북쪽 담 아래에는 큰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큰 돌구유가 있는데, 두어 사람이 기계를 돌려 물을 퍼서 연달아 구유 안에 붓는다. 마부가 채찍으로 말 무리를 나누어 열 마리씩 1대(隊)로 삼아 차례차례로 들어와 마시게 하면 앞 대열이 마시고 물러나고 뒷 대열이 이어 나오는데, 혹시라도 차례를 건너뛰는 일이 없다. 들어오는 말은 오른쪽을, 나가는 말은 왼쪽을 따라서 스스로 마구간에 들어간다. 들으니, 매년 삼복(三伏) 날에는 귀인(貴人)이 노부(鹵簿)와 고취(鼓吹)로써 어마(御馬)를 인도하여 덕승문(德勝門) 밖 적수담(積水潭)에서 씻긴다고 하고, 또 동서의 호수[海子]에도 각각 어마(御馬) 몇 천 필이 있다고 한다.
전정(箭亭)은 상사서(上駟書)의 북쪽에 있으며, 태종(太宗)의 유지(諭旨)를 적은 와비(臥碑)가 있다. 연암의 《열하일기》에,
“전성문(前星門)은 푸른 유리 기와로 덮었다. 그 안은 바로 태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전의 이름은 전심전(傳心殿)이라 했다. 전 뒤에 전정이 있다. 쇠를 녹여서 비를 만들어 열조(列祖)의 가르침을 새겨 여기에 묻었는데,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
한 것은 이 와비(臥碑)를 가리킨 것이다.
어다선방(御茶饍方)은 전정의 동쪽에 있다.
응방(鷹房)과 구방(狗房)은 사냥매와 사냥개를 기르는 곳이다. 문화전(文華殿) 동북에서 석교를 건너 삼좌문(三座門)에 들어서면 응방은 그 동쪽, 구방은 그 서쪽에 있는데, 문연각과 붙어 있다.
힐방전(擷芳殿)은 삼좌문 위에 보임 의 북쪽에 있다. 명 나라 때에는 단본궁(端本宮)이라 하였는데, 광종(光宗)의 잠저(潛邸)이다. 지금은 삼전(三殿)을 고쳐 지어서 황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다선고(茶膳庫), 화마구(花馬廐), 약방(藥房)이 모두 이 속에 있다.
국사관(國史館)은 동화문(東華門) 안 조금 북쪽으로 성을 의지하여 남향으로 있다.
비당방(備檔房)은 소덕문(昭德門) 밖 동무(東廡)에 있다.
시위방(侍衛房)은 정도문(貞度門) 밖 서무(西廡)에 있다.
무영전(武英殿)은 희화문(煕和門) 서쪽에 있다. 제도는 문화전(文華殿)과 대략 같으며, 서판(書板)을 저장하여 두었다. 뒤쪽에는 욕덕당(浴德堂)이 있으니, 바로 수서(修書)하는 곳이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3월에 유적(流賊)이 황성을 격파하였고, 이해 5월에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이 황성에 들어와 이 전 동쪽 월대 뒤에서 명 나라 문무 군신(文武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뒤에 이 때문에 예친왕은 죄를 따져 추삭(追削)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명 나라가 망한 지가 겨우 한 달이 되었다. 따라다닌 우리나라 사람이 전 위의 용지(龍墀)에 박쥐 똥만이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연각(武淵閣)은 무영전(武英殿)의 뒤에 있는데, 병기(兵器)를 저장하는 곳이다.
상의감(尙衣監)은 무영전의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청자경관(淸字經館)과 기명고(器皿庫)가 되었다.
함안궁(咸安宮)은 상의감 서쪽 통자하(筩子河) 가에 있는데, 팔기대신(八旗大臣)의 자제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이다.
회자관학(回子館學)은 우익문(右翼門) 밖에 있다.
면자관학(緬子館學)은 회자관 서쪽에 있다.
내무부(內務府)는 서화문(西華門) 안에 있으니, 바로 기밀(機密)을 처리 하는 곳인데, 명의 백호전(白虎殿)이다. 무릇 3원(院) 7사(司)가 소속되어 있는데, 내부(內府) 재용(財用)의 출입 및 제사, 연향(燕饗), 선수(膳羞), 의복(衣服), 사여(賜予), 형벌, 공작(工作), 교습(敎習) 등의 여러 일을 관장한다. 내무부 안에는 환관[中官]을 엄금한다는 세조(世祖)의 철패(鐵牌)가 있다.
광저사(廣儲司)는 서화문 안 주초방(酒醋房)의 남쪽에 있다. 은(銀), 피(皮), 단(緞), 의(衣), 자(瓷), 다(茶)의 6고(庫)가 있는데, 내부(內府)의 고장(庫藏)을 총괄하는 곳이다.
어서원(御書院)은 서화문 안 조금 북쪽에 있다. 어제(御製)의 시문(詩文)과 법첩(法帖) 따위의 판각(板刻)을 관장하였다.
자기고(磁器庫)는 무영전 남쪽에 있다.
남훈전(南薰殿)은 무영전 남쪽에 있다. 역대 제후(歷代帝后)의 도상(圖像)을 간직하였으며, 와갈(臥碣)에 새긴 어제기(御製記)가 있다. 명 나라 때부터는 내고(內庫)에 저장하여 두었는데, 건륭 14년(1749, 영조 25)에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거듭 꾸미고 윤기나게 하여 여기에 옮겨 간직하였다. 복희(伏羲) 이하로부터 두루마리로 된 것이 68, 책으로 된 것이 7, 권으로 된 것이 3이며, 《선성선현도(先聖先賢圖)》는 책이 5이다. 위치를 자세히 정하고 갑을(甲乙)을 차례대로 하였으며, 매 여름마다 햇볕에 쬐어서 자물쇠를 채워 조심하였다. 명 나라 때의 옥책(玉冊)은 모두 서실(西室)에 부장(附藏)해 두었다.
종묘(宗廟)는 단문(端門)의 왼쪽에 있다. 붉은 문과 누런 기와로 하였으며 높은 담을 쳤는데, 둘레는 291장 6척이다. 남쪽을 향하여 문을 만들었는데, 대문은 셋이요 좌우의 문은 각각 하나이다. 극문(戟門)은 5칸인데 높은 기지(基址)와 돌난간을 하였다. 앞뒤에 섬돌은 셋이 나와 있고, 가운데의 것은 계단이 9층계, 좌우의 것은 계단이 각각 7층계였다. 전전(前殿)은 11칸이요 겹처마였다. 침향(沈香)으로 기둥을 만들었고, 계단은 셋이 나와 있는데 돌난간으로 둘렀다. 정남(正南) 및 좌우의 섬돌은 모두 다섯이 나와 있는데, 가운데의 것은 계단이 11층계, 좌우의 것은 계단이 9층계였다.
무릇 대협(大祫) 제사를 모실 때는 왕공(王公) 두 사람이 각각 종실관(宗室官)을 거느리고 열조(列朝) 및 황후의 신위(神位)를 받들어 합사(合祀)하였다. 시향(時享)에는 후위(后位)를 받들기는 하나 조주(祧主)만은 참여하지 않는다. 중전(中殿) 9칸에 당(堂)은 같고 실(室)은 다른데, 안에는 열조의 신위와 신감(神龕)을 봉안하였다. 뒤에는 붉은 담으로 경계하였다. 중앙은 3칸이요 좌우에는 문이 하나씩 있었다. 후전(後殿)의 제도는 중전과 같으며 조묘(祧廟)의 신감을 봉안하였다. 전전(前殿)의 2무(廡)는 각각 15칸인데, 동쪽에는 왕공을 배향(配享)하였고 서쪽에는 공신(功臣)을 배향하였으며, 각각 요로(燎爐) 하나씩을 마주 놓아 두었다. 중전, 후전의 2무는 각각 5칸인데 모두 제기(祭器)를 저장하여 두었고, 후전 앞에는 요로 하나씩을 마주 놓아 두었다. 극문(戟門) 좌우에는 정정(井亭)이 각각 하나씩 있었고, 앞에는 돌을 걸쳐 다리 다섯을 만들었다. 동쪽은 신고(神庫), 서쪽은 신주(神廚)인데 각각 5칸이었다. 묘문(廟門) 밖 좌우에는 재생정(宰牲亭)과 정정이 있다. 《수구기략(綏寇記略)》에,
“숭정 16년(1643, 인조 21) 5월에 경사에 혈우(血雨)가 내리고 밤새 천둥이 쳐서 태실(太室)의 신주(神主)가 엎어지고, 보정(寶鼎), 이기(彝器)가 모두 녹았다. 또 6월 23일 밤에 뇌성벽력이 일어나 봉선전(奉先殿)의 묘문 금자물쇠가 모두 용의 발톱에 할퀴어 녹아내렸다.”
하였는데, 종묘 앞의 돌 위에는 용이 누운 흔적이 있었다.
사직(社稷)은 단문(端門)의 오른편에 있다. 단(壇)의 제도는 구방(矩方)이요, 북쪽을 향하여 둘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4척이다. 상성(上成)은 사방이 5장, 이성(二成)은 사방 5장 3척이다. 나온 네 섬돌은 각각 네 계단인데, 모두 백옥(白玉)으로 되었다. 상성에는 오색(五色) 흙으로 방위(方位)를 분별하여 나누어 쌓았다. 내유(內壝)는 사방이 76장 4척, 높이가 4척, 두께가 2척인데, 사색(四色)의 유리 벽돌로 각 방위의 색깔에 따라 쌓았으며, 덮은 기와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문은 넷인데 기둥은 각각 둘이었다. 기둥 및 문미(門楣), 문지방은 모두 흰 돌이었고 문짝은 붉은 기둥이었다. 내유 서북쪽에는 무덤[瘞坎] 2단(壇)이 있다. 북쪽에는 배전(拜殿)의 극문(戟門)이 각 5칸 있는데, 위에는 누런 유리 기와로 덮었고 앞뒤에는 셋으로 나온 섬돌이 있었다. 내유 서남쪽에는 신고(神庫), 신주(神廚)가 각 5칸, 우물 하나가 있다. 사직단의 담 둘레는 268장 4척이고, 안팎에 단확(丹艧)으로 발랐으며 누런 기와로 덮었다. 북쪽에는 문이 셋 있었고 나머지 삼면에는 문이 하나씩 있었다. 서문 밖에는 재생정이 있다.
황사성(皇史宬)은 태묘(太廟)의 동남쪽에 있다. 명 나라 가정(嘉靖) 때에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을 만들어서 9조(朝)의 보훈(寶訓)과 실록(實錄)을 저장하였다. 지금의 청조도 명을 이어서 열조(列朝)의 보록(寶錄) 및 옥첩(玉牒)을 저장하여 둔다.
이상 기록한 것은 모두 궁성에 있는 것이다. 내외의 방물(方物)을 정납(呈納)하는 날은 모두 두루 볼 수 있었으나, 중화전(中和殿)으로부터 그 안은 외인이 들어갈 수 없다. 그 나머지 내외의 성 여러 곳은 보는 대로 아래에 순서대로 적는다.
오성 가방의 위치[五城街坊位置]
순천부(順天府)는 대흥(大興), 완평(宛平) 두 현의 땅인데, 5성(城)에 분속(分屬)시켰다. 성마다 방(坊)이 있고 방마다 어사(御史)가 있어서 관할하는 곳을 각각 살핀다.
대가(大街)는 너비가 24보요, 소가(小街)는 12보이다. 호동(衚衕 골목)은 총 29 속칭 대항(大巷)을 호동(胡同)이라고 한다. 요, 소항(小巷)은 총 384이다.
남훈방(南薰坊)ㆍ징청방(澄淸坊)ㆍ인수방(仁壽坊)ㆍ명조방(明照坊)ㆍ보태방(保泰坊)ㆍ대시옹방(大時雍坊)ㆍ소시옹방(小時雍坊)ㆍ안복방(安福坊)ㆍ적경방(積慶坊)은 중성(中城)에 있다.
명시방(明時坊)ㆍ황화방(黃華坊)ㆍ사성방(思誠坊)ㆍ거현방(居賢坊)ㆍ조양방(朝陽坊)은 동성(東城)에 있다.
정동방(正東坊)ㆍ정서방(正西坊)ㆍ정남방(正南坊)ㆍ선남방(宣南坊)ㆍ선북방(宣北坊)ㆍ숭남방(崇南坊)ㆍ숭북방(崇北坊)은 남성(南城)에 있다.
부성방(阜成坊)ㆍ금성방(金城坊)ㆍ명옥방(鳴玉坊)ㆍ조천방(朝天坊)ㆍ하조서방(河漕西坊)ㆍ관외방(關外坊)은 서성(西城)에 있다.
숭교방(崇敎坊)ㆍ소회방(昭回坊)ㆍ정다방(靖茶坊)ㆍ영춘방(靈春坊)ㆍ발상방(發祥坊)ㆍ금대방(金臺坊)ㆍ교충방(敎忠坊)ㆍ일중방(日中坊)ㆍ외관방(外關坊)은 북성(北城)에 있다. 명 나라 때에는 외성으로서 남성(南城)에 속해 있었다. 청 나라 초에 내외의 성을 통분(通分)하여 다섯으로 만들었다.
팔기의 위치[八旗位置]
만(滿), 한(漢), 몽고(蒙古)의 군사를 8기(旗)로 나누어 황거(皇居 천자의 거소(居所)인 궁성)를 공위(拱衛)케 하고, 도통(都統), 부도통(副都統), 참령(參領), 좌령(佐領)으로 거느리게 하였다.
양황기(鑲黃旗)는 안정문(安定門) 안에 상주하며, 정황기(正黃旗)는 덕승문(德勝門) 안에 상주한다. 모두 북방에 있다.
정백기(正白旗)는 동직문(東直門) 안에 상주하며, 양백기(鑲白旗)는 조양문(朝陽門) 안에 상주한다. 모두 동방에 있다.
정홍기(正紅旗)는 서직문(西直門) 안에 상주하며, 양홍기(鑲紅旗)는 부성문(阜成門) 안에 상주한다. 모두 서방에 있다.
정람기(正藍旗) 남(藍)은 흑색이다. 는 숭문문(崇文門) 안에 상주하며, 양람기(鑲藍旗)도 선무문(宣武門) 안에 상주한다. 모두 남방에 있다.
8기의 방위는 모두 상승(相勝)의 뜻을 취하여 사방으로 나누었으나, 목극토(木克土)는 없다. 그러므로 청기(靑旗)는 갖추어 두지 않았다.
연경팔경(燕京八景)
금(金) 명창(明昌)의 《일사(逸事)》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거용 첩취(居庸疊翠), 옥천 수홍(玉泉垂虹), 태액 추풍(太液秋風), 경도 춘음(瓊島春陰), 계문 비우(薊門飛雨), 서산 적설(西山積雪), 노구 효월(蘆溝曉月), 금대 석조(金臺夕照)를 팔경으로 삼아서 원, 명 사람들이 많이 읊조렸다. 영락 연간에 관(館), 각(閣)의 제공(諸公)들이 계문의 비우(飛雨)를 고쳐서 계문의 연수[薊門煙樹]라 하였고, 또 기반의 완월[碁盤玩月] 한 가지를 잊었다 하여 더해 십경(十景)을 삼았다. 건륭 16년(1751, 영조 27)에 수홍(垂虹)을 작돌(趵突), 적설(積雪)을 청설(晴雪), 연수(煙樹)는 다시 비우(飛雨)로 고쳤다.”
[주-D001] 기(箕), 미(尾) …… 되고 :
28수(宿) 중의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이다. 즉 중국에서의 북경의 위치는 천문에서의 28수 중 기수와 미수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주-D002] 우공(禹貢) …… 된다 :
‘우공(禹貢)’은 《서경(書經)》 편명으로 일종의 중국 지리서이다. 하우씨(夏禹氏)가 9년 흥수를 다스리고 나서,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순으로 9주의 토질과 소산물 및 교통 등을 적었는데, 기주는 제도(帝都)의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북경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이다.
[주-D003] 바람이 …… 이루며 :
이 대목은 북경 지역의 짜임새를 말한 것이다.
[주-D004] 감여가(堪輿家) :
집터나 묏자리 등을 잘 보는 사람으로, 감여선생(堪輿先生), 풍수가(風水家)라고도 한다.
[주-D005] 서계(書契) :
중국 태고(太古)의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 한다. 서(書)는 글자, 계(契)는 새긴다는 뜻으로 나무에 새긴 문자이므로 서계라 하였다. 《周易 繫辭》
[주-D006] 탁록(涿鹿) :
황제(黃帝)가 이곳에서 치우(蚩尢)를 죽이고 도읍을 정한 곳이라 전한다.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으로 북경 근방이다.
[주-D007] 헌원대(軒轅臺) :
헌원(軒轅)은 황제의 이름이다. 연산(燕山)은 송 나라 때 지금의 북경을 일컫던 이름이다.
[주-D008] 화숙(和叔) …… 곳이다 :
요(堯)가 화숙에게 북방의 역상(曆象)을 맡게 하고 그곳을 유도(幽都)라 이름하였다. 《書經 堯典》
[주-D009] 요 태종(遼太宗) :
여진족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아들로 중국을 차지하여 국호를 요(遼)라 고치고, 아울러 북경을 남경이라 하였다.
[주-D010] 양(亮) :
금(金)의 폐제(廢帝)로, 희종(煕宗)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가 송에게 패한 뒤 죽었다.
[주-D011] 군포(軍鋪) :
순라군(巡邏軍)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주-D012] 구궤(九軌) :
아홉의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있는 폭이 넓은 길이다. 옛 국도 안의 길이 이러했다 한다. 《周禮 考工記》
[주-D013] 옹성(瓮城) :
본성의 바깥에 있는 작은 성으로 둥글게 만들기도 하고 네모지게 만들기도 한다. 월성(月城)이라 하기도 한다.
[주-D014] 작설(綽楔) :
효자나 의사를 정표(旌表)하는 정려문이다.
[주-D015] 패루(牌樓) :
편액을 걸어 놓는 문 또는 시가에 있는 누각의 문이다. 패방(牌坊)이라고도 한다.
[주-D016] 타운(朶雲) :
금봉은 금으로 봉황의 형체를 만든 장식이요, 타운은 꽃구름을 종이로 그려 드리워 놓은 것인데, 조정의 의식에 쓰는 것인 듯하다.
[주-D017] 팔기 도통(八旗都統) :
청 나라 태조 때에 정한 병제로, 청조 창업에 공로가 많은 자의 자손으로 조직한 군대이다. 만주인으로 조직한 만군(滿軍) 8기, 몽고인으로 조직한 몽군(蒙軍) 8기, 한인으로 조직한 한군(漢軍) 8기가 있었는데, 각각 여덟 가지 색깔의 기로 표시하였다. 도통(都統)은 각군(各軍)의 최고 통수자이다.
[주-D018] 전시(殿試) :
천자가 친히 과거를 보이는 것이다.
[주-D019] 식년(式年) :
자(子), 오(午), 묘(卯), 유(酉)가 든 해, 즉 4년마다 치르는 과거이다.
[주-D020] 가량(嘉量) :
주대(周代)에 만든 양기(量器)의 이름이다. 이것은 곡(斛), 두(斗), 승(升), 합(合), 약(龠) 등 5량(量)이 있다. 《西淸古鑑》
[주-D021] 일규(日圭) :
해의 그림자를 측량하는 기구(器具), 즉 해시계이다.
[주-D022] 기거주(起居注) :
천자의 좌우에 있으면서 그 언행(言行)의 기록을 맡은 관직, 즉 주대(周代)의 좌사(左史), 우사(右史)와 같은 직이다.
[주-D023] 노침(路寢) :
임금이 정무를 보는 정전(正殿)이다.
[주-D024] 지금은 …… 바꾸었다 :
청 고종(淸高宗)의 이름이 홍력(弘曆)이므로 휘(諱)한 것이다.
[주-D025] 경적(耕耤) :
천자와 경제후(卿諸侯) 이상이 적전(耤田)에서 갈이하는 것이다. 적전은 궁중 소속의 전지로 제사에 쓰는 서직(黍稷)을 거두는 곳이며, 이곳에서 갈이할 때 천자는 세 번, 삼공(三公)은 다섯 번, 경제후(卿諸侯)는 아홉 번씩 한다. 《禮記 月令》
[주-D026] 현무신(玄武神) :
4신(神)의 하나로 북방의 신이다. 거북과 뱀으로 상징한다.
[주-D027] 오경(五經) :
악가는 송(宋)의 영종(寧宗) 때 사람으로 《춘추》 등 많은 서적을 교간(校刊)하였는데, 그가 교간한 서적은 지극히 정밀하다고 한다.
[주-D028] 마화지(馬和之) :
송 고종(高宗) 때의 화가이다. 인물 산수에 능하였으며, ‘모시’ 300편을, 한 편에 한 폭씩 그린 ‘모시도’로 더욱 유명하다.
[주-D029] 일배 삼고두(一拜三叩頭)의 예 :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는 예이다. 경우에 따라 절하는 회수와 고두하는 회수가 각기 다를 때가 있다. 청조에서는 일반의 경례법(敬禮法)으로도 성행되었다.
[주-D030] 다이곤(多爾袞) :
태조(太祖)의 열넷째 아들로 이자성(李自成)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경을 평정하였으며, 조카인 세조(世祖)를 도와 섭정하였다. 예친왕은 봉호이다.
[주-D031] 대협(大祫) …… 왕공(王公) :
대협은 체천된 조상을 합제(合祭)하는 것이다. 왕공은 친왕(親王), 군왕(郡王), 진국공(鎭國公), 보국공(輔國公) 등의 총칭이다.
[주-D032] 수구기략(綏寇記略) :
청의 오위업(吳偉業)이 찬한 책이다. 명 나라 말기 유적에 관한 일을 명 나라가 망할 때까지 기록하였다.
[주-D033] 9조(朝) :
명 세종(世宗) 이전의 황제인 태조(太祖), 혜제(惠帝), 성조(成祖), 선종(宣宗), 영종(英宗), 경제(景帝), 헌종(憲宗), 효종(孝宗), 무종(武宗)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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