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거의 3백 리(里)에 달했고,

2022. 9. 20. 12:06백두산

숙종실록 53, 숙종 39 1 22일 경자 1번째기사 1713년 청 강희(康熙) 52

부교리 홍치중이 북로(北路) 폐막과 백두산의 정황에 대해 진달하다

국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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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부교리(副校理이교악(李喬岳) 문의(文義)059) 로 인하여 인주(人主) 자용(自用)060) 하는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부교리 홍치중(洪致中)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북로(北路)의 폐막(弊瘼)을 진달하기를,

"의논하는 자가 간혹 말하기를, ‘남도(南道)·북도(北道)에 각각 감사(監司)를 둔것에 대해서 비록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북병사(北兵使)와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은 이따금 문신(文臣)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내 홍치중(洪致中)에게 북관(北關)의 일을 상세히 말하도록 명하니홍치중이 말하기를,

"북로(北路)는 전세(田稅) 대동(大同) 법규061) 가 없으니공상(供上)062) 이외에는 따로 면제해 줄 만한 부역이 없고, 군역(軍役)을 충당하기 어려움은 삼남(三南)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 풍속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 한 번 그 마음을 결정하면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잘 어루만져 달래어 그들의 환심(懽心)을 얻는다면 후일 나라가 위급할 경우에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는 우환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장기(長技)가 마치 흉노(凶奴)와 같으니, 만일 용병(用兵)을 하고자 한다면 이들을 버리고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그 민심(民心)을 굳게 결속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학(文學)이 있는 사자(士子)가 점차로 많아지니,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고, 이내 이재형(李載亨)·윤민건(尹敏建)·한세양(韓世讓)·채진원(蔡振遠등 네 사람을 추천하여 특별히 수록(收錄)해서 북인(北人)을 용동(聳動)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이재형 등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녹용(錄用)토록 하였다.  백두산(白頭山)의 형편(形便)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무산(茂山) 70()로부터 임강대(臨江臺)에 이르기까지 또 10리가 되는데, 어활강(魚濶江)을 건너서 산밑에 이르니 땅은 광막(廣漠)063) 하나 인가(人家)는 없었고, 험한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서 정상(頂上)에 오르고 보니 산이 아니고 바로 평야(平野)였습니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하늘의 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거의 3백 리()에 달했고, 거기서 5()를 더 가니 비로소 비석(碑石)을 세운 곳에 당도했습니다. 비석은 매우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았으며, 두께는 몇 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쪼아서 갈아 놓은 것이 정밀하지 못했고 세운 것도 견고하지 않았습니다목차(穆差)064) 가 귀()한 행신(幸臣)으로서 명령을 만들어 정계(定界)하였는데, 허술함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가 공력(功力)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석을 세운 곳에서 바라보니 우뚝하게 치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가 보니 14 봉우리가 빙 둘러서서 서로 껴안고 있어 하나의 동부(洞府)065) 을 형성하였고, 거기에 큰 못이 있는데 빛깔이 아주 검푸른 빛을 띠어 몇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여지(輿誌) 중에는 못의 주위가 80리라고 칭하였는데, 신이 보기에도 40여 리 쯤은 되어 보였습니다. 산 전체가 모두 사석(沙石)이므로 풀이나 나무는 생장하지 않으며, 쌓인 눈이 사철 녹지 않으므로 백두(白頭)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연유된 듯합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