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7. 15:50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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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관중(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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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태조(宋太祖)가 변경(汴京)에 수도를 정하고 다시 관중(關中)으로 갈 생각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강(靖康)의 난리에 충사도(种師道)가 관중으로 피난할 것을 권하였으나 하율(何㮚)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 태조(明太祖)는 변량(汴梁)을 북경(北京), 금릉(金陵)을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이때에 황제에게 관중으로 옮기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포빈(鮑頻)의 말에 의하여 마침내 금릉으로 수도를 정하였다.
대체로 관중에 대한 이야기를 다만 역사적 사실로만 생각한다면, 수주대토(守株待兎)와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가까울 것이다. 충사도의 계책도 당면의 다급한 것은 면할 수가 있으나 절대 안전한 방법은 못 된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과거에 관중에 도읍을 정한 것은 황하가 좌우로 둘러 있어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못과 같이 되어 있고 다만 함곡(函谷)으로 나아가는 한 가닥 길만이 산동(山東)으로 통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험한 지대이며 또 관중의 산은 모두 촉(蜀)에서 뻗어나와가지고 장안(長安)에 와서 끝났다. 횡산(橫山) 같은 험준한 곳은 산으로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우리 왕조에 와서는 이북이 모두 서하(西夏)의 소유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산과 황하의 유리한 조건을 그들과 우리가 함께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반대로 높은 데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신종(神宗)은 날카로운 신경을 써서 횡산을 빼앗으려 하였다. 횡산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는 또 영락(永樂)이었는데 서하 사람들이 영락성에서 결사적으로 항쟁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하였다.
대체로 지리적인 가치는 변할 수 있으며 시대는 예와 지금이 다르다. 사람들은 다시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고 아직까지도 누경(婁敬)의 말 한마디를 믿고 이를 철칙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산이 가로막히고 황하가 둘러 있는 것이 오늘날에도 유리한 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영락을 손에 넣고 횡산을 점령한다 할지라도 승패는 일시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수도란 본시 아침저녁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회를 보아 빼앗을 수도 있고 저쪽도 틈을 타서 들어와 점령할 수 있는 곳에서 어떻게 영구한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발발(勃勃)의 통만성(統萬城)은 서로 점령하고 있는 곳이 가까웠기 때문에 유기노(劉寄奴)같이 강한 용맹이 있는 사람으로서도 단번에 평정하지 못하고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바로 실패를 가져왔으니 이것이 사실로 증명된다.
당시 유경(劉敬)의 계책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북방의 오랑캐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그러므로 군대의 실정을 탐색하여 그들이 위장으로 유인하는 줄을 알았고, 또 반드시 공주(公主)를 출가시켜 친선을 굳게 맺고 그런 뒤에 제(齊)와 초(楚)의 지방의 명문 호걸들을 이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것은 어느 한 가지라도 빼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정은 모르고 다만 요충지대를 장악하는 것만을 내세우고 있으나 남의 등을 문지르고 있을 때에 거센 주먹이 벌써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칠 것이라는 것은 모르는 생각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주-D001] 관중(關中) :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의 별칭. 동으로 함곡관(函谷關)이 있으므로 ‘함곡관의 안’이란 뜻으로 생긴 이름. 혹은 서쪽에 농관(隴關)이 있으므로 함곡관과 농관의 가운데라는 뜻이라고도 함.
[주-D002] 정강(靖康)의 난리 :
이 말은 북송(北宋) 흠종(欽宗) 정강 2년에 금(金) 나라가 쳐들어와서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부자를 비롯하여 많은 신료들이 북으로 잡혀간 난리.
[주-D003] 누경(婁敬) :
한 고제(漢高帝) 때의 신하. 고제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하려 할 때 누경이 관중으로 갈 것을 주장하여 장안(長安)을 수도로 정하고 누경에게는 성을 유(劉)로 고쳐주어 뒤에는 유경(劉敬)이라 하였음.
[주-D004] 통만성(統萬城) :
통만(統萬)은 곧 횡산(橫山)인데 발발이 후진(後秦)의 장군으로 이곳을 점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萬方)에 군림(君臨)한다.”는 뜻으로 성 이름을 통만(統萬)으로 고쳤음. 발발(勃勃)은 남북조시대 하(夏)의 임금인 혁련발발(赫連勃勃).
[주-D005] 유기노(劉寄奴) :
남북조 시대 송 고조(宋高祖) 유유(劉裕)의 아명(兒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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