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겨울이 되면 경사(京師)에 귤을 바치느라 1월 중에는 거의 쉬는 날이 없었

2022. 9. 12. 11:10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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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34 원집 외편 / 동사(東事)

탁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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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라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이다.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고을나(高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 3인이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니, 오곡을 심어 가꾸며 목축을 하여 무리를 이루었다. 3인은 3도(都)에 나누어 살며 각기 수장(帥長)이 되었다.
고을나의 15세에 고후(高厚)라는 자가 있어서 처음으로 신라와 통교하였다. 그때 객성(客星)이 나타났으므로, 신라국 임금이 고후를 성주(星主)라 이름하고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하사하였다. 뒤에 백제를 섬겼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
고려 신성왕(神聖王 왕건(王建)) 20년(937) 탐라국의 태자(太子) 말로(末老)라는 자가 입조(入朝)하였고 의종(毅宗) 때 나라를 폐하고 군현(郡縣)을 두었다. 그 백성들은 어리석고 풍속은 검색(儉嗇)하며 귀신을 좋아하였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예양(禮讓)을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밭 사이에 묻었고 부처를 섬기지 않았다. 양마(良馬)ㆍ진주(眞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가 나왔고 귤ㆍ유자(柚子)ㆍ황감(黃柑)이 풍부하였다. 산이 높고 바다가 험한데, 고기를 낚고 사냥하는 데에 어망(魚網)과 덫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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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18 / 묘지명(墓誌銘)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안공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安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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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표(杓)이고 자는 사정(士定)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먼 조상 맹담(孟聃)은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 때에 공주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고조할아버지 ()은 예조 참판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상억(相億)은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천수(薦授) 되었으며, 할아버지 윤적(允廸)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 종해(宗海)는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돌아가신 어머니 숙인(淑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군수(郡守) 하교(夏敎)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고 뜻이 커서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도 말과 행동거지가 마치 어른 같았다. 장성한 후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듣지 못하면 스스로 설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선생을 따라 공부하였으니 현자(賢者)들과 경전의 뜻을 토론하며 발휘하는 것이 많았다.

영묘(英廟 영조(英祖)) 30년(1754)에 증광(增廣) 병과(丙科)에 올라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속하여 기거주(起居注)를 섭행하였는데, 임금이 진단()이 나귀에서 떨어진 에 대해서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진단이 나귀에서 떨어진 것은 창생(蒼生)을 위하여 기뻐한 것이니 진명지주(眞命之主)를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단(摶)이 송(宋)나라 태조(太祖)를 만나보고 화산(華山)에 은거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미 하찮은 천자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소견이 매우 명료하도다.”

하였다.

그해 8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친 후 또 기거주를 섭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하였다. 다음 해에 임금의 친정(親政)을 입시(入侍)하였고 전적(典籍)으로 승진한 후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세자시강원의 사서(司書)와 문학(文學)을 거쳐 이조 좌랑으로 고쳐 제수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자인 현감(慈仁縣監)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도당록(都堂錄)에 뽑혔는데, 친척 이담(李潭)이 반대하며 막았으나 공은 한 번 웃고 자변(自辨)하지 않았다.

다음 해에 비로소 홍문관에 들어가 부교리가 되었다가 특명을 받고 이에 자인 현감이 되었다. 얼마 후에 홍문관 수찬에 소배(召拜)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문학(文學)으로서 사간원헌납 겸 사서(司諫院獻納兼司書)로 옮겼다. 다음 해에 부수찬으로 전임(轉任) 되었다가 다시 병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다. 또 다음 해 정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친 후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고성(固城)에 보임되었으나 친혐(親嫌) 때문에 면직되었다.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가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고,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고쳐 제수되었다가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나아갔다.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역관(譯官)들이 감히 사욕(私慾)을 챙기지 못하였다. 복명(復命)함에 미쳐서 돌아오는 짐 꾸러미가 단출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청렴ㆍ근신(謹愼)함에 감복하였다. 평양에 이르러 다시 헌납(獻納)에 제수되었고, 얼마 있다가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겸 남학교수(司諫院司諫司憲府執義兼南學敎授)로 나아갔다. 다음 해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거쳐 다시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다.

그때 마침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어 양리(良吏)를 뽑을 것을 명하자 대신들이 안(安) 아무개가 제주 목사가 될 만하다고 천거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매우 진실하기에 내가 한 번 시험해보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하였다. 이에 발탁하여 제주 목사를 제수하고 면유(面諭)하여 말하기를,

“제주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 지난해에 근신(近臣) 윤시동(尹蓍東)이 교지를 받들고 가다가 모친이 병이 들어 면직(免職)하였으니, 경이 가서 위무하라.”

하였다.

공이 마침내 명을 받고 바다로 들어가면서 임금의 성덕(聖德)을 선포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한라산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수백여 리에 걸쳐 귤나무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섞여 사는 어민(漁民)들의 부역이 가장 많았다. 공이 도임한 후에 폐해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어 모두 다 제거하였다.

목사(牧使)가 바다를 건널 때 제주의 백성들이 말을 대기시키고 와서 맞이하곤 하였다. 공은 ‘해문(海門)에 배가 있는데 무엇하러 말을 쓰는가.’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한 필의 말도 대기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매년 한겨울이 되면 경사(京師)에 귤을 바치느라 1월 중에는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공이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수고를 가엽게 여겨 노자(路資)와 식량을 넉넉하게 내려주었으니, 제주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다.

환도(環島) 이남에 노인들이 많았는데, 세상에서 이르기를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추분(秋分) 때만 되면 저녁에 나타나므로 제주의 고령자 가운데 100세가 넘어서도 아직 아치(兒齒)가 빠지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하였다. 공이 잔치를 베풀어 본 주(州)의 70세 이상 노인 700명을 불러다가 각각 명아주 지팡이를 내렸으니, 노인들이 서로 북 치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다.

제주의 옛 명칭은 탐라국(耽羅國)으로 서쪽으로 내지(內地)와 통한다. 공이 바닷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서 그 재주에 따라 상을 베풀었으므로 현송(絃誦)의 소리가 내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무사(武士)를 가려 뽑아 날마다 활을 쏘게 해서 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 상을 주었다. 이에 문무(文武)가 빈빈(彬彬)하여 예전에 시험 보였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몇 달 있다가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 공이 장차 돌아가려고 진관(津館)에 나아가자 백성들이 모두 곡(哭)을 하여 그 소리가 바다 밖 수십 리에까지 들렸다.

정의(旌義)의 수령이 바람에 표류되어 배가 위험에 빠지자 공이 몸소 구하러 나섰다. 이미 중류에 갔을 때 갑자기 태풍을 만나게 되자 뱃사람들이 모두 정의 수령을 원망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명(命)에 달려 있는데 하물며 동호부(銅虎符)를 허리에 차고 있음에랴. 왕령(王靈)이 미치는 곳에는 반드시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에 타루(柁樓)에 우뚝 서서 글을 지어 바닷속에 던지니 바람이 마침내 진정되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공의 힘이다.

조정에 돌아옴에 미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 좌부승지로 옮겨졌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고쳐 제수되었다.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조참(朝參)에서 소명(召命) 받들지 않았다 하여 해남(海南)으로 유배하였다가 열흘도  되어 명을 내려 용서하였다. 얼마 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가 어떤 일에 걸려 파면되었다. 다음 해에 병조 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는데 한 달 남짓 후에 해직되어 돌아왔다. 2년 후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는데 형률(刑律)을 의정(議定)한 일 때문에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가 한 달 만에 용서 받았다. 겨울에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다음 해에 관찰사가 고과(考課) 중고(中考) 두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하고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갔다.

다다음 해인 계사년 윤달 6일에 집에서 작고하였으니 향년 64세였다. 그해 5월 4일에 양주(楊州) 고주(古州)에 있는 언덕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시서(時叙)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광렬(光烈)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정수(鼎壽)와 둘째 아들 익수(益壽)는 모두 일찍 죽었고 딸은 김문근(金文根)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2남 1녀는 모두 아직 어리다. 내외 증손(曾孫) 약간 명이 있다.

공은 소시(少時)부터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언행을 삼갔다. 부모를 섬김에 유순하여 그 뜻을 어김이 없었고 형제들과 우애 있고 화목하였으며 종족(宗族)에게 돈독하여 은애(恩愛)의 마음이 곡진하였고 질박함을 좋아하여 화미(華美)함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교유를 일삼지 않으면서 가난한 선비처럼 자신을 검약하게 단속하였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단정히 앉아 《시(詩)》ㆍ《서(書)》를 되풀이하여 읽었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의 장구를 가장 사랑하여 종신토록 연구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정해진 명이 있는 것인데, 내 어찌 덕에 걸맞지 않은 지위에 올라 수치를 당할 것인가.”

하였다. 아! 만약 남당(南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공이 어찌 그 명(命)을 편안히 여기고 후회하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제주에는 하루에 천 리를 가는 준마(駿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매년 말 수백 필을 바쳐 승여(乘輿)를 받들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바칠 만한 것이 어찌 다만 준마뿐이겠는가. 선비 중에 또한 준마와 같은 불기지재(不羈之材)가 있으니, 안후(安侯)가 제주 목사가 된 후 가장 먼저 문무(文武)의 준수한 선비를 찾은 것은 장차 선비를 바쳐 조정에 오르게 하여 승여를 받들게 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제주에 비록 인재가 있으나 안후가 목사가 된 지 몇 달 안 되어 파직되었으니, 선비가 불기지재가 되어 조정에 오를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이 내가 조정을 위해 애석해하는 까닭이다.

[-D001] 통정대부 …… 안공 : 

안표(安杓, 1710~1773)를 가리킨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정숙(定叔)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1754년(영조30) 문과에 급제한 후 사복시 정ㆍ헌납ㆍ집의ㆍ형조 참의ㆍ대사간 등을 지냈다. 1767년 왕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할 때 이에 불참하여 해남현에 유배되었다가 한 달 후 다시 복직되어 대사간ㆍ병조 참의ㆍ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여 시파(時派)ㆍ벽파(僻派) 등의 당파가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D002] 맹담(孟聃) :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을 가리킨다. 조선 세종(世宗)의 사위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이다. 1428년(세종10)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결혼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지고 다시 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었다. 1455년(세조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초서에 능하고 말 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과 약물(藥物)에 해박하고 불법(佛法)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D003] () : 

안진(安縝, 1617~1685)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율보(栗甫), 호는 학촌(鶴村)이다. 1639년(인조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2년(효종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ㆍ동부승지ㆍ형조 참의ㆍ병조 참의ㆍ승지ㆍ황해도 관찰사ㆍ대사간ㆍ예조 참판ㆍ개성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윤휴(尹鑴)와 절친하게 지냈으나 그가 송시열(宋時烈)과 뜻을 달리하자 절교하였으며, 승지로 있을 때 윤휴가 송시열을 탄핵하자 적극 변호하다가 남인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D004] 한원진(韓元震) : 

1682~1751. 조선 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1717년(숙종4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가 신임사화로 노론이 축출될 때 사직하였으며, 1725년(영조1) 경연관으로 출사하였으나 영조에게 소론을 배척하다가 삭직되었다. 이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나자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洛論)에 맞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며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저서로 《남당집》ㆍ《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ㆍ《역학답문(易學答問)》 등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D005] 진단() : 

?~989. 중국 오대말 송초의 도교학자이자 신선가(神仙家)로, 자는 도남(圖南)이며 호는 부요자(扶搖子)이다. 송나라 태종(太宗)이 매우 존경하여 희이 선생(希夷先生)이란 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신선의 술법과 역리에 정통하여 수양도인(修養導引)과 선단(仙丹) 채취 방법에 대해 말한 《지현편(指玄篇)》 81장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그린 〈선천도(先天圖)〉를 보고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太極圖)〉를 그리는 등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상수학(象數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40여 년 동안 화산(華山)에 은거하면서 후주(後周)의 세종(世宗)과 송나라의 태종(太宗)이 모두 후한 예로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上 陳摶傳》

[-D006] 진단() ……  : 

중국 오대(五代) 말기에 진단이 화산(華山)에 숨어 살았는데 개봉으로 가는 길에 송 태조(宋太祖)가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박장대소하며 크게 웃다가 나귀에서 떨어지면서 말하기를 “이제야 천하가 안정을 찾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D007] 진명지주(眞命之主) : 

하늘의 명을 받아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통일한다는 어진 임금을 가리킨다.

[-D008] 이담(李潭) : 

1723~177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경룡(景龍)이다. 1747년(영조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75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ㆍ대사간ㆍ승지ㆍ황해도 관찰사ㆍ부제학ㆍ대사간ㆍ이조 판서ㆍ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70년 편집청 당상으로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D009] 친척 …… 막았으나 : 

안표(安杓)와 이담(李潭)은 재종형제간인데, 당시 교리(校理)이던 이담이 안표와 신사운(申思運)을 도당록에 참여하게 한 데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국역 영조실록》 34년 7월 9일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교리 이담이 상서(上書)하여 ‘홍문관의 선임은 그 법이 지극히 엄격한데, 신사운은 천박하고 우둔하며 안표는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혹은 대신(大臣)의 족당이라 하고 혹은 문형(文衡)의 가까운 인친(姻親)이라고 하여 이에 참여하였습니다.……신의 생각으로서는, 권점에 참여한 여러 당상(堂上)을 견책하고 파면하는 벌을 마땅히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D010] 친혐(親嫌) : 

친족끼리 한 관사에 있으면 공정하게 판단하고 이행하지 못할 수 있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는 것을 말한다.

[-D011] 윤시동(尹蓍東) : 

1729~179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이다. 1754년(영조30) 문과에 급제한 후 제주 목사ㆍ대사간ㆍ대사헌ㆍ대사성ㆍ부제학ㆍ경기도 관찰사ㆍ개성 유수ㆍ전라도 관찰사ㆍ이조 판서ㆍ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수(金鍾秀)ㆍ심환지(沈煥之) 등 시파 인사들과 벽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 탕평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유배되었다. 1756년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간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고, 1766년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다시 전리방귀 되었으며, 이후로도 당론을 일으키다 갑산ㆍ남해ㆍ삼화 등지로 유배되었다. 편저로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D012] 말을 대기시키고 : 

원문의 ‘立馬’는 각 역(驛)에서 역마(驛馬)를 길러 공적인 일이 있을 경우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D013] 내지(內地) : 

원문의 중주(中州)는 섬 지역인 제주도에 대하여 조선 내지, 본토를 의미한다.

[-D014]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 : 

《국역 영조실록》 42년 11월 14일 조에 “제주 목사(濟州牧使) 안표(安杓)를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살옥(殺獄)의 격식을 어긴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D015] 정의(旌義) : 

제주도 남제주 지역의 옛 이름이다.

[-D016] 동호부(銅虎符) : 

지방 수령의 관인(官印)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 한(漢)나라에서 비롯하였다.

[-D017] 사간원 …… 용서하였다 : 

《국역 영조실록》 43년 11월 29일 조에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으로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대사간 안표(安杓)를 해남현(海南縣)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반열(班列)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약 열흘 뒤인 12월 9일 조를 보면 “전 대사간 안표(安杓)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건의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D018] 고과(考課) 중고(中考) 두자 : 

관원의 근무 성적을 상ㆍ중ㆍ하로 나누어 고과하는데, 그 중 중(中)을 매겼다는 말이다. 이조나 병조에서 매년 두 차례 관원의 공과(功過)를 조사하여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데, 중고면 승진하지 못하였다.

[-D019] 집에서 작고하였으니 : 

벼슬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다는 말이다.

[-D020] 고주(古州) : 

경기도 양주(楊洲)에 있는 땅의 이름이다.

[-D021] 문을 닫고 들어앉아 : 

원문의 ‘杜門却掃’는 대문을 닫고 정원의 길도 쓸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이 “대문을 닫고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산업은 돌보지 않은 채 독서만 일삼았다.[杜門却掃, 棄産營書.]”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D022] 남당(南塘) : 

한원진(韓元震, 1682~1751)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1717년(숙종4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가 신임사화로 노론이 축출될 때 사직하였으며, 1725년(영조1) 경연관으로 출사하였으나 영조에게 소론을 배척하다가 삭직되었다. 이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나자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洛論)에 맞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며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저서로 《남당집》ㆍ《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ㆍ《역학답문(易學答問)》 등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D023] 승여(乘輿) :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