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로 친다면은 회남이 곧 이웃일레 / 緯帶淮南可比隣

2022. 9. 12. 11:10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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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13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강도(江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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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摩尼山)과 혈구산(穴口山)이 진(鎭)을 이루고 동진(童津)과 승천진(昇天津)이 가로막고 있는데 사면(四面)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토지가 기름지며, 섬들이 포진(布陣)하여 삼면(三面)이 도회(都會)를 이루어서 서울의 인후(咽喉)가 되고 있다. 둘레가 5만 5365파(把)인데 그중에 1만 6000파는 산과 포구(浦口)로서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그 나머지 중 2만 6975파는 고토(古土)로 기초를 쌓은 것이고 1만 2390파는 고석(古石)으로 기초를 쌓은 것이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외성(外城)과 중성(中城) 2960칸(間)을 쌓았고, 아조(我朝)의 숙종(肅宗) 때에 돈대(墩臺) 48좌(坐)를 쌓았으며, 효종 4년(1653)에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이 청하여 안흥진(安興鎭)을 설치해서 이를 강도의 외원(外援)으로 삼았다. 숙종 4년(1678)에는 김석주(金錫胄)가 군대의 땔나무를 구할 산림을 가꾸는 일이 중요하다 하여 완도(莞島)와 변산(邊山)에서 솔씨를 구해 와서 산기슭의 농사짓기에 곤란한 땅을 골라 두루 솔씨를 심었다. 숙종 10년(1684)에는 강도의 지도(地圖)를 진상하였는데 이때 보음도(甫音島)에 성을 쌓고 그 위에 치첩(雉堞 성가퀴)을 설치한 다음 다량의 화기(火器)를 배치하였는바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강도가 크게 공고하게 되었다. 또 문수성(文殊城)을 쌓아서 편의에 따라 을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숙종 18년(1692)에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강화에 토성을 쌓지 못한 곳이 휴암(鵂巖)에서부터 인화보(寅火堡)까지로서 그 거리가 1만 4405보(步)인데 이를 이수(里數)로 계산하면 40리 5보가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산꼭대기에 여장(女墻 성가퀴)만을 쌓아도 될 곳이 2826보이고, 평지에 성을 쌓아야 할 곳이 1만 1207보이며, 바다 기슭이 솟아올라서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성을 쌓은 것에 해당되는 곳이 372보나 됩니다. 그런데 유수(留守)가 각각 임기 중에 6리 241보씩을 나누어 쌓을 수 있으니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여섯 유수의 임기 중에 이를 완전히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강도의 군정(軍丁)만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승군(僧軍)을 사용하고 삼군문(三軍門)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비로소 일을 시작하였다. 또 이인엽(李寅燁)과 민진원(閔鎭遠)을 삼영 당상(三營堂上)으로 삼아서 서로 번갈아 왕래하면서 이 일을 끝까지 완성하게 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심도(沁都 강도(江都))의 성이 바닷가를 따라서 벽돌로 쌓은 곳이 50리나 됩니다. 그런데 해마다 장마가 지면 벽돌이 허물어져서 성첩(城堞)이 무너져 버리고 마니 헛되이 재력(財力)만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탐라(耽羅)의 탱자나무 방책(防柵)이나 왕식(王式)의 가시나무 방책을 본떠서 바닷가를 따라 탱자나무를 심도록 하되, 달곶이[月串]에서부터 승천보(昇天堡)까지 심는다면 6, 7년이 못 가서 2백 리의 거리에 석축(石築)도 아니고 벽축(甓築)도 아닌 하나의 장성(長城)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날에는 심도의 길이 사면 모두 저습(低濕)한 곳이어서 배를 갖다 댈 수 없었는데 여기에 성을 쌓고 포구를 막은 뒤로 편편한 육지가 되어 버렸다. 요사이 서양의 선박이 침입할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인바, 병인년(1866, 고종3)에 성이 함락되는 데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군사를 기르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으니 양적(洋賊)들의 기웃거리는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

 

임하필기 13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탐라(耽羅) 노정(路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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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탐라에 가려고 하는 자는, 나주(羅州)에서 길을 떠나면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를 거쳐서 영암(靈巖)의 대무지와도(大無只瓦島)와 해남의 어란량(於蘭梁)을 지나서 7일 밤낮을 가야 바야흐로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게 되며, 해남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를 따라 거요량(巨要梁)과 삼내도(三內島)를 거치게 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를 따라 고자(高子), 황이(黃伊), 노슬도(露瑟島), 삼내도를 지나게 되는데 모두 3일 밤낮을 가야 추자도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이들 세 곳은 배가 모두 추자도를 경유하게 되는데 다시 사서도(斜鼠島)와 대소(大小) 화탈도(火脫島)를 지나서 드디어 탐라의 애월포(涯月浦)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조천관(朝天館)과 화탈도와의 사이에서 양쪽 물이 서로 교류(交流)하여 파도가 매우 험하기 때문에 이곳을 왕래하는 자들이 곤란을 겪는다.” 하였다.

 

임하필기 11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일본(日本)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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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薩摩)는 절강(浙江)과, 마도(馬島)는 조선(朝鮮)과, 비전(肥前)은 탐라(耽羅)와 마주 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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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전집 10 / ()

임소에 가는 탐라백을 작별하다[羅伯之任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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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동쪽 한 번 이별 작은 못 가일러니 / 城東一別小池頭
푸른 일산 멀리 놀아 제주로 떠나가네 / 葱蓋弧南博遠遊
천년이라 한가한 땅 성주의 옛나라에 / 星主千年間暇地
탐라국주(耽羅國主)는 였날에 성주(星主)라 칭하였음
군민의 총관님은 바로 곧 군후로세 / 軍民摠管卽君侯
원(元) 나라 때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를 세웠음.

 

철옹같은 서방에다 토문마저 곁따르니 / 鐵罋西防又土門
변방을 튼튼히 한 모든 계획 분명해라 / 分明籌策壯邊垣
옹어의 바다 위서 깃대 돌림 고작인데 / 鰅魚海上纔廻節
설문(說文)에 옹어는 동이(東暆)에서 난다 했는데 곧 지금 강릉(江陵)임.
붉은 인끈 지금 옮겨 유자 나는 고장으로 / 朱紱今移橘柚園
삼십칠 도 위선이 사뭇 높아 길 고른데 / 極高卅七線途勻

 

하미는 서로 연해 석진을 지나가네 / 河尾連躔度析津
목노는 영주 땅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 木奴不過瀛洲植
위대로 친다면은 회남이 곧 이웃일레 / 緯帶淮南可比隣
위도(緯度)가 회남(淮南)과 더불어 동대(同帶)이기 때문에 유자가 바다를 건너면 역시 탱자가 됨.

 

담모가 옛날에는 탐부로도 일렀나니 / 聃牟於古亦耽浮
유리성 비었어라 바다 머릴 베개했네 / 儒李城空枕海頭
《수서(隨書)》에 ‘담모라(聃牟羅)는 백제(百濟) 해중에 있다.’ 하였고, 한문(韓文)에 ‘해외유수 탐부라의 나라[海外流水 耽浮羅之國]’라고 하였으며,《당서(唐書)》에는 ‘담라국(儋羅國)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내도하다.’ 했으니, 모두 탐라(耽羅)를 가리키는 것인데 성음이 비슷하여 서로 변한 것임.
구한의 풍토지를 보충해야 하겠는데 / 要足九韓風土志
다루화치[魯花] 유적을 어찌하면 구한다지 / 魯花遺蹟若爲求
《풍토기(風土記)》에 ‘구한(九韓)의 목에 탐라(耽羅)가 그 하나를 차지하는데 원 나라 때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었다.’ 하였음.

[-D001] 하미 : 

하괴성(河魁星)과 미성(尾星).

[-D002] 석진 : 

석목(析木)의 나루라는 것으로 제주를 말함. 석목은 미성(尾星)의 별칭인데 남쪽에 위치함.

[-D003] 목노(木奴) : 

유자의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