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9. 13:33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恭惟我太祖, 天縱聖武, 奄有大東, 南盡于海, 西北抵于鴨綠, 東北抵于豆滿, 猶慮夷狄之近境, 越江艱險, 櫛風沐雨, 親征西胡, 遠近望風, 莫不奔潰, 北至東寧、東至皇城、南至于海, 胡地一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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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8년 계미(1523) 12월 11일(정미)
18-12-11[02] 만포 첨사 이성언의 야인을 쫓는 일과 사군을 운영하는 데 대한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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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포 첨사(滿浦僉使) 이성언(李誠彦)이 상소(上疏)하였다.
“신(臣)이 이제 변방에 있으므로 사군(四郡)의 형세를 살펴서 압니다. 사군의 땅은 오(吳)ㆍ촉(蜀)보다 험하므로 적(賊)이 크게 자리잡으면 병마(兵馬)를 쓰기 어렵고 주즙(舟楫)도 쓸 수 없는데, 그 사이에 지능(智能)이 있는 자가 나서 뭇 되[胡]를 거느려 기율(紀律)을 시행하여 문득 유사시에 상하의 급소를 지키면 두예(杜預)의 지혜와 등애(鄧艾)의 재주가 있더라도 담요로 몸을 싸서 굴러 내려가거나 홰[炬]에 불붙여 사슬을 태워서 전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땅은 적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온갖 방향으로 통하므로 이제 저들이 우리 지경에 드나들며 어렵(漁獵)을 자행하니, 각 진보(鎭堡)의 주산(主山) 밖은 다 저들이 어렵하는 터가 되어, 엽기(獵機)ㆍ어량(漁粱)ㆍ막사와 말 발자국이 산과 들에 두루 찼고, 진보의 뒷산에 올라 우리 허실(虛實)을 엿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어렵하는 저들을 잡아 죽이지 못하도록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으므로, 각진(各鎭)의 망보는 군졸이 근경(近境)에서 서로 만나도 손을 대지 못하고 말로만 금지하니 저들이 두려운 줄 모르고 꺼림없이 자행하여, 점점 크게 치성(熾盛)하게 되면 작지 않은 우환이 되어 마치 큰 종기가 배나 등에 맺힌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신이 이 때문에 구구히 소(疏)로 아뢰고 권권(眷眷)히 사신에게 신보(申報)하여 전계(轉啓)한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여 온 지 오랩니다. 그런데 이제 쫓아내라는 분부를 들었으니, 이는 신이 예전부터 바라던 것을 하루아침에 얻은 것이므로 좋아 뛰고 기세가 돋아지며 반갑고 듣기를 바라던 일입니다마는, 쫓아 낸다는 말이 당초에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고금의 왕자(王者)가 이적(夷狄)을 대한 것을 두루 보건대, 죄가 있으면 정토(征討)하고 죄가 없으면 방비하였을 따름이고, 쫓아낸 일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산릉(山陵)에 나쁜 범이 있어서 쫓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나쁜 짐승을 보고 어찌 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이지 않고 쫓기만 한다면, 쫓으면 곧 돌아오곤 하여 군사가 쉴 때가 없겠거니와, 이번에 되를 쫓는 계책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저들의 땅에는 기름진 곳이 없고, 이 땅에 와서 사는 자는 농사짓고 어렵하는 이익이 저희 땅보다 열 곱이나 더한데, 어찌 집을 불사르고 쫓는 것으로 물리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물리쳐 버리지 못할 뿐이 아니라 아마도 욕을 보는 폐단까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조그마한 나라로 세 방면으로부터 적을 받게 되어 있는데, 수(隋)ㆍ당(唐)이 천하의 힘을 다해서도 굽히지 못하고 이적이 한 지방의 군사를 다해서도 감히 침범하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나라의 사기(士氣)가 정예하여 앞을 다투어 분발하고 용약하기 때문에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어서 이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사군(四郡)의 되 형세는 삼수(三水)부터 만포(滿浦)까지 강변에 벌여 사는 자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온화위(溫火衛)의 초면(初面)과 건주위(建州衛)의 초면은 경계를 연접하여 섞여 살아서 되의 집들이 매우 많은데, 사군의 되도 다 처음에 이곳에 살다가 옮겨 온 자들입니다. 이곳은 산단(山端)의 동타시합(童他時哈)ㆍ지령귀(地寧貴)ㆍ박산(朴山) 등의 집과 1일정(日程) 또는 2일정쯤 떨어져 있고 건주위의 추장 이동아(李銅兒)가 사는 부락도 1일정쯤 되고, 허공교(虛空橋) 이상의 되[虜]가 사는 곳에 또 각각 본디부터 부근에 사는 저들이 있습니다. 우리 군사가 여연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13~14일이 걸려야 돌아올 수 있는데, 저들이 원병을 청하여 저희끼리 구제한다면, 겨우 며칠 안에 아군은 참획(斬獲)하고 앞을 다투어 분발할 일이 없어져서 장사(將士)가 게을러지고 얼음길에서 조심하느라 기를 펴지 못하여, 추워 움츠리고 좌절되는 고통이 있을 뿐이며 용감하고 날카로운 기운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경내에 들어가서 구적(寇賊)에게 타이르고 집들을 불살라 없애기만 하고서 적을 뒤에 두고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가는 것은 병가(兵家)가 매우 꺼리는 일이요 반드시 피하는 길입니다. 저들이 저희 무리를 불러모으고 또 본디부터 살던 야인에게까지 청하여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끊되 혹 나무를 베어 길을 막거나 얼음을 깨어 길을 막고서, 양 언덕의 육로가 없고 절벽이며 목을 누르듯이 된 급소의 어귀에서 강을 끼고 산에 올라 좌우에서 내려 쏘면, 장사진(長蛇陳)을 이룬 우리 군졸이 백리에 벌여 있더라도 수미(首尾)가 서로 구원할 수 없는 형세가 될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손자(孫子)나 오자(吳子)를 장수로 삼더라도 꾀할 길을 모를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절도사가 대군을 거느리고 허공교로 바로 들어가 우예(虞芮)ㆍ조명간(趙明干)을 들러 여연에 이르고, 함경의 장사도 후주ㆍ무창을 들러 여연에 이르며, 허공교 이하의 원사오대(元舍吾大)ㆍ박산(朴山)ㆍ동타시합(童他時哈) 등의 세 둔(屯)에는 편장(偏將)을 나누어 보내어 엄습해서 취하면, 반드시 크게 얻을 것입니다. 세 둔에 나누어 보낸 장사는 조명간 등의 요해지(要害地)에 그대로 둔쳐서 요격하고 길을 끊는 꾀를 구원하면, 위아래의 군사가 성세(聲勢)로 서로 응원하여 군위(軍威)가 크게 떨칠 것이니, 부딪치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뭉그러져서 저들이 다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 목숨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우리를 도모하겠습니까? 본토에 사는 저들이 소식을 듣고는 숨어서 스스로 보전하기를 꾀하게 되고 서로 구제하지는 못할 것이며, 이산(理山) 등지의 되도 위세를 두려워하고 멀리 숨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만전한 계책을 내지 않고 쫓아내기만 하는 말단의 계책을 쓰려 하십니까? 신은 이 거사에 고심하여 늘 되들과 상담하였으므로 산천의 형세와 안팎의 되가 사는 곳과 도로의 거리가 서로 구원하기에 미치겠는가 하는 등의 일을 대강 압니다. 이제 이 일을 거행하려 하면서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밭갈이에 대해 노자(奴子)에게 묻지 않고 길쌈에 대해 비자(婢子)에게 묻지 않는 것과 같으니, 아마도 송 양공(宋蘘公)의 인자(仁慈)가 예전에만 웃음을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전조(前朝)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으나 철령(鐵嶺) 이북과 적유령(狄踰嶺) 이서는 들쭉날쭉하여 곧 얻었다가 곧 잃곤 하였으므로 나라의 떳떳한 경계가 없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품이 성무(聖武)하시므로 대동(大東)을 모두 차지하시어 남으로는 바다까지 닿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에 닿고 북으로는 두만강까지 닿았으나, 그래도 이적(夷狄)이 경계에 근접하여 있는 것을 염려하여 강을 건너 고난을 무릅쓰고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친히 서방의 되를 정벌하시매,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에서 위풍을 바라보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북으로 동녕(東寧)까지, 동으로 황성(皇城)까지, 남으로 바다까지의 되의 땅이 모두 비었습니다. 태종(太宗)께서 계승하여 점점 더 힘쓰신 지 이미 오래서는 아무도 감히 대들지 못하였으나, 태평한 세월이 오래 이어져 수신(守臣)이 방어를 잘못해서 경성(鏡城) 이북이 함몰하여 적(賊)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으므로, 태종께서 회복하려고 생각하셨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강계(江界) 이서도 침략당하므로 군신(群臣)이 땅을 줄일 것을 헌의(獻議)하였으나, 조종(祖宗)께 받은 것은 작은 땅이라도 버릴 수 없으므로 뭇 의논을 따르지 않고 성려(聖慮)에서 결단하시어 잇달아 큰 군사를 일으켜 서쪽ㆍ북쪽으로 정벌하여 옛땅을 회복하고 진(鎭)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뭇 의논이 다시 일어나 또 사군(四郡)을 버렸으니 마음 아픈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세조ㆍ성종(成宗)께서 잇달아 정토(征討)를 일으키셨으므로 되가 멀리 달아나서 파저강(婆猪江) 이동, 야로강(也盧江) 이서에는 되가 사는 곳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폐조(廢朝)를 당해서는 국가에 일이 많아서 서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성명(聖明)이 즉위하시기에 이르러서는 되가 귀순하여 변방이 편안하므로 한 번도 병위(兵威)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만주(李滿住)의 아들ㆍ손자와 증손ㆍ현손이 모두 모여 옛땅으로 돌아오고 야로강 지방에도 점점 와서 살며, 파저강 이동은 되가 사는 곳이 근래에 더욱 심하게 번성하여 여염이 땅에 가득 차고 농사지을 땅이 좁아서 점점 사군에 벌여 살게 되고, 야로강 이남에도 점점 와서 사니, 위로는 삼수(三水)부터 아래로는 의주(義州)까지가 장차 되가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힘으로 금하지 못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아서 저들이 허실을 갖추 알고 때를 타서 일어나면 아마도 압록강 이동에 또다시 출입하는 형세가 될 것인데, 전하께서 어찌 조종께서 백성이 싸움터에서 죽게 하면서 얻은 땅이 되가 사는 곳이 되는 것을 차마 좌시하고 구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생각하면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흐릅니다.
또 저 되들이 이제 쫓겨갔다가 곧 돌아와 그대로 살더라도 다시 정토당한다면 모르거니와, 혹 이제 곧 제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저들은 조금도 손실이 없는데, 우리는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 정토하였으므로 인마(人馬)가 지치고 쇠약하여 얼음길에서 얼어 죽고 목숨을 버리게 된다면, 병위를 보이지 못하고 도리어 비웃음을 끼쳐 나라의 위엄만 크게 손상하고 저들은 거의 두려운 줄 모를 것이니, 그 우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쫓은 뒤에 정토하려 하면 저들이 우리에게 대비하는 꾀가 오늘보다 심할 것이므로 그 즈음에는 공(功)을 이룰 수 없을 것이며, 지금 정토하여 크게 위엄을 보인다면 저들이 위세를 두려워할 것이고 그래서 서로 경계하기를 ‘큰 나라에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게 되면 변방의 우환이 오히려 작아질 것입니다. 신해년 북정(北征) 때에 사람들이 다 저들의 보복이 클 것이라고 하였으나, 저들은 두려워 움츠려서 이제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변방이 편안하니, 어찌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쫓아내고 나서 정토하더라도 저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것은 같고 우리가 힘을 쓰는 것은 아주 다르며 우리의 약한 것을 스스로 보일 뿐이고 저들의 교만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이제 쫓아내더라도 저들은 다시 그대로 살 것이고, 그러면 다시 의논하여 정토하게 되고 또다시 우환이 되면 서정을 크게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일이 마침내 이렇게 되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잇달아 세 번 일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정토하면 쫓아내는 한 가지 일의 노고와 비용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이적에 대하여 병살(兵殺)로 위세를 보이고 인덕(仁德)으로 어루만지되 가까운 자에게는 위세를 보이고 먼 자에게는 어루만지는 것이 곧 이적을 물리치는 도리입니다. 이제 병살로 물리치지 않고 인덕으로 물리치려는 것은 오히려 병을 고치는 데에 약을 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쫓아내기만 하자고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저들이 가까운 곳에 와서 살더라도 변방을 침범한 죄가 없으므로 정토는 명목이 없으니 이제 우선 쫓고 그래도 물러가지 않거든 다시 의논하여 정토해야 한다.’ 하겠으나, 이는 매우 옳지 않습니다. 절도사가 국가의 명을 받들어 해마다 봄ㆍ가을로 군관(軍官)을 보내어 그들의 짓이 옳지 않다는 뜻을 타이르고 또 물러가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힐책한 것이 한두 해뿐이 아닌데도 저들이 곧 물러가지 않은 까닭은 우리 말이 미덥지 않아서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저 우리 나라의 병통은 다 말이 미덥지 않고 행사가 무겁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으니, 군령(軍令)이 엄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고 법금(法禁)이 한결같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기강이 서지 않고 조정이 엄숙하지 않은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서경(書經)》에 ‘짐(朕)은 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국가가 군관을 보내어 타이르는 것과 대신을 보내어 타이르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동타시합(童他時哈)은 본진(本鎭)이 해마다 집을 불사르고 쫓아냈는데도 그대로 사는 자임에리까? 사람이 자식에 대하여 본디 자애(慈愛)를 가지고 다정하게 가르치되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회초리로 때리고 매로 때리며, 심하면 불효로 논하여 관가에 고하여 죽이게 하기도 합니다. 이 되들은 금하는 땅에 와서 살고 우리 땅에 와서 농사지으면서, 나라의 명을 따르지 않고 말도 공손하지 않으며, 사람을 보내어 타이르면 말을 빼앗고 심한 모욕을 주니, 이것으로 죄를 만들면 명목이 없다고 할 수 없을 터인데, 우리 나라가 이 도적에 대하여 무슨 자애가 있기에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노여움을 받을까 두려워합니까?
옛 제왕 중에는 혹 큰 것을 좋아하여 정토한 사람이 있으나, 지금의 정토를 누가 명목이 없다 하겠으며 누가 큰 것을 좋아하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형세입니다. 우리 선대의 조종께서 잇달아 정토를 일으키실 때에 어찌 백성을 괴롭히려 하셨겠으며 어찌 뒷날의 우환을 염려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혹 이때에 이적에게 군사로 정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나, 신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영무(英武)한 자질로 빛나는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셨는데, 이때에 기회를 타서 물리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방어의 우환을 후사(後嗣)에게 끼치신다면, 종기를 고치지 않고 뭉그러지기를 기다려서 도리어 오장에 해독이 되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송 진종(宋眞宗)이 전연(澶淵)의 싸움을 당하여 전쟁을 싫어해서 구준(寇準)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수십 년 동안에 방어할 자가 있을 것이고 내가 차마 백성을 피곤하게 할 수 없으니 우선 그 화의를 들어 주는 것이 옳다.’ 하였으니 화(和)라는 한 글자가 마침내 송나라가 망하게 되는 꾀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어하는 자손은 끝내 나오지 않고 드디어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금(金)나라에서 갇혀 있다가 죽게 하였고, 공제(恭帝)는 원(元)나라에 항복하여 그 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임금들이 구준ㆍ이강(李綱)ㆍ악비(岳飛)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참으로 도리에 맞는 일이라면 저들의 땅을 다투어도 된다.’ 하였는데, 더구나 이제 우리 땅을 다투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이제 거듭 입을 열어 성청(聖聽)을 번거롭히는 데에 어찌 품은 뜻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저들을 대접하여도 끝내 화호(和好)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이제 쫓아내어 제 땅으로 돌아가게 하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사군에서 어렵(漁獵)하는 이득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막사를 지어 우리 지경에서 오래 살 것인데, 반드시 입구(入寇)하여 성밑까지 오거나 약탈하기에 이르러서야 잡아 죽여야 하겠습니까? 나타나기 전에 미리 막지 않고 눈앞에 닥쳐서 구제하려 한다면, 비장(飛將)이 있더라도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미 원망하고 분하게 여기면서 제 땅으로 돌아갔다면, 그 보복하려는 뜻이 어찌 우연하겠습니까? 정토한 뒤에 ‘압록강 이동에 호인(胡人)이 들어오면 어렵한다 할지라도 모두 구적(寇賊)으로 논하다.’고 약속하고, 강계(江界) 지경 안의 각 진보(鎭堡)의 용맹한 군사를 뽑아 특별히 돌보아 주고 임시하여 형세를 보아 이들 중에서 40~50명을 보내거나 70~80명을 보내어 흩어져 쉬면서 몸소 정탐하며 되들이 지경에 들어오는 것을 엿보게 하고, 되의 풍속은 불을 피우고 잠을 자니 그 불빛을 따라 칼을 가지고 접근하면 죄다 죽일 수 있으며 도망하는 자는 군사를 매복시켜 잡되, 두세 번 이렇게 하면 되들이 압록강 이동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쫓고 정토하기만 한 뒤에 또 이를 어렵게 여겨서 잡지 않고 저들이 우리 지경에 드나드는 것을 금하지 못하면 상토(上土) 이상의 농민은 나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다만 무창 읍성(邑城) 건너편에는 회령(會寧)의 야인 김이랑합(金伊郞哈)ㆍ김합다(金合多)ㆍ김하고(金下古)ㆍ김삼마(金三馬)와 종성(鍾城)의 야인 김자통개(金者通介) 등 다섯 집이 와서 사니 함경도의 장사(將士)에게 명하여 그 집들을 도살(屠殺)하지 말게 하고, 온화위(溫火衛)의 박아양개(朴阿陽介) 등 여섯 집도 이곳에 함께 사는데 분변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차라리 온화위 사람을 놓칠지언정 육진(六鎭)의 야인을 해치지 말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김주성합(金主成哈) 등의 부락은 그 다음에 있는데 실로 죄를 지은 괴수이니, 주토(誅討)를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아마도 크게 이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무창 이하에는 본디 육진의 야인이 없었으나 집을 이루어 와서 사는 자와 자제가 혼인하였으므로 따라와서 사는 자가 더러 있는데 육진의 자제라고 하는 자이거든 죽이지 말고 어루만지면, 죄다 면하지는 못하더라도 죽음을 면한 자가 저희 무리에게 말을 전하여 육진의 되들이 아마도 나라의 은혜에 감복할 것입니다. 또 정토한 뒤에 우리가 방비하는 계책은 평시와 같은 규모로 할 수 없으므로 조목으로 아뢰는 일곱 가지를 뒤에 아울러 적으니, 전하께서 채택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1. 신이 강계(江界) 이하, 의주(義州) 이상의 각 진보(鎭堡)의 형세(形勢)ㆍ군수(軍數)ㆍ방비(防備)에 관한 일을 갖추 보았습니다. 각 진보는 토병(土兵)이 두서너댓밖에 안 되는 곳이 오히려 많고 오로지 남방 고을의 군사로 방수(防戍)하며, 요즈음은 으레 도로의 원근에 따라 옮겨 나누어 방수하여 오르게 하려고 힘쓰느라 이번에 강 위쪽에 나아갔던 자는 다음 번에 강 아래쪽에 나아가 일정하지 않게 돌아다닙니다. 장수가 다만 석 달 동안 거느리고 갈리므로 마치 길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고 사졸은 여행 중에 의탁하는 듯하여, 장수는 사졸을 돌보지 않고 사졸은 장수를 사랑하지 않으니, 위에 양장(良將)이 있어도 가르쳐 기르고 호령을 행할 수 없거니와, 아래에 선졸(善卒)이 있더라도 어떻게 웃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수 있겠으며, 변고가 있더라도 이른바 시정(市井)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운다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토병이 적은 보(堡)에서는, 적을 맞아 치고 길을 끊어서 기이한 꾀를 베풀려 하더라도, 남방의 사졸은 적이 오는 길의 요해(要害)를 살피지 못하고 또 죽음을 무릅쓰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이뿐이 아니라,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군령(軍令)이 해이해졌으므로 군장(軍裝)이 있는 자일지라도 으레 가져가지 않고 빈손으로 갑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원근을 분간하여 부방(赴防)을 정하고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여 영구히 규식(規式)으로 삼으면, 장수는 남방의 사졸을 돌보아 토병과 다름없고 사졸은 장수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본디부터 소속한 장수와 같아서, 평소에 가르쳐 기르는 것이 있고 은혜와 위엄이 함께 베풀어지며, 사졸에게는 일을 피하고 구차히 넘기려는 마음이 없으므로, 군령을 행할 수 있고 군장을 가질 수 있으며, 적변(賊變)을 당하여 마치 근본이 지엽을 통제하고 수족이 두목(頭目)을 막듯이 할 것이며, 또 사졸이 묵는 집 주인과 각각 오랜 친분이 생겨서 음식과 마초(馬草)ㆍ군량(軍糧)에도 반드시 편이(便易)할 것입니다.
2. 강변(江邊)의 고을들은 토지가 척박하므로, 모든 요역(徭役)은 전결(田結)에 의하여 정하지 않고 군정(軍丁)에 의하여 냅니다. 진상(進上)하는 대록비(大鹿皮)와 모든 공납하는 물건도 인구를 헤아려 군인에게 배정합니다. 대록비 같은 것은 흠이 없을 수 없는데 그것을 사는 데에 쓸 척수(尺數)가 표준에 맞는 면포(綿布)를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면포를 모아 가지고 관가에서 받은 면포를 가진 경중(京中)에 사는 사람의 집에서 삽니다. 공물 따위도 그 물건을 스스로 장만해 바칠 수 없으므로 각사(各司)의 주인(主人)이 방납(防納)하며 그 대가로는 모두 면포를 쓰는데, 변방에서는 면포가 나지 않아 그 값이 매우 비싸므로 한 해 동안 농사지어 거둔 것을 다 들여도 한 해에 한 집에서 낼 것을 대기 어렵습니다. 관리도 연고를 따라 지나치게 거둬들이므로 백성이 지탱하지 못하여 잇달아 고장을 떠나는데, 방백(方伯)도 바치는 예물(禮物)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폐해를 아뢰지 못하니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녹비(鹿皮)라는 것은 마름질하여 만들어서 쓰는 것이니 구멍이 있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전에 혹 폐해를 아뢴 사람이 있어서 금지하였으나, 아래에서 위에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가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폐단이 그대로 남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온 나라 안에서 곧 따르는 법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흠이 있는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흠이 없는 것을 책망하신다면 폐단이 곧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대록비는 내고(內庫)에 예전부터 저장된 것이 많으니, 반사(頒賜)에 쓰지 말고 내용(內用)에만 갖추고서, 햇수를 한정하여 감면하거나 영구히 면제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물건은 지나치게 두껍고 거칠어서 제조하기에 합당하지 못하여, 제조하기에 편리한 품질 좋은 중록비(中鹿皮) 소록비(小鹿皮)만도 못하니, 실로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다만 내탕(內帑)을 외척(外戚)ㆍ환시(宦寺)ㆍ태의(太醫)ㆍ재상(宰相)들의 집에 내고 들일 때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쓸 뿐이니, 영구히 면제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중록비ㆍ소록비로 흠이 있는 것을 가리지 않고 대납(代納)하게 한다면, 민간에 배정하지 않더라도 사냥에서 잡아 바치는 것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공물로 바치는 물건도 방납하는 사람을 금지하고 본색으로 바치게 한다면, 군민(軍民)이 생업에 안정할 수 일을 것입니다. 또 관리가 백성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관가에서 스스로 장만할 수 있는 노루ㆍ사슴 따위도 민간에 배정하는데, 백성에게는 그물이 없어 잡을 수 없으므로 모두 면포로 대납하니, 엄하게 금지하도록 아울러 명하여 그 폐단을 없애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3. 강변은 땅이 넓고 사람이 드물어서 병작(竝作)하는 전지(田地)를 경작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각 고을의 원래의 둔전(屯田)과 속공(屬公)된 전지와 고장을 떠난 사람들의 전지를 다 임시로 둔전에 넣어 으레 군인에게 주어 경작시키고는, 실지로 나는 수량에 따라 바치게 하지 않고 액수를 정하여 독촉해 받되 그 액수도 적지 않게 정하는 것이 풍속이 된 지 오랩니다. 숲이 울창하고 오래 묵은 땅도 나누어 받는 것들 안에 들어 있는데, 경작하지 않아도 액수에 의하여 곡식을 받아들이므로 사람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고장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관(京官)을 보내어 친히 그 땅을 살펴서, 경작할 만한 것은 적부(籍簿)에 올려 각각 관속(官屬)을 시켜 경작하고 군민에게 억지로 주어서 경작시키지 말며, 오래 묵어서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고장을 떠난 사람들의 전지도 가난한 백성에게 주고 함부로 관전(官田)으로 차지하지 못하게 하여, 군민의 생활을 안정시키시면 다행이겠습니다.
4. 만포(滿浦)에 사는 저들에게 공급하는 쌀ㆍ밀가루는 만포ㆍ고산리(高山里)의 두 진(鎭)에 속하여 방수(防戍)하는 군민이 강계부(江界府)에서 받아내어 날라가는 것이 규례입니다. 군사가 두 번(番)으로 나뉘어 10일마다 교체하는데, 바깥 마을에 사는 자는 진에 들어가고 번을 마치고 나오는 2일 동안은 생업을 돌보지 못하므로 쉴 날은 8일뿐이며, 강계는 만포에서 4식정(息程)남짓 떨어져 있으므로 갔다오자면 4일이 걸리고, 받아내고 날라들일 때에도 며칠 동안 지체하며, 또 부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땅에서 나는 좁쌀이라면 모르겠으나 나지 않는 쌀을 거둬들이게 되니, 폐해가 매우 적지 않습니다. 저들이 잇달아 나오므로 번을 마치고 나온 군인이 나르는 일에 종사하느라 잠시도 쉬고 생업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강계부에 들일 각 고을의 전세(田稅) 중에서 한 해 동안 쓸 수량을 계산하여 만포창(滿浦倉)에 바로 들이고 강계부의 관원이 왕래하면서 출납하여, 날라가고 생징(生徵)하는 폐단을 없애면, 두 진의 군인이 조금 숨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진의 장사(將士)는 으레 삭료(朔料)를 받으나 원래 저장된 양식은 없는데, 뜻밖의 사변이 있어 큰 구적(寇賊)이 성을 에워싸고 여러 날 버텨 있을 경우에는 이것으로 양식을 보태어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강변에 있는 각 진보의 첨사(僉使)ㆍ만호(萬戶)ㆍ권관(權管)을 으레 가려 보내지 않으니, 장수를 가려서 위임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출신(出身)으로서 삼가고 부지런하여 장래가 있는 자를 차출하여 보내고 그 군정(軍政)의 득실을 살펴서 현직(顯職)에 제수(除授)하여 그 선한 자를 권장하기도 하고 그 악한 자를 징계하기도 하면, 각자가 닦달하여 군정에 득이 있고 사졸이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무신(武臣)에게는 먼저 권관 등의 벼슬을 제수하고 문사(文士)에게는 반드시 수령(守令)의 직임을 제수하고 그 현부(賢否)를 살펴서 현직에 옮겨 제수하되, 다른 길이 없는 것이 마치 한 선제(漢宣帝)가 자사 이천석(刺史二千石) 등의 관리 중에서 인물을 가려낸 것처럼 하면, 군민이 은택을 입을 수 있고 벼슬이 함부로 주어지거나 차서를 뛰어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6. 황청동보(黃靑洞堡)는 적이 들어오는 길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나, 지금은 그밖에 이동(梨洞)ㆍ등공구비(登公仇非)의 두 보(堡)를 더 두었고, 황청의 거주지 안에는 적을 방어할 곳이 없습니다. 이동보는 적이 들어오는 길의 요해처(要害處)이므로 방어가 가장 긴요한데 군사가 적어서 15명뿐이고 모두가 늙고 약하며, 황청보의 군사 20여 명은 다 장실(壯實)하니, 황청보를 없애고 이동보에 합쳐 방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7. 요즈음 수령에 대한 전최(殿最)는 관찰사가 병사(兵使)와 함께 의논하게 되어 있으나, 병사는 끝내 참여하지 않으므로, 수령이 군정을 닦지 않더라도 이민(吏民)을 조금만 잘 살피면 최(最)를 얻습니다. 이 때문에 병사의 위세가 도리어 도사(都事)만 못하여 군정이 해이하고 호령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모든 부방(赴防)하는 군사를 수령이 전혀 마음 써서 정제하여 보내지 않아서 방어가 허술해지게 합니다. 평양(平壤)의 관리는 관찰사의 낭료(郞僚)라 하여 더욱 병사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부방하는 군사를 으레 차비(差備)에 긴요하다고 핑계하고 반이 넘게 보내지 않으며, 오는 자들도 군장(軍裝)을 가져오지 않으니, 매우 완악하고 태만합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경관(京官)은 겸직하면 포폄(褒貶)을 그 아문(衙門)에서 따로 받거니와, 수령이 첨절제사(僉節制使)ㆍ첨절제도위(僉節制都尉)를 겸하여도 경관이 겸직한 예에 따라 병사에게서 포폄을 따로 받는다면, 병사가 그 군정의 득실을 상고할 수 있고 수령도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서, 군정이 고쳐질 수 있고 호령이 행해질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제 이 도(道)의 풍속을 보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바꿀 수는 없겠으나, 예전 규례로만 다스리고 무너진 기강을 수시로 진작하지 않으면 군정이 닦일 때가 없고 방비가 완전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허황한 말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소서.
신이 듣건대, 적국의 외환이 없으면 나라가 항상 망한다 합니다. 임금이 태평에 버릇되어 지기(志氣)가 방일(放逸)하면 전유(畋游)를 사사롭게 하거나 주색(酒色)ㆍ궁실(宮室)ㆍ화리(貨利)ㆍ궁첩(宮妾) 또는 자손을 위한 영업을 사사롭게 하는데,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서 싹트면 뭇 간사한 자가 엄폐하여 어지러워지고 망하기에 이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진이를 등용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며, 전유를 당해서는 황란(荒亂)하지 않은지를 생각하고 주색을 당해서는 탐닉(耽溺)을 생각하고 궁실을 당해서는 사치를 생각하고 화리를 당해서는 탐욕을 생각하고 궁첩을 대해서는 친근(親近)을 생각하고 자손의 영업을 당해서는 외람을 생각하시며, 편안할 때에 위태로운 것을 생각하고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처하여 감히 태만하지 말고 혹시라도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대강(大綱)이 이미 바로잡히고 온갖 일이 다 펴져서 국세(國勢)가 당당하여 반석(盤石)처럼 안정될 것이니, 정토(征討)한 뒤에 좀도둑의 우환이 있더라도 어찌 국맥(國脈)을 해치겠습니까? 다만 성려(聖慮)를 번거롭힐 뿐입니다.
한때 참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배나 등에 생긴 종기를 고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예전부터 이적(夷狄)의 우환은 없는 때가 없었습니다. 임금으로서는 안으로 심덕(心德)을 닦고 밖으로 우환을 물리치는 데에 갖출 따름입니다. 신이 전하 앞에서 떠난 지 12년이 되었는데, 몸은 외방에 있으나 구구한 마음이야 어찌 잠시라도 전하의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있겠습니까? 신이 돌이켜보건대, 노둔한 자질로 제 몸을 죽이고 제 머리를 잃더라도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두 해 안에 잇달아 부모와 동기 네 사람을 잃었고, 또 신의 세 아들은 일찍 죽어서 기르지 못하여 세 딸과 두 손자만 집에 남겨 두고 여기에 왔는데 두 딸과 한 손자가 올봄 20일 안에 함께 죽었으므로, 신의 심간(心肝)이 찢어지고 병이 몸에 붙어 형체가 여위고 정신이 어두우며 음식이 날로 줄고 수염이 죄다 희어졌습니다. 신이 몸의 병을 생각하지 않고 집의 우환을 돌보지 않고서 멀리 하늘가에 있으면서 좋지 못한 음식을 먹어도 오히려 달갑게 여기는 까닭은 한갓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어서 전하께서 맡기신 임무에 부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므로, 광망하고 참람한 줄 모르고 감히 간절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보잘것 없는 소견을 올린 정성을 어여삐 여기고 망령된 말을 한 죄를 용서하고, 혹 채택하여 내치(內治)ㆍ외치(外治)에 조금이라도 보태신다면, 신이 강변에서 싸우다가 죽더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원전】 16 집 27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농업-전제(田制)
[주-D001] 사군(四郡) :
태종 16년(1416) 이래 압록강 중류 남안, 강계(江界) 북쪽 일대에 설치한 네 군, 곧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자성(慈城)ㆍ우예(虞芮).
[주-D002] 두예(杜預) :
진 무제(晉武帝) 때 사람. 용병(用兵)에 능하여 장수들 중에 두예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吳)를 쳐서 큰 공을 세웠고, 뒤에는 경적(經籍)에 잠심(潛心)하였다. 오를 칠 때에 기병(奇兵) 8백을 밤에 몰래 강 건너로 보내어 낙군(樂郡)를 기습하고 기치(旗幟)를 많이 벌이고 파산(巴山)에 불을 피우고서 요해지(要害地)로 나와, 적의 사기를 꺾었다.
[주-D003] 등애(鄧艾) :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위(魏)나라의 고귀향공(高貴鄕公)ㆍ원제(元帝) 때 사람. 젊어서부터 큰 뜻을 품고 고산(高山)ㆍ대택(大澤)의 군영(軍營)을 둘 만한 곳을 헤아렸으며, 촉(蜀)을 쳐서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음평(陰平)으로부터 사람이 없는 7백여 리를 산을 뚫어 길을 만들고 교각(橋閣)을 걸며 나아갔으므로, 길이 험하여 위태로운 일을 많이 당하였는데, 등애 자신을 담요로 싸고 밀어 굴리게 하여 내려가니 장병이 모두 나무를 잡고 벼랑에 붙어서 잇달아 나아갔다. 그래서 먼저 강유(江由)로 가서 촉장(蜀將)의 항복을 받았다.
[주-D004] 홰[炬]에 …… 전진 :
진(晉)의 두예(杜預)ㆍ왕준(王濬) 등이 오(吳)를 칠 때에 오나라에서는 강의 요해처에 쇠사슬을 가로놓아 배가 건너오는 것을 막았는데, 왕준이 마유(麻油)를 부은 홰를 만들어 배 앞머리에 두고 사슬을 만나면 불을 붙여 사슬을 녹여 끊게 하였다.
[주-D005] 초면(初面) :
첫 지면. 그 지경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땅.
[주-D006] 산단(山端) :
지명.
[주-D007] 전조(前朝) :
고려를 가리킴.
[주-D008] 신해년 :
1491 성종 22년.
[주-D009] 이강(李綱)ㆍ악비(岳飛) :
모두 남송(南宋) 때의 충신. 진회(秦檜) 등 금(金)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자들에 반대하고 싸워서 실지(失地)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D010] 비장(飛將) :
민첩하고 용맹이 뛰어난 장수.
[주-D011] 전결(田結) :
전지(田地)의 결수(結數). 결은 수세(收稅)를 위하여 토지 면적을 셈하는 단위의 하나. 토지의 비척(肥瘠)에 따라 실지의 면적이 달라진다. 전척(田尺) 1척 사방을 1파(把),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백 부를 1결이라 하는데, 전척에는 주척(周尺) 4척 7촌 7푼 5리인 1등척으로부터 주척 9척 5촌 5푼인 6등척까지 6등급이 있다.
[주-D012] 주인(主人) :
서울에 주재하여 자기 지방에서 상경하는 백성의 침식(寢食)을 제공하고 번들러 올라오는 군인ㆍ서리(胥吏) 등 입역자(立役者)를 보호하는 등의 일을 맡아보는 향리(鄕吏). 이들은 지방에서 각사(各司)에 올라오는 각종 공납(貢納)도 맡아보았으므로, 기일 안에 정량을 채워 올라오지 않으면 이들이 대납(代納)하였는데, 뒤에는 오히려 대납한 뒤에 그 대가를 징수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이것을 방납(防納)이라 한다.
[주-D013] 방백(方伯) :
관찰사의 별칭.
[주-D014] 4식정(息程) :
1식정은 30리.
[주-D015] 생징(生徵) :
까닭없이 징수함.
[주-D016] 삭료(朔料) :
월급.
[주-D017] 출신(出身) :
과거에 급제한 사람.
[주-D018] 자사 이천석(刺史二千石) :
자사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한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 한대(漢代)의 자사는 연봉 2천 석을 받았다.
[주-D019] 차비(差備) :
예비.
[주-D020] 전유(畋游) :
사냥하며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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