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의 5진(鎭)에 일찍이 땅이 탄 일이 있었으나 곧 빗물에 꺼져 버렸다 하오며

2023. 4. 14. 15:28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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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7 을축(1445) 1 22(병신)

27-01-22[02] 함길도 감사에게 유시하여 경성 지역의 땅이 곳에서 석류황이 산출되는지를 파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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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길도 감사에게 유시하기를,

“이번에 아뢴 바 경성(鏡城)에 땅이 탔다는 일은 잘 알았다. 여중추 최윤덕이 일찍이 아뢰기를, ‘함길도에 있을 때에 땅이 몇치씩 타는 것을 보았는데, 하루씩 타는 것으로 계산하면 지금 이미 수십년이 되었으나 물을 대어도 능히 끌 수가 없사옵고, 또 듣자오니, 도내의 5진(鎭)에 일찍이 땅이 탄 일이 있었으나 곧 빗물에 꺼져 버렸다 하오며, 경상도에는 역시 민간에서 지껄이는 말로는 흙과 돌이 탄 데에서 「석류황(石硫黃)이 난다고들 하옵나이다. 이제 본초(本草)를 상고하온즉, 이르기를, 석류황은 동해(東海)의 목양산(牧羊山) 골짜기에서 나는데, 반석(礬石)의 액체이고, 색깔이 거위알 같은 것을 곤륜황(崐崙黃)이라 하고, 그 붉은 색깔을 석고지(石膏脂)라 하고, 푸른 색깔을 동결석(冬結石)이라 하고,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것을 신경석(神驚石)이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석류황은 태양의 정기로서 귀신의 불꽃이 들어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석류황은 순 양기(陽氣) 화석(化石)의 정기를 받아 뭉치어서 성질이 통하고 흘러서[通流], 맹렬한 독(毒)이 있는데 약품 중에서 장군이라 호칭된다.」하였사오니, 이로써 보옵건대, 땅이 타는 곳에 석류황이 난다는 것은 의심이 없지 아니합니다.’ 하였으니, 거기 구실아치와 관노들 10여인으로 하여금 폐단이 없도록 파내어 시험해 보라.”

하였다.

 

효종실록 14권, 효종 6년 4월 1일 乙卯 3번째기사 1655년 청 순치(順治) 12년

부제학 김익희가 재변이 심함을 이유로 대처 방법을 신하들에게 묻기를 청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병법에 ‘북을 치면 백만의 군사가 앞을 막고 있더라도 감히 물러갈 수 없고 징을 치면 금옥(金玉)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감히 나아갈 수 없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군령이 엄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군졸은 거세고 사납기가 막심하여 금고의 영을 따르지 않는다. 접때 열무할 때에 박민도(朴敏道)가 거느린 군사가 군율(軍律)을 두 번 어겼으나 내가 박민도를 심하게 죄주지 않은 것은 그 죄가 군졸에게 있고 장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졸이 군령을 따르지 않았으면 그 장수도 책임이 없을 수 없으니, 금군 별장(禁軍別將) 박민도를 파면하라."

하고, 상이 또 승지(承旨)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이제 청나라 사신이 이미 돌아갔고 사기(事機)도 늦추어졌는데 두 대신이 오래 황야(荒野)에 피하여 있으니, 모두 빨리 조정에 돌아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뜻으로 특별히 하유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하라."

하였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근일의 재이(災異)는 모두 괴이하고 놀랍습니다마는, 동해(東海)가 언 재변으로 말하면 더욱 참혹합니다. 오늘 신하들이 다 입시(入侍)하였으니, 각각 재이를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동(關東)에 원한이 많은가? 어찌하여 변괴가 관동에서만 참혹한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혹 원한을 품은 백성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도신(道臣)을 시켜 상세히 탐문하여 빨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근심하는 것은 인심(仁心)과 세도(世道)가 전과 크게 달라진 점입니다. 이 근심은 남북의 적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上曰: "予聞兵法曰: ‘擊鼓則雖百萬師當前, 不敢退, 擊錚則雖金玉積如丘山, 不敢進。’ 此無他, 畏軍令之嚴也。 我國軍卒, 則强悍莫甚, 不遵金皷之令。 頃於閱武之日, 朴敏道所領之軍, 再違軍律, 而予不深罪《敏道》者, 以其罪在於卒, 而不在於將故也。 然軍卒不遵軍令, 則其將亦不可無責, 禁軍別將朴敏道汰去。" 上又謂承旨金佐明曰: "今淸使已還, 事機且緩, 而兩大臣久遯荒野, 不可不竝速還朝。 以此意特諭之, 使之乘馹以來。" 副提學金益熙曰: "近日災異, 無非可怪可愕者, 而至如東海合氷之變, 尤可慘也。 今日諸臣皆入侍, 宜令各陳弭災之策矣。" 上曰: "關東多冤氣耶? 何變怪之獨慘於關東耶?’ 右議政沈之源曰: "或不無抱冤之民, 請令道臣, 詳加訪問, 趁速以聞。" 上從之。 吏曹參判洪命夏曰: "臣之所憂者, 人心世道, 大異於前, 此憂有甚於南北之敵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