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0. 20:10ㆍ제주도
동계집 제2권 / 기(記)
대정현(大靜縣) 동문(東門) 안에 위리(圍籬)된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 만력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 8월 모일(某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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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漢拏山)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뉘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山方岳)과 파고미악(破古未岳)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加時岳)과 모슬포악(毛瑟浦岳)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松岳山), 가파도(加波島), 마라도(磨羅島)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破古)가 용의 형상이라면 가시(加時)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黃茅)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이다.
현(縣)에는 객사(客舍)가 있고 그 객사의 동쪽이자 성의 동문 안에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십 보쯤 떨어진 위치에 울타리를 둘러친 데가 바로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에는 민가(民家)였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수(太守)가 이 집을 비워 두도록 했다가 나를 거처하게 한 것이다.
이 가옥의 구조는 두 개의 용마루가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북쪽 용마루는 오래되고 누추한 데다 시렁이 네 개가 놓여 있지만 어둡고 새까맣기가 옻칠을 해 놓은 듯하다. 집이 낮아서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고 방도 좁아서 무릎을 움직일 수가 없고, 그을음이 벽에 가득하여 의관(衣冠)이 더럽혀지므로 잠시도 거처할 수가 없는 곳이다.
남쪽 모퉁이의 반 칸은 토상(土床)을 만들어서 침실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이곳 풍습이 온돌방을 좋아하지 않으나 유독 이 집만은 온돌을 놓았다. 동북쪽 모퉁이에는 목두(木豆)를 놓아 두어 식량을 저장해 두도록 하였고, 그 밖에 변소 반 가(架)를 만들어 두었다. 서쪽 모퉁이에는 한 칸을 더 두어 부엌을 만든 다음 진흙으로 바르고 구멍을 내어 밝게 하였으며, 대나무로 문을 만들어서 좀도둑을 막도록 하였다. 남쪽 용마루의 시렁은 북쪽 용마루와 같은데 만든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그다지 더럽지는 않다.
동쪽으로부터 첫째 번 칸은 화돌(火堗)을 만들어서 비복(婢僕)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둘째 번 칸은 비워 두어서 출입하는 길로 삼고 판자로 문을 만들어서 열고 닫게 하였다. 절구를 그 곁에다 두었는데 풍습에 절구는 있어도 방아를 찧는 일이 없으므로 부득이 풍습대로 따랐다. 서쪽 두 칸은 중앙을 막지 않고 터놓은 다음 나무 평상을 두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다. 평상이 차지 않는 곳은 대나무를 엮어서 깔았다. 남쪽 용마루에서 북쪽 용마루까지는 거리가 10여 척이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서실(書室)을 두 칸 만들어 주었는데,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에서 성첩(城堞)까지의 거리는 겨우 4, 5척이며, 서쪽에는 귤림(橘林)이 있는데 울타리가 높아서 겨우 나무 끝만 보인다. 그 서실의 구조는 들보의 길이가 5척이며 -모두 포척(布尺)을 사용하였다.- 기둥의 높이는 4척이고, 서까래는 양쪽을 합하면 모두 54개였는데, 주춧돌을 놓지 않고 흙에다 바로 지었다. 지붕은 띠풀을 엮지 않고 두껍게 쌓아서 빗물이 새지 않을 정도로 하였으며, 그 위에는 길다란 나무를 빽빽하게 놓고 커다란 새끼줄로 꿰매어서 서로 얽어 놓았다. 이는 해상(海上)이라서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항상 지붕이 날아갈 우려가 있으므로 민속(民俗)이 다들 그렇게 한다.
북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남쪽 한 칸은 청사(廳事)로 만들었는데, 방 안의 길이와 너비는 모두 5척이고 청사도 같다. 온돌을 종이로 발라서 매끄럽게 하고 풀을 엮어 만든 자리를 깔아 놓았으며 청사에 까는 것도 같았다. 방의 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고 남쪽은 청사를 향해 문이 있다. 청사의 동남쪽 벽에 창이 있는데 모두 작은 것이고 서쪽은 벽을 쌓지 않고 비워 두었다. 또 방 동쪽 벽 시창(矢窓) 아래에 2층으로 된 서가(書架)를 두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수백여 권을 가지런하게 잘 정돈해 두었다. 내가 총관(驄冠)을 착용하고 도의(道衣)를 입고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한가롭게 책을 보다가 졸리면 턱을 괴고 편한 자세로 조용히 쉬곤 한다.
집의 서쪽 처마는 길이가 짧아서 볕을 가리지 못하므로 기둥을 세 개 세워서 소나무 처마를 만들었다. 너비는 두어 자쯤 되고 길이는 두 칸 집의 끝까지였다. 기둥은 갈대를 사용하였는데 크기가 양쪽 손으로 잡을 만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바다에서 떠밀려 온 물건인데 대나무 같지만 대나무는 아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절강(浙江)에 있는 갈대가 그만큼 크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얻어서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가 마침내 여기에다 썼으니, 이 물건에도 수(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사람들은 그 말에 박수를 쳤다.
산죽(山竹)을 엮어 대자리를 만들어서 그 위를 덮고 이름을 소나무 처마라고 하였다. 소나무는 한라산 위에 있으므로 베어서 운반해 오려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그 편리한 것을 취하여 한 것이니 이름과 실제가 비록 맞지 않는 듯하나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찌 가릴 것이 있겠는가. 둘러쳐 놓은 울타리는 산죽(山竹)과 뉴목(杻木)과 진시(眞柴)로 틈이 하나도 없이 두껍게 막았으며, 그 높이는 지붕 위를 훨씬 벗어나서 재어 보면 한 발 남짓 된다. 길다란 나무로 띠를 만들어서 묶어 둔 것이 4층인데 그것이 높아서 쉽게 무너질까 염려한 것으로 안팎에다 기둥을 세워 지탱시켜 놓았다.
북쪽, 동쪽, 남쪽 3면은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으니,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에 동쪽과 서쪽은 항상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3분의 2가 되는데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 옆에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음식을 넣어 주기 위한 것이다. 둘러쳐 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관디[冠帶]를 갖추고 교상(轎床)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羅將)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하였다. 울타리 서쪽에 작은 사립문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전례가 그러하다.
이미 입정(入定)한 뒤에 토착민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묻기를,
“이곳 풍토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들으니, 항상 비가 와서 갠 날이 적고, 항상 바람이 불어서 조용한 날이 적으며, 매습(霾濕)이 사람에게 침투하면 사람이 간혹 현기증으로 쓰러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수일 동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데다 건조하고 다습한 기후가 육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 전에 들었던 것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영주(瀛洲)의 전역은 바닷속에 있는 궁벽한 섬이지만 이곳 대정현은 바닷가가 더욱 가깝고 지형이 낮아서 장독(瘴毒) 기운이 세 읍 중에서 가장 심합니다. 봄여름의 교차 시기부터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서 갠 날이 없고 사나운 바람이 무시로 불며 장무(瘴霧)가 잔뜩 끼면 지척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가 되면 기둥, 들보, 창문, 벽 등에 물방울이 샘에서 솟는 듯하고, 의관(衣冠)과 침상 및 자리가 습기를 받아 진흙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옷이나 재물이나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여름철만 지나고 나면 썩어서 결국 쓸모없게 됩니다. 심지어 문에 부착한 돌쩌귀도 수년만 지나면 역시 모두 녹아 버리고 마는데 더구나 피와 살로 된 몸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소인(小人)들은 이곳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몸에 배었습니다마는 내지(內地)의 조관(朝官)이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을이 저물 무렵 서북풍이 일면 장려(瘴癘)가 조금 걷히고 햇볕이 드러나는 것이 과연 요즘 날씨와 같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간혹 차지 않고 여름이 간혹 따뜻하지 않아서 기후가 불순하고 추위와 더위가 뒤바뀌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을 조절하기가 어려워 질병이 발생하기 쉬우며, 뱀, 지네, 지렁이 등 구물거리는 것들이 모두 겨울철을 지나고도 죽지 않고, 나무와 풀, 무, 부추, 파, 참깨와 같은 식물류들을 비록 한겨울일지라도 모두 밭에서 캐다가 쓸 수 있으니, 이것을 보면 나머지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별다른 지역이구나. 나와 같이 죄를 지은 자가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내가 전에 성상의 견책을 받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북쪽 변방으로 갔었는데, 북쪽 변방의 풍토도 역시 괴상하였지만 그곳은 여기에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다. 죄에는 경중이 있기 때문에 거처하는 곳이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한 성(城)을 관할하였고 여기에서는 위리(圍籬) 안에 갇혀 있으니,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아, 나의 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죽어 마땅한데, 다행히 천왕(天王)의 성명(聖明)하심을 힘입어 살아서 해도(海島)로 보내졌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같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은덕의 여파가 미친 것이니, 풍토가 좋고 나쁜 것이야 어느 겨를에 논하겠는가.” 하니, 응대하던 사람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래서 그 대략을 기록하여 자식과 조카들에게 내가 거처하는 곳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동계집 제2권 / 서(序)
주부(主簿) 하홍도(河弘道)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전송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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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越)나라의 유배당한 사람은 고국(故國)을 떠난 지 1년이 되자 고향 사람과 닮은 사람만 보아도 기뻐하였다. 더구나 나는 도성을 떠나온 지 4년이 되었으며 고향을 떠난 지가 4년에 또 한 돌을 더하였으니 어떻겠는가. 게다가 또 하군(河君)은 단지 고향 사람과 닮은 사람일 뿐만이 아닌 데이겠는가. 지금 와서 만나 보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비록 그러나 내 마음에는 의혹스러운 점이 있다. 이리 오라. 너, 하군아. 내가 너와 더불어 그 의혹을 풀어 보고 싶다. 나는 너와 전에는 귀천(貴賤)의 구분이 있었고 뒤에는 서로 잘 지낸 적도 없었으니, 단지 마을에서 예사롭게 지내던 사이일 뿐이다.
적공(翟公)이 파면되어 돌아가자, 문밖에 새 잡는 그물을 설치한 것은 예나 이제나 인정이 다 그러한 법이다. 더구나 나는 이 멀고 험한 섬에 귀양 와 있으니 어찌 재기할 가망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나에게 뒷날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군은 이미 쇠약하고 늙은 데다 또 자손도 없다. 설령 뒷날이 있다 하더라도 하군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해를 근거할 데가 없는데 군은 어찌하여 용기를 내서 왔단 말인가.
옛날에 바다를 논하는 자가 남해를 으뜸으로 삼았다. 그 말에 ‘하늘은 서북쪽이 기울고 바다는 홀로 남쪽에 있어서 세 곳에 비하여 더욱 멀고 험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직접 보고 나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섬에서 육지까지는 거리가 천여 리가 되는데 파도가 험하고 태풍이 항상 많아서 왕래하기에 용이하지 않은 배들이 서로 대기하곤 하는데, 사람들은 이 바다 보기를 저승으로 가는 관문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역시 큰 것인데, 군은 어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왔는가. 내가 우리 고을에서 청탁(淸濁)을 잃은 바가 없으므로 골육과 같은 지극히 가까운 친척들도 수없이 많으며 생사를 함께하자고 맹세한 벗도 적지 않다. 그 밖에 이러저러한 자들이 어찌 하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구 하나 찾아오겠다고 빈말이라도 해 주는 자가 없었다. 또 듣건대, 가서 보는 것은 인정(人情)이 아니라는 의논이 있다고 하니, 그 말이 진실로 그럴 듯하다.
인정(人情)이란 그다지 서로 다르지 않은 법인데, 군은 어찌 대중의 인정을 어기고 왔는가. 대저 범범한 친분으로 또 어찌할 수 없는 곳에 처해 있는데, 넓은 바다의 험난하고 먼 것을 잊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하는 논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골육이나 마음으로 사귀는 자들도 능히 하지 않은 바를 한단 말인가. “하군아, 그대가 갖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리지 못하겠다. 이 무슨 법인가?” 하고 물었으나, 하군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단지 생전에 한 번 보았으니, 진실로 다행이라고만 말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서로 마주하고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독한 안개가 살갗을 녹이는데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무더운 바람이 뼈를 찌는 듯해도 병으로 여기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도록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남들이 함께 나가서 놀고자 했으나 반기지 않았다. 내가 또 시험 삼아 묻기를, “하군은 한결같이 어찌 그리 고달프게 하는가. 사람이 이 섬에 들어오기가 진실로 쉽지 않다. 이곳에는 기이한 경치와 특이한 사적이 많은데 어찌 한 번 가서 보고 스스로 평생의 포부를 장대하게 가져 보지 않는가.” 하니, 하군이 또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잠시나마 곁에서 모시고 있으니 진실로 다행일 뿐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쯧쯧, 하군아. 어찌 매번 물어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가. 요즈음 세상이 대부분 다 물결인데 그대는 물결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내가 그대가 아닌데 내 마음속에서 그대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그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알겠는가. 또 그대가 대답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대답을 한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가 떠날 때에 술을 한 잔 주고서 다시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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