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편지는 회수(淮水)를 건너가지 못한다는 옛 규례

2022. 9. 7. 20:18제주도

구봉집 5 / 현승편 (玄繩編下)

조여식에게 답하는 편지〔答趙汝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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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형과 더불어 이별한 지 지금 5년이나 되었습니다. 곤란한 상황으로 인해 몸을 감춘 채 병에 신음하면서 적막함을 견디고 있어, 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쌓였으니, 만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일찍이 은근한 정이 담긴 서신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버리는 가운데에서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아직까지도 짤막한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예상(翳桑)에 곤핍을 당하거나 예전의 의리를 모두 잊어버려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편지는 회수(淮水)를 건너가지 못한다는 옛 규례를 배워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난번에 형이 속에 있는 생각을 다 토로하여 나라가 망하기 전에 위태로움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때 차라리 자신의 몸을 잊을지언정 자신이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시휘(時諱)를 범하여 홀로 말하였는데, 외람스럽게도 형편없는 저에 대해서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충분(忠憤)이 대공지정(大公至正)하여 하찮은 저에 대해서 사사로운 생각을 하는 바가 털끝만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내는 편지가 형에게 한번 도착하고 나면, 청명하고 직절(直截)한 기상을 더럽히게 될까 몹시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숙향(叔向)이 사사로이 사례하지 않았던 뜻으로 자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해 동안 소식이 끊겼던 데 대해 의아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옛 벗들이 저를 대하여 한 몇 마디 말도 형이 올린 상소에 들어 있다고 하는데, 형은 어디에서 그 말을 들었습니까? 이를 임금에게까지 아뢰었으니, 황송하고 황송합니다. 주회암(朱晦庵)이 말하기를 “안자(顔子)가 어찌 감히 자기 자신을 옳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그르게 여기면서 스스로 나아가지 않을 자리에서 편안해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이 말을 가지고 오늘날 스스로를 면려하는 훈계로 삼으며, 교제의 도가 잘못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닥친 화가 피부와 골수까지 바짝 다가와서 외로운 그림자가 표락(飄落)하는 탓에 살아서는 성세를 만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인생살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역시 부끄럽습니다.

듣건대 형이 형제가 죽는 아픔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하늘이 어진 이를 돕지 않는 것을 어찌 탄식하겠으며 어찌 탄식하겠습니까. 숙헌의 조카딸이 겨우 계례(笄禮)를 올릴 나이인데 혼인을 하자마자 곧바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조물주가 우리 무리에게만 유독 곤욕을 주니, 이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이 보낸 심부름꾼이 돌아가기를 서두르는 바람에 속마음을 다 쓰지 못합니다.

[-D001] 조여식(趙汝式) :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 호는 중봉(重峯)ㆍ도원(陶原)ㆍ후율(後栗)이다.

[-D002] 예상(翳桑) :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처지를 뜻하는 말이다. 지명(地名)이라는 설도 있고, 우거진 뽕밭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영첩(靈輒)이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을 조돈(趙盾)이 지나다 보고 먹을 것을 주어 구제해 주었다. 그 뒤에 영첩이 진나라 영공(靈公)의 갑사(甲士)가 되었을 때 조돈이 위험에 처한 것을 다시 구제해 줌으로써 조돈이 죽음을 모면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D003] 숙향(叔向) …… :

조헌이 구봉을 위하여 사사로운 마음으로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상소를 올린 것이므로 구봉이 개인적으로 사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에 숙향의 아우가 난리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숙향도 구속되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걱정하자 숙향은 “우리를 구원해 줄 사람은 반드시 기 대부(祁大夫)일 것이다. 그는 밖으로 천거할 적엔 원수도 버리지 않았고 안으로 천거할 적엔 친자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나만을 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기해(祁奚)는 치사(致仕)해 있다가 숙향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말을 달려 집권하고 있던 범 선자(范宣子)를 만나 숙향의 어짊을 말하여 사면하게 한 다음 숙향을 만나 보지도 않고 갔으며, 숙향 역시 사례하지 않았다. 두예(杜預)의 주(注)에, 숙향이 사례하지 않은 것은 숙향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1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