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가 추방될 곳은 바로 제주도[濟州道]라고 벌써 가리킵니다

2022. 9. 7. 20:06제주도

한국근대사자료집성13권 13권 프랑스외무부문서 3 조선Ⅱ·1889 > 정치공문 1888~1896 조선 1889 권2 콜랭 드 플랑시 씨 > 【12】 주미 조선 공사 박정양의 귀국문제와 청국 군대의 조선 개입 소문 보고

제목 【12】 주미 조선 공사 박정양의 귀국문제와 청국 군대의 조선 개입 소문 보고
문서번호 정치국 극동과 제43호
발신일 1889년 2월 10일 ( 1889년 02월 10일 )
수신자 가블레, 등등

【12】 주미 조선 공사 박정양의 귀국문제와 청국 군대의 조선 개입 소문 보고

정치국 극동과 제43호

서울,

1889년 2월 10일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조선 공사가 직면한 난관들.-반도에서 청국 군대의 개입에 관한 소문

장관님,

저의 지난 1월 10일자 보고서(제36호)에서 각하께, 워싱턴으로부터 소환된 조선 공사 박정양[朴定陽] 씨의 일본 도착과, 얼마 있지 않아서 제물포에 도착할 것이며, 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으로 임명될 것에 관해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이홍장[李鴻章]의 명령을 어기고 미국주재 청제국 대표의 감시를 피한 이 사절에게 불만이 없다고 볼 수 없는 청국 정부에게 표면상의 만족감을 주기 위해, 이 관리는 그 자리에 임명되기 전에 틀림없이 귀양과 같은 일시적인 처벌을 받게 될 것 같다고 설명드렸습니다.

제가 수집할 수 있었던 단편적인 정보에 의하면, 왕의 조치는 제가 의심했던 바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들었을 것 같은 위안[袁] 씨는, 그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청제국 사절은 보복할 기회를 잡기로 한 것이 확실합니다. 박 각하의 출발에 반대하기 위해 주차관이 취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한 미국 전함의 도움에 의해 1887년에 실행될 수 있었어도 이번에는 반역자로 생각되어 필시 천진[天津]에 강제 수용되거나 처형될 불행한 전권공사 바로 이 사람을 탈취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조선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정보를 얻었고 특히 대원군으로부터 그에 대한 아주 확실한 확인을 받았습니다. “박정양 씨는 아주 불안정한 위치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는 일본을 떠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그를 참수형에 처할 청국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될 곤란함 때문입니다.”

청국 사절의 의도를 알자마자 이희 전하는 그의 공사에게 요코하마에 그대로 있으면서 새 지시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적어도 서울에서, 분쟁의 해결책을 서둘러 구하기 위해 미국 대리공사에게 그 정부의 알선을 요청하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샤예 롱[Chaillé Long] 씨는 일어났던 중대한 사건을 완전히 모르게 놔두었습니다. 그러나 상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조선주재 미국 공사 딘스모어 씨와 전보를 통하여 직접적인 협상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요즈음에 그 도시를 떠나서 일본에 갔으며, 그곳에서 잠시 지체해서 머문 후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전함에 막 탑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소식을 계속적으로 각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마치기 전에 여기서 나돌고 있는 소문에 관해 알려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리 손에 들어온 청국 신문은 광서[光緖] 황제의 즉위 이후에 반도에 대한 원정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 나라는 청제국에 합병될 것이고, 왕은 퇴위시켜 가족과 함께 유배될 것이고, 결국 북경[北京] 총리아문[總理衙門]의 현직 관리인 증[曾] 제후가 이 새로운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이 정보는 조선의 관리들 사이에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대중들에게 빨리 퍼진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대중들 사이의 소문이 같은 근원에서 발생했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이러한 문제들을 무시하는 편인 조선인들은, 이달 안에 청제국 군대가 조선의 수도를 점령할 것이라 단언하고, 그리고 군주가 추방될 곳은 바로 제주도[濟州道]라고 벌써 가리킵니다. 그들은 청국 고관의 조정을 받는 위치에 있는 옛 섭정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데니[Denney]-위안[袁]사건(1888년 11월 2일, 20일자 보고서 제26, 29호) 이후에 항상 불안한 조정은 이러한 풍문으로 더군다나 우려를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너무나 불안한 왕은 자신의 도피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는 청국의 무력 개입을 우려하여, 교관으로 고용된 몇 명의 미국인 장교들은 통보를 받자마자 즉시 궁궐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조짐들을 지적해 낼 수 있다하더라도, 그 근원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데다가 북경 정부가 오랫동안 망설였던 정책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바꿀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청제국 공사관원들은 우리들이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될 그들의 생각조차 숨기는데 아주 능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습관적인 단호한 거부를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이 상당히 지속되어왔고, 한없이 계속될 수는 없으며, 곧 끝나야 한다고 공언하였습니다.

서울과 북경 사이의 정보 교환이 지체된 데 따라서 저에게 틀림없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르메르[Lemaire] 씨와의 빈번한 서신 교환이 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만약에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일의 근거가 되는 무엇인가가 일어난다면 각하께 즉시 알려드릴 것입니다. 상해 신문들의 확언이나 여기서 유포된 것에서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청국의 개입이 황제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북경주재 우리 공사 중의 한명과 총리아문 대신 공친왕[恭親王]과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남[安南] 문제이며, 친왕은 자기로서는 1874년의 조약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를 결코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종주권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결정이므로 미성년의 군주가 권좌에 있는 한, 어느 관리도 감히 그것에 응하고 뒤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당신은 이해해야 한다. 황제가 성인이 되는 날에, 모든 그의 관리들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그들의 업무 집행에 관해 책임을 물을 것이며, 청제국 권력의 일부분을 포기한 그들에게 엄중한 벌이 내려지고, 유배에 보내지거나 사형에 처해 질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총리아문 대신이 말한 이 전반적인 심문이 이루어질 때가 왔습니다.

동치[同治] 황제의 죽음 이래로 청제국은 심각한 상실을 맛보았습니다. 유구섬은 일본이 점령하고, 1884년의 분쟁으로 안남은 우리에게 주었고, 버어마에는 영국이 자리잡고, 티베트는 위협받고 있고,-이미 이루어진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유도 없이 광서 황제가 고려해야할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조약은 청국에 강요되어 젊은 군주가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전에 약속된 것까지 부인할 꿈을 꾸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조공국가들 중에서 이 나라만이 유일하게 그 지위에서 벗어났으며, 무력의 도움을 빌려줄 생각이 있는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자[天子]가 조선의 자주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그만 끝낼 때가 됐고, 종주국 황제의 조종을 피하려고 하는 이 나라를 청제국에 더 강하게 매어놓기에 좋은 때이며, 확고한 청국의 지배에 의해 러시아의 계획을 예방하기에 알맞은 시기입니다. 이 두 나라가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북경에서 얻게 될 결론일 지도 모릅니다. 이홍장이 한 유명한 문서에서 언급하기를, “조선은 요녕[遼寧], 길림[吉林]과 아무르의 세 동쪽지역을 보호하는 벽이다. 그 나라와 우리는 입술과 이빨과 같은 것이고, 그 나라에 불행한 것은 청국에도 불행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구

V. 콜랭 드 플랑시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가블레 각하께, 등등

 

한국근대사자료집성13권 13권 프랑스외무부문서 3 조선Ⅱ·1889 > 정치공문 1888~1896 조선 1889 권2 콜랭 드 플랑시 씨 > 【20】 광서 황제 결혼을 계기로 원세개가 개최한 파티 및 정감록에 관한 보고

제목 【20】 광서 황제 결혼을 계기로 원세개가 개최한 파티 및 정감록에 관한 보고
문서번호 정치국 극동과 제49호
발신일 1889년 2월 28일 ( 1889년 02월 28일 )
수신자 외무부 장관, 등등

【20】 광서 황제 결혼을 계기로 원세개가 개최한 파티 및 정감록에 관한 보고

정치국 극동과 제49호

서울,

1889년 2월 28일

청국 군대의 개입에 관한 소문에 의해 서울에 형성된 동요-광서[光緖] 황제 결혼을 기회로 청국 주차관이 개최한 파티.

장관님,

반도에서의 임박한 청국 군대의 개입에 대한 소식과 저의 지난 보고서에서 알려드린 불안감은 조정에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주민들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청국 주차관은 그의 황제의 결혼을 계기로 이 달 26일에 모든 외국인과 대부분의 조선 관리들을 초빙하였습니다. 그 날에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만찬 동안에 여러 명의 조선 대신들이 살해됐고 이어서 궁궐을 향해 공격을 하였던 1884년의 참극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이 모임에서 유사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왕은 26일과 27일 사이의 밤에 자기 아버지인 대원군의 집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위안 씨와 최고의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대기 중에 있었고 진군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리고 경보가 있자마자 수도에서 가장 인접한 강화성의 수비대가 서울로 소환될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그 파티는 어떤 사고도 없이 개최되었고 우리들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간 관료들만이 여기에 참석하였고 40여 명(장군들을 포함한 고관들)은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으며, 연미복차림의 러시아 대리공사만을 제외하고 외교관들과 영사들은 모두 제복차림이었습니다. 각하께-제가 이미 보고 드린바 있는-웨베르 씨는 오랫동안 공식적인 기념일조차 청국 공사관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두 달 전부터 예절을 차려야하는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청제국 주차관이 북경에 자신에 대한 러시아 황제 사절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고, 총리아문이 이를 수긍하였고, 이러한 주장에 대해, 페테르부르그 내각은 조선주재 대표를 불러 그의 태도를 수정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 파티가 무사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걱정은 여전했습니다. 위험이 생길 경우에 대비하여 많은 유복한 가족들은 피난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요는 특히 모든 사회계층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예언에 의해 지속되었습니다. 14세기에 살았던 정감이라는 작가가 쓴 책[鄭鑑錄] 한 권은, 조선인들이 말하기를 한결같이 실현되었다는 반도의 운명에 대한 예측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너무나 정확하였기 때문에 해석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섭정공이-약 20여 년 전에-이 책을 베끼는 것과 재판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금지된 책들은 그 사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조차 가장 중한 벌에 처해졌고, 신고된 모든 책은 압수시켰습니다. 그리고 새 판을 발간하였는데 그 문장들이 얼마나 왜곡되었던지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몇몇의 사본이 금지를 피하였고, 이것이 새롭게 널리 퍼졌고, 오늘날 그 옛날의 원문에서 점술 애호가들이 미래를 탐색합니다. 그들이 알아내기로는 현재 정권을 쥔(1392년에 출현한) 이(李)씨왕조는 500년만 지속될 것인데, 1892년까지랍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3년 전(1889)에, 한 청국인 장군이 조선에 군대를 끌고 들어와 진인[眞人]이라는 이름의 그 동포 중에 한명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침공에 뒤따르는 학살 장면들, 제주도[濟州道]로의 왕실 가족 추방, 이 모든 일들은 이 아시아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에언 따위 속에 나타나는 것이며, 이 신비한 책은 이곳 사람들이 순진하며 무식하며 미신적이기에 이곳에서 더욱 신뢰받게 됩니다.

경구,

V. 콜랭 드 플랑시.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