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2022. 10. 17. 12:28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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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본 아정유고 제6 / ()-()

이낙서(李洛瑞서구(書九) 에게 주는 편지

 

춘추 시대 1 24개 열국에 외자로 된 국호가 많고 간혹 두 자로 된 국호가 있으니, 두 자로 된 것은 소주()ㆍ남연(南燕) 같은 것이오. 이 책에는 잇달아 써서 기본 숫자에 차지 않으니, 두 자 국호까지 분정하여 기본 숫자를 채워 보내 주기 바라오.

 

() 나라 태정제(泰定帝)가 천하를 나누어 18()를 만들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문헌통고(文獻通考 송()의 마단림(馬端臨)의 저서)》와 《청일통지(淸一統志 화신() 등이 지은 전국의 지리서)》에서 연혁(沿革)을 상고해 내서 18로를 채워 쓰게 되었으니 지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내 주기 바라오.

 

나의 생각에는, 중원(中原)은 원기(元氣)가 모인 곳이라 일월(日月)이 바로 비추고 수토(水土)가 그 조화를 이루어, 성현의 기지가 되고 문헌의 육성지가 되었다고 보오.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지역으로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1만여 리가 되나 역대의 문물이 왕성하여 볼 만하고, 유구(琉球)는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하나의 섬이나, 자손들을 중원에 입학시켜 명(明)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실하므로 오랑캐의 풍속을 크게 혁신하였소. 이는 모두 내가 전적(典籍)에서 상고한 것으로 나만이 흠모할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우리 조선은 기성(箕聖)이 피난 온 곳으로 요동(遼東)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되지 않고, 전장(典章)과 예악(禮樂)은 사이(四夷)의 으뜸이라, 저 교지ㆍ유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문명이 어떠하겠소? 그리하여 전사(前史) 외이열전(外夷列傳)을 두루 읽어 보니 조선이 제일이요, 다음은 안남(安南)이요, 그 다음은 유구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이 강한 것을 이름이 아니라 문명으로 따진 것이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승우(崔承祐)가 당(唐) 나라 조정에 과거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고, 박인량(朴寅亮)이 송(宋) 나라에 사신가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金富軾)을 특별히 세가(世家)에 나열하였소.

호원(胡元)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공(李公)이 서천(西川)에 봉사(奉使)하고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였으며,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가 제과(制科)에 올랐소. 우리 조선의 개국(開國)은 황명(皇明)과 함께 일어났는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소. 이와 같이 2백 년 동안 계속하여 그 주고 받은 의식의 성대함과 보고 느낌에 진지한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도리어 세 조정(당(唐)ㆍ송(宋)ㆍ원(元))만큼 성대하지는 못하오.

 

묵장(墨莊)이 나에게 먼저 《패문시운(佩文詩韻)》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운략(韻略)》을 청하였더니, 《운략》은 희귀한 책이라, 유리창(琉璃廠) 20여 서방(書坊)을 뒤져 찾은 끝에야 비로소 이 책을 얻었다 하오. 그처럼 두터운 정의에 참으로 감격하였소. 갈 길이 바빠 미처 볼 겨를이 없었는데, 족하는 먼저 그 범례를 깨달아 우리들의 운문(韻文)에 대해 모두 금쪽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반공(潘公)이 이른바 ‘문운(文運)에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소.

 

《통지(統志)》포주(蒲州)조에 이른 ‘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별도로 포주에 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대개 기자묘가 셋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몽현에 있고, 하나는 평양(平壤)에 있고,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소.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평양(平壤) 북쪽 토산(兎山)에 장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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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색은(史記索隱)》에 두예(杜預)의 말을 인용하기를,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총(箕子塚)이 있다.”

하였는데, 《일통지(一統志)》를 상고하여도 보이지 않으니, 이는 대개 두씨(杜氏)의 전문(傳聞)으로 그릇된 말이다. 《일통지》 고적(古跡),

“평양성(平壤城) 밖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말을 따라 쓴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평양부(平壤府) 성 북쪽 토산(兎山) 위에 기자묘가 있다.

하였는데, 나는 이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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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27 / 잡저(雜著)

만필(漫筆()

《시경(詩經)》의 노송(魯頌)은 희공(僖公)이 반궁(泮宮)을 중수하고 비궁(閟宮)을 복구한 일을 칭찬한 것인데, 《춘추》에 이 일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정자(程子)께서 이르기를이 두 가지 일은 나라의 중대한 일인 것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께서 쓰지 아니하여 뜻을 보이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송의 시가 없었다면 또한 어떻게 성인이 더 써 넣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한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이른바공자께서 수정하지 않은 《춘추》를 읽어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한 것이다.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평양(平壤)에 도읍한 것에 대해서 옛 기록에 “2천 년 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 중국의 당요(唐堯) 무진년에 기원(起元)하여 평양에 서울을 정하고 당요와 같이 임금 노릇을 하였는데, 호칭을 단군(檀君)이라고 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그 후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요수(遼水)를 건너 평양에 오자 단군은 그에게 나라를 넘겨 주고 평양을 떠나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 ”고 하였는데, 이 사실은 우뚝이 천추(千秋)에 빛날 만한 것이다. 단군이 덕을 지닌 사람을 존경하고 어진 이에게 나라를 넘겨 주어 임금의 지위를 버리는 데 있어 헌신짝을 벗어 버리듯이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천자의 지위를 주고받은 것을 따른 것인데 어찌 중국과 우리나라에 대해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단군의 이름은 왕검(王儉)인데 지금 평양성을 왕검성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선인(仙人)인 왕검이 서울로 정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사달산은 지금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인데 그 곳에 단군의 옛 사당이 있으니,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당요의 무진년에서 무왕의 기묘년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살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준 사람은 단군의 후예인 듯싶다. 그리고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씨(王氏)는 민간에서 태어나 성씨의 유래를 알 수 없지만 5백 년 왕조의 세대를 전했으니 어쩌면 왕검의 후손이 아닐까.

 

옛 무덤의 말에 대해서 본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왕검성(王儉城) 서쪽에 기자(箕子)의 묘가 있는데 예부터 말이 서로 전해져 제사를 끊이지 않고 받들어 왔다. 그런데 두예(杜預)의 말에 “양(梁) 나라 몽현(蒙縣)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동(河東)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묘가 있는데 지금 요서(遼西)에 옛 고죽국(孤竹國)에도 백이ㆍ숙제의 묘가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이에 있어 필시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동의 수양산(首陽山)에 있는 백이ㆍ숙제의 묘도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고죽에 있는 묘는 어쩌면 사상보(師尙父)가 제() 나라에 봉해졌으므로 5대까지 주() 나라에서 반장(反葬)한 뜻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