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성(瀋陽城) 북쪽 개원현(開元縣)이 바로 옛날 오국성이다.

2022. 9. 1. 16:40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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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67권 / 입연기 하(入燕記下)

정조 2년 윤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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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미) 잠시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40리를 가 여양역(閭陽驛)에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 신광녕(新廣寧)에서 유숙했다.

○ 광녕은 북으로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고 남으로는 큰 바다여서 몽고(蒙古)ㆍ여진(女眞)ㆍ조선의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므로 맹장(猛將)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명조(明朝) 때에 장군(將軍) 이성량(李成樑)이 이곳에 살면서 노아합적(努兒哈赤)의 아비와 할아비 2대(代)를 죽여 노아합적과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되었으니, 일곱 가지의 대한(大恨)으로 하늘에 고한 맹세가 실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2(경신) 쓸쓸한 바람이 가을 날씨 같았다 40리를 가 중안보(中安堡)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 소흑산(小黑山)에서 유숙했다.

○ 북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바라보니 일대(一帶)에 검푸른 석봉(石峯)들이 짙은 회색(灰色) 같은데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다. 대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관내(關內)까지는 산형(山形)이 일반이다. 일찍이 시험해 보건대, 산의 돌은 그 지질(地質)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곳의 지질은 모두 치토(埴土 찰흙)이기 때문에 응결(凝結)하여 이루어진 산이 청석(靑石)인 듯하고, 우리나라의 지질은 사토(沙土)이기 때문에 응결하여 이루어진 산이 희고 돌도 견고(堅固)한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다.

연도에서 가끔 이곳으로 팔려온 우리나라 말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슬피 울며 머뭇거리고 연연(戀戀)한 정을 보여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게 한다. 누가 동물이 사람만 못하다고 하는가, 귀를 잘린 말 한 마리는 더욱 슬피 울었다. 이 말은 지난해에 이곳을 지날 적에 병이 나서 죽으려 하므로, 그 말을 부리던 자가 귀를 자른 다음 말을 버리고 그 귀를 가져와서 관청에 신표(信標)로 보였다. 이 말을 토인(土人)이 거두어 길러 죽지 않았으므로 더욱 고향을 그리는 슬픔이 있는 모양이다.

 

3(신유) 잠시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50리를 가 이도정(二道井)에서 점심을 먹고, 50리를 가 백기보(白旗堡)에서 유숙했다.

○ 마란초(馬蘭草)가 길 옆에 떨기로 나서 곳곳에 있는데 4~5월 사이에 붉은 꽃이 피고 잎은 매우 억세니, 곧 우리나라에서 가란(假蘭)이라 하는 것이다. 8~9월이 되면 그 잎이 질기고 길기 때문에, 그 잎을 베어다가 약롱(藥籠)으로 만든다. 추수(秋收)가 끝난 뒤에는 토인(土人)들이 이 풀을 베어 쌓아 두고 우양(牛羊)의 사료(飼料)로 쓰는데, 우양이 매우 잘 먹는다. 여름에는 우양이 그 잎을 먹지 않는데 그것은 그 맛이 쓰기 때문이다. 일판문(一板門)에서 이도정 사이는 금년에 비가 오지 않은 듯하여 진흙길은 면하였으나, 길이 매우 패어서 걸을 수 없다.

 

4(임술) 아침에 비가 왔으나 낮에는 개고, 포시(晡時)에 큰 바람이 불고 천둥치고 비가 왔다. 50리를 가 신민둔(新民屯)에서 점심을 먹고, 35리를 가 고가자점(孤家子店)에서 유숙했다.

○ 신민둔은 큰 도시(都市)이다. 연경으로 들어갈 때 여기서 큰 바람을 만나 어떤 약사(藥肆)에 들어가 쉬었는데, 이번 돌아오는 길에도 쉬어가려고 다시 이 약사를 찾으니 주인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주류하(周流河)를 10리 정도 못 미쳤을 때 흑풍(黑風)이 크게 불고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므로 비를 피해 민가(民家)로 들어갔다. 광야(曠野)에 치는 번개 모양이 한결같지 않아 매화꽃 같기도 하고 밤 하늘에 별똥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과두(蝌蚪)와 고전(古篆) 같기도 하여 장관(壯觀)이었다. 역관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주류하에 이르면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가 와 맑은 날이 매우 드물었다.”

 

5(계해) 저녁에 비가 약간 왔다. 45리를 가 대방신(大方身)에서 점심을 먹고, 45리를 가 심양(瀋陽)에서 유숙했다.

○ 영안교(永安橋)는 심양 서교(西郊)의 큰 다리로서 방금 수리하느라고 목석(木石)이 비쭉비쭉 길가에 쌓여 있는데, 진흙에 반은 매몰(埋沒)되었다. 말과 수레가 진흙에 빠져 잘 가지 못하니 요야(遼野) 2천 리 길에 최초로 험난한 길을 만났다. 초혼(初昏)에 심양에 당도하였다.

○ 심양서원(瀋陽書院)을 방문하였다. 교관(敎官) 배진(裵振)은 자(字)가 서로(西鷺)로 산서 평양부(山西平陽府) 사람인데 용모도 매우 순후(醇厚)하고 학문도 해박하였다. 내가 오국성(五國城)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는 심양성(瀋陽城) 북쪽 개원현(開元縣)이 바로 옛날 오국성이라고 대답하고, 또,

“심하(深河)는 흥경(興京)과 성경(盛京) 사이에 있는데 여기저기에 경관(京觀)이 있으니 곧 고려인총(高麗人塚)입니다.”

하니, 이는 대개 김응하(金應河)가 패사(敗死)한 곳인 듯하다.

 

6(갑자) 쓸쓸한 바람이 불고 저녁에는 비가 약간 내렸다. 20리를 가 백탑보(白塔堡)에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 십리보(十里堡)에서 유숙하였다.

○ 아침에 출발하여 조선관(朝鮮館)을 차례로 살펴보니 담장은 허물어졌고 뜰은 황폐한데 집만이 우뚝하여 지난날을 회상(回想)케 하는데, 고향 떠난 나그네의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상사(上使)의 처소(處所)에 가니 서원생(書院生) 김과예(金科豫) 등이 와 있는데 매우 은근한 뜻이 있었다. 과예의 모습이 전일에 비교하여 좀 수척하므로 서장관이 농담으로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주벽(酒癖)과 시벽(詩癖)이 있으므로 자연 파리해진다.”

하였다. 서장관이 웃으며,

“아마 술과 시 때문만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것 때문인 듯하다.”

하자, 과예는 웃으며 그 한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재선이 옆에 있다가,

“그대는 등도자(登徒子)의 병이 있소.”

하여,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7 (을축) 잠시 흐리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30리를 가 난니보(瀾泥堡)에서 점심을 먹고, 24리를 가 영수사(永壽寺)에서 유숙했다.

○ 신요동성(新遼東城)은 노아합적(努兒哈赤)이 축조(築造)한 것인데, 지금은 퇴락하였다. 성 서쪽으로 1리가 바로 영수사의 마을인데 남쪽으로는 태자하(太子河)로 통한다. 종실(宗室) 해흥군(海興君)이 일찍이 이 영수사에서 죽었으므로 조선 사람들은 꺼려 감히 들어가지 않는 자가 많다고 한다.동대로(遼東大路)에 요양(遼陽)ㆍ심양(瀋陽)ㆍ광녕(廣寧)ㆍ영원(寧遠)ㆍ산해관(山海關)은 요충지가 되는 곳이므로 명 나라 때에는 성을 수선하고 군사를 조련(操練)시켜 이 다섯 곳에 맹장(猛將)을 보내어 오랑캐를 막도록 하였으니, 산해관에서부터 요양까지 2천 리 사이는 모두 전쟁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지(城地)를 수축(修築)하지 않고 백 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으니, 이는 자기 수중의 물건으로 여겨 염려할 것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8(병인) 흐렸다. 바람이 쓸쓸했다. 30리를 가 냉정(冷井)에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 낭자산(娘子山)에서 유숙했다.

○ 아침에 작은 배 3척으로 태자하(太子河)를 건넜다. 물은 겨우 말의 배에 닿을 정도였다. 냉정점(冷井店)에 이르니 푸른 산이 둘러져 있고 긴 시내가 띠처럼 흐르는데, 지세(地勢)가 대단히 달라져 마치 우리나라와 흡사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절로 기뻐져서 길을 걷는 괴로움도 깨닫지 못했으며, 말도 길게 울었다. 석문령(石門嶺)을 넘는데 모든 사람들의 걸음이 나는 새처럼 빨랐다. 참 심하구나, 사람이나 동물이 고토(故土)를 그리워함이여! 낭자촌(娘子村)도 역시 안온(安穩)하였다. 이날 새벽에 군뢰(軍牢) 한 사람이 만부(灣府)의 글을 가지고 먼저 책문(柵門)으로 향하였다.

 

9(정묘) 아침에 비가 약간 내렸다. 40리를 가 첨수참(甛水站)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 연산관(連山關)에서 유숙했다.

○ 청석령(靑石嶺)은 우리나라 동선령(洞仙嶺)과 같으면서 더 수려(秀麗)하고 회령령(會寧嶺)은 우리나라의 청석동(靑石洞)과 같으면서 더 험준(險峻)하다. 건량관(乾糧官) 김석우(金錫禹)는 큰 수레를 타고 호랑곡(虎狼谷)의 대로(大路)를 따라서 왔다. 호랑곡은 냉정(冷井)에서부터 길이 갈라져서 대개 10리쯤 오면 연산관(連山關)으로 나오게 되는데 길이 매우 평탄하고 산수(山水)도 수려하며,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산이 모두 5급(級)으로 다섯 봉우리가 가지런하여 볼 만하다. 이 골짜기의 길이 한 10리 정도는 돌지만, 사신의 행차가 청석령과 회령령을 버리고 이 호랑곡을 택하는 것은 길이 평탄하여 행보(行步)의 수고가 덜하기 때문이다.

 

10(무진) 아침에 안개가 끼고 낮에는 더웠다. 30리를 가 답동(畓洞)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 통원보(通遠堡)에서 유숙했다.

○ 통원보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의주(義州)의 찬물 색리(饌物色吏)가 와, 부윤(府尹) 이 영공(李令公)이 충청도 관찰사로 이배(移拜)된 것과 선래군관(先來軍官)이 2일 밤에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 색리(色吏) 편에 가서(家書)를 받아 보지 못해 한스럽다.

 

11(기사) 아침에 안개가 끼고 낮에는 더웠다. 30리를 가 팔도하(八渡河)에서 점심을 먹고, 50리를 가 송참(松站)에서 유숙했다.

큰 물을 건넌 것이 모두 여덟 번인데 작은 물을 건넌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여탄(輿灘)에 이르니 산길의 흙은 물에 씻겨 남은 것이 없고 돌만 앙상하여 길이 매우 험했다. 밤에 재선과 함께 서장관의 숙소에 가서 고금을 담론(談論)하다가 밤이 깊어 달이 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재선은 범이 무서워 문 밖을 나갈 수 없다고 하여 서장관의 처소에 유숙했다.

 

12(경오) 아침에 안개가 끼고 낮에는 더웠다. 45리를 가 일대자(一臺子)에서 점심을 먹고, 35리를 가 책문에서 유숙했다.

○ 마고령(麻姑嶺) 백안동(伯顔洞)을 지나 장천(長川)을 건너니 팔구로(八九路) 땅이 질퍽하여 진창이 많아 길이 험준해서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였다. 재선과 함께 안시성(安市城)에 들어갔다. 성은 큰 길에서 북쪽으로 3리 거리에 있는데 구불구불한 산 지름길을 끼고 띄엄띄엄 있는 인가(人家)에는 그윽한 정취가 풍부하였다. 주위의 산들은 모두 둥글둥글하고 전면으로 작은 골짜기가 열렸는데 마치 사람이 팔짱을 낀 것처럼 생겼다. 성은 모두 우리나라의 성처럼 돌로 쌓았는데 그 가운데는 시내도 있고 석대(石臺)도 있고 퇴부(堆阜)도 있고 초석(礎石)도 있다. 석대에 오르려 하였으나 물이 너무 깊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대석에는 찬운대(攢雲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 의주(義州)의 역마 장교(驛馬將校)와 통사(通事)와 통인(通引) 등이 모두 와, 의주에는 장마가 계속되어 농사에 해가 많고 시내에 물이 불어 먼젓번에 왔던 배지(陪持)가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서(家書)를 받아 보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13(신미)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70리를 가 금석산에서 유숙했다.

○ 상통사(上通事) 윤갑종(尹甲宗)이 어제 봉성(鳳城)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성장(城將) 보정(普政)과 함께 책문(柵門)에 도착하여 빨리 책문을 나가기를 재촉하므로 밥을 일찍 먹고 책문을 나섰는데 별로 말썽 없이 나왔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로 수역관(首譯官) 이언용(李彦容)이 주선한 공이었다. 책문을 나선 뒤로는 기분이 상쾌하여 마치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즐거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목이 무성하여 쑥대가 사람의 어깨를 지났고, 모기 떼가 사람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총수천(葱秀川) 가에 이르러 천막을 치고 요기를 하려 했으나, 의주에서 새로 온 주자(廚子)가 이미 금석산(金石山)을 향해 떠났으므로 인마(人馬)가 모두 시장하였다. 40리를 가 금석산에 도착하여 유숙하는데 사방에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았다.

 

14(임신) 아침에 안개가 끼었고 낮에는 더웠다. 20리를 가 구련성(九連城)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 의주(義州) 도강(渡江)에서 유숙했다.

○ 아침에 출발하여 포시(晡時)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니 부윤(府尹)이 청마랑(淸馬廊) 가에 장막(帳幕)을 치고 삼사(三使)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성에 들어갔다. 밤에 도강 장계(渡江狀啓)를 써서 배지(陪持) 편에 발송하였다. 오늘 구련산 고지(故址)를 지나면서 비로소 조선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니 일대가 미망(微茫)하여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조선의 운산(雲山)을 바라보며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던 것을 생각하니, 그 말이 매우 강개하여 사람들의 장렬한 기개를 더하게 한다.

 

한마디 : 승정원일기 영조편에 조선 회령에 오국성이 있다.황제총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