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 13:46ㆍ백두산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발해황룡(渤海黃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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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근원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은 것을 장령(長嶺)이라 하고, 백두산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 흑룡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하며, 백두산의 남쪽 물이 동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두만강이라 하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압록강이라 한다.
두만강 안쪽은 다 옥저로, 북ㆍ동ㆍ남의 세 종류가 있는데, “동옥저는 동서로 좁고 남쪽으로 길어 천 리는 됨직하며, 동쪽으로는 큰 바닷가이고, 북쪽으로는 읍루ㆍ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해 있다.” 했으며, “읍루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했으니, 동쪽 바닷가와 예맥은 지금의 영동 땅이므로, 그렇다면 동옥저는 철령(鐵嶺) 바깥쪽과 북청(北淸) 남쪽이 바로 그 땅이었던 것이다.
“북옥저는 늘 숙신이 배를 타고 침략해 왔다.”고 했으며, “숙신을 혹 읍루라고 일컫기도 한다.” 하니, 대개 두만강 밖에 있던 것으로, 북옥저가 바로 이☐(利☐) 밖이었다면 숙신이 배를 타고 침략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남옥저는 지금의 영동인 예맥 이외에는 다른 땅이 없으니, 한 나라가 사군(四郡)을 설치할 때에, “옥저는 현도(玄菟)에 속하고 예맥은 임둔(臨屯)에 속했다.” 했으나 기실은 남옥저였던 것이다.
발해의 전성기에, “옥저는 동경이 되었다.” 했는데, 그것은 두만강이 서북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옥저는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숙신ㆍ읍루ㆍ물길(勿吉)ㆍ철리(鐵利)ㆍ말갈은 다 두만강 바깥 백두산 북쪽에 있던 여러 종족으로, “철리가 가장 멀어 흑수(黑水)에 가까웠다.” 했으니, 그렇다면 뒤에 흑수ㆍ말갈ㆍ동여진이라 했던 것이 다 그의 별칭이며, 장령 서쪽에 있던 것들도 또한 말갈ㆍ여진이라고 칭했으니, 지금의 평안도 압록강 안팎으로부터 대동강 원류에 이르기까지가 다 그 땅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경계가 강원도 서쪽 신라에까지 이르러, 비록 영(嶺)으로 막혔다 하나 당시에는 버려 두어 묵는 땅이 많았으므로 그 틈을 타서 침략해 왔던 것이다.
부여라는 것은, 발해가, “부(府)를 설치하고 글안을 방비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요서(遼西)의 연(燕) 나라에 가까운 땅인 것이며, “그 왕 해부루가 동해로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다.” 했으니 그 바닷가에는 옥저가 있었을 뿐이므로, 대개 바다에 가깝다는 말인 것이며,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한 것은 지금의 양덕(陽德)ㆍ성천(成川) 등지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이 성을 쌓는데, “부여성으로부터 시작했다[自扶餘城].”는 것이 이곳이며, “고주몽이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니, 비류(沸流)와 서로 접해 있었으므로, 그 왕은 ‘나는 후미진 바닷가에 있다.’” 하였으며, “교제사 지낼 돼지를 놓침을 인해서 국내성을 얻었다.” 했으니, 돼지를 놓친 지역이 극히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국내성은 분명 압록강 서쪽, 지금의 의주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인데, 그 왕이 바닷가라고 한 것은 바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가까운 땅이라는 것이며, 건넜다는 엄호수(淹淲水) 역시 압록강 원류가 아닌가 한다.
본디 부여에서 옮겨왔으므로 동부여라 하기도 하고 졸본부여라 하기도 하나 그 본토는 아니며, 뒤에 백제의 도읍을 부여라 하고 따라서 부여씨(扶餘氏)가 된 것이 그 한 증거이다.
요즘 사람들이 성천을 졸본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며, 발해의 졸빈(卒賓)이 그 땅이 아닌가 한다.
뒤에, “고구려가 국내성으로부터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으나 처음에는 압록강 서쪽에 있었으며 황룡국(黃龍國)을 멸망시켰다.” 했으니, 악비(岳飛)가, “곧바로 황룡부(黃龍府)에 다다랐다.”고 일컬은 것이 그것이며 용강현(龍岡縣)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요즘 요서에 아직 황룡성(黃龍城)이라는 것이 있으니, 고구려라는 것은 의주 바깥 말갈 서쪽이 바로 그 땅이 아니었나 싶다.
고구려의 구(句) 자는 ‘태백구오(太伯句吳)’라는 구자와 같은 것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 주몽(朱蒙)이 국호로 삼아 그 가운데 덧붙이고 스스로 높여 고(高) 자를 얹었으며 아울러 성으로 삼은 것이니, 요즘 사람들의, “산이 높고 물이 곱다[山高水麗]는 뜻”이라는 것은 지어낸 말이다.
왕망(王莽) 때에 반항한다고 침략하여, 하구려(下句麗)로 강등시킨 것만 보아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뒤에 자칭 ‘고신(高辛)의 후예’라는 것은 더욱 극히 탄망(誕妄)한 소리이며 왕씨(王氏)가 계승하여 국호를 삼았으니 우스운 노릇이다.
[주-D001] 발해황룡(渤海黃龍)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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