鴨綠輕舟通屬國이라, 압록강의 가벼운 배로 외국을 통하란 말이요,

2022. 12. 16. 23:12백두산

십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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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년간의 세온 배오  글을 삭여시니  귀예 압녹경쥬통쇽국(鴨綠輕舟通屬國)이라 여시니압녹강의 가야온 로 외국을 통단 말이오 글졔 쇼도호과관을 내노라 여시니 아국의 신을 갓다가 지은 배라 묘당 벽의 뎨오친왕(第五親王) 십삼친왕(十三親王)의 글을 삭여시니  여러 과의 글을 만히 시나 다 일 거시 업고김(金) 승지(承旨) 조슌(祖淳)의  졀귀  거시 이시니 그 시의 오
구슈황원강녀(枯樹荒原姜女祠)[주:모론 나모와 거츤 언덕의 걍녀에]쳐풍잔일만령긔(凄風殘日滿靈旗)[주:쳐쳐 바람과 쇠잔 날의 령 긔 가득도다]금슈억젼고(今生須憶前生苦)[주:긍의 맛당이 젼의 괴로오믈 각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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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연행록 6 / 기미년(1799, 정조 23)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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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점(紅花站)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길을 나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니, 관장(關長)이 여러 관원(官員)과 벌여 앉아 점검(點檢)하는 것이 들어올 때와 같은 모양이요, 두 관원이 수레 옆에 이르러 역관 김명규(金明奎)에게 사신이 가진 청심환을 얻고 싶다 한다 하거늘, 두 환씩 나누어 주니라. 여러 겹 관문을 나오니, 들에 눈이 허옇고 서북풍이 아주 매우니, 관문 안이 지척이로되, 바람과 기상이 매우 다르니 괴이하더라. 길가 높은 언덕에 비가 하나 있으니, 비 위에 먹으로 써 있기를,

“조선국(朝鮮國) 별선래(別先來) 정월 11일 진시에 지나다.”

하고, 또 그 곁에,

“조선국 선래 2월 13일 지나다.”

하였더라. 칸[汗]의 장대(將臺)에 이르러 부사와 함께 오르니 사면이 각 수십 보 되고 높이가 10여 길이라. 밖에서 보면 사면에 들어갈 곳을 모를러니, 장대에 이르니, 남편으로 작은 무지개문을 내었으니,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지라. 성 밑으로 수십 구멍을 만들어 사람이 몸을 감추게 하였으니, 성안에서 우러러보니, 그 형상이 가마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요, 네모로 세 층으로 놓아 오르게 하였으니, 각 40여 층이요, 성 위에 밖으로 다 성가퀴를 두르고, 사이사이 돌로 구멍을 뚫었으니, 기치(旗幟)를 박았던 곳이라. 사면을 바라보니, 남은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끝이 없고, 서는 담이 둘러 먹줄을 친 듯하고, 북으로 군산(群山 뭇 산)이 둘렀으되 그 가운데 높은 곳은 각산사 있는 곳이라 하며, 동은 요동(遼東)들이 끝이 없이 뵈니, 이곳의 보이는 것이 천하 장관이라 일컬을지라. 바다와 장성과 요야(遼野)와 군산이 한곳에 모여 서로 웅장(雄壯)함을 다투니, 다른 곳에서 얻지 못할 것이러라. 이는 혹 이르되, ‘오삼계(吳三桂)가 쌓은 것이라.’ 하여, 혹 오왕성(吳王城)이라 이르며, 혹 오영성(吳營城)이라 일컫는다 하고, 혹 이르되, 칸[汗]이 군사를 거느려 장성 아래 이르러 하룻밤 사이 쌓아서 6만 군사를 감추었다 하니, 자세히 모를러라. 오삼계가 성을 헐어 청병(淸兵)을 들인 곳이 더욱 분명히 보이니, 그때 일을 상상하자, 마음에 쓸쓸하고 구슬픔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관문(關門) 안 수 리(里)에 석하(石河)란 땅이 곧 오삼계가 이자성(李自成)을 쳐부수던 곳이라.

《명사(明史)》에 기록하였으되, 오삼계 영원(寧遠)에서 관에 들어온 지 열사흘만에, 경사(京師)가 함몰(陷沒)하고 황제와 황후가 다 죽으심을 듣고, 드디어 삼군(三軍 오삼계의 군사)이 상복을 입고 통곡한 후에 청의 군사를 빌려 이자성을 치는데, 원군(援軍)의 격서(檄書)를 전하니 이자성이 듣고 크게 놀라, 오삼계의 아비 양(襄)을 협박하여 오삼계에게 편지하여 부르게 하고, 옛 장수 강종으로 하여금 또한 항복하기를 권하고 태자가 평안함을 이르니, 오삼계가 대답하지 아니하고 그 아비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아비가 충신이 되지 못하였으니, 오삼계가 어찌 능히 효자가 되리오? 아비와 함께 영결(永訣)함을, 청하건대 오늘부터 하리라.”

이 편지가 가니 이자성이 더욱 두려워하더라. 오삼계가 충의로써 장사(壯士)를 깨우쳐 장려하여 말하기를,

“내가 불충(不忠) 불효(不孝)하니, 무슨 낯으로 천지에 섰으리오?”

하고, 스스로 목을 찌르고자 하니, 그 부하가 다 말하기를,

“장군이 어찌 이에 이르나뇨? 우리가 마땅히 죽기로써 싸우리라.”

하여, 이에 경성 내외(京城內外)가 다 오삼계의 격서를 붙이되,

“사민(士民)으로 언약(言約)하여 상복을 입고 원수(怨讎)를 갚으리라.”

하니, 도성 백성이 다 일시에 흰 두건을 가만히 지으니라. 이자성이 육만 병을 거느려 동으로 향할 때, 태자(太子)와 영왕 오왕(吳王)을 데리고 오니, 도적의 날랜 군사가 불과 수 만이라, 이르는 바의 헛소리에 위협(威脅)하여 항복을 받으나, 일찍이 큰 도적을 겪지 않았다가 이에 이르러 변방(邊方) 군사가 거세다는 소문을 듣고 한심(寒心)하지 아니할 이 없더라. 이자성이 승패(勝敗)를 한번 싸움에 결단할 줄 알고, 여러 영(營)을 이어 함께 나오니, 오삼계가 날랜 것을 다하여 싸우는데, 하나가 백을 당하지 아닐 이 없는지라, 도적 수천을 죽이되, 도적이 또한 용을 쓰며 첩첩이 진입하고 이자성은 태자를 끼고 높은 언덕에 올라 말을 세우고 싸움을 보더니, 도적이 사면으로 오삼계의 군사를 에워싸되, 오삼계의 군사가 동서로 달려들어 거침없이 나가니, 도적이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더라. 청병이 이에 오삼계의 오른편으로 에워 내달으니, 향하는 곳마다 위력에 눌려 굴복하여 당해 내지 못하는지라, 이자성은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모든 도적이 크게 흩어져 스스로 밟혀 죽는 자가 수 만이라. 모든 군사가 길을 나누어 따라, 그 대장 다섯을 죽이고 무수히 그 군수품을 얻으며, 북경까지 쫓아가 여러 번 쳐부수니, 이자성이 오양(吳襄)을 죽여 머리를 높이 대에 달아 성 위에 세우고, 양의 가속(家屬) 38명을 다 죽이고, 궁궐을 불지르고, 산서(山西)로 달아났다 하였더라. 《시강원일기(侍講院日記)》에 그때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되,

“갑신년(1644, 인조 22) 4월 구왕(九王)이 군사를 거느려 서를 침범하는데, 세조(世祖)가 따라가시니 옛 장성을 지나 몽고 지방으로 가더니, 심양에서 떠난 지 이레 만에 한 곳에 다다르니, 구왕이 군사를 머물고 나아가지 아니하거늘, 세조가 역관으로 하여금 탐지하라 하시니, 이르되, 산해관의 총병(摠兵) 한 사람이 유격장군(遊擊將軍) 한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산서의 유격이 황성을 침범하여 지난달에 황성이 이미 함몰(陷沒)하니, 황제 스스로 목매어 죽으시고 황후와 비빈(妃嬪)이 다 불에 타 죽은지라, 나랏일이 이에 이르니 이미 할 일이 없고, 적의 선봉이 동을 가르치니 여러 군현(郡縣)이 와해(瓦解)하되, 오직 산해관이 홀로 남았으되, 병력이 약하여 형세가 배겨 내기 어려운지라. 들으니, 대왕이 이미 군사를 내었다 하니 만일 이때가 되어 와서 구원한즉 관문을 열어 맞을지니, 대왕이 한 번 관에 든즉 북경을 날을 기약(期約)하여 정할지라. 원컨대 빨리 군사를 나오라 하니, 구왕이 허실(虛實)을 알려 하여 그 처제(妻弟)로 하여금 중원(中原) 항복한 장수 한 사람과 함께 산해관에 가게 하고, 그 항복한 장수는 진중에 머물려 두었다 하되, 군사상의 기밀이 매우 비밀(秘密)하여 자세히 몰라 하더니, 저녁때에 아역(衙譯)이 와 구왕의 말을 전하되, ‘내일 마땅히 배조(拜朝)하러 갈 것이니 세자의 일행 인마도 능히 갈 자를 뽑아 따르게 하라.’ 하였더라.

닷새 만에 연산역(連山驛)에 가 머물렀으라 하더니, 오삼계 또 장관을 구왕에게 보내어 이르되,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쳐왔으니 원컨대 군사를 재촉하여 나와 구원하라.’ 구왕이 즉시 떠나 달려가며 세자를 재촉하여 따르라 하니, 항상 매우 급하여 일행이 미처 밥을 다 못 먹고 날이 새도록 달려 사하보성(沙河堡城) 밖에 다다라 구왕이 군사를 머물려 잠깐 쉬니, 세자는 밭두둑에 앉아 밤을 새우시고, 이튿날 이에 다시 가서 관문 15리 동문에 가 머무르니 한 밤에 200리를 가니라. 청병이 갑옷을 입고 밤중에 진을 옮기니, 철마 소리가 늦도록 들리고, 산해관 위에서 포 쏘는 소리가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아니하더라. 이튿날 해 뜰 무렵 청병이 나아가 관문 5리 밖에 가니, 이날은 4월 21일이라. 관문 안에 연기와 티끌이 자욱하고 총소리가 크게 나더니, 이윽고 오삼계가 제장 10원(員)과 갑옷 입은 병사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성에 나와 맞으니, 구왕이 진중(陣中)에서 절을 받고, 군사를 이유로 성 밑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앉으니, 청인ㆍ한인이 자주 왕래하더니 이윽고 청병 좌우진(左右陣) 일시에 달려 관문을 들자, 흰 기를 성 위에 세우니, 구왕이 뒤미쳐 들어갔더라. 그때에 오삼계, 이자성이 한편 접전하고 나왔는지라. 두 편 진이 성 서편 수 리 동안 묘당 앞에서 싸우니, 철환(鐵丸)이 어지러이 성문에 박히는지라, 세자가 성 밑 나물밭 사이의 담을 의지하여 앉았으니, 구왕 있는 데와 대여섯 집 사이라. 구왕이 세자를 청하거늘, 세자가 보시니, 자리를 미처 정하지 못하여서 구왕이 즉시 일어나 말을 타며 말하기를, ‘세자는 나를 따라 싸우는 곳으로 오라.’ 세자가 마지못하여 따라가 갑옷과 투구를 갖추시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서 계시니, 총 소리가 우레 같고 화살이 비 오듯이 박혔더라. 청병이 세 번 주라(朱喇 붉은 칠한 악기) 불고 세 번 납함(吶喊 여러 사람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것)하고 일시에 적진을 충돌하되, 화살을 서너 번 쏘고 칼 빛이 번득이더라. 이때 바람이 크게 일어나는지라. 일찍 누런 티끌이 점점 멀어가니, 비로소 적병이 패하여 내닫는 줄을 알러라.

식경(食頃)은 하여 전장(戰場)이 비어지고, 쌓인 주검이 서로 베개하여 너른 들에 깔렸더라. 도적이 달아나는 것을 성 동편 바닷가에 쫓아가 죽이니,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몇 만인 줄을 모를러라. 초경(初更)에 구왕이 돌아와 전장 근처에 진을 치니, 세자는 또한 따라 진 밖에 와 주무시니라. 이튿날 구왕이 섭정왕(攝政王)을 일컫고 군중에 명하여 백성을 침노하지 못하게 하니, 오삼계가 일찍 머리를 깎고 수만 기를 거느려 청병과 함께 일시에 서로 북경에 이르니, 이자성이 벌써 궁궐을 불지르고, 궁녀와 보화를 노략하여 가지고 남으로 달아났더라. 북경 사람이 이르되, 산해관 싸움에 기병 10만과 보병 20만이 넘었더니, 싸움에 패한 후 다만 6000여 기가 남았더라. 또 역관 최후원(崔厚源)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뫼셔 심양에 있다가 세자 행차에 따라가 그때 싸움굿을 보고 전하는 말에, 이자성은 석하(石河) 남편에 진을 치고, 청병은 각산사(覺山寺) 아래 진을 쳤으되, 구왕이 날쌔고 용감한 기병 1만을 세 ()에 나누어 한 운을 먼저 들여보내어 충돌하니, 적진이 두 편으로 갈라지며 청병이 한 사람도 쏘지 아니하고 가운데로 깨쳐 지내고, 또 한 운은 들여보내어 충돌하되, 또 한 사람도 화살을 빼어 쏘지 아니하더라. 그제야 셋째 진을 들여보내니, 그 먼저 보낸 두 운이 적진 뒤를 일시에 포위하여 전후 협력하니, 잠깐 사이에 도적의 주검이 들에 깔렸더라.”

하니, 이 두 말이 《명사(明史)》와 함께 상략(詳略 자세함과 요약된 것)이 다르나 대개는 한가지라. 이것으로 보면 그때 형세를 가히 생각할지라.

오삼계가 청에 항복한 지 30년 후에 운남(雲南)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수년 사이에 여섯 성을 얻고 군사가 형주(衡州)까지 이르니, 천하 호걸이 동참하여 북경이 진동하니 파죽지세(破竹之勢)러라. 오삼계가 죽으니 군사가 청 나라에 패한 것이 되니라. 전하는 말에, 오삼계가 운남에 있어 장사(壯士) 대접을 잘하고, 항상 술을 먹으면 희자 놀음을 베풀어 악무목(岳武穆)의 일을 시키고 보다가 크게 울면서 ‘천하가 이렇듯이 되었으니 나는 마침내 사람이 아니라.’란 말을 마치며 울고, 울기를 다하면 다시 술을 먹더라 하니, 그 뜻을 가히 볼지라. 청병을 맞아들인 것과 그 아비가 죽었으나 따라 죽지 못하고 운남에서 일어나니 스스로 참혹함이 사람의 뜻에 차지 못하나, 마침내 또한 호걸(豪傑)이라 이를러라.

장대(將臺)에서 8리는 가서 강녀묘(姜女廟)에 이르니 부사가 마땅히 이르신가 하여 내 또한 들어가니, 부사는 바로 숙소에 갔더라. 묘당 지형이 평지에 우뚝하게 높은 바위가 생기고 묘당을 그 위에 지었으니, 멀리 바라보니 또한 눈에 보이는 범위가 시원하게 터졌더라. 묘당 앞의 비에 대강 써 있으되,

“진 나라 때의 동관(東關) 땅이 위태한지라, 칠랑(七郞)이란 사람이 요동에 따라 성을 쌓더니, 오래 돌아가지 못하였거늘, 그 아내가 성은 허씨(許氏)요, 이름은 맹강(孟姜)이니, 이곳에 찾아 이르러 지아비가 죽은 줄을 알고, 그 해골(骸骨)을 얻어 등에 지고 바다에 빠지다.”

하며, 또 이르되,

“바다에 세 석인(石人)이 있으되, 하나는 서고 하나는 누웠으니, 선 것은 곧 정녀(貞女)요, 누운 것은 칠랑이라.’ 또한 그 무덤이 있다.”

하고, 또 한 비에 쓰였으되,

“허맹강(許孟姜)의 지아비는 범랑(范郞)이라.”

하였으니, 어느 말이 옳은 줄을 모를러라 하였으니, 묘 안에 여자의 소상이 곧 맹강이라. 탁자에 걸터앉은 형상이라. 머리에 반포(半布) 같은 비단으로 두건을 만들어 썼으며, 몸에 흰 비단옷을 입었고, 한 손은 무릎을 짚은 거동이요, 얼굴이 옥 같으되 눈을 들어 먼 데를 바라보며 입을 비죽거려 울고자 하는 모양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참혹하게 하였더라. 앞에 두 동자가 모셨으니, 좌편 동자는 손에 우산(雨傘)을 가지고, 우편 동자는 각대(角帶)를 들었으되 우리나라 제도와 흡사하니, 이는 다 정녀의 자식인가 싶더라. 우산은 먼 길을 오는 거동이요, 각대는 범랑이 항상 띠던 것을 가지고 오는 거동을 본뜬 것이더라. 묘당에 ‘청풍정절(淸風貞節)’을 현판하였으며, 좌우 기둥에 각각 한 구(句) 글을 새겼으니, 일렀으되,

진황이 어디 있느뇨 만리장성이 원망으로 쌓았고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강녀가 죽지 않았도다 천년의 조각돌이 곧은 정을 머물었도다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留情

곁에 송 승상(宋丞相) 문천상(文天祥)의 글씨라 썼더라. 소상 옆으로 또 한 비가 있으니, 만력 연간에 세운 것이요, 또 글을 새겼으니, 한 구에 ‘압록경주통속국(鴨綠輕舟通國)’이라 하였으니, 압록강의 가벼운 배로 외국을 통하란 말이요, 글제는 ‘소도호과관’을 내노라 하였으니, 우리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지은 것이라. 묘당 벽에 제오친왕(第五親王), 십삼친왕(十三親王)의 글을 새겼으니, 또한 여러 지나가는 손의 글을 많이 썼으나, 다 읽을 것이 없고, 김 승지(金承旨) 조순(祖淳)의 한 절구(絶句) 쓴 것이 있으니, 그 시에,

마른 나무와 거친 언덕의 강녀사에 / 枯樹荒原姜女祠
처처한 바람과 쇠잔한 날에 영한 기가 가득하도다 / 凄風殘日滿靈旗
금생에 마땅히 전생의 괴로움을 생각할지라 / 今生須憶前生苦
인간의 이별이 있게 말지로다 / 莫遣人間有別離

글 아래에 해동소행인(海東小行人) 김조순(金祖淳)이라 썼더라. 묘당 뒤에 작은 절이 있으니, 세 금상(金像)을 앉혔으니 하나는 부처요, 둘은 속인의 상(像)이라. 누구를 위한지 모를러라. 불전(佛殿) 뒤에 큰 바위가 있으되, 가운데로 길이 있고, 두 사이 사람의 발자국이 돌에 흔적이 완연하니, 이는 정녀가 지아비를 바라노라 오르내리던 발자국이라 하고, 동편으로 ‘망부석(望夫石)’ 석 자를 쓰고 곁에 ‘태원 백휘(太原白輝)는 서(書) 하노라.’ 하였으며, 건륭 황제(乾隆皇帝)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새기고 주홍(朱紅)을 메웠으니, 그 시에,

처처한 바람에 대와 나무가 사양에 부르짖었으니 / 凄風竹樹吼斜陽
오히려 슬픈 소리를 지어 제랑을 속이는도다 / 尙作悲聲弔七娘
천고의 절의 자랑하고자 마음이 없고 / 千古無心誇節義
일신이 죽기를 둠은 강상을 위함이로다 / 一身有死爲綱常
유래있는 이 땅에 강녀를 일컬었고 / 由來此地稱姜女
다 이르되 당년에 기량에 울었다 하놋다 / 盡道當年哭杞梁
민이호 …… [原文缺]
이곳을 그릇 전하였은들 무슨 방해로우리오 / 訛傳是處也何妨

이 시 밖에 또 두 시를 별도로 새겨 바위를 파고 넣었더라. 망부석 북편으로 또 한 바위 대서(大書)로 ‘진의정(振衣亭)’ 석 자를 새겼으며, 둥근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여럿이니, 수십 년 전에 황제가 정자를 지었더니 즉시 무너졌다 하더라. 묘당을 둘러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북으로 바라보니 여러 산이 연속하여 땅에 서리이고, 산기슭을 장성이 둘렀으니, 또한 아주 신기한 구경이러라. 앞으로 또 묘당이 있고 네 부처를 앉혔으니, 혹 품에 어린아이를 안았으며, 혹 사람의 눈을 들었으니 보기에 괴이하더라. 뜰에 여러 비가 있으되, 이를 보지 못할러라. 이날 16리를 가서, 팔리보(八里堡) 최가(崔哥)의 집에 숙소를 정하니라.

[-D001] 구왕(九王) : 

청 세조의 아홉째 아들 파포태(巴布泰)이다.

[-D002] 섭정왕(攝政王) : 

임금이 연소하거나 질병 또는 기타 사유로 정무를 돌보지 못할 경우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사람이다.

[-D003] 소현세자(昭顯世子) : 

조선 인조(仁祖)의 장남으로 이름은 조(

), 소현(昭顯)은 시호이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청 나라에 잡혀갔다가, 명을 정벌하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었다.

[-D004] () : 

부대(部隊) 단위로 떼[隊]ㆍ패[群]를 일컫는다.

[-D005] 누운 …… 칠랑이라 : 

대본이나 기타본에 모두 누락되고, 단 한본(漢本)의 ‘臥者卽七郞’에 의해 보완한다.

[-D006] 제랑을 속이는도다 : 

한본 ‘弔七娘’에 해당되는 문구의 풀이로써, ‘자기 낭군을 조상한다.’의 오류인 듯하다.

[-D007] 七娘 : 

‘칠랑’의 ‘칠’ 자는 대본에 ‘제’ 자로 되어 있으나, 한본에 의하여 수정했다. 문체로 보아 ‘칠’ 자가 타당할 듯하다.

[-D008] 기량에 울었다 : 

춘추(春秋) 시대에 기량(杞梁)이 전사했는데, 그 아내가 성(城)에서 슬피 울매 그 성이 무너졌다는 고사가 있다.

[-D009] 민이호 :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민이호 ……’ 석 자가 있는 부분에 ‘길이 사람의 천성이 누구나 아름다운 덕(德) 좋아함을 보리니.[長見秉彛公懿好]’의 구절이 있다.

[-D010] 사람의 눈을 들었으니 : 

‘사람의 눈알을 손바닥에 받쳐 들었으니’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