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2. 23:29ㆍ역사적 사실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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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희종 천계제(明 熹宗 天啓帝, 1605년 12월 23일(음력 11월 14일) ~ 1627년 9월 30일(음력 8월 22일))는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재위:1620년 ~ 1627년). 휘는 유교(由校)이다. 태창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효화황태후 왕씨(孝和皇太后 王氏, ? ~ 1619년)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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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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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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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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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릉(德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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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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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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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청태조
천명제 (1559.02.21.~1626.09.30.)
후금을 건국한 인물이자
청나라의 초대황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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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 별집 제6권 / 부록(附錄)
연보(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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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1627) 천계 7년 금상 5년
○ 선생의 나이 65세이다.
○ 1월 1일 기사일에 망궐하례(望闕賀禮)를 올리는 반열에 참여하였으며, 사전(四殿)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 5일 계유일에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 죽은 아들을 장사 지낼 수 있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은 후사(後嗣)를 이을 자식이 많지 않아 단지 두 아들만 있을 뿐인데, 두 해 사이에 서로 잇달아서 요절하였습니다. 집안마다 어느 집인들 화환(禍患)이 없겠습니까마는, 참혹스럽기가 신의 집안처럼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신은 지난해 가을에 분황(焚黃)하는 일로 말미를 받았으나 곧바로 질병이 온몸을 감싸고 있고, 또 계속해서 서쪽 변경에서의 경보가 잇단 탓으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롭게 내리신 말미를 받았던 바를 인하여 돌아가서 복토(復土)를 하는 날에 아울러서 아들과 영결(永訣)하고자 합니다. 이는 참으로 부자지간의 절실한 지정(至情)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애통스럽고도 절박한 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신의 직임을 해임하도록 명하소서. 그리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가서 간절한 저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신다면 몹시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상소를 살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혹스러움에 놀랐다. 아, 하늘의 도가 고르지 않음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그러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원은 다 갖추어 둘 필요가 없고 오직 적임자만을 임용하여야 한다.’ 하였다. 경이 맡고 있는 논사(論思)하는 직임은 결단코 가벼이 체차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니 완강하게 사양하지 말고 기일에 맞추어 내려갔다가 곧바로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말미를 주고 말을 지급해 주라.” 하였으며, 또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정경세가 올린 상소를 보니 몹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 고을로 하여금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제급(題給)해 주게 하여 유신(儒臣)을 잘 대우하는 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가난으로 인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걱정을 없게 해 주라.” 하였다.
○ 6일 갑술일에 대궐에 나아가 호당(湖堂)의 별제(別製)를 고과하였다.
○ 14일 임오일에 어가를 호종하여 혼궁(魂宮)에 나아가 상제례(祥除禮)를 거행하였다.
○ 16일 갑신일에 조정을 하직하였다.
○ 20일 무자일에 청주(淸州)에 도착하여 오랑캐의 기병이 변경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경성(京城)으로 되돌아갔다.
○ 22일 경인일에 수원(水原)에 도착하여 호소사(號召使)로 삼으라는 명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24일 임진일 아침에 대궐에 나아가 숙배(肅拜)하였다. 인견(引見)하는 데 입시하였다. 저녁에 또 인견하는 데 입시하였다.
이날 세자(世子)가 분조(分朝)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 25일 계사일에 호소사가 되어 조정을 하직하였다. 도성을 나와 양재역(良才驛)에서 묵었다.
그다음 날에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윤우(李潤雨), 강대진(姜大進), 박한(朴𤥚)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선생을 수행하였다.
○ 2월 경자일 - 3일이다. - 에 상주(尙州)에 도착하여 도내(道內)에 통유(通諭)해 군병과 군량을 끌어모았으며, 방백으로 있는 김시양(金時讓)과 만났다.
○ 4일 신축일에 선산(善山)에 도착하여 호소사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만났다.
○ 8일 을사일에 옥성(玉成)에 도착하여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이때 올린 서장은 모두 문집에 나온다.
○ 9일 병오일에 비로소 집에 도착하여 둘째 아들 학(㰒)의 상에 곡하였다. 다시 옥성으로 돌아가서 묵었다.
○ 14일 신해일에 함창(咸昌)을 순행(巡行)하였다.
○ 16일 계축일에 용궁(龍宮)을 순행하였다.
○ 17일 갑인일에 예천(醴泉)을 순행하였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 20일 정사일에 안동(安東)을 순행하였다.
○ 27일 갑자일에 용궁에 도착하여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 3월 기사일 - 2일이다. - 에 상주에 도착하였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 8일 을해일에 오랑캐들이 물러가 군사를 파한다는 유지(有旨)를 받았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하여 논하였다.
선생이 이미 격문(檄文)을 도내에 돌리고, 또 친히 열읍(列邑)을 순행하면서 사람들을 고무시켰는데, 열흘 남짓한 사이에 원근에서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이에 호소사 장공(張公)과 협의하여 군사를 사열하고 군량을 조달해 세 부대로 나누어 잇달아 전진해 한강(漢江)을 방수(防守)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곧바로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맺기로 이미 결정하여 드디어 오랑캐들이 물러갔으므로 군사들을 파하여 돌아가서 농사짓게 하였다.
○ 12일 기묘일에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창에서 묵었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 13일 경진일에 문경(聞慶)의 희양사(曦陽寺)에서 묵었다. 유지(有旨)를 받고는 순행을 중지하였다. 다시 함창으로 돌아갔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유지 가운데, 다시 오랑캐들의 형세를 살피고 있으니 모여 있으면서 변란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 24일 신묘일에 상주에 도착하여 소명(召命)을 받았다. 서장을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 28일 을미일에 맏아들 심(杺)에 대한 참최복(斬衰服)을 벗었다. 이날 바로 길을 떠났다.
○ 4월 계묘일 - 7일이다. - 에 강도(江都)에 도착하여 복명(復命)하였다.
차자를 올려서 강홍립(姜弘立)을 주벌하라고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들과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 올리지 않았다.
○ 10일 병오일에 대가(大駕)가 강도를 출발하였다. 어가를 호종하여 통진(通津)에 도착하였다.
○ 11일 정미일에 어가를 호종해 양천(陽川)에 도착하였다.
○ 12일 무신일에 어가를 호종해 경성(京城)으로 돌아왔다. 종묘(宗廟)에 제사 지내는 데 배행(陪行)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 19일 을묘일에 인견하는 데 입시하였다.
○ 5월 1일 병인일에 차자를 올려 일에 대해 논하였다.
이 당시에 교리(校理) 조경(趙絅)이 올린 상소를 들인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회보(回報)하지 않았으며, 대신이 또 헌의(獻議)한 것이 있었는데도 살펴보지 않았다. 선생이 이에 동료들과 더불어 차자를 올린 것이다. 그 차자에 대략 이르기를,
“임금의 덕은 간언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자신의 지혜만을 쓰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이 없습니다. 조경이 올린 상소에 대해서는, 그의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개는 의당 성상께서 장려해 주어야 마땅한데도 버려두고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묘(私廟)의 혼궁(魂宮)을 지영(祗迎)하는 한 가지 절차에 있어서는, 대신이 말한 바도 따라서는 안 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물으시고서도 그 말을 따르지 않은 채 내버리시기를 마치 소각사(小各司)에서 올린 초기(草記)에 대해 무시하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할 것이라면 혼자서 모든 국사를 처리하실 일이지, 어찌 대신과 대간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태평스러워서 별다른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음대로 자신의 뜻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나라의 위급과 존망이 한순간에 결정되는 오늘날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잘 알았다. 차자에서 한 말을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또 차자를 올려서 시무(時務)에 대해 논하였다.
그 차자에 대략 이르기를,
“예로부터 비상한 변고를 만난 임금들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우고 비상한 계책을 정한 다음에야 능히 쇠망한 것을 부흥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아, 화를 되돌려 복이 되게 해 마침내 비상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참으로 혹시라도 뜻을 먼저 세우지 않거나 계책을 평소에 정해 두지 않은 채, 무너져 쓰러진 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면서 스스로 자강(自强)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끝내는 반드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의 이 오랑캐들의 화란은 어찌 차마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변경을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하여 여러 성들이 쉽사리 무너진 탓에 서쪽 지방의 생령(生靈)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군부(君父)로 하여금 몽진(蒙塵)을 하게 하고 묘사(廟社)로 하여금 파천(播遷)을 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아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위태롭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오랑캐들이 물러간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안일에 빠져 조용하기만 하여, 비상한 거조를 해서 중외(中外)의 귀신과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하고, 충신과 의사(義士)들의 기운을 격동시키는 일이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신료들을 드물게 접견하시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직언을 듣기 싫어하시는 것 역시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거조를 모두 평소와 차이가 없게 하는바, 신들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국가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는 백성들을 단결시켜서 다시금 흥성해질 수 있는 법이며, 많은 근심을 겪고 난 다음에는 거룩한 마음을 열 수가 있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우환을 겪은 뒤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참으로 밤낮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의연하게 뜻을 분발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럭저럭 지내려는 마음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소서. 그럴 경우 전하의 뜻은 이미 선 것입니다. 장수는 부득불 잘 선발하여야만 되고, 군사들은 부득불 잘 조련하여야만 되고, 군량은 부득불 미리 쌓아 놓아야만 되고, 병기는 부득불 미리 다듬어 놓아야만 됩니다. 그럴 경우 비록 군사들을 이끌고 깊이 들어가 오랑캐들의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뒷날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을 경우 튼튼하게 지키면서 그들을 물리칠 수가 있어, 지난날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위(衛)나라가 적(狄)에게 멸망당하였을 적에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몇 해 동안 야영(野營)하였으나, 마침내 혁거(革車) 300승(乘)과 암말 3000필을 보유하게 되자 적(狄)이 감히 다시 엿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패전하여 회계(會稽)에 머물면서 오(吳)나라를 신첩(臣妾)처럼 섬겼지만, 10년 동안 백성들을 끌어모으고 10년 동안 백성들을 가르쳐서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어 그 수치를 씻었습니다. 이들이 무슨 정신과 무슨 근골(筋骨)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공적을 이룩하였겠습니까. 문공이 대포(大布)의 옷을 입고 대백(大帛)의 갓을 쓴 것과 구천이 앉아서는 쓸개를 맛보고 길에서는 성난 개구리에게 허리를 굽힌 것을 보면, 두 임금이 각고(刻苦)의 마음을 어느 한순간도 일찍이 늦추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은 참으로 이미 후회스러움을 금할 수 없으며, 말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핑계를 댈 만한 점은 있습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굽히고 치욕을 참은 것이 어찌 작은 것을 굽힘으로써 큰 것을 펴기를 생각한 것이 아니겠으며, 잠시 동안의 치욕을 참아서 오랫동안 영예를 누리고자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때에 부지런히 힘쓰면서 밥 먹고 잠자는 것마저 잊은 채 자강(自强)할 계책을 세우지 않아, 이 뒷날에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게 한다면 군신 상하가 잇달아서 서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며, 설령 요행히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심하게 굴욕을 당함이 오늘날보다 장차 열 배는 더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하 후세에서 모두들 전하를 보고 그럭저럭 편안하게 지내다가 구차하게 살아남은 임금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런 뜻을 굳게 세워 시종 게을리하지 마시어 마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발을 붙이고 선 것처럼 하고, 풍랑이 이는 가운데 물이 스며드는 배에 몸을 의탁해 있는 것처럼 하소서. 그리하여 눈앞의 안일에 젖어 뒷날의 근심을 잊지 마시고, 형식적인 작은 예절을 따르느라 원대한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말한 뜻을 잘 알았다. 경들의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심을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에서 진달한 일은 올바른 말과 훌륭한 계책 아닌 것이 없는바, 내가 비록 형편없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의논해 조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5일 경오일에 어가를 호종하여 성 밖에서 자전(慈殿)을 맞이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 6일 신미일에 인견하는 데 입시하였다.
○ 7일 임신일에 이조에서 호 태감(胡太監)의 접반사(接伴使)로 차임하라고 계청하였는데, 특명으로 고쳤다.
이는 대개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 선생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 11일 병자일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인피(引避)하여 체차되었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때 올린 차자는 문집에 나온다. 상이 비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지금은 사퇴할 때가 아니니 모름지기 굳게 사양하지 말고 몸조리를 하면서 직임을 살피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차자에서 한 말을 살펴보건대, 병조에서 잘못한 바가 없지 않다. 해당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모두 추고(推考)하라.” 하였는데, 이는 헌장(憲長)에서 체차된 뒤 3일 만에 비로소 서추(西樞)에 제수하였기 때문이다.
○ 25일 경인일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6월 병오일 - 11일이다. - 에 차자를 올려서 시무(時務)에 대해 논하였다.
그 차자에 대략 이르기를,
“임금이 이미 치욕을 당하였고 종사가 장차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민생은 곤궁해져서 병사들을 조발할 수가 없으며, 재력은 고갈되어서 군량을 축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조석 간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올 것인데도 그들을 막아 낼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설령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분주하게 오가고 온 힘을 다해 급급하고 황황하게 하기를 마치 불 속에서 타는 자를 구해 내고 물속에 빠진 자를 구해 내듯이 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목숨을 구해 낼 수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현재의 기상은 느긋하고 느슨하기만 하여 그럭저럭 범범히 지내면서 평상시와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까. 이에 심지어는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정세를 살펴보는 적들로 하여금 곧바로 망할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위급한 줄을 모른다는 기롱을 하게 하고 말았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생각건대 이는 하늘이 장차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여 우리의 혼백을 빼앗아 간 것인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온 세상 사람을 들어 현철하다는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음이 없단 말입니까. 신들이 듣건대, 천하의 모든 일은 어느 하나도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현들께서 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며, 사리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전하께서 덕을 닦고 정사를 시행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한 해가 가면 갈수록 그만큼 게을러지고 있어서, 성경(聖敬)이 항상 날로 올라가는 데에 부족하며, 지기(志氣)가 점차 안일한 데로 흘러갑니다. 이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록 크나큰 난리를 막 겪어 온갖 신고(辛苦)를 다 맛보았으면서도 오히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두렵고 위태롭게 여기기를 은(殷)나라 탕(湯) 임금처럼 하지 못하고, 뒷날의 환란에 대해 삼가는 마음을 가지기를 주(周)나라 성왕(成王)처럼 하지 못하고, 마음을 잡아 깊이 생각하기를 위(衛)나라 문공(文公)처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행을 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이에 대부분 고식적이고 상투적인 데 따라서 해, 고생을 겪고 고통을 참으면서 마음을 분발하여 새로이 혁신시키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천하의 큰 근본이 있는 바가 이와 같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였으니, 신하들이 게을리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잘못되어 날이 갈수록 망하는 길로 달려 나가는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耳目)이고 조정의 기강(紀綱)입니다. 성문(城門)은 열어 놓고 언로(言路)는 막았던 것이 전송(前宋)이 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지금 적이 여전히 경내에 있어 계엄이 풀리지 않은 상황인데도 한마디 말이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곧바로 준엄한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성문을 열어 놓지 않고 언로마저 막은 것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외적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내정(內政)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고, 군사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양곡(糧穀)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오늘날의 일 가운데 이것들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내수사(內需司)의 수입을 탁지(度支)에 돌리기를 청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조종조의 옛 규례이므로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고식적인 것을 편안히 여기고 옛 규례만을 지키고자 하는 견해로, 이미 쇠망한 것을 흥성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는 방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래로 어염(魚鹽) 등에 대해서 세금을 거두고 갈대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따위의 일들에 대해서도 종시토록 망설이기만 하고 계시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열복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군사가 없고 양식이 없어 나라가 보존될 수 없을 경우, 그들이 저축해 놓은 바가 큰 도적들을 위해서 저축해 놓은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삼가 헤아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기미(羈縻)는 조금도 믿을 게 못 된다고 여기시는 것만은 아니어서 적들이 혹 쳐들어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는 듯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어찌 천려일실(千慮一失)이 되지 않겠습니까. 왕회(王恢)는 연(燕)나라 사람 가운데 오랑캐의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로 그가 말하기를, ‘흉노(匈奴)와 화친하는 것은 길어 봐야 몇 해만 유지되는 데 불과하며, 곧바로 약속을 어길 것이다.’ 하였으며, 그 나머지 진(晉)나라와 송(宋)나라의 전철(前轍)은 더욱더 분명하여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자주자(子朱子)는 말하기를,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큰 계책을 저지시키고 변경의 방비책에 대한 일반적인 규례를 무너뜨리는 것은 모두 강화(講和)하자는 설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사람들의 마음은 믿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를 가다듬는 데 느슨해짐을 이른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내탕고(內帑庫)에 있는 돈을 풀어 군향(軍餉)으로 삼으면서 말하기를, ‘이 돈을 오랑캐놈들의 머리와 바꾸겠다.’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란(契丹)의 창궐함이 오늘날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으며, 국사의 위급함은 또 전혀 오늘날과 같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에 능히 사장(私藏)을 풀어서 군용(軍用)으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시행하고 조처한 것은 여기에 부끄러운 점이 있는바, 신들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이로(二路)는 탕패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습니다. 염관(厭冠)을 쓰고서 곡하는 예는 비록 거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조들께서 음악을 듣고서도 즐거워하지 않는 마음을 인해서 향사(享祀)할 적에 우선은 음악을 쓰지 말고, 적들을 평정하고 난 뒤에 정상으로 회복시킨다고 하더라도 역시 선조를 받드는 간절한 정성에 흠결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르내리는 조종들의 영혼께서도 반드시 이렇게 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길 것이며, 풍성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흥경원(興慶園)을 천장(遷葬)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는 효성이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원군(大院君)께서 이곳에 묻혀 계신 지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으며, 애당초 조석 간에 물이 스며들거나 흙이 무너질까 불안해할 걱정이 없습니다. 성인(聖人)의 어버이에 대해 효성을 다하는 도리가 애당초 말단적인 형식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사직을 안정시켜서 국조(國祚)가 무궁토록 이어져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큰 효성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계책을 세우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시다가, 몇 년이 흐른 뒤에 외적이 물러가고 백성이 안정되며 시절은 화평하고 농사는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서 천장하는 예를 의논하소서. 그럴 경우 유명(幽明) 사이에 양쪽이 모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쪽 지방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듣고서는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전하의 마음은 수치를 씻고자 하는 마음이 급하여 비록 지극한 정이 있는 바에 대해서도 모두 정지하였다.’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감발시키고 의로운 기운을 고무시키는 데 보탬이 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차마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백 년 동안이나 예의(禮義)를 지켜 온 나라이며 당당한 천승(千乘)의 군대를 거느린 임금으로서 아래로 오랑캐들과 맹약을 맺고서도 이 오랑캐들로 하여금 종시토록 편안하게 지내게 한다면, 이것은 이미 씻기 어려운 수치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산골짜기같이 큰 그들의 욕심은 채워 주기가 어렵고 변경의 흔단이 쉽게 발생하여 편안하게 지낼 리가 전혀 없는 데이겠습니까.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부끄러움이 있고 난 다음에야 능히 분발할 줄을 알고, 분발할 줄을 알고 난 다음에야 능히 자강(自强)할 수가 있으며, 자강하고 난 다음에는 능히 정령(政令)을 시행하여 그 나라를 보전할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사람의 계책과 노력으로는 결단코 다시금 나라를 회복시킬 가망이 없습니다. 바라는 바는 오직 하늘이 순조롭게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몹시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특별히 친애하는 바가 없고 오직 덕 있는 자만을 도와줄 뿐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덕정(德政)을 힘쓰면서 천심(天心)을 누리는 것에 있어서 털끝만큼이라도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한 가지 호령을 발하고 한 가지 일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먼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마음에 합치할 수 있는 것인가, 합치할 수 없는 것인가?’ 하여, 합치된다면 시행하고 합치되지 않으면 정지시키소서. 그리하여 일마다 이와 같이 하고 날마다 이와 같이 해 나간다면, 높고도 높이 있으면서 날마다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어찌 아득한 가운데에서 묵묵히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신료들이 진언한 것에 대해서 매번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장려하는 말로 답하기는 하십니다. 그러나 시행하고 조처하는 사이를 살펴보면 끝내는 흔쾌히 받아들여 널리 시행하는 실제가 없습니다. 신료들이 전하께 진언하는 것은 본디 그것을 시행하여 공적을 이루게 하여 티끌만큼이나마 성덕(聖德)에 보답하고자 해서입니다. 어찌 한 글자 한 구절의 아름다운 말로 표창하는 영광을 바라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성인께서 이른 바,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는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한 것은 몹시 걱정해야 할 만한 것입니다. 올린 말이 쓸 수 없는 것이면 구차스럽게 아름다운 말로 표창하지 말고, 참으로 그 말이 쓸 만한 말이면 반드시 일을 행하는 데에 드러내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임금의 도에 있어서 몹시 다행이고 나라의 일에 있어서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경들은 모두 논사(論思)하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지극한 의론을 진달하여 나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었으니, 참으로 직임을 잘 수행했다고 하겠는바,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아, 언로(言路)가 막히고, 사의(私意)가 횡행하는 것을 내가 어찌 마음속으로 즐겁게 여기겠는가. 참으로 말에는 공평한 말과 사사로운 말이 있고, 소견에는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사의를 막지 않으면 공의(公議)가 통하지 않고, 지나치고 모자란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잘못이 고쳐지지 않을까 염려되기에 때때로 그 옳고 그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천장(遷葬)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나 역시 그것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비단 길년(吉年)을 잡기가 몹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물(儀物)이 이미 갖추어져 다시 민력(民力)을 쓸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이때에 미쳐서 이장(移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은 실로 편안치 못하였다. 차자 안에서 진달한 바는 나의 절실한 병통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비록 못나기는 하였지만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 잊지 않아 경들의 정성에 부응하겠다.”
하였다.
○ 12일 정미일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 22일 정사일에 인견하는 데 입시하였다.
○ 7월 을해일 - 11일이다. - 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 서평군(西平君) 한공(韓公)의 상에 곡하였다.
만사(挽詞)와 율시(律詩) 두 수가 있다.
○ 25일 을유일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26일 경인일에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어 초수(椒水)에 목욕하고 분황(焚黃)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선생으로 하여금 갔다가 즉시 돌아오게 하였다.
○ 29일 계사일에 정시(廷試)의 독권관(讀卷官)으로서 대궐에 나아갔다.
이때 임득열(林得悅) 등 7인을 뽑았다.
○ 8월 을미일 - 2일이다. - 에 조정을 하직하였다.
○ 11일 갑진일에 안동(安東)에 도착하여 초정(椒井)에서 한두 차례 목욕하였는데, 기운이 감당해 내지 못하여 봉산사(鳳山寺)로 돌아와 머물러 있으면서 몸조리를 하였다.
○ 21일 갑인일에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서 서장을 올려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상이 조리하고서 올라오라고 하였다.
○ 묘소에 올라가 분황제(焚黃祭)를 행하고 사당(祠堂)에 고한 다음 신주(神主)를 고쳐 썼다.
○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서장을 올려 사양하였다.
○ 10월에 이인거(李仁居)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 나갔다.
○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겨 제수되어 소명(召命)을 받았다.
○ 경술일 - 17일이다. - 에 도성에 들어와 숙배하였다.
○ 19일 임자일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우빈객(右賓客)을 겸임하였다.
○ 30일 계해일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11월 1일 갑자일에 주강하는 데 입시하였다.
상이 선생을 불러 위유(慰諭)하고 또 교시하기를, “경의 음성과 기운이 전날보다 훨씬 못한바, 이 어찌 여러 차례 상을 당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 4일 정묘일에 주강하는 데 입시하였다.
이 당시에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였는데,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서문(序文)에 나오는 주자(朱子)의 이름 글자를 상 앞에서 휘(諱)해서는 안 된다.’ 하니, 선생이 이천(伊川) 선생이 말한 ‘임금을 지나치게 높이면 교만한 생각이 생겨나게 된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깨우쳐 주었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상께서도 마땅히 존경하여 스승으로 섬겨야 하는바, 우리나라의 유선(儒先)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으며, 상 앞에서도 서로 쟁변하였다. 강독을 함에 미쳐서는 선생이 마침내 휘하자, 상도 휘하였다.
송준길(宋浚吉)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자로문강장(子路問强章)을 진강할 적에 상께서 묻는 데 따라 답함을 인하여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의 민속(民俗)에 대한 실상을 털끝만큼도 지나치게 치켜세우거나 지나치게 미워함이 없이 답하였다. 그러자 호서와 호남 사람들이 크게 화를 내면서 심지어는 상소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통문(通文) 가운데에서 말한 바는 모두 거짓을 날조한 것으로, 한 구절도 사실을 말한 것이 없었다. 호서와 호남의 풍습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줄을 상상도 못했는바, 몹시 탄식스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호중(湖中) 사람 가운데 유식한 사람이 있어서 통렬하게 올리지 말라고 하여 중지시켰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다행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다행이다.”
하였다.
○ 8일 신미일에 황제(皇帝)가 붕어(崩御)하였다. 반열에 들어가 거애(擧哀)하였다.
○ 10일 계유일에 정고(呈告)하니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으며, 또다시 세 번 정고하여 말미를 받았다.
○ 23일 병술일에 소대(召對)하는 데 입시하였다.
○ 12월 무술일 - 5일이다. - 에 소대하는 데 입시하였다.
○ 7일 경자일에 조강(朝講)하는 데 입시하였다.
○ 9일 임인일에 전강(殿講)의 시관(試官)으로서 대궐에 나아갔다.
○ 11일 갑진일에 소대하는 데 입시하였다.
○ 17일 경술일에 소대하는 데 입시하였다.
○ 20일 계축일에 소대하는 데 입시하였다. 선온(宣醞)을 하사받았다.
○ 26일 기미일에 동궁(東宮)의 가례(嘉禮)에 대한 교서(敎書)를 지어 올렸다.
[주-D017] 흥경원(興慶園)을 천장(遷葬)하는 일 :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묘를 어머니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의 묘에 합장(合葬)하는 일을 말한다. 인조의 생모인 연주부부인 구씨(具氏)가 1626년(인조4)에 죽자 김포(金浦)의 뒷산에 장사 지내고는 처음에 육경원(毓慶園)이라고 하였다. 그 뒤 1627년에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있던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의 산소를 이곳으로 옮겨 와 합장하고는 흥경원이라고 하였으며, 정원대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한 뒤에는 장릉(章陵)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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