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릉(孝陵)이 세자(世子)의 위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는데

2023. 5. 16. 01:54역사적 사실 오류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로 1520(중종 15)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 창경궁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9개월 만인 1545(인종 1) 3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20년 30년 15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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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25 / 경사문(經史門)

효릉(孝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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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정이 명종(明宗)ㆍ선조(宣祖)의 사이에 인재와 영걸이 떼지어 나왔으니 그 소유래가 멀거니와, 실상인즉 성묘(成廟)의 고무(鼓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효릉(孝陵)이 세자(世子)의 위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는데, 성학(聖學)이 일찍 성취되어 조예(造詣)가 높고 깊으니, 당시에 시강(侍講)하던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쳐들고 요순(堯舜)의 정치를 기다리며 다투어 스스로 학문을 닦아 쓰이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고명한 문장과 심원(深遠)한 경륜이 아울러 흥기하였으니, 대개 성인이 흥작(興作)하면 풍속을 변역시키는 것이 단지 손 한번 뒤집는 사이에 있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효릉은 성현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복이 없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昇遐)하였다. 이에 당하여 깊숙한 산골에서까지도 부모를 여읜 것같이 여기어 마치 구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사람의 뇌 속에 깊이 들어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어제(御製) 중에 인체부(人彘賦)가 있는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정(鄭)의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 위세(威勢)에 눌리어 본의 아니게 윤원형(尹元衡)의 데릴사위[贅壻]가 되었었는데, 원형이 무너지게 되자 《괘일록(掛一錄)》을 지어 원형의 악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 말에 믿을 만한 것이 많았으니, 궁액(宮掖)의 일을 목격하여 자세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의하면,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임진(壬辰 1532, 중종 27) 2월 26일에 동궁(東宮)의 해방(亥方 24 방위의 하나. 정서북(正西北)에서 북쪽으로 15도의 방위)에다 불에 그을린 쥐 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또 나뭇조각에다 글자를 써서 걸었으니 대개 효릉은 곧 을해생(乙亥生)이요 2월 26일은 바로 탄생한 날로서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돼지는 쥐와 같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옥사를 박숙의(朴淑儀) 및 그의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에게 돌려 모두 사형에 처하니, 사람들이 원통히 여겼다.” 하였다. 그렇다면 인체(人彘)의 생겨남이 혹시 이 때문인가? 그 후에 미(嵋)의 아들딸들이 혼기(婚期)를 잃고 갇혀 있어 사람꼴이 아니었는데, 효릉이 그들을 위하여 소(疏)를 올려 애절히 하소연하였다. 그 글이 또한 어제(御製) 중에 실려 있는데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느꺼워 눈물이 흐르게 한다.

노 상국 수신(盧相國守愼)의 국만(國挽)에,

 

사당에는 오롯한 심덕을 표하고 / 廟表全心德
능에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더했네 / 陵加百行源

 

라고 하였으니, 이 한 연(聯)으로써 할 말을 다했다 하겠다.

이조민(李肇敏)은 바로 《기묘록(己卯錄)》에 실려 있는 홍간(弘幹)의 손자로서 심의겸(沈義謙)ㆍ김효원(金孝元)과 서로 친한 자였는데 원형이 또한 사위로 삼았었다. 그가 당시의 일들을 갖추 기록한 것이 있어 이름을 《파안록(破顔錄)》이라 했다는데 미처 보지 못했다.

[-D001] 효릉(孝陵) : 

《類選》 卷9上 經史篇7 論史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