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재집 노천 풍지기에게 보내는 편지〔與馮魯川志沂〕

2022. 11. 2. 13:46사방6000리

숙종 2년 병진(1676) 4월 2일(갑인)

02-04-02[01] 오도 도체찰사 허적에게 도체찰사의 임무를 별도로 유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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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을 보내어 체찰사(體察使) 허적(許積)에게 별도로 유시(諭示)하였는데, 김덕원(金德遠)의 말을 사용하여 한 것이다. 그 글에 이르기를,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한 임무는 국가가 편안한 것도 반드시 여기에 있고 국가의 위태로움도 반드시 이에 있으니, 모두 옛 법으로부터 말미암아 새로이 막부(幕府)를 연 것이다. 원수(元帥)를 호령하고 팔도(八道)를 통할(統轄)하는 것이니, 부탁함이 가볍지 아니하다. 훈국(訓局)과 어영(御營)을 홀로 할 수 없으므로 나누어 둘로 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함께 서로 절제(節制)해야 할 것이며, 곤내(閫內)와 곤외(閫外)를 경에게 부탁한다. 옛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마음이 성(城)을 이룬다.’고 한 것이 있는데, 지금 해내(海內)가 흉흉(洶洶)하고 민심이 흩어져서 물과 불 속에 있는 것과 같으며, 조석(朝夕) 사이도 보전(保全)하지 못할 것만 같다. 이때에 가장 급선무(急先務)는 인심을 수습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으니, 경은 마땅히 무마하기를 급히 하여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일심동력(一心同力)으로 용감하게 죽는 군졸이 되게 한 뒤에라야 완급(緩急)에 쓸 수 있는 것이다. 경은 이를 자세히 알아서 두렵게 생각하여 준행(遵行)하라.”
하였다.
【원전】 38 집 326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환재집 3 / ()

우후 이이춘과 작별하며〔別李而春虞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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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성에 내리는 눈에 연일 아침이 어둑한데 / 春城雪花連朝昏
나는 취하여 한강 남쪽 마을에 머물렀네 / 我自留醉水南村
저는 나귀 타고 모자를 안고 저물녘 돌아오니 / 蹇驢擁帽歸來晩
언 노을 모였다 흩어져 산자락이 흐릿하네 / 凍靄明滅迷山樊
사방을 둘러보니 연기 걷혀 선명하고 / 四望皎然煙火絶
솔과 대가 동산 가득 푸르러 사랑스럽네 / 愛此松篁靑滿園
눈과 얼음이 뒤섞인 돌비탈 길에 / 銀碎玉亂石磴路
누가 추위를 뚫고 와서 문을 두드리는가 / 是誰凌寒來敲門
어떤 객이 말하기를 많은 곳을 다녔으나 / 有客自言閱歷富
당당한 가슴속 포부를 펼 곳이 없어 / 胸中磊碨無處售
태평시절에 고기 먹을 상을 헛되이 읊었고 / 昇平空賦食肉相
몸은 건장하여 비쩍 마른 조랑말 괴롭혔네 / 健軀常苦款段瘦
호남의 감영은 이천 리 길이라 / 湖南幕府二千里
지금 떠나면 도우후가 되리니 / 如今去作都虞侯
직분이 미미하여 어찌 국가의 은혜를 갚으랴 / 職微豈能酬國恩
밥이나 먹을 계책이지 금의환향 아니라네 / 聊爲就食非衣繡
훌륭하도다, 그대가 이처럼 강개한 말을 하여 / 多君有此慷慨辭
이별의 수심이 조금도 미간에 드러나지 않는구려 / 都無離愁登雙眉
선비가 거처를 생각함을 성인이 경계했거니와 / 士而懷居聖所戒
하물며 그대와 나는 본래 길이 다름에랴 / 況君與我本殊岐
남쪽 바다는 봄이 일러 떼 지은 물고기 올라오고 / 南溟春早魚大上
팔뚝만 한 감자와 삽살개를 삶으며 / 番藷如腕炰靑氂
원문에 뿔피리 울고 곁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 轅門鼓角傍修竹
등불 비치는 속에 붉은 귤 늘어지리 / 篝燈影裏紅橘垂
더욱 부러워라, 남쪽 여인의 살갗이 눈보다 희어 / 更喜越女白勝雪
춤을 마친 능파선자의 버선에 먼지가 일리라 / 舞罷凌波塵生襪
훗날 어느 때 다시 만날까 / 他日相逢定何如
이런 모든 즐거움은 내 말이 아니라네 / 凡此可樂非吾說
보고 듣는 것마다 모두 실제 일이라 / 耳目所得皆實事
범상한 가슴에도 기백과 절개 보존되었네 / 尋常胸次存氣節
대장부의 뜻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니 / 丈夫志自設弧辰
옆 사람이 크게 웃어도 그대는 걱정하지 마소 / 傍人大笑君莫卹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운수향에 내려가 / 不然寧就雲水邊
누런 띠풀로 집을 짓고 두 이랑 밭을 갈지언정 / 黃茅爲屋二頃田
어찌 문지방 안에서 그렁저렁 살아가며 / 安能奄奄房闥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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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10 / 서독(書牘)

노천 풍지기에게 보내는 편지〔與馮魯川志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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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魯川) 존형(尊兄) 지기(知己) 각하(閣下)께.

제가 도성(都城 북경(北京)) 떠나올 형께서 천진(天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르셨기에 결국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섭섭하고 허전한데, 무엇으로 마음을 달래시는지요. 아니면 혹시 머뭇거리며 미련 갖지 않았던 것을 오히려 기분 좋게 생각하시는지요.

생각건대 형의 행차가 초가을에 이미 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셨으니 그 고달픔과 어려움이 우리들에 비해 특히 심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곳에 머물고 계신지, 부임하신 지방은 다행히 이미 수복(收復)되어 정돈될 희망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응당 분주하게 생활하며 막부(幕府)의 빈객이 되었을 뿐일 것이니, 그 고달픔은 더욱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형께서는 평생 독서하시며 충신(忠信)을 지키셨고 그것을 발휘할 때는 바로 오늘이니, 어찌 저의 권면이 필요하겠습니까.

한가한 때마다 말에 올라 아득히 비탈에 이르렀네.〔乘閑輒騎馬茫茫詣空陂〕라고 읊은 창려자(昌黎子) 를 읽을 때마다 그 정황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할 만합니다. 예로부터 독서한 선비들이 이러한 경우를 가장 많이 당하였으니, 아마도 하늘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뛰어난 절개를 드러낼 수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형께서는 힘쓰십시오.

연공사(年貢使) 편에 이렇게 대략 써서 중복(仲復) 형에게 보내니, 언제쯤 풍편(風便)을 구해 형에게 전달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해를 넘겨야 될 듯합니다. 천행(天幸)으로 믿을 만한 인편을 얻어 저 또한 형의 덕음(德音)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생각지도 못할 기연(奇緣)이겠지만,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저는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다행히 아무런 병이 없습니다. 오직 군자는 가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기를 바라니, 모두 살피시기 바랍니다.

함풍(咸豐) 신유년(1861, 철종12) 10월 21일, 우제(愚弟) 박규수가 올립니다.

[-D001] 노천(魯川) …… 편지 : 

1861년(철종12) 10월 21일에 쓴 편지이다. 환재는 이해 3월 열하 문안사(熱河問安使)로 북경에 도착한 뒤 6월 귀국하였으므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보낸 것이다.
《환재집》 권10 서독(書牘)에는 대부분 중국에서 교유한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방법은 동지사(冬至使)가 왕래하는 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편지도 1861년 동지사 편에 보낸 것이다.
풍지기(馮志沂, 1814~1867)의 자는 노천(魯川)ㆍ술중(述仲)이고, 호는 미상재(微尙齋)ㆍ적적재(適適齋)이다. 도광(道光) 때 진사 급제 후, 형부 주사(刑部主事)ㆍ병부 낭중(兵部郎中)을 거쳐, 여주 지부(廬州知府)ㆍ휘령지태광도(徽寧池太廣道) 등 지방관을 지냈다. 저서로 《미상재시문집》, 《적적재문집》 등이 있다.
환재는 1861년 연행 당시 심병성(沈秉成, 1823~1895)의 서재인 팔영루(八咏樓)에서 풍지기와 만나 교분을 맺었다. 이 편지는 풍지기에게 직접 보내지 못하고 북경에 있는 심병성에게 보내 전달해 주도록 부탁한 것인데, 여주(廬州)가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으로부터 수복되었는지를 묻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히 대처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