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耽羅) 한 지역은 바다 밖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뭍길이 몇천여 리나 되고 물길은 그 두 배나 된다. |

2022. 9. 1. 16:33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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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38권 / 유서(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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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전 목사 엄사만(嚴思晩)에게 감진사(監賑使)를 잉임(仍任)하게 하고 이어 백성들을 위유(慰諭)하게 하는 유서 갑진년(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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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국토가 편소(褊小)하여 도가 모두 8개가 있고 주(州), 부(府), 군(郡), 현(縣) 겨우 360여 개가 별과 바둑처럼 나열되어 있어 지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한번 수한(水旱)이나 기근(饑饉)이 들면 관할하기가 매우 편한데, 유독 탐라(耽羅) 한 지역은 바다 밖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뭍길이 몇천여 리나 되고 물길은 그 두 배나 된다. 그곳의 소식은 이미 서울과는 막연하여 무마(撫摩)하는 일은 단지 수령들에게 맡긴 실정이다. 평범한 문서가 오는 데에도 걸핏하면 반년이나 걸리니 무릇 섬에 사는 백성들의 질고(疾苦)와 걱정과 즐거움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는 어찌 조정의 회유(懷柔)하는 은택이 섬과 뭍에 차이를 두어서 그러하겠는가.

我邦壤地褊小。道凡有八。州府郡縣僅三百六十有奇。星羅棊布。可按圖而知已。一有水旱饑饉。管領甚便。而獨耽羅一域。僻處海外。陸行幾千餘里。水路則倍之。

 

강한집 제18권 / 묘지명(墓誌銘)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안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安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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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표(杓)이고 자는 사정(士定)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먼 조상 맹담(孟聃)은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 때에 공주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고조할아버지 진(縝)은 예조 참판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상억(相億)은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천수(薦授) 되었으며, 할아버지 윤적(允廸)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 종해(宗海)는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돌아가신 어머니 숙인(淑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군수(郡守) 하교(夏敎)의 딸이다.

….

이에 발탁하여 제주 목사를 제수하고 면유(面諭)하여 말하기를,

“제주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 지난해에 근신(近臣) 윤시동(尹蓍東)이 교지를 받들고 가다가 모친이 병이 들어 면직(免職)하였으니, 경이 가서 위무하라.”

하였다.

공이 마침내 명을 받고 바다로 들어가면서 임금의 성덕(聖德)을 선포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한라산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수백여 리에 걸쳐 귤나무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섞여 사는 어민(漁民)들의 부역이 가장 많았다. 공이 도임한 후에 폐해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어 모두 다 제거하였다.

목사(牧使)가 바다를 건널 때 제주의 백성들이 말을 대기시키고 와서 맞이하곤 하였다. 공은 ‘해문(海門)에 배가 있는데 무엇하러 말을 쓰는가.’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한 필의 말도 대기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매년 한겨울이 되면 경사(京師)에 귤을 바치느라 1월 중에는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공이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수고를 가엽게 여겨 노자(路資)와 식량을 넉넉하게 내려주었으니, 제주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다.

환도(環島) 이남에 노인들이 많았는데, 세상에서 이르기를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추분(秋分) 때만 되면 저녁에 나타나므로 제주의 고령자 가운데 100세가 넘어서도 아직 아치(兒齒)가 빠지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하였다. 공이 잔치를 베풀어 본 주(州)의 70세 이상 노인 700명을 불러다가 각각 명아주 지팡이를 내렸으니, 노인들이 서로 북 치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다.

제주의 옛 명칭은 탐라국(耽羅國)으로 서쪽으로 내지(內地)와 통한다. 공이 바닷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서 그 재주에 따라 상을 베풀었으므로 현송(絃誦)의 소리가 내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무사(武士)를 가려 뽑아 날마다 활을 쏘게 해서 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 상을 주었다. 이에 문무(文武)가 빈빈(彬彬)하여 예전에 시험 보였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몇 달 있다가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 공이 장차 돌아가려고 진관(津館)에 나아가자 백성들이 모두 곡(哭)을 하여 그 소리가 바다 밖 수십 리에까지 들렸다.

 

기언 제48권 속집 /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誌)

 

세종 27년(1445)에 좌우 도지관을 혁파하고 그 읍에서 준수한 인재를 뽑아 상진무(上鎭撫)를 두었다.

 

주(州)의 치소(治所)는 두무악(頭無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항상 북풍이 많아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기울어 있다. 정의와 대정 두 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남쪽 지역은 바람이 없고 장무(瘴霧)가 많아서 낮에도 어둡다.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인데, 또한 부악(釜嶽)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주의 치소에서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못이 있으며 지세가 평평하기 때문에 두무악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정상에 백록홍(白鹿泓)이 있고, 춘분과 추분 초저녁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부악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가 장올악(長兀嶽)인데 높이가 부악과 같고 위에 깊은 못이 있다. 큰물이 지거나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산이 높아서 5월에도 눈이 쌓여 있고, 8월에 갖옷을 입는다. 주의 치소 동쪽 50리 지점에 장사퇴(長沙堆)가 있다.

 

주와 현이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에 있어 토지가 모두 모래와 자갈인데 주의 치소 옆에 있는 광양(廣壤)만이 붉은 진흙이다.

 

그 지역은 장수하는 사람이 많고, 풍속은 음사(淫祠)를 좋아하며,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아서 여자가 남자의 일을 하므로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이 있다.

 

섬사람들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해녀들은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 되는 베를 몸에 묶는다.

 

그곳에서 재배되는 곡물은 기장, 피, 콩, 보리이고, 생산되는 물화는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이고, 잡히는 어물은 전복, 상어, 웅어인데 태생(胎生)이고 알로 낳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 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난다.

 

산은 높고 바다는 사나워 그곳 사람들은 사냥과 낚시를 업으로 삼는데 그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산기슭의 땅은 돌이 많고 흙이 적기 때문에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는 밭을 밟는다.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는 한 자 남짓한 크기이며, 향서(香鼠)가 난다.

 

산에는 범이나 표범, 곰, 시랑 따위의 사나운 짐승이 없고, 여우와 토끼도 없다. 날짐승으로는 황새, 까치, 부엉이가 없고 산중에는 기괴한 새들이 보인다. 공물로 바치는 짐승으로는 사슴, 돼지, 해달(海獺)이 있다.

 

탁라, 화탈(火脫), 여서(餘鼠) 사이는 바닷물이 시퍼렇고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잦다. 매해 봄과 여름에 남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높은 돛대에 큰 돛을 단 배가 무수히 지나간다. 이곳은 흑치국(黑齒國)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바다 건너 여러 만이(蠻夷)의 물화가 교통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海)가 바라보이는데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너머는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이 원외(李員外)의 탐라일기(耽羅日記)에 쓰다

금상 6년(1680, 숙종6) 겨울 10월에 명을 받고 하직인사를 한 뒤, 백제 땅 천여 리를 지나 강진(康津) 바닷가에 이르러서 38일 동안 바람을 기다리다가 순풍을 만나 2일 만에 제주의 화북(禾北)에 이르렀으니, 바닷길로 970리를 건너간 것이었다.

옛날 동방의 구이(九夷) 가운데 하나가 탁라()인데, 고려 때 토벌해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제주를 두었다. 원나라가 모두 3세(世)에 걸쳐 이곳에 목장을 설치했는데, 그간 고을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킨 적도가 둘이 있었으므로 김방경(金方慶), 최영(崔瑩)을 보내어 모두 쳐서 평정시켰다. 우리 태종 2년(1402)에는 험고한 지세를 믿고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한라산(漢拏山) 남쪽에 두 고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외이기(外夷記)》에,

“탁라는 목축을 좋아하고,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며, 예양(禮讓)을 알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남쪽 끝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항상 흐리고 맑은 날이 적으며 사나운 바람이 자주 불고 장마가 길며 겨울에도 벌레들이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주현(州縣)은 모두 해변과 산기슭에 있으며, 부악(釜嶽)이 가장 높고 큰데 사방이 400리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