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수 천 개의 섬들에서 일본 어부들이 물고기를 말리고

2022. 9. 1. 16:49제주도

사료 고종시대사 16 > 1892년(고종 29년) 9월 10일 >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 프랑뎅, 조・일간 어업협상 내역을 프랑스 외무부에 보고함

기사제목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 프랑뎅, 조・일간 어업협상 내역을 프랑스 외무부에 보고함
연월일 고종 29년(1892년, 淸 德宗 光緖 18年, 日本 明治 25年) 9월 10일

조일[朝日]간 어업 문제 협상

장관님,

민종묵 각하께서는 통리아문을 떠나시기 전에 일본 정부와 협상 중인 어업 협상에 대해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다음 내용은 민종묵 각하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내용을 거의 그대로 쓴 것입니다.

계미년(1882) 음력 6월 25일 일본 정부와 체결한 통상 조약 제41조에 의해 조선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연안에서 일본에 어업 활동을 허가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일본 어부들이 제주도(île Quelpaert)(전라도 지방에 예속된 조선 국왕의 사유지)로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에 놀란 주민들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일본 공사는 이 과정에서 일본 어부들이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보상을 요구했고 오랜 협상 끝에 마침내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몇 천 피아스트르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금액의 일부는 지불되었고 나머지 금액과 관련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인들이 매년 6개월 동안 제주도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합의 사항을 이행하기에 앞서 섬 주민들이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준비를 할 수 있도록 5년간의 유예 기간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유예 기간이 끝나자 일본인 어부들은 제주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또 쫓겨났지만 총을 쏴서 적들을 몇 명 살해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에 항의하면서 또 다시 3년의 유예기간을 얻어냈습니다.

새로운 유예 기간이 만료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에게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내무부 주사 [이전(李琠; Yi Hien)]이 일본 영사와 함께 제주도로 파견되었습니다. 내무부 주사는 그 지방의 유력가들을 소집하여 더 이상 조정에 문젯거리를 만들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못된 사람들이 민중들 앞에서 [이전]은 내무부 파견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조업으로 얻는 막대한 이익을 나누기 위해 일본 어부들을 제주도에 유입시키려는 사기꾼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인 관리는 체포되어 그의 목을 베려던 어떤 산(성스러운 산)으로 끌려갔습니다. 사정없이 몰매를 맞았지만 다행히 도망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또 다시 6개월간 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 같은 요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이 끝나자 일본인들은 또 다시 제주도에 나타났고 난동이 일어나 조선인이 두 명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신묘년(1891) 음력 9월, 통리아문 독판 민종묵 각하는 국왕께 조약 체결 후 5년이 지나면 개정대상이 된다고 언급한 제42조에 의거해 조약을 개정하도록 국왕의 유럽인 고문 중 한 명인 르장드르 장군을 도쿄에 파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르장드르 장군은 제주도 연안에서의 조업 활동을 포기하는 대신 철도(鐵島; Tchyel-to) 개항을 일본 정부에 제안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일본 외무 대신은 철도를 외국 상인들에게 개방하는 것은 조선 재정에는 분명 이득이 되겠지만 일본에는 별다른 이득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르장드르 장군에게 지적했습니다.

르장드르 장군은 제주도 연안에서 어업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심각한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새로운 불행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대신께 지적했습니다. 게다가 조약에는 일본 어부들이 섬에 상륙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만약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상륙하는 것을 막는다면 잡은 물고기를 말릴 수가 없기 때문에 배에서 모두 썩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마지막 지적이 일본 정부의 주목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만일 조선 정부에서 일본 어부들이 제주도 근처에 있는 섬 4~5개에서 물고기를 말릴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어업권을 포기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르장드르 장군은 주민들의 적대심을 감안할 때 분쟁이 발생한 지역에 가까운 섬들을 제공하면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조선 정부에 좀 더 멀리 떨어진 섬들을 선택하도록 제안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그의 제안을 고려해보겠다고 승낙해서 이 계획을 통리아문의 민종묵 각하에게 제출했고 민종묵 각하는 이를 지지하면서 국왕에게 전달했습니다. 조선 국왕은 통리아문 독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수의 조정 관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그 중에는 대외 업무에는 문외한인 관직이 낮은 관리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같은 대응책은 더욱 나쁜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며 절대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국왕에게 바칠 정보를 얻기 위해서 다이 산 니엔(大三輪長兵衛; Taï-san-nien)이라는 일본인 교환서 총판(交換署總辦)에게까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외교 경력이 전무한 이 관리는 조정의 하급 관리들에게 만일 르장드르 장군을 소환하고 대신 조선의 고관을 중재인으로 보낸다면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이 원하는 모든 양보를 할 것이며 조선 국왕이 원하는 바대로 한 개의 섬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락을 취하고 있는 도쿄 외무성 고관에게서 확언을 들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별 것 아닌 일들로 르장드르 장군은 소환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다행히 국왕께서는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민종묵 각하를 부르셨습니다. 독판은 이희 전하께 이 모든 소문들이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고 쉽게 밝힐 수 있었습니다. 독판은 국왕께 일본인들이 어업 활동을 벌이던 연안이 광범위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섬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은 조선의 제재를 전혀 받지 않으면서 수 천 개의 섬들에서 물고기를 말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장드르 장군이 국왕에게 몇 개의 섬을 지정할 것을 권유한 것은 앞으로 일본인들이 출입 권리를 갖는 장소를 결정적으로 못 박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습니다.

이 같은 음모가 서울의 궁궐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도쿄 외무성은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르장드르 장군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으며 새로운 일본 내각은 어업 활동의 문제와 관련한 전임 내각의 정책을 유지하면서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이희 전하의 선처, 다시 말해서 외교 문서에 서명하는 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일본이 조선이 허가한 섬들에서 하는 어업활동에 대한 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동의하는 것일 것입니다.

함경도 지방 감사로 임명된 민종묵 각하가 부임지로 떠나게 되면 이 문제가 재연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문제로다.”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르장드르 장군은 극복해야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으니만큼 더욱 혁혁한 외교적 성과를 올리고 서울로 돌아올 것입니다.

경구.

H. 프랑댕

파리의 외무부 장관 리보 각하께, 등등

출전 · 『프랑스외무부문서』 5권(1891~1892), 【101】조선-일본간 어업 문제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