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8. 19:24ㆍ병자호란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9월 9일 > 최종정보
영조 1년 을사(1725) 9월 9일(계묘) 흐림
01-09-09[22] 전 덕원 부사(德源府使) 변진영(邊震英)이 만든 궁노를 조령(鳥嶺) 등에 설치하여 변방의 방비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는 김성대(金成大)의 상소
[DCI]ITKC_ST_U0_A01_09A_09A_00230_2014_028_XML DCI복사 URL복사
장흥(長興)의 출신(出身) 김성대(金成大)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듣건대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것은 성인의 지극한 경계이고, 장마철에 앞서 둥지를 견고하게 마련하는 것은 임금이 앞날을 멀리 내다보고 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傳)에 이르기를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 하였고, 또 ‘불의의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옛날의 선정(善政)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는 일을 변란이 일어날 때면 늘 부지런히 하다가 태평한 시대가 되고 나선 소홀히 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불세출의 자질이 있으시고 분발하여 호기 있게 큰일을 하실 뜻을 두시어 영릉(寧陵 효종)과 숙묘(肅廟)의 뜻을 계승하여 지극한 통한이 매양 제 양공(齊襄公)의 복수보다 간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현의 경전을 익히면서도 성상께서는 늘 국방을 삼엄하게 방비하는 것을 진념하셨습니다. 또 일찍이 궁정 뜰의 활쏘기를 통해 관리를 제수하시어 무신들이 으쓱하여 기뻐하였고 금군(禁軍)에게 고삐를 나눠 주시어 장사(壯士)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니, 신은 실로 즉위하신 뒤로 대성인의 하시는 바가 너무도 심상함을 뛰어넘는 것임을 알고서, 앞서 말씀드린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라든가 ‘장마철에 앞서 둥지를 견고하게 마련하는 계책’이 이로 인해 흥기되는 바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옷가지를 장만해 두라는 경계와 환란을 방비하는 염려가 유독 무기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미치지 않아, 신은 이를 개탄하고 있습니다.
신은 한나라 신하 조조(鼂錯)의 ‘무기가 예리하지 않으면 그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고, 또 제갈량(諸葛亮)의 ‘용병하는 방도는 무기가 우선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참으로 위급한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것으로 무기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병기를 가지고 논하자면 적진에 임해 적을 무찌르는 데 있어 발사할 때마다 적을 죽이는 것으로는 편전(片箭)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바로 남만(南蠻)에서 이른 ‘그대 나라의 동전(童箭)이 최고로 두렵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편전의 기법은 반드시 명사수가 있어야 비로소 적중시킬 수 있으며 사정거리가 100보 밖으로는 미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활을 쏘아 멀리까지 가지 않으면 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신없이 위급할 때에는 명사수를 골라서 쏘게 하더라도 급하게 활을 당기다가 자기 손바닥을 뚫는 것이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이런 이유로 옛사람이 궁노법(弓弩法)을 고안하였으니, 대개 화살이 500보까지 날아갈 수 있으며 한 줄에 10대를 갖춥니다. 이 궁노를 나란히 설치하고는 한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궁노가 일시에 발사됩니다. 마릉(馬陵)에서 방연(龐涓)을 사로잡은 것과 목문(木門)에서 장합(張郃)이 죽은 것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적들을 평정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에 의거해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멀어지고 그런 사람이 없어진 데다 서책도 분실되고 무기도 없어져 더 이상 이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 덕원 부사(德源府使) 변진영(邊震英)은 곧 옛날 전장에서 죽은 변응정(邊應井)의 증손이자 갑자년(1624, 인조2)에 절개가 높았던 박영신(朴榮臣)의 외손입니다. 나라의 수치가 설욕되지 않은 것을 통탄하고 옛 병기가 없어져 버린 것을 개탄하여 어려서부터 병기를 고안해 내리라 다짐하여 뽕나무를 구부려 활을 만들고 버들을 꺾어 화살을 만들어 오래도록 연습하여 비로소 그 방법을 고안하였으니, 1기(機)마다 화살 한 대씩을 얹으면 거의 6, 7백 보까지 가고, 화살 다섯 대를 얹으면 거의 3, 4백 보까지 가고, 화살 열 대를 얹으면 2, 3백여 보까지 갑니다. 적이 위쪽에 있으면 병기를 위로 향해 쏘고 적이 아래쪽에 있으면 병기를 아래로 구부려 쏘며, 멀리 있으면 활시위를 크게 열고 가까이 있으면 활시위를 조금만 여는 것이, 마치 용두레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편의대로 조치하는 것과 같고 숙유(熟鞣)가 당겼다 풀었다 하며 원근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이 병기를 설치한 뒤에는 여자든 어린아이든 사용법을 살피기만 하면 쏠 수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논해 보면 한 줄에 화살 열 대면 백발백중의 군사에 맞먹고, 10명의 사수가 멀찌감치 시위를 열면 700보나 500보를 날아가는 편전 10개에 맞먹습니다. 여자든 어린아이든 쏠 수 있으니, 이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모두 방맹(逄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돌아가며 쏘는 대포로 변화시킨다면 활촉이 단단한 것도 뚫어 공효가 100배 정도뿐이 아닐 것입니다. 또 병법으로 말씀드리자면 적이 100보 안에 있어야 비로소 총을 쏘고 활을 쏩니다만, 이것은 적이 수백 보 밖에 있어도 오히려 미칠 수 있으니 어찌 편리한 병기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병신년(1716, 숙종42) 연간에 변진영이 마침 갑산 부사(甲山府使)에 제수되어 궁노 30여 기(機)를 만들어 험한 요새지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과연 그 화살이 너무나 빨라 단단한 갑옷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어사였던 최상리(崔尙履)가 갑산부에 도착하여 그가 궁노를 교습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으며 교사(敎士)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그 뒤 고(故) 판서 권상유(權尙游)가 수어사 시절에 역시 이 기구를 보고 군기 가운데 최고로 편리한 병기라고 여겨 그 방식에 따라 수백여 기를 제조해 계문하여 팔도의 감영ㆍ병영ㆍ수영 및 서울에 있는 다섯 군문으로 하여금 각각 수만여 기를 제조하여 예기치 않은 사태에 쓰도록 대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축년(1721, 경종1) 이후로 이 계획이 실현되지 않아 뜻만 지닌 채 죽고 말았으니 유식자들이 지금까지도 한탄하고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그 후 경상 감사 이세근(李世瑾)이 이것이 묘한 기구라는 것을 알고서 역시 40여 기를 만들어 시험 삼아 써 보며 칭탄해 마지않았고, 또 현재 평안 감사 윤헌주(尹憲柱)가 이전에 함경 감사 시절에 이 궁노의 설명서를 보고 편리한 병기라는 것을 알고 바로 간행하여 당세 사람들로 하여금 교습하고 후세에까지 그 방법을 전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익한 병기라면 두세 중신(重臣)이 어찌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과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도 이것이 편리한 병기임을 알고서 변진영의 집에 사자관(寫字官)을 보내 이 궁노의 설명서 한 권을 써서 탑전에 올리려고 하였는데 이때 마침 다른 일로 엄한 성지(聖旨)를 받고는 미처 진달하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이 궁노가 편리한 병기인데도 국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해 끝내 시설(施設)하지 못했으니 어찌 개탄스럽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대개 우리나라는 도로의 험난함과 산천의 험고함이 정형(井陘)이나 마릉(馬陵)의 험고함과 다름이 없어 궁노를 숨겨 놓을 만한 곳이 아닌 데가 없습니다. 양남(兩南)에는 조령(鳥嶺)ㆍ추풍령(秋風嶺)ㆍ팔령(八嶺) 등지가 있고, 양서(兩西)에는 효성령(曉星嶺)과 동선령(洞仙嶺) 등지가 있고, 함경도에는 철령(鐵嶺)ㆍ함관령(咸關嶺)ㆍ마천령(磨天嶺) 등 대여섯 곳이 있는데, 이는 바로 남북의 적들이 경유하는 길목입니다. 만일 근심이 없을 때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혹 사변이 일어날 경우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회양(淮陽)과 철령 이남, 안변(安邊)과 철령 이북, 삼방(三方)의 험로(險路)가 또 그 사이에 있는데 궁노를 제조하는 데 들어가는 재료가 이곳에서 많이 납니다. 이곳에 노영(弩營)을 설치한 뒤에 회양 부사와 안변 부사로 하여금 방어사를 겸하게 하여 안팎으로 협조하고 또 춘천(春川)에 절도사를 두어 그로 하여금 여러 도의 요해처 등지를 총괄하여 살피도록 해서, 각각 궁노 1000여 기를 두고 이어 노진(弩鎭)을 설치하여 노군(弩軍) 수백 명을 정기적으로 내어 속오군과 함께 규례대로 대오를 형성하되 10명씩 돌아가면서 수직(守直)하게 하고 또 교사(敎師)를 정해 그로 하여금 노군을 교습하도록 합니다. 그러고는 팔방의 승려들이 천만인 정도일 뿐이 아닌데 모두가 군역을 피하는 무리이니, 여러 도의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본향(本鄕)의 승려들을 뽑아 그 인원을 충원하게 한다면 이 또한 일당백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승려들은 모두 노영에 소속시킨다면 몇만 명의 정병(丁兵)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으니, 어찌 병가(兵家)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개 궁노의 편리함은 비단 요해처에서만 유리할 뿐 아니라 수전(水戰)과 육전(陸戰) 및 원근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데도 유리합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적을 막는 도구로 무엇이 이보다 중대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궁노의 용도는 팔로(八路)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긴요한 곳은 바로 북방입니다. 신이 비록 남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년간 북방을 왕래하였기 때문에 그 지역의 사정을 일찍부터 환히 알고 있으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하겠습니다.
지난해 청나라 사신이 북방에 오는 것 때문에 산을 뚫어 길을 만들 때 북방의 민심이 이를 두려워하여 근 1만 호에 달하는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고서 태백산 아래로 미리 피하였는데, 천리 먼 길에 더 이상 걷지도 못하고 양식도 떨어져 길에서 굶어 죽은 자가 대부분이고 사방으로 흩어진 자도 많았으니, 당시 참혹한 광경과 가슴 아픈 심정을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침 갑산 부사 변진영이 이 궁노를 만들어 적을 막는 기구로 삼았는데, 이 궁노를 써서 수만에 달하는 철기(鐵騎)를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민심이 이 때문에 조금 위로가 되었는데, 임기가 차서 체차된 뒤로 아직까지 이를 설치하는 일이 없어 백성들의 낙담하는 마음이 더욱 통절합니다.
아, 아직도 원수와 한하늘을 이고 있다는 수치심은 깊기만 한데 백 년 간의 오랑캐의 운세는 장차 끝나 가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충신과 지사들이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일신을 아랑곳하지 않을 때이고, 안팎의 군문에서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무를 밝혀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병기가 있는데도 끝내 북방 및 각 도 각 군문에서 시설하지 못하니, 어찌 개탄스럽고 애석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혹 한가하신 때에 이런 마음이 드시면 궁노의 설명서를 가져다 보신 뒤에 변진영으로 하여금 주변의 진(陣)을 가리키면서 그 상황을 그려 보게 하소서. 그리하신다면 송(宋)나라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무기를 제작하였던 일이 어찌 과거에만 전적으로 아름답겠으며, 손 트지 않는 약을 들여와 월나라를 무찌르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을 봉해 준 일 역시 성조(聖朝)에서 사람을 쓰는 방도에 해가 없을 듯합니다.
신이 일찌감치 무예를 익혀 이름이 무과에 편입되었건만 망극한 국가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병법은 조금 알고 또한 궁노가 변방의 방비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 늘 성상께 한번 아뢰고 싶었습니다만 외람된 일이라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성명한 세상을 만나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이렇게 번거롭게 조목조목 진달합니다. 이는 바로 과거의 대신과 중신이 일찍이 강구해 정하여 성상께 아뢰고자 했지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 마시고 즉시 이 상소를 묘당에 내려 논의하여 설행하도록 하신다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편안할 …… 것 :
《주역》 〈계사 하(繫辭下)〉에 “편안해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安而不忘危]”라고 하였다.
[주-D002] 장마철에 …… 것 :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이 장맛비를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가 창과 문을 칭칭 감는다면 이제 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하였다.
[주-D003] 의외의 …… 없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5년에 정(鄭)나라가 위(衛)나라 목(牧)을 침입하니, 위나라가 연(燕)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가 연나라의 전면을 공격하면서 비밀리에 후면을 공격하였으나 연나라는 배후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가 패하였다. 이에 대해 군자는 “의외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주-D004] 제 양공(齊襄公)의 복수 :
춘추 시대에 기후(紀侯)가 제 애공(齊哀公)을 주(周)나라에 참소하여 주나라에서 제 애공을 팽살(烹殺)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제 양공 때에 이르러 9대 선조인 애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나라를 멸망시켰다. 《春秋公羊傳 莊公4年》
[주-D005] 옷가지를 …… 경계 :
《주역》 〈기제괘(旣濟卦) 육사(六四)〉에 “젖음에 옷과 헌옷을 장만해 두고 종일토록 경계함이다.[濡 有衣袽 終日戒]”라고 하였다. 이는 배에 틈이 생겨 물이 새면 옷가지로 막으니, 미리 옷가지를 준비하여 환란에 대비하라는 말이다.
[주-D006] 무기가 …… 것이다 :
《한서(漢書)》 권49 〈조조전(鼂錯傳)〉에, 흉노(匈奴)가 자주 침범하자 조조가 병사(兵事)에 대해 아뢰기를 “전투에 임할 적에 급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지형이 유리한 것이고, 둘째는 병졸들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이고, 셋째는 병기가 예리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병법에 ‘무기가 예리하지 않으면 그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요, 군졸을 쓸 수가 없으면 그 장수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요,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주는 것이요, 임금이 장수를 택하지 못하면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네 가지는 병사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D007] 마릉(馬陵)에서 …… 것 :
제나라의 군사(軍師) 손빈(孫臏)이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魏)나라로 쳐들어가면서 마릉에 이르러 나무를 깎아 하얀 면이 드러나게 한 다음 그 나무에 “방연(龐涓)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글을 써 놓고 좌우에 궁노수(弓弩手)를 매복시켜 두었다. 제나라가 위나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의 장군 방연은 조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급히 위나라로 달려와 저물녘에 마릉에 당도하여 나무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불을 비추어 읽으려 하였는데 채 읽기도 전에 매복한 궁노수들의 기습을 받아 패사(敗死)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주-D008] 목문(木門)에서 …… 것 :
위(魏)의 장합(張郃)이 촉(蜀)의 군대를 추격하여 목문에 이르러 제갈량(諸葛亮)의 군대와 싸울 때, 군이 높은 지대에 궁노를 설치하여 쏘아 장합의 오른쪽 무릎을 맞혀 사망하게 하였다. 《三國志 卷17 魏書 張郃傳》
[주-D009] 김유신(金庾信)이 …… 것 :
고구려와 말갈이 북한산성을 침략하자 김유신의 군사가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이를 막아낸 것이 《동사강목(東史綱目)》 제4 상(上)에 보인다.
[주-D010] 방맹(逄萌)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이다. 왕망(王莽)의 시대에 인륜이 끊어졌다고 탄식하면서 관(冠)을 벗어서 동도문(東都門)에다 걸어 놓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요동(遼東)에 정착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 즉위 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수양을 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逢萌》 열전에는 방맹이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활 잘 쏘는 인물인 방몽(逄蒙)의 착오인 듯싶다.
[주-D011] 정형(井陘)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산이다. 태항산(太行山)의 지맥(支脈)으로 사면은 높고 중앙은 낮아 마치 우물 같기 때문에 정형이라 이름하였는데 험난한 요새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한신(韓信)이 배수진을 쳐 조나라 군사를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주-D012] 마릉(馬陵)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요해지로,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제나라의 군사(軍師) 손빈(孫臏)이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魏)나라로 쳐들어가면서 마릉에 이르러 나무를 깎아 하얀 면이 드러나게 한 다음 그 나무에 “방연(龐涓)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글을 써 놓고 좌우에 궁노수(弓弩手)를 매복시켜 두었다. 제나라가 위나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의 장군 방연은 조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급히 위나라로 달려와 저물녘에 마릉에 당도하여 나무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불을 비추어 읽으려 하였는데 채 읽기도 전에 매복한 궁노수들의 기습을 받아 패사(敗死)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주-D013] 송(宋)나라에서 …… 일 :
송조의 증공량(曾公亮)이 지은 《무경총요(武經總要)》와 《병기도식(兵器圖式)》을 가르키는 듯하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정밀하고 해박하다고 하였다.
[주-D014] 손 …… 일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송(宋)나라에서 솜을 물에 빠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손 안 트는 약을 잘 만들었는데, 어떤 나그네가 백금을 주고 약 만드는 법을 배워 오왕(吳王)을 설득해 월(越)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그 공적으로 땅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 방법을 판 송나라 사람은 솜 빠는 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물을 쓰는 방법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다는 말이다.
'병자호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자년(1636, 인조14) 황실에서는 천자마저 쫓겨나셨네 / 皇極帝居移 (0) | 2022.12.18 |
---|---|
정묘년(1627)용골산성에 노적 3, 4만이 성 밖에 주둔하였는데 (1) | 2022.10.06 |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의 병사를 이끌고 의주(義州)에 이르렀는데 (0) | 2022.09.28 |
양반(兩班) 출신 이하 모든 군대 6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0) | 2022.09.15 |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쪽 윗자리에 앉았는데 서쪽을 향해 앉았다 (0) | 202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