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벼슬인 감국(監國)이 되고자 스스로 입조(入朝)하기를 청하였다.

2023. 7. 6. 19:12이성계의 명조선

 [《동국통감(東國通鑑) 53권 〈고려기(高麗紀) 신우(辛禑) 14년조〉,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과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이숭인(李崇仁)을 보내어 명()나라의 경사(京師)에 갔다. 공민왕(恭愍王)이 승하한 뒤부터 명 태조(明太祖)가 매번 고려의 집정대신(執政大臣)을 불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를 못하였다. 이색이 재상이 되자, 창왕(昌王)이 친히 들어가서 조현(朝見)하게 하고, 또 임금의 벼슬인 감국(監國)이 되고자 스스로 입조(入朝)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색을 보내어 신년(新年)을 하례하고, 임금의 벼슬인 감국을 청하게 하였다.【216】

우리 태조(太祖)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慷慨)하도다. 이 늙은이여!”라고 하였다. 이색은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대해져서, 자신이 환국(還國)하기 전에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아들 한 명을 따라가게 해 달라고 청하니, 태조가 태종(太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게 하였다. 명나라로 가는 길에서 한 관원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최영(崔瑩)이 정예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있어도 이( 태조(太祖) 구휘(舊諱))가 파리를 잡듯이 그를 쉽게 체포하였으니, 그대 나라의 백성들이 이()의 망극한 은덕(恩德)을 어떻게 갚으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천자(天子)가 평소에 이색의 명성을 들어서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가 원()나라에 벼슬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당연히 한어(漢語)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색이 급히 한어로 대답하기를, “고려의 임금이 친히 입조할 것을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느냐?”라고 하니, 예부(禮部)의 관원이 대신 전하여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입조하지 않아 한어가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한어는 바로 납합출(納哈出)이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오다가 발해(渤海)에 이르러서 두 척의 객선(客船)과 동행하였다. 절반쯤 왔을 때 양산도(洋山島)에서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서 두 객선은 모두 침몰되고, 우리 태종이 탄 배도 거의 구제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쓰러졌으나, 태종만은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였다.

이색이 무사히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견(主見)이 없는 군주이다. 내 생각에 황제가 반드시 이 일에 대하여 물을 것이라고 여기면 황제는 묻지를 않았고,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당시 여론이 이를 기롱하기를, “큰 성인(聖人)의 도량을 세속의 선비가 어찌 알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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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12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위화도(威化島) 창의(倡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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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21(1388, 우왕14) 명나라 황제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이 본래 ()나라에 속했던 것이라 하여 모두 요동(遼東) 귀속시켜서 이를 관할하는 철령위(鐵嶺衛)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시중 최영(崔瑩) 우왕(禑王) 권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치기로 하여 군사가 위화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아조(我朝) 태조(太祖) 의리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최영 등을 붙잡아 축출하여 버렸다. 그러고는 박의중(朴宜中)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위를 설치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이때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변고를 듣고는 장차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묻고자 하여 황제가 친히 종묘에 문복(問卜) 하려고 치재(致齋)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박의중이 도착하였으므로 치재를 파하였다.

공민왕(恭愍王) 훙거(薨去) 이후로는 황제가 매양 집정 대신(執政大臣) 입조(入朝) 요구하였으나 다들 무서워서 가려고 하질 않았는데, 이색(李穡) 정승이 되자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왕이나 또는 집정(執政) 자가 직접 저들의 조회에 가서 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변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금 왕은 어려서 수가 없다.” 하고는 스스로 입조할 것을 청하였다. 창왕(昌王) 나라 람들이 그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이를 말리니 이색이 말하기를, “신이 본래 포의(布衣) 몸으로 지금 지위가 최고의 품계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몸을 바쳐 이에 보답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죽을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사 길을 떠나 가다가 도로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시체라도 가지고 가서 사명(使命) 수행하여 참으로 나라의 명을 천자에게 득달(得達) 수만 있다면 비록 죽더라도 오히려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 함께 길을 떠나 중국의 서울로 향하였는데, 이때 아조(我朝) 태종대왕이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중국에 이르자 황제가 진작부터 이색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터라 그를 서너 차례나 인견(引見)하였으며 예대(禮待) 매우 후하였. 그리고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는 원나라에서 한림을 지냈으니 응당 한어(漢語)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이색이 즉시 한어로 대답했는데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았던 관계로 말이 자못 이해하기 어려웠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한어가 나하추(納哈出) 그것과 같구나.” 하였다. 그런데 이색이 밖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를 보니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임금인 같다. 황제가 묻는 것이 모두나의 뜻과는 같지 않았다.”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