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3. 14:48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91. РГАВМФ, ф.417, оп.1, д.924, лл.230∼239
원산시는 원산만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의 여러 장소에 산재해 있는 일부 부락을 제외하고는 연안에서 조선 부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조선 부락에 살고 있는 주민은 15,000명 정도이며, 조선정부의 토지를 봉록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는 지사(知事)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원산시의 일본인 구역 뒤쪽의 산 위에 일본 관청이 있는데, 행정 관료들이 많고 그들 중에는 영어를 구사하는 이도 있습니다. 본 도시의 한 복판과 가장 동쪽 부분은 가장 큰 일본 조계지로서, 일본 주민이 약 1,000명을 헤아립니다. 모든 건축물은 몇 개의 거리를 따라 일본식으로 지어져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일본 영사는 유럽식으로 지어진 대형 복층건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구역 맞은편 연안 지역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폭넓은 안벽(岸壁)을 형성하고 있어 심지어 톱니바퀴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접안이 불가능합니다. 해안의 남쪽 끝부분은 어느 정도 수심이 있지만, 증기보트는 접안할 수 없고 단지 노를 젓는 보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크지 않은 방파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두의 선박 수용소에는 세관용 가건물들이 있으며 그 근처에 조선 세관이 있습니다. 이곳의 관세법은 중국과 동일합니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지붕이 씌어져 있고 격납고가 갖춰져 있으면서 약 500톤 정도 수용 능력을 지닌 일본정부 소유의 석탄저장고가 있습니다. 그 부근 50사젠 정도에 건축이 시작되지 않은 공간이 존재합니다. 일본인 구역의 이 석탄저장고는 바다와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길에 의해 구분되는 크지 않은 평야가 있으며, 그 평야 뒤편 산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셰벨료프 사(Шевелёв и ко.)에게 배정되어 있는 구역이 연안을 따라서 있습니다. 이 구역의 제공 조건은 중국에 제시된 조건과 동일합니다. 구역의 넓이는 연안을 따라 35보, 수직으로 66보이며, 셰벨료프 사가 훌륭한 창고 두 동을 건설했습니다. 세벨료프 사에게 배정된 전체 구역은 원산시에 위치한 중국인 구역 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깊이를 더 늘리기는 힘들 듯 합니다. 이 구역의 지형이 평탄하고 바위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부터의 접근이 불가능하여, 바지선을 접안시키려면 최소한 10사젠 정도 길이의 접안 시설을 따로 축조해야 합니다.
중국 조계지에는 1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건물이 30동을 채 넘지 않습니다만, 거주민 수가 꾸준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거리를 따라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남쪽 방면에 위치한 산 위에 새로운 가옥을 건축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이곳에 자국 영사를 주차시키고 있지만, 유럽 조계지에는 조선 세관에서 근무하는 4명을 제외하고는 셰벨료프 선사의 대표인 그레이(Грей) 씨와 미국 선교사 다섯 가정뿐입니다. 이 가정 중에는 영국인 가정이 2개 있으며, 1명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원산의 주 수출품은 사금으로서 매년 250-300만 달러 정도가 주로 중국으로 반출되어 왔으나, 얼마 전부터는 일본으로도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대한 양의 가죽, 털이 있는 개의 가죽, 대두(大豆) 등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밀가루와 교환되고 있으며, 생선은 비료와 맞바꾸는 물물교환 형태로 교역되고 있습니다. 조선 내륙으로 식료품을 조달하는 지역이 부산인데, 막대한 양의 생선이 그곳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세관장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 원산으로부터 매우 근접한 곳에 2개의 은광과 양질의 석탄광산이 개발되어 채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입품에는 원산뿐만이 아니라, 조선 북부 전체 주민을 위한 공산품, 소금 그리고 등유(러시아산 포함) 등이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과의 연락 업무는 일본정부와 러시아의 셰벨료프 선사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는 일본 유센가이샤(遊船會社) 소속의 기선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선의 소형기선 2척은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시내에는 2개의 일본은행 지점이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기선을 타고 도착한 16,000명의 부대원, 200문의 산악포 그리고 4,000명의 쿨리들이 모든 종류의 필수품과 말을 이끌고 원산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향했습니다. 부대원은 정원 50명 이하로 승선할 수 있는 보트를 이용하여 상륙했습니다. 이 모든 배들에는 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현재는 운하에 계류 중입니다. 제가 본 가장 높은 번호가 32번이었던 만큼, 보트의 총 수가 30척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도 어선 또한 상륙에 이용되었습니다. 해안 근처의 수심이 깊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륙이 보다 용이하도록 일본인 구역에 각각 10피트 길이의 나무 접안 시설 2개가 축조되어 있습니다. 쿨리[coolie]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중국과 인도의 하층 노동
상륙 당시 부대의 숙영과 분견대 구성이 대부분은 개활지에서 이루어졌으며, 짐을 나르는 도로를 따라 일대는 서울로 나머지는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각 분견대 마다 일정 수의 쿨리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그들 외에도 도로를 개보수하기 위하여 일당 2달러의 가격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일본군이 원산과 그 근교에서 2,000두에 달하는 가축을 구매함에 따라, 그 전에는 두 당 35달러 또는 그것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그 가격이 50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전체 일본 육군은 베이징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여 이미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변에 있는 안주(Anchiu), 하잔(Hazan) 그리고 의주(Ai-chin)를 점령했으며, 더 북쪽까지도 진군했었으나 후방과의 단절을 두려워하여 회군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그 날, 승전보가 이곳에도 알려졌으며 이에 일본군들은 요란하게 축하했습니다.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원산을 통한 군수품 수송을 중단하고, 필요한 모든 물품은 기선을 이용하여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철도로 수송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철도로 5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 파병할 것이라 합니다. 최근 일본 기선이 지역수비대의 형태로 잔류하고 있던 2명의 장교와 병사 200명의 부대 및 50명의 쿨리를 운송했으며, 9월 16/28일 남아있던 예비품들을 싣고 해로를 이용하여 철도로 향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중국 군대는 의주의 북쪽에 위치한 창민이라는 곳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의 일본 측 소식에 따르면 일본군은 다수의 대포, 소총 그리고 군용 물품을 제외하고도 2백만 달러어치가 넘는 금괴와 은괴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고 합니다. 원산에는 일본 적십자가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병원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병원을 더 건설할 것이라고 했으나, 부상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후송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원산은 현재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아서 가정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길거리에서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들 속에서 일본인들을 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피난 갔던 조선인들이 산에서 내려와 복귀했으며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작황이 특별히 좋고 성공적으로 추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덕분에 조선인 스스로도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내항했을 때 협조한 조선인들에게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위협함에 따라 중국인이 특별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런 중국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일본군은 원산으로 퇴각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은 산속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남아 있습니다. 원산 시내는 얼마 전 군대가 지나갔었다는 점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단지 중국인 구역의 건물들만이 폐쇄된 상태이며, 중국 글씨가 적혀 있는 두 장의 종이 띠가 십자가 모양으로 문 위에 붙어 있습니다. 뒤뜰로 돌아가 보면 일부 장소에서 망가진 쪽문과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 학살이나 파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다른 곳으로 피신할 당시 불필요한 가재도구들을 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경비대가 도착한 현재 밤낮으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경비대가 도착하기 이전까지의 순찰 병력은 일본 영사의 지휘를 받는 순사 10명에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경비대 병사들은 좋은 제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부는 세운 깃에 6번을, 다른 이들은 9번을 새겨 넣었으며, 일본 건물들에 병사(兵舍)를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각 병사들에게 일급 2센트를 지불하고 있으며, 식비로 4센트가 추가 지급됩니다. 이곳에 있는 쿨리들은 충분한 크기의 창고 내부에 마련된 판자 침상에 거주하면서 따뜻한 이불을 공급받았으며, 모두가 요코하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건강한 병사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임명된 조선 관헌인 지사는 서울의 훈령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나, 외견상으로는 전적으로 일본인의 영향력 하에 복속된 듯합니다. 중국 측에 조금 더 가까웠던 주민들 역시 이제는 일본인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주된 원인은 대규모의 군대이며, 그에 더해 일본이 승전국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관대하고 신속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 것도 한 원인입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어떤 강압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 중국인들의 강압과 야만적 행위는 더 형편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조선인은 자신이 일본인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슬픔에 잠겨 저에게 개인적으로 실토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을 특별히 증오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평양의 모든 조선인들조차 그들을 달리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분견대와 함께 도착한 50명의 쿨리 외에 조선에 온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으며, 쿨리의 행동에 대한 특별한 불만은 듣지 못했습니다. 과연 저녁마다 쿨리들이 일본인 공동묘지 뒤편의 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까요. 오히려 그 반대로 본인이 듣기로는 쿨리들 역시 군인들과 똑같이 매일 밤 점호를 받으며, 특별 허가를 얻어야만 숙소로부터 외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의 경비대는 매일 훈련을 받고 있으며, 순찰이 그 누구를 구속하지도 않아서 누가 어디로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비대가 부산에도 역시 배치되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평양에 남은 병력은 총 25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존 중인 중국 함대가 위치한 장소는 알져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함대기를 게양한 함선은 크기에 상관없이 적과 조우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조선 전체를 돌아서 항해할 수 있다고 일본인들이 언급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은 중국 함대가 남쪽으로 도피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원산과 그 변두리는 물론 조선 그 어디에도 중국인들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했습니다.
훈령의 마지막 조항에 대해 언급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반드시 보고 드려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즉 본인이 순양함 편으로 원산에 도착했을 때, 셰벨료프 사의 부대리인으로 있는 일본인 이나마Wm(Inamatzu) 씨가 우리 순양함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본인이 배석한 자리에서 절도(竊盜)에 관한 그레이(Г. Грей) 씨의 편지를 단순히 통보하는 선에서 자신의 업무를 한정지었습니다. 또한 현지 일본인 어부들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의 훈령만을 기다릴 뿐, 일본 영사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사의 대표직을 수행하는 한 절도 사실에 대해 일본 영사에게 통보하는 것이 의무임을 설명한 후, 지금 지체 없이 영사에게 절도 사실을 통보하고, 그에 대한 일본 영사의 답변을 수령하는 즉시 그레이 씨에게 그 답변을 통보하라고 제의했습니다. 10월 1/13일 본인이 그레이 씨의 집에 있을 때 유럽식으로 고상하게 차려입고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젊은 일본 영사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이나마쯔의 통보가 있기 전까지는 셰벨료프 사의 창고에 대한 절도행위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레이 씨가 원산을 떠날 당시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그레이 씨 스스로 자신의 재산에 대한 (일본-역자 주)영사의 보호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일본 공사의 훈령 없이는 영사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도 없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 머리를 잡았습니다. 일본 영사는 현재 필요한 대책을 수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역시 서울 주차 일본 공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 만큼, 만약 그레이 씨가 원한다면 전문으로 훈령을 요구하겠다고 했습니다(이 사안은 각하되었습니다). 영사는 조사를 진행할 것이며, 만약 정말로 일본인이 절도범인 것으로 밝혀질 경우, 그 즉시 범인의 수색과 처벌에 착수하겠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결과보고서를 도면과 함께 동봉합니다.
해군 중령 ___________________
※ 원문서 233쪽에 그림 2장 있음
결과보고서
1894년 10월 2(14)일 1등급 순양함 ‘린다(Рында)’ 호 함장의 9월 30일자 174번 명령에 의하여 임명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위원장인 1등급 순양함 ‘린다’ 호의 함장 해군 중령 림스키 코르사코프(Римский Корсаков)와 위원인 히리야코프(Хирьяков) 해군 중위와 스테첸코프 1세(Стеценков 1-й) 해군 중위 그리고 서기 르줴부스콤(Ржевуском) 해군 소위는 원산시에 위치한 셰벨료프 사 소속의 창고 검사에서 다음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외형적 검사에서 입구와 자물쇠는 완전하고 결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창고 I(첨부된 도면 참조)의 구석이 약간 벗겨졌으며, 입구 A 근처 지붕 창문틀의 유리창 2장이 깨졌고, 창틀의 창살이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파손되었습니다. 창고 I에 들어가면서 10개의 나무상자와 1개의 철제 트렁크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상자와 트렁크는 열려있었으며, 그 속에 있던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들(램프, 그림 등등)은 주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통조림의 일부가 남아 있었던 것과 비록 포도주가 든 병은 없지만, 병 밑에 두는 짚으로 된 깔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두 개의 상자에 포도주와 통조림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셰벨료프 사의 통역으로 있는 조선인 이시명(Ли Си Мен)의 말에 따르면 한 장소가 완전히 약탈되었다고 하나, 그 장소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상기 물품들은 원산시에 남아 있던 중국인의 소유입니다. 창고로 배정된 장소는 직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고의 한쪽 측면은 바다와 접해 있으며, 다른 두 변은 중국인 조계지의 도로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변은 조선의 도로와 접해 있는데, 본 도로에서부터 BC.CE와 DE 방향으로 작은 도랑이 갈라져 나갑니다. 본 창고는 FG 방향으로 66보, HK 방향으로 35보 길이의 목재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레이 씨의 집으로부터 160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선인 이시명은 9월 13/25일 아침 창고를 검사하기 위해 들렀다가, 창고 I의 자물쇠가 파손되어 문이 열려 있으며, 상자 4개가 밖으로 옮겨져 부서진 상태임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상자 주변에 일본식 톱이 있었는데, 현재 그 톱을 자신이 보관 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도면에는 상자 발견 장소가 M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창고 II의 문은 양쪽 모두 열려 있었으며, 자물쇠도 파손되었습니다. 우리는 창고 안으로 상자를 옮기고, 자물쇠를 새것으로 교체하여 문을 잠근 후 대리인 미야모토에게 이 사건을 신고하러 갔습니다.
9월 14/26일 아침 (조선 세관에서 근무하는)영국인 나다니엘(Nathaniel)은 9월 13/25일 저녁 8시에 길을 따라 가던 중, 창고 근처에서 세 명의 사람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서서 성냥을 켜는 중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자신을 보자 무엇인가를 가지고 언덕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인 이시명이 창고를 확인하러 갔을 때, 이미 창문 두 장이 깨지고 창틀은 잘린 상태였다는 사실을 미야모토에게 전달했습니다. 나다니엘 씨는 상기 사실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인해 주셨으며 그 사람들이 일본인 어부들로 보인다는 사실도 부언했습니다.
위원:해군 중위 스테첸코프 1세
해군 중위 히리야코프
위원회 위원장:해군 중령 림스키 코르샤코프
서기:해군 소위 르줴부스콤
1896년 1월 제물포,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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