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보(禹玄寶, 1333~1400) 명나라로 망명하여 맹세코 동쪽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였는데,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그 절개를 높이 사, 폐현(陛見)할 때 예우를 매우 극진하게 하고 선생으로..

2023. 7. 7. 20:02이성계의 명조선

우현보

 。우현보(禹玄寶, 1333년 ~ 1400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이다. 증조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천석(禹天錫)이고,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이다. 장손 우성범(禹成範)은 공양왕의 부마였다. 고려조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을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르고,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는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생애[편집]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檢閱)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승진하였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제수되었을 때 정언(正言) 윤소종(尹紹宗)이 장차 김흥경(金興慶)을 제거하고 김사행(金師幸)을 참수할 것과 영전(影殿)의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는데, 우현보가 그것을 알고 청탁을 받아 윤소종이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데 의탁하여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임명되었다가 제학(提學)으로 승진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겸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가 송악(松岳)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자 우왕이 환관 정난봉(鄭鸞鳳)을 시켜 우현보에게 "지금 금주령이 엄한 판에 유모가 송악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우현보는 "술은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물품이니 사온(司醞)의 증명서를 받으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고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임명되었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겼다가 곧이어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左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시중(右侍中)이 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장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1]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고, 1399년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다.[2]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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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57 / ()

양호당 선생 유허비〔養浩堂禹先生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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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양호당 우 선생의 유허(遺墟)이다. 오호라, 선생은 고려 말에 왕씨(王氏)의 천명이 떠나가려는 것을 보고 단신이나마 쓰러진 나라를 부지하려고 포은(圃隱)과 협심하고 협력하였다. 결국 포은은 죽고 선생은 만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떠돌다가 끝내 죽지 않았는데 망복(罔僕)의 절조를 지키며 생을 마쳤으니, 이는 비간(比干), 미자(微子), 기자(箕子)가 나란히 삼인(三仁)이 된 까닭이다.

선생은 명나라로 망명하여 맹세코 동쪽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였는데,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그 절개를 높이 사, 폐현(陛見)할 때 예우를 매우 극진하게 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선생에게 백의(白衣)로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고 단양백(丹陽伯)에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자손에게 경계를 남기기를 “아내를 묘소에 부장(祔葬)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뜻이 매우 슬프다.

사람들은 혹 선생이 천명을 알지 못하고 권도에 달통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오호라, 선생이 천명을 알지 못하고 권도에 달통하지 못한 것이 곧 선생이 선생 된 까닭이다. 300여 년 뒤에 자손이 그 유허를 표시하고자 비석을 세우는데, 그 땅이 포은의 옛집과 서로 가까이 이웃하니, 얼마나 신기하고, 또 얼마나 비통한가. 선생의 휘는 현보(玄寶)이고, 자는 원공(原功)이다.

[-D001] 양호당(養浩堂) 선생(禹先生) : 

우현보(禹玄寶, 1333~1400)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호는 양호당이다. 1392년(태조1) 정몽주(鄭夢周)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하여 경주(慶州)에 유배되었다. 1398년 복관되어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여졌다.

[-D003]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微子》

[-D005]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 

1328~1398. 명나라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주원장(朱元璋),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초명(初名)은 흥종(興宗)이다. 재위 연호에 따라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시호는 고황제이다.

. 養浩堂禹先生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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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養浩堂禹先生遺址也。嗚呼。先生當麗季。見王氏籙將去。思欲以隻手扶顚。與圃隱協心並力。卒之圃隱死。先生萬死流離。竟不死。罔僕以終焉。此比干微箕所以並列爲三仁者也。先生赴上國。誓不東還太祖高皇帝高其節。陛見禮甚摯。俾返故國。我太祖大王許以白衣見。伯之丹陽。先生辭不居。遺戒子孫。勿令內室祔葬。此其意甚悲。人或以先生不知天

不達權疑之。嗚呼。其不知不達。乃所以爲先生也。後三百有餘年。子孫爲表其遺址。以立石焉。其地與圃隱舊宅相隣近。何其奇也。又何其可悲也。先生諱玄寶。字原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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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38 / 제문(祭文)

충정공 양호당  선생 현보  숭양서원에 배향할 묘소에 올리는 고유문〔忠靖公養浩堂禹先生 玄寶 配享崧陽書院時墓所告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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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에 명의 신하가 있었으니 / 殷臣有三
공자는 그들을 인자라고 하였네 / 孔子曰仁
공과 포은은 / 公曁圃隱
아, 고려의 신하였네 / 嗟麗之臣
정주의 도를 강론하여 / 道講程朱
그 학문 역시 참되었네 / 其學也眞
국가 흥망의 때를 만났으나 / 運際興覆
그 지조 공정하였네 / 其節也均
한 분은 죽고 한 분은 살았으나 / 一死一生
모두 신하 되지 않았네 / 歸則罔僕
옥에 갇히고 귀양 갔으나 / 幽囚流竄
맹세한 마음 변치 않았네 / 矢心靡忒
태조께서 오라고 하였으나 / 太祖曰來
나는 흰옷을 입겠다고 했네 / 我衣之白
전원으로 돌아가니 / 歸視其田
콩 농사 풍성하였네 / 有豆離離
그 콩으로 죽 끓이고 / 持以煮粥
고사리 고비 먹었네 / 爾蕨爾薇
숨기라는 훈계 남기니 / 遺誡掩抑
외로운 무덤 여기에 있네 / 獨塚在玆
저 숭양서원을 보건대 / 相彼崧院
포은 어른이 의지한 곳이네 / 圃翁攸依
공의 평생을 살펴보건대 / 跡公平生
이곳이 아니면 어디로 돌아가실까 / 匪此曷歸
유생들이 다 같이 외치며 / 章甫齊倡
궁궐에 상소했네 / 拜疏王闕
왕께서 말하길, 어찌 그리 늦었는가 / 王曰何晩
일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로다 / 事待今日
배향하는 예가 있으니 / 禮有配食
너희 말이 아름답다 하였네 / 乃言維旨
선비들이 말하길, 선비들이 논의한 지 / 士曰士論
사백 년이 되었는데 / 惟四百祀
이제 성사되었으니 / 于玆有成
우리 임금님 성스럽다 하였네 / 我王聖神
이에 위패를 만들고 / 載造位牌
이에 길일을 택했네 / 載簡吉辰
생각건대 숭양서원 아래 / 尙憶崧下
골목마다 문 마주 열어 놓고 / 門巷對開
나라 걱정하던 마음을 논하며 / 憂國論心
지팡이 짚고 오고 가리라 / 杖往屨來
한 서원에서 다시 만나니 / 一院重會
누가 기이하지 않다고 하랴 / 孰云非奇
수많은 먼 후손들 / 藐茲雲仍
감격하고 기뻐하네 / 感喜兼之
공경히 무덤에 가서 / 祇詣若堂
저간의 경과를 고하네 / 敢以事告
제수의 향기가 퍼져 나가니 / 焄蒿肸蠁
강림하소서 / 庶幾斯假

[-D001] 선생(禹先生) : 

우현보(禹玄寶, 1333~1400)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호는 양호당(養浩堂)ㆍ독락당(獨樂堂),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D002] ()나라에 …… 하였네 :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불린다. 《논어》 〈미자(微子)〉에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 죽었는데, 공자가 ‘은나라에는 인자가 세 분이었다.’라고 말씀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D003] 포은(圃隱) : 

정몽주(1337~1392)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우현보가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렀다.

[-D004] 모두 …… 않았네 : 

우현보와 정몽주가 새 왕조인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D005] 흰옷 : 

벼슬을 하지 않는 평민이 입는 옷이다.

[-D006] 숨기라는 …… 있네 : 

우현보가 죽으면서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선영에 묻지 말라.”라고 했다 한다. 우현보의 무덤은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 정종실록 > 정종 1년 기묘 > 12월 1일 > 최종정보

정종 1 기묘(1399) 12 1(정유)

01-12-01[11] 우현보 단양백을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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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보(禹玄寶)로 단양백(丹陽伯)을 삼았다.

【원전】 1 집 160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조선왕조실록 > 정종실록 > 정종 2년 경진 > 11월 13일 > 최종정보

정종 2 경진(1400) 11 13(계유)

02-11-13[13] 단양백 우현보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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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가 졸(卒)하였다. 자(字)는 원공(原功)인데, 충청도 단양(丹陽) 사람이었다. 지정(至正) 을미년에 과거에 올라 한림(翰林)에 들어가서, 이때부터 청환 요직(淸宦要職)을 모두 거쳐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에 이르렀다. 계해년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지공거(知貢擧)였는데, 그때에 임금이 병과(丙科) 제7위(第七位)로 등과(登科)하였다. 임신년에 계림(雞林)에 귀양가 있다가 무인년에 소환되고, 기묘년에 단양백(丹陽伯)을 하사받았다. 다음해 경진년에 이방간(李芳幹)이 난을 꾸미는데, 문인(門人) 이내(李來)가 알고 우현보에게 고하였다. 우현보가 곧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주상의 잠저(潛邸)에 보내어 사기(事機)를 밀고하였다. 주상이 미리 방비할 수 있었으므로, 화란을 평정한 뒤에 ‘추성 보조 공신(推誠補祚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부의를 주었다. 장사에 미치어 상등례(上等例)를 쓰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아들은 우홍수(禹洪壽)ㆍ우홍부(禹洪富)ㆍ우홍강(禹洪康)ㆍ우홍득(禹洪得)ㆍ우홍명(禹洪命)이다.

【원전】 1 집 18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고전번역서 > 기언 > 기언 제20권 중편 > 유사 > 최종정보

기언 20 중편 / 유사(遺事)

시중(禹侍中) 유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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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시중의 휘는 현보(玄寶)이고, 자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고려사》 세가(世家)와 본전(本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학(文學)으로 진출하여 춘추관 검열(春秋官檢閱)이 되었다가 전임하여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이르고, 우왕(禑王) 2년(1376)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12년(1386) 10월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민수(曺敏修), 찬성사(贊成事) 장자온(張子溫),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하륜(河崙)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니, 시호를 내려 주고 습봉(襲封)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은하기 위한 것이었다.

14년(1388) 봄에 왕이 서해로 출행할 적에 공에게 왕성(王城)에 머물러 지키게 하니 공이 오부(五部)의 장정들을 징발하면서 공언하기를 “왕이 계신 곳으로 따라가 대대적인 사냥을 하려 한다.”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요동(遼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5월에 이 태조(李太祖)가 회군(回軍)하였다. 우왕은 특별히 공에게 우시중(右侍中)을 제수하였으나, 우왕이 폐위되면서 시중에서 파직되었다.

창왕(昌王) 2년(1389)에 김저(金佇) 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우왕을 여흥(驪興)에서 맞아들여 은밀히 익양(益陽 정몽주(鄭夢周))과 모반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낭사(郞舍)가 합문(閤門)에 엎드려 공을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창왕이 듣지 않고 파면만 하였다. 얼마 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용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한 후 윤이(尹彝)ㆍ이초(李初)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사면되어 지방에서 편한 대로 살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대성(臺省)에서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하여 철원(鐵原)에 부처(付處)하였다. 얼마 후 불러들여 관직을 회복시켰다가 익양이 죽자 계림(鷄林)에 안치시켰다. 그 이듬해 고려가 망하였다.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이 특별히 예물을 많이 하사하고 옛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특별히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였다. 이때 공이 작고하니 나이가 68세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뒤에 자손들이 매년 10월 1일에 제사 지내는데, 그 축문은 다음과 같다.

“효후손(孝後孫) 모(某)는 감히 정갈한 밥과 단술로 공손히 선조고(先祖考) 고려 문하시중 부군(門下侍中府君)께 제사를 올립니다. 조정을 떠나 유랑하신 것은 국가가 망하는 즈음이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 지조와 몸을 돌보지 않은 충성을 우리 후세 자손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선조비(先祖妣) 죽산(竹山) 박 부인(朴夫人)을 배향하였습니다. 흠향하소서.”

분묘는 옛 장단(長湍)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금곡(金谷)에 있다.

[-D001] 회군(回軍)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말한다. 1388년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이른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전염병이 돈다 하여 왕명과 최영(崔瑩)의 반대를 어기고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그 뒤 최영은 유배 보내고, 왕은 강화도(江華島)로 추방한 다음 창왕(昌王)을 즉위시켰다.

[-D002] 김저(金佇) 옥사 :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다. 1389년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흥(驪興)으로 가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죽이라는 부탁을 받고 곽충보(郭忠輔)와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하기로 모의하였는데, 곽충보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그가 고문을 받고 우현보(禹玄寶) 등이 이 일에 참여했다고 자백하는 바람에 우왕은 강릉(江陵)으로 옮겨지고 창왕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으며, 우현보 등 27명은 유배되었다.

[-D003] 윤이(尹彝)ㆍ이초(李初) 사건 : 

공양왕(恭讓王) 초에 윤이가 명나라에 가서 이초와 함께 당시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라는 것과 이성계 등이 장차 명을 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이색(李穡) 등 고려의 재상들이 이에 반대하였다가 화를 당했다고 무고하였다. 이 사실이 1390년(공양왕2) 고려에 알려지자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나 이색ㆍ우현보를 비롯하여 그에 연루된 수십 명이 유배되거나 국문을 당하고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