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0. 20:40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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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3년 정사(1737) 4월 26일(갑신) 저녁에 비가 옴
13-04-26[29] 소대를 행하여 《송원강목》을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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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고종의 시대가 휘종, 흠종 때와는 달랐으니, 고종이 속은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려 바닷길을 통해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니, 우리나라가 오국성(五國城)에서 반드시 멀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한철이 아뢰기를,
“회령(會寧)에 이른바 오국성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이 응당 이를 알 것이다.”
하니, 김한철이 이르기를,
“회령의 운두산성(雲頭山城)에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황제묘(皇帝墓)라 이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지란(李之蘭)의 무덤도 그렇다고 한다.”
하였다. 김한철이 아뢰기를,
“큰 무덤 근처에 작은 무덤이 또한 100여 개 정도인데 종신(從臣)의 묘라고 칭하므로 백성들이 간혹 이를 파 보았더니, 그 가운데 정강통보전(靖康通寶錢)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서로 거리가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조영국이 아뢰기를,
“《송사기(宋史記)》에 연경(燕京)과 오국성의 거리가 천 리라고 하였으니, 멀지 않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한철이 아뢰기를,
“곽영(郭永)과 왕복(王復)의 일로 보건대 군주와 거리가 먼 신하로서 이와 같이 순절한 자가 많을 것입니다. 대체로 송이 건국될 적에 자연히 규모가 있었으니, 그러므로 비록 고종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죽음으로 섬기는 신하가 많았던 것입니다.”
[주-D001] 오국성(五國城) :
1127년(인종5)에 금나라가 남하하여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하고 북송을 멸망시킨 후 휘종과 흠종 부자를 잡아가 유폐한 곳으로, 두 황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오국성에서 모두 죽었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회령부(會寧府)의 보라진(甫羅鎭)에 두 황제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익(李瀷)은 “우리나라 사람이 경성(鏡城)에 있는 큰 무덤을 가지고 황제의 무덤이라 하고 그 땅을 곧 오국성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星湖塞說 天地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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